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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저튼 가문은 상류 사회에서도 가장 아이를 많이 낳는 집으로 유명하다.
비록 자작 부인과 돌아가신 자작의 근면함은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나 자작 부부가 이름을 짓는 센스는 진부할 지경이다.
앤소니, 베네딕트, 콜린, 다프네, 엘로이즈, 프란체스카, 그레고리, 그리고 히아신스.
순서를 매기는 것은 어떤 경우에든 도움이 되나, 현명한 부모라면 자녀들의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짓지 않고서도 마땅히 순서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방에 자작 부인과 그녀의 자녀 여덟 명이 모여 있는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을 먹을 때가 있다.
본 필자는 외모가 이토록 흡사한 남매들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비록 눈동자의 색까지 관찰하지는 않았으나, 여덟 명 모두 비슷한 골격에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
여덟 명의 자녀 모두 사교계에서 인기 있는 피부색이나 머리색을 지니지 못했기에,
자작 부인은 조건이 좋은 혼처를 찾는 데에 상당히 애를 먹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모두 비슷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다는 데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여덟 명의 자녀들이 모두 자작 부부의 결혼 생활에서 태어난 적자라는 것을 대변해 주니 말이다.
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독자에게 헌신하는 필자는 상류 사회 모든 대가족들의 경우도 다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고 싶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4월 26일.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바이올렛 브리저튼은 한 장짜리 신문을 구겨 우아한 응접실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그녀의 딸 다프네는 현명하게 아무 말도 않고 자수에만 열중하는 척했다.
"너도 그 여자가 쓴 글 읽었니?"
바이올렛이 외쳤다.
"읽었니?"
다프네는 마호가니 탁자 아래 떨어진 구겨진 종이 뭉치를 바라보았다.
"읽을 기회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읽으시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렇다면 읽어 보아라."
바이올렛은 거창하게 허공을 휘저으며 비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우리 가족을 어떻게 헐뜯어 놓았는지 읽어 보라구."
다프네는 구겨진 신문을 무릎 위에 펼쳐놓고 자기 가족에 대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요, 어머니. 오히려 저번 주에 페더링턴 가문에 대해 썼던 것에 비하면 이건 오히려 후하게 써준 편인걸요."
"그 여자가 계속 우리 집안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네 신랑감을 구하란 말이냐?"
다프네는 억지로 한숨을 참았다. 런던에서 두 번의 사교계 시즌을 보내고 나니, 남편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심으로 결혼을 하고 싶었다. 진정한 사랑의 결합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어느 정도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남편을 원하는 게 그리도 큰 소원인가?
여태까지 네 명의 남자가 청혼을 해왔지만, 다프네는 그들 중 그 누구와도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남편이 될 만한 남자도 몇몇 있었지만, 문제는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 모두들 그녀를 좋아하기는 했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모두들 그녀가 재미있고 친절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했으며, 단 한 명도 그녀에게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그녀의 미모에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녀가 옆에 있다 해서 말을 잃지도 않았고,
그녀를 위해 시를 쓸 정도로 감동을 받지도 않았다.
남자들이란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여자에게만 흥미를 나타내는 존재야. 다프네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 누구도 다프네 같은 타입에게 구애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화하기 쉽고 남자의 기분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한다고 모두들 말했다.
한때 다프네가 괜찮은 신랑감이라 여겼던 남자가 말했던 대로.
"다프, 당신은 정말이지 보통 여자들과 달라. 당신은 그야말로 아주 정상적이야."
만일 그가 그 말을 한 직후 금발 미녀 뒤를 쫓아가지만 않았어도 다프네는 그 말을 칭찬이라 여겼을 것이다.
다프네는 자신이 어느새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다프네는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칼럼 때문에 남편감을 찾는 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아요."
"다프네 벌써 2년이 지났단 말이다."
"레이디 휘슬다운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고작 세 달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자 탓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난 내가 탓하고 싶은 사람을 탓할 테다."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다프네는 말대꾸를 하지 않기 위해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꼭 주먹을 쥐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걱정해서 그러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다프네가 결혼 적령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바이올렛은 더없이 훌륭한 어머니였다.
