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친구들
“그럼, 이따가 식이 끝나고 뵙겠습니다.”
나이아가 고개를 숙이며 배웅하자, 아델라인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말고,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때, 알렉스가 나이아에게 모자를 건네며 물었다.
“이것 좀 잠시 맡아 줄래?”
“당연하죠.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나이아에게 모자를 맡기고 식장 안으로 들어오자,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대화 소리와 음악 소리가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황제의 옥좌가 있는 앞쪽은 너무 사람이 몰려 있어, 도무지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알렉스는 잠시 고민한 뒤, 그녀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그냥 적당한 곳에 있죠.”
“네, 그래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을 살짝 잡아끌어 뒤쪽 구석으로 향했다. 특히나 사람이 붐비는 앞보다는 덜해, 조금 한산하고 편했다.
알렉스는 지나가는 시종이 들고 있던 접시에서 유리잔 2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아델라인에게 건네며 슬며시 물었다.
“샹그리아인 것 같은데.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와 함께 그가 내민 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근무 중 아니에요? 이런 거 마셔도 되나 몰라.”
“이 정도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이기도 하고, 제가 총 뽑아 드는 상황이 되면 그땐 진짜 막장인 겁니다. 그리고…….”
알렉스는 위를 살짝 바라보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러자 천장 위의 시설 보수용 간이 통로에, 몇몇 병사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옷은 녹색이었다.
“제 동료들이 그렇게 허술하진 않으니까요.”
그를 따라서 대기 중인 라이플맨을 본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볍게 건배할까요?”
“그러죠. 뭘 위해 할까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잠깐 고민한 뒤, 답했다.
“안전한 사교 시즌을 위하여?”
그러자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안전한 사교 시즌을 위하여.”
짠―
유리잔이 서로 가볍게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델라인은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그러자 조금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맛이 좋아 한 번 더 마시려던 아델라인은 옆에서 어떤 시선을 느꼈다.
“왜 그렇게 저를 바라봐요?”
아델라인이 알렉스에게 묻자,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요?”
그러자 알렉스는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냥… 드레스 잘 어울린다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며 귀를 붉히자, 아델라인은 알 수 없는 간질거림을 느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응수해야 할지 몰라 유리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남은 음료를 쭈욱 들이켰다.
그걸 본 알렉스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거 약간이지만 와인 들어가 있는 거 아시죠?”
그러자 아델라인은 빈 잔을 시종에게 건네고 다른 음료가 든 잔을 받으며 답했다.
“알죠. 자제해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고요. 황제 폐하는 언제 나오시죠?”
아델라인이 묻자, 알렉스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낸 뒤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나오시겠네요.”
그는 다시 시계를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속삭였다.
“아, 공녀님! 오셨군요!”
그때,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영애들이 아델라인을 향해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아델라인은 그 영애들을 보며 머릿속으로 소설의 내용과 그동안 익힌 내용을 뒤적였다. 그중 한 명이 아델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때는 기분 전환 삼아 갔던 암시장이 범죄와 엮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 말을 듣자, 아델라인은 그녀가 누구인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아델라인은 자연스럽게 반응을 꾸미며 인사를 했다. 반쯤 도박이기는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트뤼도 영애.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그 도박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는지, 그녀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에 답했다.
“아뇨, 그동안 아버님이 한 달 넘게 외출 금지를 내리셔서, 집 안에만 있어야 했어요.”
“그것참… 유감이네요. 백작님께서도 조금 유하셔도 될 텐데.”
“그러게요. 불법적인 걸 산 것도 아닌데. 공녀님께서는 어떻게… 어머.”
트뤼도 영애가 아델라인 옆에 있는 알렉스를 보고는 탄성을 흘렸다. 잠시 알렉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치마 양쪽을 살짝 잡아당기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라이자 트뤼도입니다.”
그러자 알렉스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대위 알렉스 매닝햄입니다.”
그러자 일라이자는 더더욱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그 암시장에 투입되었던 병력의 지휘관이 알렉스라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에서 복무하고 계신가요? 제 사촌이 기병대에서 복무 중인데, 혹시 아시려나요…….”
그러자 알렉스의 얼굴에도 순식간에 미소가 덧씌워졌다. 마치 가면처럼.
“아, 트뤼도 소령 말인가요. 17 경기병 연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아, 맞아요! 어쩜. 발도 넓으셔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아델라인은 은근슬쩍 뒤로 하고, 일라이자는 알렉스에게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납시니, 모두 예를 표하시오!”
그 목소리에, 귀족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알렉스와 같이 제복을 입은 장교들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 손을 들어 경례했다.
