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귀가 2개인 이유
알렉스가 떠나자, 황태자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매닝햄 대위가 아직도 영애를 괴롭히나?”
“아…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전하.”
“다행이군. 만약 그가 불편하게 한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도록. 조처해 주지.”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말. 그러나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 저 육군본부장의 사냥개에게 영애가 물릴까 봐 걱정했을 뿐이다.”
육군본부장의 사냥개?
아델라인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황태자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영애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 군 내부의 이야기니까.”
당연하지.
그 내용은 소설에서 안 나왔다고! 라고 속으로 소리치려던 찰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내용이 떠올랐다.
처음에 황태자는 여주를 만났을 때 상당히 냉랭한 태도를 취했었다.
소설 속 묘사로는 전쟁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었지. 황태자의 친위대만 전선에 남겨 놓고 후퇴하는 바람에 수많은 가신과 부하들을 잃었다고. 그 전쟁이 시작되는 때가… 지금 시점으로는 1년 뒤, 소설 시작 시점으로는 1년 전이었다.
아델라인은 잠시 소설의 내용을 떠올린 뒤, 황태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좀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나? 다른 영애들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아닌 척해도 재미없어하던데.”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은 뒤,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이번 일도 그렇고. 조금 더 육군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자 황태자는 신기하다는 듯 아델라인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지. 길거리에서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까. 마차를 준비하도록.”
황태자가 제 곁을 지키던 한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곧 그 남자가 어딘가로 가더니, 마차 한 대를 끌고 나타났다. 후계 서열 1위인 황태자가 탈 법한 마차라고 하기에는 약간 수수한 마차였다.
다른 수행원이 마차의 문을 열자, 황태자는 아델라인의 손을 잡아 가볍게 마차로 이끌었다.
“먼저 타도록.”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정도야.”
그러나 마차에 타자, 내부의 화려한 장식이며 구비된 비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수한 외관과 다르게 안에 들어찬 소품들은 얼마 전까지 소시민에 불과했던 자신에게는 생소하게만 다가왔다.
그녀의 반대편에 앉은 황태자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겉과 다르게 내부는… 꽤나 훌륭하네요.”
“허름한 마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으니. 그리고 이런 마차가 서민들에게는 더 좋게 보이니까. 귀찮지만.”
황태자는 한숨을 쉬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돈만 많은 평민들이 주제넘게 의석을 차지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눈치 볼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 영애?”
“…그렇지요.”
어딘가 살짝 이질적인 황태자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황태자는 내가 아는 황태자가 맞을까?
설마 알렉스처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마차는 한 찻집 앞에 멈춰 섰다.
“종종 찾는 곳이다. 믿고 마실 만한 곳이니 영애의 입에도 맞겠지.”
그렇게 말하며 먼저 마차에서 내린 황태자는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이게 예법에도 맞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그가 끌고 온 마차처럼 말이다.
“감사합니다.”
아델라인은 천천히 황태자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뒤 바로 손을 놓았다. 그러자 황태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이쪽으로.”
황태자가 안내한 자리에 앉자, 곧이어 카페오레와 함께 다과가 나왔다.
“차도 좋지만, 커피도 나쁘지 않지. 혹시 커피를 싫어한다면 차를.”
“아, 아닙니다. 저도 커피를 좋아합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황태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육군에 대해서 알아 둬야겠다고 했었지.”
“네.”
소설 내용에서 나온 부분들은 어떻게든 알 수 있지만, 안 나온 부분은 직접 이렇게 물어봐야 했다. 특히나 그게 황태자같이 소설 속 주요 인물에 관한 정보라면.
“육군이라. 육군이라… 아무래도 가장 먼저 육군의 수장인 본부장, 리안 필즈먼 대장부터 이야기해야겠지.”
그렇게, 황태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
이야기가 끝나고 아델라인이 떠난 후.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세이드는 황태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황태자는 거의 다 빈 잔을 옆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영애가 계획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던데.”
“하지만 알렉스 매닝햄 대위가 직접 그녀를 찾아왔고, 그 사이에서 정보가 전달되었습니다.”
“알렉스 매닝햄에게 그 정보가 갔다고.”
황태자는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알렉스의 얼굴이 망막에 새겨진 듯 떠나가지 않았다.
“…어떤 반응이었지?”
