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뱃놀이
아주 따사로운 날이었다. 햇빛은 온 사방을 비췄고 녹음은 그 자비로움을 받아 싱그럽게 빛났다.
짙은 금발을 편히 올린 여인은 볕이 조금 가려지는 창가 카우치에 앉아 유리 너머 수목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입고 있는 진줏빛 광택 나는 드레스에도 햇살의 따사로움이 군데군데 비쳤다.
“황후 폐하.”
시녀가 한참 정원을 구경하던 여인의 상념을 깨웠다. 부드럽게 고개를 돌린 여인이 시녀에게 무슨 일이냐 물으려다 그 뒤에 자리한 이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헤리엇! 왔구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딱딱하게 폐하는 무슨……. 어서 앉아. 너희는 차를 내어 주고 물러나렴.”
부산을 떠는 여인은 리온의 황후 아샬린이였다. 모나타 공작은 처녀 시절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네가 공작이 된 이후 처음이지?”
“예.”
“부모님께서는 어떠시니? 아버지께서 조금 섭섭해하시는 거 같던데. 젊은 나이에 뒷방으로 물러났다고.”
“아시잖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폐하께서 황후로 즉위하시면 물러나기로 약속이 돼 있던 문제니까요.”
쌍둥이라고 하나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외관도 그러했지만 그녀들은 성격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솔직한 아샬린과 달리 헤리엇은 큰 가문의 가주답게 냉철하고 의뭉스럽다는 평을 받았다.
“아버지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사실 네가 가문을 더 잘 이끌 거라 생각해.”
“……황후 폐하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샬린으로서는 정말 그리 생각해 말한 것이었지만 말을 들은 헤리엇의 표정은 조금 굳었다. 사실 여인인 그가 별 탈 없이 살아 있는 아버지를 제치고 공작이 된 데에는 눈앞 쌍둥이 동생의 역할이 컸다.
물론 표면상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선황은 캐틀렛 공작이 병으로 일찍 죽고 젊은 캐틀렛 공작이 선 이후 모나타와 캐틀렛 두 가문 간의 힘 차이를 걱정했다. 경험이나 세력으로 보면 안정된 모나타가 캐틀렛을 앞서는 데다 황태자비 자리까지 모나타의 여식이 차지하게 생겼으니 이유 없는 걱정은 아니었다.
‘황태자, 그 자리는 사랑 타령을 하는 자리가 아니다. 멀리 내다봐야지. 여인 하나에 그리 꼼짝을 못 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야. 비를 캐틀렛의 앤으로 바꾸거라. 나이가 아직 어리지만 몇 년만 지나면 봐 줄 만한 여인으로 자랄 거다.’
선황은 당시 황태자였던 카시우스에게 아샬린 대신 캐틀렛 공작의 동생 앤을 비로 맞이하라 명했다.
‘싫습니다. 아샬린과 함께하지 못할 바에야 황태자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뭐야? 이 미친놈이!’
‘제 곁에 아샬린이 없으면 나라가 망할 겁니다. 그녀를 빼앗아 간 아버지께 반항하는 의미로 이 나라를 말아먹을 테니까요. 아주 제대로요. 아들이 폭군으로 기억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아샬린한테 손끝 하나 댈 생각 마십시오!’
카시우스는 아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몇 년간 부자 다툼이 일었고 천륜을 끊기 직전 모나타 공작이 여식이 황후가 되는 순간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읍소하며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렇다고 모나타가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모나타 공작 그만 본다면 죽기도 전에 자식에게 작위를 빼앗긴 셈이었지만 황제에게 지고한 사랑을 받는 황후는 가문에 공작만큼, 아니 더 크게 도움이 됐다. 황후라면 죽지 못해 사는 황제 때문에 아샬린의 말 한마디는 가히 나라를 움직일 만했으니.
“헤리엇. 계속 그러면 섭섭해. 계속 말을 높이는 것도 그렇고……. 우리는 한날한시에 태어났는데 너무 거리 두는 거 아냐?”
“이제는 황후 폐하십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매정하기는…….”
“그보다 왜 부르셨습니까?”
헤리엇은 눈을 흘기는 아샬린을 못 본 척 주제를 돌렸다. 입술을 뺀 채 툴툴거리던 아샬린의 얼굴이 조금 변했다. 손가락을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그녀가 자매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
“말씀하십시오.”
