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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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결투, 결투. 세상에 이보다 더 흥미롭고 더 로맨틱하고 더 어리석은 짓이 있던가? 

이번 주 초 리젠트 파크에서 결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본 필자의 귀에 들렸다. 결투는 불법이므로, 본 필자는 두 사람의 실명을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러한 폭력성 앞에 본 필자는 심히 얼굴을 찌푸리는 바이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결투자인 두 바보(본 필자는 이 두 명을 신사라 부를 수 없다)는 무사한 듯하다. 

혹자는 그 운명적인 아침, 지성과 이성의 천사가 두 사람에게 미소를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 필자는 그 천사가 자신의 영향력을 사교계의 다른 수많은 남자에게도 떨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런 행동은 좀더 평화롭고 상냥한 주변 분위기를 조성해 전세계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5월19일. 

사이먼은 잔뜩 부은 눈을 들어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당신과 결혼하겠소."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소......" 

그의 말은 흥분한 다프네의 비명과 격렬한 포옹에 끊기고 말았다. 

"오, 사이먼. 후회하시지 않을 거예요." 

다프네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약속드려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릴 거예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만!" 

사이먼이 그녀를 밀쳐내며 말했다. 너무도 순수한 그녀의 기쁨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내 말 들어요."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동작을 멈췄다. 

"내 말 잘 들으시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 결정하시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먼은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어떻게 말하면 좋담? 뭐라고 말하면 된담?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 적어도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건 말해야 한다. 만일 그녀가 나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자신이 평생 꿈꿔 왔던 것 전부를, 아니 그 이상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프네에게 자신을 거부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 정도의 빚은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이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죄책감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아니, 그녀에게는 더 큰 빚이 있지만, 지금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다프네."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의 이름이 그의 목구멍을 달래 주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지만, 이글거리는 경고의 눈길에 곧 손을 거두었다. 

"뭐죠?" 

그녀가 속삭였다. 

"그 무엇도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끔찍하진......" 

"난 아이를 가질 수가 없소." 

자. 말해 버렸군. 그래. 진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말이었다. 

다프네는 입을 벌렸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들었다는 표시가 나지를 않았다. 

자신의 말이 잔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그녀를 이해하게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당신은 절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소. 절대로 품안에 사랑의 결정체인 아이를 안아 볼 수가 없게 되는 거요. 당신은 절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 

다프네가 끼여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냥 알고 있소." 

"하지만......" 

"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오." 

사이먼이 냉혹하게 되풀이했다. 

"그 점을 알길 바랐소." 

"그렇군요." 

다프네의 입술이 살며시 떨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녀의 눈이 평소보다 빨리 깜박이고 있었다. 

사이먼은 다프네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같이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항상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진실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이, 마치 그녀의 영혼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는 듯한 눈이 셔터가 내려진 듯 얼어붙어 있었다. 

다프네가 괴로워한다......그 점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에 누군가가 다가서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앤소니가 근심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문제가 있는 거냐?" 

앤소니가 여동생의 고통스런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사이먼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다프네가 대답했다. 

"아뇨."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결투는 없을 거예요. 각하와 전 결혼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구나." 

앤소니는 마음이 놓이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여동생이 워낙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통에 기묘한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내가 말하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사이먼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폐부를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공기였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깨달았다.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또 다른 것이 그를 채웠다. 조금은 뜨겁고 끔찍한, 알 수 없는 승리감과 기쁜 듯한 느낌. 

그것은 감정이었다. 순수하고 희석되지 않은, 안도감과 기쁨과 욕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러한 복잡한 감정에 얽매이는 것을 평생 동안 피해 왔던 사이먼인지라, 막상 그런 것을 느끼게 되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프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확신하는 거요?" 

그가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당신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말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이먼은 혼자 남아서 자신이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옥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끌려간 것인지 분간해 보려고 애썼다. 

