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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필자는 어젯밤 헤이스팅스 공작이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말을 여섯 번 이상했다는 말을 들었다. 만일 그의 의도가 야심만만한 어머니들을 단념시키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커다란 오판을 한 것이다. 그들은 그를 우승 트로피로 생각할 테니까.
흥미로운 기사를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섯 번의 독신 선언은 모두 그가 사랑스럽고 지적인 다프네 브리저튼 양을 만나기 전에 한 것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4월 30일.
그 다음날 오후, 사이먼은 다프네의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은 놋쇠 노커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커다란 튤립 꽃다발을 쥐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다프네의 계약 내용에 훤한 대낮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 무도회장 근처를 거닐 때 다프네가 현명하게도 그 점을 지적했다. 만일 그가 내일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 그 중에서도 특히 그녀의 어머니가 - 그가 진심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라고.
사이먼은 다프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 분야의 에티켓에 관한 한 그보다 다프네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는 고지식하게 그로스베너 스퀘어에서 꽃을 산 뒤 브리저튼 저택으로 향했다. 제대로 사교계의 여인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각종 구애의 절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브리저튼 가의 집사가 당장 문을 열어 주었다. 사이먼은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매부리코에 크고 마른 몸집의 집사는 명함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인 뒤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각하."
확실히 그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브리저튼 가의 응접실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새파란 실크 드레스를 입은 다프네의 눈부신 모습이 레이디 브리저튼의 초록색 소파 끝에 앉아 있었고, 그 얼굴은 예의 그 환한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광경일 법하지만, 그녀는 여섯 명 정도 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한쪽 무릎을 꿇고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시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들으며 사이먼은 그 멍청한 작자의 입에서 금세 장미꽃이라도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모든 광경이 끔찍했다.
그는 시를 읊고 있는 어릿광대를 바라보고 있는 다프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다프네는 가만히 있었다.
사이먼은 꽃을 들지 않은 쪽 손을 내려다보고 자신이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방안을 훑어보며 어느 남자의 얼굴에 그 주먹을 꽂아 줄까 결정하려 했다.
다프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그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말이다.
바보 같은 시야. 정말 머저리 같은 시야. 사이먼은 고개를 젖히고 어리석은 구혼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주먹 크기가 저 작자의 오른쪽 눈에 맞을까, 아니면 왼쪽에 맞을까? 아니, 어쩌면 그건 너무 폭력적인 광경일지도 모른다. 턱을 가볍게 날려 주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적어도 입은 닥칠 테니까.
시인이 거창하게 말했다.
"이 시는 어젯밤 당신을 위해 쓴 시입니다."
사이먼은 신음했다. 방금 읊은 시는 셰익스피어 풍의 소넷을 본떠 쓴 것에 가까웠지만, 자작시라니, 차마 들어줄 수가 없었다.
"공작 각하!"
고개를 들어 보니, 다프네가 마침내 그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목례를 해보였다. 그의 냉랭한 얼굴이 첫사랑에 빠진 강아지처럼 멍한 다른 구혼자들의 얼굴과 비교가 되었다.
"브리저튼 양."
"공작님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다프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훨씬 낫군. 사이먼은 꽃을 들고 그녀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세 명의 젊은 구혼자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비켜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이먼은 첫 번째 남자에게 자신이 지울 수 있는 가장 거만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고작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남자"라고 불러 주기엔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젊은이는 마구 헛기침을 하며 멀찌감치 떨어진 창가로 달려갔다.
사이먼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 다음 젊은이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자작 부인이 그의 앞에 나섰다. 짙푸른 드레스에 다프네의 미소아 맞먹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각하!"
그녀가 흥분한 투로 외쳤다.
"뵙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공작님의 방문은 저희에게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 가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이먼은 낮게 말하며 그녀의 장갑 낀 손에 키스를 했다.
"부인의 따님은 다른 레이디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자작 부인은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꽃이군요."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즐긴 뒤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꽃인가요? 아마 값도 무척이나 비쌀 테죠."
"어머님!"
