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3)

본 필자의 귀에 나이젤 버브룩이 모든 보석상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는 광경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누가 버브룩 부인이 될 것인가?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4월 28일.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다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무도회장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레이디 댄버리는 촛불의 아름다움과 밝음을 사랑했기에 어두운 구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도망치다가 필리파 페더링턴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목소리가 워낙 큰 필리파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다프네 브리저튼! 다치지 않았어요?" 

그 말이 나이젤의 관심을 끌었는지, 그는 놀란 새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얼른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그에게 붙잡히기 전에 먼저 여성 전용 휴게실로 달아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이젤은 그녀를 복도로 몰아넣고 그녀에게 사랑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창피스러운데, 이젠 이 남자 - 충격적으로 핸섬하고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태연한 낯선 남자 - 가 그 모든 광경을 보고 만 것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이다! 

다프네는 웃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런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어머니는 모든 독신남에게 다프네를 소개했으며,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그녀의 얘기를 꺼냈다. 아, 물론 이 남자가 유부남이어서 어머니의 희생자 명단에 올라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프네는 본능적으로 그가 런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 사교계가 이 남자에 대한 얘기로 술렁거렸을 테니까.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완벽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조차 그의 앞에서는 창피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의 시선은 기묘할 정도로 집요하고, 어찌나 푸른지 스스로 빛을 뿜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짙은 색이었으며, 키가 굉장히 컸다. 거의 오빠들만큼 컸다. 보통 그렇게 큰 남자는 드물었다. 

이 남자라면 브리저튼 가의 남자들을 보고 킥킥대는 젊은 레이디들의 관심을 영원히 빼앗아 버릴 수 있을 거야. 다프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게 왜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 다프네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남자 같은 남자는 절대 자신 같은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눈부신 존재 앞에, 바닥에 앉아 있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마치 서커스의 광대라도 되는 양 그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무엇이건 간에,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치밀어 그녀는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그녀의 질문에 왜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않았는지 사이먼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악마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라고 부추겼다. 

"난 단지 레이디를 구하려던 것뿐이었소만, 보아하니 레이디께선, 내 도움이 필요 없으신 것 같군요." 

"오." 

여인은 기분이 좀 누그러진 듯했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그의 말을 되새겨보며 입술을 약간 삐죽거렸다. 

"그렇다면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군요. 10초 전에 나타나시지 않은 게 유감이네요. 그랬더라면 제가 이분을 때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사이먼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턱에는 벌써 푸르스름한 멍이 나타나고 있었다. 남자는 신음하고 있었다. 

"라프, 오, 라프. 당신을 사랑해요, 라프." 

"레이디 라프?" 

사이먼은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매우 매력적인 여자였다. 이 각도에서 보니 그녀의 보디스 안이 거의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미묘한 유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한 그의 내리깐 시선이 그녀의 얼굴이 아닌 다른 부위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 이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우리?" 

사이먼이 되뇌었다. 

그녀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아까 절 구해 주려 하셨다고 말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소." 

사이먼은 엉덩이에 손을 얹고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그럼 이 남자를 길거리에 끌어내는 게 좋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잖아요?" 

그녀가 외쳤다. 사이먼은 꽤 거만한 투로 대꾸했다. 

"친애하는 라프 양, 지금 지나친 친절을 베푸시는 게 아니오? 이 남자는 레이디를 공격하려 했소." 

그녀가 대답했다. 

"그는 절 공격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는 그저......그는 그저......오, 그래요. 저를 공격하려고 했다고 쳐요. 하지만 해를 끼친 건 아니잖아요." 

사이먼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정말 여자들이란 모순적이기 그지없군. 

"그 점을 확신하시오?" 

사이먼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이젤은 나쁜 짓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그저 판단을 잘못한 것뿐이랍니다." 

"그렇다면 레이디께선 나보다 관대한 사람인 것 같소." 

사이먼이 나직하게 말했다. 

여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드러운 한숨을 사이먼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품위 있게 말했다. 

