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합 맞추기 (1)
알렉스가 다시 조율을 위해 오겠다며 떠나고, 아델라인은 그를 배웅하며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몸은 꽤 좋아진 건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뭐, 파트너 문제도 해결된 거네?”
“그…렇죠?”
정문까지 따라온 안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이아의 표정은 달랐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무언가를 놓친 것 같은 찜찜한 표정이었다.
“뭐 잊은 거 있어, 나이아?”
“음… 잠시만요…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때, 안드레이와 마찬가지로 연미복을 입은 집사가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그 말을 듣자, 나이아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공녀님. 공작님께 상의를 드려야…….”
나이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붙잡자, 아델라인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 거지 뭐. 안 그래?”
“만약 공작님께서 의논하던 상대가 있다면 골치 아파질 텐데요…….”
그러자 아델라인의 표정도 굳어 버렸다. 그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공작도 나름의 파트너를 구하고 있었다면…….
“상대 가문도 분명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분으로 준비하셨을 텐데…….”
“그러네…….”
아델라인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발은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일은 벌어졌으니…….
“…상대가 정해졌다고.”
“네, 그렇습니다.”
아델라인은 공작의 무심한 표정과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들고 있던 펜과 서류까지 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신중히 골랐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공작이 묻자, 아델라인이 답했다.
“알렉스 매닝햄 대위입니다.”
“매닝햄 대위라…….”
공작은 눈을 감고 잠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는 아델라인의 표정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대체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길래 저렇게 생각을 오래 하는 걸까. 대체 누구기에.
“원래는 스틸웰 사장의 둘째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면 자유당 쪽 인물이라든지.”
공작의 입에서 두어 인물의 신상이 나왔지만, 아델라인은 그 이름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그들이 지체 높은 가문의 영식들이라는 것뿐이었다.
“뭐, 괜찮겠지. 꽤나 좋은 선택이었다.”
“네, 네?”
뜻밖의 긍정적인 반응에, 아델라인은 공작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공작은 이미 다시 펜을 집어 들고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다.
“네 뜻대로 하거라. 스틸웰 사장에게는 내가 양해를 구하지. 집사장과 조율하거라.”
그러자 아델라인은 공작에게 물었다.
“스틸웰 사장의 둘째 아들이라면…….”
“꽤나 뛰어난 인물이지. 수도 동부의 공장들을 개선하고 그에,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자이다. 비록 저번 무도회에는 둘째 대신 막내가 나왔지만, 사교계의 유명 인사기도 하고.”
“근데 왜 제 의견을…….”
“네가 선택한 사람이지 않느냐.”
생각했던 것과 다른 답. 공작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냐는 듯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가서 집사장과 의논하도록. 네가 따낸 결실이 헛되지 않게 하거라.”
그러자 아델라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이 방에서 나가자, 공작은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그게 우연과 행운으로 얻은 결실일지라도.”
공작이 집어 든 종이봉투에는 육군본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 * *
“결실…이라. 무슨 의미일까.”
아델라인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고민을 이어 나갔다. 공작이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아, 스틸웰 사장이 누구였지?”
나이아는 그녀의 물음에, 정보를 정리한 뒤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좋네. 말해 봐.”
“가장 영향력 있는 평민 사업가입니다.”
“…그래?”
“수도 동부의 공장지대 5할 이상이 스틸웰 가문의 것입니다.”
“그렇…구나. 근데 그 사람의 둘째 아들보다 매닝햄 대위가 더 가치 있다고? 왜?”
그러자 나이아는 어깨를 으쓱인 뒤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아델라인도 따라서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안드레이는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 알고 있구나.”
“이건… 음, 그러니까…….”
안드레이가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잠시 얼버무릴 때, 그사이 정보를 조합하는 데 성공한 아델라인이 물었다.
“스틸웰 사장의 막내아들이 스워포드 상병인 거야?”
“…….”
안드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마디도 안 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답은 나온 상황이었다.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맞나 보네.”
그러자 나이아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왜요? 스틸웰 사장이 사관학교 학비를 대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테고. 별 달기 전까지 기병대로 진급해도 스틸웰 사장에게는 푼돈도 아닐 텐데…….”
아델라인도 비슷한 의문을 가지며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고개를 푹, 떨구며 작게 말했다.
“그건… 제가 말하기는 힘듭니다.”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완고한 거부가 담겨 있었다.
“가정사나 개인사?”
“그에 가깝습니다.”
“…알겠어. 더 이상 묻지는 않을게. 우리도 더 말하지 말자.”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이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나이아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아는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나머지 일은 안드레이에게 도움을 받을게.”
“감사…합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듯한 나이아가 터벅터벅, 서재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안드레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부잣집 도련님으론 보이지 않을 테니. 많이 충격받았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안드레이를 향해 아델라인이 물었다.
