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번 주에는 런던의 뜨거운 날씨가 사교계 행사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
본 필자는 프루덴스 페더링턴 양이 헉슬리 무도회에서 기절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나,
그녀가 쓰러진 이유가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유럽에서 돌아온 이래 사교계를 뒤흔들어 놓은 콜린 브리저튼 씨의 영향인지는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계절보다 이른 열기에 레이디 댄버리께서는 며칠 전 런던을 떠나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분의 고양이(길고 북슬북슬한 털을 가진 맹수이다)가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탓에 레이디는 서레이의 저택으로 피신하셨다고 한다.
헤이스팅스 공작 부부는 이 더운 날씨에 잘 있는지 궁금하다.
공작 부부는 현재 바닷바람이 시원한 해안가에 있다. 하지만 본 필자는 두 사람의 평안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본 필자는 귀족가 전체에 스파이를 두고 있지 않을 뿐더러, 런던 교외의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6월 2일.
기묘한 일이라고 사이먼은 생각했다.
결혼한 지 겨우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벌써 편안하게 일상 생활의 패턴과 그 반복에 적응을 해버렸다.
지금 그는 드레싱 룸 문가에 맨발로 서서 크러벳을 풀며 아내가 머리를 빗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도 이와 똑같은 일을 했었다. 굉장히 마음이 편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아내를 곁눈질하며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를 침대로 유혹할 것인지 계획을 짜는 것이다. 물론 어제는 성공을 거두었다.
곱게 매어져 있던 크러벳이 바닥에 떨어지자, 사이먼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오늘도 성공하고 말리라.
그는 다프네의 곁에 멈춰 서서 그녀의 화장대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며 눈을 깜박였다.
그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브러시를 손가락으로 감쌌다.
"당신이 머리를 빗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아. 하지만 내가 직접 빗겨주는 게 더 좋지."
다프네는 잠시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브러시를 놓았다.
"사무는 다 끝내셨어요? 영지 관리인과 꽤 오래 말씀을 나누시던데."
"그렇소. 지겹지만 필요한 일이지. 게다가......"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뭘 보고 있는 게요?"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빗겨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말을 똑똑 끊어서 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살짝 흔든 뒤 그녀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잠시 그녀가 자신의 입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저리를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어린 시절 내내 사람들은 몹시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종종 억지로 그에게 시선을 맞추곤 했지만, 금세 입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아이가 이토록 심하게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착각임에 분명하다. 다프네가 그의 입을 바라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이먼은 부드럽게 브러시로 그녀의 머리를 빗겨 내리며,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콜슨 부인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소?"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미묘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는 눈치를 챘다.
"네.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더군요."
"아마도 그럴 거요. 여기에 거의 평생을......대체 뭘 보는 거요?"
다프네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거울을 보고 있었어요."
맞는 말이긴 해도 사이먼은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한 점에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
다프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클라이브던에 적응하게 되면 콜슨 부인은 좀더 날 잘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커다란 영지고, 난 배울 게 많으니까."
"너무 열심히 노력하진 말아요. 여기서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요?"
"난 런던을 우리의 주 거주지로 삼고 싶었소."
다프네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가 덧붙였다.
"가족들과 더 가까운 곳에 살게 되면 당신도 기뻐할 테지."
"아, 물론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벌써 보고싶은 걸요. 이렇게 오랫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본 적이 없어요. 물론 결혼을 하게 되면 나도 내 가족이 생기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이젠 당신이 내 가족이잖아요."
그녀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사이먼은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던 손을 멈췄다.
"다프네."
그가 말했다.
"당신 가족은 언제나 당신 가족으로 남을 거요. 당신에게서 그들을 빼앗을 수는 없소."
"네."
다프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따스한 초콜릿처럼 부드러운 시선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도 날 위로하려고 좀더 노력을 할 수는 있죠."
사이먼은 아내를 유혹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일어서자 실크 가운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 아래 가운과 한 세트인 네글리제가 있었다.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것이 더 많은 속옷이었다.
사이먼의 커다란 손이 다프네의 옆가슴으로 움직였다. 그의 피부색이 그녀의 녹색 가운과 대조를 이루었다.
"이 색깔을 좋아하는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그는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내 눈 색깔과 같은 거잖아요."
그녀가 농담을 했다.
"잊었어요?"