“그…… 캐틀렛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을까?”
“…….”
“별 이유 없이 으르렁거리는 거 인제 그만둬도 괜찮잖아. 저번 달에도 쓸데없는 싸움으로 젊은 아이들 몇몇이 죽었다 들었어. 쓸데없는 결투를 벌였다고…….”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하다 사고를 낸 이들입니다. 죽은 이들은 남을 탓할 수 없으며 살아남은 이들도 모두 사형을 선고받거나 추방되었습니다. 공정한 결과였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다정한 갈색 눈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결투. 그걸 금지한 이는 아샬린 그녀였다. 하지만 결투를 금지해도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약관도 못 넘긴 아이들이 죽어 갔다. 캐틀렛과 모나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희생양들. 모두가 말하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나이라 그렇다지만 아샬린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그들의 죽음은 죽자 살자 반목하는 양 가문에 있었다.
“그게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들을 부추긴 게 누군데. 주변 어른들이 아이들을 그런 길로 내모니깐 계속 일이 벌어지는 거야.”
“…….”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야. 헤리엇, 너도 내 생각에 동의했잖아. 쓸데없는 싸움은 국력을 낭비할 뿐이라고.”
헤리엇은 정의감 넘치는 자매를 바라봤다. 어릴 적과 같이 책 속에 사는 듯 자매는 여전했다. 어찌 보면 이리 올곧게 자란 것도 대단했다. 캐틀렛과 대척점에 있는 모나타의 여식으로서 황궁에 들어왔음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좋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말은 참으로 현실에서 벗어나는군요.”
하지만 듣기 좋은 말과 현실은 달랐다. 헤리엇은 겨우 잡은 우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매가 사랑받는 황후요 모나타의 세가 우세한 지금에야말로 캐틀렛을 꺾을 좋은 기회였다. 젊은이들의 죽음……. 분명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또한 다른 이들의 감정을 상기하니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몇몇 희생으로 단결이 된다면 좋은 일이었다.
헤리엇은 적어도 모나타에게 우위를 점한 공작으로 역사에 남고 싶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자신을 떠받들길 원했다. 그녀는 생각하는 바를 또렷이 자매에게 전했다.
“황후 폐하. 차라리 지금의 모나타가 캐틀렛에 뒤처진다면 폐하의 말을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희가 우위에 있질 않습니까. 이번에 그들을 꺾는다면 후대에 승기를 잡는 건 모나타일 겁니다.”
“그러니깐 하는 말이야. 우리가 우위에 있으니깐 먼저 화해를 청하면 희생이 적어. 그들도 마지못해서라도 화해를 받아들일 테니.”
“…….”
“캐틀렛 공작과 다르게 그 부인은 나와 생각이 비슷하더라. 그러니 헤리엇, 네가 마음을 먹으면 모두 멈출 수 있어. 더는 쓸데없는 피를 쏟지 않게…….”
“피. 그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먼저 피를 낸 건 저들입니다. 할아버지께서 공작일 때 저들이 어찌했습니까. 세력이 크다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겨우 바꾼 것이 아버지와 황후 폐하십니다. 그런데 화해를 청하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의견 차는 도통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헤리엇은 슬픈 낯으로 저를 보는 황후를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자신이 옳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헤리엇! 다시 생각해 보면…….”
“황후 폐하. 아니, 아샬린.”
“…….”
“기억해. 넌 모나타의 딸이자 내 자매라는 걸.”
거북한 속을 감추기 위해 헤리엇은 무장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고로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건 자매였다.
“모나타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 그러니 황제 폐하와 사랑 놀이만 말고 네 위치에서 어떻게 가문을 더 부흥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 아니면 나중에 조카의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조카인 카샨까지 언급했건만 황후의 표정은 여전했다. 저 맹추. 가문의 힘이 약해지고 황제의 사랑이 변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걸음을 옮기며 헤리엇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정 그것도 못 하겠으면 쓸데없는 말 말고 차라리 가만히 있든가.”