"나이젤은 나쁜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저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것뿐이죠. 제 친절을 다른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이먼은 이 여자에게 존경 비슷한 것을 느꼈다. 대부분 그가 아는 여인들은 이런 순간 히스테리를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상황에 대처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상냥했다. 그녀가 아니젤이라는 작자를 변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초록색 실크 드레스를 손으로 털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쪽 어깨 위로 땋아 내려져 가슴 바로 위에서 유혹하듯 컬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 뭐라고 재잘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도무지 땋아 놓은 밤색 머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백조 같은 목 위에 실크 리본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 머리카락을 입술로 따라 그리고픈 어처구니없는 충동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순진한 여인을 희롱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난봉꾼에 바람둥이라 여겼다. 문제될 것은 없을 듯싶었다. 그녀를 집어삼키거나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딱 한 번만. 단 한 번의 키스만.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너무도 달콤하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듣고 계세요?" 

마지못해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얼굴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기에, 그녀를 유혹하는 상상을 하기가 어려웠다. 

"제 말 듣고 계셨나요?" 

"물론이오." 

그가 거짓말을 했다.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 말이 맞소." 

그가 인정했다. 

그녀는 끙 하는 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는 이를 갈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다고 하셨지요?" 

그는 어깻짓을 했다. 

"레이디께서 그 말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서." 

사이먼은 그녀가 심호흡을 하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그녀의 말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칭찬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마침내 그녀가 우스꽝스러울 지경으로 단조롭게 말했다. 

"저를 도우실 생각이 없다면 그냥 자리를 떠나주시는 게 나을 듯싶어요." 

사이먼은 얼뜨기 같은 행동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미안하오. 물론 레이디를 도와드리겠소."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아직까지 바닥에 누워 간간이 신음을 내뱉는 나이젤을 돌아보았다. 사이먼도 그를 내려다보았다. 몇 초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의식을 잃은 남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여인이 말했다. 

"그렇게 세게 치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술에 취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가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숨결에서 약간 술 냄새가 나긴 했지만, 이 사람, 전에는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는걸요." 

사이먼은 그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여기에 그냥 내버려두어도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이먼은 훌륭한 의견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 바보 머저리를 치료받게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왠지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기묘한 충동을 느꼈다.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다행히 자신이 느끼는 어색한 감정이 목소리에 배어 나오지 않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마차를 부르겠소." 

"다행이군요." 

그녀가 끼여들었다. 

"정말이지 그를 여기에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답니다. 잔인하잖아요." 

이 덩치만 커다란 멍청이가 그녀를 공격할 뻔했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몹시 관대한 처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말은 하지 않고 자기 계획만을 말했다. 

"내가 마차를 부르러 가 있는 동안 레이디께서는 서재에서 기다리시오." 

"서재에서요? 하지만......" 

"서재에서." 

그가 단호하게 되풀이했다. 

"문을 닫고 계시오. 설마 쓰러진 나이젤과 함께 복도에서 발견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서재에서 기다리시오. 내가 돌아오면 함께 나이젤을 내 마차에 태웁시다." 

"마차까지 옮기는 건 어떻게 하죠?" 

그는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아직은 아무런 계획이 없소." 

잠시 다프네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자신의 영웅이 될 뻔한 남자가 구제하기 힘들 정도로 거만하다는 판단을 내리려던 차에 그가 그런 식으로 미소를 지어 버린 것이다. 소년 같은 그 미소, 20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모든 여자의 심장을 녹여 버릴 것 같은 그 미소. 

그런 미소를 보고 난 뒤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레이디들을 매혹시키는 방법을 터득한 네 명의 남자 형제들과 자란지라, 다프네는 자신이 남자의 매력에 면역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슴이 마구 뛰고 뱃속이 기묘하게 뒤틀렸으며, 다리가 녹은 버터처럼 흐물거렸다. 

"나이젤." 

다프네는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관심을 돌리려고 애썼다. 

