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최후 변론
프랑크 왕국 대사관 앞 커피 하우스. 오늘따라 유난히 한적한 이곳의 한 테이블에서는 두 신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이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두 잔의 카페오레가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종업원이 멀어지자 알렉스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인 뒤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에게 말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알렉스는 카페오레를 앞에 두고 테이블 맞은편의 베르티에를 바라봤다. 정장 차림의 베르티에도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조용히 카페오레를 마시며 알렉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각에서는 사략허가서를 윤전기로 찍어 낼 준비를 하고 있고, 제 상관은 간신히 그걸 뜯어말리고 있는 와중인데.”
알렉스는 잔을 살살 돌리며 베르티에를 향해 비꼬듯 말꼬리를 올렸다.
“어째 그쪽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입니다?”
“…….”
이야기는 전해 들은 듯, 베르티에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 프랑크 왕국의 양식으로 이뤄진 마법이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나타났다. 지금이야 철저히 정보를 통제하는 중이지만, 만약 이게 대중들에게 퍼진다면…….
대중들에게 이 사건들이 어떤 이야기로 다가올지는 명확했다.
“강 건너 불구경은 아니네. 우리도 일꾼들을 찾기 위해 노력…….”
“그냥 까놓고 말 하시지요. 그 마법사들, 진짜 실종된 거 맞습니까?”
알렉스가 날 선 목소리로 묻자, 베르티에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그런 일 가지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아.”
“하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겠지요.”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 가방에서 두 장의 종이를 건넸다.
“수도 남부 빈민가를 불태운 방화범과 성 조지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사살된 남자, 둘 다 프랑크 왕국의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직 분석이 끝난 건 아니지 않나. 특히 어제 있었던 일은.”
베르티에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에게 말하자, 그는 카페오레를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우리 중대에 증원이 들어왔다는 것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계실 텐데.”
“…….”
“단순히, 라이플맨 몇 명 더 들어온 거로 생각한 겁니까?”
알렉스의 말에서 그의 중대에 증원된 병력 중 마법사가 있다는 걸 알아챈 베르티에는 알렉스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반론을 했다.
“그래도 정식 마법사들이 교차 검증을 수행하지 않는 이상, 우리 쪽에서도 할 말은 많이 남아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할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대화가 아니라 포탄이 오갈 텐데.”
전쟁을 의미하는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하고자 하는 말이 뭐지? 한번 싸워보자,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인가?”
녹색 눈동자에서 나온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푸른 눈빛도 그에 못지않게 시리고 날카로웠다. 알렉스는 잠시 카페오레로 목을 축인 뒤, 베르티에에게 말했다.
“아니, 그런 말을 할 거면 애초에 제가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겠지요. 오히려 저는 전쟁을 싫어하는 쪽이라는 걸 알잖습니까?”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는 날 선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럼, 이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자 알렉스는 베르티에를 향해 몸을 숙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보좌관님께서는 ‘인간에게 마법이 걸려 있다’를 부정하지는 않았지요. 공식적으로는 제국에서도, 프랑크 왕국에서도 인간을 조종하거나 강화하는 마법을 도입한 적이 없는데도.”
흠칫. 차갑고 매섭던 베르티에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자 알렉스는 쐐기를 꽂을 심산으로 그의 귀로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아는 거 싹 다 불어. 다음 달에 국왕 즉위식 새로 치르고 싶지 않으면.”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떠올렸다. 어깨가 피로 젖어 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괜찮냐고 묻던 아델라인을. 만약 아델라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얽혀 들어간 이상, 이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는 진심을 담아 베르티에의 귀에 속삭였다.
“요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해서 말이지.”
* * *
“오늘은 정장 차림이네요?”
아델라인은 응접실에서 알렉스를 맞으며 물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공작가를 드나드는데 낡은 제복을 입기에도 뭐하니까, 그냥 챙겨 입었습니다.”
“편한 옷 입어도 괜찮은데. 그런 옷도 잘 어울리니까요.”
아델라인은 그리 말하며 알렉스의 손을 살짝 잡고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봤다.
마치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한쪽 볼에 손가락을 겨눈 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
아델라인의 생각이 들어맞았는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알렉스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 부름에 답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왜 그…….”
푹.
알렉스의 말랑한 볼에 아델라인의 손가락이 찔러 들어갔다. 그러자 알렉스의 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
1초, 2초, 5초… 시간이 흘러도 알렉스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슬그머니 손을 치우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화난 걸까? 화난 걸까?!
아델라인의 마음이 점점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가득 차오르던 그 순간, 알렉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하하하!”
“……?”
한참을 웃던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책 읽은 걸 금세 활용하시는 겁니까? 대단하네요.”
“……?”
아델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계속 지어 보였다. 책? 무슨 책?
“상대방을 공격하러 가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해서 기다리는 것.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효과적이지요. 잘하셨습니다.”
“…아.”