아델라인은 슬쩍 눈을 들어 황좌로 걸어오는 이를 봤다. 황후 세리야와 그보다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황제였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기운 없는 황제에게는 옥좌까지의 십수 미터도 멀어 보였다.
황제는 간신히 황좌에 앉은 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이들에게 명했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그러자 자리에 있는 모든 내빈들이 고개를 들어 황제와 황후를 바라봤다. 알렉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경례를 하던 손을 내렸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의전관의 지루한 시 낭독이 이어졌다. 빠르게 읽으면 얼마 안 걸릴 길이건만, 그걸 또 운율을 살리겠다고 늘어지게 읽는 모습에 점점 많은 이들이 집중을 잃었다.
그러자 황제는 의전관에게 눈짓했고, 그 눈짓을 받은 의전관은 빠르게 낭독을 마친 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제 본격적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 부임한 대사와 주재무관이라던지, 티 레이스에서 우승한 배의 선장이라던지. 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이룬 자들만이 그 영광에 함께할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황제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러나 알렉스의 신경은 그 사람들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주기적으로 위를 바라보며 부하들의 수신호를 확인하고, 혹시 누군가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때, 한 라이플맨이 알렉스를 보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중대장님, 부사수, 전투 불능.’
각 수신호가 의미하는 바는 잘 알았다. 그동안 수백 번, 수천 번 써 온 수신호이니만큼, 독해는 쉬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부사수도 없었고, 지금은 전투 상황도 아니었으며, 누구 하나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결국, 그 정체불명의 수신호를 본 알렉스는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잠시 추리의 시간을 가져도 대체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위에 있던 라이플맨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옆으로 돌리는 시늉을 반복했다. 얼떨결에 따라서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이내 그 라이플맨이 대체 뭘 말하려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얼굴을 본 뒤, 그녀의 팔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일라이자가 그들을 향해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두 사람은 회장의 뒤편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몇 잔째 마신 겁니까?”
사람들이 거의 없는 한적한 구석으로 온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붉어진 귓가에 입을 가져간 뒤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는 알렉스를 돌아보며, 살짝 풀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얼마 안 마셨어요…….”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또 다른 음료가 들려 있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약한 도수라도 계속 마시면 취해 버리고 말 것이었다.
“하아… 그거 이리 주십시오.”
알렉스는 한숨을 쉰 뒤, 아델라인의 손에 들린 잔을 가볍게 낚아챘다. 다행히도 지금 잔은 4분의 1 정도만 비워져 있었다.
“아이… 왜 가져가요오…….”
아델라인이 항의했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며 그 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다음 그는 근처를 지나가는 시종을 향해 손을 들었다. 시종이 다가오자, 알렉스는 시종이 들고 있는 쟁반 위의 음료를 본 뒤 물었다.
“탄산수인가?”
“네, 레몬과 설탕을 곁들인 탄산수입니다.”
설명을 들은 알렉스는 잔 두 개를 집어 그중 하나를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그 잔을 순순히 받아 든 그녀는 잔의 서늘한 감각이 기분 좋은지, 금세 반을 비워 버렸다.
“하아…….”
아델라인의 얼굴에 띤 홍조가 가라앉자,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아델라인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저 따라다니느라 긴장 많이 하시고 계실 텐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아델라인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황제가 자리를 떠나며 분위기가 한껏 누그러졌다.
다시 음악이 알현장 안을 채우고, 이내 활발한 대화 소리가 높은 천장까지 가득 채웠다. 황제를 알현한 이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알렉스는 천장을 잠시 바라보며 가볍게 수신호를 보냈다.
‘철수 후 재배치.’
그러자 천장에서 대기 중이었던 대원들은 빠르게 장비를 챙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연회장을 지키고 있는 휘태커 경감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 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밖에서 산책이나 좀 할까요. 이제 용건도 다 끝났고.”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북적이는 알현 궁을 나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디를 가야 하죠?”
“오늘 같은 경우에는 알현 궁에 계속 있다가 만찬장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먼저 자리를 뜬 이상 저희도 저녁 만찬 때까지는 쉬면 될 듯합니다.”
“그러면 어디 한적한 곳이 없으려나요…….”
그녀의 말에, 알렉스는 한 장소를 딱 떠올렸다. 함부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일도 없으며, 주변이 번잡해질 일도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한적한 장소’라는 조건에는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 고민했다. 이게 맞는 제안일까. 혹시 그녀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다른 대안을 떠올리지 못한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관사가 황궁 안에 생겼는데. 거기서 잠시 숨을 돌리는 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