"나이젤을 봐야겠군요."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약간은 거칠게 나이젤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이젤? 나이젤? 이제는 일어나야 해요. 나이젤." 

나이젤이 신음했다. 

"다프네. 오, 다프네." 

검은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다프네? 지금 다프네라고 했소?" 

그녀는 남자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당신 이름이 다프네였소?" 

그가 바보 천치가 아닌가 의심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네."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다프네 브리저튼은 아니겠지."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본인입니다만." 

사이먼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갑자기 어딘가에 통증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두뇌가 그녀의 머리카락이 짙은 밤색이라는 것을 분석해 냈다. 유명한 브리저튼 가의 머리카락. 뿐만 아니라 브리저튼의 코, 광대뼈. 제기랄. 이 여자가 앤소니의 여동생이었어! 

제기랄. 

친구들 사이에는 십계명이라 부를 만한 불문율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친구의 여동생을 탐하지 말라"이다. 

그가 멍하니 서서 바보처럼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엉덩이에 손을 얹고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세요?" 

"사이먼 바셋." 

그가 중얼거렸다. 

"공작?" 

다프네가 가까스로 말했다. 

사이먼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그는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 맙소사. 설마 기절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오빠 앤소니가 오후 내내 그에게 결혼하지 않은 젊은 공작이 젊은 미혼 여성 전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설교를 해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앤소니는 다프네를 그 규칙의 유일한 예외로 규정했었지만, 그녀는 저주스러울 정도로 창백했다. 

"설마 그런 거요?" 

그녀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물었다. 

"기절할 거요?" 

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그녀는 화가 난 듯했다. 

"절대 아니에요!" 

"다행이군." 

"그저......" 

"뭐요?" 

사이먼이 의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글쎄요." 

그녀는 우아하게 어깻짓을 했다. 

"각하에 대한 경고를 들었거든요."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누구에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가 바보 천치라도 되는 양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두에게요." 

"그건 말이오. 치......" 

갑자기 말을 더듬을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어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런 식의 제어는 이미 완벽하게 익혀 놓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감정을 자제하려는 남자로만 보일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하던 대화의 주제로 보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없을 듯했다. 

"친애하는 브리저튼 양." 

그는 아까보다 더 담담하고 절제된 어투로 다시 말했다. 

"그 말은 믿기가 어렵소." 

그녀는 다시금 어깻짓을 했다. 자신이 분개하는 것을 그녀가 즐기고 있다는 짜증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가 빈정거렸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지만 오늘 신문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답니다." 

"뭐라고요?" 

"휘슬다운에요." 

그녀는 마치 그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휘슬......뭐라고?" 

그녀는 한참 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런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공작님께서는 모르시겠군요." 

그녀가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며 부드럽게 말했다. 

공작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저돌적인 자세였다. 

"브리저튼 양, 목을 졸라서라도 당신 입에서 정보를 얻어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막 드는 참이오." 

"가십 신문이에요." 

그녀가 머뭇머뭇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게 전부예요. 바보 같은 소리 같지만, 모든 사람들이 읽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거만하게 한쪽 눈썹만 치켜올렸다. 

다프네가 얼른 덧붙였다. 

"월요일 자에 공작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기사가 실렸지요." 

그의 눈이 위험스레 가늘어졌다. 

"그리고 정확하게, 뭐라고......" 

이젠 아예 얼음 조각 같았다. 

"쓰여 있던가요?" 

"그다지 별다른 것은 없었어요. 아, 정확하게요?" 

다프네가 얼버무렸다. 뒤로 더 물러서고 싶었지만, 이미 발뒤꿈치가 벽에 닿아 있었다. 

뒤로 더 물러서면 까치발로 서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공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고, 그녀는 차라리 그를 나이젤과 함께 놔두고 달아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남자가 서로에게 그지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똑같이 미치광이니까! 

"브리저튼 양."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프네는 그를 딱하게 여기자고 결심했다. 

