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5화 (5/200)

5화 뒷조사

알렉스를 처음 대면한 후 보름이 지났을 즈음, 아델라인은 한가하면서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기억상실증을 비롯한 충격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휴양 중이었다. 그동안 모든 사교 활동은 중지되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육군본부나 경비대에서 귀찮게 하겠지.’

아델라인이 사교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했을 때, 공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었다.

아직 공작은 아델라인이 연기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해를 그녀가 일부러 조장하는 중이기도 했다.

자신이 제대로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간 아델라인은 꾸준히 책과 신문을 읽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 크게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오늘도 아침을 먹자마자 서재로 와서 배달된 신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광고, 기사, 사설 등등. 온갖 글자가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기에 빠르게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슨 정보가 있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델라인의 시선이 신문 한쪽의 기사로 향했다.

황실 주최의 무도회가 열린다는 기사.

“일단 확실한 건, 이대로 가다가는…….”

남주인 황태자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계기. 한 달 뒤에 벌어질 황실 주최 무도회에서 발생하는 화재. 그 화재로 인해 황태자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황후인 세리야가 죽는다.

소설이 진행되며 그 사고가 사실은 계획된 암살이었음이 드러나지만, 소설 자체도 지금 이 시점에서부터 2년 정도가 지나야 시작된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자신이 그 화재에서 황후 세리야를 구한다면?

남주와의 관계가 진전될 수 있지 않을까? 못해도 황태자의 눈 밖에 나서 끔찍한 최후를 맞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희망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회로는 금세 멈췄다.

“…어떻게 막지?”

암살을 미리 아는 것과 암살을 막는 건 천지 차이. 지금 자신은 그 사건을 막을 어떤 수단도 없었다.

특히 기억상실이라는 핑계로 조사를 피하며 사교 활동을 멈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때, 서재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아델라인에게 한 시종이 다가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새로 들일 사용인을 직접 뽑아 보라 하셨습니다.”

“그래?”

“네. 이번에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사용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시종은 책상에 이력서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력 사무소에서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만을 추려 보냈으니, 공녀님께서 직접 결정하시면 됩니다.”

“…알겠어.”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력서들과 가문에서 빈자리가 생긴 직책들의 목록을 양편에 두고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하녀 셋, 마부 하나, 사냥터지기 하나. 가정교사도 하나 필요하네.”

왜 공작가의 외동딸이 군사학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군사학을 담당하는 가정교사도 이번에 새로 뽑아야 했다.

그렇게 이력서를 쭉 읽어 보던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의 신상명세서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아 레이크…….”

레이크… 레이크. 계속해서 그 성을 입 안에서 굴려 보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

만약 자신의 추론이 맞다면, 처음 알렉스를 만난 날, 눈이 가려진 자신의 옆에서 계속 저격을 하던 사수의 가족 내지 친척일 것이다.

연이어 장거리 저격을 성공시키던 그 남자.

‘굿 샷. 여기 다음 라이플입니다.’

‘바람하고 거리는?’

‘380미터, 등에서 불어옵니다.’

탕.

‘잡았습니다. 감은 죽지 않으셨군요, 레이크 하사님.’

‘이제 쓸 일이 있겠냐. 저 공녀님 덕분에 다리 병신이 됐는데. 전역일도 잡혔다 야.’

‘월말입니까?’

‘어. 앞으로 뭐 먹고 살지 걱정이다. 진짜.’

탕.

총소리와 함께 아델라인은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 때문에 부상을 입고 전역한다는 그 레이크 하사.

양심이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러 왔다. 물론 자신이 아닌 빙의 전 아델라인 때문에 다친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음…….”

잠시 펜을 내려놓고 고민했다. 어쩌면 레이크라는 성씨를 공유하는 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잖아?

그 생각을 하고 이력서에 집중하자, 생각보다 이 나이아 레이크라는 사람이 꽤나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열셋부터 열여덟까지 6년을 공부하며 몇 편의 문학 논문과 작품을 내기도 했다. 수학도 잘하는지, 몇몇 수학 논문의 주석을 다는 작업에 참여했었다. 천문학 논문의 주석 작업에도, 화학 논문에도 발을 들인 경력이 쓰여 있었다.

이쯤 되면 하녀가 아니라 시녀나 가정교사로 일할 정도의 스펙인데, 지원하는 직무는 하녀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다른 이력서는 눈에 통 들어오지가 않았다. 아델라인이 하도 나이아의 신상명세서를 뚫어져라 보며 고심하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공녀님?”

“아아. 이 사람 경력이 특이해서. 학력이 엄청 특출난데 하녀에 지원했네.”

아델라인은 나이아의 이력서를 시녀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 시녀는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 줬다.

“이 사람 평민이네요. 평민 남자면 몰라도 여자가 이렇게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드물어?”

“귀족 영애들이야 물론 교양으로 공부를 하죠. 황가의 시녀로 등용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더더욱. 근데…….”

시녀는 이력서를 툭 책상 한구석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미한 가문의 일원조차도 아닌, 족보 모를 평민인데 어느 가문에서 써 주겠어요? 보니까 다른 가문의 사용인 인맥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이름 모를 시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혐오감 같은 어둡고 이상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평민과 엮이기 싫어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 감정은 아델라인 아니,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오던 한예은의 마음속 일말의 반항심을 건드렸다.

“그래?”

