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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23화 (23/200)

23화 붉어진 얼굴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만.”

선생의 말에, 스텝을 밟아 나가던 아델라인과 알렉스는 동시에 멈춰 섰다. 선생은 그 둘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띠었다.

“음, 아주 훌륭해요. 저번 수업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두 분께서 따로 연습을 하신 건가요?”

그러자 아델라인과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 이후로 따로 만났던 적은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처음 두 분께서 같이 연습하셨을 때는 하도 공녀님께서 신사분의 발을 밟으셔서 걱정했는데.”

“하하…….”

둘이서 따로 연습한 적은 없었다. 처음 연습했던 날, 아델라인의 방에서 연습했던 적을 제외하면. 그때의 낯 뜨거운 기억을 떠올린 아델라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오늘의 수업은 여기까지 할게요.”

“감사합니다. 저까지 봐주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알렉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노력하는 제자는 언제나 환영이지요. 이번 사교 시즌에 나가시는 건가요?”

그녀가 묻자, 아델라인과 알렉스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파트너를 정해서 나가는 건 굉장히 큰 의미가 있죠. 보통은 정략결혼 상대를 미리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가문의 연합을 상징하기도 하죠. 하지만.”

선생은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께는 그런 남녀들에게서 보이는 그늘이 보이지 않아,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네요.”

연회에서조차 마음을 놓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알렉스와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품고 있는 아델라인을 두고 그렇게 말하자,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델라인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선생을 배웅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녀가 선생을 모시고 나가자, 홀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밟힐 걱정은 던 것 같군요.”

“긴장하세요. 언제 또 밟을지 몰라요.”

“앗.”

아델라인의 협박 아닌 협박에 알렉스가 장난스럽게 얼어붙었다. 그 모습이 순간 웃겼는지, 아델라인은 피식 웃음을 뱉고 말았다.

“뭐예요, 진짜. 아무튼, 오늘은 정말 춤 연습 때문에 왔어요?”

아델라인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은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업무 조정도 끝나서 시간이 남기도 했고.”

“업무 조정이요?”

“네, 이제 우리 파견 중대는 황궁 경비에 투입되지 않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차라도 한잔할래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다할 이유는 없지요.”

“그럼 가요.”

아델라인은 무심코 그의 손을 잡고 이끌며 걸어 나갔다. 마침 티타임인지라, 그들은 순조롭게 복도를 지나 아델라인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구두를 벗은 뒤 슬리퍼로 갈아 신은 아델라인은 방 한편에 있는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곧바로 시녀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어느새 명령이 익숙해진 아델라인은 시녀에게 지시했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 줘. 두 명분.”

“알겠습니다, 공녀님.”

시녀가 나가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불렀다.

“매닝햄 대위.”

그러나 잠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알렉스는 그녀의 부름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슬리퍼를 한 켤레를 꺼낸 뒤 알렉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그리 보고 있어요? 부르는데 듣지도 않고.”

그러자 그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려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 잠시 창밖을.”

“불편할 텐데, 슬리퍼로 갈아 신으세요.”

아델라인이 그렇게 말하며 슬리퍼를 내려놓자, 그는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슬리퍼라고 해도…….”

그러나 그가 바닥을 내려다보자, 알렉스의 발에 꼭 맞을 법한 크기의 슬리퍼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저번의 프릴로 화려하게 장식된 슬리퍼가 아니라, 단색의 푹신해 보이는 슬리퍼였다. 그러자 알렉스는 순순히 구두를 벗은 뒤 그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저번에 웃은 건 미안해요. 그래서 따로 마련했어요.”

“그런데 제 발 크기는 어떻게 알고.”

알렉스가 묻자, 아델라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에게 말했다.

“뭐, 구두 사이즈나 슬리퍼 사이즈나. 비슷할 거 아니에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가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좀 편한 시간을 보내겠네요.”

알렉스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이어졌다. 둘 다 방 이리저리로 시선을 움직일 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시녀 두 명이 각자 다기와 다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테이블 위에 찻잔과 찻주전자, 설탕과 다과 등을 놓았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 말을 한 시녀들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러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을 깬 건, 알렉스였다.

“나이아는 잘 지냅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찻주전자를 들어 알렉스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잘 지내요. 시녀장을 빼면 나이아보다 오래 있었던 시녀들은 다 사라졌거든요.”

“아하. 다행이군요.”

“덕분에 부족했던 지식도 채우고. 지금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아델라인의 말을 들으며, 알렉스가 차를 홀짝였다.

“다행입니다. 많이 걱정했던 애였는데. 홀로 열심히 자라 줘서 고맙기도 하고.”