다프네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한 열렬한 구혼자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공작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얼마를 주고 샀는지 말씀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가 악마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그런 일은 하시지 않겠죠."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인 뒤 다프네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 내가 공작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지 않았소? 하고 싶은 말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당신이 가르쳐 준 것 같은데."
"네.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다프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거친 언사를 쓰셔서는 안 돼요."
"공작님께서 어떻게 거칠어지실 수 있다는 말이냐!"
어머니가 외쳤다. 그런 단어를 그의 앞에서 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냐? 공작님께서 왜 거친 언사를 쓰신다는 게야?"
"꽃 말입니다."
사이먼이 말했다.
"가격이오. 다프네는 내가 부인께 가격을 말씀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작 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중에 말씀해 주세요. 나중에 저 애가 듣지 않을 때."
그리고 그녀는 다프네가 다른 구혼자들과 함께 앉아 있던 초록색 소파로 다가가 3초 만에 모든 이들을 몰아내었다.
사이먼은 자작 부인의 군인과도 같은 절도 있는 동작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제 되었군요."
자작 부인이 말했다.
"어렵지 않군요. 다프네, 공작님과 함께 여기 앉지 그러니?"
"레일먼트 경과 크레인 씨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 말씀이세요?"
다프네가 순진한 척 물었다.
"바로 그거야."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게다가 크레인 씨는 건터 가에서 세 시에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니."
다프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두 시밖에 안 되었는데요, 어머님."
"요샌 말이지,"
바이올렛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길이 터무니없이 막힌다고 하더구나. 웬 마차들이 그렇게 많은지."
"어머니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죠."
사이먼이 대화에 끼여들며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각하."
바이올렛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와 똑같은 말을 제 자식들에게 종종 하곤 한답니다."
"인사치레로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실까 봐 드리는 말인데, 어머님의 말은 진실이시랍니다."
다프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이올렛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다프네. 자, 이제 실례하겠습니다. 전 할 일이 남아서. 오, 크레인 씨! 크레인 씨! 제가 시간에 맞춰 크레인 씨를 보내드리지 않으면 어머님께서 절 미워하실 거에요."
그녀는 불쌍한 크레인 씨의 팔을 잡고 그를 문가로 끌고 나갔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다프네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어머님께서 끔찍할 정도로 예의가 바르신 건지, 아니면 교묘하게 무례하신 건지 알 수가 없군요."
"교묘하게 예의가 바르신 건 어떨까?"
사이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 그건 절대로 아니에요."
"그렇다면 남은 건 물론......"
"끔찍할 정도로 무례하시다구요?"
다프네는 미소를 지으며 레일먼트 경의 팔에 팔짱을 끼고 목례를 하라고 자신을 가리켜 보이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자작 부인은 레일먼트 경을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그 순간 남아 있던 남자들이 마치 마법처럼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한 뒤 앞의 두 사람처럼 방을 나섰다.
"놀랄 정도로 능률적이시죠, 안 그래요?"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당신 어머님 말이오? 놀라운 분이오."
"얼마 안 가 돌아오실 걸요."
"슬픈 일이군. 드디어 당신을 독점할 수 있다고 좋아하던 참인데."
다프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이 공작님을 난봉꾼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유머 감각이 이렇게나 뛰어나신데."
"우리 난봉꾼들은 스스로 놀라운 어릿광대라고 자부한다오."
"난봉꾼의 유머란 결국 무척이나 잔인한 것이로군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놀라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녀의 갈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거기서 무엇을 찾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홍채 바깥쪽의 녹색 테두리. 이끼만큼이나 짙고 풍부한 녹색. 그는 그녀의 눈을 대낮에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을 깨달았다.
"각하?"
다프네의 나직한 목소리에 그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사이먼은 눈을 깜박였다.
"실례했소."
"머나먼 곳에 계시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실제로 머나먼 곳을 돌아보고 왔었소."
그는 다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런데 이것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군."
다프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음악 소리 같았다.