* * *
자매의 말은 제법 따끔했지만 그렇다고 아샬린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두 가문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양분된 리온의 귀족 세력 화합을 위해 열심이었다. 꾸준한 노력 때문일까 세월이 지나고 조금은, 그러나 꽤 의미 있는 변화들이 나타났다.
“싸움을 부추기시면 안 돼요.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하지만 아샬린, 네 가문과 캐틀렛의 싸움은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는걸. 카샨 생각도 해야지. 둘이 싸우면 그 아이가 굳건한 황제로 설 거야.”
“아직 어린애한테 그런 것부터 가르치시다니! 오늘 제 침실로 올 생각은 마세요.”
황제인 카시우스는 아샬린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유능하고 영리한 황제였다. 두 가문 간의 싸움을 잘 활용한 그는 젊은 나이에 선황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건 안 돼. 알잖나, 그대가 없으면 내 잠들지 못함을…….”
“흥!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오늘은 카샨이랑 잘 테니 폐하께서는 혼자 주무세요.”
아샬린은 그런 남편을 이해했지만 간혹 이렇게 섭섭한 티를 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도라도 추진할 수 있었으니깐. 아샬린이 몸을 돌린 채 토라진 얼굴을 하자 카시우스는 냉큼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다 컸잖나. 혼자 자야지. 게다가 내가 듣기로는 어른이다 소리치며 그대와 함께 자는 걸 거부한다던데.”
“아직 어린 녀석이……. 이게 다 폐하께서 카샨을 너무 엄하게 대해서예요. 아이는 채찍질만 해서는 안 돼요. 물론 나라도 그렇고요…….”
카시우스는 아내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황후가 저를 미혹해 나랏일에 간섭한다지만 아샬린은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그를 배려해 가며 제 뜻을 펼쳤다. 자신을 더 이용해도 좋을 텐데. 하지만 황후가 그럴 리 없음을 모를 황제가 아니었다. 아샬린의 이마에 소리 나게 입맞춤한 그가 아내를 지그시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폐하라는 존칭 말고 이름으로 불러 줘. 그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고 싶어.”
“부탁 들어주시면요. 그러면 불러 드리지요.”
“뭐든…… 그대가 원하면 뭐든 들어줄게.”
“……아실 거예요. 제 뜻을 따르는 이들도 생겼다는 걸. 그 사람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평화를 원해요.”
“마일런 후작과 바이허 백작……. 다 그대와 친밀한 이들의 남편이로군. 이래서 여인이 무서워. 그대도 그렇지만 다들 감쪽같이 사내를 변화시키잖나.”
“말 돌리지 마시고요.”
“알았어. 말해 봐.”
“그 사람들하고 몇 개의 법안을 만들려 해요. 결투를 막기만 해서는 끝이 나질 않으니깐…….”
“우리 황후님께서 정치에 앞장서시겠다? 이러다 내가 뒷방으로 밀려나는 것 아닌가.”
“농담으로도 그런 말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벌써 다들 수군거리는데…….”
“뭐야! 어떤 놈이!!! 당장 끌고 오라 할까?”
“쓸데없는 일로 고함치지 않기로 하셨죠?”
“쓸데없지 않아. 그대와 관련된 일이잖아.”
“폐하!”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폐하께 순종하지 않으면 집안 간수를 못 한다 폐하를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카시우스는 걱정스레 저를 보는 아샬린을 꼭 안아 줬다. 사랑스러운 사람.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모두가 저를 욕해도 좋았다. 아샬린 그녀만이 자신의 곁에서 지금처럼 자신을 걱정스레 봐 준다면 그 어떤 말도 그를 상처 입히지 못할 테니.
“……괜찮아. 아무리 그대가 밀어준다 한들 문제가 있으면 허하지 않을 테니깐. 그보다 계속 폐하라 부를 참이야? 이름…… 이름 불러 줘. 요새 더 인색해졌어.”
“카시우스 정말…… 다 커서도 어리광이에요?”
“좋다, 정말……. 그대 목소리로 들리는 내 이름 정말 좋아. 사랑한다고도 해 줘.”
아샬린은 카시우스의 품에서 그를 토닥이다 고개를 들었다. 사랑스러운 사람. 황금빛 눈동자에 맺힌 자신은 활짝 웃고 있었다.
“사랑해요, 카시우스. 난 당신밖에 없어요.”
