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3)

20 

결혼 시즌의 끝이 좋지 않다. 헤이스팅스 공작 부인(전 브리저튼 양)은 벌써 두 달 전에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필자는 아직 그녀의 새 남편을 머리카락 한 올 본 적이 없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행복한 커플이 신혼 여행지로 삼았던 클라이브던에도 공작은 없다고 한다. 사실 본 필자는 공작의 행방을 안다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공작 부인께서는 알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을 하지 않으니 아무도 모르는 일. 게다가 공작 부인은 친정집 대식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캐내는 것이 본 필자의 직업이기는 하나, 본 필자 역시 당혹스럽다는 말을 하는 바이다. 두 사람은 너무도 깊이 서로를 사랑하는 듯했기에......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8월 2일. 

여행은 이틀이 걸렸고, 그 사이에 계속 혼자 생각을 해야 했기에 사이먼은 더욱 괴로웠다. 지루한 여행에 대비해 읽을 만한 책을 가져왔지만, 책을 펼칠 때마다 그냥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읽지를 못했다. 

다프네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될 거란 생각을 지우기는 더욱 힘들었다. 

런던에 도착하자, 그는 마부에게 즉각 브리저튼 저택으로 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행에 지쳐 있었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도 싶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다프네를 만날 순간만을 상상해 왔으므로 더 이상 미룬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러나 브리저튼 저택에 도착한 뒤 그는 다프네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집사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도 사이먼은 지극히 위험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 부인이 여기 계시지 않다니?" 

집사 역시 만만치 않게 위험스런 목소리로 윗입술을 치켜올린 채 말했다. 

"그러니까, 각하......이 집에서 살고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다지 존경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내한테서 편지를 받았단 말일세......" 

사이먼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지만 운나쁘게도 편지는 없었다. 

"어쨌든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가 어딘가에 있단 말이야." 

그가 투덜댔다. 

"거기엔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똑똑히 쓰여 있었어." 

"그 말은 맞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사이먼은 이를 갈며 물었다. 

집사는 눈썹만 치켜올릴 뿐이었다. 

"헤이스팅스 저택에 계십니다, 각하." 

사이먼은 입을 다물었다. 집사에게 지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었다. 

"어찌되었거나," 

집사는 이제 여유를 가지고 말했다. 

"공작 부인께선 공작님과 결혼하셨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이먼은 그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직장에서 해고될까 봐 겁나지 않나 보군." 

"물론입니다." 

사이먼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 고맙다는 말만큼은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 바보 천치가 된 기분을 안고 현관문 앞을 떠났다. 다프네가 헤이스팅스 저택으로 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그녀가 그를 떠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가족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을 뿐일 테지. 

만일 스스로를 발로 걷어찰 수만 있었어도 그는 저택을 향하는 마차 속에서 자신을 걷어찼을 것이다. 

일단 마차에 탄 뒤, 그는 진짜 자신을 걷어찼다. 그의 저택은 브리저튼 가에서 그로스베너 스퀘어만 건너면 금방이었다. 차라리 마차에 타는 시간이었으면 이미 잔디밭을 가로질러 집에 당도했을 것이다. 

어차피 서둘러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헤이스팅스 저택의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복도로 들어간 그가 전해들은 소식은 아내가 집에 없다는 것이었으니까. 

"승마를 하시고 계신데요." 

제프리즈가 말했다. 

사이먼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승마라고 했나?" 

그가 멍하게 되뇌었다. 

"네, 각하." 

제프리즈가 대답했다. 

"승마 말입니다. 말을 타는 거요." 

사이먼은 집사의 목을 조르면 어떤 벌을 받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했다. 

그는 물어뜯듯 말했다. 

"어디로 간 거지?" 

"하이드 파크로 가신 걸로 아는데요." 

사이먼은 갑자기 피가 확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숨이 가빴다. 도대체 제정신이긴 한 건가? 임신 중인 여자가, 심지어 사이먼 자신조차도 임산부는 말을 타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명령했다. 

"말에 안장을 올려주게. 지금 당장." 

"특별히 원하시는 말이라도?" 

제프리즈가 말했다. 

"빠른 놈으로." 

사이먼이 쏘아붙였다 

"지금 당장 해. 아니,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군." 

그 말과 함께 사이먼은 몸을 돌려 집밖으로 나갔다. 

마구간으로 가는 길에 공포가 혈관을 빠져 나와 뱃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이먼의 단호한 걸음은 어느새 뜀박질로 변해 있었다. 

