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화 (1/200)

1화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난 잔에 비친 얼굴을 바라봤다.

확실히 동양계는 아닌 얼굴.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서양에 가까운 얼굴이 잔에 담긴 물의 표면에 비쳤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옆에 있는 거울을 보자 그 미인의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자 나는 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금발, 맑게 반짝이는 밝은 하늘색의 눈동자, 잡티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또렷이 보고 있었다.

“…설마.”

얼마 전 연재 중단을 선언한 로맨스 소설 속의 악녀.

“내가……?”

‘아델라인 폰 로피츠’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매닝햄 대위는 악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Rifleman, Take Aim!! Fire!!”

그와 같은 진녹색 제복을 입은 병사들은 총구를 눈앞의 기사들에게 겨눴다. 이내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뭐야… 주인공이나 보여 주지. 주인공도 안 나오는 전투 신을 보여 주고 있어…….”

대한민국의 흔한 대학생 중 한 명, 간호학과에 재학 중인 한예은은 스크롤을 휙휙 내리며 중얼거렸다. 교양수업 교수는 강의 중 다른 길로 새서 몇 번이고 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고 있었기에, 그녀는 마음 놓고 몇 번이고 읽은 이 소설의 끝 아닌 끝을 다시 마주했다.

나름 인기를 끌고 있는 흔한 로맨스 소설, ‘황태자님 관찰일기’ 초반부터 나오는, 그렇다고 호감이 가는 것도 완전한 악역도 아닌 애매한 캐릭터인 ‘알렉스 매닝햄’ 대위.

다른 장교들과 다르게 육군의 붉은 제복 대신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진녹색의 낡은 제복을 입고 다니는 그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게으름을 피워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모두를 몇 번이나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또 여주인공이 사건의 조짐을 눈치채고 그에게 말을 해도 무시해 대는 무능하고 게으른 장교.

독자들은 그가 나타날 때마다 ‘사이다!’를 외치며 참교육을 원했지만, 작품 속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지경이 되도록 매닝햄은 어떤 형태의 참교육도 받지 않았다.

일이 터질 때마다 그냥 3개월 감봉, 1개월 정직 등으로 지나가고 그마저도 주인공에 의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로 금세 징계가 풀리며 독자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닝햄을 제외한 다른 악역들을 상대로 할 때는 풍부하고 시원하게 사이다를 공급해 주는 스토리 흐름과 꽤 훌륭하고 참신한 근대 기반의 소설 배경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독자를 끌고 왔건만…….

- 와… 매닝햄은 결국 이렇게 죽네요. 죽더라도 사이다는 주고 가지.

- 매닝햄 묘사에만 몇 화를 들이붓는 겁니까? 답답해서 하차합니다.

- 매닝햄 드디어 죽었네. 주인공 이름 까먹겠다! 다음 화!

매닝햄은 결국 황궁의 한구석에서 부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도 같이 죽어 버린 채로 몇 주째 다음 화가 나오지 않고 있는 이 소설의 끝을 지키고 있었다.

고작 엑스트라, 잘 쳐줘도 민폐 조연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렬하고 자세한 전투 신의 묘사는 독자들의 쌓여 있던 반감을 터뜨려 버렸다.

이 마지막 화의 댓글은 999개. 보통 100개 정도 달리던 다른 화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댓글이었다.

예은은 댓글창으로 들어가,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 결국, 매닝햄은 끝까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네요. 이 소설에서 군더더기 같은 존재인 듯. 차라리 참교육 당한 아델라인이 더 도움이 된 듯.

그녀가 엔터 키를 누르자, 댓글 개수가 네 자릿수가 되었다. 그녀는 1,000번째 댓글을 채웠다는 알 수 없는 사소한 만족감을 느끼며 노트북을 덮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들 과제 잊지 말고 꼭 다음 시간까지 해 오세요.”

예은은 예상치 못한 교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제라니.

분명 과제 따위는 없다는 꿀강의랬는데.

