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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34화 (34/200)

34화 도망친 자에게 낙원은 없다

짹짹. 짹짹.

열린 창문의 틈새로 맑은 햇살과 함께 활기찬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맑고 기분 좋은 소리를 거부하듯, 깊고 어두운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흐어어어어…….”

아델라인은 아침에 일어난 뒤로, 계속해서 머리를 베개에 묻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뭘 한 거지? 뭔 짓을 했던 거지? 뭔 짓거리를 저질러 버린 거지?!

미쳐 버린 건가?

여주를 적으로 돌려 버리다니,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아델라인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하필 오늘은 날이 더럽게 맑았다. 아델라인은 한숨을 쉬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오늘은 뭐가 있었더라.

아델라인은 멍한 눈으로 저 멀리 펼쳐진 도심을 바라보며 눈을 비볐다. 그러나 어제의 기억들이 너무 강렬해 도저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피오나에게 한 말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욱 강렬했던 건…….

‘이제 진정 되셨습니까.’

화아악.

그 기억을 떠올리자, 아델라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으으으으…….”

그녀는 다시 침대에 엎드려 베개를 끌어안고 버둥거렸다. 그 얼굴,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나이아의 목소리와 함께, 아델라인의 침실 문이 열리며 나이아와 동료 시녀들이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그래… 좋은 아침…….”

아델라인이 얼굴을 붉힌 채 침대에 누워 있자, 나이아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얼굴이 뜨겁네요.”

“아니, 괜찮아…….”

아델라인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는 거였더라…….”

그러자 나이아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뒤, 아델라인에게 답했다.

“오늘은 가벼운 일정 하나만 있습니다. 트뤼도 백작의 살롱에서 오찬과 함께 토론회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자유 일정이에요.”

“토론회? 아, 그… 주제가 알려지지 않은 거 말이지?”

“네, 가서 즉석에서 알려 준다고 하는데요?”

아델라인은 그제야 로딩을 마친 머릿속에서 정보를 끄집어냈다. 그래. 그랬었지.

“오늘은 채비를 일찍 해야겠는걸. 또 늦으면 세 번째 아니야?”

“그럴걸요.”

아델라인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고, 몸을 단장하는 동안에도 자꾸만 이마에 느껴졌던 부드럽고 따듯한 감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아델라인이 잠옷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을 때 즈음, 안드레이가 아델라인의 침실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 안드레이.”

“공작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서재로.”

“알겠어.”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복도를 다시 걸어 나갔다. 안드레이의 걸음은 아직도 약간 어색했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걸음걸이가 많이 나아졌네.”

“…공녀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이아는 고개를 숙이며 아델라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걷는 것도 힘들어하던 안드레이가 이렇게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아델라인이 계속 신경 써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손을 내저으며 나이아의 말에 답했다.

“내가 치료했나, 다 의사가 있고 사제가 있어서 나은 거지.”

“…….”

“완전히 회복은 힘들겠지.”

“네. 그래도 저번에 보니까 약간씩은 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때.”

언젠가, 저택의 모든 사용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웅성거린 적이 있었다. 아직 안드레이가 저택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점, 시킬 일이 별로 많지 않았던 그의 하루 일과는 오전에 끝나고는 했다.

그 첫날 밤. 안드레이는 저택을 한 바퀴 돌았다.

한 바퀴는 두 바퀴가 되고, 수십, 수백 바퀴가 되었다.

안드레이가 몇 번이고 속도를 높이려 할 때마다, 그의 다리는 마치 돌이 된 것처럼 굳어 버리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달리는 것에 미련을 가진 것처럼.

“…….”

아델라인은 그게 뭔지 알았다.

그건 미련이었고, 미련함이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동료들과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미련이었다. 긴 세월의 군 생활 동안 외로운 경보병의 삶을 함께했던 미련이었고, 그걸 잊지 못하는 남자의 말 없는 미련함이었다.

그날 이후, 안드레이는 다시는 뛰는 일이 없었다.

“…자. 오늘 하루도 알차게 살아 봐야지. 나이아는 먼저 서재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을 좀 봐 줄 수 있어?”

“네,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먼저 제 서재로 보낸 뒤, 공작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앞에 서서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도록.”

아델라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작도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보였다.

의회의 인장이 찍힌 서류는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의 손에서 건네지고 있었고, 가주의 인장이 찍힌 서류는 노년의 집사장을 통해 건네지고 있었다.

공작은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에 인장을 찍은 뒤,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인사하거라. 이쪽은 제국 의회 부의장, 피터 그린우드다.”

그러자 의회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건네던 남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피터 그린우드라고 하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아, 아델라인 폰 로피츠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델라인이 치마 양쪽을 붙잡고 인사하자, 그린우드 부의장도 고개를 살짝 숙여 답했다.

“피터, 용건을 전하게. 오늘도 일정이 있는지라 많은 시간을 내주지는 못할 테니.”

“저런, 오늘도 ‘용건만 간단히’입니까? 올 때마다 항상 문전박대를 당하는 느낌입니다, 그려.”

“5분.”

공작이 시계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린우드는 한숨을 쉬며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린우드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의회의 인장이 찍힌 봉투.

“그러면, 간단하게. 어차피 내용은 모두 여기 안에 들어 있으니.”

