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남자에게 황소 고집을 부린다고 말하는 것은 황소에 대한 모욕이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6월 2일.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을 택했다. 브리저튼 가는 워낙 떠들썩한 가족이다. 그 누구도 비밀을 감추거나 불만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사이먼과 대화를 하려 했다. 그를 논리적으로 타이르려 했다.
그 다음날 아침 그녀는 서재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가 전날 밤 어디에서 잤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건 두 사람의 침실이 아니란 것만 제외하고는. 서재 안은 어둡고 역겨울 정도로 남성적이었다. 아마도 사이먼의 아버지가 꾸민 것일 테지. 다프네는 그가 이런 방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뭐든 증오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불편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책상 뒤에 앉아서 마호가니 탁자의 표면을 보호하는 가죽 덮개 위에 다리를 얹고 매끄럽게 윤이 나는 돌멩이 하나를 손 안에 넣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곁에는 위스키 병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밤새도록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았다. 다프네는 그 점에 감사했다. 문이 열려 있었기에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당당하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정도로 대담하지는 않았다.
"사이먼?"
다프네는 문 뒤에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 뒤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쁘세요?"
그는 돌멩이를 내려놓았다.
"아니."
그녀는 돌멩이를 가리켰다.
"여행에서 가져오신 건가요?"
"카리브 해안에서. 해변에서의 시간을 기념하는 거지."
다프네는 그가 완벽하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날 밤과는 달리 전혀 말을 더듬지 않는다. 아마 진정이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너무 태연해서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곳의 바닷가는 영국과 다른가요?"
그는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훨씬 따뜻하지."
"아, 뭐 그 정도는 나도 예상했어요."
그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프네, 열대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물론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쉽게 말로 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자신이 어려운 주제를 피하기 위해 딴소리나 지껄여대는 겁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프네는 심호흡을 했다.
"우리는 어젯밤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짐작했지."
그녀는 몸을 앞으로 굽혀 침착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아요."
사이먼은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만일 내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느낀다면 미안하오......"
"정확하게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도 기억을 해본다면 난 이 결혼을 피하려 애썼소."
"말도 참 곱게 하시는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마치 강의를 하듯 말했다.
"내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리란 생각이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잖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사이먼."
"그게 바로 중요한 점이오."
그는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내가 왜 굳이 그렇게 결혼을 피하려 했는지 모르겠소?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아 아내를 아프게 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오."
"언제는 아내를 얻을 생각을 하신 적이나 있었나요?"
다프네가 반박했다.
"당신은 자기 생각만 했을 뿐이라구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아내가 당신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거요, 다프네."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그녀가 쓰디쓰게 말했다.
사이먼은 어깻짓을 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높게 사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소. 절대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소."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의 눈에 가책 같은 것이 스쳤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강철 같은 의지가 차지했다.
"당신도 기억해 보면 알겠지만, 당신 오라비가 결혼을 강요했을 때 난 거절했었소.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 해도 말이오."
다프네는 반박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가 결투에서 죽음을 택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를 좀먹는 그의 분노를 그녀가 얼마나 증오하건, 사이먼이 앤소니에게 총구를 겨눌 만큼 비열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동생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앤소니는 사이먼의 심장을 겨냥했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은 내가 당신에게 절대로 좋은 남편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당신이 아이들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당신은 몇 번씩이나 그런 당신의 바람을 내게 말해 주었지. 그 점에 관해서는 당신을 탓할 수 없소. 당신은 사랑이 넘치는 대가족 출신이니까."
"당신도 그런 가족을 가질 수 있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 결투를 막고 내게 결혼을 해달라고 했을 때, 난 당신에게 경고했었소. 내가 아이를 갖지 않으리란 것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고 했어요."
다프네는 노여움으로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차이는 무척 큰 거예요."
"난 아니오."
사이먼은 차갑게 말했다.
"난 아이를 가질 수 없소. 내 영혼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군요."
마음속에서 뭔가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녀의 심장이리라. 그런 말에는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이먼의 분노는 그가 그녀에게 느끼게 될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것이리라.
