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남자들이란 양떼와도 같다. 한 마리가 가면 나머지도 곧 그 뒤를 따른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4월 30일.
앤소니 오빠가 이 일을 제법 무난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사이먼이 두 사람의 계획을 털어놓는 동안,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도중에 종종 끼어들며 이야기를 거들어 주는 동안
고작 일곱 번 언성을 높였을 뿐이니까.
그것은 다프네가 예상했던 것보다 일곱 번이나 적은 횟수였다.
마침내 다프네는 오빠에게 사이먼과 자신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가만히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앤소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을 낀 뒤 두 사람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가끔씩은 벽의 회칠이 벗겨질 정도로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약속을 지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이먼이 말을 마쳤다.
"그렇게 된 얘기라는 걸세."
침묵이 흘렀다. 쥐죽은 듯한 침묵. 10초 정도 침묵이 지속되었다.
앤소니와 사이먼을 번갈아 바라보는 자신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라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마침내 앤소니가 입을 열었다.
"미쳤어?"
"오빠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둘 다 완전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야?"
앤소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둘 중 누가 더 바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조용히 좀 하세요!"
다프네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님이 들으실지도 몰라요."
"네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어머님께서 알게 되면 심장이 어떻게 되어서 돌아가실지도 몰라."
앤소니가 꾸중을 했지만, 언성은 낮춘 상태였다.
"하지만 어머님은 이 일에 대해 영원히 모르실 건데요?"
다프네가 되받아쳤다.
"그래, 그렇지."
앤소니는 턱을 내밀고 말했다.
"너의 계획은 지금 이 순간 깨져 버렸으니까."
다프네는 팔짱을 꼈다.
"절 말리시지 못할 거예요."
앤소니는 사이먼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저 자식을 죽여 버리면 간단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보다 더 하잘것없는 이유로 결투를 한 사람들도 많다고."
"그건 다 바보 천치라서 그런 거죠!"
"누가 더 바보인지를 놓고 저 자식과 다투진 않겠다!"
"내가 끼여들어도 되겠소?"
사이먼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 사람은 오빠의 제일 친한 친구라고요!"
다프네가 외쳤다.
"더 이상은 아니야."
앤소니는 또박또박 잘라 말했다.
다프네는 발끈 화를 내며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공작님도 뭐라고 좀 하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사이먼의 입술이 웃음을 참지 못해 경련을 일으켰다.
"언제 그럴 기회나 있었소?"
앤소니는 차갑게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자네, 이 집에서 나가게."
"그 전에 내가 변론을 해도 될까?"
"여긴 제 집이기도 해요."
다프네가 격하게 말했다.
"그리고 난 공작님이 머무르셨으면 해요."
앤소니는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온몸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좋아. 2분을 줄 테니까 변명을 해보게. 더 이상은 줄 수 없어."
다프네는 머뭇거리며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2분 동안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하지만 그는 그저 어깻짓을 할 뿐이었다.
"당신이 하지 그러오. 어쨌든 앤소니는 당신 오빠니까."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엉덩이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일단, 공작 각하와의 음모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 쪽은 제 쪽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공작님은 절 이용해 다른 여자들을 멀리......"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들도."
사이먼이 끼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들을 멀리하시려는 계획이에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프네는 사이먼을 흘끗 바라본 뒤 말했다.
"난 공작님이 틀리셨다고 생각해요.
그저 공작님이 젊은 레이디 하나를 만나신다고 해서 여자들이 공작님을 뒤쫓는 것을 단념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특히 그 젊은 레이디가 저일 때는 말이죠."
"네가 뭐가 어떻다고 그러는 거냐?"
앤소니가 물었다.
다프네는 설명을 하려고 하다가 두 남자가 모종의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뭐죠?"
"아무것도 아니다."
앤소니가 조금은 쑥스럽게 말했다.
"내가 당신 오라버니에게 왜 당신한테 구혼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에 대한 가설을 설명해 주었소."
사이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군요."
다프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것이 기분 나빠해야 할 만한 일인지 생각해 보았다.
