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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생존 (11/12)

10장. 생존

“으…….”

머리가 지끈거리며 목이 탔다. 전형적인 숙취였다.

마른 눈이 따갑고 뻑뻑했다. 레이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곧 뿌연 시야로 높디높은 천장과 그걸 받치고 있는 대리석 기둥이 들어왔다.

“어?”

처음 드는 생각은 ‘여기가 어딘가’였다. 제 침실도 손님방도 아니었다. 낯선 풍경에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곧 깨질 것 같은 머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멈췄다.

끊어진 기억이 떠올랐다. 모를 소리만 하는 인간, 갑자기 튀어나온 손수건과 거기에 묻어 있는 독한 향. 어떻게 생각해 봐도 명백한 납치였다.

납치라면 몇 번 겪어 봤으나 이번은 느낌이 달랐다. 바닥을을 짚자 차가움이 느껴졌다. 내려다본 곳에는 대리석 반듯한 모서리가 있었다. 곧 레이첼은 자신이 줄곧 대리석 제단에 누워 있었음을 인지했다.

무슨, 제물도 아니고 이게 뭐지?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피자 오싹한 기운이 스쳤다. 얼핏 성스러워 보일 흰 공간은 지나치게 넓고 어두웠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조각상과 음각된 벽은 햇빛 아래에서 봤다면 아름다웠겠지만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기괴할 뿐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겁에 질린 레이첼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려는 차 온화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인지한 레이첼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도 빠짐없이 본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사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늙은 사제의 얼굴은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특유의 미소는 온화한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따스했다. 하지만 아는 이의 등장에도 레이첼의 얼굴은 나아질 낌새가 없었다. 자신의 양 발목에 단단히 채워져 있는 족쇄를 알아본 탓이었다. 쇠사슬로 서로 연결된 족쇄는 돌로 만들어졌는지 무겁고 단단했다.

“사, 사제님, 이건 뭐예요. 아니, 그 전에 여기는 어, 어디예요?”

가까스로 불안을 누른 레이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사제가 한 발 다가왔다.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레이첼 님께서 교육받으실 곳입니다.”

“그게 무슨…….”

“레이첼 님께서는 성녀가 될 분이십니다. 하지만 부족한 점이 있어 교육이 필요하신 상태지요. 그리하여 오늘부터 이곳에서 저를 비롯한 많은 사제들이 레이첼 님을 위할 것입니다.”

“말도 안 돼요! 성녀? 사제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성녀님께서는 이미 정해져 있잖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조금 있으면 곧…….”

“루치아 님 말입니까. 그분께서는…….”

사제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가 기도하듯 손을 모으며 묵념했다.

“……얼마 전 여신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 죽, 죽어요?”

“마음은 아픈 일이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거짓된 신앙으로 성녀가 되려 했으니 여신께서 벌을 내리신 거지요.”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 애통한 어투였지만 레이첼에게 그 감정은 와닿지 않았다. 성녀 후보가 죽어? 왜? 누군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공포심만 더할 뿐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나가야 해, 당장!’

레이첼은 루치아의 죽음이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과 연관 있음을 눈치껏 알아챘다. 그녀는 당장 도망치리라 마음먹고 발목에 감겨 있는 족쇄를 풀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거친 움직임에 소리만 요란할 뿐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으십니다.”

사제는 그런 레이첼을 잠시 내려다보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강한 손아귀 힘에 놀란 레이첼이 사제를 뿌리쳤다.

탁―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한 건 나예요! 당장 풀어 주세요! 집으로 가야겠어요!”

“레이첼 님께도 책임은 있습니다. 신전에 머무실 때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하마터면 이 늙은이가 진정으로 선택받으신 분도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그게 무슨…….”

무얼 얘기해? 알아듣지 못할 말에 레이첼이 소리치는 것도 잊은 채 사제를 올려다봤다. 사제의 얼굴이 처음으로 미미하게나마 구겨졌다. 그는 거짓말쟁이 아이를 보듯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신전에 기거하는 어린 소년이 기적을 보았다고 말하더군요.”

사제는 그날 울고 있던 지크를 본 것이 여신의 뜻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신의 의중이 아니라면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아이가 눈에 띌 리 없었으므로.

‘왜 울고 있는 게냐, 지크.’

‘사제님…….’

‘말을 해 보렴. 무슨 일이냐.’

‘레이첼 님이……. 전 봤어요. 봤는데…….’

‘무얼 보았단 말이냐. 자, 눈물을 닦고 말해 보렴.’

‘레, 레이첼 님이 책에서 봤던 성녀님과 같이…….’

“……어린 소년?”

“지크 말입니다. 레이첼 님과도 퍽 가까운 아이였으니 모른다고 하지는 않으실 테지요?”

처음에도 그도 묻은 채 가려 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가 나타났다 한들 루치아라는 훌륭한 후보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신께서는 제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어 하셨다. 그가 지크의 말을 듣고 한참 갈등하고 있을 때 루치아 후보는 쓰러졌다. 여신께서 자비를 거뒀다는 뜻의 푸른 반점이 그녀에게 나타난 것이다.

“진즉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여신의 뜻대로 제자리를 찾았으니 다행입니다.”

“전 아니에요! 아닌데……. 일단 이것 좀 풀어 주시면 제가 말할게요. 지크가 뭘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착각한 거 같아요. 전…….”

레이첼의 얼굴은 끝까지 의문투성이였다.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에 사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혹 본인은 여신께 선택받은 사실을 모르는 건가?

‘차라리 잘됐군.’

어차피 시험을 해야 했다. 눈앞에서 결과를 본다면 여신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내렸는지 깨닫게 되겠지. 그가 뒤로 손짓하며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들어오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제 여럿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두운 공간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 그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들이 가까이 오기 무섭게 레이첼의 눈은 제일 앞줄의 한 명에게 고정됐다. 커다란 그릇에는 익히 본 것이 담겨 있었다. 기이할 만큼 푸른 물. 그것을 본 순간 뒤가 스산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이것부터 드셔야 합니다.”

“싫, 싫어요.”

“양이 좀 과하지요? 시간이 촉박해 어쩔 수 없습니다. 몇 번 드셔 보셨으니 참을 만하실 겁니다.”

몸을 계속 뒤로 빼다 보니 제단의 끝에 다다랐다. 레이첼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제단에서 벗어나려 했다.

“잡아라.”

사제가 고갯짓을 하며 낮게 명령했다. 들어온 이들 중 몇몇이 재빨리 레이첼의 뒤로 가더니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허리를 세웠다. 레이첼이 버둥거리며 놓으라 비명을 질렀다.

“야! 놔! 놓으라고! 이거 못 놔?”

“괴로우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여신께 선택받은 분이 아닙니까. 뭣들 하나. 성수를 마시는 걸 도와드려라.”

붙잡은 이들 외 두 사람이 더 레이첼에게 다가왔다. 한 사람이 그녀의 턱을 고정하고 입을 벌렸다. 레이첼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여러 명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곧 끔찍한 맛의 성수가 그녀의 입으로 콸콸 쏟아졌다.

“싫……으읍…… 싫어! 읍!”

들어차는 성수에 숨 쉬기가 끔찍했다. 그러나 숨을 참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었으니. 맛이었다. 작은 유리잔으로 한 잔 마실 때와는 궤가 달랐다. 쓰고 아리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맛에 레이첼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고작 몇 분이 지났건만 레이첼은 지옥에서 돌아온 듯 몸이 축 늘어졌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사제 둘이 부축한 채 앞을 봤다. 늙은 사제가 단검을 넘겼다. 무엇이라도 벨 듯 날카로운 빛이 어두운 공간에서 번뜩였다.

“피를 내 보아라.”

“무, 무슨 짓을 하려고. 놔! 당장 놔!!!”

다가오는 검에 레이첼이 반항했으나 이미 힘은 다 빠진 후였다. 사제들은 손쉽게 그녀를 제압했다. 날카로운 검이 레이첼의 손가락을 찔렀다.

“오오…….”

“여신이시여…….”

붉은 피가 손가락 끝에 맺히더니 곧이어 떨어졌다. 하나 어찌 된 영문인지 핏방울이 떨어진 손가락은 멀쩡했다. 피부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며 처음을 끝으로 피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침묵하던 사제들이 감탄사를 뱉었다.

“이번에는 좀 더 세게…… 아니다, 이리 내.”

늙은 사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재촉하더니 이내 검을 빼앗았다. 주름 잡힌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그녀의 흰 손이 손등을 보인 채 제단에 고정됐다. 높게 들린 검 표면에 레이첼의 얼굴이 반사됐다. 앞으로의 일을 예상한 듯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이 제단에 울렸다.

“아악!”

* * *

레이첼의 실종 소식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황궁 연회, 그것도 황태자의 결혼 연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황제는 소식을 알기 무섭게 함구령을 내렸다.

물론 조사는 진행됐다. 의심 가는 이들이 비밀리에 체포됐으나 곧 한 사람을 남긴 채 모두 풀려났다. 유일한 용의자는 레이첼의 파트너이자 그녀와 단둘이 나가는 것이 목격된 리이트가의 후계였다.

아제프는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위 귀족인 그가 갇힌 감옥은 지하인 만큼 축축하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적당한 의자와 테이블에, 카펫과 깨끗한 침대까지. 쇠창살만 없다면 감옥이 아닌 일반 백성의 방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아제프에게 강한 혐의가 없음을 의미했다. 유일한 용의자이긴 하나 그에게서도 혐의를 찾기는 어려웠다. 레이첼과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을 뿐 그녀의 실종을 가장 먼저 알린 것 또한 그였다.

그렇기에 그 또한 감옥을 나가려면 충분히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제 일신이 어디 위치했는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알고 있는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면서도 그는 그 외 어떤 변명도 억울함도 비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조사관이 나서 리이트 후작에게 연락을 취하면 풀려날 수 있을 거다 알려 줬겠는가 싶지만 그는 조사관의 말을 못 들은 척 흘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

덕분에 먼저 움직인 건 아비인 리이트 후작이었다. 손수 감옥까지 내려온 그는 의자와 침대를 놔두고 찬 바닥에 앉아 있는 아들을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집으로 가자. 폐하께서도 허락하셨다.”

간수에게서 열쇠를 받아 든 후작이 쇠창살을 열고 아들 앞에 섰다. 멍한 눈으로 앞만 보던 아제프가 아비를 천천히 올려다보더니 잠긴 눈을 한 채 말했다.

“……나 때문입니다.”

“…….”

“이번에도 나 때문이란 말입니다.”

“…….”

“어머니와 같습니다. 제가 여신께 죄를 지어 사라진 겁니다. 저 때문에…… 그녀가…… 사라졌습니다.”

