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진실된 마음
역사에 남을 장엄한 결혼식이었다. 화려한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 수십 개가 늘어졌고 벽과 기둥은 갖가지 귀한 꽃들과 나부끼는 리본이 장식했다. 사람 수백은 입힐 수 있는 천이 주인공들이 한 번 걸을 길에 깔렸으며 거대한 홀 안은 하객들로 꽉 찼다.
“신부의 드레스 좀 보세요. 세상에, 정말 아름답네요.”
“오늘을 위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관이랍니다. 리온의 보물로 길이 남겠지요.”
홀 안이 아무리 사치스럽다 한들 신랑 신부의 차림새만은 못했다.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의 결혼식답게 주인공들이 걸친 천부터 구석구석을 장식한 보석들까지 모두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었다. 특히 두 사람이 쓴 관은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수백의 불빛에 반사돼 빛나는 모양새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레이첼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조용히 홀 안을 구경했다. 생애 이런 화려한 식은 다시 보기 힘들리라. 지엄한 표정으로 걷던 카샨이 저를 발견하자마자 매서운 눈빛을 보낸 것도 모를 만큼 그녀는 식장의 화려함에 매료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경. 덕분에 좋은 구경 하고 가요.”
본래 레이첼은 결혼식 후 피로연 개념으로 열리는 연회는 몰라도 본식은 참석할 수 없었다. 홀이 아무리 넓다 한들 원하는 이들 모두를 수용하기에는 좁았고 당연하게도 결혼식 참관 권리는 고위 귀족부터 줄을 세워 결정되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식을 참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파트너의 역할이 컸다. 명가로 이름 높은 리이트가의 소후작, 아제프의 파트너로 참석한 레이첼은 가까이 붙은 아제프의 귀에 계속해서 작게 속살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붉은 입술이 가까워질 때마다 그가 얼굴을 붉히는 것도 모른 채.
“……별말씀을.”
아제프는 세차게 뛰는 심장에 당황한 참이었다. 신전에 머물 때 몇 번 가까이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이리 딱 붙어 앉은 경우는 없었다.
느껴지는 숨결과 더듬더듬 닿는 부드러운 살결. 그가 홀로 진땀 빼는 와중에도 레이첼의 팔꿈치는 이따금 그의 허리에 닿았다. 레이첼은 식에 집중하면서도 아제프에게 찬탄 섞인 잡담을 걸어왔고 덕분에 그는 쿡쿡 찔리는 허리보다는 빨리 뛰는 심장에 더 괴로움을 느꼈다. 사람들이 가득 차 밖보다 온도가 높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분명 사람들이 제 얼굴빛을 이상하게 봤으리라. 부끄러움에 정신이 혼미함을 느끼며 그는 괜스레 주변 눈치를 살폈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아제프는 언젠가부터 멍하니 레이첼의 드러난 목과 어깨, 그리고 붉은 입술에 시선을 힐끔 던졌다. 그런 그를 눈치챈 모양인지 레이첼이 갑자기 얼굴을 구기고는 그에게 불쾌하다는 듯 속삭였다.
“고개 돌려요!”
깜짝 놀란 아제프는 움찔거리며 황급히 앞을 봤다. 잔뜩 열 오른 얼굴이 절로 내려갔다. 그는 손을 모아 꽉 쥔 채 속으로 여신을 찾았다. 이 무슨 추태인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뒤늦은 레이첼의 말에 그는 다시 고개를 슬쩍 들었다.
“뭐야. 정말 같이 왔잖아. 망할 놈!”
“무슨…….”
“……앞만 봐요, 앞만! 고개 돌리지 말라니까요.”
아제프는 레이첼의 말에 고개를 앞으로 한 채 힐끔 곁눈질로 레이첼을 살폈다. 들떠 보였던 조금 전과 달리 그녀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갈 뻔했으나 레이첼이 앞만 보라 했기에 그는 잠자코 앞만 봤다.
“개새끼! 잠시라도 믿은 내가 미쳤지.”
레이첼은 계속해서 작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제프는 드문드문 말 속에 섞인 험한 단어 선정에 놀라긴 했으나 왜인지 모르게 그 모습조차 귀엽게 느껴졌다.
‘……귀엽다?’
스스로에게 혼란을 느낀 아제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는 와중에도 눈은 계속해서 옆을 좇았다. 상기된 뺨 위 부드럽게 내려온 머리카락. 위로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새초롬히 튀어나온 입술 등 무엇 하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나마 단 하나 아쉬운 걸 고르라 한다면 레이첼의 시선이었다. 자신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눈.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곤 레이첼이 신경 쓰는 곳을 모른 척 살폈다.
‘마일런 후작?’
아제프의 시야에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어딘가 어수선한 옷매무새가 띄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내는 흐트러진 외양만큼이나 불안해하는 모양새였다. 그 주변도 사내 때문에 약간 소란이 난 듯했다. 그러나 아제프는 그런 사내의 주변에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그를 죽여 씹어 먹을 것 같은 사내, 에단의 표정이 원체 살벌했기 때문이다.
* * *
“저 새끼가 기어코!”
에단은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감정을 드러냈다.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첼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레이첼 곁에 다른 사내가 있는 걸 보자 눈이 뒤집혔다.
“에단! 보는 눈이 많아.”
“놔.”
그가 식 중에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듯싶어지자 곁에 있던 로잘린이 손을 잡았다. 꼭 쥔 힘이 제법 절절했으나 에단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곧바로 그 손을 털어 냈다.
자신을 냉대하는 태도에 로잘린이 상처 입은 얼굴을 했지만 에단으로서는 그 표정조차 가증스러웠다. 그가 레이첼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짓씹듯 말했다.
“네 짓인 거 알아. 아니, 너와 아저씨 두 사람의 합작이겠지.”
에단의 말에 로잘린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잘게 떨리는 눈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이야.”
“어쩐지 사고가 너무 잦더라니……. 마차 바퀴에, 말에, 휴양지 인근 산에 도적이라니. 그것도 잘 훈련된 기사 같은 도적. 말이 된다 생각해?”
“…….”
“게다가 내가 도착하기 무섭게 따라붙는 너까지…….”
“…….”
“아주 작정을 했더군.”
에단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로잘린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에단이 레이첼과 이런 중요한 자리에 함께 있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눈물로 아버지께 애원했고 원대로 에단의 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내가 말했지, 너랑은 더는 엮일 일 없다고. 대단하신 캐틀렛 공녀께서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
“식 중이라 참지만 이 이상 오늘 나한테 붙을 생각은 마. 지금 당장 너랑 이렇게 있는 것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깐.”
희게 질려 있던 로잘린의 얼굴이 캐틀렛 공녀라는 단어가 언급되기 무섭게 변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사납게 눈초리를 올린 그녀가 에단을 노려봤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저 멀리 앉아 있는 레이첼을 좇을 뿐이었다.
“마일런가는 널 받아 주지 않아. 마일런가에 들어올 여자는 레이첼 하나야.”
