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3)

최근 런던은 원대한 야망을 가진 어머니들로 넘쳐난다. 지난 주 레이디 워스의 무도회에서 본 필자는 열 명 남짓한 독신 남성들이 구석에 모여 원대한 야망을 가진 어머니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중 누가 가장 우세한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으나, 레이디 브리저튼과 페더링턴 부인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는다. 현재 F 부인이 레이디 B를 근소한 차이로 앞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페더링턴 가에서는 세 딸들을 매물로 내놓았고, 레이디 브리저튼은 한 명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나 브리저튼 가의 딸 E, F 및 H의 나이가 차면, 미혼 남성들은 안전을 위해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고 사료되는 바이다. 레이디 B는 세 딸을 앞세우고 주위도 둘러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무도회장을 가로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그녀가 쇠로 만든 장화를 신지 않기만을 하나님께 빌도록 하자.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4월 24일. 

이렇게 끔찍한 밤은 처음이라고 사이먼은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브리저튼 양과의 만남은 오히려 축복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친한 친구의 여동생에게 비록 잠시나마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녀를 유혹하려던 나이젤의 바보 같은 행동이 바람둥이로서의 그의 감수성에 지극히 거슬리긴 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나이젤을 범죄자로 취급해야 할지 친구로 대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다프네의 우유부단함이 그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 그가 견뎌야 하는 고문에 비할 게 못 되었다. 

무도회장으로 몰래 들어가 레이디 댄버리께 안부를 전한 뒤 들키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온다던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였다. 무도회장 안으로 막 발을 들여놓는데, 옥스퍼드 시절의 친구 한 명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 친구는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무척 매력적이었으나 운나쁘게도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새로운 공작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것이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지름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 것이다. 신랄함으로 악명 높은 사이먼조차 옛 친구의 아내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시간 뒤 그는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미혼 여성들에게 소개되었으며,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미혼 여성들의 어머니들에게도 소개되었으며,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미혼 여성들의 결혼한 누이들에게도 소개되고 말았다. 사이먼은 그 중 어떤 부류의 여자들이 더 혐오스러운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미혼 여성들은 지극히 지루했고, 어머니들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귀찮게 굴었으며, 누이들은 너무도 노골적으로 사이먼의 관심을 끌려고 했으므로 자신이 혹시 매음굴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 중 여섯 명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제안을 해왔고, 두 명은 자신의 내실로 초대하는 쪽지를 몰래 그에게 건넸으며,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돌이켜 보면 볼수록 브리저튼 양이 괜찮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다프네 브리저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시간쯤 전에 큰 키에 무시무시한 오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녀를 얼핏 본 것도 같았다. 

사이먼은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 형제들을 한꺼번에 둘쑤셔 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진 듯했다. 생각해 보니, 파티에 참석한 미혼 여성들 중 오직 그 여자에게만 소개되지 않은 것 같았다. 

뭐, 아까 복도에 그녀와 버브룩을 놓아두고 왔지만 버브룩이 또 문제를 일으켰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를 세게 갈겨 주고 왔으니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게다가 술까지 마셔댔으니 더 오래 걸리겠지. 다프네가 얼간이 나이젤 문제에는 어리석을 만큼 마음이 여리기는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복도에서 함께 있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먼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한 귀퉁이에 모여 있는 브리저튼 가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사이먼처럼 젊은 여자들과 아니든 어머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이먼보다는 적은 수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사교계에 갓 데뷔한 아가씨들은 대부분 브리저튼 가의 남자들보다 사이먼의 주위를 맴도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했다. 

사이먼은 짜증이 나서 그들을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벽에 나른한 자세로 기대 있던 앤소니는 그의 표정을 보고 씩 웃으며 와인 잔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젖혀 사이먼의 왼쪽을 가리켜 보였다. 사이먼이 돌아다보니 끔찍할 정도로 많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채 딸을 앞세우고 한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겹겹이 두른 레이스에 끝없는 주름단. 레이스. 레이스. 