"참, 정말 먼 곳까지 여행을 하셨다죠? 진 랭커셔 바깥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답니다. 그러고 보니 전 정말 이곳에서만 살았군요."
"어쨌거나 딴 생각을 해서 미안하오. 내가 유머 감각이 모자란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가?"
"그런 말은 한 적 없어요. 공작님도 잘 아시면서."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제가 한 말은 공작님께서 보통 난봉꾼들에 비해 수준 높은 유머 감각을 가지셨다는 것이었어요."
그가 거만하게 눈썹을 하나 치켜올렸다.
"당신 오빠들은 난봉꾼으로 분류하지 않을 거요?"
"오빠들은 자신이 난봉꾼이라고 생각만 하는 거죠."
그녀가 정정했다.
"거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요."
사이먼은 코웃음을 쳤다.
"만일 앤소니가 난봉꾼이 아니라면, 난 진짜 난봉꾼을 만나는 여자를 동정해 마지않소."
"많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것만이 난봉꾼의 전부는 아니랍니다."
다프네가 쾌활하게 말했다.
"여인의 입안에 혀를 찔러 넣고 키스하는 것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사이먼은 목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되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아는 것조차 안 되는 거요."
그가 투덜댔다.
"남자 형제가 넷이라니까요."
그녀가 또 설명 대신 그렇게 말했다.
"아, 셋이라고 해두죠. 그레고리는 너무 어리니까 빼고."
"누가 당신 오빠들에게 당신 앞에서 말조심을 하란 말을 해줘야겠군."
그녀는 다시 어깻짓을 했다. 이번에는 한쪽 어깨로만.
"대부분은 제가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걸요."
사이먼은 그런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대화의 원래 주제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 같군요. 제가 하려던 말은, 난봉꾼의 유머 감각은 잔인함을 그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거예요.
스스로를 조롱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희생양이 필요한 거죠.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의외로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재치 있게 하신다는 거예요."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목을 졸라야 할지 모르겠군."
"목을 졸라요? 세상에, 왜요?"
다프네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 풍부한 소리. 사이먼은 그 소리를 온 몸 깊숙이 느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심호흡을 해도 맥박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웃는다면 결과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커다란 입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웃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사이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 오빠는 어디 갔소? 당신은 지나치게 뻔뻔스러워. 누군가가 당신을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해."
"오, 앤소니 오빠라면 자주 보시게 될 거예요. 사실 여태껏 나타나지 않은 게 놀랍군요.
어젯밤 상당히 화가 난 것 같던데,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공작님의 단점과 죄에 대한 설교를 들어야 했다고요."
"죄라는 것은 대부분 과장 되기 마련이지."
"단점은요?"
"그건 아마 진실일 거요."
그가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 말에 다프네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진실이건 아니건, 어쨌거나 오빠는 공작님께 무슨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물론 속셈은 있지."
그녀는 냉소적으로 고개를 젖히며 눈을 흘겼다.
"오빠는 공작님이 뭔가 못된 일을 꾸미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요."
"나도 못된 일을 꾸미고 싶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죠?"
"아무것도 아니오."
다프네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 우리 계획을 앤소니 오빠께 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요?"
다프네는 어젯밤 자신이 겪었던 한 시간짜리 고문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 그건 생각해 보시면 간단한 일이에요."
사이먼은 눈썹만 치켜들었다.
"친애하는 다프네......"
그녀의 입술이 놀란 듯 살짝 벌어졌다. 그가 연극조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당신을 브리저튼 양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겠지요? 함께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난 다음인데?"
"우리는 아무 일도 겪지 않았어요, 어리석은 공작님. 하지만 어쨌거나 절 다프네라고 부르셔도 될 것 같아요."
"좋아."
그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날 각하라고 불러도 좋소."
그녀는 그를 찰싹 때렸다.
"알겠소. 꼭 그래야 한다면, 사이먼이라 부르시오."
그는 입술 끝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꼭 그래야겠어요."
다프네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꼭 그래야만 해요."
그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 안에서 뭔가 기묘하고 약간은 뜨거운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꼭 그래야겠소? 그 말을 들으니 몹시 흥분되는군."
