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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성들이 단 한 번의 키스에 파멸한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5월 14일.
사이먼은 어느 순간에 자신이 그녀에게 키스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저 느끼는 것이지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다프네를 덤불 뒤로 끌어당긴 것은 그녀에게 훈계를 늘어놓기 위함이라면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주의한 태도 때문에 두 사람이 심각한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다. 어쩌면 계속 일어나고 있었던 일인데, 그가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프네의 눈동자가 변했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벌렸다. 아주 약간, 숨을 내쉴 수 있을 정도로 살짝 벌렸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기어올라갔다. 엷은 새틴 장갑을 타고 맨살을 타고 마침내 하늘하늘한 실크 소매에 닿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단숨에 좁아져 버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밀착되었으면 했다. 그녀가 자신을 감싸길 원했고, 그녀를 자기의 몸 위에서, 몸 아래에서 느끼고 싶었다. 그녀를 너무도 원했기에 두려울 정도였다.
사이먼은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팔이 넝쿨처럼 그녀의 몸을 죄었다. 그녀의 온몸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보다 키가 상당히 작았기에, 그녀의 가슴은 그의 갈비뼈 아래쪽에 밀착되었고, 그의 허벅지는......
그는 욕망으로 몸을 떨었다. 그의 허벅지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었고, 단단한 근육은 그녀의 피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사이먼은 신음했다. 욕구와 충족되지 못한 갈망이 한데 어우러진 본능적인 소리. 오늘밤 그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녀를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평생. 따라서 오늘밤 이 짧은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실크 드레스가 손가락 아래에서 부드럽고 하늘하늘하게 느껴졌다. 손을 그녀의 등 쪽으로 움직이며, 그는 그녀의 우아한 곡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 아마 죽는 날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몇 센티미터뿐이지만 그가 뒤로 움직이자 두 사람의 뜨겁게 달아오른 육체 사이로 시원한 밤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다프네가 외쳤다. 그 간단한 말이 얼마나 커다란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사이먼은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그녀를 꼭 붙잡았다. 마치 그녀의 얼굴을 들이마시려는 것처럼, 너무 어두워서 그녀의 얼굴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드는 그 미묘한 색깔까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고 분홍색이며, 입가는 엷은 복숭아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각기 다른 수많은 갈색 톤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과연 거기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의 상상의 산물인지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드는 그 초록색 테두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그녀가 실제로는 어떤 느낌인지, 어떤 맛일지 그저 상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그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러한 것들을 상상해 왔던가. 침착한 태도를 보였건만, 앤소니에게 그 많은 약속들을 했건만 그의 몸은 그녀 때문에 열에 들떠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방 저편에서 다프네가 있는 것을 본 순간 그의 피부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꿈속에 나오면 그의 몸은 아예 불꽃에 휩싸이는 듯했다.
그녀가 자신의 품안에 있는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숨결이 욕망으로 빠르고 불규칙한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이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폭발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아주 간단하다. 지금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으면, 지금 그녀를 마셔 버리지 않으면 그는 죽어 버릴 것이다. 지나치게 멜로드라마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진실이었다. 욕망의 손이 그의 내장을 휘저어 놓다가 불꽃으로 타올라 그의 몸을 삼키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를 원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을 때, 그 입맞춤은 부드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난폭하지도 않았지만, 맥박이 너무도 거칠고 급박하게 뛰고 있었기에 그의 키스는 온유한 청혼자의 키스라기보다는 굶주린 연인의 키스에 가까웠다.
억지로라도 다프네의 입술을 열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순간의 열정에 휩싸여 있었던지라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침범하려 한 순간 그는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못했다.
"오, 하나님, 다프네."
사이먼이 신음했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신의 욕망을 그녀가 느껴 주길 바랐다.
"절대 몰랐었소......단 한 번도 꿈꿔 본 적이 없소......"
거짓말이었다. 꿈을 꾸었었다. 잔인할 정도로 자세한 꿈을 꾸었었다. 하지만 현실과 비교해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길 하나 움직임 하나가 그녀를 더더욱 원하게 만들었다. 순간 순간이 지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점점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뭐가 옳은 것인지, 뭐가 예법에 맞는 것인지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기에, 자신의 품안에 있다는 것과, 자신이 그녀를 원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그녀 역시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다프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들이마셨다. 그래도 모자랐다.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머뭇거리며 그의 등을 타고 올라가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에 닿은 부분이 따끔거리다가 마침내 불타 올라버렸다.