후작은 텅 비어 버린 아들의 눈에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그의 입가가 씰룩이며 턱이 바짝 당겨졌다. 그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어떻게든 참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다시 빌어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

“막일꾼이라도 좋습니다. 내가 신전에서 참회하면 돌아올지 모릅니다. 어머니처럼 그렇게는 안 돼요. 그녀는 안 됩니다. 내가…… 나 때문에 그럴 수는 없어요.”

레이첼이 실종된 후 아제프는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똑같았다. 어미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제 곁에서 사라졌다. 다 자신 때문이었다. 여신께 회개하지 않은 채 죄를 저지른 자신의 탓. 그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리이트 후작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절 다시 성소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다시 밤낮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빌고 회개하면 이번에는 여신께서 용서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만!!!”

결국 참지 못한 후작이 토해 내듯 소리쳤다. 괴로워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핏줄 터진 눈이 벌겠다. 그가 아들의 앞에 무릎 꿇었다.

“……다 내 죄다.”

카일은 아들이 이럴 때마다 저 자신에게 치가 떨렸다. 자신이 어린아이를, 아그네스와 저 사이의 유일한 아이를 어떻게 망쳤는지가 너무도 선명했다.

“네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내 탓이야.”

과거 그는 아그네스의 죽음을 모조리 아제프에게 돌렸다. 어미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 주지는 못할망정 모든 게 너 때문이다 손가락질하며 제 분을 쏟아 냈다. 그만큼 아들도 힘들었을 텐데…… 그는 제 슬픔에 눈이 멀어 아제프를 학대했다. 그 어린아이에게 스스로 죄라 칭하게 겁박하며 온종일 꿇려 기도 올리게 했다.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오. 아니, 짧은 시일 내에 후회하게 될 테지.’

아샬린 황후의 말이 옳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후회뿐이었다.

“황후 폐하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내가…… 내가 그때 정신을 차렸다면……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다면 넌…….”

우스운 것은 진실을 몰랐다면 자신은 여전히 그릇된 진실을 믿으며 아들을 학대했을 거라는 거였다.

언젠가 그들을 모조리 쳐 죽이리라. 아그네스를 비롯해 자신과 자신의 아들 모두를 지옥에 빠뜨린 이들을 떠올리며 후작은 이를 갈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비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아제프가 물었다. 초점이 돌아온 눈은 무언가 느낀 듯 형형했다. 후작은 잠시 고민하다 아들의 눈을 보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네가 찾는 그 아가씨 말이다. 알아보니 저번에 네가 쫓아갔던 그 후보였더구나.”

“…….”

“그 아가씨에게 이상한 일이 없었느냐? 예컨대…….”

이상한 일이라는 말에 아제프는 레이첼 본인도 모르는 비밀을 기억해 냈다. 생생했던 기적. 수 초 안에 피가 멎고 수분 안에 찢어진 피부가 재생됐다. 감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상처가 나았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후작은 아들의 떨리는 눈을 보며 한숨 쉬었다.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신전이 그녀를 데려간 이유는 하나였다.

“역시…….”

“무슨 일입니까. 그녀가 기적을 보인 일이 지금의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아제프. 내 말 똑똑히 들어라. 그 아가씨는 포기해.”

“…….”

“그 아가씨는 아마 얼마 안 되어 성녀로 나타날 게다.”

“성녀는 내정돼 있지 않습니까! 루치아 님께서 이미…….”

아제프는 레이첼이 성녀가 될 거라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 그녀는 자신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성녀라니.

“……루치아 후보가 죽었다. 그 바람에 신전에서 새로운 후보를 물색한 모양이야.”

“죽어요? 루치아 님께서? 하지만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확실해. 루치아 후보는 죽었다.”

“…….”

“루치아 후보를 대신해 그 레이첼이라는 아가씨가 끌려간 게다. 분명 성녀가 될 생각은 없었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녀는 자질이 뛰어났던 모양이야. 아그네스처럼 운 나쁘게…….”

충격에 빠져 있던 아제프가 아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미처럼 운이 나쁘다니……. 순간 불길한 느낌과 함께 어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아그네스…… 네 어미의 마지막을 기억하느냐?”

아제프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어린 나이 겪은 일이지만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의 어미 아그네스는 푸른 반점이 퍼진 상태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머리카락은 다 빠졌으며 눈과 귀는 기능을 잃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숨만 내쉬다 발작을 일으키며 세상을 떴다. 눈앞의 아비는 당시 푸른 반점이 신벌이라 울부짖으며 여신께 용서해 달라 수십 수백 번을 빌었다.

“그 사람은 고통스럽게 갔지. 끝끝내 괴로워하면서……. 여러 번 고민했다. 차라리 내 손으로 아그네스를 보내 주고 따라 죽을까.”

“…….”

“난 아그네스가 신벌을 받았다 생각했다. 푸른 반점은 여신의 분노를 뜻하니…… 나와 너로 인해 성녀 후보였던 그이가 여신의 노여움을 샀다 생각했지.”

“…….”

“하지만 아니었어. 아그네스가 그런 이유로 그렇게…… 그리 고통스럽게 간 게 아니야! 찢어 죽일 놈들!”

언제였던가. 황궁에 몇 차례 다녀온 뒤였나. 아제프는 아비가 어느 날부터 신전을 멀리했던 것을 기억했다. 여신을 입에 달고 살던 아비는 어느 순간 여신을 말하지 않았다.

가문의 재산을 팔아 가며 냈던 기부금을 순식간에 끊었고 신전을 방문하기는커녕 여신에게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 성소에 있지 말고 돌아오라고. 돌아와 가문을 이으라고. 그때는 아비가 어미를 잊어 그러는 줄만 알았다. 세월이 흘러 신앙이 퇴색한 모양이지. 할아버지가 누누이 말하던 세속의 일이 더 큰일로 느껴지는 모양이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아비의 얼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아비는 신앙을 잃은 게 아니었다. 그는 신앙을 스스로 내다 버렸다. 어미와 관련된 어떤 이유로…….

아제프는 진실을 알기 무서웠다. 이 이상 아비의 말을 들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들어야만 했다.

레이첼, 그녀가 그 진실과 관련돼 있으므로.

“제대로 알려 주십시오. 하나도 숨김없이.”

리이트 후작의 얼굴에 얼핏 갈등이 스쳤다. 한참 머뭇거린 그가 아들의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죽은 아내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도 본 적이 있을 테지. 성녀 후보들에게만 주는 성수를…… 그 지독한 푸른 물을 말이다.”

* * *

“나가지 마십시오.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

“폐하께서 함구하라 경고도 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이리 나서시면…….”

빌은 나갈 채비를 하는 에단을 붙잡았다. 바짝 마른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은 채 돌아다닌 몸은 이미 상할 대로 상했다.

“제발…… 몸을 챙기셔야 합니다.”

황태자의 결혼 연회 날 에단은 빌의 예상보다 더 늦게 후작저로 돌아왔다. 공녀님과 함께하시지 않았나? 내심 둘이 같이 오길 바랐던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채 홀로 온 주인이 아쉬웠지만 비틀거리는 꼴이 걱정돼 별말 하지 않았다.

그 후 에단은 방에 틀어박혔다. 몰래 들여다본 방 안에서 서럽게 울고 있던 주인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주인의 입에서 나오는 레이첼이라는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는 바로 뛰어들어 무슨 일이냐 소리칠 뻔했다.

로잘린과의 재결합이 물 건너갔음을 알게 된 빌은 괜스레 레이첼을 욕하며 주인의 건강을 염려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걱정할 일은 그다음부터였다.

황궁에서 조사관이 나오고 주인은 창백한 얼굴로 조사관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빌은 밤에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에단이 밤낮 구분 없이 후작저를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열도 있습니다. 제발…… 이 늙은이가 걱정으로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십니까.”

에단은 대꾸 없이 빌을 털어 냈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쫓으며 빌이 무어라 계속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찾아야 했다. 당장 이 두 눈으로 안전한 걸 봐야 했다. 시야가 어지러웠으나 에단은 눈을 껌뻑이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빌은 출입문까지 에단을 따라왔다. 빠른 걸음의 주인을 따르니 숨이 찼다. 그가 다시 한번 에단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 에단이 휘청거렸다. 놀란 빌이 재빨리 주인을 부축했다.

“주인님!”

에단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는 와중에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레이첼은 겁에 질려 울고 있을지 몰랐다. 항상 괜찮은 척했지만 눈물이 많은 이였다.

에단이 눈에 힘을 준 채 일어섰다. 그러나 곧 나갈 것처럼 보였던 그는 출입문 손잡이를 잡더니 멈칫했다.

그가 몸을 돌렸다. 뒤에 서 있던 빌은 잘 생각하셨다 이야기하려다 섬뜩하게 빛나는 검은 눈에 얼어 버렸다. 주인의 눈초리는 잘 벼린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빌.”

에단이 이름을 부르자 긴장에 뻣뻣이 굳은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주인은 보통 그를 할아범이라 친근하게 칭했다. 이어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지난번 내가 집을 비웠을 때 그 애가 찾아왔었나?”

누굴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빌은 머뭇대고 말았다. 말 못 하는 그를 향해 에단이 재차 물었다.

“몇 번이나 왔었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이 빌의 얼굴에 또렷이 박혔다. 이번에는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이 가까스로 답했다.

“……주인님께서 떠나시고 사흘 뒤부터 매일 오셨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지?”

“…….”

“물었어. 왜 내게 그걸 말하지 않았나.”

질책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느리고 차분한 어투였다. 하지만 빌은 에단이 보이는 냉기에 당장에라도 졸도할 것 같았다. 주먹을 말아 쥔 그가 더듬거렸다.

“로, 로잘린 아가씨께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캐틀렛 공녀가 무슨 상관이지.”

“주인님과 아가씨께서는 약혼하셨던 사이십니다. 게다가 두 분은 어릴 적부터…….”

“빌. 네 주인이 누구지?”

에단의 물음에 빌의 얼굴이 굳었다. 주인이 누구냐니. 그건 빌에게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빌의 조상은 대대로 마일런 후작을 모셨다. 그의 조부도 아비도 그리고 저도.

“네 주인은 나인가 캐틀렛 공작인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늙은이는 돌아가신 후작 각하 때부터 주인님을 모셨습니다.”

“그래. 자네는 그랬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 내 곁에는 항상 자네가 있었지. 하지만 빌.”

“…….”

“난 자네 아들이 아니라 주인이야. 그리고 난 내 뜻을 어기는 종은 필요 없어.”

“주, 주인님.”

평생 마일런가에 충성했던 빌이 무릎을 꿇었다. 에단이 후작이 된 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하나 에단은 단호했다.