휘슬다운 지에 따르면, 그는 런던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적응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자신의 일이 신문에 실렸다는 것에 화를 내는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맨 처음에는 다프네 역시 놀랐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휘슬다운의 칼럼이 어떤지 한 달 정도 봐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레이디 휘슬다운이 자신의 기사를 실었을 때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게 화를 내실 필요는 없어요." 

좀 딱하게 여기는 투로 말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여자는 단지 공작님이 끔찍한 난봉꾼이라고 썼을 뿐이에요. 그 사실은 공작님께서도 부인하시지 않겠죠? 대부분의 남자분들이 자기를 난봉꾼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하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에게 자신의 말을 부인할 기회를 주었다. 물론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공작님께서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에 한두 번쯤 마주치셨을 제 어머니께서도 그 말을 다시금 확인해 주셨답니다." 

"정말이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님은 절대 공작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어요." 

"정말이오?" 

그가 느리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잿빛에 가까워졌다는 것도 포함해 그의 말투 어딘가가 다프네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프네는 그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곡선을 그렸다.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해 봅시다. 당신 어머니는 내가 몹시 나쁜 남자이며, 어떤 경우에도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소."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이 상황을 보고 당신 어머니께선 어떤 생각을 하실까?"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하셨나요?" 

"그러니까 여기 나이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도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래도......" 

그는 말꼬리를 끌었다. 다프네의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유쾌한 나머지 도리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었다. 

물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대부분 짜증과 혼란스러움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재미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앞으로 몸을 숙여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래도," 

사이먼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마도 그녀는 그의 숨결을 살갗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지금 단둘이 있단 말이오." 

"나이젤을 제외하면 말이죠." 

다프네가 반박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흘끗 쳐다본 뒤 다시 늑대처럼 음흉한 시선을 브리저튼 양에게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난 나이젤이 별로 걱정되지 않소. 당신은?" 

사이먼은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나이젤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 불행히도 그녀를 연모해 마지 않는 나이젤은 사이먼이 그녀에게 덤벼든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사이먼이 그런 짓을 할 리도 없지만 말이다. 결국 그녀는 앤소니의 여동생이니까. 어쩌면 좀더 자주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이제 게임을 그만둘 시간이라는 것을 사이먼은 알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앤소니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할 성싶지는 않았다. 왠지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혼자서 떠올리며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사이먼은 그녀가 약간의 흥분 정도는 느껴 주길 바랐다. 

서로에게 지분거리는 것은 그만두고 다프네의 바보 같은 구애자를 저택 밖으로 끌어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정도는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짜증날 때 꼭 입술을 다무는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충격을 받았을 때 입술을 벌리는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 여자 앞에서는 자신의 짓궂은 성격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든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눈을 나른하게 유혹하듯 뜨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뒤 말했다. 

"레이디의 어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상상이 가오." 

그의 공격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그래도 꽤 반항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사이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 하나로 그녀의 턱을 살짝 건드렸다. 

"레이디의 어머님께서는 아마 날 조심하라고 하실 겁니다." 

잠시 침묵의 순간이 흐른 뒤 다프네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뭔가 말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꼭 다문 뒤, 어깨를 살짝 세우고...... 

그리고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코앞에서 말이다.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오, 세상에. 오, 너무 우스운 말이었어요." 

사이먼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녀가 웃다가 말고 말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진심이에요.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어울리지 않아요." 

사이먼은 말을 잃었다. 이 조그만 여자가 자신의 위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약간 부아가 치밀었다고나 할까. 

위험한 남자라는 타이틀에는 상당한 이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젊은 아가씨들을 겁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 사실 그 표정이 어울리는군요. 그 점은 인정해야겠어요." 

그녀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매우 위험해 보이셨어요. 물론, 핸섬해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에요." 

그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은 제게 겁을 주실 생각이었던 거죠, 그렇죠?" 

그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그녀가 말했다. 

"물론 그러셨겠죠. 저말고 다른 여자에게는 무척 효과가 컸을 거라는 말을 꼭 해드리고 싶어요."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거요?" 

"오빠가 세 명에 남동생이 하나거든요." 