그는 다프네를 떠올렸다. 그녀의 심플한 초록색 드레스. 다프네, 그녀의 진실한 갈색 눈동자와 환한 미소......" 

"각하!" 

세 딸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공작 각하!" 

사이먼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 새인가 온몸에 레이스를 감은 여자 넷이 그를 겹겹이 둘러싸 앤소니를 노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여자가 말했다. 

"각하. 각하를 접견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사이먼은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자들이 그를 너무도 세게 짓눌러 대고 있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조지아나 헉슬리가 우리를 이리로 보냈답니다." 

여인은 끈질기게 말했다. 

"그녀가 제게 꼭 딸들을 각하께 소개하라고 해서요." 

조지아나 헉슬리가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건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평소라면 이처럼 대담한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계속 말을 해나갔다. 

"하지만 공작님의 선친께서는 저의 친우이셨답니다." 

사이먼의 몸이 굳어졌다. 

"진정 놀라운 분이셨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사이먼의 머리 속을 후벼팠다. 

"작위에 대한 의무를 절대 잊지 않으셨지요. 분명히 좋은 아버지이셨을 테죠." 

"나야 알 도리가 없지요." 

사이먼이 잘라 말했다. 

"오!" 

여인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한 뒤에야 간신히 말했다. 

"그렇군요. 아, 네."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연한 태도를 보이면 여인이 알아서 떠나주겠지. 하지만 제기랄. 도대체 앤소니는 어디 있는 걸까? 자신이 대회에서 상을 탄 종마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당하는 것도 기분 나쁜데, 여기 서서 전 공작이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였느냐는 말까지 들어야 한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공작 각하! 각하!" 

사이먼은 억지로 자기 앞에 서 있는 레이디에게 시선을 맞추며 침착하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결국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것은 그렇게 하면 그가 기뻐할 줄 알고 그러는 것뿐일 테니까.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각하께서 아직 클라이브던 백작일 때도 한 번 소개된 적이 있었답니다." 

"그렇군요." 

사이먼은 레이디들이 친 바리케이드 사이에 뚫고 달아날 만한 구석이 없나 살폈다. 

"이쪽은 제 딸들입니다." 

여자는 세 명의 젊은 레이디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명은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세 번째는 아직 젖살이 덜 빠진데다가 피부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렌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 역시 오늘 저녁이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디가 계속 말했다. 

"모두들 사랑스럽지요? 제 기쁨과 자부심의 원천이랍니다. 게다가 모두 유순하기까지 하지요." 

사이먼은 개를 사러 갔을 때 그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했다. 

"각하, 푸르덴스, 필리파, 페넬로페를 소개해 올립니다." 

  아가씨들은 인사를 했다. 그 누구도 감히 그의 눈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집에 딸이 하나 더 있답니다. 펠리시티라고 하는데,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아서 이러한 모임에는 데려오지 않는답니다." 

도대체 그 얘기를 왜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저 지루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것을 그는 예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디의 성함은......?" 

"오, 실례했습니다! 저는 페더링턴 부인이랍니다. 제 남편은 3년 전에 세상을 떴답니다. 그이가 공작님 선친의......좋은 친구였답니다." 

그녀가 마지막에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도 아버지 얘기를 듣고 사이먼이 보인 반응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사이먼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르덴스는 피아노포르테(피아노의 원래 이름)를 상당히 잘 친답니다." 

페더링턴 부인이 쾌활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먼은 프루덴스의 고통스런 표정을 바라보며, 재빨리 페더링턴 저택에서 열릴 음악회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랑스런 필리파는 훌륭한 수채화가이지요." 

필리파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페넬로페 양은?" 

사이먼이 짓궂게 물었다. 

페더링턴 부인은 괴로워하는 셋째 딸에게 겁먹은 표정을 보냈다. 

페넬로페는 얼굴도 예쁘지 않은데다가 어지간히 피둥피둥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골라 준 드레스 때문에 더욱 끔찍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상냥했다. 

"페넬로페요?" 

