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퍼즐은 가장자리부터
평범한 일상과 그 일상으로 위장된 작전들이 계속되었다. 알렉스와 아델라인은 수업을 하고 연극을 보고 산책을 하며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그사이, 알렉스와 아델라인을 미행하는 몇몇 스토커들이 제압당했다.
스토커들에게 ‘협조’를 받아 얻은 정보로 또 다른 거점을 타격하자, 며칠간 평화가 찾아왔다. 아델라인에게 붙어 다니던 미행도 없어졌다. 그러자 간만에 제대로 된 훈련을 진행할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 1소대랑 외인 소대는 소대 간 모의 교전 한다고 했지?”
“네, 황실 사냥터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래. 혹시 배당이 어떻게 되나?”
달력을 바라보며 서류 작업을 해 나가던 알렉스의 물음에, 옆에서 의약품 장부를 맞추던 팩이 그에게 답했다.
“외인 소대 승리에 걸린 돈이 7파운드 조금 넘고, 1소대에 걸린 돈이 10파운드 조금 안 됩니다.”
“자네는?”
“1소대에 10실링 정도 걸었지요. 중대장님은 얼마나 걸어 보시렵니까.”
알렉스는 잠시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의 손에는 한 금반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걸 본 팩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반지는 뭡니까?”
“증거품이다. 어디에 써야 할지는 모르지만.”
알렉스의 말에 팩은 잠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팩을 바라본 뒤, 그 손 위로 금반지를 튕겼다.
그러자 그는 잠시 반지를 살펴보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해군 선의 보조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 들려 드린 적 있었습니까?”
“이발사 겸 선의 보조? 몇 가지 이야기는 들었지.”
팩은 잠시 장부를 옆으로 치우더니, 사무용지 한 장을 꺼내 반지의 바깥쪽 면을 덮고 연필로 살살 칠하기 시작했다. 반지의 안쪽은 특이하게도 정십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함장이나 간부들은 개인 선실이 있으니까, 그 공간을 이용해서 조그만 사업을 한단 말이죠? 예를 들자면 신대륙의 사향이나 모피 같은 거.”
“들어본 적은 있지. 그래서?”
“그중에서도 함장이나 제독, 이런 분들은 자기 선실에 금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열쇠 구멍이 없었습니다.”
“번호를 돌려서 푸는 거야?”
“번호도 필요하지만. 이거 없으면 번호가 있어 봤자 소용없습니다.”
팩은 무늬를 보며 빈 공간에 그 무늬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안쪽에 무늬가 이렇게 생겼습니다. 작대기 하나에 동그라미가 열 개. 이게 뭔 의미일까요?”
팩이 묻자, 알렉스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을 한 뒤, 번쩍 눈을 떴다.
“그거 끝났냐?”
“뭐, 장부 말입니까? 곧 끝납니다.”
“5분 내로 끝내고 사복으로 갈아입어. 무장은 경무장. 나랑 어디 좀 가자. 스워포드한테도 준비하라 그래.”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휘태커에게 받은 자료를 책장에서 꺼내 펼쳤다. 그 내용을 주욱 훑어본 알렉스는 미소를 지었다.
“빙고.”
알렉스는 자료를 다시 책장에 넣은 뒤, 옷가지를 챙겨 집무실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팩은 이미 장부 정리를 다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는지, 책상에는 장부의 서명란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반지가 올려져 있었다.
왼쪽 옆구리에는 검을 차고, 오른쪽에는 피스톨을 찬 알렉스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친 뒤 안주머니에 탄약포 몇 개를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장부에 서명을 마친 뒤 반지를 챙긴 그는 집무실 바깥으로 나섰다.
복도로 나서자, 스워포드와 팩도 각자 정장을 입은 채 대기 중이었다. 알렉스는 그들을 지나쳐 정문으로 향했고 두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알렉스가 문을 열자, 한낮의 햇빛이 알렉스의 눈을 찔렀다. 잠시 눈을 찌푸리며 시야를 회복할 때, 바로 앞에서 아델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여기 있었네요! 다행이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알렉스는 급히 고개를 숙여 살짝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어디 가는 거예요, 알렉스?”
아델라인이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넓은 챙 모자를 쓴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수도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알렉스는 맞은편에서 나이아와 함께 앉아 있는 아델라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태워다 주어서 고마워요, 아델라인.”
그러자 아델라인은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에이, 뭘요. 어차피 그렇게 많이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근데 이쪽은 누구신가요?”
아델라인이 묻자, 알렉스는 옆에 앉은 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은 우리 중대 의무병 크레이튼… 파코우스키?”
알렉스의 소개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팩이 알렉스의 발음을 정정하며 덧붙였다.
“크레이튼 파코프스키 병장입니다. 팩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인식표에는 파코우스키라고 되어 있잖아.”
“그걸 그렇게 발음하면 제 고향에서는 못 배워 먹은 쿠르바 소리 들을 겁니다.”