그녀는 마치 그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듯 말했다. 

"공작님의 그런 방법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답니다." 

"그런가?" 

그녀는 그의 팔을 살짝 두드렸다. 

"하지만 상당히 놀랄 만한 시도였어요.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공작님다운 방탕함을 제게 발휘해 주실 정도로 절 높게 평가해 주시다니." 

그녀가 꾸밈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방탕한 공작다움" 이라고 해야 할지?" 

사이먼은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위협적인 맹수의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썼다. 

"당신은 몹시 성가신 여자로군. 그 사실을 알고 계셨소, 브리저튼 양?" 

그녀는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 친절하고 호감가는 여자라고 생각한답니다." 

사이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보요." 

다프네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나이젤을 흘끗 바라본 뒤 한숨을 쉬었다. 

"괴롭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사이먼은 웃음을 참았다. 

"내 말에 동의하는 것이 괴롭다는 거요,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보라는 점이 괴롭다는 거요?" 

"둘 다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그의 두뇌에 기묘한 영향을 끼치는 환하고 매력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앞엣것이 더 괴롭군요." 

사이먼은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자신의 귀에 자신의 웃음소리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 조금 놀랐다. 그는 자주 미소를 짓고 가끔은 쿡쿡거리기도 했지만, 즐거워서 큰 소리로 웃어 본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친애하는 브리저튼 양." 

그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만일 레이디가 친절하고 호감가는 여성의 본보기라면 세상은 몹시 위험한 곳인 모양이오." 

"아, 그렇다더군요. 적어도 제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말이지요." 

그녀가 대답했다. 

"왜 당신 어머니가 생각나지 않는지 모르겠군. 듣자 하니 한 번 뵈면 잊기 힘든 분일 듯싶은데."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세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 어머니를 모르시는 거예요." 

"당신을 닮았소?" 

"묘한 질문이군요." 

"그리 묘한 것 같지 않은데." 

사이먼은 대답을 하며, 아마 다프네의 말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묘한 질문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듯 그의 물음에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대신 대답했다. 

"브리저튼 가의 사람들은 다들 닮았다는 얘기를 들었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네, 그래요. 닮았지요. 저희 어머니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어머님은 파란 눈에 금발이세요. 저희들의 갈색 머리는 아버님께 물려받은 거랍니다. 그래도 미소만큼은 어머님을 닮았다고 하더군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다프네는 발을 꼼지락거렸다. 도대체 공작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나이젤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그가 절묘한 타이밍을 보이며 일어나 앉았다. 

"다프네?" 

그는 눈이 제대로 안 보이는 듯 눈을 깜박였다. 

"다프네. 당신이에요?" 

"세상에. 브리저튼 양. 도대체 얼마나 세게 때린거요?"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저 쓰러뜨릴 정도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어요. 맹세할 수 있어요!" 

그녀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어쩌면 그가 술에 취해 있었을지도 모르지." 

"오, 다프네." 

나이젤이 신음했다. 

공작은 그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뒤로 물러서며 쿨룩거렸다. 

"술에 취한 건가요?" 

다프네가 물었다. 

공작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청혼할 용기를 내려고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마신 것 같군." 

"내가 그렇게 겁나는 존재인지 그 누가 알았을까." 

다프네는 자신을 그저 좋은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남자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멋진 일이야." 

사이먼은 그녀를 정신병자처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묻고 싶지도 않군." 

다프네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계획을 실행할까요?" 

사이먼은 엉덩이에 손을 짚고 상황을 관찰했다. 나이젤은 일어서려고 애를 썼지만, 적어도 사이먼의 눈에는 조만간 그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낼 정도로 정신은 붙어 있으니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듯했다. 그것도 상당히 잘 나불대고 있었다. 

"오, 다프네. 당신을 너무 사라해요. 다퍼레." 

나이젤은 간신히 무릎으로 딛고 몸을 일으켜 흐느적거리며 다프네를 향해 기어갔다. 마치 술 취한 기독교 신자가 기도하는 모양 같달까. 