페더링턴 부인이 약간 높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페넬로페는......어......저......그냥 페넬로페예요!"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페넬로페는 양탄자 아래로 기어 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이먼은 만일 이들 중 한 명과 꼭 춤을 춰야만 할 상황이라면 그녀와 추겠다고 작정했다. 

"페더링턴 부인." 

오직 레이디 댄버리만이 낼 수 있는 짧고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공작을 괴롭히는 중인가?" 

사이먼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페넬로페 페더링턴의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올라 웅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레이디 댄버리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천천히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 

레이디 댄버리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페더링턴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디 댄버리도 가만히 있었다. 

페더링턴 부인이 마침내 사촌을 보러 가야겠다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세 딸을 데리고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사이먼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얼굴의 웃음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 친절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봅니다만." 

"하. 저 여자 머리 속에는 깃털만 들어 있지. 그 딸들도 마찬가지고. 제일 못생긴 셋째 딸만 빼고 말이지." 

레이디 댄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다른 색깔의 옷만 입혔어도......" 

사이먼은 참으려 했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레이디께선 도무지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나 보군요?" 

"그래. 재미있잖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 자네는 정말 괴물 같은 손님이야. 지금쯤이면 파티를 연 주인에게 와서 인사를 할 만큼의 매너는 익혔을 게 아닌가." 

"레이디께서 계속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여 계셔서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군." 

사이먼은 레이디 댄버리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자네 친구 브리저튼이 오는군." 

사이먼은 그녀가 눈인사를 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앤소니가 다가오자 레이디 댄버리는 대뜸 그를 겁쟁이라고 불렀다. 

앤소니는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작에 이리로 와서 페더링턴 모녀에게서 친구를 구해 줄 수도 있었잖나." 

"하지만 저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는데요." 

"흠." 

그 외에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앤소니가 말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노인네야. 레이디 댄버리가 그 망할 휘슬다운이란 여자라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그 가십 칼럼니스트 말인가?" 

앤소니는 고개를 끄덕인 뒤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구석의 화분 뒤로 사이먼을 이끌었다. 걸어가며 앤소니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수많은 젊은 레이디들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네." 

사이먼은 낮은 소리로 욕을 했지만 앤소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할걸?"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는 싫으니까 나보고 인정하라고 하지는 말게." 

앤소니는 다시 웃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발벗고 나서서 자네를 다른 아가씨들에게 소개할 거야." 

"그런 짓을 한다면 자네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 될걸." 

사이먼이 경고했다. 

앤소니가 씩 웃었다. 

"칼, 아니면 권총?" 

"아, 독약. 독약이 낫지." 

"저런." 

앤소니는 걸음을 멈추고 두 명의 브리저튼 형제 앞에 멈춰 섰다. 둘 다 밤색 머리에 큰 키, 완벽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먼은 한 사람의 눈은 녹색이며, 다른 한 사람은 앤소니처럼 갈색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는 헛갈릴 정도로 비슷했다. 

"내 동생들은 기억하지? 베네딕트와 콜린. 베네딕트는 이튼에서 봤으니 기억할 테지. 이 녀석이 처음에 입학한 뒤 우리 뒤를 세 달 동안이나 쫓아다녔잖아." 

"사실이 아닙니다!" 

베네딕트가 웃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콜린은 만난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군." 

앤소니가 말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자네와 마주칠 일이 없었을 거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콜린이 쾌활하게 말했다. 

사이먼은 콜린의 녹색 눈이 장난스럽게 빛나는 것을 보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콜린이 더욱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앤소니 형님이 공작님에 대해 몹시 모욕적인 말을 하더군요. 우리 두 사람이 잘 맞을 거라면서요." 

앤소니는 눈을 굴렸다. 

"우리 어머니께서 콜린 때문에 머리가 돌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하는 이유가 뭔지 다들 알겠지." 

콜린이 말했다. 

"저는 그 점에 자부심을 느끼는데요." 

"다행히도 어머님께서는 콜린의 마법에서 잠시 벗어나 계셨지." 

앤소니가 말을 이었다. 

"유럽 대륙을 한 바퀴 돌고 방금 돌아왔거든." 