다프네는 그날 내내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들 그녀의 약혼 소식에 흥분해 있었다. 오빠들만 제외하고 말이다. 오빠들은 그녀를 위해 기뻐해 주긴 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들떠 있지는 않았다. 다프네는 그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좀 기분이 묘했으니까. 어제부터 일어난 일 덕분에 그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결혼식은 최대한 빨리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데 모두들 동의했다. 바이올렛은 다프네가 레이디 트로우브리지의 정원에서 사이먼과 키스하는 광경을 다른 이들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은 뒤, 얼른 대주교에게 특별 결혼 허가서를 신청했다. 그리고는 결혼식 피로연의 세부 계획을 짜는데 골몰했다. 가족친지들끼리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초라한 결혼식을 올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엘로이즈, 프란체스카, 히아신스는 모두들 신부 들러리를 서게 될 거라는 사실에 몹시 흥분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사이먼이 어떻게 청혼했느냐? 한쪽 무릎을 꿇고 했느냐? 다프네는 어떤 색깔의 드레스를 입게 될 것이며, 사이먼은 언제 그녀에게 반지를 줄 것이냐? 

다프네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여동생들의 질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저녁이 되자 그녀의 대답은 거의 한 단어로 줄어들었다. 마침내 히아신스가 결혼식 부케로 무슨 색깔의 장미를 원하느냐고 묻는 데에 다프네가 "셋"이란 대답을 하자, 동생들도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었다. 

자신이 해낸 어마어마한 일에 다프네는 거의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한 남자의 목숨을 구했다. 흠모하는 남자한테서 결혼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자식 없는 삶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그것도 단 하루 동안 말이다. 

그녀는 웃었다. 왠지 처절하게. 내일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을지. 

앤소니에게 "결투는 없을 거예요"라고 대답하기 직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에 맴돌던 말이 무엇이었건, 그것은 단어나 문장 혹은 이성적인 생각 그 무엇도 아니었다. 마치 색깔의 홍수에 휩쓸린 느낌이었다. 붉은 색과 노란색, 그리고 그 두 색깔이 부딪히는 곳은 정신없는 주황색이었다. 순수한 느낌 그리고 본능. 그것이 전부였다. 이유도 논리도 없었고, 이성적이지도 제정신이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서 미친 듯이 들끓고 있던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 없이는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이먼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아기란 상상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형의 존재였다. 

하지만 사이먼......사이먼은 실체였고 이곳에 있었다. 그의 뺨을 만지면 어떤 느낌인지, 그와 함께 웃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키스의 달콤함을, 그의 씁쓸한 미소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다. 

자신은 없었지만, 그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능한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께서 기적을 내려 주실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브리저튼 가처럼 대식구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아이 하나만 있어도 그녀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러한 생각을 사이먼에게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만일 그녀가 아기에 대해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결혼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점만큼은 확신했다. 잔인할 정도로 진실해지기 위해 그가 얼마나 커다란 노력을 했던가. 그녀가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그는 절대로 그녀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프네?" 

응접실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은 게냐?" 

다프네는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그저 피곤한 것뿐이에요." 

그 대답은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서야 자신이 서른여섯 시간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이올렛이 딸 곁에 앉았다. 

"난 네가 더 좋아할 줄 알았다. 네가 사이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단다." 

다프네는 놀란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걸." 

바이올렛이 부드럽게 말하며 딸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 사람은 좋은 남자다. 훌륭한 선택을 한 거야." 

다프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난 옳은 결정을 내린 거야. 결혼에 최선을 다하겠어.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을지언정. 혹시나 그녀가 불임일지도 모르는 노릇이 아닌가. 그녀는 아이가 없는 몇몇 부부를 알고 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결혼을 하기 전에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형제 자매가 여덟이나 되니까 예뻐해 주고 안아 줄 조카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아이를 낳느니 아이가 없더라도 사랑하는 남자와 사는 편이 낫다. 

"낮잠을 좀 자지 그러니?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구나. 네 눈가에 그늘이 지는 게 보기 싫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원래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옳지 않았던가. 수면이 필요했다. 

"한두 시간 뒤면 분명히 나아질 거예요." 

입에서 카다란 하품이 새어나왔다. 