“고마워. 나도…… 나도 그대를 사랑해, 아샬린. 아샬린, 내 사랑.”
곧이어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어찌나 열성적인지 두 사람은 살짝 열린 방문으로 그들의 아들 카샨이 인상을 팍 쓰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장밋빛 화려한 머리카락의 사내가 황궁 복도를 거닐었다. 여인이라면 한 번쯤 뒤돌아볼 사내다운 외관에 빳빳한 제복. 얼핏 보기에 사내는 근사해 보였지만 어딘가 기이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단정한 차림새와는 이질적으로 사내의 눈에는 초점도 심지어 사내가 내딛는 걸음조차 의미 없어 보였다. 바닥을 보는지 앞을 보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눈이 정처 없이 방황했다. 지나가는 이들이 모두 이상한 듯 그를 보다 숙덕거렸고 개중에 몇은 손가락질까지 했다.
“리이트 후작.”
사내에게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쉬이 인지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내 카일 리이트는 어느새 제가 황궁 안 어느 홀에 있음도, 황후가 제 앞에 있음조차 이름을 불리고서 알아챘다. 몇 번 눈을 끔뻑인 그가 상대를 알아본 후 딱딱하게 예를 차렸다.
“황후 폐하.”
“언제까지 이리 살 생각이오?”
“…….”
아샬린은 못마땅한 듯 카일을 봤다. 아그네스의 남편이자 그녀와 도망친 성기사. 세상에서 가장 칼같았던 사내는 반려가 세상을 뜬 이후 녹슬다 못해 부러진 칼이 되어 버렸다.
“요즘도 온종일 신전에 박혀 있소? 의미 없이?”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저는 제 죄를…….”
느릿느릿 말하는 본새에 아샬린이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아샬린이 일갈했다.
“감히 내 앞에서 추태요? 아제프는! 아그네스와 그대의 아들은 어쩔 셈이오. 돌보지 않을 참인가?”
황후의 일갈에 뒤에 있던 시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녀를 화나게 한 당사자는 고저 없는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고했다.
“……보냈습니다.”
“뭐요?”
“성소로…… 신의 곁으로 보냈습니다.”
“후작!!!”
경악한 아샬린이 카일에게 소리쳤다. 성소? 아그네스의 아들은 이제 여섯이었다. 열여섯도 견디기 힘든 성소에서의 삶을 어미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가 겪는다고?
“아제프는 이제 여섯이오! 그런데 뭐? 어디로 보내?”
“…….”
“심지어 그 아이는 하나뿐인 그대의 후계 아닌가! 그런데 성소로 밀어 넣다니! 미친 거요?”
“황후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아그네스. 그녀는 아샬린과 친분이 깊은 이였다. 그녀가 황태자비가 될 때 현 마일런 후작 부인 헤레이스와 현 바이허 백작 부인 디안나, 이 두 사람과 함께 화동이 되어 준 이가 아그네스였기 때문이다.
아샬린은 막내 여동생과 비슷한 또래인 소녀들을 제법 아껴 황태자비 시절 말 상대로 종종 불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헤레이스와 디안나는 결혼 전 잠깐이나마 아샬린의 시녀 자리에 있었다.
물론 아그네스 같은 경우에는 성년이 되기도 전 성녀 후보로서 성소로 가 버렸지만 아샬린은 종종 편지를 나누며 그녀를 가까운 지인으로 여겼다. 아그네스가 눈앞 카일 리이트와 사랑의 도주를 했을 때도 끝까지 그들의 편을 들어 줬을 만큼.
“아그네스는 내 동생과도 같은 아이였소! 그런 아이의 아들인데 내 어찌…….”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요. 아그네스 그녀는 이제…….”
“…….”
“없질 않습니까. 제 아내이자 폐하의 동생 같은 그이는 더는 세상에…….”
짝―
숨 들이켜는 소리가 시녀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의 주인인 황후는 하녀들에게조차 손찌검을 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명가인 리이트가의 주인을 때리다니. 황후를 아는 이들이라면 기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런 그대를 본다면 아그네스가 울겠군! 아니, 통곡하겠어!”
“……울지 않을 겁니다.”
“허?”
“원망하고 있을 겁니다. 고귀한 자신을 내가 망쳤다고!”
