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3)

헤이스팅스 공작이 브리저튼 양(본 필자처럼 브리저튼 가문의 비슷비슷한 자녀들을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다프네 브리저튼 양 말이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또다시 목격되었다. 서로에게 이토록 충실한 커플은 본 필자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바이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본 비에 이미 10일 전 보도된 바, 

브리저튼 가의 그리니치 피크닉에 동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브닝 파티뿐이다. 

본 필자의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공작은 2주일 전 브리저튼 가로 찾아가 브리저튼 양을 방문한 이래 단 한 번도 그녀의 집에 들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두 사람은 하이드 파크에서 함께 말을 탄 적도 없다고 한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5월 14일. 

2주 뒤, 다프네는 햄스테드 히스에 있는 레이디 트로우브리지의 무도회장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위치에 꽤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파티의 한가운데 서 있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춤을 출 차례를 다투는 수십 명의 구혼자들의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레이디 트로우브리지의 무도회장에 머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이먼이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저녁 내내 벽에 붙어 지내야만 하는 운명은 아니었다. 

사이먼의 예측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아서 다프네의 인기는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가 되어 버렸다. 

모두들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숭배하지 않았던 다프네는 갑자기 올 시즌 최고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견줄 수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들은 언제나 다프네가 특별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재잘거렸다. 

레이디 저지는 자신이 벌써 몇 달 전부터 다프네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측해 왔으며, 

자신의 말에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라고 모두에게 떠들어댔다. 

그 말은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비록 레이디 저지의 미움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전에는 브리저튼 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레이디 저지가 그녀를 현재 그러하듯 "내일의 보물"이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최근에는 다프네가 무도회에 도착하자마자 그날 밤의 댄스는 모두 예약이 끝나 버리는 지경이었다. 또, 그녀에게 레모네이드 한 잔을 가져다주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남자들이 피를 흘리며 싸움을 벌이는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 맨 처음으로 벌어졌을 때 다프네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이먼이 곁에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저녁도 별로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이먼이 거의 매일 저녁 꼭 한 번씩은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명백하게 밝힐 기회를 찾는 것도 상관없었다. 대부분은 야망에 찬 어머니들의 대군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다프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에 따라붙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가 종종 그녀가 불편해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례하기까지 해도 상관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뿐이지만(두 사람만 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어쨌거나 짬짬이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냈다. 무도회장 구석에서 나누는 웃음 섞인 대화, 함께 추는 왈츠. 그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다프네는 5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연애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연애가 완벽한 연극이라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다프네는 다시는 앤소니에게 사이먼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중에 공작의 이름이 나오면 오빠는 눈에 보일 정도로 악의를 품는다. 그리고 앤소니가 직접 사이먼을 만날 때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긴 하지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 분노의 틈틈이 다프네는 두 사람 사이의 오래된 우정을 간간이 엿볼 수 있었다. 그저 이 모든 일이 끝나면, 그리고 절대 그녀의 심장이 노래하게 만들지 못할, 지겹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백작과 결혼하게 되면 두 사람이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가리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앤소니가 강력하게 요청한 바에 따라 사이먼은 바이올렛과 다프네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모든 파티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앤소니가 주장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이 황당무계한 계획에 동의한 유일한 까닭은 다프네가 새로운 구혼자 무리 가운데에서 남편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불행히도(다프네에게는 다행이었지만) 다프네에게 푹 빠진 젊은 신사들은 사이먼이 주위에 있으면 감히 그녀에게 접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이먼이 네 곁에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것이 앤소니의 말이었다. 

물론 그 말에 상당한 욕설과 비난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다프네도 굳이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템즈 강에서 일어난 사건 이래로, 앤소니는 사이먼의 이름에 수많은 욕설을 갖다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이먼은 앤소니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다프네에게 적절한 남편감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이먼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프네는 비참한 기분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했어야만 했다. 비록 거짓일지언정, 사교계에서 "넋을 잃게 만드는 공작"이란 칭호를 얻은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 일의 결과가 어떠리란 것을 미리 예견했어야만 했다. 