"흠. 아무튼 오빠도 그 정도쯤은 이미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해요."
사이먼은 웃음이었을 것임에 분명한 기묘한 콧소리를 냈다.
다프네는 두 남자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저한테는 2분밖에 없으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사이먼은 어깻짓을 했다.
"시간을 재는 사람은 당신 오라버니니까."
앤소니는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아마도 사이먼의 목을 움켜쥐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저러는 것이리라 다프네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이먼은......"
앤소니가 악의를 담아 말했다.
"자기가 입을 다물지 않으면 망할 창문 밖으로 내던져질 거란 사실을 알게 될 테지."
"전 남자들이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오늘에서야 겨우 확실히 알게 됐네요."
다프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사이먼이 씩 웃었다.
앤소니는 사이먼 쪽을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동생에게 말했다.
"사이먼과 내가 방해한 것을 빼고 1분 30초 남았다."
"좋아요."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 연설을 한 가지 주제에 국한시켜야겠군요. 오늘 여섯 명의 남자가 저를 방문했어요. 여섯!
제가 또 언제 여섯 명의 방문을 받았는지 오빠는 기억하실 수 있으세요?"
앤소니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기억나지 않아요."
다프네는 이제 여유를 가지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여섯 명의 남자가 우리 집 현관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리고 험볼트에게 명함을 내밀었어요.
여섯 명의 남자가 제게 꽃을 사다 주고, 저와 이야기를 하고,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시를 읊어 주기까지 했어요."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녀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세요?"
뒤늦게 무엇인가를 깨닫고 앤소니는 침묵을 지켰다.
"그건 모두 공작님이......"
다프네는 사이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친절하게도 어젯밤 레이디 댄버리의 무도회에서 제게 관심이 있는 척해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책상 모서리에 느긋하게 기대 있던 사이먼은 그 순간 몸을 폈다.
"아아, 이거야 원."
그가 얼른 말했다.
"나 같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을 거요."
그녀는 침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 건데요?"
그가 "난"이라고 말을 꺼내려는 참에 다프네가 말했다.
"그 남자들은 단 한 번도 절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란 걸 전 알고 있어요."
"그저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일 뿐이잖소."
사이먼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뭘 생각하든 당신이 왜 신경을 쓰는 거요?"
다프네가 입을 다물고 뒤로 살짝 물러섰다.
자신이 뭔가 아주 잘못된 말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피어올랐지만,
그녀가 눈을 마구 깜박거리는 것을 볼 때까지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제기랄.
그리고 다프네는 한쪽 눈을 훔쳤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척해서 눈물을 닦는 모습을 감추려 했지만,
사이먼은 자신이 가장 비열하고 못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네가 이제 뭘 했나 보게."
앤소니가 버럭 외쳤다. 그는 여동생의 팔에 손을 얹은 뒤 사이먼을 노려보았다.
"신경 쓰지 마라, 다프네. 저 녀석은 머저리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가 훌쩍였다.
"하지만 공작님은 똑똑한 머저리에요."
앤소니의 입이 딱 벌어졌다.
다프네는 퉁명스럽게 오빠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싫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지 마셨어야죠."
앤소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여섯 명의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왔니?"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스팅스님까지 함치면 일곱이에요."
"그 중 네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남자가 한 명이라도 있더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이먼은 자신이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뚫어질 정도로 찌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손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다프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전에는 친구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었어요.
헤이스팅스님께서 그들에게 몸소 보여주기 전에는 날 단 한 번도 로맨스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뿐이죠.
기회가 닿는다면 그 중 한 명과는 진지하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이먼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뭐죠?"
다프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만일 공작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뒤에야 그들이 다프네의 매력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들은 바보 멍청이이며,
따라서 그들 중 그 누구와도 결혼을 고려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관심을 보이면 그녀에게 더 많은 구혼자가 모여들 것이란 점을 맨 처음에 지적했던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으므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가 마침내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중요한 게 아니오."
다프네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가 마음을 바꾸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리고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계획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이제 인정하시나요?"
