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한여름의 아포가토
“…….”
알렉스는 눈앞의 소시지들을 바라봤다. 접시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각기 다른 모양의 소시지들은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있었다.
평소라면 음, 맛있겠다 하며 먹었겠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하아.”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아델라인은 그 옆에 앉으며 알렉스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하필 소시지라니.”
알렉스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아침도 소시지, 점심도 소시지, 거기다가 이제 돌아가면 또…….
“왜요, 소시지 싫어해요?”
알렉스의 사정을 모르는 아델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알렉스는 다시 얼굴색을 바꾸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우연이 조금 겹쳐서 당황했을 뿐입니다.”
“무슨 우연이 겹쳤는데요?”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보며 묻자, 알렉스는 식전주로 나온 술을 맛보며 답했다.
“며칠 동안 소시지만 먹어야 하는 이유가 생겨서, 오늘 아침에도 소시지를 한 접시 먹었거든요.”
“그래요? 무슨 이유인데요?”
아델라인이 질문을 한 찰나, 그들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일라이자는 둘을 향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오셨군요, 로피츠 영애. 그리고…….”
일라이자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매닝햄 대위님.”
뭐야. 왜 톤이 다른 건데?
아델라인은 일라이자의 태도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일라이자의 인사에 답했다.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 잘 지냈답니다. 아, 오늘은 제 사촌도 이 자리에 왔어요. 잠시만…….”
일라이자가 누군가를 부르자, 곧 17 경기병 연대의 화려한 제복을 입은 남자가 일라이자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이 네가 말했던 장교냐? 평민 장교와 어울릴 생각이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이내 알렉스의 얼굴을 보고 완전히 굳어 버렸다. 알렉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민이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트뤼도 소령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알렉스에게 질문했다.
“자네가 어쩐 일로.”
“당연히 초대를 받았지요. 로피츠 영애와 동행해서 말입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을 잡아 살짝 들어 보이며 질문에 답했다. 그러자 트뤼도 소령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래. 둘이 잘 어울리는군.”
분명 계급은 트뤼도 소령이 한 단계 높은데, 둘의 태도를 보면 정반대의 상황인 것 같이 느껴졌다. 트뤼도 소령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갔고, 반대로 알렉스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연대장님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저는 수도에 발이 묶인지라, 대신 안부를 전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당,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 좋은 시간 보내게!”
그렇게 말하며 소령이 자리를 피하고 당황한 일라이자가 그 뒤를 따르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나지막이 속삭여 물었다.
“소령이 대위보다 높은 거 아닌가요?”
그러자 알렉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보통은 그렇죠.”
긍정의 말. 하지만 알렉스의 어조에는 부정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델라인의 직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듯, 알렉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보통은, 말이지요…….”
“그렇구나…….”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태도에 결국 캐묻기를 포기하고 눈앞의 소시지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살롱에는 오늘의 주제가 걸려 있었다.
“대륙 각지의 소시지 양식과 그를 통한 문화적 차이에 대해. 소시지를 오찬 식사로 낸 이유도 이것이었군요.”
아델라인이 말하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시지… 한동안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델라인이 묻자, 알렉스는 소시지 한쪽 끝을 나이프로 조금 잘라 입에 넣은 뒤 음미했다.
소시지를 맛보고 간신히 넘긴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답했다.
“여단에서 우리 중대에 한 소대 정도 증원을 보내기로 했는데, 그게…….”
“그게?”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단의 외인 대대에서 차출된 소대라 미리 준비할 게 많아졌습니다.”
“근데 그게 소시지만 먹어야 한다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는데요?”
“그중에 돼지고기를 못 먹는 사람도 있거든요, 교리상. 먹어도 된다고 본인은 말하는데… 조금 그렇죠.”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미리 다 먹어 둬야 하는군요. 힘들겠네요.”
“그래서 가면 또 소시지를 먹어야 합니다. 쌓아 둔 소시지 재고가 적지 않아서.”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아델라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저녁까지 같이 다닐래요? 오랜만에 나들이 삼아서.”
그 말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얼굴에 드러난 안도감을 보자, 아델라인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요!”
* * *
“…산책을 하죠.”
“…그러죠.”
살롱에서의 일정이 끝나자, 어느새 속이 더부룩해진 알렉스와 아델라인은 곧바로 합의를 이뤄 냈다. 두 사람은 마부에게 시간과 위치를 알려 준 뒤,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곳은 오지 말아야겠어요. 밥은 편하게 먹어야지.”
“동감입니다.”
둘은 거리를 걸어 나갔다. 한낮의 거리는 붐비다면 붐볐고, 한산하다면 한산했다. 거리에는 좌판이 서 있었지만, 한여름 한낮의 열기에 지쳐 느긋한 자세로 자리만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는 빠르게 지쳤지만, 길가의 가로수가 만드는 그늘로 들어가면 약간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 아델라인은 이내 차양이 넓게 펼쳐진 길가의 커피 하우스를 발견했다.