물론, 다프네 아래로 시집 보내야 할 딸이 세 명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만 않으면 지금도 좋은 어머니이다.
바이올렛은 섬세한 손을 가슴에 가져갔다.
"그 여자는 우리 부부를 비방했어."
"아니에요."
다프네가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의 말에 반론을 제기할 때는 조심스럽게 포문을 여는 것이 현명하다.
"그 여자가 한 말은 우리 모두가 부모님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귀족 가의 대가족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았어야 해."
바이올렛이 훌쩍거렸다.
"어머니, 그 여자는 스캔들을 싣는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요. 그런 일을 언급하는 게 그녀의 일이에요."
"그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일 거야."
바이올렛이 화가 난 듯 말했다. 그녀는 날씬한 엉덩이에 양손을 얹었다가 마음을 바꾼 듯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휘슬다운, 흥! 그런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절대 귀족 가의 부인은 아닐 게야.
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악한 거짓말을 써댈 리가 없어."
"아마 그 여자도 우리 중 한 명일걸요?"
다프네가 눈을 장난스레 반짝이며 말했다.
"그 여자가 사교계 사람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기삿거리를 얻겠어요? 설마 창문을 훔쳐보고 문에 귀를 대고 엿들을 거라 생각하시진 않겠죠?"
"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프네 브리저튼."
바이올렛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프네는 또 한 번 미소를 꾹 참았다. 바이올렛은 자식들에게 말싸움에서 밀린다고 생각될 때마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 멈출 수가 없었다.
"저는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가 어머니 친구분 중 한분이라 해도 놀라지 않을 거예요."
"입 다물어라, 다프네. 난 그렇게까지 타락한 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
"좋아요. 어머니 친구는 아닐지 모르죠. 하지만 틀림없이 우리가 아는 사람 중 하나일 거예요.
그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바이올렛은 팔짱을 꼈다.
"그 여자 사업을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그 여자를 망하게 만들고 싶으면 신문을 사지 마셨어야죠."
다프네가 지적했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니? 모두들 사보는데 나 혼자 안 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남들이 모두 그 여자가 쓴 최근 가십 이야기를 하며 웃어댈 때 나만 모르면 바보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야."
그 말이 옳다고 다프네는 생각했다.
유행을 따라가기 좋아하는 런던 사교계는 지금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신문에 중독되어 있었다.
문제의 신문은 세 달 전 어느 날 아침, 런던에 사는 모든 귀족 저택의 현관 앞에 배달되었고,
그 이후로 2주 동안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빠짐없이 배달되었다.
그리고 셋째 주 월요일 아침, 런던 시내의 모든 집사들이 현관 앞에서 신문 배달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전처럼 신문을 무료로 배부하는 대신 한 부에 5페니란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프네는 레이디 휘슬다운이란 사람의 사업수완에 감탄했다.
자신이 쓴 가십을 사람들이 돈주고 사게 만들기 전에 미리 사교계 전체를 중독시켜 놓은 것이다.
모두들 주머니를 긁어 신문을 샀고, 어딘가에서 레이디 휘슬다운은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바이올렛이 콧김을 내뿜으며 가족들에 대한 "끔찍한 중상모략"에 대해 열을 내는 동안,
다프네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나머지 기사를 전부 읽었다.
휘슬다운 - 모두들 그 신문을 그렇게 불렀다 - 은 논평과 사교계 소식, 끔찍한 비난과 가끔 가다 띄엄띄엄 실리는 찬사가 한데 섞여 있었다.
예전에 발행되던 사교계 신문과 다른 점은 필자가 취재 대상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S경이나 레이디 G와 같은 약자 뒤에 숨을 수가 없었다.
레이디 휘슬다운은 누군가에 대해 쓰고 싶으면 그 사람의 본명을 그대로 싣는다.
사교계는 모욕을 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실은 모두들 폭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호는 전형적인 휘슬다운 신문이었다.
브리저튼 가에 대한 짧은 기사를 제외하고는 지면 전체가 어젯밤에 열린 무도회에서 일어난 일에 할애되어 있었다.