다프네는 갑자기 이름 얘기가 아닌 뭔가 좀더 은밀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낯설고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이 팔에 퍼져나갔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로 물러섰다.
"꽃이 무척 아름답군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사이먼은 나른한 시선으로 꽃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잡은 손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렇소. 아름답지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당신에게 주는 게 아니오."
다프네는 사레가 들려 마구 기침을 했다.
사이먼은 씩 웃었다.
"당신 어머님께 드리는 거요."
그녀가 놀라서 입을 살짝 벌렸다.
"참으로 영리하고도 영리하시군요. 어머님은 정말이지 공작님 발 아래서 녹아 내리실 걸요? 하지만 이 일을 두고두고 공작님 발목을 잡게 될 거예요."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그렇소?"
"네. 어머님은 공작님을 결혼식장으로 끌고 들어가시려고 더더욱 안간힘을 쓰실 테니까요. 처음에 우리가 계획을 짰을 때 못지않게 파티에서 괴롭힘을 당하실 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코웃음을 쳤다.
"원래는 몇십 명이나 되는 어머니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지만, 이젠 딱 한 명만 상대하면 될 거요."
"공작님도 어머님의 집요함에는 놀라실 거예요."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어머님은 공작님이 진심으로 마음에 드시나 봐요. 벌써 우리 두 사람만 남겨두신 지 꽤 오래되었어요. 예의범절에 어긋날 정도로."
사이먼은 잠시 생각을 하다 몸을 숙여 속삭였다.
"혹시 문가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계신 건 아닐까?"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랬더라면 어머님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거예요."
그 말에 사이먼은 미소를 지었다. 다프네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네요. 어머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오? 그건 왜요?"
"공작님의 계획은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어요. 적어도 제게 있어선 말이죠. 오늘 아침 도대체 몇 명의 구혼자들이 찾아왔었는지 아세요?"
그는 팔짱을 꼈다. 그 바람에 튤립이 거꾸로 매달렸다.
"눈치챘소."
"정말 놀라워요. 전에는 단 하루만에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방문한 적이 없었어요. 어머님께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심지어 집사인 험볼트조차 얼굴이 환하던걸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사람이 그렇게 미소짓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어머! 저기, 물이 떨어지고 있어요."
그녀는 몸을 구부려 꽃다발을 똑바로 들어주었다. 그녀의 팔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자 그녀는 그의 뜨거운 체온과 내재된 힘에 놀라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많은 것을 셔츠와 코트 위로 느낄 수 있다면. 만일 그가......"
다프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수만 있다면 내 전 재산을 내놓아도 좋으련만."
사이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운좋게도 바이올렛이 바로 그 순간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두 사람만 함께 둬서 정말 미안해요. 크레인 씨가 타고 온 말의 편자가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분을 마구간으로 모셔가 발굽을 고쳐 줄 하인을 찾아야 했거든요."
다프네가 태어난 이래 어머니는 마구간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인께서는 정말이지 완벽한 분이십니다."
사이먼은 꽃을 내밀며 말했다.
"자, 부인을 위해 가져왔습니다."
"저를 위해서요?"
바이올렛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기묘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심이세요? 난......"
그녀는 다프네를 바라보고, 그 다음에 사이먼을 바라본 뒤, 다시금 딸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세요?"
"물론입니다."
바이올렛은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다프네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눈치챘다. 전에는 그 누구도 어머니에게 꽃을 가져다 드린 적이 없었다. 적어도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로는. 바이올렛은 훌륭한 어머니였다. 하지만 다프네는 어머니 역시 한 명의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바이올렛은 코를 훌쩍였다.
""감사합니다"는 어떨까요?"
다프네는 따스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오, 다프. 넌 정말이지 최악이야."
바이올렛이 딸의 팔을 찰싹 쳤다. 어머니가 이렇게 젊어 보이기는 처음이라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감사드려요, 각하. 정말 아름다운 꽃이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사려 깊은 행동이셨어요. 언제까지나 이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겠어요."