앤소니는 인정하기가 고통스러운 듯했다.
"현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만, 어째서 이 일로 네가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알 것 같다."
"오빠, 난 남편감을 찾아야만 해요. 어머님께서 날 죽도록 괴롭히신다는 이유 외에도, 내가 남편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난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고 싶어요. 내가 얼마나 그러고 싶은지 오빠는 상상조차 못하실 거예요.
게다가 변변한 구혼자는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사이먼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배어 있는 진실한 애원을 앤소니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앤소니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힘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는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나도 이 일에 동의하마."
다프네는 펄쩍 뛰며 앤소니에게 팔을 감았다.
"아, 오빠. 정말이지 앤소니 오빠가 최고에요."
그녀는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저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뿐이지요."
앤소니는 눈을 위로 굴리다가 마침내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네도 알겠지? 내가 어떻게 당하고 사는지?"
앤소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괴롭힘을 당하는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할 때만 사용하는 음색이 담겨 있었다.
사이먼은 쿡쿡 웃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사악한 유혹자에서 친한 친구로 되돌아온 걸까?
"하지만!"
앤소니가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다프네는 뒤로 물러섰다.
"조건을 내걸고 싶다."
다프네는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깜박이며 오빠의 말을 기다렸다.
"첫째, 이 얘기는 이 방 밖을 나가면 안 된다."
"동의해요."
그녀가 얼른 말했다.
앤소니는 기다렸다는 듯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물론일세."
사이먼이 대답했다. 앤소니가 중얼거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어머님께서는 좌절하실 거야."
"내 생각엔 오히려 자네 어머님께선 우리의 독창성에 찬사를 보내실 것 같지만,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어머님을 알아 왔으니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자네의 신중함에 감복하는 바일세."
앤소니는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둘째, 그 어떤 경우에도 두 사람만 있어서는 안 돼. 절대로."
"그건 어렵지 않아요. 우리가 실제로 연애를 한다 해도 두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다프네가 대답했다. 사이먼은 레이디 댄버리 저택 복도에서 잠시 마주쳤던 일을 떠올리며 다프네와 함께 둘만의 시간을 더 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앤소니 브리저튼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셋째......"
"셋째도 있어요?"
다프네가 물었다.
"생각해 낼 수만 있다면 서른 번째까지 있을 거다."
앤소니가 으르렁댔다.
"좋아요. 오빠가 꼭 그러셔야겠다면."
다프네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잠시 동안 사이먼은 앤소니가 그녀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 웃고 있지?"
앤소니가 물었다.
그제서야 사이먼은 자신이 웃음소리를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냐."
그가 얼른 말했다.
"좋아."
앤소니가 투덜댔다.
"셋째 조건이란 바로 이거야. 만일 내가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자네가 다프네의 품위에 손상을 입히는 장면을 목격하면......자네가 보호자도 없는 곳에서 손등에 키스 따위라도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난 자네를 결단코 살려 두지 않겠어."
다프네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앤소니는 그녀에게 엄한 시선을 보냈다.
"전혀!"
"오."
"헤이스팅스?"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앤소니가 투덜대며 말했다.
"자, 이걸로 끝이야. 자네는,"
그는 사이먼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떠나도 좋아."
"앤소니 오빠!"
다프네가 외쳤다.
"그건, 오늘 저녁 식사 초대는 취소라는 건가?"
사이먼이 물었다.
"그래."
"안 돼요!"
다프네는 오빠의 팔을 쿡 찔렀다.
"헤이스팅스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어요? 그럼 왜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죠?"
"그건 며칠 전 얘기야. 몇 년도 더 된 것 같은 얘기라고."
앤소니가 투덜댔다.
"월요일이었어."
사이먼이 말했다.
"그럼 함께 식사를 하셔야 해요."
다프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그리고 오빠."
그녀는 오빠의 팔을 찔렀다.
"공작님을 어떻게 독살할까 궁리하는 것은 그만두세요."
앤소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이먼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소, 다프네. 내가 앤소니와 10년도 넘게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걸 잊었소? 앤소니는 화학의 기본조차 모르는 사람이오."
