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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내 아가씨 (12/12)

에필로그. 내 아가씨

성녀 추대식이 무산되며 신전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다. 교황이 갑자기 급사했다 발표됐으며 여러 주교 및 고위 사제가 비리로 퇴출당하거나 누구도 모르게 사라졌다. 일부 신앙심 강한 이들은 성녀 추대식 전 황궁의 기사들이 성소에 쳐들어간 것을 이유로 황제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곧 밝혀진 진실에 모두 입을 닫았다.

‘황후 아샬린과 캐틀렛 공작 부인, 마일런 후작 부부, 바이허 백작 부부의 명복을 기린다. 범인이 밝혀졌으니 모두 편히 잠들라.’

10여 년 전 뱃놀이 사고. 황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 사고의 배후를 밝혔다. 동부를 위시한 몇몇 귀족들은 반발했으나 다년간 조사된 자료가 너무도 명확했으므로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황제는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몰아쳐 뱃놀이 사건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신전은 물론이요 사회 전반에서도 죄인이 속속들이 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황제의 자비 없는 결정에 혀를 내둘렀으나 뱃놀이 사건으로 죽은 이들이 원체 대단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므로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죄인들의 처분이 결정되고 황제는 자신의 아들인 카샨을 비롯해 에단, 아이작, 리이트 부자, 캐틀렛과 모나타 공작 등 뱃놀이 사건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가 그들을 부른 대외적인 이유는 위로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황제는 그들을 응접실에 모은 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세세히 뱃놀이 사건에 대해 알리고 황궁 지하 깊은 곳으로 그들 모두를 초대했다.

‘짐과 함께 내려갈 이들은 일어서도록.’

아제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아제프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이끌고 스산한 지하로 내려갔다. 에단, 아이작, 카샨은 굳은 얼굴을 한 채 금방 나왔지만 그들보다 위 세대인 황제와 리이트 후작, 두 공작은 지하 은밀한 공간에 있는 모든 자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일 지하를 드나들었다. 그들의 방문은 수십 일 이후에야 끊어졌으며 이상하리만치 지독한 피비린내가 한동안 황궁 어느 구석을 메웠다.

수뇌부가 모조리 처단된 신전은 순순히 죄를 인정하며 죽은 교황 이그나시오의 이름을 지우겠다 밝혔다. 황제는 신전을 아예 무너뜨릴지 잠깐 고민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정도에서 끝냈다.

‘아샬린이라면 말렸을 테니깐.’

물론 나중에 이유를 들은 카샨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신전이 뱃놀이 사건의 배후로 밝혀지며 나뉘었던 귀족 세력에는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사이좋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서로 교류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황제는 그에 맞춰, 폐지됐던 결투 금지안을 되살렸다.

“더 철저히 복수하지 못해 미안해. 아샬린.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하길 원했겠지.”

그리고 결투 금지안이 다시 법전에 오른 날 황제는 죽은 아샬린 황후의 방에서 누구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두툼한 법전이 완전히 젖을 때까지.

* * *

두 공작가는 여러 사건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제법 큰 분란이 두 공작가 사이에 남았기에 귀족 사회의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시작은 로잘린의 임신이 알려진 뒤였다.

누가 감히 그녀의 치부를 소문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캐틀렛 공작은 딸의 치부가 알려진 뒤 에단과 연을 아예 끊겠다 선언했다. 하나 그 소식은 소문조차 될 수 없었다. 로잘린이 임신한 아이는 시기를 보건대 로지오 모나타의 아이였다. 그보다 더한 가십거리가 어디 있을까.

‘세상에, 캐틀렛 공녀가 모나타의 아이를 임신했대요.’

‘어찌 그런 망측한 일을…….’

‘이제 어떻게 될까요? 캐틀렛과 모나타가 혼사라도 맺는다면…….’

‘그야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그동안 쌓인 앙금이 얼마인데…….’

모나타와 캐틀렛. 황가 다음 가장 고귀한 두 가문의 결합이니 아이는 고귀해야 마땅했지만 양가는 모두 아이를 꺼렸다.

‘모나타의 아이라니!’

‘캐틀렛의 핏줄이!’

긴 세월 반목으로 쌓인 앙금이 한 번에 사라질 리 없었다. 뱃놀이 사건이 밝혀졌다고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며 갑작스레 생긴 아이로 양 가문은 후계 문제에 휩싸였다.

‘모나타의 후계는 내 장녀 마들렌 모나타로 명명하노라.’