사이먼은 그 답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어떻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산소가 부족해 질식사를 하려는 마당에 미소를 짓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녀를 만지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괴로울 때까지 있었다.
그는 다프네를 끌어당겼다. 그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미쳐 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나만을 위해 이걸 샀다고 말하는 거요?"
그는 그녀의 목에 대고 중얼거렸다.
"물론이지요."
그의 혀가 그녀의 귓불을 훑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또 누가 이런 걸 입은 내 모습을 보겠어요?"
"아무도 없지."
그는 그녀의 등을 자신의 흥분에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무도 없어. 절대로."
다프네는 그가 갑작스레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약간 어리벙벙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덧붙였다.
"이건 내가 해온 혼수 중 일부인걸요."
사이먼은 신음했다.
"당신의 혼수가 정말 마음에 들어. 내가 그 마을 했던가?"
"딱 꼬집어서 말한 적은 없어요."
그녀가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던걸요."
사이먼은 셔츠를 벗으며 그녀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당신이오."
다프네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건 간에 -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음이 확실하다. 그녀의 입술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
침대로 넘어지는 순간 잊혀지고 말았다.
사이먼은 즉시 그녀를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양손을 엉덩이로부터 쓸어 올려 그녀의 팔을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그는 그녀의 드러난 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당신은 무척 힘이 세지. 대부분의 여자들보다 훨씬."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은데요."
사이먼은 저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몸짓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움직여 그녀의 머리 위에 찍어눌렀다.
"하지만,"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나보다는 힘이 세질 않지."
다프네는 놀라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 소리가 무척 도발적으로 들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양 손목을 거머쥔 뒤,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탐험했다.
정말이지 마음껏 탐험했다.
"당신이 완벽한 여자가 아니라면 세계는 정말......"
그는 그녀의 나이트가운 자락을 엉덩이로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엉덩이 아래 손을 밀어넣었다.
"당신은 몰랐던 모양이군. 왜냐면 이건......"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완벽하다고."
"사이먼!"
"게다가 이건......"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가슴을 덮은 뒤 실크 위로 유두를 간질였다.
"내가 이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얘기해 주지 않아도 되겠지?"
"당신 미쳤어요."
"그럴 가능성도 농후하지."
그가 동의했다.
"하지만 난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어. 그리고 당신은......"
그는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
"훌륭한 맛이야."
다프네도 킬킬 웃어댔다.
사이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감히 날 조롱했나?"
"평소라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내 머리 위로 양손을 다 고정시킨 상황에선 그럴 수가 없어요."
사이먼의 손이 바지로 다가갔다.
"확실히 난 몹시 똑똑한 여자와 결혼한 것 같군."
다프네는 그의 입에서 별 노력 없이 말이 술술 나오는 것을 자부심과 애정이 가득 담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어릴 때 그가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정말 멋진 남자와 결혼을 했다. 강한 의지력 하나로 모든 것을 극복한 남자.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제력이 강한 남자이다.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 기뻐요."
그녀가 다정스레 말했다.
"당신이 내 남자라는 게 너무도 자랑스러워요."
사이먼은 그녀의 진지함에 놀라 행동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낮고 허스키했다.
"나 역시 당신이 내 것이란 사실이 자랑스럽소."
그는 자신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보여주지."
그가 투덜댔다.
"이 망할 놈의 것을 벗을 수만 있다면."
다프네는 다시 웃음이 목구멍에서 치미는 것을 느꼈다.
"두 손을 이용하면 좀더 쉬울지도......"
그녀가 제안했다.
그는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당신을 놓아줘야 하잖아."
그녀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손을 움직이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안 될까요?"
"내가 당신을 믿을 줄 알고?"
그녀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손을 움직이겠다고 약속을 하면 어떨까요?"
"음, 그건 또 흥미로운걸."
그는 우아하고 힘찬 태도로 침대에서 펄쩍 뛰어 3초 만에 옷을 다 벗어버렸다. 다시 침대로 뛰어들며 그는 옆으로 길게 누웠다.
"자, 아까 어디까지 했더라?"
다프네는 다시 킥킥댔다.
"여기쯤이었던 것 같아요, 내 생각엔."
"아하."
사이먼은 장난스럽게 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집중하고 있지 않았군. 우린 바로......"
그는 그녀 위로 올라가 자신의 체중으로 그녀를 눌렀다.
"여기에 있었소."
