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신고식
언제나 평화로운 파견 중대의 관사는 여느 때처럼 연회에서 돌아온 알렉스를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북적였다. 새로 들어온 식구들은 미리 마련된 방에 짐을 풀고 기존 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알렉스도 마찬가지, 그는 터번을 머리에 쓴 한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위 계급장을 달고, 허리에는 제식 세이버보다 훨씬 굽은 날을 지닌 샴쉬르를 찬 그는 허허 웃으며 알렉스와 악수를 했다.
“중대장님께서는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십니다, 그려.”
“노먼 중위도. 애들은 잘 지내요?”
노먼은 인사를 나눈 뒤, 턱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의 유목 민족과 비슷한 얼굴상을 가진 노먼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 아들놈이 외무부에 취직해서, 잔치도 한 번 벌였지요.”
“좋은 소식이군요. 축하해요.”
“그럼, 짐 풀고 다시 이야기 나누시지요. 애들 말 들어 보니 이야깃거리가 많던데.”
“하하… 그러시지요.”
노먼이 자신의 짐을 들고 정해진 방으로 들어가자, 알렉스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증원은 좋았다. 매번은 아니지만, 꾸준히 작전에 투입되는 그들에게 사람 수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렇게 밤을 넘어 새벽이 될 때까지,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때,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벽에, 황궁에서 저렇게 급하게 말발굽 소리를 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외인 소대는 그 반응이 조금 늦었지만, 그들의 몸도 따라서 굳으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멈추고,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발소리는 이내 정문을 지키던 대원들에게 가로막혔다.
“정지! 정지!”
“제3 수도경비대에서 왔습니다, 애런 휘태커 경감의 요청입니다!”
그 말에, 알렉스를 비롯한 기존 중대원들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아직 대기. 내가 나가서 상황을 확인하지.”
그 말에, 대원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알렉스가 정문으로 가서 문을 열자 수도경비대의 제복을 입은 경비대원이 가벼운 신변 조사를 받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알렉스의 물음에, 경비대원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알렉스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수도 남부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제3 수도경비대의 예비대가 주요 교차로를 장악하고 있지만, 여력이 부족합니다.”
“원인은?”
그러자 경비대원은 숨을 고르며 알렉스에게 봉투를 쥐여 주었다.
“빈민가 곳곳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인 화재입니다.”
그 말에, 알렉스와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원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알렉스가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보자, 휘태커의 글씨체에서 그 혼란이 전해져 왔다. 여기저기서 치솟는 불길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한 건지, 그들은 간신히 몇몇 교차로와 시설물들을 지키는 데 급급한 상황이었다.
방화일 가능성이 크고, 방화범이 잡히지 않은 상황. 휘태커는 알렉스에게 방화범의 체포를 요청하고 있었다.
“신고식 한번 거하게 치르네. 빌어먹을…….”
알렉스는 그 종이를 손아귀에 넣고 콰직! 구기며 이를 악물었다.
“이름이 뭐지?”
“채드윅 클린턴 경위입니다!”
“클린턴 경위. 잠시만 기다리게. 전달할 서신을 작성해서 가져다주지.”
그렇게 말한 알렉스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원들은 모두 자신의 장비를 든 채 복도에 정렬해 있었다.
외인 소대도 마찬가지. 제식 라이플과는 다른 총기를 든 그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먼 중위, 오늘은 1소대장이 부중대장 역할을 맡을 겁니다. 외인 소대는 4명씩 각 소대에 분산 배치하고, 중위는 나 대신 본부소대를 맡아 주세요.”
그러자 길쭉하고 특이한 모양새의 라이플을 든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노먼의 확인을 받은 알렉스는 계속해서 지시를 내려 갔다. 이윽고 지시를 다 들은 그들은 본부소대가 꺼낸 장비와 탄약을 챙기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알렉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미리 작성해 둔 서류들에 날짜만 새로 써넣었다. 수도 내에서 알렉스의 파견 중대가 움직이기 위해 통보해야 하는 부처들은 한 손에 꼽기 힘들었다.
모든 서류에 날짜와 서명을 마친 알렉스는 급하게 제복을 갖춰 입고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라이플과 피스톨, 총검과 세이버도.