"죽여 버리겠어."
앤소니가 혼잣말을 했다.
"이번 주가 끝나기 전에 죽여 버릴 테야."
"절대로 안 그러실 거예요."
다프네가 달래듯 말했다.
"내일만 되면 오빠는 이 모든 일을 까맣게 잊고 화이트 클럽에서 궐련이나 피우고 계실 걸요."
"절대 그러지 않을 걸."
앤소니가 불길하게 말했다.
"물론 그러실 거예요. 그렇죠, 사이먼?"
사이먼은 제일 친한 친구의 얼굴을 관찰한 뒤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그의 눈동자가 좀 달랐다. 왠지 진지했다.
6년 전, 사이먼이 영국을 떠났을 때 앤소니와 그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아, 물론 그때는 자신들이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도박을 하고, 창녀를 안고, 사교계를 휘젓고 다니며 자신들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뽐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두 사람은 진정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사이먼은 여행을 하는 도중 자신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일어난 일이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사이먼은 앤소니를 자신이 남겨두고 갔던 스물두 살짜리 어린애 그대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소평가를 했던 것이다. 그의 친구 역시 성장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앤소니에게는 사이먼이 평생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의무가 있을 것이다.
이끌어 주어야 할 남동생들, 보호해야 할 여동생들. 사이먼에게는 공작 작위가 있었지만 앤소니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 차이는 몹시 큰 것이었다. 사이먼은 친구가 과보호를 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탓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이먼이 천천히, 마침내 다프네의 질문에 대답했다.
"당신 오라비와 나는 6년 전 함께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닐 때와는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 같소. 그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 같군."
몇 시간 뒤, 브리저튼 저택은 소란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다프네는 언젠가 누군가가 그녀의 눈을 갈색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했던 짙은 녹색 이브닝 드레스로 바꿔 입은 뒤
메인홀에서 서성거리며 어머님을 진정시킬 방도를 찾으려 했다.
"믿을 수가 없어."
바이올렛이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공작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말을 앤소니가 잊고 하지 않을 줄이야. 준비할 시간이 없었어. 전혀 없었다고."
다프네는 손에 들린 메뉴를 바라보았다.
거북이 수프에서 시작해 세 가지 코스를 거친 뒤
베사멜 소스(하얗고 진한 맛의 소스)를 곁들인 양고기 요리(물론 그 뒤에는 네 종류의 디저트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가 나오는 식사였다.
다프네는 어머니를 놀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공작님은 별로 불평을 하실 분 같지 않아요."
"그러기를 바라야지."
바이올렛이 말했다.
"하지만 공작님이 오신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쇠고기 요리라도 내놓았을 텐데. 원래 손님에겐 쇠고기 요리를 대접하는 법이란다."
"공작님도 이게 그냥 가족끼리의 조촐한 식사라는 것을 아시는걸요."
바이올렛은 신랄한 시선을 보냈다.
"공작님께서 오신다는데 어떻게 조촐한 식사가 될 수 있겠니?"
다프네는 사려 깊은 시선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은 손을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머님. 공작님께서는 당신이 오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가족 식사에 뭐 대단한 것을 내놓길 기대하시는 분은 아닐 거예요."
"기대하시진 않겠지."
바이올렛이 말했다.
"하지만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프네, 사교계엔 예법이란 것이 존재한단다. 기대치란 것이 있단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네가 어쩌면 이렇게 침착하고 초연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초연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초조해 보이지도 않잖아."
바이올렛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초조하지 않을 수가 있니? 세상에, 다프네. 그 사람은 너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다프네는 하마터면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비친 적이 없으시다고요, 어머님."
"그럴 필요도 없었잖니? 안 그랬으면 어젯밤 왜 너와 춤을 추셨겠니? 또 그런 영광을 안은 레이디는 페넬로페 페더링턴 하나뿐이었잖니?
그리고 우리 둘 다 공작님이 그 애를 딱하게 생각해서 그랬다는 걸 알고 있잖아."