"제발 결혼해 줘요, 더프네. 당신은 그래야만 해요." 

"이보게, 정신 좀 차리라고." 

사이먼이 툴툴대며 남자의 셔츠 깃을 잡았다.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 

그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난 이만 이 사람을 바깥으로 데리고 가겠소. 그냥 복도에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까. 병든 소마냥 끙끙대며 소리를 지르기라도 할 것 같소." 

"이미 소리지르기 시작한 것 같은데요." 

다프네가 말했다. 

사이먼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다프네 브리저튼은 결혼 상대로 괜찮은 여성이며, 따라서 사이먼과 같은 독신남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매우 매력적인 여자였다. 

만일 그녀가 남자였다면 친구로 삼았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눈과 그의 몸이 잘 알고 있었기에, 사이먼은 이 상황을 되도록 빨리 마무리짓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해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다면 다프네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며, 사이먼 역시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더구나 자제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더욱 그러했다. 자제력은 그에게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는 절대 아버지에게 맞설 수 없었을 것이며, 대학에서 수석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그것이 없다면 여전히 바보처럼 말을 하고 있겠지. 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내가 그를 여기서 끌어내겠소." 

그가 불쑥 말했다. 

"당신은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요." 

다프네는 얼굴을 찡그리며 파티장으로 통하는 복도를 어깨너머로 바라보았다. 

"무도회장으로요? 아까는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내가 마차를 부르러 가는 동안 이 사람을 여기에 내버려두기로 했을 때의 일이오. 이젠 정신을 차렸으니 그럴 수도 없잖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하실 수 있으세요? 나이젤은 몸집이 꽤 큰 편인데." 

"내가 더 크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은 날씬하기는 하지만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어깨도 넓고 허벅지도 탄탄하게 근육이 붙어 있었다. 다프네는 자신이 그런 것들을 흘끔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달라붙는 바지가 유행하는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무시 못할 분위기가 있었다. 뭔가 맹수다운 면이 있었다. 엄격하게 통제된 힘과 위엄이. 

다프네는 그가 나이젤을 옮길 수 있으리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감사드려요. 이런 식으로 절 도와주시다니 정말 친절하시군요." 

"난 친절할 때가 거의 없는 인간이오."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도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공작님의 행동을 그 단어 외의 것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하지만, 남자들이란 원래......" 

"당신은 남자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군." 

그는 약간 신랄하게 말한 뒤 나이젤을 일으켜 세우며 끙 소리를 냈다. 

나이젤은 다프네에게 손을 뻗으며 그녀의 이름을 흐느껴 불렀다. 

사이먼은 다리를 벌리고 나이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다프네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네, 그건 남자 형제가 넷이기 때문이죠. 그 어떤 경험보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이젤이 있는 힘을 다 짜내(하지만 균형 감각은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이먼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프네에게 달려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벽을 등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이젤에게 부딪혀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다프네는 온몸의 뼈가 다 덜그럭거릴 만큼 세게 벽으로 밀려났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나님 맙소사." 

공작은 욕을 내뱉었다. 그는 다프네에게서 나이젤을 떼어내고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그를 때려도 되겠소?" 

"아, 제발 좀 그래주세요." 

다프네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나이젤에게 잘 대해 주고 싶었지만,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공작은 "잘됐군"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린 뒤, 놀랄 정도로 강력한 주먹을 나이젤의 턱에 선사했다. 

나이젤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다프네는 침착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깨어나기 어려울 것 같군요." 

사이먼은 주먹을 흔들었다. 

"아마도." 

다프네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오히려 내가 즐거웠소." 

그는 찌푸린 얼굴로 나이젤을 바라보았다. 

"이젠 어떻게 할까요?"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젠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 해야겠지. 당신이 서재에서 기다리는 사이, 이 남자는 여기에 내버려둡시다.

 마차가 준비되기 전에는 그를 끌고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드릴까요, 아니면 곧장 서재로 갈까요?" 