모든 장비를 챙긴 알렉스의 눈에, 책상 위에 쌓아 둔 사무용지가 보였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그걸 보자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펜을 다시 꺼내 들었다.
사사사삭.
조급한 마음을 따라, 손도 거칠게 글씨를 휘갈겼다. 머릿속에 떠오른 온갖 음어와 약어를 다시 일반적인 어휘로 바꾸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에 한 줄을 추가로 써넣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보기 힘들면 레이크 하사에게 부탁할 것.]
그 한 줄을 추가한 알렉스는 다른 서신들과 함께 뭉텅이로 접어 손에 쥔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본부소대의 대원들은 새로 온 외인 소대원과 함께 뒷마당에서 마차를 끌어와 온갖 장비와 보급품을 실었다.
“경위, 이거 각각 제1 수도경비대, 육군성장관 집무실, 시청, 육군 수도사단 본부, 수상 관저하고 제국 의회 의장 집무실.”
초조한 듯 발을 구르며 그걸 바라보고 있던 경비대원에게 급하게 하나하나씩 서류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려 준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남은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서신이니 시간이 남으면 전해 줄 수 있겠나.”
알렉스의 말에, 경위는 그 서신도 낚아챈 뒤 자신의 말에 오르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로피츠 공작가 저택. 알렉스가 보냈다고 전해 줄 수 있나?”
“해 보겠습니다. 히랴!!”
알렉스의 부탁을 들은 경위는 급하게 말을 몰아 황궁을 달려 나갔다. 그 사이 보급품을 마차에 실은 대원들은 하나씩 마차에 올라탔다.
“갑시다, 중대장님.”
“고마워요, 노먼 중위.”
노먼이 뻗은 손을 잡고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자, 마부석에 탄 대원이 말을 채근했다. 한계까지 짐을 실은 말과 마차는 천천히 가속력을 얻으며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알렉스는 다리 사이에 라이플을 끼운 채 고민했다.
내가 괜히 말한 건가.
어쩌면 아무 일이 아닐 수도 있을 텐데. 그냥 괜히 걱정시키지 말고 조용히 갔다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아델라인을 떠올리던 알렉스는 이내 고개를 털어 머릿속을 비워 냈다. 지금은 아델라인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알렉스는 총기를 들고 점검을 시작했다. 그사이 마차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했다.
* * *
동이 막 터오기 시작한 새벽,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깬 안드레이는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레이크 집사님. 방금 수도경비대의 경위 한 분이 와서 이걸 전해 주고 가셨습니다. 뭔 내용인지는 모르겠는데, 집사님 이름이 적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하인이 안드레이에게 쪽지를 건넸다. 대충 흘겨봐도 휘갈겨 쓴 알렉스의 글씨체인 걸 알 수 있었다. 하인을 돌려보낸 안드레이는 책상 위의 초를 켜고 서신의 내용을 풀어 새로 쓰기 시작했다.
[수도 남부에 방화로 추정되는 동시다발적 화재를 동반한 소요사태 발생, 사전 계획 수행 불가 가능성 다분. 파견 중대 동원. 대기하지 말고 선행할 것.]
“이렇게 불친절하게 쓰면 알아들을 수 있겠나.”
안드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게 되자, 안드레이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의 전우들이 싸우러 가는데, 안드레이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는 속삭임이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옷들을 바라봤다.
진녹색의 라이플여단 제복. 이제는 다시 입을 일이 없는 옷이기에, 그 제복은 벽에 걸린 채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그걸 잠시 바라보던 안드레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방해만 될 뿐이라는 걸 알지 않냐, 안드레이.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지금 위치에서 주어진 본분을 다해라.
몇 번이고 자신을 다그친 안드레이는 이를 악문 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청소를 시작한 저택의 사용인들을 지나쳐 아델라인의 침실로 향했다.
이미 나이아도 하녀들과 함께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그때 안드레이가 다가오자, 나이아는 그를 바라봤다.
“오빠, 무슨 일이야?”
그러자 안드레이는 나이아에게 쪽지를 건넸다.
“이거 공녀님께 전해 드려.”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떠나가는 안드레이의 모습은 어쩐지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이아는 그런 그를 붙잡고 무슨 일이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안드레이는 복도 모퉁이를 돌아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이야, 나이아? 안드레이가 아침부터 내 방에 오고.”