"알겠어요."
다프네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 문제는 당신과 의논해 봐야 소용이 없겠군요."
사이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사이먼은 하루 종일 혼자 지냈다. 다프네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보아도 양심의 가책밖에 들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까닭이 있는 건 아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해 주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잘못 해석해서 그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육체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다프네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녀의 비탄에 잠긴 얼굴이 어른거릴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차라리 모든 사실이 알려지고 나자 어깨 위에 놓여 있던 무거운 짐이 덜어진 듯한 홀가분함은 있었다.
비밀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좋은 징조이리라.
밤이 되었을 때쯤에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거의 없다고 스스로를 이해시킬 지경이 되었다. 아, 물론 완전히는 아니고 거의 말이다.
그는 자신이 다프네의 마음을 아프게 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결혼을 했으며, 그 점이 언제나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다프네를 좋아했다. 아니, 세상 그 누구보다 다프네를 더 좋아했다.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꺼렸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차라리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한집 가득 아이를 낳는 것을 지켜봐도 행복했을 것이다.
사이먼은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한 달 전과는 달리, 다프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광경을 그리 마음 편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건 당연한 거야. 그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그녀는 이제 내 아내니까. 그녀는 이제 내 것이니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다프네가 얼마나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단 한 명의 자식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경고를 했었어. 사이먼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녀도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저녁을 먹은 후에 계속 서재에 앉아 손 안에서 돌멩이를 이리저리 굴리던 사이먼은 갑자기 몸을 폈다.
난 그녀를 속이지 않았어. 그건 진실이 아니야.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고,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어 그녀가 약간 기분이 상했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리석은 희망이나 기대를 가지고 결혼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일어섰다. 다시 한 번 얘기를 할 때이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대화를 요구하리라.
다프네는 저녁 식사에 참석하지 않아 그는 혼자서 식사를 했다. 접시에 닿는 포크 소리만이 쥐죽은 듯한 고요를 깰 뿐이었다.
아침 이래로 아내를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녀를 봐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녀는 내 아내다. 사이먼은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그녀를 볼 수 있다.
그는 복도를 가로질러 가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다프네에게 뭔가에 대해 - 주제는 아무거나 만들면 되는 법이다 -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으로 입을 벌리려는 순간, 그녀가 거기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먼은 눈을 깜박였다.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침대에 있지 않다면 어디에 있는 거지?
드레싱 룸. 틀림없이 드레싱 룸 안에 있을 것이다. 사이먼이 1분도 안 되어 벗겨 버리리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밤마다 꼭꼭 나이트가운을 걸쳤다.
"다프네?"
그가 드레싱 룸 문가로 가며 외쳤다.
"다프네?"
대답이 없었다. 문 아래로 빛도 비치지 않았다. 설마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은 아닐 테지.
그는 문을 열었다. 그녀는 거기에도 없었다.
사이먼은 초인종 줄을 잡아당겼다. 거칠게. 그리고는 복도로 걸어가 그의 부름을 받고 달려올 불행한 하인을 기다렸다.
이층에 근무하는 조그만 금발머리 하녀였다. 이름이 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이 표정을 보자마자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내 아내는 어디에 있나?"
그가 짖었다.
"아내라고 하셨습니다, 각하?"
"그래."
그가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내 아내."
그녀는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는 너도 알겠지. 키는 너만하고 긴 갈색 머리에......"
사이먼은 끝까지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하녀의 겁에 질린 표정 때문에 자신이 지나치게 비아냥거린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길게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어디 있는지 아나?"
그는 좀더 부드럽게, 그러나 절대로 온화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에 계시지 않습니까, 각하?"
사이먼은 빈 방을 고갯짓해 보였다.
"아니다."
"하지만 마님께서 주무시는 곳은 거기가 아닙니다, 각하."
그는 눈썹을 그러모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마님께선......"
하녀는 공포에 질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미친 듯이 복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탈출구를 찾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혹은 그의 천둥 번개 같은 성깔에서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이거나.
"말해 봐!"
그가 외쳤다.
하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께선 공작 부인 마님의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까?"