“그렇죠.”

아델라인은 그 이력서를 옆으로 밀어 두었다.

그리고 일부러, 남은 여섯을 고르는 동안, 홀로 동떨어진 그 이력서에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자신은 마치 나이아 레이크라는 사람에 대해 흥미를 잃은 것처럼.

그러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만약 나이아 레이크가 ‘레이크 하사’와 연결점이 있다면…….

꿩 대신 닭이라고. 알렉스 그 사람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 * *

수도, 남부 거주 구역.

“충성.”

“됐어. 뭔 충성이야 충성은, 민간인이.”

“옷 벗은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되었습니다, 군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아닌 세월보다 더 길어요.”

알렉스는 모자를 벗고 아파트의 현관문 안으로 들어왔다. 좁고 허름한 집이 그가 들어오자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제대한 지 나흘밖에 안 된 레이크 하사. 이제는 안드레이 레이크로 불리게 된 그의 모습에서는 아직 군인의 느낌이 뿜어져 나왔다.

알렉스는 안드레이에게 찻잎 통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아직 주변 정리도 안 된 사람에게 온 건지 모르겠군. 자, 여기 집들이 선물.”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드레이는 알렉스가 내민 찻잎 통을 받아 들었다. 선물을 내밀 때 그의 표정에서 나타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선물마저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다가 여기 오신 겁니까? 제복 입으신 거 보니 비번은 아니신 것 같은데.”

“보급품 때문에. 이번에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를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뭐, 당장 장마철 대비도 좀 더 해 둬야 하고.”

“하긴, 겨울 닥쳐서 겨울나기 준비하는 건 더 힘드니까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안드레이는 절뚝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 봤자 스토브 하나와 개수대 하나 달린 방 한편의 공간이었지만, 필요한 건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사이 알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졸업장이 하나 걸려 있었다.

“나이아가 졸업했네?”

“올해 초에 졸업장 받았습니다.”

졸업장과 학사모를 쓴 채 홀로 서 있는 초상화를 보며, 알렉스는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해 주지. 한 명쯤은 빼 줄 수 있었을 텐데.”

“한 명 빠지면 그 공백이 얼맙니까.”

안드레이는 찻잔 두 개와 다과를 가지고 오며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알렉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며 땅이 녹을 때.

이 말은 가을에 추수한 곡식이 떨어지고, 아직 보리를 추수할 봄이 오지 않았을 때를 의미했다.

식량이 떨어지고 겨울 동안 얼어 있던 동토가 녹자, 빈민가가 널려 있는 수도의 북부 구획은 전염병과 지반침하가 동반된 생지옥으로 변했다.

하루에 수십 채의 건물이 무너지고,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그 지옥도에 제일 먼저 질서를 가져온 건 100명도 안 되는 라이플맨들이었다.

“3시간짜리 강의여도 야전 의술 과정을 수료한 게 저하고 팩, 그리고 중대장님밖에 없었으니 자리를 비울 수 있었겠습니까.”

혹여나 자신의 동생에게 전염병이 옮을까 봐, 그리고 부족한 의료 인력이 더더욱 부족해질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는 말에, 알렉스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동료였는데.

“…어떻게. 앞으로 뭐 할지는 생각해 봤어?”

“일단은 고향으로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탄광 마을이라 뭐 없긴 한데, 그래도 생판 남밖에 없고 물가도 비싼 수도보다는 낫겠지요. 나이아도 이제 자기 앞가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그렇게 말해도, 안드레이의 눈에는 동생에 대한 염려와 미안함이 가득했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리라.

“나이아는 어디 갈 곳 있대?”

“자기가 알아서 잘 한다는데…….”

안드레이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그가 사회생활을 하며 배운 자와 안 배운 자의 차이가 현격히 드러난다는 걸 알기에, 그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생을 아카데미까지 보내며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평민 여자가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라는 약간의 회의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세상이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확실하고, 귀족과 평민의 구별도 확실하건만.

“…정 안되면 내게 말해. 윈체스터 조병창에 아는 사람 있으니까. 수학도 잘한다며.”

그의 걱정을 알아챈 알렉스는 그에게 걱정 말라는 듯 한마디 했다. 그러자 안드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야, 그래도 고아원 출신 중에 너만큼 열심히 산 놈 없다. 진짜.”

알렉스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평민, 그것도 고아로 자라 부사관이 되고 똑같이 고아인 여동생을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에 보내 졸업시켰으니.

“잘…되겠죠. 잘되겠죠, 누구 동생인데…….”

알렉스의 말에 감정이 훅 올라왔는지, 안드레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아파트 계단에서 누군가가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그들이 있는 아파트 문 앞에서 멈추더니, 열쇠로 문을 열고 벌컥 들어왔다.

안드레이와 꼭 닮은 여성. 분명 전에 봤을 때는 아직 애였는데 이제 어느샌가 커 버린 나이아가 기쁜 얼굴로 희소식을 전했다.

“오빠! 나 취직했어!”

그러자 그 방 안에 있던 둘이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보다 살짝 늦게 일어난 안드레이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는 다시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취직? 어디에?”

“인력 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로피츠 공작가에서 하녀를 뽑는대서 이력서를 보냈더니, 심지어 시녀로 수락했대!”

그러자 기쁜 표정을 짓던 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왜? 무슨 일 있나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이아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갸웃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둘은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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