예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학교에 와서도 아싸를 벗어나지 못한 그녀였다. 과제가 뭐였는지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그녀는 부지런히 교수의 뒤를 따라갔다.

“교, 교수님! 잠시만…….”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발이 꼬였고.

“어?”

분명 바닥에 있어야 할 계단이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퍽.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주변에서 꺄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예은은 자신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제외한 그 어떤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아…….”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흐릿해졌다. 예은은 갑자기 몰려오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좋아. 좋아. 좋아. 상황부터 정리하자.”

예은 아니, 이제는 아델라인 폰 로피츠가 된 그녀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은 아델라인 폰 로피츠, 이 소설에서 가장 죄질이 나쁜 악녀의 몸에 빙의했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본 벽걸이 달력을 참고했을 때, 지금은 소설이 시작하는, 그러니까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황태자 ‘하이젠 아들러 베르크’와 여자 주인공 ‘피오나 루멘시아’가 만나기 1년 전이다.

그 말인즉슨, 아델라인이 아직 업보를 쌓기 전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작품상에서의 업보는.

“후우… 일단 언어는 영어인 것 같고…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네. 다행이다.”

운이 좋은 건지, 다행히도 신은 아델라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대한민국 12년 공교육 과정과 사교육에서 내리 배우는 수학과 영어가 쓸모없지는 않게 된 것이다.

시계를 보자 아직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그 말인즉슨,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넉넉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펜이…….”

테이블 위의 필기구를 발견하고 움직이려던 아델라인이었지만, 그녀의 몸은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다리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갑갑하긴 하지만, 분명 감각은 있는데…….’라고 생각하며 이불을 들추자, 석고로 고정해 놓은 자신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젠장.”

몇 번이고 다리를 움직여 보려 했지만, 아델라인은 생각보다 힘이 없던 건지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사실 이건 꿈이지 않을까.

그래. 하도 매닝햄 그 쓸모없는 엑스트라만 몇 화째 나오니까 소설 꿈을 꾸게 된 거야.

그래. 눈을 뜨면 난 병원이겠지. 병원일 거야.

내가 악녀로 빙의했을 리가 없어. 이건 소설인데.

거기에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하고만 살아온 슬픈 삶이었는데.

아델라인은 자그마한 소망을 되뇌며 잠에 빠졌다.

눈을 뜨면 이 꿈이 깨길. 21세기 대한민국의 병실이길 바라면서.

* * *

“하아아… 죽고 싶다 진짜.”

황궁 한구석의 공터. 그 공터에 쳐진 스무 개 정도의 텐트 중 하나에서 램프 불빛과 함께 한숨 섞인 한탄이 흘러나왔다.

마침 사람 키만 한 머스킷을 어깨에 맨 병사가 그 텐트의 출입구를 열어젖히며 안을 들여다봤다.

“충성. 매닝햄 대위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그 안에서는 한 남자가 나무판자와 보급품 상자로 만든 책상 앞에 앉아 흑발인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매닝햄 대위라고 불린 그 남자는 병사를 향해 대충 손을 이마로 가져간 뒤,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어. 스워포드 상병. 이번에 작전 투입된 거 보고서 쓰느라 죽을 맛이다, 진짜.”

서류를 바라보는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는 계속해서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스워포드는 그의 책상에 있던 주전자에서 커피를 따르며 그를 잠시 관찰했다.

당연히 산과 강, 들판과 시가지를 누비는 ‘라이플맨’답게 그의 몸에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진녹색의 낡은 제복은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낡은 제복으로도 그의 훤칠한 키와 체격은 가릴 수 없었다.

스워포드는 커피를 홀짝이며 알렉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황궁 경비를 설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여심을 뒤흔드는 그였지만, 스워포드를 비롯한 동료들에게는 그냥 젊은 중대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또 죽을 맛입니까? 이번에도 친위대 쪽에서 태클 걸었습니까?”

그의 질문에 매닝햄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째 밤을 새운 건지, 그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있던 우리 빼내고 그 자리에 황태자가 지휘하는 친위대를 쑤셔 넣으랜다.”