속이 뒤집혔다. 로잘린은 에단의 시선을 따라 레이첼을 죽일 듯 보다 작게 이를 갈았다. 에단 대신 레이첼을 족쳐야 했다. 나다니는 걸 좋아하니 골목에서 죽여 버리든 납치해 사내들에게 던져 버리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감히 제까짓 게……. 일말의 정이 남았다 아량을 베풀어서는 안 됐다.
“레이첼이랑 정말 결혼이라도 할 참이야?”
“…….”
“하급도 하급 나름이지. 레이첼한테 하찮은 평민의 피가 흐른다는 걸 잊었어? 태생부터 미천하고 더러운 애야. 고작해야 내 장난감이었을 뿐이라고.”
“…….”
“에단. 간절히 충고할게. 내가 네게 주겠다잖아. 가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곁에 둬도 돼. 하지만 결혼은 나랑 해야지. 우리는 어릴 적부터 혼인이 약조된 사이야. 물론 너랑 나 사이에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에단은 의외로 묵묵히 로잘린의 말을 들었다. 그가 별 반응 없이 제 말을 경청하는 듯싶자 로잘린은 용기를 얻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께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넌 훌륭한 공작이 될 수 있어. 아버지께 나 말고 누가 있니? 마일런 후작인 네가 나랑 결혼하면 방계에서도 무어라 하지 못해.”
로잘린은 저와의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캐틀렛가의 하나뿐인 직계손으로 미래의 캐틀렛이었다. 어떤 사내가 저를 마다하겠는가. 자신과 혼인하면 공작이 될 수 있는데.
하지만 에단은 로잘린이 결혼을 언급하기 무섭게 차가운 낯빛을 했다. 그가 무감한 얼굴로 로잘린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로잘린, 너 내가 모르고 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 알고 있어. 너 말이야…….”
에단의 속삭임을 들은 로잘린의 낯이 흙빛으로 변했다. 크게 눈을 뜬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마주 쥔 채 에단을 봤다. 설마하니 그가 알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에단은 그새 그녀에게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달달 떠는 로잘린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는 앞을, 정확히는 레이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 *
성대한 연회였다. 본식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넓은 홀 색색이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 때문에 모자람은 없었다.
기쁜 날인 만큼 사람들은 즐겁게 웃고 마셨다. 오늘만을 위해 준비된 고급술을 나르느라 성안 궁인들은 바삐 움직였고 요리사들은 쉴 새 없이 음식을 채워 넣었다. 사방에서 온통 잔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부도 행복해 보였다. 이제 황태자비가 된 호프먼의 공주는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에 같은 색의 눈이 매력적인 이였다. 수줍어하는 와중에도 남편인 황태자를 보며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양새가 새 신부 그 자체였다. 물론 그 곁에 선 황태자는 만들어진 미소로 답할 뿐이었지만.
레이첼은 신부와 신랑을 힐끔거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간섭할 바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황태자비는 소문과 다르게 순진해 보였다. 귀한 여자가 저런 개차반하고 결혼하다니……. 신분이 높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구나, 그녀는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으신 겁니까? 가까이 갈까요?”
“아뇨.”
레이첼이 계속해서 신랑 신부를 보자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아제프가 물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단칼에 잘라 내듯 단호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카샨은 지금도 간혹 그녀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축하를 드리라? 카샨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대 그는 새 신부 앞에서 그녀를 제 정부라 소개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사내였다.
“경께서는 가 보세요. 그래도 황태자 전하신데 눈도장이라도 찍어 놓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그보다…….”
가지 않겠다 답한 아제프가 무언가 생각난 듯 움찔거리다 절절매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뀐 그의 태도에 레이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 질문에 혹 기분 상하시지는……. 그러니깐, 전하께서는 그때…….”
“아…….”
“……생각이 짧았습니다. 보는 것도 싫으실 텐데.”
아제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레이첼은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카샨에게 겁탈당할 뻔한 걸 구해 준 이가 아제프 경이었지. 그때가 생각나자 당장 공주에게 고자질하고 식을 엎어 버리고 싶었다. 하나 그녀의 복수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쉬움에 짧게 혀를 찬 레이첼은 괜한 죄책감에 빠져 있는 아제프를 위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보다 경, 괜찮다면 제 언니와 동생을 소개해 줄까 하는데 어때요? 경이라면 깐깐한 언니 마음에도 들 법한데.”
아제프는 자연스레 팔짱을 껴 오는 레이첼에 몸을 뻣뻣이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이끌려 겨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레이첼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다급히 말했다.
“……축하나 하러 가요.”
“예? 하지만 방금 전에는…….”
“가만 생각해 보니 피할 일도 아니고……. 일단 저리로 가요. 빨리!”
레이첼은 거의 끌고 가다시피 아제프를 인도했다. 엉겁결에 걷게 된 아제프는 몇 분 새 변한 그녀의 심경에 의문을 표했으나 곧 거의 쫓아오듯 그들 쪽으로 걸음 하는 사내를 보고는 상황을 이해했다.
에단 마일런. 식 때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던 그는 한참 가까워진 거리에서 유령처럼 섬뜩한 얼굴을 한 채 있었다.
* * *
억지로라도 웃기 어려웠다. 레이첼은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며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아제프 경도 그렇고 애블랑 영애 그대도 그렇고…… 두 사람 다 아주 오랜만이야.”
에단을 피해 카샨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자 결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다니. 레이첼은 허리를 숙이며 속으로 눈물을 쏟았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하고픈 사람은 많을 터이니 아주 잠깐이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레이첼과 아제프가 다가오기 무섭게 카샨은 환히 웃으며 대부분의 사람을 물렸다. 그리고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나른하고도 잔인한 눈으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축하보다 두 사람의 축하가 값지군. 두 사람은 날 꺼리지 않나.”
“…….”
“전하, 농담이 과하십니다.”
카샨의 곁에 당연하다는 듯 남은 이도 레이첼에게 문제였다. 잔머리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히 머리를 넘긴 아이작은 차가운 얼굴로 레이첼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로는 편을 들어 준다지만 푸른 눈이 어찌나 시린지. 레이첼은 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이작의 바로 곁에는 마들렌 모나타가 있었다. 레이첼보다 진한 색의 금발을 틀어 올린 그녀는 제 파트너 못지않게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마들렌이 레이첼과 아제프를 힐끔 훑어봤다. 그녀의 표정 안에 악의는 없었다. 자리한 거라고는 넘치는 무료함과 조금의 호기심뿐. 카샨의 앞에서도 지루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그녀는 신분에 걸맞게 당당하고 오만해 보였다.
“그런가? 하지만 백작…… 자네도 알지 않나. 경은 감히 날 패대기친 장본인이요 그 옆의 애블랑 영애는 감히 내 명을 어기고 도망간 이 아닌가.”