“……후작저를 나가. 되도록 빨리.”

마지막에 들었던 말 중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신만 변하면 된다고, 노력하면 된다 생각한 건 큰 착각이었다. 지난 세월 그가 보여 준 행동에 주변조차 그녀를 괄시하고 있었다.

별거 아닌 일이다. 그럴 수 있지. 그렇게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넌 조금 덜 상처 입었을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늙은이가 그리한 것은 다 주인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만은 제발…….”

“다시 돌아왔을 때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냉혹한 말과 함께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닫힌 문 너머 빌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래도록 함께한 사용인의 울음에 에단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지만 그는 그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꺼번에 두세 개의 계단을 내려온 에단이 아무 말 없이 준비된 말 위에 올랐다.

* * *

몇 시간 동안 밖을 헤매던 에단은 밤늦게 바이허 백작가로 향했다. 아무 곳이나 들쑤시며 레이첼과 관련된 말을 주워듣던 중 아이작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그 아가씨의 일이라면 친우이신 바이허 백작님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황궁을 드나들며 일하는 젊은 자작은 아이작이 황태자와 함께 황제를 알현했고 그 뒤 황태자는 제 궁에 감금을 당하고 아이작은 그날 이후 백작저에만 있다 이야기했다.

“……왔나?”

“꼭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에단은 아이작을 보기 무섭게 그가 무언가 알고 있다 확신했다. 널브러지다시피 카우치에 누운 친우 옆 유리 탁자에는 술병 여러 개와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

“너 아는 게 있지? 당장 말해.”

“…….”

“왜 어울리지 않게 벙어리 행세야. 빨리 말 못 해?”

아이작은 자신을 다그치는 친우를 보며 픽 웃더니 술잔을 들었다. 호박색 술을 단번에 비운 그가 꼬인 혀로 말했다.

“에단. 난 자네가 원망스러워.”

“뭐?”

“헤어진 주제에 왜 레이첼과 내 사이를 갈라놓았나. 난 에단 자네를 생각해 그녀에게 1년 이상 다가가지 않았네. 한데 자네는…… 자네가 그때 레이첼을 납치해 그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사랑했을 거야. 여전히 웃어 줬을 거고. 어쩌면 지금쯤 내 아내가 되어 있었겠지. 그래, 바이허 백작 부인!”

키득거리는 품새는 가벼웠으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에단은 제 질문에 답 대신 쓸데없는 푸념이 돌아오자 고민 없이 아이작의 멱살을 잡았다. 한시가 급한데 이 술주정뱅이가 뭐라 나불댄단 말인가. 그가 친우를 흔들며 위협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나? 쓸데없는 말 말고 제대로 답해. 아는 게 뭐야.”

“정신? 난 아주 멀쩡하네. 너무 멀쩡해서 탈이지. 정신을 못 차린 건 오히려 자네지. 여자 하나에 캐틀렛을 버려? 멍청하기는…….”

횡설수설 말이 튀었다. 에단은 아이작을 차갑게 내려다보다 결국 주먹을 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작이 카우치로 나뒹굴었다.

“씨발, 왜 때리고 지랄이야. 개같은 에단. 망할 에단…….”

카우치에 처박힌 아이작이 욕을 지껄이며 낄낄거렸다. 에단은 다시 한번 아이작의 멱살을 잡고 들었다.

“몇 대 더 맞겠나?”

“……그러고 보니 이번 일도 자네 탓이군. 그때 에단 자네가 레이첼을 신전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야. 말이 무섭긴 해. 설마 했던 일이 사실이 되다니.”

그러나 에단은 아이작에게 그 이상 주먹을 내지를 수 없었다. 이어진 아이작의 말에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신전? 생각도 못 한 단어에 그가 아이작을 더 가까이 끌었다.

“무슨 말이야. 제대로 말해.”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머리가 그것밖에 안 돌아가나? 하기야 자네는 전부터 그랬지. 그래, 내 우둔한 자네를 위해 친절히 말해 주지. 레이첼 그녀가…….”

“…….”

“……성녀라 하더군.”

“…….”

“말이 되나? 그녀가 성녀라고. 자네가 그녀를 거짓 성녀 후보로 만들더니 레이첼이 정말 성녀가 됐어. 그녀가 어디 있나 알고 싶어 날 찾았겠지? 성녀…… 답은 뻔하지 않나. 그녀는 성소로 갔네. 아니, 끌려갔지. 그 빌어먹을 곳에 갇혀 있단 말이야.”

아이작의 말에 에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아이작의 멱살을 놨다. 신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새끼가 기어코!!!’

분명 아제프 그 미친놈의 짓이었다. 그 일을 아는 건 자신과 그 그리고 작은 소년 하나뿐이었다. 사제들이 소년의 말을 믿을 리 없었으니 남은 건 하나였다. 게다가 아제프 그놈은 그때도 고심하지 않았던가.

“미친 새끼! 죽여 버리겠어!!!”

에단이 고함을 지르자 풀린 눈으로 그를 보고 있던 아이작이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처지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아이작이 에단을 추궁했다.

“표정을 보니 자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군?”

“…….”

“또 뭐, 둘만의 비밀인가? 하! 전부터 그랬지. 두 사람 정말 나한테 너무한다 생각하지 않아?”

“…….”

“내가 자네 친우이긴 한가? 레이첼 그녀가 내 연인이긴 해?”

“둘 다 아니니깐 그만 좀 닥쳐.”

아무 말 없던 에단이 아이작을 밀쳤다. 술에 취해 제대로 반항 못 한 아이작이 밀려 나며 다시 카우치에 안착했다. 넘어지듯 앉느라 어딘가에 부딪친 모양인지 아이작이 신음을 흘렸다. 에단은 그가 아파하건 말건 고함쳤다.

“막았어야지! 알면서 뭐 했어? 안 막고!”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네. 어떻게든 빼내 보려 했지만 끝났어. 젠장! 하다 하다 전하도 자네도 아닌 여신한테 레이첼을 빼앗길 줄이야.”

“이건 명백한 납치야. 범죄라고! 걔는 성녀가 되길 원하지 않아. 다시 데려와야 해. 폐하께 고한 다음 구해야 한다고. 감히 신전에서 귀족 영애를 납치해?”

“소용없어. 그리 안 해 본 줄 아나? 전하마저 실패하셨네. 폐하께서 완강하셔.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신전과 척을 질 수 없다고 말이야. 신전이 그녀를 납치한 건 사실이나 성녀 후보였다는 대의명분이 있지. 망할…… 성녀 후보라는 직함 때문에 순전히 납치라 주장할 수도 없다고.”

“뭐? 그게 말이 돼? 그놈들한테는 이미 성녀가 있잖아. 왜, 그…….”

“……메페즈의 루치아가 죽었어. 은밀히 알아본 사실이야.”

“…….”

“이제 왜 자네 탓이라 하는지 알겠나? 신전에서 어떤 이유로 그 많은 성녀 후보 중 레이첼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첼은 루치아 후보의 후임이 된 거야.”

“망할…….”

아이작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명확해졌다. 레이첼이 보여 준 그것. 아제프는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다.

이를 악문 에단이 몸을 돌렸다. 그가 일언반구 말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에단!”

아이작은 뒤에서 친우의 이름을 부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단 에단을 따라가야 했다.

척 봐도 친우는 레이첼을 쫓아 성소로 가는 낌새였다. 황제의 함구령도 어기고 성소로 향한다면 분명 큰 질책이 있겠지. 하지만 레이첼의 일만큼은 에단에게 질 수 없었다. 레이첼은 자신의 연인이었다. 현재의 연인인 그가 과거의 연인에게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절대 안 되지.’

아이작은 평상시와 달리 매우 엉망인 몰골이었다. 조금 전까지 술을 들이켜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깔끔한 차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그가 겉옷을 대강 꿰입고 말을 찾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작스러운 말 울음소리에 놀란 하인 몇이 따라 나왔다.

“주인님! 어, 어디로 가십니까?”

“이걸 황태자 전하께 전해라. 어떻게든 성공해야 한다.”

하인이 물었지만 아이작은 말 위에서 대충 무언가를 종이에 휘갈겨 쓰더니 던지듯 하인에게 건넸다. 그리고 잡을 새도 없이 말의 옆구리를 찼다. 히이이잉 긴 울음소리와 함께 바이허 백작가 정문에는 흙먼지만이 남았다.

* * *

카샨은 제 궁에서 어렵게 나온 뒤 바로 황제에게 달려갔다.

“폐하!”

“…….”

“레이첼은 리온의 제국민입니다. 성녀 후보라 해도 이렇게 절차도 없이 납치해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도 제 결혼식, 황궁 연회에서요!”

황제는 카샨의 절절한 호소에도 여전한 얼굴이었다. 일순 따분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에 카샨이 입술을 내리 물었다. 이럴 때마다 아비가 거대해 보였다. 저 얼굴. 저 표정. 핏줄이 아닌 황제다웠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갇혀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알아냈다. 찾은 사실만 보더라도 일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건 신전으로부터의 폐하와 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들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그녀가 정말 성녀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녀는 성녀 후보로 있는 기간이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짧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지요.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가져온 종이가 바닥에 펼쳐졌다. 카샨은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제는 아들이 제 앞에 무릎 꿇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황태자. 그만하거라.”

“…….”

“고작 자작 영애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어. 그만 일어나 나가 보거라. 보고 있기 힘들어.”

카샨은 황제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카샨이 황제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그가 휘두를 수 있는 건 피뿐이었다. 황제는 아닌 척해도 카샨에게 어느 정도 물렀다. 어미 아샬린이 죽은 후로는 더. 카샨이 무릎 꿇은 채 아비의 손을 잡고 거기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이따위 방법밖에 없는 것이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푹 숙인 고개 아래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제발요. 아그네스 성녀 후보 때에는 도와주셨잖습니까. 그녀와 리이트 후작이 제국민이라는 이유로요.”

“……그 일은 네 어미가 특별히 부탁했으니깐.”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아들을 내려다보며 유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카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아들인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레이첼을 빼 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아…… 카샨.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전에 내게 말할 때는 별 가치 없는 이라더니…….”

황제가 달래듯 카샨의 손을 토닥였다. 미미하게나마 미간을 찌푸린 그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아버지, 전…….”

침을 삼키고 잠깐 머뭇거리던 카샨이 아비와 눈을 마주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해야 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도.

“……그녀가 누군가의 연인이든 어떤 이의 부인이든 상관없다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으면 언제고 품을 수 있으니까요. 자신 있었습니다. 누구와 결혼하든 제 것으로 만들 자신이요.”

“…….”