그 별명은 필리파 페더링턴이 그를 "여자의 넋을 잃게 만들 정도로 핸섬하다"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필리파는 "속삭인다"는 말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였으므로, 모든 사교계 사람들이 그녀가 그 말을 하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옥스퍼드를 갓 졸업한 젊은 귀족들이 그 말을 간단하게 줄여서 "넋을 잃게 만드는 공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그 말이 참으로 가슴아픈 진실이라 생각했다. "넋을 잃게 만드는 공작"이 그녀의 영혼을 빼앗아 버렸으므로.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러자고 한 일도 아니다. 사이먼은 그녀를 존중하고 멋진 유머 감각으로 대한 것뿐이었으니까. 심지어 앤소니조차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도 사이먼에게 불평을 할 수 없다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사이먼은 다프네와 단둘이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장갑을 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다프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 일도 겨우 두 번뿐이었다. 

두 사람은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편안한 침묵에서 재치 있는 응답 사이를 오갔다. 모든 파티에서 두 사람은 꼭꼭 두 번씩 춤을 추었다. 사교계의 스캔들을 간신히 피할 수 있는 횟수가 두 번이었다. 

다프네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기묘한 모순인가. 그녀가 애초에 사이먼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다른 남자들을 끌기 위함이었다. 사이먼이 애초에 다프네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결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모순을 기묘할 정도로 괴로운 것이라고 다프네는 벽에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비록 언제나 결혼 얘기가 나오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되풀이하곤 하지만, 가끔씩은 사이먼이 혹시 그녀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볼 때가 있었다. 비록 그녀가 브리저튼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했던 위험스런 말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 사이먼은 가끔씩 두 사람이 맨 처음 만났던 밤과 똑같은 굶주림과 뜨거움으로 다프네를 바라볼 때가 있었다. 물론 그녀가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눈을 돌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피부는 따끔거렸고 숨결은 가빠졌다. 

게다가 그의 그 눈동자란! 모두들 그의 눈을 얼음장에 비유하곤 했다. 

그가 사교계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보면 모두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프네도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의 사이먼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처럼 말이 많지 않았다. 그의 말은 좀더 짧았고, 어조는 좀더 퉁명스러웠으며, 눈동자는 그의 차가운 태도를 그대로 반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웃을 때면, 두 사람이 함께 사교계의 우스꽝스런 규칙들을 비아냥거릴 때면, 그의 눈동자가 바뀐다. 그의 눈은 좀더 부드럽고 다정하고 편안해진다. 가끔씩은 그의 눈동자가 녹아 버릴 것 같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다프네는 벽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샌 웬일인지 공상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허, 이게 누구야. 다프, 왜 혼자 여기서 뿌루퉁하게 서 있는 거지?" 

다프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콜린이 다가오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평소처럼 오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이래 그는 사교계를 온통 휘저어 놓았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그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애타게 기도한다는 젊은 레이디들의 이름을 다프네는 스무 명 가량은 어렵지 않게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그들의 기도에 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은 방탕한 생활을 더 즐기고 싶을 뿐, 결혼해 정착하려는 마음은 없는 듯했으니까. 

"뿌루퉁한 적 없어." 

그녀가 정정했다. 

"피하는 것뿐이야." 

"누굴 피해? 헤이스팅스를?" 

"아니, 물론 아니지. 그 사람은 어차피 여기에 없는걸." 

"어, 왔던데." 

인생의 첫 번째(물론 방종한 여자 뒤를 뒤쫓고 경마에 돈을 거는 것 다음으로) 목표가 여동생을 괴롭히는 것인 콜린이었기에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을 숙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왔다고?" 

콜린은 음흉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갯짓으로 무도회장 입구를 가리켰다. 

"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15분 전쯤에 보았는걸." 

다프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날 놀리는 거지? 공작님이 오늘밤은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내게 똑똑히 말했단 말이야." 

"넌 그런데도 왔단 말이야?" 

콜린은 양손을 뺨에 가져다대며 놀란 시늉을 해보였다. 

"물론 왔지." 

그녀가 되쏘았다. 

"내 삶은 헤이스팅스님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구." 

"정말?" 

다프네는 왠지 그가 그저 놀리려고 하는 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정말이야." 