"공작 부인의......"
그는 갑자기 솟구치는 분노를 꾹 참았다.
"언제부터?"
"오늘부터인 줄 아옵니다, 각하. 저희 모두는 허니문 막바지엔 두 분께서 각자의 침실에서 주무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그가 으르렁댔다.
하녀는 몸을 벌벌 떨었다.
"공작님의 부모님께서 그러셨기에, 각하......"
"우린 내 부모가 아니란 말이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하녀는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게다가."
사이먼이 위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다."
"무, 물론이십니다, 각하."
"내 아내가 어디를 자기 방으로 정했는지 말해 주겠냐?"
하녀는 떨리는 손으로 복도 저쪽에 있는 문 하나를 가리켰다.
"고맙다."
그는 앞으로 네 걸음 걸어나가다가 뒤돌아섰다.
"넌 이만 가봐도 좋다."
아마 하인들은 내일쯤이면 다프네가 방을 옮긴 것을 두고 수군거릴 것이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두 사람의 대격돌을 하인에게 보임으로써 소문에 불을 지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이먼은 하녀가 종종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성난 몸짓으로 다프네의 새 침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문 앞에 멈춰 서서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자, 그냥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문을 쾅쾅 주먹으로 쳤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고 주먹을 치켜든 순간, 혹시 그녀가 문을 잠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잠기지도 않은 문을 두드린 거라면 참 어리석은 짓일......
그는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잠갔군. 그는 재빨리, 그리고 유창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욕을 할 때는 평생 한 번도 말을 더듬은 적이 없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다프네! 다프네!"
그의 목소리는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다프네!"
마침내 그는 방안에서 나는 발소리를 들었다.
"네?"
그녀가 말했다.
"들어가게 해줘."
짧은 침묵. 그리고......"
"안 돼요."
사이먼은 충격을 받고 튼튼한 목재 문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젠장. 그에게 순종하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다프네."
그가 분노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당장 이 문을 여시오."
다프네가 말을 하기 전에 한숨을 내쉬는 것까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문에 바짝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사이먼, 내가 당신을 내 방으로 들여놓는 것은 당신을 내 침대에 들여놓을 마음이 있을 때만이에요.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가서 주무시면 나도, 그리고 온 집안 사람들도 고맙겠어요."
사이먼은 정말로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머리 속으로 문의 무게를 가늠하며 얼마만한 힘으로 밀어붙여야 이 문이 부서질까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다프네."
그는 스스로도 두려울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이 문을 부수겠소."
"그러시지 않을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팔짱을 끼고 문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녀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안 그러실 거죠?"
다시 한 번 그는 침묵이 가장 효과적인 대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약간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믿어지지 않아 문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치실지도 몰라요."
그녀가 덧붙였다.
"이 망할 문을 열란 말이오."
그는 이를 갈며 말햇다.
침묵, 그리고 천천히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격렬하게 문을 열어젖히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다프네가 바로 그 문 뒤에 있을 테니까.
그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서 있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문을 잠그지 마."
그가 내뱉었다.
다프네가 어깻짓을 했다. 그녀가 감히 어깻짓을 하다니!"
"나도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니까요."
사이먼은 다프네 앞으로 다가갔다.
"내일 아침까지 당신 물건들을 우리 침실로 다시 옮겨 놓으시오. 당신은 오늘밤 당장 우리 침실로 돌아오는 거요."
"싫어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망할 뜻이지, 싫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망할 뜻인 것 같아요?"
그녀도 지지 않고 되받았다.
도대체 자신을 화나게 하고 충격 받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로서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거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놓고 욕을 입에 올린 것인지.
"싫다는 말은 싫다는 뜻이에요."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내 아내야!"
그가 외쳤다.
"당신은 나와 함께 자는 거야. 내 침대에서!"
"싫어요."
"다프네, 경고하겠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내게 뭔가를 감추려 했어요. 나도 당신에게서 뭔가를 감추겠어요. 나 자신을 말이죠."
그는 말을 잃었다. 정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다프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문가로 걸어가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문을 가리켰다.