공허한 외침에 오히려 화가 가라앉았다. 아그네스를 잃은 후 사내는 완전히 망가진 듯 보였다. 아샬린이 숨을 고른 뒤 카일의 손을 잡으며 부탁 조로 말했다.
“후작…… 제발 이러지 마시오. 아그네스의 죽음은…….”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녀는 별안간 카일의 손을 놨다. 고심하듯 잠시 침묵한 아샬린이 뒤에 있는 여러 시녀들을 살피더니 카일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그대나 그대의 아들 탓이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내 그것만은 말해 줄 수 있소.”
하지만 카일에게 그녀의 말은 들리되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폐하. 그녀의 죽음은 오롯이 저와 제 아들 탓입니다. 제가 그녀를 망치고 죽였습니다.”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오. 아니, 짧은 시일 내에 후회하게 될 테지.”
“…….”
“그러니 후작…… 아그네스를 봐서라도 아제프를 다시 데려오시오. 어린아이에게 그 무슨 못 할 짓이오.”
아그네스를 언급했음에도 카일의 얼굴은 여전했다. 걱정스레 저를 보는 아샬린을 둔 채 그가 허리를 숙였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멀어져 가는 사내는 흡사 유령 같았다. 아샬린이 깊은 한숨을 쉬고는 바로 뒤 가장 가까운 시녀를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예, 폐하.”
“……일을 조금 서둘러야겠다. 아니면 곧 사람 하나가 더 죽겠어.”
* * *
“……황후가?”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용한 듯하나 뒤지고 다니는 것들이 하나같이 민감한 사항이라…….”
“어디까지 아시는 것 같나.”
“푸른 반점의 존재를 아셨답니다. 그리고 성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교황은 불쾌한 듯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몸을 움찔 떨며 바닥에 닿을 듯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여인의 몸으로 최고 자리에 앉으셨으면 꽃같이 아름답게 계실 것이지 정치 개입도 모자라 신의 영역까지 넘보신단 말인가. 허어…….”
“죄송합니다.”
“여우가 따로 없어. 모나타가에서 영악한 짐승 한 마리를 키웠군.”
“아그네스 후보와 제법 친밀했다 합니다. 아그네스 후보의 죄악을 감싸고돈 것도 황후셨으니……. 이대로 둔다면 신께 노여움을 살지 모릅니다.”
“그 더러운 계집은 끝내 여신의 이름에 오물을 뿌리고 가는구나. 간악한 것. 지금쯤 저 깊은 바닥에서 불타고 있겠지.”
“어떻게 조치할까요?”
“……황후는 선을 넘었다. 이대로 앉아 당할 수는 없지. 어떻게 지켜 온 신성인데.”
“그렇다면…….”
“신앙이 깊은 이들 중 황후에 대한 반감이 깊은 이들에게 명하라. 여신을 위하는 일이라 하면 그들은 스스로 타올라 신성한 임무를 마칠 것이다.”
* * *
뜨거운 불볕 날씨가 이어지자 카시우스는 아샬린에게 배 한 척을 선물했다. 하얀 목나무로만 만들어진 배는 우아한 선이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처음으로 선물 받은 배를 띄운 아샬린은 뱃놀이에 몇몇 객을 초대했다. 마일런 후작 부부와 바이허 백작 부부 그리고 캐틀렛 공작 부인이 시녀 몇몇과 함께 배에 올랐다.
“아이들은 잘 크고 있나? 후작도 그렇고 백작도 그렇고 둘 다 아들 하나지? 성별이 같으니 나중에 카샨과 어울려도 괜찮겠어.”
해는 뜨거웠지만 호수 위에 떠 있으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 견딜 만했다. 아샬린을 중심으로 차양 아래 앉은 이들은 가벼운 도수의 술과 음료를 즐기며 기분을 냈다.
아샬린은 오랜만에 보는 헤레이스와 디안나가 퍽 반가웠다. 두 여인도 옛 주인을 봐 기뻐했으나 그녀들의 남편들은 황후와 부인 모르게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각각 캐틀렛과 모나타 아래에서 으르렁대던 젊은이들이었으니. 아마 부인들이 친밀하지 않았다면 이렇듯 황후 아래 모이지도 않았을 사내들이었다.
