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무슨 수작질이야
“아버님, 시녀를 한 명 새로 들이고 싶습니다.”
“음. 시녀들이 무슨 실수를 했느냐.”
“아닙니다. 다만 제가 품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공작은 그녀를 바라보며 순간 당황한 눈빛을 내비쳤다.
“…혹시 그쪽 취향이었느냐.”
“아닙니다, 아버님.”
아델라인은 며칠 전, 몰래 빼둔 이력서를 공작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공작은 옅은 안도의 숨을 내뱉곤 잠시 그 서류를 읽어 본 후 입을 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 꽤 두각을 드러내던 평민 여자 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그래서, 이 여자를 시녀로 들이고 싶다 이거냐?”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공작은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 있는 시녀들은 우리 가문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문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네 사람이지. 새로운 사람이 끼어들기 쉽지 않을 텐데.”
그들을 설득할 만한 무언가를 생각해 둔 것이 있느냐? 라고 묻는 듯한 공작의 눈빛이 아델라인에게 닿자, 그녀는 연이어 공작에게 말했다.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야 하니,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면 더욱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흠. 나쁘지 않은 방법이구나. 그런데 그렇다면 굳이 이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그냥 하인들을 잠시 시녀로 쓰다가 다시 하녀로 내리면 될 것을.”
공작이 그렇게 말하자 아델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얼굴이 함께 비쳐야 훨씬 더 효과가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 허리를 숙여 공작의 귀에 속삭였다.
“이 사람은, 라이플여단에 소속되어 있던 레이크 하사의 여동생입니다.”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말을 듣고 서신을 보내 나이아 레이크에 관한 정보를 좀 더 얻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로피츠 공작가의 외동딸이 요청하자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이아 레이크에게는 유일한 가족인 안드레이 레이크라는 이름의 오빠가 있었다.
심지어 조금 더 발품을 팔아 양지의 정보 길드에 의뢰를 넣으니 같은 이름의 부사관이 육군 병원에서 의병 전역 진단을 받았고, 얼마 전 월말에 전역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유일한 가족이지요.”
“흠.”
그 정보를 들은 공작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일개 부사관이면 몰라도 그 상관인 알렉스 매닝햄 대위는 이야기가 다를 텐데.”
아델라인은 공작의 입에서 나온 알렉스의 이름에 놀라면서도 그 기색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이자를 이용해 자신을 휘두르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그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지.”
“아군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잘 이야기를 한다면.”
“흠…….”
아델라인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안드레이 레이크라는 자는 자신이 어쩌다가 다치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 남은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할 테니. 그러니 나이아 레이크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일 겁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공작은 그 이력서를 끌어당겼다.
“꽤나 머리를 썼구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네 어미와 달리 생각해 둔 게 있었구나.”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연락을 넣겠다. 대신, 뜻대로 안 되면 곤란해지는 건 알아 두도록.”
공작의 허락에 아델라인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순간이었다.
* * *
“…….”
“…….”
두 남자는 말 없이 서로의 술잔을 부딪친 뒤 잔을 기울였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의 주점은 활기로 가득 찼지만, 그들의 테이블만은 침울했다.
“너 말 안 했었냐.”
“어떻게 말합니까, 그걸. 분명 저번 파병처럼 울고불고할 텐데. 그냥 훈련하다 저 혼자 다친 거로 했습니다.”
안드레이는 알렉스의 잔에 럼을 따라 주며 말했다.
“시이발…….”
그는 머리를 감쌌다.
평민 여자로 일자리를 찾는 게 힘들다는 건 알지만……. 그래서 아무 자리나 우선 얻어 보려 인력 사무소에 이력서를 넣은 것도 알지만…….
“좀 미루는 건 안 되겠지?”
“공작가에서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오라고 했다고 그러던데요…….”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너무 침울해 보였던 안드레이는 질문을 던져 화제를 바꿨다.
“요즘 육본 분위기는 어때요?”
“나도 모르겠지만 여간 살벌한 게 아닌 것 같아. 황궁 경비만 하라고 창설한 친위대가 자꾸 선을 넘어서 병참까지 건드리려 하잖아. 계급체계도 간섭하려 하고 인사도 간섭하려 하고.”
“그건… 심각하군요.”
근 몇 달간 황궁에 주둔하며 사람들이 막연히 ‘충성스럽고 강력한 황실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친위대의 실상을 제대로 깨달은 그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들의 감상평은 딱 하나였다.
무능력한 병신 새끼들.
그런 무능력자들이 육군성의 군사 행정을 넘어 주제넘게 육군본부의 군령권까지 간섭하려 드니, 육군본부 사령관의 직속 병력인 그들의 시선으로는 아니꼽다 못해 뭣 같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무릎은 좀 어떠십니까.”
“뛸 일이 없으니 덜 아프기는 하더라.”
“조심하십쇼, 그거 훅 무너지는 거 한순간입니다.”
“나도 알아, 인마.”
그는 마지막으로 잔을 비운 뒤 안드레이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나가자. 나이아가 걱정하겠다.”
“그러죠, 뭐.”
안드레이도 따라서 일어섰다. 그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영 불편한 건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알렉스는 먼저 나서서 계산한 뒤, 안드레이와 함께 주점을 나왔다.
“연금 다음 달에 나오냐?”
“네. 한 달은 저축해 놓은 거로 지내야죠 뭐. 나름 모아 온 돈도 있고. 나이아 졸업시키고 나니 꽤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럼 다행이고.”