"오늘 저녁에 도착했지요." 

콜린이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젊은이다운 매력이 있었다. 

다프네와는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고 사이먼은 판단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얼마 전에 여행에서 돌아왔다네." 

"네, 공작님께선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오셨다고 하더군요. 언젠가 한 번 여행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콜린의 말에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프네는 만나셨나요? 파티에 참석한 브리저튼 가의 자녀 중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다프네뿐인데." 

베네딕트가 물었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사이먼이 고민하고 있는데 콜린이 코웃음을 쳤다. 

"이 자리에 없기는. 저기에 있구만. 아주 끔찍해 보이는데요." 

사이먼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다프네가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 옆에서 콜린 말대로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떠올랐다. 다프네 역시 어머니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소개되어지는 끔찍스런 미혼 여성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성적이고 직선적인 여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이는 고작 스물쯤 되었을까. 성이 아직도 브리저튼인 걸로 봐서는 아직도 처녀인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있으므로 그녀 역시 끝없는 소개의 굴레에 갇히는 것이 당연했다. 

다프네 역시 아까의 사이먼만큼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사이먼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중 하나가 가서 다프네를 구해오자." 

베네딕트가 말했다. 

"에이." 

콜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맥클스필드에게 소개한 지 고작 10분밖에 안 되었는걸요." 

"맥클스필드?" 

사이먼이 물었다. 

"백작 말입니다. 캐슬포드의 아들이죠." 

베네딕트가 대답했다. 

"10분?" 

앤소니가 물었다. 

"불쌍한 맥클스필드." 

사이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다프네가 그리 지겨운 애라는 건 아니지." 

앤소니가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어머님께서 만약......어떤 남자를......음......" 

"공략." 

베네딕트가 도왔다. 

"......하시겠다고 결정하면." 

앤소니는 동생에게 고맙다는 듯 목례를 했다. 

"어머님께선 몹시, 아......" 

"무자비하시죠." 

콜린이 말했다. 앤소니가 미소지었다. 

"그래. 바로 그거지." 

사이먼은 방 저편을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몹시 지겨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맥클스필드 역시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레이디 브리저튼의 눈이 야심차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사이먼은 젊은 백작이 딱하게 여겨졌다. 

"우리가 다프네를 구해 주자." 

앤소니가 말했다. 

"정말 그래야 할 것 같군." 

베네딕트가 덧붙였다. 

"그리고 맥클스필드도." 

앤소니가 말했다. 

"아, 당연하지." 

베네딕트가 덧붙였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모두 말만 번지르르하군." 

콜린이 비아냥거렸다. 

"그럼 네가 가서 다프네를 구해 올래?" 

앤소니가 쏘아붙였다. 

"말도 안 돼요. 구해 오자는 말을 내가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큰 형님은......"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거지?" 

사이먼이 마침내 물었다. 

브리저튼 형제들은 똑같이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 형님들께서 차마 공작님께 할 수 없는 말은요......자기들이 어머니를 무서워한다는 것이지요." 

콜린이 조소하듯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 

앤소니가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했다. 

베네딕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말엔 동의해." 

사이먼은 이보다 어이없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브리저튼 가의 세 형제들. 큰 키에 핸섬하고 운동에 뛰어나 온 나라 아가씨들의 흠모를 받는 세 남자. 

하지만 세 명 모두 한 여인이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다. 

"만일 내가 다프를 구해 온다면 어머니는 대신 날 잡으실 거라고. 그러면 난 끝장이야." 

앤소니가 설명했다. 사이먼은 앤소니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미혼 여성들에게 소개되는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꾹 참았다. 

"내가 왜 전염병처럼 이런 자리를 피하는지 이젠 자네도 알겠지." 

앤소니가 우울하게 말했다. 

"난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단 말이야. 아가씨들과 그 어머니들이 날 못 찾으면, 어머님은 내가 그들을 찾아가게 만드시지." 

"아!" 

베네딕트가 외쳤다. 

"헤이스팅스님께서 다프네를 구해 주시면 어떨까요?" 