그녀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내 삶은 사이먼을 중심으로 돌지 않아. 물론, 내 생각은 사이먼을 중심으로 돌지만. 

콜린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전에 없이 진지해졌다. 

"너 심하게 당했구나, 그렇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가 알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알게 된 거야." 

"콜린 오빠!" 

"그동안......" 

그는 무도회장 입구를 가리켰다. 

"가서 그 사람이나 찾지 그러니? 아무리 내가 눈부신 미남이라도 어디 헤이스팅스님만 하겠니. 벌써 네 발이 그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이는구나." 

자신의 몸이 스스로의 의지를 배반했다는 것에 경악한 다프네는 얼른 발을 내려다보았다. 

"하! 속았지?" 

"콜린 브리저튼." 

다프네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정말이지 가끔은 오빠가 세 살일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군.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넌 고작 한 살 반이란 말이지, 꼬마야."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기에 다프네는 그저 최대한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콜린은 껄껄 웃을 따름이었다. 

"꽤 매력적인 표정이로구나. 하지만 빨리 지우는 게 좋을걸. 넋을 잃게 만드는 각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니까." 

이번만큼은 다프네도 속지 않았다. 이번에는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콜린은 몸을 숙여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다프." 

다프네는 그래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콜린은 쿡쿡 웃었다. 

"다프네!"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사이먼의 목소리. 

그녀는 휙 돌아섰다. 

콜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넌 말이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오빠를 좀더 믿을 필요가 있어." 

"콜린이 제일 친한 형제였소?" 

사이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짙은 눈썹 하나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건 어젯밤 그레고리가 제 침대에 두꺼비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순위가 저절로 올라간 거예요." 

다프네가 물어뜯듯 말했다. 

"게다가 베네딕트 오빠는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인형의 머리를 잘라 버린 이후로 절대 상위 랭킹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앤소니 형님은 도대체 뭘 했기에 아예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지 모르겠군." 

콜린이 중얼거렸다. 

"딴 데 갈 곳 없어?" 

다프네가 눈치를 주었다. 

콜린은 어깻짓을 했다. 

"없는데." 

"혹시 조금 전에 프루덴스 페더링턴과 춤을 출 약속을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세상에, 절대 아니지. 네가 잘못 들었나 보다." 

"그럼 어머님이 오빠를 찾는 것 같은데. 오빠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콜린은 여동생의 괴로움을 보고도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눈에 뻔히 보이게 행동하면 안 되는 법이란다." 

그는 일부러 사이먼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공작님이 눈치채 버릴 거라고." 

사이먼은 웃음을 참다못해 온몸이 떨렸다. 

"내가 지금 공작님과 함께 있자고 그러는 줄 알아?" 

다프네가 신랄하게 말했다. 

"오빠와 함께 있지 않으려고 이러는 거야." 

콜린은 심장 위에 손을 턱 얹었다. 

"난 상처입었다, 다프." 

그는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오, 다프네 때문에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자네는 재능을 낭비하고 있군, 브리저튼. 배우가 되는 게 좋았을걸." 

사이먼이 온화하게 말했다. 

"흥미로운 생각이군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되면 어머님이 얼마나 괴로워하실까." 

콜린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어차피 파티가 지겨워지던 참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즐거운 저녁 되시길." 

그는 거창하게 절을 해보인 뒤 두 사람을 떠났다. 

다프네와 사이먼은 콜린이 사람들 사이에 묻히는 모습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이 다음에 들리는 비명은 분명 제 어머님의 비명일 거예요." 

다프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는 어머님이 기절하시면서 몸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고?"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는 어깻짓을 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검은색 이브닝 재킷에 살짝 주름이 갔다. 

"따분해서." 

"그저 따분해지셔서 햄스테드 히스에 있는 레이디 트로우브리지의 무도회장까지 오실 결심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햄스테드 히스는 메이페어(런던 하이드 파크 동쪽의 고급 주택가)에서 족히 10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어요.

 길이 좋을 때에도 거의 한 시간이 걸리는데 오늘밤같이 사교계 사람들이 길을 다 막은 밤엔 시간이 더 걸린다구요.