다프네는 마구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자신을 유혹하려고 할 때는 웃어선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소?"
이젠 걷잡을 수 없이 웃기 시작했다.
"오, 사이먼."
그녀가 헐떡였다.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그가 갑자기 굳어 버렸다.
"뭐라고?"
다프네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이젠 그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거부를 당했으니,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사랑을 되돌려주는 법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리라. 이 남자를 위해서라면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줘요."
사이먼은 공포와 환희가 뒤범벅된 표정을 지었다. 다프네는 예전에도 누군가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는 가족 없이 자랐다. 그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사랑과 따스함 없이 살아온 것이다.
그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
"다, 다프네, 난......"
"쉿."
그녀는 그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편해지면 그때 해요."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잔인한 말을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이먼에게 말하는 것이 편할 때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그냥 키스해 줘요."
다프네는 얼른 속삭였다. 어색한 순간을 빨리 넘기고 싶었다.
"제발, 키스해 줘요."
그가 키스했다.
사이먼은 뜨겁고 격렬하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모든 열망과 욕망을 담아 키스했다. 그의 손길과 키스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의 나이트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불이 발 아래 잔뜩 구겨졌다.
하지만 다른 날들과는 달리 그녀의 넋을 잃게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심지어 육체의 뜨거운 갈망도 그녀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욕망 속을 떠다니며, 모든 신경 세포가 욕정에 들떠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생각과 분석을 계속했다.
너무나 푸르러서 촛불 아래에서도 빛이 나는 그이 눈이 자신의 눈을 응시했다. 그 강렬함은 자신의 심정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그의 격한 감정 상태를 담은 것일까. 그가 숨가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또 한 번 그가 희미하게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그녀에게 몸을 묻었을 때, 그는 몸의 근육이 불끈 솟아오를 정도로 세게 고개를 젖혔다. 그가 왜 이토록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고통이라고?
"사이먼?"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걱정 때문에 욕망이 흔들렸다.
"당신 괜찮아요?"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고의 리듬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며 몸을 낮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을 데리고 가주겠소."
그건 어렵지 않다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그가 입술로 그녀의 가슴 끝을 깨물자 숨이 막혔다. 그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정확하게 어디를 만지면 되는지,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어느 때 계속 한 곳을 자극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두 사람 몸 사이로 들어가 그녀의 뜨거운 피부를 간질였다. 그녀도 이젠 그와 맞먹는 힘으로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제발."
그는 한 손을 그녀 아래로 집어넣어 그녀를 좀더 세게 끌어당겼다.
"지금이야, 다프네. 지금!"
그래서 그녀는 끈을 놓아 버렸다. 주위에서 세상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눈을 세게 감았는지, 별과 점과 눈부신 빛줄기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음악을 들었다. 어쩌면 절정에 도달한 자신의 높은 신음소리가 미친 듯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합주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이먼은 영혼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서 간신히 몸을 빼고 언제나 그러하듯 즉각 침대 끝 시트 위에 자신을 쏟아버렸다.
그는 곧 다프네에게 몸을 돌리고 그녀를 품안에 꼭 안아줄 것이다. 이젠 너무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의식 같은 일이었다. 그는 등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머리채에 얼굴을 묻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호흡이 잦아들면 잠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오늘밤은 뭔가가 달랐다. 오늘밤 다프네는 기묘하게 초조함을 느꼈다. 몸은 피곤하고 충족되었는데 뭔가가 마음 뒤편에서 꿈틀거리며 잠재의식을 건드렸다.
사이먼은 몸을 굴려 다프네의 등뒤로 나가온 뒤 그녀를 깨끗한 쪽으로 밀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몸을 울타리 삼아 그녀가 자신이 더럽혀놓은 것에 몸이 닿지 않도록. 몹시도 사려 깊은 행동이었고, 심지어......"
다프네는 눈을 번쩍 떴다.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했다.
자궁은 건강하고 튼튼한 씨앗이 없으면 살아나지 않는다구요.
아까 오후에 콜슨 부인이 그 말을 했을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사이먼의 고통스런 어린 시절 얘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어떻게 하면 나쁜 기억들을 영원히 지울 만큼 그에게 사랑을 주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고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다프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허리께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옆 탁자에 놓인 초를 밝혔다.
사이먼은 피곤한 듯 눈을 떴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 반대편의 젖은 얼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씨앗.