이제는 완전히 여름이라는 것을 나타내듯, 수도의 밤은 살짝 덥기까지 했다.
알렉스는 안드레이의 집 앞까지 동행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몸 추스르고 푹 쉬어.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감사합니다.”
안드레이를 배웅하며 돌아서려던 알렉스 뒤에서, 안드레이 아니, 레이크 하사의 경례 소리가 들렸다.
“충성!”
이제는 다시 하지 못할 경례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알렉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돌아 경례했다.
“충성.”
안드레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던 그는 경례한 뒤 바로 뒤돌아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이 지금 이렇게 실수를 해서 좋은 부하를 잃었지만, 그 부하가 멋대로 이용당하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모자를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무슨 속셈인지 알아야 쓰겠습니다, 저는…….”
* * *
“안,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시녀로 새로 들어온 나이아 레이크 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생각보다 공작의 일 처리는 빨랐다.
공작은 나이아를 바로 자신의 전담 시녀로 배정했다. 다른 시녀들의 불만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공작의 입김이 가해지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아델라인이 나이아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첫인상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구나.’
다른 시녀들과 달리 화장기 하나 없는 그녀의 눈가는 거뭇했고, 얼굴에 주근깨도 조금 얹어져 있어 다른 시녀들에 비하면 덜 화려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느낄 수 있는 의욕과 성의는 다른 목적을 위해 시녀 일을 하는 이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온갖 힘든 일을 겪고 그걸 이겨 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굳은 눈빛이었다.
빙의 전, 대학 다니랴 알바하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자신이었기에 더욱 나이아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산책을 하고 싶은데, 같이 따라 나와 줄래? 저택 소개도 할 겸.”
“신입 교육은 제가 시키겠습니다. 공녀님.”
나이아의 이력서를 보고 평민이라고 무시하던 시녀가 나이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꼴에 선배라고 벌써부터 누르려는 건가.
나이아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면, 저런 방해와 간섭을 계속 직접 쳐내야 한다는 건가.
“아니야, 됐어. 나도 산책할 겸, 새로 온 사람에게 직접 소개는 해 줘야지. 다른 사람들은 하던 일 해.”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이아의 손목을 붙잡고 끌다시피 방을 나왔다. 얼마간 걷자, 꽃과 조경수로 꾸며진 정원이 나타났다.
이제 둘만 있는 자리가 되자,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내 이름 정도는 알 테니까 넘어가고. 너는 무슨 공부를 했어? 아카데미를 졸업했다고 이력서에서 봤는데.”
“아, 원래 전공은 문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수학도 재미있어서 수학 학위도 따려 했는데… 그냥 강의 몇 번 듣고 교수님 몇 번 도운 거로 끝났습니다.”
논문에 주석을 다는 일이 고작 ‘몇 번’ 도운 일로 끝나는 일이었나, 라고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나이아에게 살짝은 실례일 수 있는, 그래서 귀족 영애다운 질문을 했다.
“수학 학위는 왜 안 딴 거지? 보니까 그쪽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질문을 받은 나이아는 예상대로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정사… 때문에 문학 학위만 땄습니다.”
가정사?
아델라인은 그 ‘가정사’라는 단어에 압축된 무거운 느낌을 알아챘다.
그 가정사만 해결할 수 있다면, 나이아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 속도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정사가 뭔지 물어도 될까?”
“…….”
나이아의 표정에 갈등이 일었다. 아무리 자신의 윗사람이라고 해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정사를, 그것도 곤란한 가정사를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런 갈등을 알아챈 아델라인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포개어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내가 고용한 내 사람이야. 네가 사정이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래도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어.”
그러자 나이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 유일한 혈육인 오라비는 육군 부사관입니다. 아니… 이었습니다. 전역했으니.”
그녀는 살짝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역?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훈련을 하던 중 다리를 심하게 다쳐 군 생활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고 의병 전역을 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연금은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자신의 예상대로, 레이크 하사는 동생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업을 이어 나가기 힘들었던 건가?”
“아닙니다. 저는 지난봄에 졸업했고, 오라비의 전역은 보름도 되지 않았습니다.”
“보름도 되지 않았다라… 그러면 학업을 그만둔 다른 이유가 있었나?”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여름부터, 제 오라비가 속한 부대가 수도에 재배치되었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기뻤습니다. 오래전에 먼저 고아원을 떠나 입대한 이후, 처음으로 같이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 착각이었죠.”
“무슨 착각?”
아델라인은 나이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한번 물꼬가 트인 입에서는 줄줄 이야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일이 바쁘다며 집에는 거의 달에 한 번꼴로 왔습니다. 항상 피곤한 얼굴이었고, 아닌 척하지만 다쳤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몸이 안 좋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인 작년 11월 즈음에… 집 안 청소를 하다가 오라비의 제복이 들어 있는 가방을 열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복이 많이 상해 있었겠지.”
나이아는 속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그녀의 마음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었다고 남들이 모르는 정보까지도 나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알렉스와 그 부하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나이아라고 알 도리가 있었을까.
유일한 혈육이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며 자신의 학비를 대 줬다는 걸 알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델라인은 나이아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그러자 나이아는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리 와, 안아 줄게.”
어쩐지 나이아가 너무 측은해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아, 원래는 이렇게까지 가까이할 생각은 없었는데.
뭐, 괜찮겠지.
아델라인은 어깨가 조금씩 젖어 드는 걸 느끼며 눈을 감고 계속 나이아의 등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