“쿠르바는 또 뭔데?”
“좋은 말입니다, 좋은 말.”
“아닌 것 같은데.”
알렉스와 팩의 만담 같은 대화를 듣고 있던 아델라인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둘은 동시에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은 숨죽여 끅끅 웃더니, 팩을 바라보며 물었다.
“둘은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러자 팩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델라인에게 답했다.
“아, 안면을 튼 건 6년 전, 같은 소속으로 지내게 된 건 4년 전부터입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저놈도 마찬가지고.”
“스워포드 상병 말인가요?”
“네, 저놈도 해병 출신이라.”
의외의 정보에, 아델라인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아도 마찬가지였는지, 멍하니 팩을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이분이.”
“레이크 하사 친동생.”
알렉스가 팩에게 나이아를 소개해 주자, 나이아는 고개를 숙이며 팩에게 인사했다. 팩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여사님.”
“아, 네. 잘 부탁드려요.”
그때, 마부석에 앉아 있던 스워포드가 마부석 창문을 탁탁 두드렸다. 알렉스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스워포드가 창문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앞으로, 한 블록.’
“거의 다 왔구만. 내릴 준비 하자고.”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알렉스의 말에, 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때, 맞은 편에 있던 아델라인이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
“음?”
“혹시 오래 걸리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일찍 끝날 것이고, 아니어도… 생각해 보니 일찍 끝나겠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
“아마도 일찍 끝날 겁니다.”
“혹시 같이 있어도 될까요? 뭐 하는지 보고 싶어서. 그리고… 오늘은 일정이 없어서, 살짝 붕 뜬 날이거든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슬쩍 팩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팩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 예측이 맞는다면, 그리고 중대장님의 생각이 맞는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뭐가 생기면 저희끼리 들고 가죠.”
팩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차가 갓길에 멈춰 서고, 팩이 문을 열고 내렸다. 알렉스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워포드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그 말과 함께 마차에서 내린 알렉스는 마부석의 스워포드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다음, 그는 마차 안에 있는 아델라인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금방 올게요.”
알렉스가 떠나가자, 마부석 창문이 열리고 스워포드의 얼굴이 그 사이로 나타났다.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됩니까? 밖은 너무 더운데요.”
스워포드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스워포드가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로 올라탔다.
“감사합니다, 후. 중대장님은 참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그는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이마에 잔뜩 흐르는 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나이아가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상병님.”
“아, 고마워. 나이아.”
스워포드는 그 손수건을 받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땀을 다 닦은 그는 잠시 손수건을 바라보다, 그걸 안주머니에 넣으며 나이아에게 말했다.
“이건 내가 세탁해서 돌려줄게. 그냥 주기는 조금 그러니까.”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렇게 할게. 내가 마음이 쓰여서 그래.”
그리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수건을 접어 넣는 스워포드의 행동에 나이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던 아델라인이 스워포드를 향해 물었다.
“근데 웬 코트에요? 아무리 밤이 쌀쌀해졌다고 해도 낮에는 덥던데. 햇살도 쨍쨍하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코트는 보기만 해도 더워 보였다. 그런 차림으로 바깥의 햇빛을 받았으니,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겠지.
그러나 스워포드는 코트를 살짝 벌려 보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허리춤에 채워진 피스톨과 세이버, 코트 안주머니에 꽂힌 단검과 탄약포. 그걸 보자 아델라인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러 나온 건 아니었네요.”
“아직은 근무 시간이니까요. 남정네 셋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확실히 수상해 보이기는 해요.”
아델라인의 말에 스워포드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런 스워포드를 향해 아델라인이 질문을 했다.
“혹시 마일즈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그날 뒤로 며칠 동안은 자주 마주쳤는데.”
“그날… 말입니까?”
“남부에서 불났던 날이요. 알렉스가 저 바람맞힐 뻔했던 날.”
아델라인의 말에, 스워포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잠시 아델라인의 말에서 나온 정보를 취합한 뒤, 대답했다.
“본가에서 지내지는 않으니 잘 모릅니다. 그래도 뭐, 둘째 형님은 빈민가 재건 사업에 입찰해 보려 하는 것 같던데요.”
스워포드는 그 말을 한 뒤, ‘신문에서 봤습니다’라는 말을 급히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 사이 찰나의 공백을 눈치챈 아델라인이 스워포드를 향해 물었다.
“알렉스 말로는 가출했다더니. 그렇게 싫어하는 사이는 아닌가 봐요?”
“…뭐, 시간이 지나면 힘든 기억들도 웬만하면 다 미화되니까요. 해병 시절도 그랬고. 이제 안부는 묻고 다닙니다.”
스워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 뒤, 바로 역공을 가했다.
“그나저나 ‘알렉스’라니. 벌써 그렇게 가까워지신 겁니까?”
그의 약간 짓궂은 질문에, 아델라인은 곧바로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알렉스의 모습들을 떠올린 아델라인은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손부채질을 했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