공작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에 누워 있는 나이젤의 자세를 가늠해 보았다. 

"조금만 도와주면 큰 힘이 될 것 같소." 

"그래요?" 

다프네가 놀란 듯 물었다. 

"거절하실 줄 알았어요." 

그 말에 공작은 거만하게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라 생각해서 물은 거였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다프네는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의향을 물을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아요. 제가 하려던 말은, 단지 제 경험에 의하면 남자들은......" 

"당신은 경험이 상당히 많은 것 같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 정정하겠소. 당신은 자신이 아주 경험이 많다고 생각하는군." 

다프네는 눈을 이글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도대체 공작님이 저에 대해 뭘 아신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 말도 옳은 말은 아닌 것 같군." 

공작은 그녀의 성난 항의도 무시하고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내 생각에, 당신은 자신이 경험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인 것 같군." 

"이......이......" 

반박을 하려고 해봤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다프네는 화가 나면 말을 제대로 못하는 편이긴 했다. 

게다가 지금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사이먼은 그녀의 격노한 얼굴을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지 어깻짓을 했다. 

"친애하는 브리저튼 양......" 

"다시 한 번 절 그렇게 부르신다면 고함을 질러 버리고 말 거예요." 

"아니,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요.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들 테고, 당신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원치 않았다는 것이 떠오를 거요."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어요." 

다프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사이먼은 팔짱을 끼고 벽에 몸을 쓱 기댔다. 

"진심이오?" 

그가 말꼬리를 끌며 말했다. 

"정말이지 보고 싶어지는데." 

다프네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다. 

"그만두세요. 저에 대해서 잊으시고. 오늘밤에 대해서도 잊으세요.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돌아섰지만, 공작의 목소리에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날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소?" 

망할. 그 말이 옳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머, 그랬지요.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다프네는 거짓이라는 티가 폴폴 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 알고 있소?" 

그가 짐짓 순진하게 말했다. 

"만일 날 돕고 싶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도와드리겠다고 했잖아요." 

다프네가 쏘아붙였다. 

사이먼은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놀리는 것은 무척 쉬웠다. 

"이렇게 합시다. 내가 그를 일으켜 세워서 오른쪽 팔을 내 어깨에 걸칠 테니, 당신은 반대편으로 가서 그를 부축해요." 

다프네는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의 거만한 말투가 심히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짜증스럽게 군다 하더라도 결국 헤이스팅스 공작이 스캔들이 될 만한 상황에서 그녀를 구출해 주고 있는 처지니까. 

물론 누군가가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더더욱 끔찍한 상황에 빠질 테지만. 그녀가 불쑥 말했다. 

"더 나은 생각이 있어요. 나이젤을 그냥 여기에 내버려두죠." 

공작은 얼굴을 휙 돌려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를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어 좀이 쑤신다는 표정이었다. 

"내 생각에." 

그가 말했다.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를 바닥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 건 당신인 것 같은데." 

"그건 나이젤이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기 전의 얘기죠."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다프네는 얼굴을 붉혔다. 여자들은 원래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런 존재라고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은 자신이 그의 눈에 그런 존재로 비치는 것이었다. 

"알겠소." 

그는 담담하게 말하며 나이젤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나이젤의 무게가 고스란히 다프네에게 넘어와 그녀 역시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젠 이만 떠나도 괜찮을지?" 

공작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투로 말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Rm덕인 뒤 나이젤을 바라보았다. 

"좀 불편해 보이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사이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가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는 거요?" 

그가 마침내 물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고개를 저은 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나이젤 곁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얽힌 다리를 풀어 똑바로 뉘였다. 

"집까지 공작님 마차를 타고 가는 호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자세로 내버려두고 가는 것은 좀 잔인한 것 같아요. 자, 이제 끝났어요." 

그녀는 일어서서 고개를 들었다. 

막 떠나가는 공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프네가 어쨌네, 여자들이란 원래 어쨌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못 들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칭찬일 리가 만무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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