어제는 여동생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무도회에 가지 않았다.
원래 브리저튼 가문은 떠들썩하게 생일을 축하하는 습관이 있었고, 자식들이 여덟이나 되고 보니 축하할 생일도 많았다.
"넌 그 쓰레기를 읽고 있구나."
바이올렛이 그녀를 나무랐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창피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늘 칼럼은 꽤 좋은데요. 어젯밤에 세실 텀블러가 높다랗게 쌓아놓은 샴페인 잔에 부딪혀 큰 소동이 벌어졌던 모양이에요."
"그래?"
바이올렛은 흥미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네. 미들토프 무도회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썼네요.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걸었다는 둥, 누가 뭘 입고 왔다는 둥......"
"물론 사람들의 패션 센스에 대한 비평도 잊지 않고 썼겠지?"
바이올렛이 빈정거렸다.
다프네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세요. 페더링턴 부인이게 보라색이 전혀 안 어울린다는 건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바이올렛은 미소를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프네는 어머니가 자작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술 끝에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씩 웃으며 딸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 좀 보자꾸나."
어머니는 딸에게서 신문을 빼앗았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났다니? 혹시 중요한 사건을 놓친 건 아니겠지?"
다프네가 말했다.
"어머니, 레이디 휘슬다운의 보고서를 보면 정말 아무 데도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어쩌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죠.
보아하니, 어젯밤 우리가 먹은 음식이 무도회 음식보다 훨씬 나았던 모양이에요. 그만 돌려주세요."
어머니의 손에서 신문을 홱 빼앗는 바람에 한 귀퉁이가 찢어져 바이올렛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다프네!"
다프네는 짐짓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먼저 읽고 있었어요."
"그래도!"
"이거 들어 보세요."
바이올렛은 앞으로 몸을 굽혔다. 다프네가 읽어나갔다.
"한때 클라이브던 백작으로 알려졌던 난봉꾼이 마침내 런던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새 헤이스팅스 공작은 아직 공식적인 이브닝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화이트 클럽과 태터살 클럽(남성 귀족 전용 클럽) 앞에서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공작 각하는 지난 6년간 해외에 거주하였다.
전 공작인 부친이 타계한 후에야 그가 런던으로 돌아온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정말 노골적이군요. 클라이브던이란 사람, 앤소니 오빠의 친구 중 하나였죠?"
"이젠 헤이스팅스잖니. 그래, 앤소니와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친구였던 것 같다. 이튼에서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그녀는 눈썹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대단한 반항아였지. 아마, 부친과는 늘 사이가 좋진 않았어. 하지만 매우 똑똑하다고 들었다.
앤소니 말로는 그 사람이 수학 과목에서 수석을 했다는 것 같아."
바이올렛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내 자식 중에는 왜 그런 얘가 없는지."
"어머니도 참. 만일 옥스퍼드에서 여자를 받아 준다면 분명히 제가 수석을 차지했을 거예요."
바이올렛은 코웃음을 쳤다.
"네 가정교사가 아플 때 내가 수학 시험을 채점했었단다, 다프네."
"그럼 역사 과목만이라도."
다프네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신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시선이 자꾸 새 공작의 이름으로 쏠렸다.
"흥미로운 사람인 것 같아요."
바이올렛은 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 사람은 네 또래 젊은 아가씨에게 적당치 않아."
"제 또래라고 말씀하시니 우습네요.
언제는 너무 어려서 앤소니 오빠의 친구를 만날 수 없다고 하시고,
또 언제는 제가 너무 나이가 차서 좋은 혼처를 찾지 못할 거라 괴로워하시니 말이에요."
"다프네 브리저튼, 난 네 말......"
"말투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알아요."
다프네가 씩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절 사랑하시잖아요."
바이올렛은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다프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렇단다."
다프네는 어머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자식들이 성가시게 굴어도 사랑해야만 하니까."
바이올렛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언젠가는 말이지, 너도 꼭 너 같은......"
"딸을 낳아 봐야 한다구요? 알아요."
다프네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부모는 사랑과 웃음과 아이들로 충만한 결혼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전 어머니처럼 해내지는 못할지도 몰라요."