사이먼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프네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의 하늘색 눈동자에서 진정한 기쁨을 보았다. 그리고는 당신 자식들은 눈앞에 서 있는 남자처럼 사려 깊은 행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미안함을 느꼈다.
헤이스팅스 공작. 다프네는 그 순간 자신은 반드시 그와 사랑에 빠져 버릴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기쁠 것이다.
"어머니, 제가 가서 꽃병을 가져올까요?"
다프네가 말했다.
"뭐라고?"
바이올렛은 여전히 꽃향기를 맡느라 정신이 없어서 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 그래. 물론이지. 험볼트에게 내가 할머님께 물려받은 크리스털 화병을 가져다 달라고 하렴."
다프네는 사이먼에게 고맙다는 뜻의 미소를 보낸 뒤 문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채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큰 오빠의 커다란 몸이 문을 가로막았다.
"다프네."
앤소니가 으르렁댔다.
"널 찾고 있었다."
다프네는 일단은 오빠의 성난 태도를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앤소니 오빠."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어머님께서 화병을 가져오라고 부탁하셨거든요. 헤이스팅스님이 어머님께 꽃을 가져다 주셨답니다."
"헤이스팅스가 여기에 있다고?"
앤소니는 다프네의 어깨 너머로 응접실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건가, 헤이스팅스?"
"자네 여동생을 찾아왔다네."
앤소니는 다프네를 옆으로 밀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빠의 발걸음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자네한테 내 여동생에게 구애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했단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그녀는 앤소니의 얼굴에 꽃다발을 가져다대고 흔들었다. 꽃가루가 마구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예쁘지 않니?"
앤소니는 재채기를 하며 옆으로 물러섰다.
"어머님, 전 지금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이올렛은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제 아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싶으신지요?"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좋습니다. 앤소니, 조용히 하거라."
다프네는 얼른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억눌린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말았다.
"너!"
앤소니는 동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용히 해."
"전 가서 이만 꽃병이나 가져오는 편이......"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날 당신 오빠의 손에 맡기겠다는 거요?"
사이먼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공작님께서는 혼자서 오빠에게 대적하지 못하실 정도로 나약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니오. 그저 당신 오빠는 당신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닐 뿐더러......"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들이지?"
앤소니가 으르렁댔다.
"앤소니!"
바이올렛이 외쳤다.
"내 응접실에서 그런 불손한 말을 하다니 참을 수가 없구나!"
다프네가 능글맞게 히죽히죽 웃었다.
사이먼은 고개를 젖히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앤소니를 바라보았다.
앤소니는 두 사람에게 협박하듯 인상을 지푸려 보인 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을 믿으셔선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고나 계십니까?"
"물론. 공작님께서는 네 여동생을 보러 오신 게다."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그리고 난 자네 어머님께 꽃을 사다 드렸네."
사이먼이 거들었다.
앤소니는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시선으로 사이먼의 코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콧대를 부러뜨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사이먼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저 작자의 악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나 계십니까?"
"개과천선한 난봉꾼들이 제일 좋은 남편이 되는 법이지."
바이올렛이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어머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공작님은 진짜 난봉꾼도 아닌걸요."
다프네가 거들었다.
앤소니가 너무도 희극적으로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여동생을 바라보는 바람에 사이먼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자제할 수 있었다. 자신이 웃음소리를 내는 순간 앤소니의 주먹은 두뇌와의 싸움에서 지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이먼의 얼굴이 제일 먼저 그 희생양이 되리란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모르십니다."
앤소니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어머님은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해왔는지 모르십니다."
"네가 해온 짓과 별 차이가 있겠니?"
바이올렛이 교활하게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앤소니가 외쳤다.
"세상에. 저는 저 녀석의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시 나부랭이나 장미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단 말입니다."
사이먼은 장미꽃잎이 가득 뿌려진 침대 위에 다프네를 눕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글쎄, 장미꽃 상상이라면 할 수 있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저 자식을 죽여 버리고 말겠습니다."
앤소니가 선언했다.