"다프?"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다프네, 어디가 안 좋은 거요?"
그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도 역시 거짓말일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뭐지요?"
너무도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뭐가 뭐냐니?"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눈으로 좇았지만 보이는 건 침대뿐이었다.
"뭘 말하고 있는 거요?"
"왜 아이를 가질 수 없지요, 사이먼?"
그의 눈에 그늘이 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죠, 사이먼?"
그녀는 거의 소리지르다시피 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오, 다프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래는 듯했으나, 미약하게나마 거만함이 배어 있었다. 다프네는 속에서 뭔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가요."
그녀가 명령했다.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여긴 내 침실이오."
"그럼 내가 나가겠어요."
다프네는 침대 시트를 몸에 감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이먼은 순식간에 그녀를 쫓아왔다.
"감히 침실에서 나가 버리지 마."
그가 으르렁댔다.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난 한 번도......"
"당신은 네게 거짓말을 했다구요."
그녀가 외쳤다.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난 평생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프네......"
"당신은 내 어리석음을 이용했어요."
다프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충격을 받아 목이 죄기 전 목구멍 깊은 곳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내가 결혼의 의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그건 사랑을 나눈다고 하는 거요, 다프네."
그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선 그렇지 않아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사이먼은 그녀의 신랄한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릴 뻔했다. 그는 알몸으로 방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이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 미친 듯이 노력했다. 아직도 그녀가 뭘 아는지, 그녀가 자신이 뭘 안다고 생각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프네."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감정 때문에 말을 더듬지 않으려 애썼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줘요."
"오, 이젠 게임을 하시겠다?"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좋아요. 내가 얘기를 해드리죠. 옛날 옛날에 한......"
그녀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뜨거운 분노가 마치 비수처럼 그의 배를 찔렀다.
"다프네."
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러지 말아요."
"옛날 옛날에,"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한 젊은 레이디가 있었지요. 일단은 그녀를 다프네라고 부르죠."
사이먼은 드레싱 룸으로 걸어가 가운을 거칠게 잡아챘다. 남자에겐 알몸으로 대처하고 싶지 않은 문제가 있게 마련이니까.
"다프네는 몹시, 몹시 멍청했지요."
"다프네!"
"아, 좋아요, 그럼."
그녀는 한 손을 허공에 홱 치켜들었다.
"무지했다고 해두죠. 그녀는 몹시 무지했어요."
사이먼은 팔짱을 꼈다.
"다프네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어요.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침대에서 한다는 것만 제외하곤 아무것도 몰랐지만, 언젠가는 그 결과로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요."
"이제 그만하시오, 다프네."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증거는 그녀의 눈 안에서 번뜩인 어두운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녀의 남편이 자신은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난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말했소. 당신에게 결혼하지 않을 기회를 줬다고. 그건 잊지 맙시다."
그가 격하게 말했다.
"감히 그 사실을 잊지는 마."
"난 당신이 안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아, 그래. 정말 그런 말이 듣고 싶었지."
그가 비웃었다.
"제발, 사이먼."
그녀가 외쳤다.
"당신을 딱하게 생각해서 결혼한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왜?"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워낙 신랄해서 그 고백은 차갑게 들렸다.
"그리고 당신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당신은 분명 죽었을 테니까."
미처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걸 내 문제로 돌리지 말아요."
그녀가 격하게 말을 이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당신은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저 갖지 않으려는 것뿐이었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 그 대답이 들어 있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채 다스리지 못한 분노가 그녀의 행동에 배어 있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당신의 씨앗이 어디에 떨어지든 상관이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매일 밤 그게 절대 내 몸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했어요."
"당신은 이 일에 과, 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해, 다프네."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분노에 차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내게 말해 봐요."
"난 절대 아이를 낳지 않을 거요."
그가 으르렁댔다.
"절대로.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아뇨."
사이먼은 몸 속에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뱃속을 휘감으며 피부로 밀려나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 분노는 언제나 그의 삶을 지배했던 남자에게 향한 것이었다. 사이먼은 자제력을 찾으려 애썼다.
"내 아버지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소."
다프네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그는 그 말에 놀랐다.
"뭘 알고 있는 거요?"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 당신을 거부했다는 것."
무엇인가가 그녀의 어두운 눈 속에서 꿈틀거렸다. 연민이라 부르기에는 미약하지만, 그와 비슷한 것.
