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황후의 요구
“도착했습니다, 공녀님.”
“고마워요.”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아델라인은 어쩐지 낯선 황궁의 기류를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태자의 친위대 대신 황궁을 지키던 제3 수도경비대는 어디로 가고, 그 빈자리를 다른 제복을 입은 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려던 찰나, 아델라인에게 한 관리가 다가왔다.
“로피츠 영애?”
“네. 맞는데요.”
“황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관리를 따라 황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델라인이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남쪽 하늘에 들어차 있던 검은 연기 기둥은 화려한 건물과 푸르른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마치 동떨어진 다른 세상 같았다.
황궁만 보면, 이곳은 평화로운 낙원 그 자체였다. 아델라인이 관리를 따라가며 좀 더 걷자, 이내 여러 사람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이번 경마대회 우승자가…….”
“어머, 그랬나요? 그것 참…….”
점점 다가갈수록, 그 대화들이 또렷하게 아델라인의 귀에 들려왔다. 이 주변의 풍경만큼이나, 들려오는 대화들도 황궁 바깥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이었다.
해맑은 그들의 목소리들을 듣자, 아델라인의 가슴이 울렁이는 게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 새벽에 쪽지 한 장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저 난장판으로 뛰어들었는데, 정작 상류층이라는 인간들은 며칠 전에 있었던 경마대회나 유명 인사의 가십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황후와 시녀들이 보였다. 관리는 허리를 숙이며 아델라인이 왔음을 알렸다.
“황후 마마, 아델라인 폰 로피츠 공녀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델라인도 치맛자락 양쪽을 붙잡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황후는 주변의 시녀들을 향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아, 그런가요. 그러면… 나는 공녀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알겠습니다, 황후 마마.”
황후의 말에, 시녀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아델라인을 안내했던 관리도 황후에게 인사한 뒤, 뒷걸음으로 정원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황후는 아델라인에게 다가와 반가운 얼굴로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에요, 아델라인. 5월 궁에서 보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황후마마,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아델라인. 자, 앉아요.”
황후의 말에, 아델라인은 황후가 가리킨 방향에 앉았다. 미리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던 듯, 정갈하게 마련된 찻잔이 그녀를 맞았다.
황후는 직접 그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만나서 고마움을 표현해야 했었는데, 친위대도 그렇고 당장 사교 시즌에 대신 사용할 공간을 마련하느라 바빠서 통 신경을 못 썼네요.”
“아닙니다, 황후 마마.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한 뒤, 차로 입술을 축였다. 차의 향이 아델라인의 코를 간질였지만, 여기서 그 향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한시가 급한 사안이니,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시가 급한 사안이라. 무슨 일인가요, 공녀?”
황후는 여유롭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수도 남부의 빈민가에 동시다발적인 화재가 발생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도와야 하는데, 황후 마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 그런가요?”
너무나도 평온한 황후의 어조. 마치 ‘오늘 메뉴는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입니다.’라는 문장에나 어울릴 법한 가벼운 목소리에, 아델라인의 속은 타들어 갔다.
“황후 마마께서 황실을 대표해 구호금을 마련해 주신다면, 다른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행동도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자 황후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공녀는 얼마나 준비하셨죠?”
그러자 아델라인은 그 질문에 곧바로 답했다.
“100파운드와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제 시녀에게 맡겨, 구호물자를 준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말에,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황실은 그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준비해야겠군요, 공녀.”
그 말에, 아델라인은 한결 짐을 덜은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황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를 멈춰 세웠다.
“한 달 내로 지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할게요. 그동안 공녀도 너무 앞서 나가지 말도록 해요.”
“…네?”
“공녀가 먼저 앞서 나가면, 다른 귀족 가문들도 부담스럽게 느낄 거예요. 개중 몇몇은 공녀를 향해 안 좋은 시선을 보낼 거고.”
“…….”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아델라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한 달. 그리고 노력. 아델라인은 황후의 눈빛에서 한 가지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황후는 그 무엇도 확실히 약속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때, 황후가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녀가 제 부탁을 한가지 들어준다면, 저도 더 노력해 볼 수 있는데.”
그 말에, 아델라인은 다시 황후를 바라봤다. 아델라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황후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매닝햄 대위와 멀어지세요. 이건 제 부탁이기도 하지만, 공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갑자기 나온 이름에, 아델라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아델라인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잠시의 말미를 준 뒤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아들과 얽힌 일에, 공녀가 휘말리게 둘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자는 위험한 인간입니다.”
“…….”
“그와 멀어지세요. 연을 끊는다면 더 좋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황후의 여유롭고 온화한 표정에 박혀 있는 눈빛은 왜 이리 서늘한 걸까.
아델라인은 갈등했다. 황후의 말에 따라야 하는 걸까. 황후니까. 그리고 이 세상의 주인공인 황태자의 어머니니까.