"내 방에서 나가요."
사이먼은 성이 나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 방은 내 것이오."
그가 으르렁댔다.
"당신은 내 것이오."
"당신이 가진 것이라곤 아버지의 작위밖에 없어요."
그녀도 외쳐댔다.
"당신 스스로도 당신 것이 아니에요."
낮은 귀울림이 그의 귀를 채웠다......새빨갛게 달아오른 분노의 고동소리. 사이먼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를 다치게 할 무슨 짓인가를 할 것 같아 두려웠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망할 뜨, 뜻이지?"
그녀는 다시 어깻짓을 했다. 망할 여자.
"당신이 알아서 판단해 보세요."
사이먼의 이성은 그 순간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는 앞으로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너무 세게 쥐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혈관 속을 떠도는 끓어오르는 분노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이 설명해 봐."
그는 턱을 벌릴 수가 없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장."
그녀의 의미심장하고 침착한 시선 앞에 그는 하마터면 무너질 뻔했다.
"당신은 자신 하나도 간수하질 못해요."
다프네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여전히 무덤 속에서 당신을 조종하고 있어요."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가슴속이 말하지 못하는 분노와 할 수 없는 말로 가득했다.
"당신의 행동, 당신의 선택......"
다프네는 몹시도 서글픈 눈을 하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이 당신 자체나 당신이 원하는 것이나,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는 상관없어요. 당신이 하는 모든 일, 사이먼, 당신의 모든 행동, 당신의 모든 말은......그저 아버지를 괴롭히려는 것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 아버지는 이제 살아 계시지도 않은데도."
사이먼은 맹수처럼 우아하게 앞으로 다가섰다.
"모든 행동은 아니오."
그가 낮게 말했다.
"모든 말은 아니오."
다프네는 흉포한 그의 시선에 뒷걸음질을 쳤다.
"사이먼?"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몸집이 자신보다 두 배는 더 크고, 힘은 세 배나 더 센 그에게 대들 수 있게 했던 용기와 허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이먼의 검지손가락 끝이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입고 있던 실크 가운 아래로 열기와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다가와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쥐었다.
"이렇게 당신을 만지는 건."
사이먼은 그녀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내 아버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요."
다프네는 몸을 떨었다. 사이먼을 원하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 자신이 그를 원하게 만드는 그가 미웠다.
"내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는 건."
그는 이빨로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
"내 아버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요."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그를 밀어내려고 얹은 손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어깨를 감싸쥘 뿐이었다.
사이먼은 천천히 다프네를 침대로 밀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는 건,"
그는 그녀의 목에 대고 뜨겁게 말했다.
"우리 피부가 맞닿는 것은 우리 두 사람......"
"안 돼!"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사이먼을 밀어냈다. 그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날 침대로 데려가는 건 우리 두 사람의 일이 아니에요."
다프네가 숨막히는 듯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언제나 그곳에 있어요."
사이먼의 손가락이 넓은 소매 사이로 들어와 살을 움켜쥐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푸른 눈에 떠올라 있는 차가운 분노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다프네가 속삭였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 봐요. 내게서 몸을 빼고 침대 위로 당신을 쏟을 때, 당신은 내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사이먼의 얼굴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의 눈이 그녀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힘이 빠진 손에서 빠져 나왔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작게 말했다.
다프네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침대에서 물러났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분명 자신을 유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그녀를 애무해 아찔한 황홀경 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그 다음날 아침 그를 증오하게 되리라.
자기 자신을 더더욱 증오하게 되리라.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서로를 응시했다. 사이먼은 양팔을 늘어뜨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충격과 고통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프네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만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프네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이먼은 고통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아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당신은 나의 소유요."
다프네는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사실이에요."
그는 단숨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이 날 원하게 만들 수도 있어."
그가 속삭였다.
"나도 알아요."
사이먼의 목소리가 더더욱 낮아졌다. 거칠고 급박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내 것이오. 당신은 내게 속한 사람이오. 난 내 맘대로 여기 있을 수가 있소."
다프네는 자신이 백 살이나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간신히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떨어진 뒤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