말을 옆으로 타는 것은 달리는 쾌감을 만끽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속도가 빨라서 다행이라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그녀가 자라난 지방 영지에서는 언제나 콜린 오빠의 반바지를 빌려 입고 오빠들과 미친 듯이 말을 몰아댔었다. 어머니는 맏딸이 진흙 범벅이 되거나 종종 새로운 멍이 들어 돌아올 때마다 반쯤 기절을 하곤 했다. 하지만 다프네는 상관없었다. 어디에서 말을 타건, 누구랑 말을 타건 상관없었다. 그때는 무조건 빨리 달리는 것이 최고였으니까. 

물론 런던에서는 반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기에, 그녀는 옆으로 타는 안장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종 사교계의 대다수가 아직 잠이 들어 있을 시간에는 하이드 파크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말안장 위에서 몸을 잔뜩 낮추고 말을 갤럽(승마의 여러 단계 중 말의 속도를 최고로 달리는 주법)으로 몰았다. 틀어올린 머리카락이 빠져 나와 눈물이 고일 정도로 눈을 찔러댔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벌판을 마음껏 달렸다. 자유를 느꼈다. 상심한 마음에는 그것보다 나은 치료법이 없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시종은 이미 뒤로 처진 지 오래였다. 그가 "기다려 주세요! 마님! 기다려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도 듣지 못한 척 달렸다. 

나중에 사과를 하면 되겠지. 브리저튼 가의 시종들은 그녀의 버릇이며 승마 솜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하인 중 하나인 이 새로운 시종은 아마도 걱정을 할 테지. 

다프네는 다소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주 약간일 뿐이다. 혼자 있고 싶었다. 빨리 달려야만 했다. 

마침내 나무가 우거진 곳에 다다르자 그녀는 속도를 약간 늦추고 상쾌한 가을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공원의 소리와 향기로 감각을 채웠다. 그리고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맹인을 떠올렸다. 그는 시각을 잃은 이후 다른 감각들이 더욱 날카로워졌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숲의 향을 들이마시며, 그녀는 아마도 그 말이 맞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높다란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고, 그 다음에는 겨울 준비를 위해 먹이를 찾아다니는 다람쥐들의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다프네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제기랄. 저건 분명히 다른 사람이 말을 몰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이다. 

다프네는 사람을 피하고 싶었다. 혼자서 생각을 하고 고통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 사교계 사람에게 자신이 왜 공원에 혼자 있는 것인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귀를 기울이며 다가오는 말의 방향을 가늠한 뒤 반대방향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을 속보로 몰며, 자신이 길을 비켜 주면 그가 그냥 지나쳐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든 그 사람은 그녀 뒤를 졸졸 따라오는 듯했다. 

다프네는 속도를 올렸다. 주변 지대 조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올렸다.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와 튀어나온 나무 뿌리가 지나치게 많았다. 이제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심장 고동소리가 쿵쿵 울리며, 머리 속에선 수많은 상상이 날개를 폈다. 

만일 기수가 그녀가 처음에 상상했던 것처럼 사교계의 일원이 아니라면? 혹시 범죄자라면? 술 취한 사람이라면? 아직은 시간이 일렀기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명을 지른다면 혹시 들을 사람이 있을까? 시종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가 남겨둔 그 자리에 말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녀 뒤를 쫓아오고 있을까? 만일 쫓아오고 있다 하더라도 방향을 제대로 맞췄을까? 

시종! 그녀는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틀림없이 시종일 것이다. 그녀는 기수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한 바퀴 돌렸다. 헤이스팅스 가의 정복은 붉은 색이다. 제복의 색깔쯤은 확인을...... 

쿵! 

나뭇가지가 가슴팍을 정통으로 때린 순간 온몸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간 듯했다. 입술에서 고통의 신음이 새어나왔고, 말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바닥으로......바닥으로...... 

온몸의 뼈가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 깔린 낙엽들은 쿠션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녀는 몸을 작게 웅크리면 고통도 줄어들 것처럼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오, 하나님. 너무도 아팠다. 제기랄. 전신이 다 아팠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숨을 쉬는 데 집중했다. 차마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던 온갖 욕설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너무 아팠다. 망할, 숨쉬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숨을 쉬어야 한다. 숨을 쉬어. 숨을 쉬라고, 다프네. 그녀는 자신에게 명령했다. 숨쉬어. 숨을 쉬어. 넌 할 수 있어. 

"다프네!" 

다프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낑낑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음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다프네! 하나님 맙소사, 다프네!" 

그녀는 누군가가 말에서 뛰어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변의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프네?" 

"사이먼?" 

