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23)

프롤로그 

클라이브던 백작 사이먼 아서 헨리 피츠라눌프 바셋은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 탄생했다. 

교회 종이 몇 시간 동안이나 울려 퍼졌고, 새로 태어난 아기의 집인 거대한 성에서는 샴페인이 물 흐르듯 흘러넘쳤다. 

클라이브던 마을 전체가 일손을 놓고 어린 백작의 아버지가 선포한 휴일과 축제를 즐겼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야."

빵가게 주인이 대장장이에게 말했다. 

사이먼 아서 헨리 피츠라눌프 바셋은 고작 클라이브던 백작으로 인생을 마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칭호에 불과했다. 

아기의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길다 싶은 사이먼 헨리 피츠라눌프 바셋은 대영 제국에서 가장 유서 깊고 부유한 공작 가의 유일한 상속자이다. 

아홉 번째 헤이스팅스 공작인 아이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아내의 침실 앞 복도에서 울어대는 아기를 품에 안으며, 공작은 자부심으로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마흔이 훌쩍 넘을 때까지 그는 공작이나 백작인 친구들이 계속해서 자식을 얻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몇몇은 귀중한 아들을 보기 전에 딸을 줄줄이 낳는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고귀한 혈통을 잇고 영국의 귀족 가문을 지탱할 아들을 보고야 말았다. 

오직 헤이스팅스 공작만이 예외였다. 

15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공작 부인은 다섯 번이나 임신했지만, 아기를 제대로 낳은 것은 단 두 번, 그나마 사산이었다. 

심한 하혈을 하며 5개월 만에 유산을 해버린 다섯 번째 임신 이후, 주치의들은 더 이상 아기를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고 공작 부처에게 엄중히 권고했다. 

공작 부인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공작 부인은 몸이 너무 약하고 또한 연세가 너무 드셨다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바셋 가문의 방계에 공작 작위가 계승될 것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실 도리밖에 없다고. 

하지만 공작 부인은 자기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반년간의 요양 뒤 두 사람의 침실을 잇는 통로를 열었다. 

공작은 다시 한 번 아들을 얻기 위한 모험을 시작했다. 

다섯 달 후, 공작 부인은 공작에게 자신이 아기를 가졌음을 알렸다. 

공작의 기쁨은 곧 그 무엇도 이번 기회를 망쳐 놓을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로 바뀌었다. 

공작 부인은 달거리를 건너뛴 순간부터 침실에 갖히다시피 했다. 

의사가 매일 왕진을 왔으며, 임신 중반쯤에 와서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를 아예 성에 눌러앉혀 버렸다. 

이번에는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을 가질 것이다. 작위는 반드시 바셋 가문의 혈통으로 이어질 것이다. 

공작 부인은 한 달 전에도 진통을 느꼈다. 그녀의 엉덩이 아래에는 베개가 괴어지게 되었다. 

중력으로 아이를 뱃속에 잡아두려는 것이라고 닥터 스터브즈가 말했다. 

그럴싸한 말이라고 생각한 공작은 의사가 나간 뒤 아내의 엉덩이 아래 베개를 한 개 더 괴어서 허리를 20도로 치켜들게 만들었다. 

공작 부인은 한 달 내내 그런 모양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의 순간이 다가왔다. 온 성안 사람들이 아들을 원하는 공작을 위해 기도했다. 

그 중 몇몇은 배가 점점 불러오는 동안 생기를 잃고 여위어만 가는 공작 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치게 큰 희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공작 부인은 이미 두 명의 아이를 낳아 땅에 묻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만일 그녀가 무사히 출산한다 할지라도, 아이가 딸일 수도 있을 테니까. 

공작 부인의 비명이 점점 더 커지고 그 간격이 잦아질 때마다, 

공작은 의사와 산파, 하녀가 가로막는 것도 뿌리치고 부인의 침실로 밀고 들어갔다. 

끔찍한 피바다였다. 하지만 공작은 아이의 성별이 판가름나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어했다. 

머리가 보이고, 그 다음에 어깨가 나왔다. 

공작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힘을 주는 동안,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고 마침내 공작은 신이 아직 바셋 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산파에게 아기를 목욕시키게 한 뒤 작은 사내아이를 품에 안고 홀로 나가 아기를 모두에게 보였다. 

"아들을 얻었다!" 

그가 외쳤다. 

"완벽한 아들을 얻었어!" 

하인들이 마음이 놓이는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울릴 때, 공작은 고개를 숙여 꼬마 백작을 바라보고 말했다. 

"완벽해. 넌 바셋 가의 남자야. 내 아들이다." 