그는 봉투를 까딱인 뒤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제국 3급 훈장을 받게 된 것을 축하하네. 수여식은 3일 뒤, 사교 시즌의 마지막 날이 될 걸세. 원래라면 첫날, 알현식 때 진행해야 했지만 제1 야당의 반발이 조금 있었다네. 이에 대해서는 제국 의회와 다수당을 대표해 유감을 표하지.”

아델라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래도 아직 수도에는 많은 명사가 남아 있을 거고, 훈장 자체의 영광도 널리 퍼질걸세. 이제는 영애나 공녀가 아니라 ‘여사’라는 칭호로 불리게 될 거고.”

그러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알렉스… 매닝햄 대위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러자 그린우드는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는…….”

* * *

“소시지.”

알렉스는 포크로 소시지를 찍은 뒤, 그것을 눈으로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소시지는 왜 안 줄어드는 걸까.”

“그건 중대장님이 안 먹어서가 아닐까요.”

숙취에 절은 목소리와 함께, 소시지로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있던 식사 당번이 알렉스의 접시에 소시지를 가득 채워 줬다. 그걸 본 알렉스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성질을 냈다.

“야, 나 이따가 또 밥 먹으러 간다고!”

알렉스가 외쳤지만, 식사 당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까지는 드셔야 합니다. 앞으로 소시지 구경은 힘들 테니 많이 드셔 두시죠.”

그 말에, 알렉스는 할 수 없이 다시 포크를 들고 소시지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알렉스의 손놀림은 다시 둔해졌다. 평소에는 아껴 먹던 부식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많이 먹으니 물릴 것 같았다.

그때, 알렉스의 눈에 벽에 걸린 시계가 들어왔다.

지금 나가면 이르고, 조금 있다가 나가면 늦을 것 같고.

하지만 알렉스에게는 전혀 이른 시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소시지 지옥에서 탈출하기에는.

“나 간다! 1소대장 말 잘 듣고 있어!”

알렉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뛰쳐나가자, 옆에 있던 대원들도 따라서 일어났다.

“중대장님 잡아!!”

“저, 저, 저거 도망간다!!”

우당탕. 식당에 일대 소란이 일었지만, 숙취에 시달리고 있던 대원들과 달리 알렉스는 순식간에 식당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오늘도 아델라인과 함께하는 일정. 비록 오찬만 같이 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그 사실이 알렉스의 기분을 알게 모르게 들뜨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인가.”

알렉스는 순식간에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문을 바라봤다.

만약 저들에게 잡힌다면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소시지를 먹여지다가 허겁지겁 뛰어야 할 것이다. 알렉스는 결국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 버린 창문을 바라봤다.

“젠장.”

정장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레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알렉스는 창문을 열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창틀로 나갔다.

그러나 이미 알렉스의 행동을 예측한 듯, 숙취와 광기에 절은 목소리가 알렉스에게 점점 가까워져 왔다.

“포위해! 포위!!”

“꼭 소시지를 먹게 만들어라!!”

자신이 가다듬은 대원들이 이렇게 위협적이고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알렉스는 한숨을 쉰 뒤 곧바로 수풀 속으로 뛰어들어 달렸다.

알렉스가 달리기를 멈춘 건, 간신히 대원들을 따돌리고 황궁의 중심부까지 나온 후였다.

* * *

“그래서,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다고요?”

아델라인이 10분 정도 늦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묻자, 알렉스는 마차에 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썰미가 좋지 않다면 잘 안 보이겠지만, 어느새인가 알렉스에게 한해서는 눈썰미가 좋아진 아델라인이 손수건을 건넸다.

“일단 땀도 닦고, 숨 좀 돌리세요. 그리고 머리에 나뭇잎 붙어 있어요.”

그러자 알렉스가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나뭇잎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알렉스의 손은 아델라인이 위치를 집어 줘도 이리저리 헤맸다.

결국,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의 머리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마차가 덜커덩! 흔들리며 아델라인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꺄악!”

아델라인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균형을 잃으며 붕 뜨자, 아델라인은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말았다.

분명 아플 거야, 아플 거라고.

아델라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찾아온 건 고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델라인의 몸을 감싼 건 따스한 온기와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괜찮습니까?”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이 눈을 뜨자, 그가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물론 알렉스도 당황한 표정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틱. 톡. 틱. 톡.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몇 번 들린 뒤, 두 사람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화악.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건 아델라인이었다.

“잡아 줘서… 고마워요.”

그러자 알렉스도 시선을 바깥으로 고정한 채 답했다.

“…다행입니다.”

잠시 뒤, 그들이 탄 마차가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마부가 계단을 설치하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어느새 그의 얼굴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여전히 얼굴의 홍조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그의 손을 잡았다.

“기꺼이.”

알렉스는 그녀가 자신의 손을 살며시 잡은 것을 확인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살롱이 위치한 건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 앞으로 두세 명의 인부가 상자를 든 채 먼저 앞서나갔다.

알렉스의 시선이 그 상자들에 닿자, 그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 상자들에는…….

[최고의 소시지, 브뤼에 소시지]

[초리조 소시지는 엘린체 소시지!]

라는 마크들이 제각각 찍혀 있었다.

도망친 자에게, 낙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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