카샨의 말에 기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만큼 그의 말이 주는 파장은 컸다. 황태자에게 그런 행패라니 당장 죽어도 이상할 일 없지 않은가. 새 신부인 호프먼의 공주 리리엔타의 얼굴은 그녀가 찬 진주만큼이나 대번에 창백해졌으며 작게 하품하던 모나타 공녀도 흥미롭다는 듯 레이첼과 아제프를 봤다.
레이첼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셨다. 설마하니 대놓고 저 일들을 언급할 줄이야. 옆을 힐끔 보니 아제프의 얼굴도 조금 뻣뻣이 굳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카샨은 붉은 술이 들어 있는 잔을 홀짝이다 다 마시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백작 말대로 내가 정말 과한 장난을 친 모양이군. 모두 얼굴 펴. 장난이네.”
“전하, 그런 장난은 마십시오. 전 정말 이들이 전하께 무도한 일을 벌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새 신부가 작게 한숨을 쉬며 상냥하게 말했다. 호프먼 특유의 부드러운 억양이 제국어에 섞여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카샨은 아양 떠는 새 신부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비스듬히 의자에 앉은 그가 살짝 홍조가 도는 얼굴로 레이첼을 불렀다.
“레이첼. 아니, 리첼.”
“……예, 전하.”
새 신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여전히 웃는 낯을 한 그녀였지만 잠깐 깨문 입술을 눈치 못 챈 이는 없었다. 하기야 남편 될 자가 결혼식 당일 연회에서 신부의 말을 무시한 채 다른 여인을 친근히 부르는데 기분이 좋으면 더 이상했다. 게다가 그 여인이 아주 아름답다면……. 신부는 결혼식 당일 남편의 시선을 앗아 간 레이첼을 보며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대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겠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에 레이첼은 대꾸조차 못 한 채 황태자비의 눈치를 봤다. 그러잖아도 적이 많은 그녀였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 중 하나의 심기를 거스른다니. 당장은 힘없이 결혼한 타국의 공주라지만 미래에는 황후 폐하가 아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레이첼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아아…… 비, 여기 있는 애블랑 영애는 비록 신분은 좀 처지나 리온의 사교계에서 명망 있는 영애라오. 보다시피 아주 아름답고…… 아주 영리하지.”
“……그렇습니까.”
레이첼의 떨리는 눈동자를 눈치챈 모양인지 카샨이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신부에게 말을 건 그가 레이첼을 샅샅이 훑으며 칭찬했다.
“그대의 궁에 들여도 좋을 인재야. 그러니 황궁에 적응하면 영애를 불러 곁에 두도록 하시오. 그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호프먼에서 많은 시녀가 왔습니다. 그들만으로도 전…….”
리리엔타의 부드러운 거절에 카샨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그가 대번에 공주의 말을 잘랐다.
“불충분하지. 그대는 이제 호프먼의 공주가 아닌 리온의 황태자비요 장차 이 나라의 황후요. 호프먼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지. 그건 너무 뒤처지지 않는가.”
조국을 무시하는 카샨의 말에 리리엔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미한 미소마저 걷혔으나 그녀가 당장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새 신부의 얼굴로 앉아 있던 리리엔타는 그제야 설렘을 내려놓고 남편을 살폈다.
그녀의 남편은 남편이되 남편이 아니었다. 공주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다. 그가 자신을 맞아들인 건 정치적인 문제였다.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황금색 눈이 두려워졌다. 저 눈은 그녀를 새 신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애정 따위 한 톨도 없었다. 자신을 이용 가치 있는 물건이자 찍어 눌러야 할 이로 보는 저 눈. 공주는 자신이 어떤 이와 결혼했나 실감했다.
“조금 늦게 말하려 했다만 말이 나온 김에 하지. 호프먼에서 온 그대의 시녀는 둘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내시오.”
“하지만! 전하…….”
“긴말하지 않겠소. 부족한 시녀들은 앞의 애블랑 영애를 포함해 리온의 귀족들로 채우시오. 내 비의 시녀 자리라면 많은 이들이 줄을 설 것이오.”
새로이 부부가 된 두 사람 사이의 권력 차이는 확실했다. 고개를 숙이며 신부가 복종의 뜻을 알렸다. 결혼식 당일인 걸 생각하면 잔인한 처사였으나 제 뜻을 관철한 카샨은 제 신부를 보며 코웃음 치더니 다시 레이첼을 봤다. 리리엔타를 볼 때와 달리 열을 잔뜩 품은 시선이었다.
“비의 시녀 자리가 얼마나 영광인지는 레이첼 그대도 알겠지?”
“……예.”
“그렇다면 내게 감사 인사 해야 옳지 않은가. 그대에게 귀한 답례품을 하사한 셈인데.”
레이첼이 허리를 숙였다. 떨떠름했지만 이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보다야 조용히 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그녀가 시녀가 되게끔 공주가 가만있겠는가. 남편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대놓고 제게 추파를 던지는데. 레이첼은 괜찮을 거라 자신을 다독였다.
“잠깐.”
레이첼이 완전히 예를 갖추기 직전이었다. 편히 앉아 있던 카샨이 한 발 다가선 그녀의 손목을 갑작스레 잡더니 당겼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주무르다 아쉽다는 듯 놓으며 말했다.
“보통의 명예가 아닌데 그 정도 인사로는 부족할 거 같군.”
“……원하시는 대로 행하겠습니다.”
그럼 어쩌라고! 카샨이 일부러 그리했음을 눈치 못 챌 레이첼이 아니었다. 슬슬 올라오는 열을 꾹 참은 채 레이첼이 고개를 숙이자 카샨이 제 왼손에 자리한 반지를 굴리듯 건드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빛냈다.
“이 반지는 나와 비의 결혼을 기념해 맞춘 것이지.”
“…….”
“감사 인사로 여기 입 맞추는 건 어떨까? 그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운 인사일 거 같은데.”
결혼을 상징하는 반지에 동성의 충성 다짐도 아니요 여인의 입술이 닿는다니. 그것도 결혼식 당일에.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었다. 리리엔타의 표정은 이제 거의 울 듯 변해 있었다.
‘이 미친놈이!’
레이첼은 입술을 꾹 문 채 머뭇거렸다. 팔을 앞으로 뻗은 카샨의 표정은 생각 외로 진중했다.
“더 기다렸다간 내 팔이 떨어져 나가겠군. 뭘 머뭇거리지?”
‘제발 그래라. 차라리 떨어져 버려! 그럼 바닥을 기어서라도 입 맞춰 줄 테니깐.’
공주에게는 미안했지만 별 이유 없이 사람들 앞에서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레이첼은 떨리는 손을 꾹 쥔 채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코앞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입술은 반지에 닿지 못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부드럽지만 빠르게 레이첼을 막더니 그녀를 뒤로 슬쩍 밀어 낸 탓이었다.
“전하께서 제 파트너에게 이런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껏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에 햇빛 한 점 못 본 것 같은 창백한 피부. 아제프는 잿빛 눈동자를 느리게 움직이며 레이첼의 앞에 나섰다. 레이첼이 그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자 카샨이 눈가를 찡그리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경은 별 쓸데없는 걸 다 묻는군. 당연한 일 아닌가.”