사이먼은 레이디 브리저튼 - 그 순간 그녀는 손으로 맥클스필드의 팔을 꼭 움켜잡고 있었다 - 을 한 번 쓱 본 뒤, 

차라리 죽을 때까지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얼른 둘러댔다. 

"우리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일은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될 걸세." 

앤소니가 반박했다. 

"그럴 일은 없을걸. 자네는 공작이니까." 

"그래서?" 

"그래서라니?" 

앤소니가 외쳤다. 

"어머님도 다프네가 공작과 함께 있는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쯤은 개의치 않으실 걸세." 

"이봐. 자네 어머님의 재단에서 무참히 살해당하는 희생양 노릇을 하라는 건가?" 

사이먼이 격하게 말했다. 

"정말 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신 모양이네요?" 

콜린이 빈정댔다. 사이먼은 그 말을 무시했다. 

"게다가 자네 여동생이 말하길......" 

세 명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고, 사이먼은 당장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꽤 커다란 실수를. 

"다프네를 만났나?" 

앤소니가 물었다. 지나치게 예의바른 앤소니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사이먼이 대답하기도 전에 베네딕트가 슬쩍 몸을 기대오며 물었다.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죠?" 

"맞아요." 

콜린이 오늘밤 들어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죠?" 

사이먼은 형제들을 바라보다가 왜 다프네가 여태껏 미혼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 호전적인 트리오라면 아무리 확고한 마음을 가진, 혹은 바보같은 마음을 가진 구혼자라도 겁을 줘서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이젤 버브룩도 그런 케이스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도회장으로 오던 길에 복도에서 다프네와 마주쳤지. 그녀가......" 

그는 의미심장하게 브리저튼 형제들을 둘러보았다. 

"이 집 식구라는 사실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어서 내가 소개를 했지." 

앤소니는 베내딕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마 버브룩을 피해 달아나던 때 만났나 보군." 

베네딕트는 콜린을 바라보았다. 

"버브룩은 어떻게 된 거야? 너 아니?" 

콜린은 어깻짓을 했다. 

"전혀. 아픈 가슴을 달래려고 집에 갔을지도 모르죠." 

혹은 아픈 머리를 달래려고 갔을지도. 사이먼은 신랄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군." 

큰형다운 표정이 사라지자 앤소니도 같은 바람둘이에 사이먼의 가장 친한 친구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빼고." 

베네딕트가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작님은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죠?" 

"그럴 기회가 없었잖아." 

사이먼이 날카롭게 말했다. 짜증이 막 폭발하려 했다. 

"자네가 미처 몰랐다면 설명해 주지, 앤소니.  자네는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형제가 많아서 그 모두에게 소개되려면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걸린단 말이야." 

"지금은 두 명밖에 없는데요." 

콜린이 지적했다. 

"난 집으로 가겠네. 자네들 세 명은 정신이 나갔어." 

사이먼이 말했다. 그러자 형제 중 가장 보호심이 강한 것 같아 보이는 베네딕트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는 누이가 없으시지요?" 

"그렇네. 다행하게도." 

"나중에라도 딸을 낳아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딸을 가질 일은 아마 평생 없을 테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앤소니가 말했다.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지. 다프는 다른 웬만한 여자들보다 훨씬 낫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구혼자가 없단 말이야." 

베네딕트가 말했다. 

사이먼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앤소니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완벽하게 착한 아이인데 말이야." 

사이먼은 자신 역시 그녀를 벽에 밀어붙인 뒤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을 뻔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만일 그녀가 브리저튼 가의 사람이란 것만 몰랐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프가 최고지." 

베네딕트가 말했다.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몰론이야. 정말 멋진 여자라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사이먼이 말했다. 

"멋진 여자건 아니건, 내가 저리로 가서 그녀를 구할 수는 없네. 자네 어머님께서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니까."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정말 평판이 안 좋으신 모양이군요." 

콜린이 말했다. 

"대부분은 과장된 거야."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왜 자신이 변명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것 참 안되셨네요.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콜린이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이 젊은이 앞에 펼쳐질 길고도 방탕한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다. 