"어머, 얘야."
바이올렛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참 다정한 말이로구나."
다프네는 손가락에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 생활과 아이 문제라면, 전 어머니처럼 되고 싶어요. 아, 물론 아이를 여덟 명이나 낳지 않아도 된다면 말이죠."
바로 그 순간, 브리저튼 가 여인네들의 화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헤이스팅스 공작 사이먼 바셋은 화이트 클럽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다프네의 큰오빠 앤소니 브리저튼이 앉아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짙은 색 머리카락을 가진 두 사람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앤소니의 눈은 여동생의 눈동자와 같은 짙은 갈색인 데 반해, 사이먼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꿰뚫는 듯 차가운 푸른색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종종 사람들은 사이먼의 눈 때문에라도 그를 선명하게 기억하곤 했다.
그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누군가를 쳐다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불편함을 느꼈고, 여자들은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앤소니는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친밀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사이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도 앤소니는 그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는 아무리 어렸을 때라도 곁에 있으면 든든해지는 친구였다. 앤소니는 사이먼이 영국으로 돌아와 찾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앤소니가 말했다.
"자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뻐, 클라이브던. 아, 잊었군. 이젠 자네를 헤이스팅스라 불러야 하는데."
"아니."
사이먼이 딱 잘라 말했다.
"헤이스팅스는 내 아버지를 칭하는 말이야. 아버지께선 그 이름 외의 칭호로 불리길 거부하셨지.
꼭 그래야 한다면 아버지의 작위는 물려받아야겠지. 하지만 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겠어."
"꼭 그래야 한다면 이라고?"
앤소니가 눈을 크게 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작 작위를 물려받는 일에 그렇게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걸?"
사이먼은 검은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신의 타고난 권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역사 속에 길이 남을 바셋 가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에 자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를 메스껍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 왔다.
이제 와서 가문의 영관이나 작위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 우습다.
"내겐 커다란 짐에 지나지 않아."
사이먼은 마침내 투덜대듯 말했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앤소니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모두들 자네를 그렇게 부를 테니까."
사이먼은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작위에 익숙해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앤소니는 친구가 불편해하는 것 같자 굳이 캐묻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어쨌거나 자네가 돌아와서 기뻐. 다음 번에 동생을 무도회에 데려갈 때에는 나도 다소 홀가분해지겠군."
사이먼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긴 다리를 발목께에서 꼬았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자네를 홀가분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건가?"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기는 할테지?"
"잘못 생각하고 있군."
"하지만 다음 주에 열릴 레이디 댄버리의 무도회에는 가겠다고 했잖아."
앤소니가 말했다.
"그건 내가 그 노인네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지. 그분은 하고 싶은 말은 꼭 하시거든. 게다가......"
"게다가?"
앤소니가 채근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분은 어렸을 때 내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셨지. 난 그분 조카 리버데일과 함께 그분 댁에서 방학을 보낸 적이 있어."
앤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자네는 사교계에 발을 들이밀 생각이 없다는 거로군. 자네 뜻은 정말 가상해.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경고하지......자네가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네를 찾아내고 말 걸세."
사이먼은 브랜디를 마시다가 "그들"이라 말하는 앤소니의 표정을 보고는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는 한참 동안 기침을 하다가 간신히 말했다.
"제발 말해 보게. 그들이라니, 대체 누구 말인가?"
앤소니는 진저리를 쳤다.
"어머니들."
"난 어머니가 안 계셔서 자네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사교계의 모든 어머니들 말일세, 이 한심한 친구야. 결혼할 나이가 된 딸을 가진 불을 뿜는 용들 말이야.
달아날 수는 있지만, 절대 숨을 수는 없지. 미리 경고하겠네만, 우리 어머니는 그 중에서도 제일 끔찍하시다고."
"세상에. 난 아프리카만 위험한 줄 알았지."
앤소니는 동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자네를 끝까지 추적해서 사냥할 걸세.
그들에게 발견당하면 어느새 자신이 대화의 주제라고는 날씨나 머리 묶는 리본밖에 모르는,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젊은 레이디들과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네."