바이올렛은 일어서서 딸에게 팔을 내밀었다. 

"너 혼자서는 이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프네를 도와 이층으로 올라갔다. 

"게다가 한두 시간 정도로는 모자랄 것 같다. 내일 아침까지 깨우지 말라고 모두에게 엄하게 일러두마." 

다프네는 반쯤 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녀가 웅얼거리며 방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침에 봬요." 

바이올렛은 다프네를 침대에 눕히고 신발을 벗겼다. 

"지금 상태라면 옷을 입고도 푹 잘 것 같구나." 

그녀는 부드럽게 말한 뒤 딸의 이마에 입맞췄다. 

"나 혼자서는 네 옷을 벗기는 게 무리일 것 같다." 

어느새 골아떨어진 다프네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이먼 역시 몹시 지쳐 있었다. 죽을 뻔하다 살아나는 일이 날마다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지난 2주 내내 그의 꿈을 가득 채웠던 여인에게 구원을 - 게다가 결국은 약혼까지! - 받다니. 

만일 양쪽 눈에 시퍼렇게 든 멍과 턱에 든 커다란 멍만 아니었어도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될 지경이었다. 

다프네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알고 있을까? 자신이 뭘 포기한 것인지 알고 있을까? 그녀는 분별력 있는 여자다. 어리석은 꿈과 환상에 젖어있는 여자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판단하지 않고서 그와의 결혼에 동의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1분 만에 결정을 내렸다. 1분 동안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자신이 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착각을 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에 대한 꿈을 포기해 버렸단 말인가? 

혹은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만일 그가 결투에서 죽는다면 다프네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이유를 가져다 붙여 그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말았을 것이다. 제기랄. 다프네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사이먼조차 그녀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하게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아마도 그녀 역시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그녀의 동기가 무엇이었건 간에, 이번 주 토요일(레이디 브리저튼은 이미 약혼기간이 길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는 평생토록 다프네에게 묶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멈출 수 없다. 다프네는 이제 와서 결혼을 무르지 않을 것이며,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놀랍게도 이 운명적인 결과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다프네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의 결점을 알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없는지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선택했다. 

그 사실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각하?" 

서재의 가죽 의자에 누워 있다시피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낮고 침착한 목소리는 집사의 목소리였다. 

"뭔가, 제프리즈?" 

"브리저튼 경께서 각하를 뵈러 오셨습니다. 지금 집에 안 계시다고 전할까요?" 

사이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길. 피곤했다. 

"자네 말을 믿지 않을 걸세." 

제프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는 앞으로 세 걸음 나가다가 뒤로 돌아섰다. 

"정말 손님을 만나실 작정이십니까? 현재 주인님 상태가 조금, 어, 좋지 않아서요." 

사이먼은 멋쩍게 웃었다. 

"내 눈을 보고 말하는 거라면, 브리저튼 경이야말로 둘 중 더 큰 멍을 만든 장본인이라네." 

제프리즈는 부엉이처럼 눈을 깜박였다. 

"더 큰 쪽이라고요, 각하?" 

사이먼은 가까스로 웃었다. 쉽지 않았다. 온 얼굴이 아팠다. 

"구분하기 힘든 줄은 알겠네만,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조금 더 심하다네." 

제프리즈는 흥미를 느낀 듯 다가와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 말을 믿게." 

집사는 몸을 폈다. 

"물론입니다. 브리저튼 경을 응접실로 안내할까요?" 

"아니, 이리로 모셔오게." 

제프리즈가 초조하게 침을 삼키자 사이먼이 덧붙였다.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 이제 브리저튼 경이 상처를 하나 더 늘릴 까닭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때릴 곳이 더 남아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중얼거렸다. 

제프리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방안에서 종종 걸음으로 나갔다. 

잠시 후 앤소니 브리저튼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사이먼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사이먼은 일어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현재 상태로는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이 꼴이라 놀란 겐가?" 

앤소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우울하고 공허하게 들렸지만, 옛친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의 잔재랄까. 그게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앤소니가 사이먼의 눈을 가리켰다. 

