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7화 (17/200)

17화 휴식

황후가 알렉스의 손을 보기도 싫다는 듯 내치자, 알렉스는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손을 들어 경례하며 말했다.

“그럼, 이만. 좋은 하루 되시길.”

“…….”

황후는 태연하게 자신을 향해 경례하는 알렉스를 보고는, 얼굴을 굳힌 채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델라인은 황후가 나가는 것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 6촌 친척하고 정말 친하셨나 봐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저렇게 사납게 굴 정도면, 분명 알렉스의 부대가 저격한 황후의 6촌 친척은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겨우 간신히 따져서 6촌이었으니. 마지막 만남은 15년 전이고.”

그러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왜…….”

그러나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말을 끊었다.

“오늘 정말 잘해 주셨습니다, 공녀님. 진심으로.”

그는 제복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며 갑자기 오한이 찾아오던 아델라인의 몸에 온기가 더해졌다.

“…….”

“코트는 걸치고 가십시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상황일 테니 설명해 드리자면, 오한이 찾아올 겁니다. 몸도 멀쩡하진 않을 거고.”

“…어떻게 아셨어요?”

아델라인은 마치 자신의 상태를 꿰뚫어 보는 듯한 알렉스의 말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쓰고 있던 모자를 그녀의 머리에 씌워 주며 말했다. 그러자 모자가 앞으로 살짝 기울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모든 이들에게는 처음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델라인이 그 모자챙을 잡아 살짝 올리자, 약간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을 내려다보는 알렉스가 있었다.

역시나 잘생긴 그였지만, 지금은 외모에 대한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쩐지 그의 미소에서 묻어 나오는 씁쓸함이, 조금 전까지 달콤한 음료수를 맛보던 자신의 입가에도 맴도는 것 같았다.

“…….”

그때, 열린 문 너머로 많은 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서 잠시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본 스워포드는 방 안의 알렉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 수신호를 읽어 낸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알렉스의 얼굴에는 어느새 씁쓸함이 거둬져 있었다.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알렉스는 천천히 아델라인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방을 나섰다.

그러자 복도를 가득 메운 채, 친위대를 이끌고 휴게실을 향해 걸어오는 황태자가 보였다. 알렉스는 황태자를 바라봤고, 황태자는 알렉스를 노려봤다.

“스워포드, 현장 보존해. 밀든 하사가 지원하러 올 거야.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그러나 황태자가 노려보든 말든, 알렉스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스워포드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를 들은 황태자의 눈썹이 씰룩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대위?”

그러나 황태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스워포드는 손을 들어 경례하며 알렉스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두 사람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황태자는 주먹을 꽉 쥐더니, 알렉스에게 소리쳤다.

“당장 그 자리에 멈추도록! 현 시간부로 이 건물은 봉쇄되었다! 이건 이 제국의 황태자, 하이젠 아들러 베르크의 명령이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잠시 바라봤다. 마치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가 뭘 할지는 모르지만, 아델라인은 어느새 그를 믿고 있었다.

“부탁할게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렇게 말한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델라인은 반 박자 늦게 그를 따라갔지만, 이내 보폭을 따라잡아 알렉스의 곁에서 같이 걷게 되었다. 아델라인은 뒤를 살짝 돌아봤다.

나이아는 아델라인과 알렉스의 뒤를 잘 따르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황태자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황태자는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렸지만, 알렉스는 황태자를 잠시 노려본 뒤, 그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복도를 틀어막고 있던 병사들도 양옆으로 물러서며 자신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자, 온통 아수라장이 된 무도회장이 보였다. 바닥에 널려 있는 유리 파편, 쓰러진 테이블, 그리고…….

“이게 무슨…….”

“왜 갑자기 친위대가…….”