사이먼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내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자네가 괜찮은 독신남이라도 되었다는 뜻인가?"
"내가 괜찮은 독신 남성이 되고 싶어서 된 건 절대 아니야.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사교계 모임은 절대 사양하고 싶어.
하지만 작년에 여동생이 사교계에 데뷔를 해서, 가끔씩 그 애를 에스코트해야 하거든."
"다프네 말인가?"
앤소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던가?"
"아니.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그 아가씨가 자네에게 편지 보내던 건 기억해. 넷째 딸이었나, 그러니까 이름이 D로 시작하겠지."
"아, 그래."
앤소니는 눈을 굴렸다.
"브리저튼식 작명법. 누구든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지."
사이먼이 웃었다.
"효과는 있잖아."
"어이, 사이먼."
앤소니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굽혔다.
"이번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브리저튼 본가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어. 자네도 오지 않으려나?"
사이먼이 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방금 사교계의 어머니들과 아가씨들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나?"
앤소니는 웃음을 터Em렸다.
"어머니께는 점잖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이시라고 말해두지. 그리고 다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
그 애는 세상에 예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니까. 그 애가 마음에 들 거야."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앤소니가 동생과 나를 연결시켜 주려는 걸까?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앤소니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설마 내가 자네를 다프네와 짝지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대 맞지 않을걸. 자네는 그 애 취향이 아니라고. 너무 사색적이라서."
사이먼은 그 말이 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래, 자네 동생 프로포즈는 받았나?"
"몇 번."
앤소니는 남은 브랜디를 훌쩍 마셔 버리고는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다 거절해도 그냥 내버려두었지."
"관대한 오라비로군."
앤소니는 어깻짓을 했다.
"요새 세상에 결혼에서 사랑을 바란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난 동생이 남편과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한 명은 그 애 아버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이가 많았고, 또 한 사람은 막내 삼촌뻘, 그것도 제 잘난 척만 해대더군.
그리고 이번 주에 또 한 명. 세상에, 그 인간이 제일 끔찍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사이먼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앤소니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마지막 후보자는 사람은 좋지만 머리가 좀 모자라. 뭐, 나도 할 짓 못할 짓 다 해봤으니,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그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사이먼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앤소니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그 불쌍한 얼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즐겁지는 않았어."
"어, 그 일을 해야 하는 건 다프네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내가 해야만 했네."
"여동생이 프로포즈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게 내버려두는 오라비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사이먼이 조용히 말했다.
앤소니는 그게 어떻느냐는 식으로 어깻짓을 했다.
"동생 노릇을 잘했으니 그 정도는 해줘도 될 것 같아."
"그래서 동생을 또 다른 무도회에 데려가 줘야 한다 해도 말인가?"
사이먼이 장난스레 물었다. 앤소니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야 한다 할지라도."
"그런 날도 머지 않아 끝날 거란 말로 위로를 해야겠군.
하지만 뭐야, 결혼을 해야 할 여동생이 다프네말고도 셋이나 되잖아?"
앤소니는 의자에 푹 몸을 묻었다.
"엘로이즈가 2년 후 데뷔할 테고, 프란체스카가 그 후 3년 뒤, 하지만 히아신스가 나이가 들었을 때쯤에는 나도 의무에서 풀려나지 않을까."
사이먼이 쿡쿡 웃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자네가 전혀 부럽지 않군."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기묘한 갈망을 느꼈다. 혼자가 아니란 느낌은 어떤 것일까.
결혼해서 가정을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만일 처음부터 형제가 있었다면 그의 인생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앤소니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저녁 식사하러 올 텐가? 물론 정식 파티 같은 건 아니야. 가족들만 있을 때는 편하게 식사를 하거든."
앞으로 며칠 동안 할 일이 태산 같았지만, 사이먼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기꺼이."
"잘됐어. 그럼 일단은 댄버리 무도회에서 보게 되겠군?"
사이먼은 진저리를 쳤다.
"아마 그렇게 되겠지. 내 목표는 들어가서 30분 만에 퇴장하는 걸세."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앤소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파티에 참석해서 레이디 댄버리께 인사만 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사이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앤소니는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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