55화 1실링은 12페니
알렉스와 팩은 건물의 계단을 올라갔다. 자료에 쓰여 있는 대로, 사무실은 5층에 있었다.
5층으로 올라가자, 사환 하나 정도만 두었을 것 같은, 넓지 않은 사무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사무실의 공간을 둘러본 알렉스와 팩은 동시에 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비밀 공간이 있구만.”
“1층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준공 연도를 생각해 보면 세금 절약을 위해 5층이 더 넓을 텐데 말이죠. 보통은 1층 면적으로 세금을 책정하니까.”
팩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벽면을 살살 손으로 짚어 가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이미 사무실의 집기들과 서류들, 한 톨의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 수단은 전부 경비대가 가져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쪽은 창문이 없군.”
“남향인데 말입니다. 그죠?”
가장 볕이 잘 들어야 할 남쪽 벽면에는 창문 대신 벽의 반절을 차지하는 그림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딱히 오래되고 비싼 종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나씩은 걸어 놓을 법한 멋들어진 성화의 복제본.
그러나 팩과 알렉스는 주저하지 않고 그 앞으로 다가가 그림을 들어냈다. 그러자 고풍스러운 나무문이 드러났다. 차이점이라면, 문고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다이얼이 있다는 점. 알렉스는 팩에게 반지를 튕겨 준 뒤, 옆으로 들어낸 성화를 감상했다.
등 뒤에다 상당한 양의 금화를 쌓아 두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앞에도 상당한 금화를 쌓아 둔 채 그 재산을 선지자에게 헌납하는 부자와 얼마 없는 재산을 처분해 은화 한 줌을 건네는 노파. 그리고 그 사이에 선 선지자.
그 의미가 뭘까 생각하던 차, 팩이 다가와 물었다.
“다이얼이 세 칸짜리인데요. 생각하신 거라도?”
“뭐? 세 칸이라고? 네 칸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말에, 알렉스는 문으로 다가가 다이얼을 살폈다. 팩의 말대로 다이얼은 세 칸이었고, 그 다이얼 옆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상태였다. 다이얼을 잠시 내려다본 알렉스는 눈을 감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작대기 하나에 동그라미 열 개. 이를 숫자로 표현하면 10,000,000,000. 1과 0뿐인 숫자이니 2진법으로 변환해 보면 1024. 네 칸짜리 다이얼 비밀번호로는 적당한 번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뀐 지금, 알렉스는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가야 했다.
그때, 팩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보고 중얼거렸다.
“L, S, P… S, P, L… P, L, S…….”
그걸 듣고 있던 알렉스가 팩을 향해 물었다.
“뭐하냐?”
“반지 겉면에 음각으로 파져 있던 글씨입니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아서. 혹시 일종의 약어일까요?”
“약어라면?”
“뭐 L이면 단체명에 붙일 만한 것들 많잖습니까. 나머지는 그냥 짜 맞추면 될 거고. L이면 어디 보자… 리그, 군단, 아니면 뭐 왕립 뭐시기 할 때.”
“그건 R. 이 못 배워 먹은 쿠르바야.”
“아. 그렇지… 근데 뜻 정말 모르시는 거 맞죠?”
팩이 의심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만. 1024를, 12진법하고 20진법으로 변환하고 있어 봐.”
“1024를?”
“해 봐.”
알렉스의 말에, 팩은 코트 주머니에서 연필과 수첩을 꺼내 계산을 시작했다. 먼저 나온 값은… 20진법.
“1024를 20진법으로 바꾸면, 첫 번째 자리에는 4. 두 번째 자리는 11. 세 번째 자리는 2입니다.”
“12진법은.”
“12진법은…….”
팩이 수첩의 다음 장을 펼쳐 계산했다. 잠시 뒤, 무언가 가닥을 잡은 듯 검산까지 한 번 더 한 팩이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7,1,4…….”
그들이 찾아야 하는 세 자릿수. 알렉스는 다이얼을 차근차근 돌리기 시작했다. 반지까지 함께.
7. 1. 4. S.
다이얼의 눈금에 세 개의 숫자와 한 개의 문자가 맞춰졌다. 그다음 옆에 삐져나온 단추를 누르자, 갑자기 철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일화에서, 선지자는 결국 노파의 은화는 받지만, 부자의 금화는 받지 않지. 오히려 부자 부부는 자신의 재물을 숨기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고. 그리고… P는 페니, L은 파운드의 ‘리브라’.”
그러자 팩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S는 실링이군요. 그리고… 항상 진실되어라.”
“그러면 구원이 찾아오리라.”
팩의 말을 이어 성서의 한 구절을 완성한 알렉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방 안에 빛이 들어오며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수십 권 분량의 장부들. 마치 뒷일을 준비하듯 분기별로 정리되어 있는 장부들은 너무 가지런해 매혹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때, 책장의 빈 곳에 놓인 한 장의 종이가 보였다.