“아, 공녀님. 일어나셨나요?”
오늘따라 일찍 일어난 아델라인이 눈을 비비며 나이아에게 다가오자, 나이아는 그 서신을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이걸 전하라고 오라버니께서 주셨어요.”
아델라인이 그 서신을 건네받아 읽었다. 비록 윗부분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악필로 휘갈겨져 있었지만, 아래에는 정갈하게 옮겨 쓴 듯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읽기 편하고 좋다, 라고 마냥 생각했다. 하지만 문장을 읽어 내려가자 그녀는 잠에서 완전히 깰 수밖에 없었다.
“…안드레이를 다시 불러와 줘.”
“알겠습니다. 소피아, 안드레이 집사를 불러와 주세요.”
나이아의 지시를 들은 하녀가 빗자루를 기대어 놓은 뒤 달려 나갔다. 아델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오늘은 훈장을 받는 날이었다. 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알렉스의 도움이 컸기에, 적어도 알렉스와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하필 오늘이라니.
그때, 청소를 하던 하녀가 남쪽으로 설치된 커튼을 젖혔다. 그 하녀는 이내 창문에 비친 광경에,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떨어트리고 입을 가렸다.
수도 남쪽에, 연기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그 끝을 모르고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청소하던 다른 하녀들도, 그 하녀들을 통솔하던 나이아도 창밖의 광경에 경악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알렉스가 저기로 향했다고? 정말?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저런 처참한 재난 현장에 몸을 던졌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마침 안드레이가 하녀와 함께 들어오자, 아델라인은 창문 밖으로 펼쳐진 현장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저기로… 갔다고요? 알렉스가?”
안드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에 비친 모습으로 안드레이의 답을 확인한 아델라인은 창가로 다가가 머리를 창문에 기대었다.
“…….”
뭘 할 수 있는 거지? 저 현장에 있는 알렉스를 위해 뭘 할 수 있는 거지?
저기 있는 사람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지?
“나이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줘.”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나이아는 평소와 달리 답을 주지 않았다.
“…….”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모든 방법에 저마다의 제약이 걸려 있습니다. 구호 성금을 마련하는 것조차도 황실이 낸 것보다 많이 내면 예법에 어긋나기에…….”
“방법이 있습니다.”
그때, 안드레이가 반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긴급 사태를 선언하면, 인근의 수도사단이 보유한 자원을 동원해 신속한 지원이 가능합니다. 수도사단의 평시 비축물자로 상황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을 벌 수는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이아는 눈을 번쩍 뜨며 안드레이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 방법은 위험해요. 의장으로 계신 공작 각하께서 단독으로 안건을 올리는 건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는 방법이고, 의회의 표결에서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몰라요.”
“하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표결만 통과된다면. 그리고 긴급 사태가 발령된 이상, 추가 지원도 쉬워질 것입니다. 일회성 성금이 아니라, 체계적인 지원책이 수립될 가능성도 높고.”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델라인은 손을 들어 대화를 멈췄다.
“나이아. 얼마 전에 내 용돈 장부 정리를 끝마쳤지. 쓸 수 있는 돈을 정리해서 이재민들을 위한 식량을 살 수 있도록 해. 안드레이, 현장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필요한 게 뭔지 확인해 와.”
그렇게 말한 뒤, 아델라인은 옷장을 열어 안쪽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보석함이 그녀의 손에 들려 나왔다.
한참 전에는 이 보석함의 보석으로 세이드의 호감과 친분을 얻어 보려 했었지.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더 소중한 사람이 있으니까. 겉과 속이 다른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내 옆에서 함께 보조를 맞춰 왔던 사람이…….
그래, 파트너가 저 불구덩이 안에 있으니까.
“필요하면 이것까지 다 써.”
“하, 하지만 이건.”
“어차피 태반은 쓰지도 않는 것들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이아에게 보석함을 쥐여 준 아델라인은 옷을 챙겨 입었다.
“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볼게. 그러면 길이 보이겠지.”
옷고름을 여민 아델라인은 문밖을 나가며 안드레이와 나이아에게 말했다.
“서두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