그래도 모자랐다. 사이먼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떠나 목을 타고 쇄골 근처 음푹 팬 곳으로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신음을 했다. 그 부드러운 흐느낌에 그의 열정은 더더욱 달아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섬세하게 파여 있는 드레스 네크라인을 잡았다. 약간 헐렁한 듯 여유가 있었기에, 섬세한 실크를 살짝 잡아당겨도 그녀의 부푼 가슴이 드러나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녀의 가슴을 볼 자격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을 저지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사이먼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드레스를 잡아당기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거부할 기회를 주었다. 처녀다운 수줍음 대신 그녀는 등을 뒤로 젖히고 부드럽게 그를 흥분 시키는 숨을 내쉬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떨리고 아찔한 욕망의 순간, 그는 그냥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가슴을 탐하려고 하는 순간, 그의 귀에......
"이런 망할 개자식!"
다프네가 먼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 하나님."
그녀가 헐떡였다.
"앤소니 오빠!"
그녀의 오빠가 고작 3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앤소니는 사이먼에게 덤벼들며 다프네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원시인 전사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거의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앤소니의 몸이 사이먼에게 부딪치기 전에 다프네는 간신히 가슴을 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먼이 뒤로 넘어지며 뻗은 팔에 맞아 다프네 역시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죽여 버릴 거야. 이 되어먹지 못한......"
앤소니의 격렬한 욕설의 뒷부분은 사이먼이 그의 몸을 뒤집는 바람에 끝나지 못했다.
"앤소니 오빠, 안 돼요! 멈추세요!"
다프네는 여전히 드레스 가슴 부분을 움켜쥔 채 소리질렀다. 이미 옷자락을 끌어당겨 이젠 흘러내릴 염려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앤소니는 뭐에 홀린 것 같았다. 그는 사이먼을 내리쳤다. 분노가 그의 얼굴에, 주먹에,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원시적인 소리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리고 사이먼은 그저 자신을 방어하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무력한 바보가 된 기분으로 옆에 서 있기만 하던 다프네는 중간에 끼여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앤소니가 레이디 트로우브리지의 정원에서 사이먼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사랑하는 남자한테서 오빠를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이 위아래로 위치를 바꾸며 몸을 뒤집는 바람에 다프네는 무릎을 부딪히고 가시덤불 위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아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과연 이런 고통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부분에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의 비명이 얼마나 절절했던지, 두 남자는 금세 싸움을 멈추었다.
"오, 하나님!"
다프네가 넘어지는 순간 위에 있던 사이먼이 얼른 달려와 그녀를 도우려했다.
"다프네, 괜찮아요?"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흐느낄 뿐이었다. 가시덩굴이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길다란 상처가 났다.
"다친 것 같은데."
사이먼이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앤소니에게 말했다.
"똑바로 들어올려야 할 것 같아. 만일 옆으로 빼어내려고 하면 덩굴에 더욱 엉겨 버릴 거야."
앤소니는 사이먼에 대한 분노는 잠시 접어둔 채 짧고 사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다프."
사이먼은 몸을 구부리고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당신 몸에 내 팔을 감을 거요. 그 다음에는 당신을 앞으로 들어올려 꺼내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는 당신도 다칠 거예요."
"내 옷소매는 길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내가 하지."
앤소니가 말했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를 무시했다.
앤소니가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사이먼은 잔뜩 엉긴 가시덩굴 사이로 팔을 뻗어 장갑을 낀 손을 가시가 가득한 가지와 다프네의 맨살 사이로 조금씩 집어넣었다.
하지만 다프네의 실크 드레스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가시에 걸려 있었다.
"완전히 풀어낼 수가 없군. 당신 드레스가 찢어질 것 같소."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그녀가 허덕였다.
"이미 망가져 버린걸요."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이 그 드레스를 그녀의 허리까지 잡아당기던 중이었다지만,
가지에 걸려 드레스 자락이 찢어지게 되면 몸에서 벗겨져 버릴 것이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앤소니를 돌아보았다.
"자네 코트가 필요할 것 같네."
앤소니는 이미 코트를 벗는 중이었다.
사이먼은 다시 다프네를 돌아다보며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준비되었소?"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상상이었을까, 자신의 얼굴에 그녀의 눈길이 머물자 그녀도 좀 진정이 되는 듯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피부를 찌르는 가시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팔을 좀더 밀어넣어 그녀의 등뒤에서 양손을 맞잡았다.
"셋을 세겠소."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둘......"
그는 그녀를 그대로 들어올려 버렸다. 그 바람에 두 사람 모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셋을 센다고 했잖아요!"
다프네가 소리쳤다.
"거짓말이었소. 당신이 긴장하길 원치 않았거든."
다프네는 계속 더 말다툼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그 순간 드레스가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팔로 몸을 가렸다.
"이걸 받아."
앤소니가 그녀에게 코트를 내밀며 말했다. 다프네는 앤소니의 값비싼 코트를 감사히 받아 몸에 둘렀다.
앤소니에게는 꼭 맞는 코트였지만, 그녀에겐 지나치게 헐렁해서 온몸을 감싸 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괜찮니?"