“하지만 아니요, 이제 알았어요. 아예 제 손을 떠나 버린다 생각하니 알았다고요.”

“…….”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힘이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고 닿지 않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

“전 그녀를 사랑해요. 아니라 했지만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그러니 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이 아들을 살려 주세요.”

황제의 입가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아들의 말에 아샬린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녀와 자신을 닮은 아들이 애처롭게 부탁하고 있었다. 여인 때문에.

자신의 아비라면 손자의 이런 태도를 한심하게 생각했을 것이나 카시우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또한 사랑을 해 봤고 아직까지도 그 사랑에 앓고 있는 이였다.

아샬린의 마지막이 생각났다. 자신이 선물한 그 배에서 그녀는 사라졌다. 빠른 물속으로,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그래, 소용없지. 보이지 않고 닿지 않는다면 황제가 무슨 소용일까. 카시우스는 아샬린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황제의 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거지로 살아도 그녀 곁이 훨씬 행복할 테니까.

그러나 아샬린은 돌아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카시우스는 황제였다. 황제는 아들의 기대와 반대의 말을 했다. 아들이 안타깝긴 했으나 이 일로 자신의 오랜 계획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과한 생각을 하는구나. 카샨, 그녀는 성녀가 되는 것뿐이야. 어떻게 보면 영광스러운 일이지.”

“그런 말 마십시오. 이미 알아봤습니다, 아버지께서 함구령을 내리실 때.”

카샨의 말에 카시우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빛이 스쳤다. 알아봐? 무얼? 자칫하면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기에 그는 가는 눈으로 아들을 봤다.

“그때 왜 그리 과하게 입을 막으시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더군요. 성녀, 그것이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

“성녀라는 것…… 오래 산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계속해서 신전에 관한 걸 조사하고 계시던데…… 그 시기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더군요.”

“…….”

“말씀해 주세요. 제가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 과한 일입니까?”

카샨은 성녀와 어미의 죽음이 관련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비를 흔들려 하고 있었다. 잠시 말 없던 카시우스가 뜬금없이 말했다.

“카샨. 난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이 내 아샬린을…….”

여신이 악마를 무찌르는 천장화로 시선을 돌린 황제는 어딘가 광기에 차 보였다. 그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악마를 향해 창을 내리꽂는 여신을 노려보다 아들에게 어미의 죽음에 대해 조용히 그러나 상세히 속삭였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해는 이미 넘어간 후였다. 캄캄한 밖. 모든 걸 들은 카샨의 심경이 딱 그러했다. 말조차 못 하는 아들을 보며 카시우스가 제 계획을 밝혔다.

“……그러니 난 네 청을 들어줄 수 없다. 난 성녀가 존재하길 바란다. 강력하다면 더 좋지. 그들은 가장 높이 날아올랐을 때 추락해야 한다. 예컨대 성녀 추대식 때 말이다. 그때 그들이 추종하는 여신 따위 만들어진 허상임을 밝혀야지.”

카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제는 성녀 추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성녀가 되든 상관없이. 카샨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레이첼은요? 레이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버지 뜻대로라면 그녀가 성녀일 때…….”

“뻔한 걸 묻는구나. 여신이 없으면 성녀도 없어야지. 감히 제국민을 포함해 황제인 나를 속인 여인을 어찌 내 그냥 두겠느냐. 네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장 먼저 검에 찔리는 이가 바로 성녀다.”

아비의 검에 목이 베이는 레이첼을 상상하자 온몸의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비는 한다면 하는 이였다. 카샨은 최대한 이성을 찾으려 애쓰며 아비를 만류하려 했다.

“아, 아버지. 안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동부를 포함한 일부 지역은 신앙이 깊은 지역입니다. 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런 일을 벌였다간 내전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레이첼이 아니더라도 아비의 계획은 위험했다. 성녀 추대식 때 성녀를 죽인다니. 성녀가 거짓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동요할 터였다. 자칫하면 내전으로 이어지겠지. 그러나 카시우스는 완강했다. 그가 아들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졌다.

“두려워 마라, 카샨. 네 아비이자 이 나라의 황제인 내가 장담컨대 여신은 없어. 그것은 조각상과 같은 허상에 불과해.”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얼굴이었건만 카샨은 이 순간 아비가 제일 두려웠다. 아비는 분명 성군으로 칭송받는 이였다. 그런데 왜…… 지금의 아비는 역사서에서나 보던 미치광이 폭군 같은가. 아들의 두려움을 읽은 카시우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네 어미가 죽었을 때 난 깨달았다. 여신 따위 없다고.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아샬린이 죽을 리 없다. 적어도 그녀의 시체는 내게 돌아왔어야 해. 하나 그렇지 않았다. 아샬린은 내게 어떤 형태로도 돌아오지 못했어.”

반려를 잃은 사내의 입가에 광기 어린 웃음이 맺혔다. 여신상이 부서지고 불타는 신전이 눈앞에 그려졌다. 흰 옷을 입은 사제들은 피 흘리며 기사의 검에 꿰뚫렸고 교황의 관은 칼질 한 번에 바닥에 떨어졌다. 상상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긴 숨을 내쉰 황제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 그것을 부숴 버리는 데 망설임이 없을 수밖에.”

* * *

“가만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수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셨는지……으윽!”

“싫어! 이 개새끼들아! 매번 칼 들고 찍으려 드는데 너라면 가만있겠냐? 놔! 놓으라고!”

레이첼은 몸부림치며, 다가오는 사제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사제가 들고 있던 검이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는 검을 보자 얼마 전이 생각났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려온 단검은 그대로 그녀의 손을 뚫었다. 레이첼은 엄청난 고통과 충격에 소리 한번 못 지르고 그대로 기절했다.

한참 만에 일어났을 때 다행히 손은 멀쩡했다. 두려움과 패닉에 빠져 덜덜 떨기만 하는 그녀에게 사제들이 다가와 기적이니 성녀니 무어라 찬탄하며 설명을 늘어놨다.

겁에 질린 레이첼에게 그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공포에 완전히 질려 버린 그녀는 며칠간 얌전히 사제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구역질 나는 맛에 캑캑거리면서도 그들이 마시라는 성수를 마셨고 외우라는 구절도 군말 없이 익혔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곧 성녀가 되실 분인데…….”

“성녀는 얼어 죽을! 이 짓거리 하면서 성녀? 미친놈들! 당장 놔! 놓지 못해?”

하지만 사제들이 확인해 본다 다시 검을 들고 왔을 때 레이첼은 이성을 잃었다. 목숨이 아까워 그동안 얌전히 있었지만 멀쩡한 살을 베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제들은 갑자기 발버둥 치는 그녀 때문에 당황해 허둥거렸지만 어쩌란 말인가, 죽어도 다시 검에 찍히기는 싫은데.

“윽! 가만 계셔야 더 빨리 끝납니다. 제발 가만히 좀…….”

“싫다잖아! 아프다고! 너네 같으면 가만있다 칼 맞겠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고! 이 머저리들아!”

“후…… 잡아. 성녀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차피 여신께서 기적을 내려 주시지 않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사지가 붙잡혀 반항조차 불가하자 레이첼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놔! 흐으……. 놔 주세요. 아니면 그 여신인가 뭔가 하시는 분이 벌을 내릴 거라고!”

여신을 끌어들인 것이 성공적이었는지 사제들은 주춤거렸다. 딴 이도 아니고 성녀 될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진 사제들이 주춤거리며 손을 물렸다.

우는 레이첼과 사제들의 대치가 이어질 때였다. 언제 왔는지 늙은 사제가 방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검을 든 사제를 한심하게 보며 물었다.

“아직도 멀었느냐?”

“그게…… 원체 겁을 먹으셔서…….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

눈을 흘긴 늙은 사제가 꾸짖는 기색으로 핀잔을 주고는 레이첼에게 다가왔다. 엉엉 울고 있던 그녀는 제 손을 찍었던 그가 다가오자 입을 꾹 문 채 독기 서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레이첼 님.”

“…….”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레이첼 님께서는 성녀가 되실 겁니다. 그런데 아이처럼 이렇게 떼를 쓰시면 어떡하겠습니까.”

“미친…… 그걸 말이라고.”

“말씀과 행동도 가려 하셔야 합니다. 얼마 뒤에 신전을 대표하실 몸인데 언행을 바로 하셔야죠. 레이첼 님이 곧 신전의 얼굴입니다.”

“신전의 얼굴은 무슨……. 계속 말하지만 이거 납치예요! 범죄라고! 난 그딴 거 안 해요! 그러니 당장 풀어 줘요! 풀라고!”

“…… 아랫것들이 레이첼 님을 제대로 보필을 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여신께 순종하셔야지, 이런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조곤조곤 말하는 폼이 꼭 어리석은 제자를 대하는 스승 같았다. 늙은 사제가 제 뜻에 불응하는 레이첼을 엄히 바라보며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검을 이리 다오.”

“미, 미친! 놔! 다가오지 마! 말라고!”

그가 다시 검을 쥐자 레이첼이 날뛰었다. 그러나 사지를 결박당한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제가 이번에는 손이 아닌 레이첼의 허벅지 위로 검을 가져다 댔다. 닿을 듯 말 듯 날카로운 검 끝이 자리를 가늠하자 레이첼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싫어!!! 잘못했어요! 하지 마세요. 제발…… 제발 그만해요!”

“오늘은 제가 도와드리겠지만 내일부터는 직접 하셔야 합니다.”

“싫…… 싫다고! 싫어! 하지 마! 하지 말란……아악!”

살 찢는 소리가 선명했다. 레이첼이 고개를 젖히고 몸을 뒤틀며 고통에 허덕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을 대강 올린 늙은 사제가 그새 아물어 가는 상처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이런…… 아직도 검 위를 걷기는 어렵겠군요. 시일이 촉박한데 말입니다.”

“흐…… 아…… 아파…… 흐윽…… 엄마…….”

사지를 결박하고 있는 사제들조차 애처로운 울음에 고개를 숙였지만 검을 잡은 이는 숙련된 도살자가 짐승을 도축하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가 여전히 단조로운 목소리로 가르치듯 말했다.

“시간을 조금 더 드리고 싶지만 이제 연습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시작은 사금파리가 좋겠습니다. 검보다는 덜 날카로우니 적응하기 편하시겠지요.”

레이첼은 사제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허우적대던 그녀는 견디기 힘든 고통에 또다시 까무러쳤다. 거의 아문 상처를 살피며 늙은 사제가 검을 넘겨줬다.

“성수의 양을 좀 더 늘려. 그리고 깨어나신 후에 또 반항하시면 그걸 드려라.”

“하, 하지만 그건…….”