그나마 모나타는 마들렌을 후계로 내세워 분란을 잠재웠다. 지금껏 은근히 로지오를 지지하던 원로들은 몇십 년 원수였던 캐틀렛의 무남독녀를 도저히 공작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로잘린이 마들렌처럼 야망 큰 여자라 모나타를 삼켜 캐틀렛으로 만들까 봐 두려워했다.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된 모나타와 달리 캐틀렛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캐틀렛의 원로들 또한 모나타인 로지오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게다가 마들렌이 공공연하게 내 동생은 캐틀렛 공작이 될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바람에 그들의 반발심은 더 커졌다. 방계로 하여금 가문을 이으라 외치는 원로들 때문에 캐틀렛 공작은 방 안에 틀어박혔으며 로잘린은 결혼도 못 한 채 부푼 배를 부여잡고 애를 태웠다.

‘……들키기 전에 에단과 결혼했어야 했는데.’

로잘린은 만삭이 되기 전 로지오와 겨우 약혼했다. 약혼도 했겠다 이대로 간다면 아비의 도움을 받아 결혼에도 성공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결혼한다 한들 그녀와 로지오의 앞날이 평탄할까? 로지오는 강력한 공작이 될 수도 유능한 공작이 될 수도 없는 재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제 가문도 아닌 캐틀렛 가신들의 저항에 지레 겁먹고 로잘린을 내버려 둔 채 모나타 소속 영지로 도망쳤다. 캐틀렛 공작위를 받지 않겠다 큰 소리로 선언하며.

그렇다고 로잘린이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영에 무능한 그녀는 노력할 생각조차 없이 모든 이들을 원망하며 떼를 썼다. 어떻게든 후계 교육을 시작하려는 캐틀렛 공작은 매일같이 소리치며 우는 그녀 때문에 몇 달 사이 10년은 더 늙어 버렸다.

‘싫어요! 내가 왜 회계 장부 보는 법을 배워요?’

‘앞으로 영지를 다스리려면 어느 정도는…….’

‘대리인에게 시키면 되잖아요! 난 캐틀렛 공녀예요.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이라고요! 그런데 나보다 처지는 여자들도 안 하는 일을 하라고요? 난 못 해요!’

가신들은 아비에게 떼쓰며 우는 로잘린을 보며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이대로 로잘린이 공작이 되고 배 속 저 아이가 후계를 물려받게 된다면? 지금도 캐틀렛을 차지하겠다며 소리치는 마들렌 모나타가 제 동생과 조카를 이용하지 않을까?

결국 가문의 원로들과 가신들은 로잘린의 후계 승계에 단체로 반발했다. 지지부진한 내부 싸움이 지속됐다. 캐틀렛 공작은 자신과 황후 폐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그녀를 다독였지만 로잘린의 눈물은 그칠 낌새가 없었다.

“이게 다 레이첼 그 계집애 때문이야. 망할 년! 흐아앙…….”

로잘린은 레이첼에게 가장 많은 원망을 쏟아 냈다. 하지만 레이첼은 남보다도 못한 옛 친우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런 일에 신경 쓰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바빴다.

* * *

폴 마틴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오늘 그의 파트너 레이첼 애블랑 때문에.

그녀는 보기만 해도 황홀한 여인이었다. 굽이치는 백금발 아래 앳된 얼굴은 눈이 부셨고 연보라 제비꽃색 눈이 살포시 접힐 때면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애, 애블랑 영애. 저, 저와 파트너 해 주시겠습니까?’

‘어머, 폴 경. 오랜만이에요. 그러잖아도 그때 대접한다 했는데…… 죄송해요. 잊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그보다…….’

‘흠…… 마침 다음번 연회 파트너가 없던 참인데. 좋아요. 함께 가요.’

한참 전 연회 때 마차까지 바래다준 것이 인연의 끝이었는데 그녀가 그 일을 기억할 줄이야! 게다가 파트너 청을 수락해 주기까지!

“이크, 이럴 때가 아니지.”

사랑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폴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이첼은 그에게 음료 한 잔을 부탁했다. 폴은 재빨리 그녀가 말한 음료를 찾았다.

인기가 많아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걱정하던 음료가 저 멀리 보였다. 몇 잔 남지 않은 붉은 잔을 보며 폴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그가 잔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전 누군가 길을 막았다.

“바이허 백작님?”

깔끔히 넘긴 은발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단번에 아이작을 알아본 폴이 의문 가득한 얼굴을 했다. 아이작이 웃으며 신사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폴 경. 어딜 그리 급히 가나?”

“예? 아…… 제 파트너가 음료수를 부탁해서…….”

“파트너? 혹시 애블랑 영애를 말하나?”

폴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냥 평범한 질문인데 왜……. 그가 갸우뚱한 얼굴로 맞다 답하기도 전이었다. 아이작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폴 경. 내 충고 하나 하지.”