"이건 그저 튤립일 뿐이잖니."
바이올렛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것도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튤립. 앤소니, 넌 정말이지 네 감정을 자제하는 방법을 배워야겠구나. 예의에 어긋난다."
"저 자식은 다프네의 신발을 핥을 자격조차 없다고요."
사이먼의 머리 속에 좀더 에로틱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의 발가락을 핥고 있는 자신의 모습.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뒤가 아니던가. 다프네는 앤소니의 여동생이란 말이다. 그녀를 유혹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공작 각하를 헐뜯는 말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 이 이야기는 이만 끝내도록 하자꾸나."
바이올렛이 강조하듯 말했다.
"하지만......"
"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앤소니 브리저튼!"
사이먼은 다프네가 숨막히는 듯 웃음을 참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그 말이 왜 그렇게 우스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러겠습니다."
앤소니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각하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젠 정말 화병을 가지러 가야겠네요."
다프네는 그렇게 말하며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바이올렛은 팔짱을 끼고 앤소니에게 말했다.
"내 집에서 손님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절대로 손끝 하나 대지 않겠습니다."
앤소니가 대답했다.
"약속드리지요."
어머니를 가져 본 적이 없는지라, 사이먼은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꼈다. 브리저튼 저택은 엄밀히 말해 앤소니의 집이지 그의 어머니의 집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앤소니가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참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브리저튼."
그가 끼여들었다.
"앤소니와 저는 서로 할 말이 많으니까요."
앤소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많지."
"좋아요.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하든 두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하지만 난 이 방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바이올렛이 말하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긴 내 응접실이고, 난 여기가 편하니까. 만일 두 사람이 남자들 사이에서 대화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통하는 어리석은 교환을 나누고 싶다면, 다른 곳에 가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사이먼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다프네의 어머니는 보기와는 다른 사람인 듯했다.
앤소니는 고갯짓으로 문을 가리켜 보였고, 사이먼은 그를 따라 복도로 나섰다.
"내 서재를 이쪽일세."
앤소니가 말했다.
"여기에 서재가 있단 말이야?"
"가장은 나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자네는 다른 고셍 살잖아."
사이먼이 말했다. 앤소니는 멈춰 서서 사이먼을 훑어보았다.
"브리저튼 가문의 가장이라는 내 위치에 심각한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자네가 설마 잊은 건 아닐 테지."
사이먼은 앤소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말은, 다프네의 일 말인가?"
"바로 그거야."
"내 기억이 맞는다면 주초에 자네 입으로 우리 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자네가 그 애한테 흥미를 가질 거란 생각을 하기 전이지!"
사이먼은 입을 다물고 앤소니를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앤소니가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왜 내가 자네 여동생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자네가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란 맹세를 내게 했던 것을 제외한다면 말인가?"
앤소니가 느릿하게 물었다.
좋은 지적이다. 사이먼은 그가 정곡을 찔렀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걸 제외한다면."
그가 무뚝뚝하게 쏘아붙였다.
앤소니는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다프네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적어도 우리가 다프네의 남편감으로 인정할 만한 남자라면."
사이먼은 팔짱을 끼고 등을 벽에 기댔다.
"여동생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것 같지 않......"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앤소니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감히 내 동생을 모욕하지 마!"
하지만 여행을 하던 중에 호신술을 능숙하게 익혀 둔지라, 사이먼은 금방 두 사람의 위치를 바꿔 놓고 말았다.
"난 자네 동생을 모욕한 게 아냐. 자네를 모욕하고 있던 것이지."
그는 악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소니의 목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 사이먼은 손을 놓아주었다.
"어쨌든, 다프네는 왜 자신이 괜찮은 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네."
"그래?"
앤소니가 조롱하듯 물었다.
"난 자네와 자네 동생들의 원숭이 같은 태도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그녀는 런던 사교계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친구로만 볼 뿐 로맨스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네."
앤소니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렇군."
그리고 잠시 후 덧붙였다.
"그 애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친구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앤소니가 말했다.