 공작님이 과연 제정신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하세요." 

"나 역시 내가 제정신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소." 

그가 중얼거렸다. 

"뭐, 어쨌든 공작님이 여기 오셔서 기뻐요. 끔찍한 밤이었어요." 

다프네가 기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제게 공작님에 대해 질문을 던져댔어요." 

"점점 더 재미가 있어지는데?" 

"생각 좀 해보세요. 맨 처음 저를 취조한 사람은 어머니였어요. 공작님께서 왜 오후에 저희 집을 방문하시지 않는지 알고 싶어하셨다구요."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꼭 당신을 찾아가야만 하는 거요? 이브닝 파티에서 오직 당신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으로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 

다프네는 좌절감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꼭 그렇게 귀찮은 표시를 내야 하는 것일까. 

"공작님께서 제게만 관심을 쏟으시는 것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달라요.

 어쨌거나 공작님께서 절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휘슬다운에만 실리지 않았어도 굳이 그런 말씀까지 하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정말이오?" 

사이먼이 호기심을 나타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의심을 품기 전에 내일 당장 저를 찾아오셔야 할 거예요." 

"도대체 그 여자의 스파이가 누군지 궁금하군."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솜씨 좋은 스파이라면 내가 고용하고 싶소." 

"공작님께 왜 스파이가 필요한 거죠?" 

"그냥. 어쨌거나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은 일에 틀어박아 둘 수야 없지 않겠소?" 

다프네는 레이디 휘슬다운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휘슬다운 지의 장단점을 논의할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제 어머님이 취조를 끝마치신 뒤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었지요. 그 사람들은 더 끔찍했어요." 

"참으로 안된 일이오." 

그녀는 신랄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 질문을 한 사람 중 딱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여자였어요.

 그리고 모두들 제 행복을 빈다는 말은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결혼하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몰래 계산하고 있는 눈치였다고요." 

"모두에게 내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겠지, 물론?" 

다프네는 속에서 뭔가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네." 

그녀는 일부러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했다. 

"제게도 관리해야 할 이미지란 것이 있으니까요." 

사이먼이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질문을 했다는 유일한 남자는 누구였소?" 

다프네는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어떤 공작님이었어요. 당신 아버님과 친구이셨다는 좀 나이든 분인데, 이상한 분이었어요." 

사이먼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해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당신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공작이었는지에 대해 끝없이 자랑을 늘어 놓으시더군요." 

그녀는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웃어 보였다. 

"공작들끼리 서로를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전혀 몰랐지 뭐예요. 아마 무능한 공작이 작위를 웃음거리로 만들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죠?"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알고 계셨어요? 공작님께서 아버님 얘기를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건 내가 그 사람 얘기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사이먼이 짧게 말했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니, 전혀." 

그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시는 얘기하지 않겠어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잖소." 

다프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론이에요." 

길고 불편한 침묵이 뒤따랐다. 다프네는 애꿎은 스커트 자락만 어색하게 쥐어뜯다가 마침내 말했다. 

"레이디 트로우브리지가 참 예쁜 꽃들로 장식을 하셨죠?" 

사이먼은 화병에 꽂아놓은 커다란 분홍색과 흰색 장미 다발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레이디께서 직접 키우셨을까요?" 

"난들 알 도리가 없지." 

또 다른 어색한 침묵. 

"장미는 기르기가 무척 힘들어요." 

그는 대답 대신 끙 하는 소리만 내었다. 

다프네는 헛기침을 한 뒤 그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물었다. 

"레모네이드는 드셨어요?" 

"난 레모네이드를 마시지 않소." 

"전 마신단 말이에요." 

다프네도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전 지금 목이 말라요. 그러니까 실례하겠어요.

 전 가서 레모네이드나 마실 테니 공작님께서는 계속 주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계시죠.

 저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을 거예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묵직한 손이 팔 위에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시선을 팔로 옮겼다가 하얀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자신의 복숭아빛 실크 드레스 위에 올려져 있는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녀는 계속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자신의 팔을 따라 올라가 팔꿈치의 맨살에 닿아 주길 바랐다. 

물론 사이먼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 꿈속에서나 그런 일을 할 뿐. 