설마 오늘 수업할 책의 내용이었던 건가? 그거 한 글자도 안 읽어 뒀는데?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지만, 알렉스의 표정이 너무 좋아 도저히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아델라인은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델라인은 그 선택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오늘은 가볍게 1장만 나가 볼까요? 한 50페이지뿐인데다, 이해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 순간, 아델라인의 하늘색 눈동자는 공포에 물들어 갔다.
* * *
해가 지고, 길가에 뜨문뜨문 놓인 가로등만이 주변을 밝히는 밤. 알렉스는 광장의 한구석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어 내렸다.
“귀여웠지.”
이미 읽은 내용이 알렉스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시선은 신문의 기사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아델라인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도 자신의 상태를 불안한 표정으로 살피는 게 귀여웠다. 그래서 일부러 약간 짓궂게 반응했더니, 지레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떠는 것도 귀여웠다.
“하…….”
알렉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공장 지대의 매연과 가로등의 불빛, 그리고 하늘 높이 뜬 보름달의 달빛에 대부분 별은 그 빛을 잃었지만, 개중 몇몇은 아직도 밤하늘에 밝게 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알렉스에게 길을 알려 주던 별들도 있었다. 여름철의 대삼각형. 어디 있는지만 찾아낼 수 있다면, 북극성만큼이나 도움이 되는 이정표였다.
잠시 그 삼각형을 시작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흐릿한 별들을 집어 가던 알렉스의 옆으로, 누군가가 자리를 잡았다.
“뭐가 보이기는 하나?”
낮과는 다른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신문을 든 채 나타난 베르티에는 알렉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알렉스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베르티에 옆에 두고, 베르티에가 들고 있던 신문을 건네받아 들며 답했다.
“별이 보이지요. 별이.”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는 약간의 비아냥을 섞어 알렉스에게 쏘아붙였다.
“잘도 보이는구만.”
그러나 알렉스도 순순히 당해 줄 인물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베르티에의 말을 받아치며 신문 뭉치의 무게를 가늠했다.
“착한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별들이니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놈에게는 전혀 안 보이지 않겠습니까.”
알렉스는 신문 뭉치의 옆구리를 슬쩍 만져 봤다. 질 낮은 갱지 사이사이에 고급 사무용지가 끼어 있었다. 알렉스는 그 신문 뭉치를 서류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이게 끝입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베르티에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건넬 수 있는 건 그 안에 있는 게 전부이지만, 말은 다르지. 말은 흔적이 남지 않으니까.”
베르티에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왕국도 전쟁을 기피하는 분위기는 아니네. 아동 연쇄 납치 사건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악재가 연이어 터지고 있으니.”
“윗대가리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구만. 우리도 비슷한데.”
“다만 명분이 없어 움직이지를 못하는 거지. 그런 점에서, 자네들이 나서 준 건 다행이라 생각되면서도 걱정도 되는 상황이야.”
그 말에, 알렉스는 일전에 건네받았던 명단을 떠올리며 베르티에에게 물었다.
“그 명단에 있는 마법사 하나라도 죽으면, 그걸로 명분을 삼으실 겁니까?”
“그건 본국의 국왕 전하와 그 각료들의 인내심에 따라 다르겠지.”
“…….”
“어차피 그 신문에 끼워져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 육군이 동물 병기를 퇴역시킨 건 또 다른 이유도 있네.”
그는 잠시 한숨을 쉰 뒤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물을 강화하고 조종해 다루던 이들이, 이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거지.”
“그래서 밖으로 새어 나가기 전에 통째로 덮어 버린 것이군요.”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알렉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베르티에를 향해 중얼거렸다.
“뒤처리 좀 잘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우리까지 엮이게 하지 말고.”
“뒤처리는 잘했네. 판단은 칼 같았고, 행동은 순식간이었지. 볼티져들과 왕실 근위대가 일제히 동원된 작전이었어. 관련 연구에 참여한 모든 마법사와 군인들,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단 하룻밤 만에 체포했네.”
“…하지만, 다시 몇몇 마법사들이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
알렉스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베르티에에게 물었다. 프랑크 왕실 근위대라 하면 황태자가 이끄는 친위대와 달리 수차례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베테랑들이었다.
“분명 구금을 해 두고 이중삼중으로 감시 중이었네. 하지만…….”
베르티에는 목에서 무언가를 벗어 손에 그러쥐었다.
짤랑.
인식표 서너 개가 금속 체인에 꿰여 가벼운 소리를 냈다. 베르티에는 그 인식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실전되었다 여겨진 흑마법에, 탈출한 마법사들을 추적하던 우리 부대가 그대로 휩쓸렸네. 인근 성당에서 사제들을 급히 동원했지만, 상당수가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지.”
“…흑마법.”
알렉스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베르티에를 바라봤다. 기록상으로도 수백 년 전에 실전된 학문이었다. 알렉스는 다시 목걸이를 목에 차는 베르티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온 겁니까? 부하들의 복수를 하려고?”
알렉스의 물음에, 베르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은 않겠네. 그러니 부탁하지.”
베르티에는 신문을 한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 보랏빛 눈의 마녀를 잡아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