그가 투덜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앤소니는 사이먼을 돌아보았다.
"저 애를 꺼내줘서 고맙네."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앤소니의 시선이 다시 다프네에게 갔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조금 따끔거려요. 집에 돌아가면 약을 발라야겠지만, 그때까진 참을 수 있어요."
"다행이다."
앤소니가 또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주먹을 쥐고는 사이먼의 얼굴에 날렸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그의 친구는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건,"
앤소니가 이를 갈 듯 말했다.
"내 여동생을 농락한 대가다."
"앤소니 오빠!"
다프네가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짓은 그만두세요! 공작님은 절 농락하지 않으셨어요."
앤소니는 몸을 휙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난 봤단 말이다, 네......"
다프네는 속이 메슥거렸다. 잠시 자신이 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나님 맙소사. 앤소니 오빠에게 가슴을 보이고 만 것이다! 오빠에게! 너무도 망측한 일이었다.
"일어서."
앤소니가 낮게 내뱉었다.
"다시 내가 널 칠 수 있게 일어서란 말이야."
"오빠, 제정신이세요?"
다프네는 소리를 지르며 여전히 바닥에 앉아 얻어맞은 눈에 손을 대고 있는 사이먼과 앤소니 사이에 끼여들었다.
"오빠, 다시 한 번 공작님을 때리면 절대로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앤소니는 거칠게 그녀를 옆으로 밀어젖히고는 침을 뱉었다.
"이번 것은 우리의 우정을 깨뜨린 대가다."
다프네가 공포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사이먼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안 돼요."
그녀는 다시금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며 외쳤다.
"옆으로 비켜요, 다프네."
사이먼이 부드럽게 명령했다.
"이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나 본데, 원래 내가......"
다프네는 중간에 말을 멈췄다.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옆으로 비켜나라, 다프네."
앤소니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소니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머리 너머 사이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요! 우리, 어른답게 대화로 하면 안 될까요?"
그녀는 앤소니와 사이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사이먼을 돌아보았다.
"세상에, 사이먼! 당신 눈 좀 봐요!"
그녀는 사이먼에게 달려가 이미 퉁퉁 부어오른 그의 눈에 손을 가져갔다.
사이먼은 가만히 있었다. 근심에 찬 그녀의 손길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어오른 피부 위로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기묘하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그녀를 원했다. 하지만 이번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다프네가 옆에 있는 것이 너무도 기분 좋았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정갈한 그녀.
그런 그녀에게 그는 지금 태어나서 가장 수치스러운 짓을 하려는 것이다.
앤소니가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고 마음이 좀 가라앉은 뒤 사이먼에게 여동생과 결혼할 것을 종용한다면 그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옆으로 비켜요, 다프네."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울린다고 생각했다.
"싫어요, 전......"
"비켜요!"
그가 외쳤다.
그녀는 얼른 물러서 조금 전에 넘어졌던 가시덤불에 등을 붙이고 겁먹을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이먼은 앤소니에게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날 때리게."
앤소니는 그 말에 약간 놀란 듯했다.
"어서 때려."
사이먼이 말했다.
"빨리 끝내 버리자고."
앤소니의 주먹이 풀어졌다. 그는 다프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때릴 수가 없어."
그가 불쑥 말했다.
"가만히 서서 때리라고 하니까 때릴 수가 없군."
사이먼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어서 때리라니까. 내가 죄값을 치르게 해주게."
"죄값은 결혼식장에서 치르게."
앤소니가 대답했다.
다프네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바람에 사이먼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프네는 놀란 걸까?
설마 어리석은 행동을 들켰을 때의 결과조차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다프네는 입을 열었다.
"난 강요하지 않겠어요."
"내가 강요한다."
앤소니는 이를 갈며 말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이면 난 유럽으로 갈 걸세."
"떠나세요?"
다프네가 물었다. 그녀의 공포에 찬 목소리가 날카로운 죄책감으로 다가와 사이먼의 심장을 갈랐다.
"내가 이곳에 머문다면 당신은 나 때문에 영원히 수치를 당할 것이오. 차라리 내가 떠나는 게 나을 거요."
다프네의 아랫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 단 한 마디. 그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염원이 그의 심장을 쥐어짰다.
말을 하기 위해 사이먼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당신과 결혼할 수 없소, 다프."
"할 수 없다는 거냐, 못 하겠다는 거냐?"
앤소니가 물었다.
"둘 다다."
앤소니는 다시 한 번 그를 때렸다.
사이먼은 바닥으로 넘어지며, 턱에 날아온 앤소니의 주먹이 굉장히 센 것에 놀랐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느껴도 싸다고 생각했다. 다프네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잡아 그를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미안하오, 다프."
그는 간신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쪽 눈밖에 보이지 않아서 기묘한 느낌이었다.