고개 숙인 채 검을 넘겨받던 사제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가 말을 더듬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곧 엄한 눈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취임식까지만이다. 여신께 순종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지.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 * *

“그러게 누가 아무 준비도 없이 출발하라 했나? 나보다 먼저 가더니 결국 만나는군.”

에단은 아이작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이작의 손에 들린 수통을 빼앗아 신경질적으로 물을 들이켰다. 정신없이 달릴 때는 몰랐는데 멈추고 나니 어질할 정도로 갈증이 났다.

“뻔하지. 돈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에단, 성소에 가는 길에는 마을이 없다네. 덕분에 지리를 모르는 이는 고생하기 십상이지. 바로 자네처럼.”

그들은 지친 말을 위해 성소 가까이에 있는 숲의 작은 샘가에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은 고급 품종인 할랍종으로 빠르고 지구력이 뛰어났지만 생명체인 만큼 아예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었다.

“시끄러워.”

말에게 물을 먹이려 길을 헤매는 에단을 겨우 따라잡은 아이작은 이곳 지리를 안내해 주는 대가로 쉴 새 없이 빈정거렸다. 에단은 시끄럽다 대꾸하긴 했지만 평소와 달리 그 이상 아이작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잠깐 쉬고 있는 와중에도 레이첼이 걱정돼 다른 곳에는 신경이 가지 않았다.

“그리 조급해할 필요 없어. 지도를 보니 조금 있으면 도착이네. 여기서 잠깐 쉰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거야.”

“…….”

에단의 표정에 조급함이 드러나자 한참 빈정거리던 아이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레이첼의 상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도 문제였고 지금 찾아가고 있는 성소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으니. 항상 이성적으로 계획을 짜고 움직이는 그에게 있어 이번 결정은 참으로 무모했다.

“내가 이러고 있는 와중에 그 애가 나쁜 짓이라도 당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뭘 그런 걸 걱정하나. 다른 이유도 아니고 성녀로 불려 간 레이첼이네. 신전에서도 가둬 놓을지언정 함부로는 못 할걸.”

“아니야. 뭔가 불안해. 그 애를 가만둘 작자들이 아니야. 분명 꿍꿍이속을 가지고…….”

“이미 물었네만 에단, 나한테 말 안 한 거 없나? 혼자만 알고 말하면 내가 뭐가 되지? 응?”

“…….”

“답답해 죽겠군. 그리 입을 다물면 내가…….”

“조용.”

아이작이 말을 이을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듯 에단이 울창한 숲 쪽을 바라봤다. 에단의 행동에 아이작 또한 긴장한 채 같은 곳을 응시했다.

숲은 주변에 마을도 없는 데다 성소에 가까운 만큼 한적한 편이었다. 방문하는 이들이라고는 신앙심 깊은 여행객이 다였지만 이런 시각에는 그조차 드물었다. 에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당장 나와.”

낯선 기척이 가까워졌다. 장갑 낀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사내 하나가 말을 끈 채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에 아이작이 알은척을 하려 했다.

하지만 에단이 먼저였다. 상대를 확인하기 무섭게 그가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

둔탁한 소리가 늦은 밤 샘가에 울렸다.

* * *

“그만하게. 아제프 경을 그렇게 노려본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아.”

아제프에 대한 에단의 의심은 어느 정도 풀렸다. 아이작의 적극적인 만류와 아제프의 해명이 제법 상세하고 진실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제프의 얼굴에 남은 멍처럼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동행하는 내내 화를 참지 못했다. 특히 아제프에게서 몰랐던 진실을 듣게 된 후 에단은 주먹이 아닌 검을 뽑아 들었다. 아이작이 아니었다면 아제프는 진즉 다쳤거나 이미 죽어 차갑게 식어 갔을 터였다.

“이제껏 제가 있었던 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해? 그리고 저놈을 어떻게 믿어, 거짓으로 날 속이는 걸지!”

“에단, 곧 도착하네. 제발 목소리를 낮춰.”

“성수를 먹인 것도 저놈이야. 걔한테 그렇게 위험한 걸 먹였다고!”

당장에라도 아제프에게 달려들 것 같은 에단을 아이작이 붙잡았다. 아제프는 에단의 말에 고개 숙일 뿐이었다. 남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자 지금껏 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반추하게 됐다.

레이첼은 성수라 불리는 그것을 마시기 싫어해 잔꾀를 부리곤 했다. 그리하여 아제프는 그녀가 몰래 버리려던 것을 매번 찾아내 마시길 종용했다. 그것이 독과 같은 것인 줄도 모르고.

“네놈이 성소 내부를 아는 게 아니었다면 진즉 이 검으로 죽였어. 하나 일이 끝나고도 살 생각은 마. 네놈의 목은 내가 바로 베어 버릴 테니까.”

스산한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에단은 진정으로 이 일이 끝나면 아제프를 죽여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감히 그 애한테 뭘 먹여? 다시 생각해도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분명 그때 그랬다. 너무 쓰고 먹기 괴롭다고. 해가 되는 독인 줄도 모른 채 괴로움을 참아 가며 마셨을 터였다. 바로 저놈과 그 신전 놈들로 인해.

“……뜻대로 하십시오.”

아제프는 에단의 겁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이라고는 오직 레이첼뿐이었다. 아제프는 아비가 말한 진실을 상기하며 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그녀만 무사하게 해 달라고. 물론 이제 와 여신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뭐? 뜻대로 해?”

에단은 덤덤한 아제프의 말에 더 분이 끓는 모양인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곧 아이작이 그의 말을 끊고 나무 뒤에 바짝 붙어 앞을 향해 고갯짓했기에 검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쉿. 에단, 그만하고 앞을 보게.”

세 사람 앞에 위용 있는 신전이 펼쳐졌다. 눈이 아플 정도로 흰 벽이 옆으로도 위로도 끝없이 펼쳐져 캄캄한 밤을 비췄다. 범인이라면 크기에 우선 압도되고 남을 정도였다.

“더럽게 크군.”

성소에 처음 와 본 에단이 눈을 한 번 내리감았다 뜨곤 욕설을 내뱉었다. 성소는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컸다. 아이작이 왜 아제프와 꼭 동행해야 한다 했는지 납득이 갔다. 저 정도 넓이를 뒤지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깊게 심호흡한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 * *

레이첼은 제단에 누워 있었다. 일말의 미동도 없이.

사제가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푸른 물을 먹였다. 꿀꺽 느리지만 넘어가는 성수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일으켜 드려라.”

늙은 사제의 명에 두 명의 사제가 레이첼의 양팔을 붙잡았다. 인형처럼 축 늘어진 그녀가 사제들의 움직임에 따라 간신히 섰다.

레이첼의 눈앞에는 사금파리 길이 놓여 있었다. 갖가지 크기로 부서진 사금파리들은 제각각 날카로운 단면을 자랑했다.

“시작해.”

레이첼이 질질 끌리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은 물론이요 그녀의 흰 발 전체에 상처가 죽죽 그어졌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던 늙은 사제의 입은 거의 한계까지 찢어졌다.

“아아…… 여신이시여.”

붉은 선이 그이고 피부가 찔리기 무섭게 재생됐다. 거의 다친 것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피는 나지도 않았다. 흐르기도 전에 멎어 버렸으니. 멍한 얼굴의 레이첼을 제외한 그 자리 모든 이들의 얼굴에 환희가 찼다.

이제 조금이면 됐다. 조금이면…….

늙은 사제는 레이첼이 장장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사금파리 길을 걷는 것을 다 지켜본 후 명했다.

“내일은 검과 불을 준비해라. 초대 성녀 이사벨라 님께서 강림하실 터이니.”

* * *

아제프는 상세히 성소 내부를 알려 줬다. 그의 설명을 듣는 에단과 아이작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히 설명을 들었다. 물론 에단은 아제프에게 도움받는 것이 못마땅한 듯 간간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도 아제프 없이는 레이첼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이상 무어라 말하는 일은 없었다.

곧 세 사람은 각자 목표 지점을 잡고 갈라졌다. 성소가 원체 넓은 데다 여럿이 몰려다니면 들킬 염려가 컸기 때문에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에단은 입구를 중심으로 동쪽 지역을 살폈다. 밖에서 볼 때도 그러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오니 성소 내부 크기가 실감 났다. 홀은 왜 이리 쓸데없이 넓으며 기둥은 어찌나 높은지 한때 신전이 황궁보다 부유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깊은 밤인 만큼 정찰병을 제외하고 돌아다니는 이들은 없다 해도 무방했다. 에단은 복도 끝 모퉁이에서 정찰 도는 이들을 피해 몸을 숨기며 그들의 방향을 가늠했다. 어떻게 구역이 나뉘었는지는 모르나 제가 온 방향에서는 저들을 본 적이 없으니 당분간은 이리 오지 않을 터였다.

‘저건…….’

한참 컴컴한 그림자 속에 숨어 움직이던 에단의 눈에 사제 하나가 들어왔다. 이 시각 옷을 다 차려입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사제가 들고 있는 그릇이었다.

“급하다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루치아 님처럼 큰일이라도 나면…….”

사제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 확신한 듯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루치아. 에단은 사제의 말에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분명했다. 사제가 가고 있는 곳은 레이첼과 관련 있었다.

사제는 별 특이할 것 없는 홀로 들어섰다. 곧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에단이 홀로 들어섰을 때 사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뭐야. 어디로 사라진 거지.”

홀에는 문 따위 없었다. 여느 홀처럼 높은 천장 아래 여신상만이 존재할 뿐. 에단은 얼굴을 구기다 무언가 생각난 듯 소리가 났던 곳을 어림잡아 벽을 더듬었다.

수도까지 침략당했던 먼 옛날 어느 전쟁 이후 황궁이나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귀족가에는 꼭 비밀 장소가 있었다. 그러니 신전이라고 없을 이유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겉보기에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만져 보니 실금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벽을 눌렀다. 그러자 여신상 바로 뒤의 바닥이 천천히 열렸다.

먼저 들어간 사제와 마주칠까 검을 뽑은 에단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제법 깊었지만 벽에 걸려 있는 횃불 덕에 앞을 분간 못할 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완전히 내려오자 얼마 떨어진 앞에 문이 나타났다. 문 자체는 위에서 보던 것과 별 차이 없었다. 하나 문 위에 상체까지만 조각된 여신은 기기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보통 여신의 조각상은 자애로운 미소나 그것도 아니라면 악마를 무찌르는 위용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신상은 좀 특이했다. 에단은 괴로운 듯 울고 있는 여신상을 인상 찌푸리며 보다 문에 바짝 붙었다.

들어간 사제는 하나였지만 안에는 인원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당장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채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일단 몇 놈이나 있는지…….’