알렉스는 조심스레 그것을 잡아당겨 봤다. 다행히 무언가가 연결된 건 아닌지, 종이는 그대로 알렉스의 손에 집혀 딸려 왔다.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아마 나는 입막음을 당했거나 당하려 했다는 뜻일 겁니다. 누가 이 글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이걸 보는 이가 날 입막음한 이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차분히 정돈된 글씨. 알렉스는 팩에게 문을 경계하라는 수신호를 보낸 뒤 계속해서 글을 읽었다.
[저는 항상 진솔하게 살라 가르침 받아 왔지만, 진솔하지는 못했습니다. 증권가의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러하듯, 누군가의 돈을 받아 시키는 대로 거래를 했습니다. 위험은 적었고, 이익은 달콤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황금빛 환상을 바라보며 꼭두각시처럼 일했습니다.]
알렉스는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한 남자의 고백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지시는 점점 세세해졌고 위험해졌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수익을 냈습니다. 이전보다도 더 큰 이득에, 제게 돌아온 수수료도 덩달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형식만 갖춰 써 놓고 어지러이 방치했던 장부를 다시 써 내려갔습니다. 증권가에서 떠돌던 괴담이, 괴담이 아니게 된 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 종이를 원래 있던 위치에 놓고 방 안의 책장들을 둘러보며 팩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회수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냐?”
알렉스의 물음에, 팩은 어깨를 으쓱였다.
“소대 하나 끌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의 손 타는 것도 그렇잖습니까.”
“그렇지… 스워포드 보내야지. 네가 자리 지키고.”
“…혼자 있는 건 무서운데요.”
“부탁할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알렉스는 그리 말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스워포드는 마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렉스가 마차 문을 두드리자, 스워포드가 문을 열고 그를 바라봤다.
“충성. 뭐 건지셨습니까?”
“관사 다녀와라. 2소대나 3소대 데리고 와서 회수하라 그래. 짐마차도 하나 끌고 오고.”
알렉스의 말에, 스워포드는 마차에서 내리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렇게 많습니까?”
질문하는 사이, 스워포드의 손이 알렉스의 코트 주머니 위를 스쳐 지나갔다. 알렉스가 그걸 느끼고 고개를 끄덕이자, 스워포드는 한숨을 쉬며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스워포드의 손이 스치고 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다. 그러자 손끝에서 종이쪽지가 잡혔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쪽지를 펼치자, 신문지를 오려 만든 문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3시. 롤란드 가 17번지. 혼자서. 물건과 함께.]
수도 서부의 한 주소. 알렉스는 주머니에 다시 그 쪽지를 넣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 있어요? 그리 오래 걸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닙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별일 없었죠?”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환 한 명이 와서 스워포드에게 쪽지를 건네준 것만 빼면요. 무슨 내용이었으려나.”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그렇군요’라고 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사환을 심문해 봤자, 알 수 있는 정보도 없을 것이다. 그냥 심부름 한 번 하는 대가로 페니 한두 개나 받았겠지.
“글쎄요. 그나저나 생각해 두신 곳은 있으십니까?”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질문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만약 그녀를 두고 결정을 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아니, 판단할 수는 있을까?
아델라인이 고민하는 사이, 알렉스의 고민도 점점 깊어져 갔다.
그때, 아델라인의 입이 열렸다.
“오늘은 광장에서 장이 선다는데. 장터 구경을 가 볼까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지금 당장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겠지.
고민은 조금 뒤로 미뤄 놓고, 지금 이 순간을 눈앞의 그녀와 함께 즐기면 되는 것이겠지.
“좋습니다. 간 김에 대원들에게 나눠 줄 간식도 마련해야겠군요. 대원들이 많이 지쳤을 테니.”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고는 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 오늘은 중대 중 두 개 소대가 훈련을 나갔습니다. 아마 저녁까지 먹고 한밤중에 들어오겠지요.”
“훈련…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해요?”
“뭐, 오늘은 모의 교전입니다. 탄환 없이 화약만 재어 넣고, 소대 단위 기동과 교전을 해 보는 훈련이죠.”
아델라인은 헤에, 하며 신기하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 걸까. 알렉스도 그 훈련을 하겠지?
알렉스가 훈련하는 건 어떤 모습일까.
“한번 보고 싶네요. 알렉스가 어떻게 훈련하는지. 지금 가서 보는 건 무리겠죠?”
“그렇죠. 넓은 산에 마흔 명 정도만 흩어져 있을 테니, 가서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델라인은 그 말을 듣고 신기하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내비쳤다.
그 눈빛을 읽은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언젠가 제가 기회를 잡아 보겠습니다. 직접 훈련에 참관하실 수 있도록.”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환한 미소를 보였다.
“진짜요?”
“대신, 수업 때 집중해서 정해진 진도까지 다 나간다면.”
알렉스의 조건이 붙었지만, 아델라인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하는 거죠?”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모습. 그 모습이 아델라인의 도도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귀여워 알렉스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엄지를 맞대며 알렉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