다프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투로 속삭였다. 그가 여기에 있다니. 하지만 그의 목소리였다. 아직까지는 눈을 뜰 수가 없었지만, 사이먼의 느낌이었다. 그가 주위에 있으면 공기까지도 바뀌어 버렸으니까. 

사이먼의 손이 혹시나 부러진 곳은 없는지 알아보려고 가볍게 그녀의 몸을 만졌다. 그가 말했다.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요." 

"온몸이오." 

그녀가 헉헉거렸다.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손길만은 여전히 가슴이 아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눈을 떠요." 

사이먼이 부드럽게 명령했다. 

"날 봐요.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춰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어요." 

"할 수 있어." 

다프네는 사이먼이 장갑을 벗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따스한 손가락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는 눈썹가로 손을 가져가 댄 뒤 그녀의 양미간을 만졌다. 

"괜찮소." 

그가 달랬다. 

"고통을 참지 말아요. 눈을 떠봐요, 다프네." 

천천히,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그녀는 눈을 떴다. 사이먼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한순간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모두 잊고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과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고통을 달래 주고 있다는 것만을 느꼈다. 

"날 봐요." 

그가 다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집요했다. 

"날 보고,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말아요." 

다프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 이젠 긴장을 풀어요." 

사이먼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녀가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말을 하며 계속 그녀의 몸을 더듬어 혹시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지를 확인해 나갔다.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이먼은 계속 낮게 달래는 투로 말을 걸며 그녀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도 심한 타박상이 전부인 듯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특히나 아기가...... 

갑자기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다프네만 걱정하느라 그녀가 임신중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아이. 

두 사람의 아이. 

"다프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조심스럽게. 

"괜찮은 것 같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많이 아프오?" 

"조금이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어색하게 침을 삼켰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 같아요." 

"확신하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나 있는 거요?" 

다프네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깜박이며 뭔가 말처럼 들리는 듯한 목졸린 소리를 냈지만, 사이먼은 쉬지 않고 고함을 쳐 그녀의 말을 묵살했다. 

"도대체 시종도 없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주위 환경도 험악한데 왜 갤럽을 하고 있었던 거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게다가 제기랄, 도대체 왜 당신이 말 위에 있었던 거요?" 

"승마를 하고 있었는데요?" 

다프네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이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는 거요? 아이의 안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조차 안 해본 거요?" 

"사이먼."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산부는 말 근처 3미터 반경 안에도 들어가면 안 돼! 그런 것도 몰랐단 말이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몹시도 나이 들어 보였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그녀가 담담하게 물었다. 

"당신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잖아요." 

"그렇소. 원치 않았소. 하지만 어차피 생긴 아이를 당신이 죽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없으니까." 

사이먼은 숨을 멈췄다. 

"무슨 뜻이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비껴갔다. 

"난 임신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는 문장을 채 끝맺을 수 없었다. 갑자기 기묘한 느낌이 몸을 덮쳤다. 설마 실망감일 리는 없겠지만,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게 거짓말을 한 거요?"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일어나 앉으며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녀가 외쳤다. 

"아뇨.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어요. 난 내가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흐느끼며 밀려드는 눈물을 감추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이런 모습의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이토록 비탄에 젖어 있는 모습이라니. 사이먼은 무력감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분이 나아지길 바랐다. 자기 탓으로 그녀가 괴로워한다는 사실이 그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어쨌다는 거요, 다프?" 

사이먼이 물었다.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아이를 너무도 원한 나머지 어떤 식으로든 내 달거리에 영향을 끼쳤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지난달엔 너무도 행복했는데."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흐느낌에 가까운 그 소리. 

"너무나도 기다렸어요. 심지어는 달거리용 천까지 준비해 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어요." 

"아무 일도?" 

사이먼은 그런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그녀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그렇게 행복해 보기도 처음이었죠." 

"속이 메슥거리던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어요. 달거리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걸 제외하곤. 하지만 이틀 전에......" 

사이먼은 그녀의 손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오, 다프네."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빼며 쓸쓸하게 말했다. 

"느끼지도 않은 것을 느끼는 척하지 말아요. 제발 내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말아요. 당신은 단 한 번도 이 아이를 원치 않았어요." 

그녀가 공허하고 건조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이 아이라고? 세상에, 아이가 마치 세상에 존재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그저 내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던 건데."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비난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꿈이었을 뿐인데." 

사이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그녀는 불신과 후회가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도리가 없잖아요." 

"나, 나, 나......" 

그는 침을 삼키며 목에서 긴장을 풀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단 한 가지 말을 꺼냈다. 