공작은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가 자신이 마침내 건강한 사내아이를 얻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4월초의 공기는 차가웠으므로, 그는 산파에게 아기를 다시 산모에게 데려다 주라고 지시하고는 

값비싼 말을 타고 마을로 달려나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행운을 자랑했다. 

그 사이, 아이를 낳은 후 출혈이 멈추지 않던 공작 부인은 천천히 의식을 잃고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공작은 아내의 죽음을 애도했다. 진심으로 애도했다. 

아내를 사랑한 것은 물론 아니고, 아내 역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어차피 공작은 결혼에서 후계자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그 점에서 그의 아내는 모범적인 배우자였다. 

그는 그녀의 무덤 앞에 계절에 상관없이 매주 싱싱한 꽃을 가져다 놓도록 지시했으며, 

그녀의 초상화를 응접실에서 복도로 옮겨 계단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었다. 

그리고 나서 공작은 아들을 키우는 일에 열중했다. 

물론, 첫 해에는 공작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아기가 너무 어려서 영지 관리나 그 밖에 장차 그가 수행해야 할 여러 의무에 대해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작은 사이먼을 유모의 손에 맡기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기 전과 똑같이 생활했다. 

한 가지 차이라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 심지어는 국왕에게도 - 아기가 태어난 직후에 그린 조그만 초상화를 보라고 강요한 것이다. 

공작은 종종 클라이브던에 들렸고, 사이먼의 두 번째 생일 이후에는 아예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그는 직접 아이를 교육할 작정이었다. 조랑말을 사고, 아이가 좀 큰 뒤에 여우 사냥에 쓸 조그만 엽총을 사고, 과목별로 아이를 가르칠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그 모든 것을 배우기에 백작님은 너무 어리십니다!" 

유모인 홉킨스가 주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헤이스팅스는 경멸하듯 대답했다. 

"나도 아이가 금세 모든 것을 배우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공작이 될 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어리면 어릴수록 좋은 법이지." 

"그분은 아직 공작이 아니십니다." 

유모가 중얼거렸다. 

"곧 그렇게 될 게다." 

헤이스팅스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아들 옆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아이는 바닥에 앉아 블록으로 삐뚤빼뚤 성을 쌓고 있었다. 몇 달 만에 클라이브던에 들린지라, 공작은 사이먼이 부쩍 자란 것을 보고 마음이 흡족했다. 아이는 윤기 흐르는 갈색 머리에 투명한 푸른 눈을 가진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무얼 짓고 있는 게냐, 아들아?" 

사이먼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헤이스팅스는 유모 홉킨스를 바라보았다. 

"아직 말을 못하는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십니다, 각하." 

공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이가 두 살인데 말을 시작했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말문이 늦게 트이는 아이도 있습니다, 각하. 백작님은 무척 영리하십니다." 

"그렇겠지. 바셋의 핏줄인데 당연한 일이야." 

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공작이 바셋 가의 혈통의 우수성에 대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아직까지는 말하고 싶은 것이 없으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공작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사이먼에게 장난감 병정을 건네주고 머리를 쓰다듬은 뒤 워드 경에게서 새로 산 암말을 운동시키려고 성을 나섰다. 

하지만 2년 뒤에는 공작도 그리 느긋하지만은 않았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지?"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습니다." 

유모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게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네 일을 제대로 했다면 저 애는......" 

공작은 화난 표정으로 사이먼을 가리켰다. 

"이미 말을 하고 있을 게다." 

조그만 책상에서 글씨 연습을 하고 있던 사이먼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어린 표정으로 관찰했다. 

"벌써 네 살이란 말이다, 제기랄." 

공작이 외쳤다. 

"말을 왜 못하느냐는 말이야!" 

"백작님께서는 글씨를 쓰실 수 있습니다." 

유모가 재빨리 말했다. 

"여태껏 다섯 명의 아기를 길러 봤지만, 사이먼 도련님처럼 어린 나이에 글쓰는 법을 배우신 분은 없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다면 글을 아무리 잘 쓴들 무슨 소용이 있나." 

헤이스팅스는 사이먼에게 성이 나서 이글거리는 시선을 돌렸다. 

"내게 말을 해보아라, 망할 녀석!" 

사이먼은 아랫입술을 떨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공작 각하!" 

유모가 외쳤다. 

"백작님께서 놀라십니다." 

헤이스팅스는 그녀에게 얼굴을 홱 돌렸다. 

"어쩌면 좀 겁을 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 저 애에게 필요한 건 기강일지도 몰라. 엉덩이를 때려 주면 말을 할지도." 

공작은 유모가 사이먼의 머리를 빗겨 줄 때 쓰는 은제 브러시를 집어들고 아들에게 다가갔다. 