균형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날 도우러 오다니. 내가 그녀를 거부했는데도 날 돕다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녀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정말 미안하오."
"처량한 말은 아껴 두시지."
앤소니가 내뱉었다.
"내일 새벽에 보자고."
"안 돼요!"
다프네가 외쳤다.
사이먼은 앤소니를 올려다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프네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마, 만일 누군가가 될 수 있다면, 다프, 그건 당신이었을 거요. 그, 그 점만은 내가 보장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당황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무슨 뜻이죠?"
사이먼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이 시간쯤이면 그는 이미 죽은 몸일 것이다.
그가 감히 앤소니에게 총구를 가져다 댈 수는 없을 테니까.
앤소니가 허공에 총을 쏠 정도로 화가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기묘하고 처량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는 인생을 걸고 원했던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삶을 끝마치리라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결말을 예상하는 것을 꺼린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되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이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증오로 이글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의 눈 앞에서, 어딘가 외진 곳에서 동틀 무렵에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런 수치를 안고.
부드럽게 그를 어루만지던 다프네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고 흔들었다.
그 바람에 그는 물기가 밴 눈을 떴고, 자신의 얼굴에 바짝 들이밀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이런 얼굴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분노로 빛나는 눈동자. 고통, 아니면 좌절감일까.
"오빠가 당신을 죽이겠다잖아요! 내일 어디 인적 없는 들판에서 당신을 쏘아 죽이겠다잖아요.
그런데 지금 오빠가 그래 주기를 바란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잖아요."
"난 주, 죽고 시, 싶지 아, 아, 않아요."
사이먼이 말했다. 마음도 몸도 너무 지쳐서 말을 더듬어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하, 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할 수가 없소."
다프네의 손이 그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비틀거렸다.
그 눈에 떠오른 고통과 거절의 아픔은 사이먼으로서도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커다란 오빠의 코트를 온몸에 감싸고 짙은 머리카락에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잔뜩 묻히고 있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말은 마치 영혼으로부터 찢겨져 나오는 듯했다.
"나, 난 늘 내가 남자가 꿈꾸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나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게 아니오!"
사이먼이 외쳤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지만 가까스로 일어섰다.
"다프네, 그런 게 아니오."
"이미 할 말은 한 것 같다."
앤소니가 짧게 말하며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그는 여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심장을 깨뜨리고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더럽힐지도 모를 남자에게서 그녀를 돌려세웠다.
"한 가지만 더."
사이먼이 말했다. 자신의 눈에 떠올라 있을 게 분명할 처절하고 애원하는 듯한 빛이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다프네에게 얘기를 해야만 한다. 그녀를 이해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앤소니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사이먼은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남자의 소매에 손을 얹었다.
"난 어쩔 수가 없네. 난......"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난 맹세를 했어, 앤소니. 난 다프네와 결혼할 수 없네. 이것만은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그녀에게 이 말은 할 수 있어......"
"뭘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앤소니가 무감각하게 말했다.
사이먼은 앤소니의 소매를 놓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프네에게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끔찍하게도 그녀의 동정을 받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앤소니가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말했다.
"조금은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앤소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발."
단 한 번이라도 이토록 절절한 심정으로 그 말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앤소니는 몇 초 동안 가만히 있다가 결국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고맙네."
사이먼은 엄숙하게 말하고 앤소니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다프네는 자신을 보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를 멸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턱을 치켜들고 반항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보다 더 그녀를 존경해 본 적이 없었다.
"다프."
사이먼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을 더듬지 않고 제대로 할 수 있기만을 빌었다.
"다, 당신이라서 그런 게 아니오. 만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요.
하지만 나와 결혼하면 당신은 파멸할 거요. 난 절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소.
당신은 매일 조금씩 죽어갈 테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울 거요."
"당신은 절대로 날 아프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믿어 줘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동자는 따스하고 진실했다.
"난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당신은 과연 날 믿나요?"
그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사이먼은 무력하게, 공허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당신을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주시오."
다프네가 너무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기에 사이먼은 그녀가 혹시 숨을 멈춘 것이 아닌가 근심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오빠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이젠 집에 가고 싶어요."
앤소니는 그녀에게 팔을 두르고 돌려세웠다.
마치 그녀의 시야에서 사이먼의 모습을 가려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이. 그가 달래듯 말했다.
"집에 데려다 주마. 네가 자리에 들면 브랜디를 줄게."
"브랜디는 마시고 싶지 않아요. 생각을 좀 하고 싶어요."
다프네가 날카롭게 말했다.
사이먼은 앤소니가 그 말에 좀 놀라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앤소니는 군소리 없이 다정하게 동생의 팔을 꼭 쥘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사이먼은 얻어맞은 채 피를 줄줄 흘리며 두 사람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