“…….”
“내가 그대 파트너를 아끼기 때문이야. 아까 말했잖나, 레이첼은 아주 대단한 인재라고. 그런데 이런 인사라……. 듣기 불쾌하군.”
아제프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다. 감히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른 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그는 저를 노려보는 카샨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그녀의 충성을 원하십니까?”
애매한 물음에 카샨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카샨이 레이첼에게 원하는 것은 보통 군주가 신하에게 원하는 충성과는 궤를 달리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충성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는 레이첼이 순순히 복종하고 명을 따르길 원했다. 낭창하고 부드러운 몸을 그가 내킬 때마다 내주고 반짝이는 저 눈이 저만을 향했으면 했다. 반항 따위 앙탈 정도로만, 그가 귀애할 정도로만 했으면 했고 종국에는 마음 한 조각마저 제 것이길 원했다.
내게 종속될 여인에게는 그것만 한 충성이 없지. 카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볼 수 있지.”
“전하, 제가 질투가 조금 많습니다.”
기껏 답을 줬건만……. 아제프의 엉뚱한 말에 카샨의 어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신전 생활을 오래 하다 얼마 전 그만뒀습니다. 덕분에 여인과 연회를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 이유로 애블랑 영애는 제 첫 파트너입니다.”
“그래서?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지?”
“외람되지만 저로서는 생애 첫 파트너가 다른 사내에게 입 맞추는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카샨의 입에서 헛웃음이 짧게 터져 나왔다. 그래서 감히 저걸 뒤에 숨긴 채 내줄 수 없단 말인가. 감히! 카샨이 등을 세우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경, 리이트 후작을 믿고 또 이리 방자하게 구는 모양인데 그때와 같은 용서는 없어. 그러니 당장 비키는 게…….”
“그러니 제가 그녀 대신 전하께 충성을 보이겠습니다.”
순식간이었다. 카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제프가 그 앞에 무릎을 꿇더니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 광경에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숨 들이켜는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아제프의 행동은 어디에서나 그렇겠지만 특히 리온의 황가에서는 더 큰 모독이었다. 500여 년 전 당시의 황제가 허수아비 노릇을 하며 팔을 묶인 채 원치 않은 충성 맹세를 받은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황가는 허락 없는 신체 접촉과 맹세에 대단히 민감했다.
카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사내를 당장에라도 차 버릴 듯 매서운 얼굴을 한 채 손을 거칠게 거둬들였다.
“전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질 조짐을 보이자 아이작이 나섰다. 그는 이쪽을 흥미로운 눈으로 주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카샨을 살폈다.
‘죽여 버려?’
아니나 다를까 카샨은 당장에라도 아제프를 도륙 낼 궁리 중이었다. 어차피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이였다. 리이트 후작 때문에 한 번은 참았지만 더는 참아 줄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놈은……. 카샨의 시선이 아제프의 뒤에 숨듯 자리한 여인에게 닿았다.
저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숨는 레이첼을 보자 애가 타고 더 큰 분이 끓었다. 카샨은 이번에야말로 저 방자한 리이트가 놈도 제 손을 거부하는 버릇없는 여인도 손봐 주마 결정했다.
“쯧!”
카샨이 기사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들기 직전이었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두 멈칫한 채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혀를 찬 이는 지금껏 한마디 없이 있던 마들렌 모나타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떠는 외사촌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로 어찌 화를 내십니까. 쓸데없는 자작 영애의 충성보다는 리이트가 후계자의 충성이 쓸모 있는 법입니다.”
어찌 보면 무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어투였으나 마들렌 모나타의 입에서 나오자 무례한 그 말이 이상하리만치 괜찮았다. 도도히 고개를 치켜든 그녀가 길게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더욱더 값진 것을 받으신 터이니 얼굴 붉히지 마시라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다른 손님이 와 있습니다. 인사라도 하셔야 될 텐데요.”
마들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 레이첼 위로 그림자가 졌다. 바짝 붙은 숨소리에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 * *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경, 가요.”
“가만. 무례하군. 아직 물러나라 명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잠깐 있다 가지. 레이첼 그대와도 친근한 이 아닌가.”
바로 뒤에 자리한 사내를 눈치챈 레이첼이 입술을 물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카샨은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는 듯 노기를 지우더니 아제프를 끌어당기는 레이첼을 막았다.
“마일런 후작, 그리고 캐틀렛 공녀. 두 사람 모두 오랜만이야. 특히 공녀, 그대는 아주 간만이지?”
카샨의 손짓에 앞으로 나온 두 사람은 얼핏 보면 한 쌍처럼 보였으나 파트너라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에단은 로잘린을 없는 이 취급하고 있었으며 로잘린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곁에 붙으려 했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 전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부부를 향해 예를 올린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자리에 있는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특히 지금껏 무료함만을 보이던 마들렌은 로잘린을 향해 비웃음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벌써 이런 자리에 나오다니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모양이야.”
“이런, 내 외사촌은 두 사람이 불편한가 보군. 마들렌, 왜 그러지? 두 사람에게 혹 불편한 감정이 있나. 아니면 혹시…….”
마들렌의 비웃음 소리는 제법 컸기에 카샨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가 아는 그의 외사촌은 어미인 모나타 공작을 닮아 냉혹한 데다 다른 이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였다.
“로지오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나?”
두 공작가를 생각해 사람들은 로잘린과 로지오에 대해 입을 함부로 열지 않았다. 그렇기에 로잘린은 오늘 식과 연회에서도 저를 보는 시선과 수군거림을 느끼기만 했을 뿐 그 이상 무례하게 구는 이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공작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는 카샨은 달랐다. 그는 로잘린이 불편해할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그녀와 로지오의 이름을 대화에 던져 놨다. 로잘린이 입술을 꽉 물었다.
“아닙니다. 화가 나다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공녀 덕에 일이 얼마나 쉬워졌는데……. 전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은 표정부터 바꾸고 해. 그리고 별 감정 없으면 공녀에게 좀 웃어 줘. 누가 보면 네가 공녀를 잡아먹는 줄 알겠군.”
카샨의 말에 마들렌이 한 걸음 로잘린에게 다가갔다. 움찔 몸을 떠는 로잘린은 막아 달라는 듯 에단을 보며 그쪽으로 몸을 옮겼으나 에단은 냉정히 옆으로 피했다. 덕분에 로잘린은 다가온 마들렌을 똑바로 마주 봐야 했다.
“캐틀렛 공녀.”
“아…….”
“전하께서 콕 집어 말씀하시니……. 로지오와 함께해도 좋습니다. 모나타와 캐틀렛 두 가문 사이는 불편하지만 내 인생 최고의 조력자를 냉대할 수는 없지. 제법 괜찮은 모나타의 영지도 하나쯤은 내어 주지요. 원한다면 내 동생의 부인으로 들어오도록 해요.”