“저기로 가죠.”
“좋습니다.”
더위가 버거운 건 아델라인만이 아니었는지, 알렉스도 금세 아델라인의 제안에 동의하곤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의 야외석에 앉자, 점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카페오레도 좋지만, 다른 메뉴도 있나? 여름의 열기를 식힐 만한 거로.”
알렉스가 묻자,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사교 시즌의 시작과 함께 아이스크림이 개시되었습니다. 그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걸로 하지.”
점원이 묻자, 알렉스는 지갑을 꺼내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은 무언가 떠올린 뒤, 점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커피도 한 잔 부탁드릴게요. 적당히 식은 것으로.”
“네, 알겠습니다.”
알렉스가 은화 몇 닢을 점원에게 건네자, 그 점원은 돈을 받은 뒤 카운터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말했다.
“에이, 벌써 내 버리셨어요?”
“그동안 마차로 태워다 주신 게 얼마인데, 이 정도는 제가 내죠.”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잠시 뒤, 점원이 아이스크림과 함께 커피를 가져왔다. 알렉스는 커피를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듯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근데 커피는 왜 시키신 겁니까?”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자신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 그릇에 커피를 부었다.
“이렇게 먹으면 맛있어요.”
새하얀 아이스크림 위로 검은색의 커피가 부어졌다. 아이스크림의 한쪽 부분을 커피와 함께 섞은 아델라인은 숟가락으로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음. 역시 아포가토는 최고야.
아델라인이 눈을 감은 채 행복한 표정으로 그 맛을 음미하자, 알렉스도 조심스레 아델라인을 따라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부었다.
그의 얼굴은 반쯤 의심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투르게나마 아델라인을 따라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섞어 입에 한술 넣자, 그의 표정은 만족감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음미를 마친 아델라인이 눈을 뜨자, 그녀는 알렉스의 표정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맛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잠시 입술을 꾹 닫고 알렉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으로 아포가토를 맛봤을 알렉스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뒤, 알렉스는 눈을 떠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알렉스는 귀를 붉히며 아델라인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스크림 녹습니다.”
“아, 그래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도 부지런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계속해서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부어 먹는 모습, 그리고 그걸 음미하는 두 선남선녀의 모습을 본 주변 손님들은 너도나도 추가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던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크림을 먹던 사람은 커피를 주문하자, 카운터에 있던 사장의 얼굴에는 아델라인이나 알렉스보다도 더 밝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아포가토를 음미했다. 그릇이 절반 정도 비워졌을 때 즈음,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맛있죠?”
그러자 알렉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군요. 이건 누가 알려 준 겁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언젠가 떠올린 방법이에요.”
“그렇군요.”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어쩐지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런 게 훌륭한 파트너 아닐까요.”
그러자 알렉스는 잠시 어제의 일을 떠올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 게 훌륭한 파트너죠.”
알렉스가 ‘훌륭한 파트너’라고 말하자, 아델라인의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오늘 아침에, 그린우드 부의장이 전해 줬던 소식.
분명 모두가 선망하고 바라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에게 그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알렉스는 달랐다.
그걸 떠올리자, 아델라인의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알렉스. 있잖아요…….”
아델라인이 시선을 돌리며 운을 띄우자, 알렉스는 숟가락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네. 말씀하시죠.”
“사실… 오늘 아침에 그린우드 부의장이 저택을 방문했어요.”
“훈장 수여건 말입니까.”
알렉스가 아델라인이 하려던 말을 언급하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던 듯,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미 제게는 소식이 와 있었습니다. 황궁 경호 임무를 우리가 맡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차피 우리네 일이라는 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 더 나은 일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 멸시나 증오의 시선을 받는 것보다 낫지요.”
“…분하지도 않나요?”
너무나 담담한 태도에, 아델라인의 마음속이 조금씩 들끓었다. 왜, 대체 왜 이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지.
“그런 감정은 이미 녹색 제복을 입을 때부터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만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고.”
“…….”
아델라인은 그를 바라봤다.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얼마나 알렉스가 힘들게 일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 왔다.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알렉스가 한 일에 비하면 자신이 한 건 없다시피 한데.
아델라인은 우울한 표정으로 조금씩 녹아 무너지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봤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그러자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그렇게 제가 불쌍해 보입니까?”
“불쌍하다기보단… 어이가 없는 거죠.”
아델라인이 무너진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말하자, 알렉스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요?”
그녀의 되물음에 알렉스가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 저랑 함께 해 주세요, 아델라인.”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그거면, 제게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