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휴가
이른 아침.
“저희는 먼저 탕에 들어가겠습니다.”
“어, 그래. 나도 뒤따라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 있어.”
대욕탕의 탈의실. 대원들은 각자의 세면도구를 들고 대욕탕으로 들어갔다. 여자 손님은 많지만 남자 손님은 그리 많지 않은지, 탈의실은 의외로 한적했다.
“잠시 실례.”
그때, 한 남성이 상의를 벗고 있던 알렉스의 옆으로 와 벤치에 앉았다. 남자는 옷을 벗으며 알렉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건강은 어떤가, 대위?”
“관절은 쑤시고 몸은 피곤하고.”
“평범하구만.”
알렉스는 계속해서 옷을 벗으며 상대에게 물었다.
“상부 지침은 어떱니까?”
“정보 출처가 불확실하니 개입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다. 현장의 자네를 신뢰하긴 하겠지만.”
“하긴, 그렇기는 하지요.”
“황태자와 세이드가 접선했다는 건 사실인가?”
그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으로는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우회적으로는 가능하겠지. 한번 알아보겠네.”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나도 모르지. 개입할 생각인가?”
알렉스는 잠시 캐비닛 안에 옷을 개어 넣으며 고민했다.
“분명 자네들이라면 황후를 구출하는 것도, 만일 있을 암살자들을 막는 것도 가능하겠지. 자네들은 정예 중의 정예니까.”
“…….”
“본부장도, 여단장도 자네를 믿고 있다. 판단은 현장 지휘관인 자네의 몫이다.”
그렇게 말한 그 남자는 캐비닛에 옷가지를 집어넣고 닫았다.
“먼저 가지. 필요한 게 있다면 접촉하도록.”
남자가 떠나자, 알렉스도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먼저 탕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과 마음, 둘 다 지친 부하들이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간만의 휴식을 다시 빼앗고 또다시 작전을 준비하라고 할 수 있을까.
알렉스는 몸을 씻고 탕에 몸을 담갔다. 몸 곳곳이 쑤셔 오던 게 뜨듯한 욕탕 물을 만나 한결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몸이 노곤해지는 게, 기분이 좋았다. 서류 작업이고 훈련이고 당직 근무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되자, 머릿속에서 여러 사소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욕 끝나고는 뭘 하며 쉴까, 밥은 뭘 먹을까, 등등.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중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델라인 폰 로피츠.
도대체 뭐가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엇을 근거로 황후가 암살당할 거라 말한 거지? 아니, 그 전에.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거였나?
그의 생각은 어느새 점점 아델라인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몸을 눕혀 수면 위로 얼굴만 내놓은 채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귀가 물에 잠기고, 눈이 눈꺼풀에 덮이자 그는 더더욱 사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뭐가 다른 걸까. 아니, 뭐가 달라진 걸까.
“…레이크 하사.”
“왜 그러십니까?”
알렉스의 부름에, 옆에서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있던 안드레이가 몸을 이끌고 그의 옆에 다가와 물었다.
“저번 암시장 작전에서. 무슨 특이사항 있었나?”
그러자 안드레이는 잠시 고민한 뒤, 그에게 답했다.
“제게 물으셔도 제가 더 아는 게 있겠습니까. 이미 브리핑, 디브리핑까지 다 마친 임무인데.”
“그런가…….”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대체 무슨 감정일까. 왜 자꾸 생각이 날까.
하아.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욕탕의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일지. 알렉스의 얼굴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 * *
아델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 일찍 나가, 오전 내내 목욕을 즐기다 온 그들은 단체로 별장의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당연하게도 알렉스가 끼어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입가심을 위해 마시던 찻잔을 잠시 내려놓고,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나이아에게 말했다.
“매닝햄 대위에게 차 한잔 같이하자고 전해 줘.”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아델라인은 다시 쪽지를 읽어 봤다.
풀을 쳐 뱀을 쫓아낸다. 일단 세이드를 제 발로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했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다. 근데 어떻게. 어떻게 쫓아낸 걸까.
똑똑.
도저히 잡히지 않는 실마리를 더듬고 있던 아델라인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너머에 있을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들어와요.”
아델라인이 말하자, 나이아와 함께 알렉스가 들어왔다.
“저는 차를 새로 내오겠습니다. 편히 이야기 나누시길.”
그렇게 나이아가 다시 방을 나서자, 방 안에는 아델라인과 알렉스만이 남아 있었다.
“세이드가 떠났네요.”
끄덕.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제게 세이드를 붙잡아 두라고 했는데……. 가 버렸네요.”
“그렇지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하며, 그는 아델라인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고작 하루였다.