"그래도 왜 자네가 그 애 냄새를 맡고 다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이거야 원, 나를 완전히 강아지로 취급하는군."
앤소니는 팔짱을 꼈다.
"잊지 말게. 옥스퍼드를 졸업한 뒤 우리가 함께 어울려 다녔다는 것을.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똑똑히 알고 있다고."
"세상에, 브리저튼. 우린 고작 스무 살이었어! 모든 남자들이 그 또래에는 바보 아닌가? 게다가 자네도 알지 않나, 내, 내......"
사이먼은 갑자기 혀에 이상한 느낌이 오는 것을 깨닫고, 얼른 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제기랄. 요새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극히 드물지만,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했을 때는 언제나 이 지경이다. 감정에 대한 자제력을 잃은 순간 말하는 능력조차 잃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일이 생기면 화가 더더욱 치밀기만 한다. 그렇게 되면 말을 더듬는 것은 더욱더 심해지고, 정말 끔찍한 악순환이었다.
앤소니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괜찮나?"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목에 먼지가 좀 걸린 것뿐이야."
그는 거짓말을 했다.
"차를 가져오라고 할까?"
사이먼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차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짜 목에 먼지가 걸린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마다하지 않을 테니까.
앤소니는 초인종을 울리고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하던 말이 뭐였지?"
사이먼은 침을 삼켰다. 화가 좀 가라앉았으면 했다.
"그저 내 악명의 절반도 진실이 아니란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네라는 말을 하려던 것뿐이야."
"그래, 하지만 악명을 떨치게 된 나머지 반은 내 눈으로 목격했었지. 자네가 가끔 다프네와 만나는 것은 별로 상관없지만, 그 애에게 구애를 하는 건 싫단 말일세."
사이먼은 친구 - 아니, 친구라고 믿어 왔던 남자 -를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진심으로 자네 동생을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가 절대 결혼할 계획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 다프네는 결혼하고 싶어하고."
앤소니는 어깻짓을 했다.
"솔직히 두 사람을 댄스 플로어 반대편에 함께 둔 것만으로도 난 최대한 노력을 한 거였어."
사이먼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앤소니의 태도가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이해할 수 있을뿐더러 썩 훌륭한 태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앤소니는 그저 자기 여동생을 위해 그러는 것뿐이니까.
사이먼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만일 그에게도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혼자들에게 까다롭게 굴었을 것이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앤소니가 외쳤다. 찻쟁반을 든 하녀 대신 다프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님께서 두 사람이 끔찍한 일을 저지를 기세라고 말씀하셨어요.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옳겠지만, 혹시나 서로를 죽인 게 아닌지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되어서요."
"아냐."
앤소니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저 목을 조른 것뿐이지."
다프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역시 칭찬할 만한 여성이었다.
"누가 누구 목을 졸랐나요?"
"내가 먼저 졸랐고, 그 다음에는 사이먼이 화답을 했지."
"그렇군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즐거운 광경을 놓쳐서 아쉽군요."
그 말에 사이먼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다프."
그가 입을 열었다.
앤소니는 홱 돌아섰다.
"어째서 이 애를 다프라고 부르나?"
그는 다프네를 노려보았다.
"네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을 했니?"
"물론이에요."
"하지만......"
"내 생각엔, 우리가 솔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사이먼이 끼여들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에요.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제가 진작에 그렇게 말씀드렸다는 게 기억나실 텐데."
"지적해 주어 고맙소."
사이먼이 웅얼거렸다. 다프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참을 수가 없는걸요.
게다가 남자 형제가 넷이나 되고 보니, "내가 말했잖아"란 말을 할 기회는 언제나 놓치지 않는 편이죠."
사이먼은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중 누굴 더 딱하게 여겨야 할지 모르겠군."
"이게 무슨 일이지?"
앤소니가 물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딱하게 여겨야 할 사람은 나지. 나야말로 저 애보다 훨씬 더 착한 오라비거든."
"사실이 아니에요!"
사이먼은 두 사람의 말다툼을 무시하며 앤소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 싶나? 사실은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