얄밉게 빈정거리는 것이 비아냥이 분명했지만 로잘린은 고양이 앞 쥐처럼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저는…… 저는…….”
같은 공녀인데…… 주먹을 꾹 쥐었지만 고개를 들고 마들렌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로지오가 이런 성격이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눈앞의 재수 없는 여자와는 생김새만 닮은 유약한 사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왜 두 사람이 같이 왔지? 공녀, 그대는 내 외사촌과 함께해야 맞질 않은가.”
두 공녀의 대치를 구경하던 카샨이 놀리듯 물었다. 로지오와의 관계를 아예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말에 로잘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유일한 구원이라도 되는 양 에단을 바라봤다.
“같이 온 것이 아닙니다.”
로잘린의 간절한 표정에도 에단은 미간을 구기며 뱉어 내듯 말했다. 로잘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에단의 시선은 지금도 그리고 이 자리에 오기 전에도 레이첼만을 향해 있었다.
에단의 절절한 시선을 알 법도 하건만 눈 하나 깜빡 안 한 채 미간을 구기고 있는 레이첼을 보며 카샨이 짙은 미소를 물었다. 같이 돌아다닌다 싶더니 또 그새 틀어진 모양새였다.
‘그 난리를 치며 내게서 앗아 가더니……. 여차하면 백작과의 약속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이작 또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눈치챈 듯 친우와 레이첼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냉랭한 푸른 눈은 얼핏 보면 무감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한 듯 간혹 크라바트로 가는 손이 그의 심기가 썩 달갑지 않음을 알려 줬다.
의외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있는 사내 넷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음에도 모른 척 제 머리카락만을 꼬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아제프의 팔짱을 낀 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하는 얼굴이 새초롬했다. 카샨은 레이첼의 작은 손이 아제프의 팔을 꼭 잡은 것을 못마땅한 듯 잠깐 응시하다 다시 로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녀, 질문이 불편하겠지만 내 외사촌을 위해서라도 물어야겠어. 그대 파트너는 대체 누구지? 로지오인가? 아니면 거기 있는 마일런 후작인가?”
에단은 분명 로잘린이 그의 파트너가 아님을 밝혔지만 카샨은 모른 척 로잘린을 향해 달갑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에단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카샨은 구겨지는 그 얼굴에 그때 레이첼을 빼앗긴 모욕을 일부나마 갚는 기분이었다.
“제 파트너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눈물을 글썽이던 로잘린이 에단과 레이첼을 번갈아 보다 억울한 듯 입술을 꾹 물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뗀 그녀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울음을 토해 내듯 말했다.
“……여기 있는…… 마, 마일런 후작입니다. 그가 제 파트너예요.”
어찌나 애타는 목소리인지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로잘린을 동정할 법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녀의 전적이 어떠했는지 아는 이들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얼핏 황당한 기색이 스쳤다.
“……축하하네. 옛 약혼녀와 다시 만난 모양이군. 하기야 캐틀렛과 마일런의 우정은 예부터 대단했지.”
질문을 한 카샨 또한 당당한 로잘린의 답에 조금 당황했지만 그는 그보다 즐거움을 더 크게 느꼈다. 세 사람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도리가 없었으나 상황이 에단과 레이첼 두 사람의 관계에는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카샨은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레이첼과 그의 첫 만남에도 로잘린 저 여자가 지대한 공을 세웠더랬다. 다른 사내를 잊어 내려 노력하며 순결을 제게 바쳤던 레이첼의 앳된 시절 과거가 떠오르자 카샨의 욕망에 불이 붙었다.
아주 착한 아이였지.
내 작은 새. 그가 레이첼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속삭이자 레이첼의 눈썹이 대번에 위로 섰다. 화를 참지 못한 모양인지 입 모양으로나마 욕설을 지껄이는 게 보였지만 언제나 그러했듯 건방지다는 생각과 함께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결혼 이후 또 다른 식이 열릴지 모르겠군. 하지만 마냥 축하만은 할 수 없겠어. 공녀가 마일런 후작과 함께한다면 로지오 그 아이가 가여워지는 게 아닌가? 마들렌 네 마음이 아프겠구나. 듣자 하니 로지오는 몸이 아파 오늘 내 식에도 못 온다더니…….”
“흥! 별로 상관없습니다. 로지오 그 아이가 하는 일이 그렇지요. 여자 하나 끝까지 건사를 못 해 방에 틀어만 박혀서는…….”
마들렌은 제 친동생을 얕잡아 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날카로운 어투에는 동생에 대한 연민 따위 없었다.
사실 마들렌이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모나타가 남매 중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건 마들렌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가신들과 원로들은 남자라는 이유로 항상 로지오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 게다가 어미조차도 그녀와 꼭 닮은 마들렌보다 유약한 아들에게 마음을 기울일 때가 많았다.
‘누이…… 미안합니다.’
마들렌은 어미보다 가문의 가신들보다 동생의 태도가 더욱더 못마땅했다. 로지오는 정면으로 그녀와 맞서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후계 자리를 포기하지도 못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하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에게 로지오는 한심한 머저리였다.
그랬기에 마들렌은 로지오가 캐틀렛가의 여식과 도망치는 사고를 쳤을 때 내심 놀랐다. 그 머저리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다른 이들은 경악할 일이었지만 마들렌은 동생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용기 있다고.
게다가 동생의 사고는 그녀를 후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캐틀렛이라면 치를 떠는 원로들이 그녀의 손을 들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관대해진 마들렌은 동생의 도주를 은밀히 도우며 생각했다. 그래, 모나타는 내가 가질 터이니 넌 그 멍청한 여자아이 잘 꼬드겨 캐틀렛을 차지하렴. 모나타의 핏줄이 캐틀렛 공작이 된다면야 그 또한 가문에 충성하는 일이지.
그러나 마들렌의 바람과 다르게 로지오의 도주는 1년을 가지 못했다. 거지꼴로 돌아온 그는 방에 틀어박혀 엉엉 울기만 했다. 마들렌은 동생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치를 떨었다. 내가 저런 놈을 잠시나마 인정했다니. 그녀의 동생은 일평생 그녀에게 머저리로 남을 것이 뻔했다.
“혹여나 나와 로지오 둘 모두 공작이 되지는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하긴 공녀에게도 덜떨어진 내 아우보다는 마일런 후작이 나은 선택이겠지.”
로잘린이 처음으로 마들렌에게 눈을 치켜떴다. 마들렌은 우습다는 듯 그 눈을 마주 보다 천천히 레이첼 쪽으로 눈을 옮겼다. 그녀의 눈에는 아까와 다르게 레이첼을 향한 불쾌감이 조금 서려 있었다.
마들렌도 어느 정도 레이첼에 대해 알았다. 저 여자에게 황태자는 물론이요 마일런 후작 그리고 제 파트너 아이작까지 어느 정도 엮여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 웃음이나 팔고 다니는 계집. 천박하기는.’