“예?”

“자네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예에? 그게 무슨…….”

“말귀가 어둡군. 하기야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말이야…….”

“윽…… 백작님, 이 무슨…….”

“이리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겠지. 조심하게.”

점점 죄어 오는 어깨에 폴이 아이작의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아이작은 그의 귓가에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뭐라는 거야. 백작이면 단가?’

기분이 나빠진 폴은 잠깐 아이작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다섯 발자국도 가기 전 또 다른 이가 그의 앞에 섰다. 상대를 확인한 폴이 재빨리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하, 인사 올립니다. 제4기사단 폴 마틴…….”

“네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으니 입 닫아.”

“예?”

“감히 황궁 기사 주제에 내가 있는 이 황궁에서…….”

‘어?’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지?”

조금 전 아이작과 비슷한 말에 폴이 눈을 끔뻑였다. 당황스러웠다. 뭐지? 다들 왜 이러시지? 바이허 백작도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으나 앞의 황태자는 대놓고 흉흉했다. 그가 폴의 어깨를, 쥐는 것도 아니요 세게 치고 가며 경고했다.

“잘 들어. 레이첼 애블랑에게 접근 마. 아니면 당장 황궁 기사단에서 쫓겨나고 싶나?”

카샨이 저를 지나치자 폴은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눈치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그였지만 이쯤 되면 이 일이 누구로 인한 것인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누, 누가 뭐래도 난 이겨 낼 거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위협쯤이야…….’

레이첼 애블랑. 그의 파트너는 역시 대단했다. 저런 거물들이 자신을 견제하다니.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했다.

‘그래 봤자 그녀가 택한 건 나란 말이지, 에헴.’

폴은 음료를 집어 들며 레이첼을 찾았다. 저런 사람들을 물리고 자신을 택해 줬는데 빨리 가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막 레이첼을 발견한 그 앞에 또다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

“이봐. 너…….”

“예?”

“죽고 싶나?”

* * *

따사로운 햇살, 사방을 메운 푸릇한 풀 내음. 다시 찾아온 봄은 가만있어도 포근히 마음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와 대조되는 서리 같은 목소리로 에단을 타박했다.

“각하 때문에 폴 경이 도망간 거죠?”

“……뭐가?”

에단은 시침을 딱 뗀 채 레이첼에게 잔을 건넸다. 붉은 열매가 동동 떠다니는 음료는 레이첼이 각별히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잔을 에단 쪽으로 밀고는 등을 홱 돌려 버렸다. 에단이 지나가는 시종에게 잔을 치우듯 건네고 재빨리 레이첼을 따랐다.

“……다 봤으니 모른 척 마세요.”

“야! 나 아니야. 난 그저…….”

“제 경고는 항상 이렇게 무시하시죠.”

“나 정말 아니라니까. 억울해!”

“에단.”

절대 아니라고 방방 뛰던 에단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췄다. 그가 레이첼의 옆얼굴을 곁눈질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첼이 샐쭉 눈을 치켜뜬 채 그를 몰아세웠다.

“정말 아니야? 폴 경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물론. 난 말이야 그저…….”

“거짓말은 용서 안 해.”

용서 안 한다는 말에 에단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가 양손을 마주 쥔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했어.”

“…….”

“……잘못했어.”

구시렁거리면서도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대 마일런가 가주라고 보기 힘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꼴은 딱하다 할 만했지만 레이첼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에단을 무시한 채 자신에게 헤벌쭉 입을 벌리며 인사하는 사내들에게 하나하나 미소 지으며 눈인사했다.

“약속을 어겼네. 한 달간 접근 금지야. 나 볼 생각도 마.”

“하, 하지만…… 레이첼, 내 말도 좀 들어 봐.”

레이첼과 인사 나누는 사내들을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에단은 가여운 목소리를 흉내 냈다. 한 달이라니. 그 기간 동안 못 보면 정신병으로 어딘가에 갇혀 있어야 할 터였다.

“……지금 안 가면 두 달이야.”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는데…… 내 말도 한 번만 들어 줘, 응? 레이첼.”

에단은 레이첼을 졸래졸래 따르며 계속해서 사정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그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 명, 아니 천 명이 이상하게 봐도 좋았다. 레이첼이 보지 말자는 말만 취소한다면.

결국 주변 시선에 레이첼이 먼저 섰다. 그녀가 구석진 창가 커튼 옆에서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팔짱을 꼈다. 말해 보라는 허락이었다.

“나 도저히 못 견디겠어.”

“…….”

“사방의 사내새끼들이 널 노리는데 가만히 어떻게 있어? 저번 주만 해도 네게 고백한 놈들이 여섯이야.”