대놓고 전공을 조작하라는 요구에 스워포드는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세상에. 육본은 뭐 한답니까? 육군성은요?”

“육군성 인원 3분의 1이 황태자 놈이 심어 둔 자식들인데 제대로 굴러가겠냐. 육본에서도 전사자 안 나왔으니 대충하잰다……. 그쪽도 싸우느라 힘든가 봐. 양보할 건 양보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거에 집중하자 이거지.”

어쩔 수 없는 상황. 지금 당장은 고작 한 명의 라이플맨일 뿐인 스워포드가 할 수 있는 건 한숨을 내쉬는 것밖에 없었다.

“염병할 자식들. 육본을 아주 그냥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에휴…….”

매닝햄 대위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던 스워포드는 품속에서 조그만 양철통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매닝햄 대위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나 담배 안 하는 거 알잖아. 씹는 것도 담배고.”

“그러십니까. 피우는 거 싫어하는 건 이해되는데 왜 씹는 담배나 코담배도 싫어하시는지 원.”

“비싸 인마. 약값도 많이 들어가는데 담배 살 돈이 있겠냐.”

그는 쑤시는 무릎 관절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스워포드가 혀를 찼다.

“염병. 누구는 약값 청구도 제대로 안 돼서 사비 털어 넣고 있는데, 누구는 전공을 날로 먹으려 드니 원. 그 우리가 구해 준 귀족 영애는 뭐라 안 한답니까? 듣자 하니 공작가 영애라던데.”

그러자 매닝햄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의식 불명이래나 뭐라나. 그것 때문에 지금 여단장님도 육본 가서 깨지고 계시잖냐.”

매닝햄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스워포드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아니 자기가 놀라서 기절한 게 어떻게 우리 탓입니까?”

“난들 아냐. 그러고 보니 애들 상태는 어때?”

매닝햄이 화제를 돌리자, 스워포드는 한숨을 푹푹 쉬며 답했다.

“죽을 맛입니다. 황궁 파견 온 뒤로 수도경비대에서 지원요청 때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거기에 친위 대장이 떠넘긴 황궁 경비 업무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평소에 잘 쉬어야 실제 상황 때 기량이 나오는데, 지금은 그냥 전열 보병 연대에 붙어 있는 경보병 수준이라도 나오면 다행입니다.”

스워포드의 직설적인 말에, 매닝햄은 한숨을 푹 쉬며 그를 달랬다.

“…알겠어. 내가 최대한 빨리 업무 조정 요청 올릴게.”

“이번에는 되는 겁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묻는 스워포드의 말에, 매닝햄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 됐다. 근무 들어가라. 교대 늦으면 필립이 뭐라 그럴라.”

“필립, 그놈이 맨날 늦는데요 뭐.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충성.”

“충성.”

그렇게 스워포드가 떠나고 홀로 천막에 남은 매닝햄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분류 번호 0932-31-71. 제58차 수도경비대 지원 작전.

- 아군 사상자 : 경상 5, 중상 1, 전사 0.

- 적군 사상자 : 경상 10, 중상 0, 사살 82.

- 교전 지역 : 수도 남부 슬럼 지역. 고밀도의 판자촌 및 그 지하에 형성된 암시장.

- 특이사항 1. 인신매매 조직에 억류 중이던 103명의 아동 구출. 후속 조치 필요.]

그 문장까지 쓴 매닝햄은 펜을 잠시 멈추고 고민했다.

지금까지 여기에서 멈출 기회는 많았다. 상부에서도 그러길 원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몇 번이고 서류에 온갖 트집을 잡아 가며 보고서를 채택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이어 쓰며 보고서 작성을 마쳤다.

[- 특이사항 2. 암시장에 있던 귀족 영애 및 그 수행원 6인을 작전 지역에서 확보. 증인으로서의 출두를 요청했지만 로피츠 공작가에서 영애의 의식 불명을 이유로 출두 거부. 후속 조치 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