“좀 더 커야 합니다. 아직 황태자 전하와 어울릴 아이들은 아니지요. 철도 없고 사고만 치는 아이들입니다.”
“내 아들에 대해 백작이 어찌 그리 잘 아나? 아이작은 그럴지 모르지만 에단은 그렇지 않네. 날 닮아 영리하고 얌전하거든.”
“아하…… 각하네 아드님이 얌전하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뭐야?”
“하기야 그런 말은 들리더랍니다. 마일런 영식이 각하의 어린 시절을 똑 닮았다 하더군요. 생긴 것이나 성품이나…….”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말다툼이 붙었다. 으르렁거리는 남편들을 보며 헤레이스와 디안나가 살벌하게 옆을 돌아봤다.
“황후 폐하 앞에서……. 이든, 그만해요!”
“오스카, 그만하세요.”
두 사내는 곧바로 얌전해졌다. 아샬린은 아끼던 시녀들의 말에 조용해지는 후작과 백작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렇게들 잘 어울리는 부부일까. 발랄하고 상냥한 헤레이스는 오만하지만 그녀에게만은 얌전한 마일런 후작 이든을 만났고, 차분하고 조용했던 디안나는 냉소적이지만 그녀에게만은 따뜻한 바이허 백작 오스카를 만났다.
“내 아끼는 이들을 잘못 보냈군. 헤레이스와 디안나는 결혼 전이나 후나 서로 이리 친밀한데 두 사람은 같이 행동한 지 몇 년인데 아직도 어린애들처럼 싸우는가. 하긴 카시…… 폐하께서도 아직 어린아이 같으시지.”
얼핏 엄중한 문책 같았지만 말속에 담긴 웃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든에게 포도 한 알을 먹여 준 헤레이스가 툴툴거리는 남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는 왜 오지 않으시나요. 제가 듣기로 오늘 뱃놀이는 황제 폐하께서 먼저 청하신 거라던데.”
“오지 않는 건 아니고…… 폐하께서는 좀 늦을 거란다. 일이 있으시다나.”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늦으신다는데 어찌 웃으십니까?”
이든의 반문에 아샬린은 뱃놀이 전 안나가 귓속말로 언질 준 내용을 떠올렸다. 뱃놀이에 동원되는 배는 총 세 척으로 하나는 아샬린이 타고 있는 배요 나머지 둘은…….
‘아샬린, 그대가 어릴 적 제일 좋아했던 책이 이거였던가?’
‘어디서 찾으셨어요?’
‘그건 몰라도 되고……. 맞아, 아니야, 그것만 말해.’
‘맞아요. 제가 처음 읽은 통속 소설인데 당시 이 책에 있는, 바다 위 해적을 물리치는 남자 주인공을 제가 너무도 좋아했지요. 거친 바다 사내. 멋있잖아요.’
‘멋있기는! 천박한 데다 소금 내나 나는 구질구질한 사내인데!’
귀여운 사람 같으니라고. 아샬린은 카시우스가 어떤 복장으로 나타날지 상상하며 답했다.
“웃을 수밖에……. 백작, 아마 곧 해적선이 나타날 거요.”
아샬린의 얼굴 가득 기쁨이 번졌다. 해적선이라는 말에 눈치를 챈 헤레이스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어머, 그러면 저희는 어찌합니까. 이 자리에 검을 든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이대로 납치라도 당하는 걸까요?”
“글쎄……. 해적이 나타난다면 용사도 나타나겠지? 하지만 헤레이스 넌 용사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후작이 널 납치되게 둘 이는 아니니 말이야.”
“황후 폐하 말이 맞아. 헤레이스 그대는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있잖아.”
“황후 폐하 앞에서 당신은 참!”
“괜찮다, 헤레이스. 후작과 네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연애할 때는 그리 싸우더니…….”
“전……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당신! 언제……. 떨어져요! 떨어져! 황후 폐하께서 보시잖아요!”
“싫어. 배도 좁은데 떨어질 공간이 어디 있다고.”
후작은 더운 날씨임에도 헤레이스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주변의 시선도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인지……. 오히려 기겁하며 얼굴을 붉히는 이는 헤레이스였다. 그 광경에 백작이 소리 나게 혀를 찼다.