워낙 눈에 띄는 외관이긴 했다. 누가 보더라도 혹할 얼굴에 사내를 홀리는 분위기까지 있었으니. 저런 미모는 어디 가서 쉽게 찾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과연 그 이상 값어치가 있을까? 저 외관이 영영 빛을 내는 것도 아니고 대단치 않은 물건이니 관심 두지 않았지만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연히 말이 삐딱하게 나갔다.
“……물론 후작님에게도 나은 선택일 테고.”
생략된 말을 눈치채지 못할 레이첼이 아니었다. 붉어진 얼굴에는 수치가 담겨 있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요 제법 많이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러운 걸까. 레이첼은 마들렌의 얼굴에 뚜렷이 드러난 경멸을 읽었다.
“캐틀렛 공녀, 이 자리에서 똑똑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들렌의 세찬 말이 지나가기 무섭게 에단의 목소리가 자리를 채웠다. 내내 얼굴을 구기고 있던 그는 순식간에 로잘린을 밀어 내고 마들렌 앞에 섰다. 조금 전과 달리 얼굴을 반듯이 편 채 입꼬리를 길게 올린 그가 마들렌을 똑바로 쳐다봤다.
“마일런과 캐틀렛의 결합은 없습니다. 그러니 공녀께서 미리 겁먹을 필요 없으십니다.”
마들렌의 얼굴이 창백해지다 곧이어 붉어졌다. 그의 말은 놀림에 가까웠다. 겁을 먹는다니.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모멸에 고귀한 모나타가의 장녀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기뻐하시면 곤란합니다. 캐틀렛과 결합하지 않는다 하여도 마일런이 모나타를 돕지는 않을 테니까요. 사실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공녀를 보며 확실히 결정했습니다. 모나타는…….”
“…….”
“……마일런과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군요.”
그 말의 뜻을 못 알아챌 마들렌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위로 번쩍 올라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홀 안 많은 사람의 이목이 쏠렸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카샨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이쯤 해 둬, 마들렌. 핏줄이라지만 내 결혼식에서 행패를 부린다면 기사에게 끌려 나가야 할 것이야.”
마들렌이 씩씩거리며 손을 내렸다. 사나운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여기서 에단에게 손찌검을 해 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다들 목이 마르실 텐데 잔이라도 들고 다시 이야기 나누지요.”
잠자코 눈치만 보던 리리엔타가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지나가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카샨을 비롯한 사람들은 별말 없이 순서대로 잔을 들었다.
곧 에단이 잔을 들 차례가 왔다. 그의 장식 단추 중앙에 위치한 루비만큼 붉은 액체가 미미하게 찰랑였다. 에단은 잔의 둥근 곡선 끝자락에 맺힌 레이첼을 바라보다 입술을 물었다. 그가 잔을 잡으려 손을 뻗다 멈췄다.
금쟁반을 든 시종이 의아한 표정을 하기도 전이었다. 에단이 갑작스레 몸을 돌렸다. 동시에 레이첼의 몸도 따라 홱 돌아갔다.
카샨이 자리에서 일어남은 물론이요 아제프와 아이작도 당황해 발을 옮겼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를 헤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이미 멀어져 붙잡을 수 없었다.
* * *
“이거 놔요! 놓지 못해요?”
“…….”
“어떻게 매번 이렇게 똑같아요? 이리 끌려가는 것도 이제 지겨워요! 지겹단 말이야!”
레이첼은 주변을 의식해 조용히 있다가 사람들이 뜸해지기 무섭게 반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에단의 힘은 그녀로서는 당해 내기 힘든 것이었다. 에단은 한적한 테라스 휴게실에 레이첼을 밀어 넣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미안.”
에단은 사람이 있음을 알리려 커튼을 내린 후 출입구 쪽에 선 채 레이첼에게 사과했다. 레이첼은 풀 죽은 얼굴로 미안하다 말하면서도 퇴로를 막는 그의 행위에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랑 단둘이 있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 그래서 그런 거야. 미안해.”
“생각나지 않으면 하지를 마세요. 끌려오는 처지는 생각도 않으시면서 끝에 미안하다 말만 붙이면 다예요?”
쏘아붙이는 말이 매서웠다. 레이첼은 두통이 이는 듯 신경질적으로 눈썹 옆을 누르며 에단을 노려봤다. 그러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자 다리를 움직여 출입구로 향했다.
“……가지 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듣기 싫어요.”
“내게도 말할 기회는 줘. 제발…….”
손목을 잡으려다 주춤한 그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레이첼은 언짢은 듯 그 손을 털어 냈지만 문에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 에단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일부러 늦으려고 했던 게 아니야. 정말이야. 사고가…… 아니, 함정이 있었어. 다 말할게. 원래라면 너랑 약속하기 하루 전날 오는 거였는데…….”
“그 이상 말할 필요 없어요.”
“어?”
“캐틀렛가가 엮여 있는 거겠지. 아니에요?”
에단의 일은 로잘린과 마주쳤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한 후였다. 그는 자신을 좋아했다. 바보도 아니고 대놓고 좋아한다 몇 번이고 말했는데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단의 마음은 의심을 끼고 봐도 진실했다.
레이첼 그녀가 허락한다면 당장이라도 청혼하려 들겠지. 하지만 모든 걸 예상했음에도 레이첼은 도무지 에단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늙은이가 주인께 해가 되는 이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탓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가 아니라 말해도 주변이 그랬다. 에단이 아무리 강력히 주장한다 한들 환경이 그렇지 못했다. 물론 본인 의지가 확고한 만큼 헤쳐 나가려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가. 레이첼은 그런 고난을 원하지 않았다. 끝에 기다리고 있을 열매가 아무리 달다 한들 열매를 구하려 상처 입는 멍청이가 되긴 싫었다.
레이첼은 에단 없이도 행복해질 자신이 있었다. 누가 뭐라 한들 그녀는 아름다웠고 레이첼은 스스로가 충분히 매력적인 이다 자부했다. 그런데 왜 아픔을 자초해야 하는가. 그것도 한 번 겪어 본 아픔을. 그녀는 더는 다치기 싫었다.
“네가 언짢아할 거라 생각했어.”
“…….”
“넌 캐틀렛을 꺼리니깐. 말해 봤자 연회를 앞두고 네 심기를 상하게 할 거라 여겼어.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항상 자신만만했던 사내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는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비굴한 자세였다. 레이첼은 문뜩 에단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깐 화내지 마. 네가 이리 나가면 나는…….”
그는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떼쓰다 안 되니 결국 후회하며 우는 아이.
불현듯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부모를 잃은 사내아이는 그 상실감에 가시를 세우다 울음을 터뜨렸다. 레이첼은 에단이 또다시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제게 매달리고 집착하는 건가 고심했다. 어쩌면 그도 자신처럼…….
“이번에 많이 생각해 봤어요.”
레이첼은 문가에서 떨어져 에단 앞에 섰다. 그리고 안쓰러울 정도로 처량한 얼굴을 한 그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하와 제 관계를요.”