그러나 아델라인은 도저히 황후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알렉스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녀는 도저히 황후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황후 마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인사를 했다. 더 이상 여기에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아델라인은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델라인은 길 근처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황후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이 사실을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황후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얼마 전에 처음 만났을 뿐인 그린우드 부의장은 어떻게 설득하라는 걸까. 결국, 아델라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때, 아델라인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아델라인의 옆으로, 한 노인이 다가왔다. 아델라인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노인을 바라봤다. 거친 일을 하는 사람인지, 한 손에 도구들이 들어 있는 양동이를 든 노인은 무채색의 모직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얼기설기 엮은 밀짚모자가 얹혀 있었다.
“같이 앉아도 괜찮겠소, 영애?”
그러자 아델라인은 옆으로 살짝 비켜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은 머리에 쓴 밀짚모자를 살짝 들어 보이며 감사를 표한 뒤 앉았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려.”
그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힘들었기에 그 힘없는 목소리마저 마음에 와닿았다.
“듣자 하니 남쪽에서 큰불이 났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온 것이오?”
“그걸 어떻게…….”
분명 황후가 모든 이를 물렸을 텐데, 이 노인이 자신의 목적을 정확히 알아내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 노인은 허허 웃은 뒤 그녀를 향해 말했다.
“황궁에서는 벽에 눈이 달려 있고 바닥에 귀가 달려 있소. 그런 식으로 축 처져 있으면 될 것도 안 되기 마련이지.”
“아…….”
아델라인이 그제야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자각하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여겨보던 노인은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벗어 아델라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얇디얇은 금줄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반지가 꿰여 있는 목걸이였다.
“부적이오. 옷 밖으로 꺼내야 효력이 있지.”
“부적…이요?”
“물론, 정 효과가 없다 싶으면 그냥 그걸로 식량 한 줌 더 사시오. 아까 들어보니 패물도 다 팔았다고 들었소만.”
그렇게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남기며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아델라인은 목걸이의 반지를 손에 들어 살펴봤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볼품없는 반지였지만, 안쪽에는 어떤 글귀가 적혀 있었다.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문구에, 아델라인은 잠깐 기억을 뒤져 봤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아델라인은 결국 생각을 멈추고 걸음을 옮겨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자, 나이아는 한 신사와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신사는 스워포드와 꼭 빼닮았지만, 좀 더 세련되고 밝은 인상이었다.
“몇몇 종목에서 평상시보다 많은 매수 및 매도 주문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주문들의 호가는 점점 우상향했고요. 그 종목 중 하나가 우리 스틸웰 공업의 협력사여서, 거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식 시장에서 통정매매를 이용한 시세조작이 의심된다 이 말인가요?”
“현물 시장에도 이상이 생길 것으로 판단해 사람을 보냈지만, 다행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금속 및 석탄은 잠잠했습니다. 하지만 곡물에서도 누군가 인위적인 시세 조작을 가한 정황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쪽은 아직 단정 지을 수 있는 단서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식 시장과 현물 시장 양측에서 평소와는 다른 상황이 발생한 건가요?”
나이아의 물음에, 그 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전했다.
“의회에 이 상황을 알리고 싶지만, 소집령이 내려진 이후 제국 의회당은 출입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입니다.”
그때, 아델라인이 다가오자 나이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공녀님.”
“그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고 있어? 문제라도 생긴 거야?”
그러자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장이 열리자마자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치솟았어요. 일단 구매는 해서 오라버니가 알려 준 주소로 보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턱없이 부족해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상황이 훨씬 안 좋은 상태였다.
“…알겠어. 수고했어. 이쪽의 신사분은?”
아델라인의 물음에, 나이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신사는 중절모를 살짝 들어 보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틸웰 공업의 마일즈 스틸웰 상무입니다.”
“아델라인 폰 로피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델라인도 따라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잠깐. 스틸웰… 스틸웰?!
아델라인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마일즈 상무도 왜 그녀가 놀랐는지 짐작한 바가 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전에 가문끼리 사교 시즌의 파트너를 조율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제 동생과 먼저 만나셨다고도 들었고.”
“아…….”
예상치 못한 인연에, 아델라인은 혼잡한 머릿속을 차례대로 정리해 나갔다. 알렉스가 없었다면 사교 시즌 동안 함께 다녔을 사람이었다. 그때, 마일즈가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레이크 양에게 들은 바로는, 수도 남부의 빈민가에 보낼 구호품을 마련 중이라 알고 있습니다.”
“네, 지금으로선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지만…….”
아델라인이 부끄럽다는 듯 탄식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을 바라보자, 마일즈는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마일즈를 바라봤다.
“군납 비스킷을 만드는 업체의 사장이 저와 친분이 있습니다. 수도 근교의 항구에 자체 곡물 창고를 보유 중이지요.”
마일즈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장을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무상 공여는 몰라도 현 시세보다는 싸게 확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분명 대가가 있을 것이다. 황후가 그러했듯, 이 자도 조건이 있을 것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황후도 조건을 붙이는데, 아무런 빚도 없는 마일즈가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그러자 마일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든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