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분노
한순간이었다. 아델라인은 자신이 무언가에 부딪히고 쓰러지며, 무언가에 짓눌리는 감각만이 느껴졌다.
뭐에 부딪혔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제대로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 버리는 바람에, 아델라인은 곧이어 큰 소리가 울리고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신을 덮쳤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슬며시 뜨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아델라인의 머리를 누군가가 품에 안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알렉스의 목소리. 대부분 상황에서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던 알렉스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초조하고 날이 서 있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머리를 품속에 꼬옥 안았다. 마치 소중한 것을 잃을 뻔한 사람처럼. 아델라인은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떴지만, 아델라인이 볼 수 있는 건 오직 알렉스의 녹색 제복밖에 없었다.
“중대장님!”
그때, 여러 명의 발소리와 함께 노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옆을 돌아본 알렉스는 자신이 죽인 이의 얼굴을 보고는 그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노먼. 현장 보존하세요. 수사관들은 절차대로. 소대원들 오면 원대 복귀시키고.”
“…알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파악한 노먼과 수사관들은 빠르게 현장을 정리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안긴 채로 일으켜졌다. 시신은 빠르게 흰 천에 덮였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피는 몸을 일으키는 사이 옆을 봐 버린 아델라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기 충분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깨닫고 몸을 벌벌 떨며 반사적으로 알렉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깨의 옷이 축축해져 가는 게 느껴졌지만, 아델라인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덮쳐진 순간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의 팔에 들어간 힘을 느낀 알렉스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늦지 않았어…….”
알렉스의 목소리에도 평소 같지 않은 동요가 일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알렉스도 자신과 같이 충격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자 천천히, 아델라인의 손발에서 통제할 수 없던 떨림이 잦아들었다.
몇 분 동안 아델라인을 안은 채, 그리고 그녀에게 안긴 채 아델라인을 살피던 알렉스는 그녀를 감싸 안은 팔을 푼 뒤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휘태커가 부탁한 주요 인물이 죽었다든가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델라인의 어깨에서 흐르는 피. 그것을 보자, 알렉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본 아델라인은 그제야 쓰라린 고통을 느꼈다.
“아…….”
그러나 그 고통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알렉스의 표정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져서, 아델라인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뺨에 손을 얹고 물었다.
“…알렉스는 다친 곳 없어요?”
다친 건 자신이면서, 상대의 안부를 묻는 그 모습에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델라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옷을 흠뻑 적시기 시작하자, 그는 손수건을 꺼내 아델라인의 어깨에 가져다 댔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병원이니 곧바로 조치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제가…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알렉스는 계속해서 자책하는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잠시 뒤, 알렉스에게 노먼이 다가왔다.
“중대장님.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말해.”
알렉스의 목소리에서 일순간 어떤 조짐을 느낀 노먼은 알렉스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속삭임이 계속될수록, 알렉스의 표정은 시시각각 뒤틀려 갔다.
“…본부에서 조사관 파견까지는.”
“빨라도 하루 정도 걸립니다. 확실한 답을 얻으려면 며칠은 더 걸릴 테고.”
“당장 요청하고, 방침 전달받으세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노먼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곧이어 의사들이 다가와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포션을 묻힌 솜으로 상처를 닦아 내자, 금세 그녀의 살갗이 아물었다. 생각보다 빠른 회복에, 아델라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다.
치료를 마친 의사는 도구들을 간호사에게 건네며 그녀에게 말했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병원장님께서 가능한 많은 협조를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고개를 숙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저희 병원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델라인은 손을 내저으며 의사에게 말했다. 물론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알렉스가 옆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의 의연함을 흉내 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사고인데요. 일단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의사가 떠나려는 찰나, 알렉스는 그 의사를 향해 질문했다.
“혹시. 간호사 중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없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알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알렉스는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조금만 더 의심했었더라면. 조금만 더 신중했었더라면.
“아니… 괜찮습니다.”
알렉스는 힘 빠진 목소리로 의사에게 답한 뒤, 아델라인의 옆 공간에 앉았다. 그의 힘 없는 모습을 보자, 아델라인은 그의 손을 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손을 잡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거칠고 차가운 손이었지만, 잡고 있으니 놓기가 아쉬웠다.
그러나 서로 할 일이 적지 않은 상황.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저는 다시 저택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자 알렉스는 따라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에스코트해 줄게요.”