"다프네, 제발 돌아서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강렬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몸을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나는 순간 그가 말했다. 

"내 사과를 받아 주시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난......" 

그는 말을 멈추고 조용히 입을 손으로 가리고 기침을 했다. 

"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소. 난......난 아버지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다프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토록 말을 못해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사이먼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듯했다. 

"당신이 아버지 얘기를 꺼냈을 때......" 

그는 다른 방향으로 대화에 접근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소. 아버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소. 그래서......그래서......그래서 난 몹시 화가 난 거요." 

"미안해요." 

다프네가 말했다. 자신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오." 

사이먼이 얼른 말했다. 그의 엷은 하늘색 눈동자가 다프네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뭔가가 가시는 듯했다. 얼굴 역시 많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입가에 경직된 주름이 사라졌다. 그는 불편하게 침을 삼켰다. 

"난 내 자신에게 화가 난 거요." 

"그리고 당신 아버님에게도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팔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바깥 공기를 좀 쐬시겠어요? 그러면 좀 나아지실지도 몰라요." 

다프네가 온유하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내가 당신을 테라스로 데리고 나가면 앤소니가 내 목을 자를 거요." 

"앤소니 오빠가 어떻게 반응하시든 상관없어요." 

다프네가 짜증난 말투로 말했다. 

"오빠가 끊임없이 제 주위를 맴도는 것에 진력이 났다고요." 

"그저 오빠 노릇을 하려는 것뿐이잖소." 

그녀는 깜짝 놀라 입술을 살짝 벌렸다. 

"지금 누구 편을 드시는 거죠?" 

가볍게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며 그가 말했다. 

"좋소. 하지만 금방 돌아옵시다. 

 앤소니 하나라면 나 혼자서도 그럭저럭 당해낼 수 있지만, 당신 오빠들 모두가 달려나오면 나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우니까." 

테라스로 나가는 문이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이먼은 그녀의 팔꿈치를 정중하게 잡았다. 

"뭐, 테라스에도 사람들이 꽤 많을 거예요. 오빠가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요." 

하지만 그들이 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스팅스!" 

사이먼은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자신이 어느새 그 이름에 익숙해진 모양이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간주하게 될 테지. 

그런 생각만 해도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절름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저분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공작님이세요." 

다프네가 말했다. 

"아마 미들토프 공작님일 거예요."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을 하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헤이스팅스!" 

노인은 그의 팔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자네를 만나고 싶었네. 난 미들토프라고 하네. 자네 아버지는 내 친우 중 하나였어." 

사이먼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은 마치 군인의 동작처럼 절도가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아버진 자네를 몹시 보고 싶어했다네. 자네가 여행을 가버렸을 때 말이야." 

입안에서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분노에 그의 혀는 부풀었고, 뺨 안쪽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만일 지금 말을 한다면 여덟 살 꼬마일 때와 마찬가지로 말을 하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다프네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 어떻게 한 건지는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원래 'I'를 제외한 모음을 말할 때는 실수를 적게 하는 편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 

간신히 "오?"란 말을 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날카롭고 거만하게 나와 줘서 기뻤다. 

하지만 노인은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거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자네 부친이 돌아가실 때 내가 곁에 있었네." 

미들토프가 말했다.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몸을 움찔했다. 

"부친이 자네에게 전해 주라고 내게 맡긴 편지 몇 통이 집에 있다네." 

"태워 버리십시오." 

다프네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미들토프의 팔을 잡았다. 

"아,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공작님께서는 지금 당장 그 편지를 보고 싶지 않으신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마음을 바꾸실 겁니다." 

사이먼은 그녀에게 얼음장처럼 냉랭한 시선을 보낸 뒤 미들토프에게서 등을 돌렸다. 

"태워 버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난......아......" 

미들토프는 몹시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바셋 가의 부자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친구는 두 사람 사이의 불화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 주지 않았었다. 

그는 유일한 자기 편인 듯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편지말고도 그는 내게 몇 가지 전언을 남겼소. 지금 그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하지만 사이먼은 이미 다프네의 팔을 놓고 밖으로 나가 버린 뒤였다. 

