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38화 (38/200)

38화 온전히 함께할 시간을

사교 시즌의 끝물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연회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풍경이지만, 아델라인은 볼 때마다 눈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잡은 채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이고, 어느 정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떠나면 될 일이었다.

원래 의도는 그러했을 텐데…….

“아, 로피츠 공녀.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델라인을 보자, 이 연회를 개최한 귀족이 다가와 아델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눈이 모두 아델라인에게 향했다.

“아, 아.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제노네스 남작. 저택이 매우 인상 깊네요.”

“감사합니다. 이번 사교 시즌을 맞아 단장을 새로 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말하면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러 가던데,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알렉스도 그걸 느꼈는지, 그의 시선이 약간 매서워졌다.

“매해 의례적으로 하는 연회라 준비에 소홀했는데, 공녀께서 오실 줄 알았다면 좀 더 성의껏 준비했을 텐데 아쉬움이 없잖아 있습니다.”

남작의 말에, 아델라인의 직감이 경고를 보냈다. 뭐지, 뭐가 문제인 거지.

왜 내 호감을 사려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착각인가?

그때, 남작의 입에서 아델라인의 의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이번에 훈장을 직접 폐하께서 수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훈장. 아델라인은 그 말이 나오자 옆에 서 있던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델라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괜찮다면, 혹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의 이야기요?”

“어떻게 황후 마마를 구하게 되었는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남작이 작지 않은 소리로 말하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점점 아델라인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알렉스의 손을 잡은 아델라인의 손아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고, 시야는 캄캄해져 갔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순수하게 호의와 호기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아델라인을 향한 질투나 의문 혹은 약간의 적개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아델라인을 향해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마치 바늘로 살갗을 찌르는듯한 그 시선들에, 아델라인의 말문이 턱턱 막혀 왔다.

그때, 그녀를 향한 시선이 한순간에 걷혔다. 아델라인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넓은 등판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극한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향해 살의를 지닌 사람을 마주하고 맞서는 건 보통의 용기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가리고 선 채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알렉스에게로 향했다.

그중에는 알렉스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어 슬쩍 발을 빼는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알렉스를 향해 더 비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선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비록 옳은 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때로는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다쳤고, 누군가는 사람이 죽는 걸 눈앞에서 봐야 했으니까.”

그는 아델라인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애초에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황후마마의 신변이 위험했고, 황궁과 황실을 지키는 친위대의 허술함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자중하시지요.”

알렉스의 말에 반박할 방법을 찾지 못했는지, 결국 사람들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작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나갔다. 그리고 알렉스는 자신의 뒤에 있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참… 그렇지요? 자기 일 아니라고.”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은 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델라인의 생각을 간파한 건지,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인 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원래 다 그런 겁니다. 자기 일 아니면 무관심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런가요.”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지나가는 시종의 쟁반에서 음료를 하나 집어 들어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왜 이것밖에 못 했냐, 왜 이만큼이나 시간이 걸렸냐. 매번 트집 잡히는 게 우리입니다. 모를 리가 없지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알렉스의 표정은 밝았지만, 그 눈에 맺혀 있는 씁쓸함은 아델라인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연회장을 채우던 노래가 바뀌었다. 그러자 중앙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자리로 물러나며, 빈 공간이 생겼다.

그걸 본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춤을 춘 적이 없네요.”

그 말에, 알렉스도 뒤늦게 잠시 지난 시간을 회상해 봤다. 여기저기 많이 가기는 했어도, 정작 같이 연습했던 춤은 춰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퍽 우습고 이상했는지, 알렉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춤을 춰 본 적이 없군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한 곡 정도 춤을 같이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델라인과 알렉스를 향해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자,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알렉스도 생각이 같았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꼭 오늘만 날인가요. 내일도 있는데.”

“그렇죠, 오늘만 날인 게 아니죠.”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음료를 홀짝 마셨다. 잠시 사람들이 춤추는 걸 눈에 담고 있던 그녀는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이런 데서 춤을 춰 본 적이 많나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춤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습니다.”

“아하…….”

“저 같은 사람하고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없고.”

그 말에,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잘생기기만 했는데, 왜 없었을까요.”

아델라인이 묻자, 알렉스는 웃음소리를 살짝 내며 답했다.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그는 위스키가 담긴 스트레이트 잔을 쟁반에서 가져와 손에 들고 홀짝이며 말했다.

“고작 평민 장교이니, 잠깐의 유흥으로 가지고 놀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영애들도 몇몇 있었지요.”

“그런가요…….”

“제게 넌지시 인맥들을 자랑하며 다가오더군요. 제가 거절하면 협박도 하고.”

“협박이요?”

“진급 못 하게 만들어 주겠다, 저 멀리 외딴 속령의 주둔군에 배치되게 하겠다. 뭐 그런 것들 말이지요.”

알렉스는 위스키를 반 정도 비우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아델라인의 마음도 같이 아파져 왔다.

그러나 그게 무색하게도,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요.”

“…예?”

갑작스러운 반전에, 아델라인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필즈먼 대장을 떠올렸다.

아. 이 사람 후견인이 지금 육군 서열 1위지.

그걸 떠올리자, 아델라인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묵직한 감정이 단번에 사라졌다.

“…뭐야. 그런 결말이면 왜 그렇게 슬픈 분위기로 말한 거예요.”

괜스레 마음 아파했던 아델라인은 왠지 배신당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홱 돌리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라고 하면 더 화내려나.”

화악.

고개를 돌렸다고 해도 귀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알렉스의 장단에 맞춰 주는 것 같아,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

결국, 그녀는 심통 난 표정 그대로를 유지했지만, 이미 눈매는 축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많이 화났나요?”

알렉스가 알면서도 묻자, 아델라인은 한숨을 푹 쉰 뒤 답했다.

“알면서도 묻는 거예요? 참 질 나쁜 사람이네.”

아델라인은 일부러 중의적인 말을 던졌다. 조금이라도 이 남자를 흔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이미 아델라인의 감정을 간파한 지 오래였고,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상태였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 겁니다, 그런 모습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비운 뒤, 새로운 잔을 들어 안에 담긴 투명한 증류주를 맛봤다. 진이었다. 상쾌한 솔향이 그의 코를 간질였다.

“…참 비겁하네요. 화를 내기도 힘들게 만들고. 당황시켜서 골탕 먹이기도 힘들고.”

“원래 제 직장이 포커페이스를 요구하는 곳이라.”

알렉스는 잔을 반 정도 비운 뒤 말을 이었다.

“아델라인 당신은 꽤나 난감한 상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참나.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있는 거 알죠? 그런 얼굴로 말하면 어떻게 믿어요?”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올려다보며 따지자, 그는 허리를 살짝 숙여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거짓말 아닌데.”

그 말에, 아델라인의 입이 딱 다물어지고 말았다. 그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 그녀는 도저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

아델라인이 가만히 있자, 알렉스는 계속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만날 때마다 매번 기대되고 설레서, 일부러 조금씩 일찍 나가는 중인데. 그건 모르고 있었죠?”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알아 그걸.

“내일도… 일찍 나올 거예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한쪽 손을 아델라인의 볼에 가져갔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볼에 맺힌 온기가 알렉스의 차가운 손으로 전해졌다.

“아닐 수도 있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