"네가 말을 하게 해주마, 이 바보 같은......" 

"안 돼요!" 

유모는 입을 딱 벌렸다. 공작은 브러시를 떨어뜨렸다. 사이먼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라고 했느냐?" 

공작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속삭였다. 

사이먼은 주먹을 꼭 쥐고 조그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제발 날 때, 때, 때, 때......" 

공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애가 뭐라고 하는 거냐?" 

사이먼은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제, 제, 제......" 

"하나님." 

공작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바보 천치로구먼." 

"바보가 아니십니다!" 

유모가 외치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제, 제발 날 때, 때, 때, 때리지......" 

사이먼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세요." 

헤이스팅스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거지?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백작님을 칭찬해 주셔야만 합니다!" 

홉킨스 유모가 엄하게 말했다. 

"공작 각하께선 4년 동안이나 백작님이 말을 하시길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 녀석은 저능아란 말이다!" 

헤이스팅스가 버럭 외쳤다. 

"저주받을 망할 저능아!" 

사이먼이 울기 시작했다. 

"헤이스팅스 작위가 머저리에게 가야 하다니." 

공작이 신음했다. 

"상속자를 얻기를 몇 년 동안 기도했건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군. 차라리 작위가 내 사촌에게 가게 내버려둘 것을." 

그는 아버지 앞에서 강해 보이려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는 아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질 않아." 

그 말과 함께 공작은 방을 나섰다. 

유모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백작님은 바보가 아니십니다." 

그녀가 격렬하게 속삭였다. 

"백작님은 제가 아는 그 어떤 아이보다 똑똑하십니다. 제대로 말하는 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답니다. 백작님께서도 꼭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사이먼은 그녀의 따스한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공작님께 보여드립시다." 

유모가 맹세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공작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을 후회하게 만들어 드릴 겁니다." 

홉킨스는 맹세를 지켰다. 

헤이스팅스 공작이 거처를 런던으로 옮기고 아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사이먼과 함께 보내며 단어를 연습하고 발음을 연습했다. 

그가 제대로 발음을 할 때마다 후한 칭찬을 했으며,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에는 그를 격려했다. 

진도는 느렸지만, 사이먼의 말은 나아졌다. 

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제, 제, 제, 제, 제발"은 "제, 제, 제발"로 바뀌었으며,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더듬지 않고 문장 전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화를 낼 때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었지만, 유모는 사이먼에게 말을 더듬지 않고 싶으면 언제나 침착하게 이성을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 

사이먼은 결연한 의지를 가진데다가 똑똑했다. 게다가 그는 굉장한 고집쟁이였다. 

그는 문장 사이를 끊어 읽는 것을 배웠으며,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을 익혔다. 

제대로 말을 했을 때는 입술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나 분석했다. 

마침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유모를 바라보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이제는 아버님을 뵈러 갈 때가 왔다고 생각해." 

유모는 고개를 들었다. 공작은 7년 동안 한 번도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이먼이 보낸 편지에 단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았다. 

사이먼은 거의 백 통을 보냈었다. 

"확신하십니까?" 

유모가 물었다.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마차를 준비하지요. 내일 런던으로 떠나겠습니다." 

여행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렸고, 마차가 마침내 바셋 본가 앞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유모의 손에 이끌려 계단 앞으로 가며 사이먼은 분주한 런던 거리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바셋 저택에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유모는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그저 노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곧 열리고 거만해 보이는 집사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문을 닫으며 읊조렸다. 

"배달은 뒷문으로 하도록." 

"잠깐만!" 

유모가 재빨리 문틈에 발을 끼우며 말했다. 

"우리는 하인이 아닙니다." 

집사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아니, 저는 하인입니다만, 이분은 아니십니다." 

유모는 사이먼의 팔을 잡아 앞으로 밀었다. 

"이분은 클라이브던 백작이십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집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린 뒤 말했다. 

"클라이브던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뭐라고요?" 

유모가 날카롭게 외쳤다. 

"난 절대 죽은 게 아니다!" 

사이먼이 열한 살짜리로서는 최대한 도도하게 외쳤다. 

집사는 잠시 사이먼을 관찰 한 뒤 그가 바셋 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왜 내가 주, 죽었다고 생각했지?" 

사이먼은 자신의 실수를 저주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화가 났을 때는 언제나 말을 더듬곤 했으니까. 

"그것은 제가 말씀드릴 바가 못 됩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당연히 말해야 합니다." 

유모가 쏘아붙였다. 

"저 또래의 소년에게 뭔가 말을 한 뒤 설명을 해주지 않을 수는 없어요." 