“싫어요!”

귀를 가져다 대기 무섭게 에단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문 안에서 들리는 비명.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레이첼이었다.

* * *

레이첼은 들어온 사제가 하나인 것을 보고는 반항하며 발버둥 쳤다. 그가 들고 온 저것. 끔찍하리만치 역겨운 저 물이 제 몸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저것만 마시고 나면 정신 나간 것들이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 댔다. 게다가 그녀가 심하게 반항할 때면 그들은 이상한 약을 억지로 마시게 했다. 몽롱한 정신에 기억은 흐릿했지만 레이첼은 그때도 사제가 제 몸에 무슨 짓을 벌였다 확신했다.

쉴 새 없이 학대당하는 몸. 갉아먹히는 정신. 당장에라도 정신을 놔 버리고 싶었으나 레이첼은 어떻게든 견뎠다. 성녀가 되어야 한다 했으니 그녀를 죽일 생각은 없단 말이었다. 언젠가는 밖으로도 나갈 수 있을 터이니 꼭 기회를 잡아 이 미쳐 돌아가는 곳을 탈출하자 레이첼은 다짐했다.

두려움에 눈물만 나던 것이 각오하고 나자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레이첼은 꽁꽁 묶인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사제들이 하나하나 올 때면 머리를 굴려 볼 만했다.

레이첼은 시골 신전의 늙은 사제를 제외한 사제들이 대부분 젊고 여인에게 미숙한 이들임을 눈치챘다. 몇몇은 대놓고 레이첼을 가여운 눈으로 봤으니 그녀는 서서히 그들 중 일부를 구워삶는 중이었다.

“마시기 싫어요. 너무 괴롭단 말이에요.”

“레, 레이첼 님.”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첼이 눈물을 글썽이며 가여운 한숨을 쉬었다. 어딘가 묘한 분위기에 사제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이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처연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제님이 좀 봐주시면 안 돼요? 한 번쯤은 괜찮잖아요.”

“안 됩니다. 추대식 때까지는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제발요……. 제발……. 너무 괴로워서 그래요. 흐윽…….”

“안 됩니다. 다른 사제들을 불러오기 전에 어서 드세요. 아니면 또 약을 드시게 될 겁니다.”

“다른 사제님들은…… 몇 번 넘어가 주셨는데. 사제님 정말 너무하세요.”

단호했던 사제가 다른 사제라는 말에 주춤했다. 자신 외 다른 이들은 봐줬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신전 내 은밀히 활동하는 사제들은 기밀을 다루기에 모두 입이 무겁고 절대적으로 상관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명을 어기고 이 여인의 부탁을 들어줬다니.

하지만 여인의 얼굴을 내려다볼수록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다른 이들도 눈감아 줬다는데 자신이라고 미움받을 이유 있나. 심장이 매섭게 요동쳐 사제는 일단 그릇을 내려놨다.

퍽―

그러나 사제가 허리를 숙였다 펴기 무섭게 둔탁한 소리가 났다. 외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사제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눈을 깜빡이며 최대한 예쁜 표정을 보이던 레이첼이 갑자기 나타난 얼굴에 눈을 크게 떴다.

“각하?”

“……여기서도 그러고 있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그래도…….”

에단이 레이첼을 묶은 밧줄을 끊어 냈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물기가 서려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 * *

에단이 레이첼과 함께 탈출하고 있을 때 아제프는 붙잡혀 끌려가는 중이었다. 레이첼을 찾느라 너무 구석구석 헤집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흐음…… 파문당한 성기사가 내 처소에 침범이라…….”

“…….”

“그래, 그러고 보니 성이 리이트라 했지……. 아비와 똑같군. 무도하기 짝이 없어.”

그 말에 아제프가 고개를 들었다. 주름이 가득한 손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성기사 시절 멀리서 몇 번 본 교황이 자리하고 있었다.

교황 이그나시오. 속칭 신의 아들. 신전에서 가장 높은 이이자 세속의 사람은 감히 황제라 하더라도 판단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는 자. 의례 행사 때와 달리 편안한 복장을 한 그는 성스러운 교황이라기보다 나이 많고 부유한 귀족 노인 같았다.

“이리 보니 아그네스와도 닮았구나, 아이야.”

아제프의 얼굴은 이미 여러 군데 터져 있었다. 저항하다 생긴 상처가 제법 깊었지만 교황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 발로 제 앞에 꿇어앉아 있는 아제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가 아그네스를 입에 담자 아제프는 피를 흘리면서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어머니에 대해…….”

“네 어미는 참으로 아름다웠지. 외관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품고 있었던 자질이 말이다.”

“말하지…… 마.”

“난 아직도 안타깝게 생각한단다. 너같이 타락한 씨앗으로 인해 아그네스가 불구덩이에 떨어지게 된 걸.”

아제프는 지금껏 살아오며 눈앞에 있는 교황을 누구보다 존경했다. 그러나 존경은 진실 앞에 눈 녹듯 사라졌으며 남은 것이라곤 십수 년 거짓에 농락당한 삶뿐이었다. 어미의 원수이자 제 삶을 통째로 망친 자. 감정 표현이 드문 아제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도 참지 않았다.

“……닥쳐.”

“나를 그리 보면 안 되지, 아이야. 네 어미는 너와 네 아비 때문에 죽은 거란다. 타락한 씨앗 같으니라고. 이번 생의 끝에 불구덩이에 떨어질 너를 위해 내 친히 기도해 주마.”

아제프의 눈이 독기로 번들거렸다. 이그나시오는 아까운 제물 아그네스의 눈을 기억했다. 도망쳤다 잡혀 올 때 꼭 저랬지, 그 계집도. 거의 마지막 순간, 신앙을 버리고 사내와 도망친 제물. 내 염원을 단번에 부숴 버린 더러운 것. 아그네스의 도망으로 자신의 대 기적의 성녀는 십수 년 이상 미뤄졌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자 교황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참으로 교만하고 또 주제넘구나.”

그가 아제프의 머리를 세게 밟았다. 부드러운 가죽신이었지만 꾹 내리누르는 힘이 늙은 노인치고는 강했다. 딱딱한 바닥에 찢어진 상처가 비벼지자 아제프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으윽.”

교황은 화풀이하듯 지그시 아제프를 밟다 그가 혼절한 후에야 발을 뗐다. 교황이 피 묻은 신발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눈치 빠른 사제가 다가와 신을 벗기고 새로운 신을 대령했다.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명했다.

“리이트 후작에게 전하라. 타락한 그대의 더러운 결과물이 여기 있으니 데려가려면 전만큼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이야.”

물론 후작가를 다 팔아도 성의를 보이긴 어렵겠지만. 이그나시오는 이번에야말로 변절자 카일 리이트를 끝장내겠다 다짐했다. 본래 진작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었다. 황제와, 죽은 아샬린 황후의 비호가 없었다면 눈앞 이 더러운 씨앗도 진작 저 아래 불구덩이에 떨어졌겠지.

교황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눈치챈 사제들이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그를 따랐다. 그러나 교황이 다시 침실로 가기 전 사제 하나가 뛰어오더니 주교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성하…….”

주교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그가 눈치를 보며 곁을 맴돌자 이그나시오가 짜증스레 손짓했다.

“무슨 일이냐?”

“성녀 후보에게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방금 전…….”

주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황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집어 던졌다. 날아간 지팡이에 사제 하나가 맞아 머리를 부여잡으며 꼬꾸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쓰러진 사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교황이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앞을 쏘아봤다.

“……쥐새끼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군.”

* * *

“이런…….”

아이작은 난간 옆 기둥에 숨어 아래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잔뜩 몰려든 신전 기사들과 사제. 그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좀 조심하지. 하아…… 이 일을 어찌한담.”

1층 복도 끝 찾고 있던 여인의 백금발과 함께 친우의 검은 머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길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방향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곧 붙잡힐 것이 자명했다.

“아제프 경을 빨리 찾아야겠군. 셋이서도 힘들겠지만 시간을 벌면 그사이 와 주시겠지.”

아이작은 에단이나 아제프처럼 검술에 능하지 못했다. 그는 저 혼자 에단을 도와주러 가 봤자 소용없음을 직감하고 아제프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막 다시 움직이려던 차 다른 쪽 복도에서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였다.

“제길…….”

질질 끌려가는 아제프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아이작은 일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나가야겠어.”

지금에라도 소리를 질러 사제들과 기사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지만 그리한다 해서 레이첼과 에단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돌리지는 못할 것이다. 신전 인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레이첼일 테니. 아이작은 도망친다는 죄책감을 꾹 누른 채 난간 너머 창밖을 봤다. 신전 밖의 숲은 컴컴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목을 더듬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숲에서라도 마주치면 좋을 텐데.”

간절한 눈으로 숲을 보던 아이작이 이내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창밖 숲속에는 희미하지만 횃불 여러 개가 불타며 빛을 발했다.

* * *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가까이 오면…….”

“오면 어찌하실 참입니까.”

레이첼은 에단의 앞을 막아섰다. 싸움에 무지한 그녀가 봐도 에단은 위중했다. 아까 베인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러 이미 상의의 3분의 1을 적신 참이었고 구부러진 허리에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로웠다. 게다가 동료 여럿이 죽어 남은 기사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지금 나서면 에단은 분명 갈기갈기 찢기리라.

“비…… 비켜……. 뒤에 서 있…… 으윽.”

“서 있긴 뭘 서 있어요, 옆구리에 구멍이 났는데. 잠자코 일어나 도망칠 생각이나 하세요!”

레이첼은 나서려는 에단을 제 뒤로 밀어 넣었다. 그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레이첼의 힘에도 밀릴 만큼 지쳐 있었다.

“도망이라뇨. 그런 말씀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지 말라 했어요. 오지 말라고! 오기만 해 봐, 콱!”

덜덜 떨렸지만 이 이상 방법이 없었다. 레이첼은 에단이 들키기 전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으라고 준 단검을 빼 들어 앞으로 겨눴다.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는 검은 작지만 무거워 계속 아래로 기울어졌다.

“그건 또 어떻게 구하셨는지……. 돌아가시면 교육을 좀 더 받으셔야겠습니다.”

교육이라는 말에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저기서 말한 교육이란 정신도 못 차리게 하는 약을 먹이거나 그도 아니면 검으로 찌르는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미친 새끼라며 욕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레이첼은 입술을 물고 잠깐 고민하다 사제에게 제안했다.

“……다시 돌아갈게요.”

“안……흐윽! 안 돼……. 비켜 봐. 내가…… 내가…….”

