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마지막 춤곡의 이름은
무도회가 열리는 오후, 아델라인은 창밖을 보며 감상을 말했다. 마차의 창문을 통해 본 거리는 마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도경비대 제복을 입은 경비 대원들이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차는 걷는 것보다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가 많네.”
“아무래도 간만의 무도회이니까요.”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아버님께서 그렇게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
저택에 돌아와 보니, 기존의 시녀들은 대부분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시녀들이 메꾸고 있었다. 거기다가 방에 걸려 있던 몇몇 액자와 소품들도 사라졌다.
결국, 유일하게 살아남은 시녀장은 새로운 시녀들을 교육하고 집기들을 새로 마련하느라 아델라인과 동행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과 동행한 사람은…….
“나 따라다니느라 힘들 텐데, 오늘까지만 조금 부탁할게.”
초면인 시녀를 데리고 무도회에 가는 건 힘들었기에, 결국 일주일간 홀로 아델라인을 수발들어야 했던 나이아가 하루만 더, 그녀를 따르게 되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나이아는 피곤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무도회에 동행하는 만큼, 시녀인 그녀도 적당한 드레스를 입고 기본적인 화장은 한 상태였다. 이 정도만으로도 평균 이상은 되겠지만, 아델라인의 앞에서는 아니었다.
“단장을 하니 더욱 미모가 돋보입니다, 공녀님.”
“에이… 뭘 그렇게 낯부끄럽게 말해. 다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 준 덕분이지.”
아델라인은 악녀기는 해도 그 외모가 특별히 서술될 만큼 미인이었다. 그녀의 머릿결은 더욱 찰랑거렸고 피부는 바스에서의 휴식과 함께 매끈해졌다. 거기에 더해진 화장은 그녀의 미모를 한층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레이크 하사… 아니, 안드레이 씨는 적응을 잘하고 있어? 분명 처음 하는 일일 텐데.”
“그 부분이 걱정되기는 했는데, 적응을 잘하는 듯합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아델라인은 로피츠 공작과 함께 앞의 마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을 안드레이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기병대는 마검, 포병대는 성검,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부사관은 주머니칼.
그때는 이해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다시 아리송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검이나 성검이 더 좋은 것 같은데.
그녀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던 시선을 다시 맞은편의 나이아에게로 옮겼다.
“얼마나 읽었어, 그건?”
어제도 읽고 있던 회고록이 똑같이 나이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회고록을 덮은 뒤, 대답했다.
“이제 절반 정도 읽었어요.”
“꽤나 양이 많나 봐?”
“자서전이 아니라 회고록이어서, 책이 꽤 밀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주의 깊게 읽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책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 남 일 같지도 않고.”
“그렇긴 하겠네.”
아델라인은 저 멀리, 점점 가까워지는 황궁 건물을 창문을 통해 바라봤다.
“오늘 무도회가 어디서 열린다고 했더라?”
“오늘은 5월 궁에서 진행될 거라 전달받았습니다.”
5월 궁. 그녀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나이아에게 물었다.
“5월 궁은 어떤 건물이야?”
그리고 나이아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 정보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5월 궁은 말 그대로 초여름인 5월부터 주로 사용하는 행사용 건물입니다. 대륙 중앙의 사막지대에서 쓰이는 구조를 채택해 자연 냉방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연 냉방?”
“네, 그래서 저도… 살짝은 기대하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나이아가 고개를 숙이자, 아델라인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에이, 무슨. 계속 이야기해 봐.”
“네, 그래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면… 냉기를 보존하기 위해 1층은 창문이 많지 않습니다. 주방 같은 시설은 별관에 집중시켰고요. 오로지 행사를 위한 건물인 셈이지요.”
“2층은?”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니, 상대적으로 창문이 많지요. 2층 같은 경우에는 무도회장보다는 휴게실과 식당, 흡연실 등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테라스들도 2층에 있고요.”
“그렇구나.”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설 속 장면과 묘사들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황후가 어디에 있었다는 것만 알아도…….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이멜다의 봄. 저는 이 곡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 황태자가 신년 무도회에서 두 번째로 여주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그때 무도회의 악단의 연주가 들리자, 황태자는 여주를 데리고 무도회장을 벗어났었다.
그 이유는… 그 곡과 함께 화재가, 그리고 참사가 벌어졌으니까. 그리고 그 곡은, 오늘 이후 황태자의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았을 테니까.
“이멜다의 봄. 혹시 그 곡이 뭔지 알아? 이름은 알겠는데 어떤 곡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이멜다의 봄이요?”
나이아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잘…….”
뭐든지 알 것 같았던 나이아마저 모른다 말하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우리 유능한 나이아라도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뭐, 기회가 되면 들을 수 있겠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마차는 황궁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다른 마차들은 한 번씩 검문을 거쳐 갔지만, 공작가의 마차는 그런 번거로운 과정 없이 순식간에 정문을 지났다. 그러자 곳곳에 배치되어 화려한 제복을 입고 정렬한 친위대의 모습이 보였다.
“친위대 제복이 화려하네요.”
“그러게.”
나이아의 감상에 맞장구를 친 아델라인은 그들의 모양새를 살폈다. 병사들의 자세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 병사들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경직된 걸음걸이를 하며 요란스레 움직였다.