“애가 따로 없군. 안 그렇습니까? 부인.”
“오스카. 내가 그만하라 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그도 몰래 디안나의 허리를 감싸다 그녀에게 찰싹 얻어맞았으므로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두 쌍의 부부를 흐뭇하게 보던 아샬린의 시야에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는 여인이 들어왔다. 아차 싶어진 아샬린이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은 말이 없군. 자리가 불편한가?”
“아닙니다. 다만 황후 폐하께서 명하셨는데 공작님께서 자리하지 않아…….”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는 캐틀렛 공작의 부인인 레이첼이었다. 성질 급한 공작과 달리 없는 듯 있는 그녀는 조용한 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첼의 얼굴을 보며 아샬린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괘념치 말게. 내 자매도 오지 않았으니 캐틀렛 공작만 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공작 부인이라도 함께해 줘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
“송구합니다, 폐하. 다음에는 꼭 같이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인께서 신경 써 줘서 감사하오. 자 그럼 해적을 기다리며 잔이라도 드십시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함께 잔 부딪히는 소리가 배 위에 울렸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배가 넓은 호수 위에서 서서히 길을 벗어나고 있음은 몰랐다.
* * *
“……길이 이상합니다. 이대로 가면 좁은 물길로 빠지는데 거긴 유속이 빨라 위험합니다.”
이상함을 눈치챈 건 오스카였다. 술에 취해 호수를 보던 그는 뱃길을 보다 벌떡 일어섰다. 위험하다는 말에 이든도 따라 일어서 호수를 봤다.
“뭐야, 정말이잖아. 밑에서 배 젓는 놈들 대장이 누구야. 왜 이리로 배를 몰아?”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오스카가 황급히 말했다. 불안해진 헤레이스가 이든의 등을 떠밀었다.
“당신도 백작님하고 같이 가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놈이랑? 싫은데…….”
“괜찮습니다, 후작 부인. 후작 각하께서는 여기 계신 황후 폐하와 레이디를 보호하셔야지요.”
오스카 또한 이든과 함께하기는 싫은지 호수를 살피면서도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아샬린은 고개를 저었다. 기이한 감각이 그녀에게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아니야. 후작, 백작과 함께 가게.”
아샬린의 표정에 두 사내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층계 아래 노를 젓는 곳에서 고함과 함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소리 지른 이가 남편임을 알아챈 헤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그를 찾았다.
“이게 무슨! 이든! 이든! 무슨 일이에요?”
헤레이스의 말이라면 저 멀리서부터 답했던 이든이었다. 잠잠한 침묵에 불안해진 디안나마저 남편을 찾았다.
“오스카? 거기 있어요? 오스카, 대답해요!”
두 여인의 외침에도 적막만이 흘렀다. 점점 빠르게 물살을 헤치는 배에 여인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아샬린이 입술을 물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레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내 중 가장 앞에 선 이에게 고함을 질렀다.
“네놈들은 누구야! 이든은 어디 있어!”
아샬린은 한눈에 그가 이 배의 책임자임을 알아봤다. 카시우스가 유능한 기사라 붙여 줬던 이였다. 그러나 유능한 기사의 갑옷에는 뱃놀이와 어울리지 않는 피가 묻어 있었다.
“끝까지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이런 슬픔은 없었을 텐데. 두 분은 곱게 보내 드렸습니다. 대단하신 분들이더군요. 약을 먹고도 이 정도라니…….”
얼어 있는 여인들을 훑어본 기사가 널브러진 술병과 음료병을 보며 독백하듯 탄식했다. 말을 들은 헤레이스가 성큼 한 발 다가서며 기사에게 삿대질했다.
“뭐? 이든이 뭐? 그걸 누구더러 믿으라고! 비켜! 내려갈 거야.”
“소용없습니다, 부인. 숨이 끊어지는 걸 확인하고 올라왔으니까요.”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디안나였다. 좋지 않은 상황임을 알아챈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친우의 반응이 그러하자 참지 못한 헤레이스가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아샬린은 그런 그녀를 저지한 채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게 무슨 짓이지, 카멜론. 그대는 충실한 기사가 아니었던가. 왜 이런 짓을 벌이지?”