아델라인은 그의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진심 어린 미소를 봤다. 가식 따위는 없는 그의 미소에, 아델라인도 덩달아 미소를 짓게 되었다.

“나이아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어요?”

아델라인의 질문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안드레이는 제가 임관할 때부터 같이 복무하던 전우니까 나이아를 모를 수가 없었지요. 가끔 레이크 하사… 아니, 안드레이가 부상을 당해 입원해 있으면 고아원이나 아카데미에 대신 면회를 가고.”

“아…….”

“쉽지 않은 삶이었을 겁니다. 유일한 혈육은 1년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하고 편지도 어떨 때는 회신이 안 오고. 아마 뭘 하는지는 짐작을 했을 겁니다.”

알렉스는 살짝 슬픈 감정을 눈에 머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같은 라이플맨들은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과의 화목한 삶을, 누군가는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그럼 스워포드 씨는 어쩌다가 만난 거예요? 스틸웰 가문의 막내라면서요.”

그 말을 들은 알렉스는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안드레이가 말해 줬습니까?”

“아뇨, 그냥 추측한 거예요. 원래 파트너는 스틸웰 사장의 둘째 아들로 조율하고 있었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몇 가지 단서를 조합해서 안드레이를 좀 추궁했죠.”

“…….”

“이제는 내 사람이잖아요?”

아델라인이 당당한 눈빛으로 말하자, 알렉스가 하하 웃었다. 잠깐의 웃음이 지나간 뒤, 그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죠, 이제는 공녀님의 사람이죠. 제 부하가 아니라.”

그의 얼굴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마치 어떤 짐을 덜어 낸 듯한 얼굴이었다.

알렉스는 찻물로 입술을 적신 뒤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일에만 매진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서로 다투는 두 형제에게 질려 무작정 집을 나온 철없는 막내… 정도지요.”

“그래요?”

“애초에 자기는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건 질색이라고 하기도 했고요.”

“그렇구나…….”

잠시 스워포드의 인상을 떠올린 그녀는 그의 설명에 대조시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이야기를 머릿속 한편에 기억해 둔 아델라인은 그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수도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어요?”

아델라인의 입에서 나와 버린 그의 이름. 지금까지는 성으로 불러 오던 그였기에,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아델라인의 귀 끝은 살짝 붉어졌다.

아직 격식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나?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피어났다.

그러나 알렉스의 반응은 그녀가 예상하던 것과 달랐다.

“북부 산맥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칭 정도는 신경 안 써도 괜찮습니다.”

그는 아델라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델라인.”

화악.

갑자기 심장을 찔러 오는 듯한 그의 말에, 아델라인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당황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린 그녀는 잠시 말을 더듬었다.

“아, 아, 아데, 아델라인?”

잠시 그녀가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보이자, 머릿속에서 뭔가 떠올린 알렉스는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라인에게 다가갔다.

“왜요, 싫습니까?”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소가 얹어지자 아델라인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내저었다.

“시, 싫다는 게 아니라! 잠깐만요!”

눈을 감고 손을 휘적거리던 아델라인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얄미우리만치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다과를 입에 넣고 있는 알렉스였다. 그의 장난에 놀아난 꼴이 되어 버린 아델라인은 결국,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이…….”

분하다는 듯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노려봤지만, 그게 알렉스에게 먹힐 리는 없었다. 알렉스는 잠시 부들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봤다.

“이제 슬슬 가야 할 시간이군요. 차 잘 마셨습니다.”

알렉스는 주머니에 회중시계를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로 갈아 신었다. 그러나 아직도 얼굴의 홍조가 가라앉지 않은 아델라인은 꽉 쥔 주먹으로 그의 몸을 툭툭 때리며 그를 채근했다.

“으으… 얼른 가 버려요! 다음에는 찻값도 받아 낼 거야!”

“사람 살려― 공작가 외동딸이 애먼 장교 때린다―”

알렉스는 그녀의 주먹에 맞아 주며 엄살을 부렸다. 그렇게 몇 번 때리니 그제야 분이 풀렸는지, 아델라인은 주먹을 풀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다음에 만나는 건, 아마 황궁에서겠지요?”

그녀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별문제 없는 이상 미리 조율된 대로 진행될 겁니다. 그럼.”

알렉스는 문고리를 붙잡은 뒤, 그녀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쪽도 건강하세요, 괜히 몸살 나서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아델라인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를 배웅하자, 알렉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방문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알렉스는 그 문 옆의 벽에 기대었다.

복도의 양옆을 돌아본 알렉스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화악―

그의 손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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