"당신을 바보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아요."
사이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아니, 어떻게 숨을 쉴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알고 있소......?"
"당신이 말을 더듬는다는 거요?"
그녀가 대신 말을 맺었다.
그는 속으로 그녀에게 감사했다. "더듬다"라는 말은 그가 배울 수 없었던 유일한 단어였다.
그녀는 어깻짓을 했다.
"당신 아버지는 바보 천치였어요."
사이먼은 입을 딱 벌렸다. 평생에 걸친 분노를 어떻게 그런 태평한 말 한 마디로 날려보낼 수 있는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당신 가족들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당신이.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혈통 하나뿐이었소. 혈통과 작위. 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란 걸 깨닫자......다프네, 그는 사람들에게 내가 죽었다고 말했소!"
다프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아니, 더 끔찍했지."
사이먼이 물어뜯듯 말했다.
"난 그에게 편지를 보냈소. 수백 통의 편지를, 제발 날 좀 보러 와달라고. 그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았소."
"사이먼......"
"내가 네 살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는 걸 아, 알고 있소? 몰랐소? 그래, 그랬었지. 아버지는 날 쥐고 흔들며 내가 목소리를 낼 때까지 때리겠다고 협박했소. 그게 내 아, 아버지였소."
다프네는 그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른 체하려고 했다.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무시하려 했다. 사이먼을 그렇게 끔찍하게 대했다는 것에 대해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젠 돌아가셨잖아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리고 당신은 여기에 있어요."
"날 쳐다보는 것조차 괴, 괴롭다고 말했소. 후사를 보기 위해 몇 년 동안 기도를 했다고 했소. 아들이 아니라."
그의 언성이 위험스레 높아졌다.
"후사를 보려고. 뭐, 뭘 위해 그랬던 거지? 헤이스팅스 작위는 이제 머저리에게 가게 됐어. 그의 소중한 공작 작위가 바, 바보에게 가버린 거지!"
"당신 아버지가 틀린 거예요."
다프네가 속삭였다.
"그가 틀렸던 말건 난 상관없어!"
사이먼이 버럭 외쳤다.
"그에게 소중했던 건 작위뿐이야. 내 생각은 조금도 안했지. 내 기분이 어떤지, 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 입을 가진 내 심정은 어떨지!"
너무도 커다란 분노 앞에 다프네는 뒷걸음질을 쳤다. 이것은 평생에 걸쳐 쌓인 증오심이었다.
사이먼은 갑자기 앞으로 나와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거 알아?"
그가 끔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웃는 사람은 나란 것을. 그는 헤이스팅스 작위가 머저리에게 가는 것보다 끔찍한 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이먼, 당신은 바보가 아......"
"내 말 듣고 있소?"
그가 외쳤다.
다프네는 겁이 났다. 그녀는 얼른 문가로 달아나 만일을 대비해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 난 머저리가 아니지."
그는 침을 뱉듯 말했다.
"그리고 결국엔 그, 그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거야. 어, 얼마나 마음이 편했을까. 헤이스팅스 작위가 무사하다고 생각하니. 내가 이젠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으니 사, 상관없어. 헤이스팅스......중요한 건 그게 전부였지."
다프네는 토할 것 같았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있었다.
사이먼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잔인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헤이스팅스 작위는 나와 함께 죽을 거야. 혹시나 작위를 물려받게 될까 봐 걱정했던 사촌들은......"
그는 어깻짓을 하며 건조하게 웃었다.
"그들은 모두 딸밖에 낳질 못했어. 대단한 일이지? 어쩌면 내 아, 아버지가 내가 바보가 아니란 결론을 갑자기 내린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지. 내가 마지막 희망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으신 걸지도 몰라요."
다프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갑자기 미들토프 공작에게 받은 편지들을 떠올렸다. 그이 아버지가 그에게 보낸 편지. 그녀는 그것을 런던에 있는 브리저튼 저택에 남겨두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상관없어."
사이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죽으면 작위도 없어지니까. 이보다 더 토, 통쾌할 수 없지."
문은 다프네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드레싱 룸을 통해 방에서 걸어나갔다.
다프네는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여전히 침대에서 끌어낸 시트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온몸에 경련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기묘한 떨림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도 없이, 숨 죽여 울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제가 뭘 어쩌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