“저렇게 발로 바닥을 내리찍듯 땅을 디디며 움직이면 몸이 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실제로 친위대 소속의 병사들이 허리 통증을 많이 호소한다고 하더라고요. 근속 연수도 상대적으로 짧고요.”
“그렇구나.”
분명 그들이 선보이는 절도 있는 동작이나 자세는 수많은 훈련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델라인은 순간, 생뚱맞은 감상을 내뱉었다.
“뭔가… 장난감 병정 같네.”
그러자 나이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시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은 마차 안에서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녀님. 황태자님께서는 자신의 친위대를… 소중히 하시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나이아의 입꼬리도 살짝 씰룩거렸기에, 아델라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느새 공작가의 두 마차가 멈췄다. 각각의 마차에서 마부가 계단을 내렸고 두 쌍의 사람들이 그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고맙네, 안드레이.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약간 숙여 답하는 안드레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로피츠 공작은 아델라인과 나이아를 향해 다가왔다.
“준비는 되었느냐.”
“네.”
“가자.”
아델라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하자, 그는 발걸음을 돌려 연회장 안으로 걸어갔다. 그 옆을 아델라인이 따랐고, 그 뒤를 나이아와 안드레이가 따라 들어갔다.
안은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소설에서 묘사하던 무도회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로피츠 공작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그때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사교계에 복귀하는 것이니, 튀는 행동은 자제하도록.”
“알겠습니다.”
당부인지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투로 말을 건넨 공작은, 이내 다른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드레이도 공작을 따라나서자, 그제야 그녀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그때.
“하하, 이럴 때도 가끔 있어야죠. 맨날 말 안 듣는 막내라고 핀잔 듣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포착됐다. 그쪽으로 돌아보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스워포…….”
고작 몇 음절을, 그것도 그렇게 크게 말한 것도 아니건만. 어느새 스워포드는 아델라인을 굳은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오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깔끔한 정장, 손에 들린 고급 샴페인, 세련된 동작.
얼마 전 아스테리오스 소탕 작전에서 봤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보다도 더 이 무도회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나이아.”
“네?”
“저기…….”
아델라인은 손을 들어 스워포드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지만,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누구를…….”
나이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델라인은 손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봤나 봐.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아마도…….”
아델라인은 말꼬리를 흐리며 음료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목을 축이면서 생각을 해야지, 싶었다.
아델라인이 손가락으로 딸기가 동동 띄워진 음료가 담긴 유리 항아리를 가리키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은 와인 잔과 비슷하게 생긴 유리잔에 국자로 음료를 떠서 그녀에게 건넸다.
음료를 한 모금 머금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감쌌다.
“맛이 좋네.”
칭찬과 함께 다른 손을 내밀자, 시종은 또 다른 잔을 채워 그녀에게 건네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무도회 되시길.”
아델라인은 뒤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나이아에게 잔을 건넸다.
“자, 목마를 텐데.”
그러자 나이아는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조심스레 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잔을 들고 아델라인은 나이아와 함께 무도회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딱히 관심을 받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로서는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의도와 맞지 않게, 누군가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도회는 잘 즐기고 있나, 영애?”
자신에게 말을 건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황태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바스에서 만나고 또 만나는군. 공작께서는?”
“공작께서도 여기 오셨습니다. 지금은 다른 분들을 만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런가, 나쁘지 않군.”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그쪽의 영애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자 가만히 잔을 들고 있던 나이아는 급히 잔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손을 살짝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한 뒤, 황태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제 시녀입니다. 저 혼자 음료를 즐기는 건 약간 외로워서.”
“그렇군. 그래도 주의를 주는 게 좋을 것…….”
황태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이아를 바라보자, 아델라인도 시선을 나이아에게로 옮겼다.
이런 자리가 처음인 그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한 듯 몸이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델라인은 황태자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의 사람입니다. 황태자 전하.”
“…….”
“제 사람의 행동은 제가 판단합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나이아를 강력히 두둔하자, 황태자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조금 과했던 것 같군. 영애도, 그쪽의 시녀도 좋은 시간 보내도록.”
그는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겨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향해 돌아봤다.
“괜찮…아?”
아직 남에게 하대하는 게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아 순간 존댓말이 나올 뻔한 아델라인은 간신히 입을 통제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괘,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이아의 안색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델라인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올라가자.”
“네, 네?”
“테라스는 위에 있다면서. 한숨 돌리자고.”
아델라인은 나이아가 뭐라 말하기 전에, 가까이 있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나이아의 설명대로, 2층에는 테라스나 휴게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적절한 테라스를 가늠하고 있을 때, 뒤에서 따라오던 나이아가 급히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아델라인은 갑작스러운 나이아의 행동에 테라스를 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녀도 나이아를 따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신문을 통해 알아 뒀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복도 끝의 방에서 나오는 황후 세리야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아델라인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공녀. 꽤 오랜만이지요?”
그러자 아델라인이 고개를 들어 황후를 바라보며 의례적인 안부 인사로 답했다.
“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걱정해 준 덕분에요. 그럼.”
짧은 안부 인사 후, 황후가 수행원과 함께 중앙 계단으로 향하자, 아델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을 뺐다.
그리고 황후 세리야가 나왔던 방을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게 이렇게 쉽게 풀리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바람이나 쐬다 들어가자.”
아델라인은 한 테라스의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나이아는 얼떨결에 그녀를 따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