“말해 주기는 힘들겠지?”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라인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이미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이상, 그녀의 눈에 서류가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그러면, 매닝햄 대위가 감추고 있는 사실도 있는 거야?”
“…….”
“말해 봐. 이제는 내 사람이니.”
안드레이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갈등이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뒤, 생각을 정리한 안드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말씀드릴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제가 직장을 옮겨도, 마찬가지로 공녀님의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델라인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다. 비록 자신은 지금 아델라인을 섬기고 있지만, 그 이전의 상관이었던 알렉스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 수는 없다는 뜻이리라.
“…미안해. 방금 이야기는 잊어 줘.”
“감사합니다. 그럼… 이 안건부터.”
아델라인은 다시 안드레이가 건네는 서류를 받으며 업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렉스 매닝햄. 그는 누구일까.
* * *
다음 날, 알렉스는 서류 가방과 함께 저택을 방문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가 서재로 오자, 옆에 있던 나이아를 잠시 물린 뒤 알렉스와 의논을 시작했다.
“일단 이 행사들을 참여하려고 해요. 황실에서 진행하는 행사들이죠.”
그러자 알렉스는 일정표를 읽어 내렸다. 수첩을 꺼낸 그는 빠르게 무언가를 적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경마 행사 같은 경우에는 야외 행사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그 정도는.”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일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아델라인은 그를 바라봤다.
어제 안드레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나이아를 물리기까지 했다. 이 소설 속 엑스트라가 이면에는 뭘 품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러자 나이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오늘도 무용 수업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벌써?”
“네.”
“아, 제발.”
아델라인이 가볍게 투정을 부리자, 나이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수업은 들어야죠. 그리고 선생님께서…….”
나이아는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은 뒤, 아델라인의 옆에 있던 알렉스에게 말했다.
“대위님도 잠시 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자 알렉스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콱.
아델라인의 뒷굽이 또 무언가를 찍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그녀의 손과 허리를 잡고 있던 알렉스의 손에 잠깐이지만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움찔.
“…….”
“미안…해요.”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봤지만, 그녀는 허겁지겁 발을 치우며 시선을 회피했다. 몇 번이고 밟아 버린 그의 구두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대신해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그 참사를 보며, 무용 선생은 이마를 잠시 짚은 뒤 아델라인을 봤다.
“…공녀님께서는 많이… 뭐랄까…….”
잠시 어휘를 고민하던 선생이 이어 말했다.
“상대의 리드를 따라가기 힘들어하시는군요. 물론 아직 첫날이라 그렇겠지만.”
“…죄송합니다.”
“배우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성함이…….”
“알렉스 매닝햄,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아, 좋아요. 매닝햄 씨, 혹시 장교나 경비대 간부이신가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음… 웬만한 장교나 간부분들은 다 사교댄스를 배우실 텐데…….”
그러자 알렉스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나 선생이 다시 알렉스에게 시선을 두기 전에, 그의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선생에게 물었다.
“동작이 조금 딱딱한 겁니까?”
그러자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빠른 학생은 그녀로서도 도움이 되었다.
“동작에 절도가 있는 건 직업적인 부분이라 이해하지만, 그래도 춤은 홀로 추시는 게 아니니까요. 하나하나 동작이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보통 책을 보면.”
“책이나 일대다 수업에서는 편의상 동작을 구분하긴 하지만… 잠시 손을 빌려주시겠어요?”
선생이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순간 손이 잡혀 버린 알렉스는 당황한 눈으로 아델라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선생의 손에 이끌려 홀을 누비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동작이 끊어지는 게 아니라, 동작을 계속 이어 나가세요. 멈추는 게 아니라 계속 움직여 가는 거예요.”
“아, 네, 네.”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알렉스는 선생의 리드를 따라 동작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때까지만 해도 딱딱하고 투박했던 그의 동작은 어느새 부드럽고 세련되게 바뀌었다.
그때, 안드레이가 쟁반을 한 손에 든 채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수업은 잘되어 가십니까.”
“아마도… 그럭저럭.”
아델라인의 시선이 계속 알렉스를 쫓는 걸 보자, 그는 쟁반을 홀 한편의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중대장… 아니, 대위님이 춤을 추시는 건 거의 처음이군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처음이라고? 장교인데?”
“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았기도 했고, 사교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신 분이시니.”
“…….”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이아의 수업이 떠올랐다.
공병. 경보병. 포병. 해외 파병.
“부사관에서 올라온 경우였군요.”
“우리 부대의 상당수가 그렇습니다. 힘들고, 명예는 없으니.”
그 말을 한 안드레이는 알렉스가 합을 맞췄던 선생과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제 오지랖이 좀 심했나 보군요. 나머지는 직접 대화를 나눠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