"전 페넬로페가 좋아요."
다프네가 말했다.
"나도 페넬로페가 좋아. 그 애 어머니가 그런 피부색을 가진 아이에게는 오렌지색 드레스를 입혀선 안 된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아차리길 바란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중요한 건 뭐죠?"
"나도 몰라!"
바이올렛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전 가서 엘로이즈나 찾아야겠어요."
"그러려무나."
바이올렛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레고리가 깨끗한지 꼭 확인하렴. 그 앤 좀처럼 귀 뒤를 안 씻잖니.
그리고 히아신스. 아, 히아신스는 어쩌면 좋지? 헤이스팅스님은 열 살짜리 아이와 식사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실 텐데."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다프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앤소니 오빠가 가족끼리 식사하는 거라고 말씀드렸다니까."
"대부분의 집안에선 어린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단다."
바이올렛이 지적했다.
"그건 그 사람들 문제죠."
다프네도 마침내 단념하고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전 공작님과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정식 초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세요.
게다가 정식 초대가 아니라서 기쁘다는 말씀도 하셨다고요. 공작님은 가족이 없어서 브리저튼 가족 식사 같은 일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신 적이 없으시대요."
"오, 하나님."
바이올렛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 어머님."
다프네가 얼른 말했다.
"어머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레고리가 감자 요리를 프란체스카의 의자에 올려놓는 일 따위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 그런 어린애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지난주에 했잖니!"
"충분히 교훈을 얻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바이올렛은 매우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다프네가 좀 덜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어머님 속을 썩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겁을 주죠, 뭐."
"죽인다 해도 겁 안 낼걸?"
바이올렛이 생각에 잠긴 투로 말했다.
"어쩌면 걔 말을 팔아 버리겠다는 말은 통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은 절대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마음이 여리지."
바이올렛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날마다 하는 승마를 못하게 하겠다고 말하면 믿을지도 모르지."
"그건 통하겠네요."
다프네가 동의했다.
"잘 되었군. 난 가서 그 애에게 좀 겁을 줘야겠다."
그녀는 두 발자국 정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야."
다프네는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머니가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바이올렛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다시 심각한 대화를 나누겠다는 뜻이었다.
"오늘 저녁 식사가 잘 되길 바란다, 다프네. 헤이스팅스님은 너에게 딱 어울리는 짝이 될 거라고 생각해."
"될 거라고 생각만 하신다고요?"
다프네가 놀렸다.
바이올렛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다프네, 난 그냥 아무 남자에게나 널 시집보내고 싶은 게 아니란다.
비록 내가 미혼 남성이라면 무턱대고 아무나 소개를 해대긴 했지만, 그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많은 구혼자를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단다."
바이올렛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가장 큰 꿈은 내가 네 아버지를 만나 행복했듯, 너도 나처럼 행복하게 사는 거란다."
그리고는 다프네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복도를 따라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다프네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헤이스팅스와 꾸민 계획이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렛은 두 사람이 진실을 밝혔을 때 몹시 낙담할 것이다.
사이먼은 다프네가 자신을 버리면 된다고 했지만, 차라리 그 반대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먼에게 버림받는 것은 끔찍한 일이 될 테지만, 적어도 어머니로부터 "왜?"란 질문을 끝없이 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머니는 그를 떠나게 내버려둔 다프네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프네 역시 어머니의 말이 옳은 게 아닌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사이먼은 브리저튼 가 사람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 대하여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였다. 웃음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날아다니는 콩은 단 한 번만 목격하고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콩은 히아신스가 앉아 있는 테이블 끝에서 날아오른 것 같기는 했지만, 브리저튼 가의 막내는 너무도 순진하고 천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사이먼은 그런 그녀가 오빠를 겨냥해 콩을 던졌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바이올렛은 콩을 보지 못했다. 그 콩이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그녀의 머리 위를 넘어갔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다프네는 그것을 보고 만 듯,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냅킨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눈가에 주름이 지는 것으로 보아 냅킨 아래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듯했다.