앤소니가 사이먼의 등을 주먹으로 치며 그를 앞으로 밀었다. 

"어머님도 잘 말씀드리면 마음이 바뀌실 거야. 가지." 

사이먼은 별 수 없이 다프네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커다란 소동을 을이켜야만 하는데, 소동이 벌어지면 자신이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앤소니였더라도 아마 똑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어머님!" 

앤소니는 자작 부인에게 다가가며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녁 내내 뵙지 못했군요." 

사이먼은 아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레이디 브리저튼의 푸른 눈동자가 환하게 빛나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야심만만한 어머니이긴 해도, 레이디 브리저튼은 자식들을 몹시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앤소니! 널 보게 되어서 정말 기쁘구나. 다프네와 나는 맥클스필드 경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단다." 

앤소니는 맥클스필드 경에게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다프네와 잠시 시선이 마주치자 사이먼은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그녀 역시 눈에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머리가 좋은 여성이다. 

"그리고 이쪽은?" 

레이디 브리저튼이 사이먼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새 헤이스팅스 공작이지요.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를 함께 다녔는데, 기억하시지요?" 

"물론이다." 

레이디 브리저튼이 예의바르게 말했다. 

여태까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던 맥클스필드는 그 기회를 틈타 얼른 말했다. 

"전 이만 아버님을 뵈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앤소니는 젊은 백작에게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얼른 가보도록 하시지요." 

젊은 백작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 버렸다. 

"난 백작이 아버지와 사이가 몹시 나쁘다고 알고 있었는데." 

레이디 브리저튼이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이에요." 

다프네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사이먼은 웃음을 참았다.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없이 그에게 경고했다. 

"어쨌든 저 사람은 평판이 무척 나쁘더라." 

레이디 브리저튼이 말했다. 

"요사이에는 그런 소문이 많이 나도는 듯합니다."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다프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이번에는 사이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했다. 

다프네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가 새로 얻은 작위가 그의 나쁜 평판을 가려 줄 수 있는지 저울질해 보는 듯했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줄 압니다, 레이디 브리저튼. 지금이라도 만나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사이먼이 부드럽게 말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다프네를 손짓해 불렀다. 

"제 여식 다프네입니다." 

사이먼은 장갑 낀 다프네의 손을 잡고 손등에 예의바르게 키스했다. 

"공식적으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리저튼 양." 

"공식적으로?" 

레이디 브리저튼이 물었다. 

다프네는 입을 딱 벌렸지만, 사이먼은 그녀가 말문을 열기 전에 먼저 말했다. 

"이미 오라버니께는 오늘 저녁 잠시 만났던 일에 대해 설명을 했소." 

레이디 브리저튼이 다프네를 홱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 공작님께 소개를 받았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다프네가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백작님 때문에 바빴잖아요. 그 전에는 웨스트버러 경, 그리고 그 전에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 다프네." 

레이디 브리저튼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사이먼은 자신이 지금 웃음을 터뜨리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일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이디 브리저튼은 그에게 아주 멋진 미소를 선보였다. 

사이먼은 다프네가 그 환한 미소를 누구에게 물려받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레이디 브리저튼은 그의 나쁜 평판 정도는 무시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에 기묘한 빛이 감돌며, 다프네와 사이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사이먼은 갑자기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앤소니가 슬쩍 몸을 기대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무척 미안하군." 

사이먼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자네를 죽이고 싶어." 

다프네의 냉랭한 눈빛이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디 브리저튼은 다행히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이미 화려한 결혼식 광경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레이디 브리저튼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들 뒤에 있는 뭔가에 초점을 고정했다. 

그리고 너무도 속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기에, 사이먼, 앤소니, 다프네는 모두들 목을 쭉 빼고 뭐가 있나 바라보았다. 

페더링턴 부인이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프루덴스와 필리파가 바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페넬로페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절대절명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닫고 사이먼은 비장의 카드를 쓸 결심을 했다. 

"브리저튼 양." 

그는 다프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저와 함께 춤을 추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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