집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몇 년 동안 백작님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공작님은 당신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며 너무 괴로운 표정을 지으셨기에, 아무도 더 이상 캐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그러니까 하인들은 다들 백작님께서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이먼은 자신이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구멍이 마구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더라면 공작님께서 상복을 입지 않으셨을까요?" 

유모가 따졌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나요? 공작님께서 상복을 입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감히 백작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요?" 

집사는 어깻짓을 했다. 

"공작 각하께서는 자주 검은 옷을 입으십니다. 상복을 입으셨더라도 옷차림은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말도 안 됩니다." 

유모가 말했다. 

"당장 공작 각하를 모셔 오세요."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정을 추스르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피가 끓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선 이층에 계십니다. 당장 두 분이 도착하셨다고 알리겠습니다." 

유모는 방안을 사납게 오가며 낮은 목소리로 공작에게 갖은 욕을 다 퍼부었다. 

사이먼은 방 한가운데 서서 양팔을 뻣뻣하게 늘어뜨리고 심호흡을 했다. 

넌 할 수 있어. 마음속으로 외쳤다. 넌 한 수 있어. 

유모는 그가 화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네, 바로 그겁니다." 

그녀는 얼른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사이먼이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세요. 말을 하기 전에 꼭 먼저 생각을 하셔야 해요. 만일 감정을 조절......" 

"아직도 그 애 버릇을 망쳐 놓고 있군 그래." 

문 쪽에서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홉킨스는 일어서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뭔가 예의바른 말,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만한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작을 본 순간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사이먼을 보았고, 갑자기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공작은 아들과 똑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아버지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각하." 

그녀가 내뱉었다. 

"각하께서는 경멸을 받아 마땅하십니다." 

"넌 해고야." 

유모가 뒤로 펄쩍 뛰었다. 

"그 누구도 헤이스팅스 공작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해." 

그가 으르렁댔다. 

"그 누구도!" 

"국왕 폐하조차도 말씀이십니까?" 

사이먼이 조롱했다. 

헤이스팅스는 몸을 빙글 돌렸다. 아들이 말을 똑바로 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한 문장은 제대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문장이었다. 

아직은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때가 아니다.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상황에선 안 된다. 

평소라면 단 한 번도 더듬지 않고 며칠을 보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자신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 때문에 마치 갓난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저능아 갓난아기. 

갑자기 혀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작은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음? 말이나 할 수 있는 게야?" 

"괜찮습니다, 사이먼 도련님." 

홉킨스는 공작을 노여운 눈초리로 흘겨보며 속삭였다. 

"절대로 화내지 마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도련님." 

웬일인지 달래는 목소리를 듣자 더욱더 말문이 막혔다. 사이먼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왔다. 

그런데 유모가 그를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뭐가 문제지?" 

공작이 빈정댔다. 

"혀를 어디에 두고 오기라도 한 게냐?" 

사이먼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온몸을 경직시켰다. 

부자는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랫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마침내 공작은 욕을 내뱉으며 문가로 걸어갔다. 

"너야말로 내 인생 최악의 실패작이다." 

그는 아들에게 내뱉었다. 

"내가 무슨 일을 했기에 너 같은 것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것이다." 

"공작 각하!" 

홉킨스가 분연히 외쳤다.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저 애를 내 눈앞에서 치워라." 

그는 침을 뱉듯 말했다. 

"저 애를 내 눈에 보이지 않게만 한다면, 널 해고하지는 않으마." 

"기다리십시오!" 

사이먼의 목소리에 공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뭐라고 말한 게냐?" 

사이먼은 세 번 코로 숨을 쉬었다. 아직도 화가 나서 입은 꾹 다문 채였다. 

그는 턱에 긴장을 풀고 입천장에 혀를 비비며, 제대로 말을 했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려 했다. 

공작이 그를 무시하고 다시 방을 나서려 할 때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저는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사이먼은 홉킨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의 눈에서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 피어올랐다. 자부심.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저 아래에서 그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사이먼은 작은 희망을 느꼈다. 

"저는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주......" 

갑자기 목구멍이 막혔다. 사이먼은 공포를 느꼈다.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목구멍은 조여들고 혀는 무거워졌으며, 아버지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고만 있었다. 

"저는 아직 주, 주, 주, 죽......" 

"집으로 가라."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네 자리는 없다." 

사이먼은 공작의 거부를 온몸으로 느꼈다. 기묘한 통증이 심장 부근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작은 몸에서 증오가 끓어올랐다. 증오는 그의 눈을 통해서도 흘러나왔다. 그는 엄숙하게 맹세했다. 

만일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이 될 수 없다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의 정반대가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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