하루 만에 알렉스는 자신에게 세이드를 붙잡아 두라고 했다가, 정작 그가 떠나니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 나이아가 새로운 차와 찻잔, 그리고 다과가 담긴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과가 반쯤 사라진 접시는 새로운 다과가 담긴 접시가 대체했고, 알렉스의 앞에는 새 찻잔이 놓였다.
나이아가 당장 할 일을 마치고 아델라인의 옆에 서서 기다리자, 알렉스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그러면서 나이아를 바라보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말했다.
“나이아는 제 시녀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압니다. 공녀님께서 보신 것보다 더 오래 본 사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겁니다.”
“…….”
“때로는, 듣지 않는 게 더 안전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 말을 한 알렉스는 눈을 아래로 살짝 깔며 찻잔을 들어 음미했다.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그의 눈빛이 찻잔 너머의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빛을 본 아델라인은 할 수 없이 나이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이아. 잠시 주방에 가 줄 수 있어? 오늘은 소고기도 좋지만, 닭고기 요리가 좋을 것 같은데.”
“요리사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녀의 요청에 답하며, 나이아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킨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묻고 싶은 게 많아서요. 낮에는 세이드를 붙잡아 두라고 했다가, 밤에는 그를 쫓아냈으니 안심하고 자라. 어느 쪽이 본심이었는지부터.”
“아. 그거부터.”
알렉스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그녀에게 말했다.
“아군을 속여라. 그러면 적군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
“간단한 원리이고, 적용하기는 더더욱 쉽지요. 저희가 하던 일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가시면, 공작가의 전속 마법사를 이용해 한번 모든 공간과 물품을 살펴보십시오. 특히, 나이아의 물품이나 그 아이가 머무르는 공간에 대해서는 철저히 부탁드립니다.”
알렉스의 말에, 그녀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정리해 나갔다. 그때,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세이드가 여주인공의 숙소에 도청 마법을 설치했다가, 그녀의 뛰어난 직감에 들키고 마는 장면.
“설마…….”
아델라인은 놀라서 입을 열려다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 모습이 웃기다고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지금은 다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제야 입에서 손을 뗀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진짜요?”
알렉스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를 향해 말했다.
“계속해 주세요.”
그녀의 요구에, 알렉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처음에 드렸던 제안. 세이드를 잡아 두라는 제안은 단지 첫 번째 포석이었을 뿐입니다.”
“무엇을 위한 포석이었죠?”
“공작가에 숨어든 세이드를 제 발로 나가게 하기 위한 포석.”
알렉스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세이드, 신출귀몰하지요. 무예도 마법도 그리고…….”
톡톡. 알렉스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머리도 뛰어나지요. 그렇기에 애초에 잡아 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잡아 둔다고 잡을 수 있었으면 진작에 잡았지.”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그를 응시했다.
“…일단 설명을 계속 들을게요.”
그녀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다음에는 라이플맨들을 집합시켜 마치 어떤 정보를 전달하는 흉내를 냈고, 결정적으로… 레이크 하사를 곁에 두게 권함으로써 세이드의 위험 부담을 높였지요.”
“레이크 하사가 세이드에게 위협이 되었던 건가요?”
“그 자체로도 훌륭한 경호원이자 참모이겠지만, 레이크 하사로 하여금 계속 자신을 주시하게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준 셈이니까요. 세이드로서는 위험 부담을 지기 싫었겠지요.”
“아하.”
알렉스의 설명을 듣자, 갑자기 이해가 빨라졌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그는 완전히 제 뜻을 이뤄 낸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감탄하고 있을 때, 알렉스가 차로 입술을 축인 뒤 말했다.
“그나저나 말입니다. 바스라는 도시는 꽤 넓고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라면요. 근데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고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어떻게, 황태자가 저와 공녀님이 있는 곳을 정확히, 찾아왔는지.”
그에 아델라인의 눈이 커졌다.
“지, 지금 뭐라고…….”
“설마, ‘우연히’ 같은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황후를 대상으로 하는 암살 사건이 있을 거라고 경고까지 하셨으면서.”
“…….”
“여기는 소설 속이 아닙니다, 로피츠 공녀.”
알렉스의 눈빛에서, 아델라인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더욱 머릿속이 혼탁해졌다.
소설 속의 황태자는 여느 소설의 주인공이 갖춰야 할 덕목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근면 성실하고 선하며, 때로는 악인을 단호하게 쳐낼 줄 아는 인물. 그러나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상처를 여주인공이 치유해 주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물론 아델라인 같은 악역들이 나타나 위기로 몰아넣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뤄 내는 이야기.
‘황태자 관찰일기’라는 소설은 그런 달달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 소설 속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에서 단지 비호감 엑스트라로 그려졌던 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황후의 암살이 이뤄진다면.”
알렉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 뒤에는 황태자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담담한 목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을 깨부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