사이먼은 식사 내내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브리저튼 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잠자코 듣는 편이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앤소니와 베네딕트가 악의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기까지 했으므로.
하지만 사이먼은 브리저튼 가의 장남과 차남 반대쪽에 앉아 있었기에(분명히 바이올렛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을 무시하고 그저 다프네가 다른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기만 해도 되었다.
가끔씩 누군가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한 뒤 다시 조용히 관찰자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다프네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히아신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공작님은 별로 말씀을 많이 하시지 않는군요?"
바이올렛은 와인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다프네가 히아신스에게 말했다.
"공작님께선 우리보다 훨씬 더 정중하신 분이란다.
우리처럼 누가 자기 말을 못 들었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끊임없이 남의 대화에 끼여들거나 말을 자르지 않는 분이야."
"내 말을 못 들었을 거라고 걱정한 적은 없어."
그레고리가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바이올렛이 건조하게 말했다.
"그레고리, 콩을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하지만 히아신스가......"
"레이디 브리저튼."
사이먼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혹시 제가 이 맛있는 콩 요리를 더 먹어도 될는지요?"
"물론이에요."
바이올렛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 콩 요리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좀 보렴."
그레고리는 자기 콩을 다 먹었다.
사이먼은 혼자 미소를 지으며 접시 위에 콩 요리를 덜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남은 콩 한 알까지 다 먹어치웠다.
그는 은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엔 전염성이 강한 웃음기가 가득했다.
사이먼은 금세 자신의 입가가 치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앤소니 오빠, 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거예요?"
브리저튼 가의 딸 중 하나가 - 사이먼은 아마 그녀가 프란체스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하기는 어려웠다 - 물었다.
엘로이즈와 프란체스카는 어머니를 닮은 똑같은 파란 눈에 얼굴도 몹시 흡사했다.
"찌푸리고 있는 게 아냐."
앤소니가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사이먼은 벌써 한 시간째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으므로 그 말이 거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걸요."
엘로이즈가 아니면 프란체스카인 아이가 말했다.
앤소니는 무척이나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그렇지 않아>라고 또 말할 줄 알면 큰 오산이다."
다프네는 다시 냅킨에 대고 웃었다.
사이먼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사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들 있니?"
바이올렛이 불쑥 말했다.
"오늘 저녁이 올해 들어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는 걸. 비록......"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히아신스를 바라보았다.
"내 막내딸이 식탁 너머로 콩을 던졌지만 말이다."
사이먼이 퍼뜩 고개를 드는 순간 히아신스가 외쳤다.
"어떻게 아셨죠?"
바이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굴렸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 모든 걸 다 안다는 사실을 언제쯤이면 깨달을 수 있겠니?"
사이먼은 바이올렛 브리저튼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질문을 던져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말씀해 주세요, 각하. 내일 바쁘신지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질문을 하는 그녀가 너무도 다프네와 닮아 있어서 그는 잠시 당황했다. 아마도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말을 더듬은 것이리라.
"아, 아니오. 바쁘지 않습니다."
"완벽해!"
바이올렛은 얼굴을 환하게 빛냈다.
"그렇다면 내일 저희와 함께 그리니치로 놀러 가시죠?"
"그리니치요?"
사이먼이 되물었다.
"네. 벌써 몇 주 전부터 가족끼리 소풍을 가기로 계획했답니다. 보트를 타거나 템즈 강변에서 피크닉을 하려고 해요."
바이올렛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꼭 오실 거죠?"
"어머니."
다프네가 끼여들었다.
"공작님께선 분명히 하실 일이 많을 거예요."
바이올렛이 얼음 같은 시선으로 다프네를 노려보는 바람에 사이먼은 혹시나 두 사람 중 하나가 얼어붙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바쁘지 않다고 방금 말씀하셨잖니."
바이올렛은 다시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모두 왕립 천문대를 구경할 예정이랍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일반에게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지만, 돌아가신 제 남편이 후원자였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사이먼은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깻짓을 하며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다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바이올렛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두드렸다.
그리고 사이먼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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