"난 당신이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먼은 침묵으로 그녀가 대답하기를 독촉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늘에 저주를 퍼부었다. 결국 말을 더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싸웠을 때, 나는 자제력을 잃었소. 나, 난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는 턱이 죄어 오는 것을 느끼며 좌절감에 눈을 감았다. 마침내 길고 떨리는 한숨을 내쉰 뒤 그가 말했다. 

"그런 나 자신이 증오스러웠소." 

다프네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그래서 떠난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는 담담하게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이 한 일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아니오." 

"하짐나 그래서 떠난 건 아니라고요?" 

그녀가 끈질기게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그래서 떠난 건 아니오." 

다프네는 무릎을 꼭 끌어안고 그가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여태껏 그에게 버림받은 이유는 그가 그녀를 증오해서, 그녀가 한 짓을 증오해서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증오한 건 자기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말을 더듬는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업신여기는 게 아니란 걸 알잖아요." 

"내가 나 자신을 경멸하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럴 테지. 그는 자존심 강하고 고집이 세고, 모든 사교계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으니까. 남자들은 그의 호감을 사려 애쓰고, 여자들은 미친 듯이 그의 관심을 끌려고 법석을 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번 입을 열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매번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프네는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대부분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질문에 금방금방 대답을 했기에 그가 말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갰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아버지가 바보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아니에요." 

"알고 있소." 

하지만 사이먼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이먼, 날 봐요." 

다프네가 부드럽게 명령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아버지가 바보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아니에요." 

"안다니까." 

사이먼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듯, 약간은 짜증을 내는 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제가랄, 다프네. 난......"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진저리를 쳤다. 잠시 다프네는 그가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며, 목을 부들부들 떨며 그는 말했다. 

"난 그를 증오해, 다프네. 난 그를 즈, 즈, 증......" 

그녀는 그의 뺨에 양손을 얹고 얼굴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괜찮아요. 듣자 하니, 당신 아버지란 사람 정말 끔찍한 분이었던데요. 하지만 이젠 그냥 흘려보내야만 해요." 

"그럴 수가 없소." 

"그럴 수 있어요. 화를 내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그것에 인생을 좌우당해서는 안 돼요. 지금만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 아버지가 당신 대신 선택을 내리게 만들고 있어요." 

사이먼은 시선을 피했다. 

다프네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대신 그의 무릎 위에 양손을 얹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몸이 닿아 있어야만 했다. 지금 그를 놓아주면 그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가족을 원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이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닌지? 당신은 정말 멋진 아버지가 될 거예요, 사이먼. 하지만 당신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잖아요. 당신은 이게 복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당신 아버지가 무덤에서 당신을 조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내가 아버지에게 아이를 낳아주면 내 아버지가 이기는 거요." 

사이먼이 속삭였다. 

"아뇨.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아이를 주면 당신이 이기는 거예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모두가 이기는 거예요."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일 당신 자신이 아이를 원치 않기 때문에 낳지 않겠다면 그건 다른 문제예요. 하지만 돌아가신 분 때문에 스스로 아버지가 될 기쁨을 거부한다면, 당신은 겁쟁이예요." 

다프네는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지만, 해야만하는 말이었다. 

"언젠가는 당신도 당신 아버지를 떠나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할 거예요. 분노를 흘려보내고......"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멍하고 절망적이었다. 

"내게 그런 걸 하라고 말하지 마. 그게 내가 가진 전부요. 모르겠소, 그게 내 전부라는 걸?"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는 언성을 높였다. 

"내가 제대로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오? 무엇이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오? 그건 분노였소. 언제나 분노였소.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말겠다는 의지였소." 

"사이먼......" 

그의 목구멍에서 허망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정말 우스운 얘기 아니오? 난 아버지를 증오해. 너무도 증오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버지였소."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열심히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당신은 어찌되었건 성공했을 사람이에요. 당신은 고집이 세고 똑똑해요.

 난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말을 제대로 하는 법을 배웠어요, 당신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만일 당신 아버지가 애정을 보여 주었더라면 좀더 편하게 배울 수 있었겠죠." 

사이먼은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난 사랑을 받았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난 자라면서 사랑과 헌신만을 받았어요. 날 믿어요. 그게 있으면 모든 것이 훨씬 더 편하니까요." 

사이먼은 몇 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감정을 다스리려고 낮게 심호흡을 하는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마침내 다프네가 그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산산조각이 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난 행복하고 싶어."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의 몸에 팔을 두르며 맹세했다. 

"그렇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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