에단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춘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려앉은 손이 모아진 채 드레스 자락 일부를 꾹 움켜쥐고 있었다. 잔뜩 들어간 힘에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천이 주름졌다.
“백작님 말이 맞았어요. 사실은 저도 과거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
“……각하께서는 제게 특별해요. 계속 아니라고 되뇌어도 그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
특별하다는 말에 에단의 눈이 커졌다. 레이첼은 놀란 그를 보며 자조하듯 쓴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각하가 좋았어요. 각하께서는 어릴 적부터 잘생기셨고 돈도 많았고 캐틀렛가 안에서 제게 제일 잘해 주셨어요. 물론 못되게 굴 때도 많았지만 결정적일 때는 항상 제 편에 서 주셨죠. 그래서 각하와의 이별이 제일 어려웠어요. 처음이었고 제 판단에 자신이 없었거든요. 각하와의 시간이…… 행복하기도 했고요.”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간혹이지만 생각했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만나 보니 이놈이나 저놈이나 비슷한데……. 각하보다 나은 사내도 별로 없는데……. 그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조금만 내려놨다면 그랬으면 우리 끝이 행복했을까 하고요. 사실 각하 입장에서 저 정도야 정부가 적당했겠죠. 제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지…….”
담담한 말에 에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 손으로 망친 관계였다. 그런데 왜 네가 그런 생각을 해! 그는 그런 말 말라며 레이첼 앞에 무릎 꿇고 싶은 걸 참으며 이어지는 레이첼의 말을 경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웃으면서 말할 수 있어 다 잊었다 여겼어요. 게다가 각하께서 원체 고약하게 말하고 행동하시니 역시 잘 끝냈다 되뇔 수도 있었어요.”
“…….”
“신전에서 돌아오고 얼마간 각하와 다니면서 생각했어요. 나쁘지 않다고. 예전 생각만 하면 찜찜했지만 그래도 각하께서 변하신 모습을 보이니깐 괜찮을지도 모른다 잠깐이나마 생각했어요. 각하께서는 여전히 잘생겼고 부유하고 또 잘났으니깐 눈 딱 감으면 내 인생은 피겠다 그런 속된 마음도 품었어요.”
에단을 진실로 밀어 내려 하면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다. 다른 사내들에게 하듯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면 질긴 그라도 치를 떨며 나가떨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레이첼은 곧 끝낼 것처럼 악을 쓰고 울지언정 마지막에는 빈틈을 내줬다. 어찌 보면 약은 행동이었다. 아닌 척 그에게 희망 고문을 한 셈이니.
“그런데 아니에요.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니…… 너무 괴로워요.”
담백한 어투였지만 레이첼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미세하게나마 있던 미소는 사라졌으며 반짝이던 눈은 탁해졌다. 울음 맺힌 목소리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내 마음이 남아 있다 해도 도저히 그걸 다시 겪어 낼 자신이 없어요. 싫어요. 끔찍해요. 친우이자 은인의 약혼자를 빼앗았다 욕먹기도 싫고 정부로 들어오라 강요받는 것도 싫어요. 나도 귀족인데……. 숨어 지내는 걸 강요당하기도 싫고 아버지와 공작님의 매질도 싫어요. 너무 아프고…… 이제 싫어!”
그녀는 말을 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듯 격한 반응을 보였다. 길게 선을 그으며 내리는 눈물이 흰 피부에 미쳐 다 스며들지 못한 채 흔적을 남겼다. 금세 말라 버석거리는 흔적에 에단이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손에 이마를 묻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러니깐 제발 그런 생각도…… 말도…… 마, 응?”
“…….”
“내가…… 내가 변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때처럼 힘들지 않을 거야. 더…… 더는 힘들게…… 널 힘들게…….”
하지 않아. 말을 끝맺기 어려웠다. 빌고 있는 와중에도 레이첼이 고통스러울 걸 생각하자 자신의 지금 행위조차 혐오스럽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올라오는 토기를 참으며 에단이 레이첼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노예가 자신을 버리는 주인에게 하듯 그렇게 간절하게.
“아니. 변하는 건 없어요.”
“제발. 레이첼, 제발……. 응?”
“화도 나고 걱정도 돼서 요 며칠 하루도 빠짐없이 후작가를 찾았어요.”
“……뭐?”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도 무언가 일렁이며 반짝였다.
“……역시 아무도 얘기 안 했나 봐요.”
연회 시작 직전 도착한 탓에 급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씻고 옷을 갈아입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저택에서 보냈다. 누구라도 그에게 레이첼이 찾아왔었노라 말해 주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레이첼에 대해 일언반구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없는 와중 그가 들은 여인 이름이라고는 로잘린이었다.
“그것 봐요. 각하께서 변하면 뭐 하나요, 주변이 다 그대로인데. 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여전했어요.”
내 열등감도 그대로였고.
레이첼은 자신이 로잘린을 비롯해 소위 고귀한 신분의 고위 귀족들에게 열등감이 있음을 인정했다. 잘난 사내들만 골라 만나는 것도 귀한 것을 걸치며 돌아다니는 것 일부에도 그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못난 감정이 있었다. 아까 모나타 공녀의 말에 쉽게 얼굴을 붉힌 일도 이런 감정이 기반이리라.
“난 그런 시선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어요. 각하와 만나면 항상 억울해져요. 죄인처럼 경멸받는 거, 이제 싫어요.”
그녀가 가진 이 옹졸한 감정은 분명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웃으며 사람들 사이를 다녀도 마음 어느 구석에서는 로잘린을 비롯한 마들렌, 아이작 그리고 눈앞 에단을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자명했다. 특히 그들 옆에 있으면 더욱더 그러하겠지. 못났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싫어도 당장 고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였다.
“……난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리고 각하께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레이첼은 제 앞에 무릎 꿇은 에단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시절 울고 있던 에단을 달래듯 상냥하고 부드럽게.
에단도 똑같은 때를 떠올린 모양인지 어렴풋이 그때와 같은 얼굴을 했다. 몽롱한 검은 눈동자가 젖어 든 채 레이첼을 뚫어지게 봤다.
“나는…….”
입술을 꾹 문 채 울음을 참던 에단이 입술을 달싹였다. 염치없었지만 계속해서 빌어야 했다. 그는 이 여자를 놓치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건 사는 게 아니야. 살기 위해서라도 레이첼을 붙잡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 레이첼이 살짝 그러나 단호하게 그를 밀어 냈다.
레이첼이 문 가까이 어둡게 그림자가 진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잖아도 흰 얼굴이 어둠 속에 더욱 희게 빛났다. 한 발 떨어진 그녀가 굳어 버린 에단을 향해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2년이면 충분해. 그러니 에단…….”
“레이첼 제발…….”
“우리 이제 그만하자. 이러는 거 서로한테 너무 구질구질하잖아.”