어차피 마차에 타서 움직일 예정이기에 알렉스를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제안을 거절하려 했던 아델라인이지만, 알렉스의 표정을 보자 그 말은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고마워요.”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어깨에 걸쳐 주며 피투성이가 된 웃옷을 가려 줬다.
“제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자책이 잔뜩 묻어 있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 때문에 알렉스마저 자책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델라인은 애써 손의 떨림을 숨기며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그저 우연일 뿐이었어요, 알렉스. 우연으로 인한 사고.”
아델라인은 마부가 놓은 계단으로 마차에 오르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밝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알렉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그럴 겁니다.”
알렉스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마부는 부지런히 마차를 몰아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연결되었습니다, 중대장님.”
알렉스가 관사에 돌아와 집무실로 들어가자, 때마침 그곳에서 통신구를 조작하고 있던 노먼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통신구 앞에 서서 오른팔로 통신구를 향해 경례했다.
“충성.”
- 충성.
통신구 앞에 나타난 것은 리안 필즈먼. 그는 알렉스에게 앉으라 손짓한 뒤, 그를 향해 물었다.
- 노먼 중위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이번에도 프랑크 왕국 양식의 마법이 검출되었다고. 그게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그 단어 한마디를 내뱉는 목소리에 실린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번은 신중론을 내놓음으로써 넘어갈 수 있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니었다. 세 번째는 더더욱. 늑대에 이어 방화범, 그리고 이번의 사건까지, 세 번 모두가 프랑크 왕국을 가리키고 있었다.
의회에 이 소식이 들어가게 된다면, 의원 중 몇몇은 전쟁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전쟁은 일종의 사업이었고, 기회였으니까.
- 일단 조사가 시작되면, 의회에서도 호전적인 여론이 일어날 걸세. 내각도 싫어하지는 않겠지. 전운이 감돌면 내각의 지지율도 높아질 테니.
수정구 속의 필즈먼은 외알안경을 고쳐 쓰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 자네 의견은? 자네가 현장에 가까우니.
필즈먼이 알렉스의 의견을 묻자, 그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필즈먼에게 보고를 했다.
“프랑크 왕국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너무 허술합니다. 그들이 일부러 자신들을 의심하게 할 증거를 남겨 둘 이유가 없습니다.”
알렉스의 말을 들은 필즈먼은 흥미롭다는 듯 펜으로 메모해 나갔다.
- 계속하게.
“이번에 사망한 남성은 증권가에서 일하던 인물입니다. 또한, 이번 빈민가 방화사건을 전후로 각종 부정 거래 의혹으로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자입니다.”
- 외부의 소행보다는 내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건가?
“이미 비슷한 요소를 지니고 있던 인물들 여럿이 입막음 당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자 필즈먼은 통신구, 그리고 통신구 너머의 알렉스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연신 책상을 두드렸다.
- 내게 원하는 게 있는 듯한 눈치인데.
필즈먼의 말에, 알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사람 앞이 아니었다.
“우리 파견 중대를 투입해 주십시오.”
알렉스의 말에, 필즈먼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필즈먼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수의 계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그의 물음에, 알렉스는 자신이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제1, 제2 수도경비대는 의욕조차 없습니다. 제3 수도경비대는 파견 중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경험치가 쌓였지만, 빈민가를 담당해야 하는 만큼 운용이 제한적입니다.”
- 수도사단은 벌써부터 의회에서 철수안 내놓으라고 재촉해 대는 중이고, 결국 여유로운 인원은 자네들 파견 중대밖에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러나 필즈먼은 알렉스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필즈먼은 숙고의 시간을 거친 뒤,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 하지만, 나는 자네가 왜 자네를 비롯한 파견 중대를 투입해 달라고 말했는지 이유를 묻고 싶은 것이네.
예상치 못했던 질문. 그러나 답은 마련되어 있었다.
“사냥 대회부터 시작해, 상대방은 다양한 수단으로 우리 파견 중대를 압박하고 시험하는 중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상대방은 결국 파견 중대에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라이플여단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알렉스는 수정구 속 필즈먼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라이플맨은 사냥꾼이지 사냥감이 아니다.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필즈먼은 연신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알렉스가 입을 다문 채 필즈먼의 답을 기다리고 있자, 필즈먼은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 …진심인가?
필즈먼의 물음.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알렉스를 응시한 필즈먼은 잠시 고민한 뒤, 한 마디 말을 건넸다.
- 추가 인력 증원은 힘들다. 항상 신중할 수 있도록.
허락이나 다름없는 필즈먼의 말에, 알렉스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경례했다.
“네, 알겠습니다. 충성.”
-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