“시끄러우니 입 닫고 있어 봐요.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녀가 돌아가겠다 하자 에단이 안 된다 뒤에서 웅얼거렸다. 그러나 옆구리를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는 이미 한가득이었다. 레이첼은 핏기가 사라진 에단의 얼굴을 힐끔 보고 소리를 높였다.

“돌아간다고! 대신 이 사람 보내 주고 치료도 해 줘요. 그것만 보면 다시 그 방으로 갈게요. 얌전히 있을 거예요. 약속해요.”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성스러운 곳에서 감히 성녀가 되실 분을 납치하려던 무도한 자입니다. 성소의 규율에 따라 이 자리에서 당장…….”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 그래요? 이 인간 마일런 후작이야! 이대로 죽으면 공작 각하나 황제 폐하께서 가만 계실 것 같아요?”

레이첼의 말대로 에단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황제나 공작이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는 젊었지만 명문 마일런가의 주인이었으며 리온에서도 제법 신망받는 귀족이었으니. 하지만 늙은 사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에단은 후작이 아닌 대역죄인이었다.

“그래 봤자 세속의 이입니다. 여신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한 법이지요. 상과 벌에 차등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웃기고 있네, 차등이 없기는 무슨!”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셔야 한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요. 그만하시고 이리 오십시오. 반항하셔 봤자 소용없습니다.”

“싫어! 이 사람 보내 줄 거야, 말 거야. 그것만 이야기해. 아니면 나도 안 가. 안 간다고!”

레이첼이 사제를 향해 단검을 더 쭉 뻗었다. 그 모습이 꼭 작은 동물이 새끼를 맹수에게서 구하려는 것 같아 늙은 사제는 코웃음 쳤다. 후작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얌전히 끌고 가야 할 대상은 하나, 저 버릇없는 성녀 후보뿐이었다.

“말로는 안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여봐라, 레이첼 님을 모셔라. 침입자는 목을 베고.”

“오, 오지 마!”

늙은 사제의 말에 성기사 몇과 사제들이 움직이자 레이첼이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예기에 다가오던 이들이 주춤했다. 그러나 곧 단검을 휘두르는 이가 매우 서툶을 눈치챈 그들이 천천히, 느리게나마 그녀에게 접근했다.

“이 이상 오, 오면 찌를 거야. 너네 나보고 성녀라며! 성녀가 또 죽어도 좋아?”

“하, 하지, 윽. 하……지 마.”

단검으로 이들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레이첼은 제 목에 단검을 가져갔다. 놀란 에단이 하지 마라 애원했지만 그녀는 에단마저 쳐 내고 검을 더 가까이 댔다. 단검이 순식간에 그녀의 목을 관통할 위치에 닿자 무표정했던 사제의 얼굴이 미약하게나마 바뀌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레이첼 님.”

“보내 줘. 빨리! 이 사람 정말 죽을 거 같단 말이야.”

“후작을 보내 주면 얌전히 그 검 내려놓으실 겁니까?”

“치료도 해 줘. 내 앞에서. 당장.”

대치가 끝없이 이어지자 사제가 한숨 쉬며 먼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가 손짓하자 기사와 사제들도 이어 물러섰다.

“……좋습니다. 명을 따르지요. 그럼 우선 어떡할까요?”

“먼, 먼저 약을 들고 한 명만 이리 와. 와서…….”

레이첼이 에단을 보며 요구 사항을 말할 때였다. 레이첼의 말을 들어줄 듯싶었던 사제가 그녀에게 달려들더니 그녀의 손목을 꺾어 검을 쳐 냈다. 급작스럽고 행동에 레이첼이 들고 있던 단검으로 제 목과 팔 일부를 얇게 그었다.

“아악!”

“성녀께서는 본인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잊으신 모양입니다.”

“레, 레이첼! 이 개새끼가!!!”

분노한 에단이 몸을 튕겨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가만있을 사제와 성기사들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그가 쿠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여신의 은총을 받은 당신께 웬만한 상처는 해가 되지 못하지요.”

늙은 사제의 말대로 레이첼의 상처는 이미 말끔해진 후였다. 그가 웃으며 사제 둘에게 레이첼을 붙잡으라 명했다. 그녀가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반항하려 했으나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곧 레이첼은 양팔을 붙들린 채, 제압당해 헐떡이는 에단을 봐야 했다.

“후작은 죽이고 레이첼 님은 모신다. 납치범 때문에 심신이 허약해지셨을 테니 약을 준비하게.”

사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 하나가 에단의 등을 지그시 밟고 검을 들어 올렸다. 동료 여럿이 에단에게 죽는 걸 본 그의 눈은 이미 광기에 차 있었다. 눌린 등 때문에 옆구리에서 피가 더 흘렀다. 에단이 쿨럭 피를 토해 냈다.

“떨어져! 에단한테서 떨어지란 말이야!”

레이첼이 발악하며 소리쳤다. 시야가 흐려지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미운 사람이지만…… 다시 보지 말자 했지만 이렇게 죽는 걸 볼 수는 없었다.

호흡이 가팔라졌다. 기사의 검은 이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끊어질 듯 폐부가 아림과 동시에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검이 그대로 에단의 목을 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순간 레이첼은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는다면 자신은 미쳐 버리리라.

“그만.”

레이첼이 덜덜 떨며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장내에 누군가 침입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곧 레이첼과 에단을 제외한 모두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성하…….”

교황 이그나시오였다. 그새 옷차림을 갖춘 그는 교황이라는 직위에 걸맞게 높은 관을 쓰고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가 사제를 지나쳐 레이첼의 앞에 섰다. 열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들이 각각의 화려함을 뽐냈다.

“이번에 성녀님이 되실 분인가. 아직 많이 부족하군.”

“…….”

“성녀는 순종이 가장 큰 덕목이오. 여신께 축복받은 이상 그것을 신전을 위해 쓰고 헌신할 필요가 있지.”

엄한 목소리였지만 일면에 자비로움도 있었다. 레이첼은 눈앞의 노인이 에단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붙들린 채 허겁지겁 고개 숙여 빌었다.

“잘,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그를 살려 주세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 제발…….”

“다행히 깨달은 바가 있으신 모양이오.”

바짝 엎드린 그녀의 행동에 노인이 만족스러운 듯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하지만 그뿐. 이그나시오는 이어지는 말로 레이첼의 기대를 산산이 부쉈다.

“……하나 벌을 늦출 수는 없지.”

레이첼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교황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레이첼은 순간 똑똑히 봤다. 늙은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서린 잔인함을. 그가 저를 올려다보는 레이첼과 눈을 마주하고는 웃었다. 불길함이 현실로 닥쳤다.

“성녀가 되기도 전 그대 때문에 한 젊은이가 죽는 것이오. 말을 듣지 않으면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을 명심하시오.”

그건 에단의 목을 베라는 소리였다. 레이첼이 다시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안 돼! 그를 죽이지 마!

주교가 기사에게 눈짓했다. 검이 둥근 반원을 그리고 올라갔다. 아……. 레이첼이 곧 떨어질 검을 보며 멍청한 낯을 했다.

‘사랑해, 레이첼. 나한테는 너뿐이야.’

좋았던 순간만 생각났다. 서로 마주 보며 웃던 얼굴만 떠올랐다. 그가 죽으면 난 어떡하지? 이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마지막으로 에단을 눈에 담은 레이첼이 눈을 감았다. 보지 말자. 보지 말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도 그와 함께하자.

그리 마음먹으니 차라리 편했다. 이 사이에 혀를 살짝 밀어 넣은 채 레이첼이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준비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에단을 겨눈 검이 화살에 맞아 챙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기사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손목에 두 번째 화살이 박힌 후였다.

“누, 누구냐!”

“뭐야? 네놈들은!”

“성하! 피하셔야 합니다, 성하!”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곧 챙챙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사제들의 비명과 주교의 고함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레이첼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새 혀를 조금 깨물어 아린 고통이 찌르르 느껴졌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레이첼.”

에단이 바로 옆에 있었다. 의식을 잃은 그를 아이작이 거의 업다시피 했다. 곧 또 다른 사내가 그녀를 부축했다. 옆을 보니 인상을 잔뜩 찌푸린 카샨이 못마땅한 듯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은 늦을 걸 그랬군.”

* * *

“지금쯤이면 도착했겠군요.”

“……늦지는 않았을 테지.”

리이트 후작은 황제를 올려다봤다. 누구보다 높은 자리의 고고한 황제는 황좌에 편히 기대앉아 느른한 한숨을 쉬고 있었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잠시 황제의 표정을 살핀 후작이 그에게 물었다.

“폐하,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작, 그대는? 그대는 내 결정을 원망하지 않나? 아그네스의 복수를 내가 망친 참인데.”

돌아온 것은 질문이었다. 후작은 조금 뜸을 들이다 답했다.

“……아그네스도 망쳤는데 아들마저 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저 때문에 힘들었던 아이였는데.”

“…….”

“모든 것을 듣자마자 뛰어나가더군요. 구해야 할 이가 있다고요. 그렇게 둘 수 없다 했습니다.”

“…….”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나가 버렸거든요.”

“그 정도면 약과야. 내 아들은 말일세…….”

팔걸이를 툭툭 치며 후작의 말을 경청하던 황제가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후작이 황제의 말을 경청했다.

“제 목에 검을 들이대더군. 실제로 조금 베였네. 피를 봤지. 덜떨어진 녀석…….”

“…….”

“목에 칼을 가져다 대는데 이상하게 아주 어린애 같았어. 떼쓰는 것처럼 보였지.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내게 한 번도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

“물론 제 어미한테는 종종 그랬겠지. 아니라고 고함쳤지만 그 애 내가 알기로는 일곱 살 무렵에도 어미와 종종 함께 잤거든. 감히 날 몰아내고는……. 그때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아샬린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한 대 후려칠 뻔했어.”

“…….”

“너무 버릇이 없어 화가 났지만 나도 아비인지라 그 이상 어쩔 도리가 없더군. 두들겨 팬 것도 미안하고 결국 들어주겠다 했지. 어쩌겠나, 하나뿐인 핏줄인 것을…….”

황제의 금안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후련함도 보였다. 창밖 이제 뜨기 시작한 해를 보며 황제가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카샨 그 아이가 사랑이라도 차지했으면 좋겠는데…….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아들이나 카샨이 좋아하는 그 아가씨한테는 경쟁자가 너무 많아. 하나같이 잘난 사내들이라 황태자라 하더라도 승산이 클지는 원…….”

“그래도 제 아들만 하겠습니까. 아제프 그 애는 평생 여자 손이라고는 잡아 보지도 못한 머저리인데.”