“들은 바로는 협력할 생각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황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계획대로 진행해도 되겠군. 안 그런가?”
“저희야 대금만 제대로 지불하신다면야.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추가금이 필요하겠지요.”
“…쯧. 이러긴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의뢰를 했는데.”
“저도 먹여 살릴 식솔이 있다 보니 말입니다, 전하. 그리고 대비하고 있었다지만, 이번에… 꽤나 험하게 당하기도 했고요.”
그러자 다시 한번 혀를 찬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만 잘해 주면, 섭섭지 않게 얹어 주지. 조건은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요.”
세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제 마부로 돌아갈 시간이라.”
그가 그리 말하자, 황태자도 끄덕였다.
“이번 일은 가장 중요하다. 그 점을 기억하고 있도록.”
“아무렴. 다시 제국의 기틀을 세우실 분이신데. 최선을 다하지요.”
세이드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황태자는 눈을 감았다.
그래.
자신은 황태자였다.
이 제국을 이어받을, 그리고 다시 일으킬 황태자.
고작 평민 장교 하나에게 무시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볼일은 다 봤다. 움직이지.”
“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 * *
“도착했습니다, 공녀님.”
“고마워요.”
마차가 별장 앞에 도착하자, 아델라인은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도착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 주며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이아는?”
“별장의 점검을 마치고 집기들을 들이는 중입니다. 부를까요?”
“아니, 됐어. 내가 갈게. 어디 있어?”
“지금은 1층의 식당에서 집기를 계수하는 중입니다.”
“알겠어. 하던 일 마저 해.”
하인에게 나이아의 위치를 전해 들은 그녀는 천천히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는 사복을 입은 알렉스의 부하들이 사용인들을 데리고 지시를 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쪽이 사각지대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
“아, 네. 알겠습니다.”
“이쪽은 출입구를 봉쇄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어차피 사용 빈도도 그렇게 높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이건 조금 더 보수를 해야 하지 싶은데. 상병! 자네가 이쪽 문 한번 점검해.”
“알겠습니다!”
쉬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람들이,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그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살펴보며 식당으로 향했다.
“은촛대 5개, 은식기 30세트. 기입해.”
“기입했어요.”
“다음은 다기 세트. 동방에서 온 거네.”
“5인 세트가 4개 있어요. 확인해 보세요.”
나이아가 목록을 확인하며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안드레이가 상자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안에 다 있어. 이건 그대로 놓으면 될 것 같아.”
“진짜예요? 대충 살펴보시는 것 같은데.”
“대충 살펴보기는. 이런 거 다뤄 본 게 한두 번인가.”
분명 둘이서 일하는 건 처음일 텐데도 호흡이 척척 맞는 모습을 보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 모습만 보면 몇 년 동안 같이 호흡을 맞춰 일하던 동료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모퉁이에서 두 남매가 일하는 걸 살펴보던 아델라인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비켜 주시지요.”
“아, 네.”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난 아델라인을 지나친 건, 큼지막한 상자를 양팔로 들고 들어가는 알렉스였다. 그 큼직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알렉스는 이내 뒤로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아, 오셨습니까. 좀 있으면 스워포드 그놈도 오겠네.”
“…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알렉스가 묻자, 아델라인은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나저나 지금 뭐 하시는 건지 물어도?”
“일을 돕는 겁니다.”
“손님으로 초대했는데 일을… 하는 건가요?”
“나이아가 혼자서 돌보기에는 많은 양이니, 그냥 돕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여러 일도 있어서 목욕탕 가기에도 그른 것 같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더 물어볼 것이 있냐는 눈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거기에 반응해 알렉스를 마주 본 아델라인은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러면, 차 한잔 같이하실래요?”
“황태자와 이야기를 하며 들은 게 좀 있으십니까.”
그는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물었다.
“상류층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고 제게 물으시려는 거면, 그냥 그게 맞다고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제가 말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알렉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이런 경험이 꽤나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알아야 했다.
분명 소설 속의 선역이자 남자주인공인 황태자에게서 왜 불안하고 찝찝한 느낌이 드는지.
그리고…….
알렉스 매닝햄.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이 알 수 없는 사람이 누군지.
“한쪽 말만 들으면 불공평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자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알렉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바로 평정을 되찾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답을 기다렸다. 결국, 그는…….
“좋습니다. 차 한잔 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