"죄송합니다." 

다프네가 미들토프에게 말했다. 사이먼의 지독한 태도를 대신 사과해야 할 것만 같았다. 

"공작님도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하시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미들토프는 사이먼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프네는 말했다. 

"아버님에 대해서는 좀 민감한 반응을 보이시는 편이랍니다." 

미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먼이 저렇게 나올 거라고 공작이 미리 내게 경고를 했었지. 

 하지만 그 말을 한 뒤 웃으면서 바셋 가의 자존심에 대해 농담을 했기 때문에, 난 그가 진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지 않았소." 

다프네는 테라스를 향해 열린 문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게 진담이었나 봅니다. 전 이만 공작님께 가보야겠습니다." 

미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편지를 태우지 말아 주세요." 

"그런 일은 꿈도 꾸지 않을 거요. 하지만......" 

다프네는 이미 테라스를 향해 한 걸음 내딛은 상태였지만 노인의 말투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뒤돌아섰다. 

"무슨 일이시지요?" 

"난 건강이 좋지 않소." 

미들토프가 말했다. 

"난......의사 말로는 때가 왔다고 하더군. 그 편지를 레이디께 부탁드려도 괜찮을지?" 

다프네는 충격과 공포가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그토록 개인적인 서신을 안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젊은 여인에게 맡기려 한다는 것에서 느낀 충격이었다. 

또한 만일 그녀가 그것을 받는다면 사이먼이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느낀 공포였다.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 일을 하기에 적당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미들토프의 눈이 지혜로 반짝였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난 레이디가 바로 적당한 인물이라는 예감이 드오. 

 그리고 레이디라면 언제 그 편지를 헤이스팅스에게 전달해야 좋을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소.

 그 편지를 레이디에게 배달시켜도 될는지?"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말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들토프는 지팡이를 치켜들고 테라스 문을 가리켰다. 

"이젠 그만 그에게 가보도록 하시오." 

다프네는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벽에 걸린 촛대 몇 개가 조명의 전부였다. 

희미한 달빛 덕에 간신히 구석에 서 있는 사이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온몸에서 분노를 뿜어내며 가슴에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테라스 밖에 펼쳐진 끝없는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다프네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무도회장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마시던 터라 산들바람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가냘프게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테라스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조명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원으로 내려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다가가며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당신은 공작님께 몹시 무례하게 대했어요"라든가 "왜 그렇게 아버지에게 화를 내시는 거죠?"라든가. 

하지만 결국 그의 감정에 대해 묻기에는 적절한 시간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프네는 그의 곁에 다가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별을 보고 싶군요." 

사이먼은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놀라서, 그 다음엔 호기심으로. 

"런던에서는 절대 별을 볼 수가 없잖아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강하거나 안개가 끼거나. 또 어떤 때는 공기가 너무 더러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구요." 

그녀는 어깻짓을 하며 구름 덮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햄스테드 히스에서라면 별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구름이 협조를 해주지 않는군요." 

기나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사이먼이 헛기침을 한 뒤 물었다. 

"남반구에서는 여기와 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의 질문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먼 역시 대화를 평소대로 돌리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그를 도왔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농담을 하시는군요." 

"농담이 아니오. 아무 천문학 책이라도 하나 찾아서 보도록 하시오." 

"흠." 

"흥미로운 점은," 

사이먼이 말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목소리에서 긴장이 사라져갔다. 

"천문학자가 아니더라도......나 역시 아니니까......" 

"게다가 저 역시 아니죠." 

다프네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고 미소를 지었다. 다프네는 그의 눈동자에도 어느새 어두운 기색이 가셨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그리고 그 안도의 마음이 이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기쁨으로. 그의 눈에서 그림자를 지운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평생 그의 눈동자에서 어둠을 몰아내 주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둬 주기만 한다면...... 

"아무튼 한 번 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한 번도 별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아프리카에 있을 때 하늘을 보았소. 너무도 투명한 밤이었지. 그런 밤은 난생 처음이었소." 

그녀는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 

그가 놀랍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뭔가가 다른 거요." 

"하늘이 어떻게 다를 수가 있지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 손을 저었다. 