"어느 쪽이 내가 만든 거지?" 

"오른쪽." 

사이먼은 피부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다프네도 여자치곤 꽤 날카로운 주먹을 가졌지만 자네만큼 체격이 크거나 힘이 세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그 애, 꽤 잘했군." 

앤소니는 몸을 굽혀 여동생의 솜씨를 감상하며 말했다. 

"동생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걸세." 

사이먼이 투덜댔다. 

"정말 아프다고." 

"다행이군." 

그리고는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은 너무도 많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길 바란 건 절대 아니었네." 

앤소니가 마침내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앤소니는 책상 모서리에 몸을 기댔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가 내 동생에게 구애하도록 허락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그게 진짜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잖아." 

"자네가 어젯밤 그것을 진짜로 만들었잖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먼저 유혹을 한 쪽은 다프네지 자신이 아니었다고? 그를 테라스로 끌어내어 밤의 어둠 속으로 이끈 것이 그녀였다고?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프네보다 훨씬 경험이 풍부했다. 원했다면 그 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이만 접어두도록 하지." 

앤소니가 말했다. 

사이먼이 대꾸했다. 

"다프네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네." 

앤소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젠 자네가 그 애의 바램을 들어주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건가?"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그렇겠지.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그렇겠지. 

"다프네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하리란 것은 자네도 알겠지." 

사이먼이 나직이 말했다. 

앤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라도 하면......" 

"다프네를 상처 입히는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사이먼은 눈을 이글거리며 맹세했다. 

앤소니는 오랫동안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난 자네가 내 여동생에게 수치를 안겨준 것 때문에 자네를 죽이려고 했어.

 만일 자네가 그 애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자네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평온하지 못할 걸세. 물론," 

그가 좀더 엄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목숨도 그리 오래 붙어 있지 못할 테지만." 

"죽음보다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을 때까지만 살려둘 셈인가?" 

사이먼이 부드럽게 물었다. 

"바로 그거지."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죽음과 고문을 들먹이며 협박을 하고 있긴 해도, 사이먼은 앤소니의 그런 점을 존경했다. 

여동생에 대한 그 커다란 애정은 놀랄 만한 것이다. 

혹시 앤소니는 그에게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뭔가를 본 것은 아닐지. 

두 사람은 거의 반평생 동안 친구였다. 

앤소니가 그의 영혼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어떤 방식으로든 본 것은 아닐까? 

그가 그토록 감추려 애썼던 분노와 고통을 보았던 것일까? 

그래서 여동생의 행복을 그렇게도 걱정하는 것일까? 

"내 약속하지. 내가 가진 걸 모두 동원해서라도 다프네를 지켜 주고 기쁘게 해주겠네." 

앤소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는 문가로 다가갔다. 

"그렇지 않으면 날 다시 보게 될 걸세." 

그는 떠났다. 

사이먼은 신음을 내뱉으며 가죽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어쩌다가 인생이 이토록 복잡해진 것일까. 

언제 친구가 적으로 바뀌었으며, 어쩌다가 가벼운 희롱이 욕망으로 변한 걸까. 

다프네는 또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될 터였다. 그녀 때문에 온몸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그녀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는 그 날을 상상하며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속삭이는 그녀의 몸으로 천천히...... 

그는 몸을 떨었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건강에 해롭다. 

"각하?" 

제프리즈였다. 사이먼은 피곤한 나머지 고개를 들 기력도 없었다. 그저 들어오라고 손짓만 했을 뿐이다. 

"오늘 저녁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겠습니까, 각하?" 

사이먼은 간신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굳이 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곱 시가 채 안 된 시간. 평소의 취침 시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이른데."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집사가 말했다. 

사이먼은 눈을 감았다. 제프리즈의 말이 옳다. 어쩌면 깃털 매트리스와 부드러운 시트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실로 달아난다면 오늘 저녁 내내 브리저튼 가의 인간은 단 한 명도 보지 않아도 될 테지. 

제길. 이런 기분으로는 며칠 동안이라도 좋으니 침실에 처박혀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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