불이 난 무도회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가, 다시 영문도 모르고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들까지.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소란스레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사이에 녹아든 그들은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예상대로 정문 앞은 친위대 제복을 입은 병사들로 틀어막혀 있었다. 그걸 본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녀의 답을 확인한 알렉스는 제복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챙긴 뒤,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병사들에게 제지당하는 듯하던 그가 손에 든 것을 내보이며 말하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양쪽으로 물러섰다.

짧은 대화를 나눈 알렉스는 다시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죠?”

“별거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 * *

“모든 이들에게는 처음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라…….”

아델라인은 공작가로 돌아가는 마차를 탄 채,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손끝으로 알렉스가 걸쳐 준 제복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당장 마차에 구비해 두는 고급 담요가 의자 아래 보관함에 있었지만, 그걸 꺼내 덮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모를 포근함이 좋아서, 아델라인은 약간 닳은 소매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그것을 걸치고 있었다.

“…….”

아델라인에게도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사정이 있었을까. 그녀가 악녀로서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까.

그녀는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로피츠 공작을 바라봤다. 이미 공작은 아델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작이었다.

“많이 바뀌었구나.”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자세를 고쳐 앉은 뒤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말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버님?”

“…암시장에서의 일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느냐.”

“네? 아, 그 부분은…….”

그러나 공작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멈춘 뒤, 계속 말했다.

“아니다. 내일부터는 집사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거라. 네 시녀에게 도움을 받으면 어렵지는 않겠지.”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매닝햄 대위의 도움은 어떻게 받은 거지?”

“네?”

“알렉스 매닝햄 대위 말이다. 어떻게 접촉한 것이지?”

공작이 묻자, 아델라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을 조금 풀어놓기로 했다. 어차피 사용인들에게 물으면 금세 나올 정보들일 테니까.

“일주일 전 즈음 바스에서 만났고 하루 동안 별장의 공간을 일부 내어 주었습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그때 나눈 이야기는…….

“그 부분은 아직… 때가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대위가 부탁한 것인가?”

아델라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었지만 일단, 이 고비부터 넘겨야 했다. 그러자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이상 이 부분으로는 먼저 묻지 않겠다.”

어느새 마차는 저택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하인들과 하녀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자 하인들이 마차의 계단을 내리고 문을 열었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다 마차 계단을 디디기 직전, 공작은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은 네 사람들이다. 앞으로는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하거라.”

여전히 딱딱하지만, 그래도 그 말 속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공작이 내리고 난 뒤, 아델라인이 그를 따라 내리자 뒤의 마차에서 내린 나이아가 아델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저를 배려해 주셔서…….”

“아니, 괜찮아.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어. 씻는 건 다른 사람 도움받으면 되니까.”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려 저택으로 들어가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그러자 새로 들인 시녀들이 그녀를 맞았다.

“씻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한 시녀의 말과 함께, 부드러운 손길들이 아델라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알렉스의 제복 코트를 벗겼다. 아델라인은 그 시녀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내가 직접 전달할 테니, 바로 세탁을 한 뒤 내 침실에 두도록.”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녀의 지시를 받은 시녀는 알렉스의 재킷을 조심스레 개어 챙긴 뒤 방을 나섰다. 그사이 다른 시녀들은 그녀의 드레스를 벗기고 몸을 씻겼다. 따듯한 물이 몸을 타고 흘러내리자,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피로도 온수와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곧 아델라인은 얇고 가벼운 잠옷 차림이 되어 침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어느덧 익숙해진 포근한 침대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한고비… 넘긴 건가?”

황태자의 모친인 황후 세리야를 구했으니. 그래도 황태자가 자신의 목을 직접 칠 일은 없지 않을까.

그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지난 몇 시간 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알렉스가 내민 손을 내친 황후.

그리고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당황하지도 않은 채 바로 경례를 하며 인사를 건넨 알렉스.

대체 그는 누구일까.

누군데 그렇게 소설에서는 보지 못한 이야기가 많을까.

“알렉스.…….”

어느새 잠결에 빠진 그녀의 머릿속에는 흑발의 미남이 자리 잡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