"정말 달랐소. 모든 별들의 위치가 달랐어." 

"저도 남쪽 하늘을 보고 싶군요."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만일 제가 이국적이고 화려한 여자라면, 남자들이 시 속에 표현하는 그런 여자였더라면, 전 아마 여행을 하고 싶었을 거예요." 

"당신은 남자의 시상을 자극하는 여자잖소." 

사이먼이 약간 냉소적으로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그저 시가 별 볼일 없었을 뿐이지." 

다프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마, 그렇게 놀리지 마세요. 전 흥분했었다구요. 첫날 여섯 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데다가 네빌 빈스비는 정말로 시를 썼던걸요." 

"일곱 명이었소." 

사이먼이 정정했다. 

"나까지 포함한다면." 

"당신을 포함하면 일곱 명이지만, 당신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아요." 

"당신은 날 아프게 하는군. 내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그는 콜린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당신도 연기자가 되는 것이 나을 뻔했네요." 

"그럴 것 같지도 않군."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하지만 제가 하려던 말은, 전 따분한 영국 여자라 어디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거죠. 이곳에서 행복한걸요."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기묘한, 어쩌면 불꽃이 이는 듯한 눈을 했다. 

"당신은 따분하지 않소.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당신이 행복하다니 기쁘오. 난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거든." 

다프네는 사이먼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의 몸이 점점 그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사이먼?" 

그녀가 속삭였다. 

"여기엔 사람들이 있소." 

그의 목소리는 기묘하게 억눌려 있었다. 

다프네는 테라스 구석을 바라보았다. 아까 들었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 펼쳐진 정원이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만일 여기가 런던이었더라면 테라스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디 트로우브리지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데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해마다 무도회를 자신의 별장인 햄스테드 히스에서 열었다.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우아한 저택 사이에 펼쳐진 넓은 잔디밭. 정원에 심겨진 나무와 꽃, 덤불과 생울타리......사람들이 모습을 감추는 어두운 구석. 

다프네는 갑자기 사악하고 억제되지 않는 자유를 느꼈다. 

"정원을 거닐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수 없소." 

"그래야만 해요." 

"그럴 수가 없다니까." 

사이먼의 목소리에 담긴 고통이 그녀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는 그녀를 갈망했다. 그는 그녀에게 미쳐 있었다. 

다프네는 자신의 심장이 마술 피리(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아리아를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높은 도(C)음을 넘어서 마구 공중제비를 넘는 듯한 느낌. 

그리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에게 키스하면? 그를 정원으로 이끌어서 고개를 젖히고 그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느껴 본다면? 

그러면 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을까? 그가 날 얼마나 사랑하게 될 수 있을지 깨달을까? 

어쩌면, 어쩌면 그도 내가 자신을 몹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면 그도 자신이 얼마나 결혼을 피하고 싶은지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전 정원을 거닐겠어요." 

다프네가 선언했다. 

"당신은 오고 싶으면 오세요."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사이먼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녀는 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욕설을 내뱉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프네. 이건 미친 짓이오." 

사이먼이 말했다. 하지만 이미 허스키해진 그의 목소리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듯했다. 

다프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더 정원 안쪽으로 들어갈 뿐. 

"제발, 다프네. 내 말을 들어요." 

사이먼의 손이 다프네의 허리를 꼭 붙들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난 당신 오빠에게 약속을 했소." 

그가 격하게 말했다. 

"난 맹세를 했다고." 

다프네는 누군가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돌아가세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소. 당신을 혼자 정원에 내버려둘 수는 없소. 누가 당신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들지도 모르니까." 

다프네는 오만하게 어깻짓을 한 뒤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물론 사이먼도 그럴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녀는 온몸에 힘을 빼고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3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사이먼의 숨결이 가빠졌다. 

"이러지 말아요, 다프네." 

다프네도 뭔가 재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뭔가 유혹적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허세도 그녀를 버렸다. 한 번도 키스 받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 첫 키스 상대가 될 기회를 주었다. 그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허리를 잡은 그의 손가락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리고는 다시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겨 뒷걸음으로 우아하게 정돈된 높다란 가시덤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살짝 벌렸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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