아니, 여덟인데. 레이첼은 굳이 에단의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커튼을 만지작거리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난 그게 너무 힘들고 또…….”

“나랑 뭐라고 약속했지?”

약속이라는 말에 에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숨이 거칠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가 간신히 입을 뗐다.

“……2년 동안은 자유롭게…… 네게 간섭 안 하겠다고.”

“그런데 왜 계속 이래? 약속 어길 참이야?”

레이첼은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는 대가로 약속을 하나 걸었다. 2년. 그가 로잘린과 약혼한 그 기간만큼은 자유롭게 지내겠다고. 에단은 몇 번이고 재고해 달라, 차라리 마일런가 재산 반을 주겠다 애원했지만 레이첼은 요지부동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 사항을 받아들인 에단은 그날부터 자신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다른 사내들과 시시덕거리는 레이첼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괜찮아! 협박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놈들이니깐. 하지만 황태자나 아이작 놈은 너한테 청혼만 지금 몇 번째야!”

“…….”

“아이작 그놈은 그제 일곱 번째 청혼했다며! 나보다 많이 한 셈이잖아. 그리고 황태자 그 새끼는 뭐? 결혼도 한 주제에 내 황후는 너뿐이라고? 황제가 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미친놈!”

결국 에단이 폭발했다. 이제 고작 한 달이었지만 저를 버려두고 다른 사내와 함께하는 레이첼을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웠다. 2년……. 2년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시시각각 달라지는 에단과 달리 레이첼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도 제법 복잡했다. 정확히는 좀 당황스러웠다. 싫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이야. 에단은 씩씩거리다 못해 눈물까지 보일 것 같았다. 다 큰 사내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레이첼은 왜인지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아래로 당기며 그를 바라봤다.

“……아제프 놈처럼 다 떠났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 네 주변 사내는 나 말고 다 사라졌으면 좋겠단 말이야.”

아제프란 말에 레이첼이 아주 잠깐 얼굴을 굳혔다. 결혼식 연회 날 그녀에게 고백했던 기사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다.

‘제 마음은 아직 유효합니다. 제가 당신께 마음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평생 그대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하지만 레이첼 그녀는…….

‘미안해요, 아제프 경. 하지만 나는…….’

다친 곳이 다 낫지도 않은 사내는 그녀의 답에 고개를 떨구더니 한참 만에 몸을 돌렸다. 그 흔한 인사도 없이.

레이첼은 며칠 후 아제프가 리온을 떠났다는 말에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레이첼이 아는 사내들 중 가장 선한 이였다. 다른 이들을 거절할 때와 달리 큰 죄책감이 그녀를 감쌌다. 자신이 그를 망쳤다는 생각이 아직도 간혹 그녀를 괴롭혔다.

“에단.”

그러나 레이첼은 신전에서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씁쓸한 표정을 재빨리 지운 그녀가 에단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찌푸린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반사적으로 주름이 펴졌다. 그녀는 의아한 눈을 하면서도 제게 눈을 떼지 못하는 에단을 보다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그게 그렇게 불안해? 내가 안 받아 주는데도?”

끄덕이는 고갯짓이 사랑스러웠다. 참지 못한 레이첼이 까치발을 들어 에단을 목을 감싸 안았다.

“야! 너…….”

“쉿! 들키면 모른 척할 거야.”

에단이 바로 입을 닫더니 그녀가 편히 자리를 잡게 허리를 숙였다. 눈을 반쯤 감는 것이 무언가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레이첼이 입술을 내밀었다. 에단이 옳다구나 싶어 눈을 감고 레이첼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려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레이첼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었다.

쪽―

비켜 간 입술이 에단의 뺨에 닿았다 바로 떨어졌다. 레이첼이 깔깔 웃으며 냉큼 돌아서 도망쳤다.

“더 분발해 봐. 그럼 혹시 몰라? 날짜가 좀 줄어들지?”

예쁘게 주름진 드레스가 팔랑이며 멀어졌다. 창가를 통과한 햇살이 레이첼이 가는 길을 비췄다.

에단은 약이 오른 얼굴로 레이첼을 쫓아가다 섰다. 레이첼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따뜻한 봄볕 아래 반짝이는 그녀는 세상 무엇보다 눈부셨다.

오롯이 저를 보는 레이첼의 눈. 에단은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보다 문뜩 깨달았다. 그녀만 있다면…… 이 행복이 영원할 것을. 지금의 봄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을.

북받쳐 오르는 감동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에단이 레이첼에게 천천히 다가가 꼭 안은 채 가만히 속삭였다.

“사랑해. 내 아가씨.”

― <그 아가씨의 생존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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