“아니야, 그대 아들이 유리할지도 몰라. 알다시피 카샨 그 아이는 성질머리가 더럽잖나. 나나 제 어미 모두 그렇지 않았는데 그 아이는 혼자라 그런지……. 아샬린과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

“뭐…… 그 아가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전하나 제 아들이나 어쩔 수 없지요. 물론 차이면 죽을 만큼 힘들기야 하겠지만 누굴 탓하겠습니까. 그 아가씨가 자길 좋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협박한 것도 아니고 모두 자신의 선택인 것을요.”

“하하, 맞아. 정확하군, 후작. 그래, 모두 제 선택이지.”

황제는 웃으며 죽은 아내를 생각했다. 다행히 아샬린은 자신을 선택했다. 만약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많이 힘들었겠지. 아마 죽겠다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리이트 후작의 눈도 황제와 비슷하게 아득하니 조금 흐려졌다. 황제는 괜히 말을 걸어 그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남은 이들에게 기억은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말없이 죽은 반려를 그렸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지만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뜰 무렵에야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잔뜩 젖어 있는 목소리에는 후회와 슬픔이 한가득이었다.

“저도 그렇지만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

“……보답받지 못해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에 감사한 것을요.”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로 그랬다. 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텐데…….

* * *

“제시간에 와 주셨군요. 늦으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그 알량한 종이 쪼가리가 나를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착각이 지나치군.”

카샨은 아이작의 말에 차갑게 일갈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작게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신전에서 비명횡사할 뻔했는데…….”

“흥! 백작 그대는 두 사람에 비해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게다가 신전 안에 있던 것도 아니잖아?”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하지요. 전하를 만날 때 제 발은 울타리 안쪽이었습니다. 건물 안은 아니지만 신전 내는 맞지요.”

카샨이 아이작을 노려봤다. 온통 칼자국에 여기저기 피 흘리는 에단이나 아제프와 다르게 아이작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옷이 좀 구겨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것이 다였으니.

“이런,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전 에단이나 아제프 경처럼 무모하지 않습니다. 항상 생각부터 하고 움직이지요. 그러니 다칠 일도 적을 뿐입니다.”

“어련히도 그러겠군.”

카샨이 코웃음을 뱉었다. 아이작이 두 사람에 비해 차분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만큼 이성적인 판단을 했으니까. 하지만 멀쩡한 그의 모습은 이 자리에서만큼은 빛을 바랬다.

무모했다 한들 카샨은 이 자리에서 빛나는 이는 다친 에단이나 아제프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쳤으나 저나 아이작 대신 다른 것을 얻을 기회를 가지게 될 터였다.

‘……과연 나는 군대 없이 여기에 홀로 올 자신이 있었을까? 혼자인 내가 저들처럼 목숨 바쳐 누군가를 구할 판단을 했을까?’

카샨은 바로 답을 내리고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가 한참 그답지 않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아이작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보다 이들을 전부 어찌할 셈이십니까?”

시선을 돌리자 꽁꽁 묶인 채 입에 재갈까지 문 고위 사제 몇이 눈에 들어왔다. 카샨의 얼굴이 대번에 차가운 빛을 띠었다. 그가 신음 흘리며 무릎 꿇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카샨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어느 노인 앞이었다. 노인은 쓰고 있던 관을 잃어 휑한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추레한 노인이 교황이라 누가 생각할까? 노인의 열 손가락 위 반지는 여전히 빛났다. 하지만 노인의 뒤에 비쳤던 후광은 이미 사그라든 후였다.

노인이 핏발 선 눈을 한 채 무어라 소리를 내지르려 했다. 카샨이 우습다는 듯 조소를 흘리며 발을 올렸다. 그리고 노인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았다.

“으……읍!”

“이 버러지를 비롯해 몇몇만 데려가면 그만이지.”

카샨은 교황을 산 채로 아비에게 데려갈 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제 복수심보다는 반려를 잃은 아비의 복수심이 강할 터였다. 분명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 아비가 보인 광기를 떠올린 카샨이 아주 잠깐이나마 그를 동정했다.

“조심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알다시피 성소에 군대를 들인 것부터 말이 나올 테니까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신앙심이 강한 이들은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

“물론 바이허는 황가를 도울 것이지만요.”

아직 진실을 모르는 아이작은 이성적으로 카샨에게 충고했다. 카샨은 머지않은 미래 알게 될 진실에도 아이작이 저리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몸을 돌렸다. 뒤에서 노인이 계속 소리를 냈지만 이제 저놈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그대 가문의 도움은 필요 없어. 리온의 움직임에 변명은 없다. 리온이 곧 이 나라의 정의야.”

오만한 말이었으나 황가의 일원에게서 나온 말이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이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참 씁쓸한 일입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잠시간의 침묵 뒤 아이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샨은 아이작의 씁쓸한 옆모습을 잠깐 보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백금발의 여인이 검은 머리의 사내에게 꼭 붙어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사내에게 집중한 채였다. 사내의 손을 쥔 채 뺨을 부비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니 심장 한편이 떨어져 나갈 듯 아려 왔다.

“……공주님을 구한 공은 한 사람이 모조리 가로챘으니 말입니다.”

* * *

“곁…… 곁에 있어 줘, 응?”

한차례 고비를 넘긴 후 몇 시간 만에 깨어난 에단은 제 곁에 레이첼이 있음을 확인한 후 거의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당연히 레이첼은 벌컥 화를 내며 고함쳤다. 그러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도 펑펑 쏟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닥쳐! 망할 자식아! 개새끼! 버러지 같은 놈! 왜 그런 거야, 왜! 죽으면 어떡하려고! 이 미친놈! 평소에는 도망만 잘 가더니…….”

“……싫다며.”

“뭐라는 거야…… 흐윽.”

“신전에 머무는 거 싫다 했잖아. 넌 춤추고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못 입어 본 드레스도 많다며. 저번에 그거 다 입어…… 으윽.”

“말하지 마! 듣기 싫으니까 입 닫으라고!”

“……여기 있으면 그거 다 못 해 보잖아. 그리고 그 시퍼런 거 그거 끔찍하게 맛없다며.”

“미친놈…….”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오는가. 레이첼은 에단을 흘겨봤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꾸 나오는 눈물 때문에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여야 했다.

반면에 에단은 옆구리가 끊어질 듯 아픈 와중에도 입꼬리를 내릴 수 없었다. 레이첼은 욕하면서도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어디로 사라질까 봐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야 옆구리 정도는 한 번 더 뚫려도 괜찮다 생각될 정도였다.

한참 동안 훌쩍이는 소리만 났다. 에단은 하염없이 우는 레이첼을 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넘겨 줬다.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 여자에게 차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레이첼.”

그가 제 이름을 부르자 레이첼이 부은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그가 혼절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젖은 소매는 아직도 축축했다. 에단이 머리를 넘겨 주던 손으로 레이첼의 눈물을 닦으며 고백했다.

“……사실 조금 전에 말한 거 다 거짓말이야.”

“뭐?”

“사실은 네가 성녀가 되면…….”

“…….”

“네 곁에 설 수 없으니깐, 그래서 그랬어.”

솔직히 말하고 나니 편안했다. 레이첼이 강요하지 말라 한 순간부터 그는 감히 제 마음을 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레이첼은 여린 이이니 이런 때 이런 말을 한다고 그를 구박하지는 않을 터였다. 영악한 셈법이었다.

“진작 너한테 청혼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멍청해서 기회를 놓쳐 버렸어. 후작 따위 버리고서라도 너한테 갔어야 했는데. 그따위 공작이 뭐라고…….”

“…….”

“강요……하는 거 싫다 했는데, 미안. 이런 말도 불편할 텐데. 미안해. 레이첼…… 그런데…….”

약 기운이 도는 모양인지 정신이 조금 아득했다. 에단이 읊조리듯 말을 흐리다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런 그를 본 레이첼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입술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에단은 그런 레이첼을 눈치채지 못한 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말을 마저 끝냈다. 꼭 당장 죽는 사람처럼.

‘……이렇게 구질구질하게라도 너한테 잊히고 싶지 않아.’

짝―

“이 머저리가!”

에단이 눈을 완전히 감기 직전이었다. 작은 손이 날아오더니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번쩍 든 정신에 그가 눈을 크게 떴으나 레이첼은 멈추지 않았다.

짝―

“눈을 왜 감아! 네 할 말만 하면 다야? 눈 뜨고 제대로 들어!”

짝―

“시답잖은 소리는 말고!”

때린 건 레이첼이었건만 우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레이첼이 양손으로 에단의 얼굴을 쥔 채 흔들었다.

“나 그때도 네가 후작이어서 좋았거든! 그따위 성격에 작위도 없었어 봐. 내가 널 쳐다나 봤을 거 같아?”

“으윽…….”

“나 후작 부인 소리 듣고 싶단 말이야. 그래서 나 무시한 것들 다 고개 숙이게 할 거야. 그리고 네가 가진 돈도 다 쓰고 싶어. 모조리! 한 푼도 남김없이!”

“레, 레이첼…… 그만…….”

“드레스? 그 정도로 내가 만족할 거 같아? 목걸이고 팔찌고 다 살 거야. 집도 살 거고 휴양지마다 별장도 가질 거야. 마일런이란 이름으로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질 거야.”

한참 만에 고정된 머리를 제대로 가누기도 전이었다. 후드득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비롯한 얼굴 전체에 닿았다. 에단이 위를 봤다. 레이첼이 그의 멱살을 잡은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개새끼. 내가 결국 이런 말까지 하게 하고……. 그래도…… 그래도…….”

감미로운 욕을 듣는 것까지는 좋았다. 뭐가 어찌 되었건 자신을 위한 말 아닌가. 하나 이어지는 레이첼의 말에 에단은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야 해, 에단. 죽, 죽으면 안 돼. 알았어? 여기서 죽으면 네 장례식 전에 다른 남자랑 결혼할 거야. 그 사람이랑 팔짱 낀 채 네 장례식에 참석할 거라고. 그리고 네가 땅에 묻히는 순간 그 사람하고 입 맞출 거야. 너 따위 잊고!”

장례식? 뭐 그것까지야 참을 수 있었다. 자신의 장례식에 온다는 것은 그녀는 살았다는 거니깐. 하지만 남자? 입맞춤?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에단은 벌떡 일어나 자신은 죽지 않으니 그딴 소리 말아라 소리치려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다시 누웠다. 겨우 멈춘 피가 다시 솟자 레이첼이 비명을 지르며 의원을 불렀다.

“여, 여기!!! 빨리요! 빨리!”

후다닥 의원이 달려왔다. 에단은 자리를 비키려는 레이첼을 붙잡은 채 웅얼웅얼 힘겹게 읊조렸다.

“으…… 그건…… 절대…… 으…… 안 돼.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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