“폐하. 혹시 이그달린을 아십니까?”
기사는 아샬린의 물음에 상관없는 답을 내놓았다. 이그달린. 그는 조국 리온이 타국과 전쟁을 벌일 때 타국의 편에 선 척하며 역으로 조국을 도왔던 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이그달린이 돌을 맞아 죽은 후에야 밝혀졌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제게 돌을 던지는 조국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리온의 승리를 기뻐했다 알려졌기에 많은 이들은 이그달린을 진정한 충신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었다.
“훌륭한 이지요. 죄인을 자처했지만 실상 그는 성인이었으니까요. 황후 폐하, 제가 오늘 이그달린을 본받고자 합니다.”
기사가 괴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샬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그를 노려봤다.
“카멜론! 이그달린을 본받는 것이 지금 이 사태와 무슨 상관인가!”
“황후 폐하께서는 여신을 부정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 무슨…….”
“폐하. 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 아래 온갖 악마들과 교접한 마녀라지요? 그들에게 몸을 바치고 얻은 사악한 마술로 황제 폐하의 눈을 가렸다지요?”
“미친놈!!!”
황후에게 감히 해서 안 될 말이었다. 헤레이스가 욕을 하며 카멜론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카멜론 곁의 다른 기사가 헤레이스를 붙잡아 바닥에 내쳤다. 동시에 다른 기사들이 일제히 네 여인을 둘러쌌다.
“전 이 나라 리온을, 그리고 여신을 경애합니다. 누구도 제 생전 그 둘을 더럽히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황후 폐하, 저희와 가시지요. 이 자리에 있는 모두 폐하와 함께 자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기사들의 표정은 결연했다. 누가 보면 정말 만고에 없는 충신으로 보일 만했다. 하지만 실상은……. 기괴함으로 뭉친 신앙 집단에 아샬린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폐하, 차라리 호수로 뛰어드셔야 합니다. 저기…… 해적선이 보입니다. 폐하께서 계십니다. 차라리 뛰어들면……아악!”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디안나가 아샬린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샬린을 끌고 걸음을 옮기기도 전 배가 크게 요동치더니 무언가 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와지직―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소름 끼치는 굉음과 함께 배가 갈라지고 사방에서 물이 쏟아졌다. 부서진 나무판자가 아샬린의 머리를 때렸다.
“폐…… 흐읍…… 폐, 폐하!”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샬린의 몸은 이미 물속에 있었다. 헤레이스가 곁에서 그녀를 부르며 손을 뻗는 것이 보였지만 그 목소리도 곧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다. 여기저기 부딪힌 몸이 찢겨 나갈 거 같았다. 아샬린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반려의 이름을 불렀다.
‘카시우스…….’
빠른 유속이 황후가 토해 낸 마지막 공기 방울조차 삼켰다. 지고한 황제의 절규하는 울음과 말리는 이들의 고함이 호수 위를 메웠다.
“놔!!! 놓으라고! 아샬린! 아샬린!!!”
“안 됩니다, 폐하. 뭣들 하나. 당장 폐하를 잡아라!”
“돌리면 네 목부터 벨 것이다. 놓아! 당장 놓아!!!”
황후 아샬린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황제는 그 후 네 번 자해를 시도했으나 결국 죽지 못했다.
* * *
황후와 고위 귀족 다섯 그리고 그 외 많은 이들의 죽음. 뱃놀이 사고는 리온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배가 왜 그리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모두 반대 세력의 짓이라 소리 높일 뿐이었다.
캐틀렛 공작은 아내를 잃고 더 포악해졌으며 자매를 잃은 모나타 공작은 대놓고 캐틀렛에게 황후의 자리가 탐났냐 일갈했다. 죽은 마일런 후작과 바이허 백작이 각각 양 진영에 속한 귀족 중에서도 구심점에 해당하는 이들이었기에 양쪽의 반목은 더 깊어졌다.
싸움은 거의 전쟁과도 같았다. 황제는 서로 싸우고 죽이는 귀족들을 말리지 않았다. 반려를 잃은 그의 판정은 매서울 정도로 잔인했다. 심지어 그는 싸움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아샬린 황후가 힘들게 제정하고 개정한 결투 금지 법안은 그녀 사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그러나 아쉬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