* * *
탁―
문이 닫혔다. 다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먼저 자리를 뜬 건 에단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먼저 나간 건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에단이 그녀를 빤히 볼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에단의 무릎이 완전히 꺾였다. 동시에 시린 눈가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흐려졌다. 그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 큰 사내의 울음소리가 테라스를 감돌았다. 하지만 홀 안 시끄러운 분위기와 음악 때문에 그 소리는 멀리 나가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사내 목소리 같은데……. 설마 울고 있는 건가요?”
테라스 너머 어두운 정원에 숨어든 연인만이 사내의 변변찮은 슬픔을 훔쳐 들었으나 그들 또한 곧 신경을 거뒀다. 알지 못하는 사내에게 관심을 가지기에는 당장 그들의 사랑 놀이가 급했으며…….
“신경 꺼요. 또 어떤 변변찮은 놈이 차인 모양이지.”
“어머, 가여워라. 사내가 이렇게 울 정도면 정말 사랑했던 모양이에요.”
“사랑이라……. 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아이…… 쓸데없는 말을. 이리 와 봐요.”
이런 연회에서 헤어지는 연인들은 본래 한둘이 아니었으니.
* * *
테라스를 벗어난 레이첼은 아무렇지 않게 연회를 즐겼다. 그녀를 찾고 있던 아제프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줬으며 여러 사내와 춤을 췄다.
연한 하늘색 모슬린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한 마리 팔랑대는 나비 같았다. 빛 아래 연한 금발이 거의 은빛으로 보일 때면 여기저기 찬탄이 새어 나왔다.
누구보다 연회를 즐기는 모습이었지만 아제프는 레이첼이 걱정스러웠다. 들고 있는 저 잔만 도대체 몇 번째인가. 진한 포도주는 향기로웠지만 그만큼 독했다.
“취했습니다. 잠깐 앉아서 쉬도록 해요.”
“괜찮으니 놔 줘요. 한 잔 더…… 한 잔 더 부탁해요.”
“이리 오십시오.”
“아…… 괜찮다니까요!”
붉게 물든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취기가 역력했다. 결국 보다 못한 아제프는 레이첼을 홀 밖 정원으로 이끌었다. 몇몇이 그와 레이첼을 주시하며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홀을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싫다 거부하던 레이첼은 막상 정원에 나오자 앞장서 걷더니 레몬 나무 앞 벤치에 털썩 앉았다.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기에 아제프는 그녀가 자리를 잡기 무섭게 겉옷을 벗어 어깨에 둘러 줬다.
온기 가득한 옷은 따뜻했고 어딘가 좋은 향이 났다. 레이첼은 아제프의 겉옷에 얼굴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으응…… 경도 이런 걸 알아요? 어디서 배워 오셨대……. 이런 거랑은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아제프는 대꾸 없이 옷을 제대로 여며 줬다. 레이첼에게는 제법 큰 품의 옷이었기에 단추를 잠그고도 여유가 있었다. 레이첼이 깔깔 웃으며 제 옆자리를 손으로 쳤다.
“앉으세요. 계속 서 있느라 다리 아플 텐데.”
“……괜찮습니다.”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볼까 무서워요?”
“……명예에 누가 될 겁니다.”
“어차피 같이 나온 순간 끝인걸요. 벌써 뒤에서 다들 수군거릴 거예요, 둘이 무슨 사이냐고. 흐음…… 그러고 보니 경의 노림수인가? 보통 이런 연회에서 취한 여자를 데리고 나오면…….”
“아닙니다!”
“깜짝이야! 알았어요, 알았어. 농담이에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네.”
레이첼이 과장되게 놀란 척하며 웃다 다리를 꼰 채 손으로 턱을 받쳤다. 살짝 붉은 얼굴색이 위로 크게 치켜뜬 눈과 함께 요염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가 아제프와 눈을 마주하며 긴 속눈썹을 팔랑였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예?”
“경이 보기에도 내가 예뻐요? 안 보고는 못 배길 만큼?”
벌컥 들어온 질문에 아제프는 당황했다. 물론 아름다웠다. 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동의하고 싶음에도 어쩐지 마음이 부끄러워 감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제프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아제프가 아무 말 없이 입만 뻐금거리자 레이첼이 자연스레 쏟아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자신을 스스로 과장되게 자랑했다.
“예쁘겠지! 나 알고 있어요, 내가 제법 예쁘다는 거. 솔직하게 말해 봐요. 아제프 경도 나한테 반했죠? 내가 눈부시게 예뻐서 옆에 계속 얼쩡거리는 거죠?”
장난이었겠지만 아제프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민망할 수 있는 말이었건만 레이첼이 말하자 진실로 느껴졌다.
꼭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계속 얼쩡거린다는 말에 아제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제프는 쿵쿵 뛰는 제 심장 소리를 듣다 차마 레이첼과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취기 오른 레이첼은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그녀가 일어서 비틀거리더니 아제프에게 얼굴을 훅 가져다 댔다. 진한 포도주 향이 달콤한 체향과 섞여 그를 자극했다.
“경도 예뻐요.”
“…….”
“이 눈도 예쁘고 코도 그렇고 입술도……. 특히 머리카락 색이 부러워요. 이런 머리카락이면 머리 장식은 필요 없을 거야. 진주 핀 하나만 꽂아도 빛날걸. 어때요? 언제 한번 해 볼래요?”
아제프는 자신의 머리카락 색이 좋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붉은색은 신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색 중 하나였고 자신의 죄악을 닮은 색이라 다른 색으로 물들일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제 머리색이 그대로라 다행이라 여겼다. 가는 손가락이 장밋빛 머리카락 끝을 살짝 잡았다 사라질 때 그는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말씀하십시오.”
“경은 집안도 좋고 리이트가 유일한 아드님이신데 왜 성기사가 됐어요? 이런 말 좀 불경하지만…… 사실 성기사는 장남 이외 아들이나 물려받을 작위 없는 이들이 많이 가는 자리잖아요.”
다시 앉은 레이첼은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일순 불편할 수 있었지만 아제프는 레이첼이 제게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물음을 반겼다. 그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버지께서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은 길이기도 하고요.”
“옳은 길? 그게 왜 옳은 길이에요?”
아제프는 잠깐 주저했다. 왜 옳은 길이냐…….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잠깐 머물렀다.
“……제 어머니께서는 유력한 성녀 후보셨습니다. 그 대에 누구보다 깊은 자질을 가지고 계셨지요.”
“성녀 후보……?”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성기사였던 아버지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났습니다. 두 분께서는 신전에 적을 두셨지만 성스러운 맹세를 어기신 거지요.”
“어? 그분은…….”
정신이 번쩍하며 취기가 살짝 가셨다. 아제프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레이첼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금단의 사랑을 한 성녀 후보와 성기사. 철모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사랑으로 손꼽히는 그들의 사랑은 20여 년 전 당시만 해도 큰 파장을 부른 죄악이었다.
‘설마하니 그 성기사가 리이트 후작이라고는…….’
성녀 후보는 아그네스라는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성기사에 대한 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소문의 초점이 성녀 후보이자 여인이었던 아그네스에게 쏠린 탓도 있었고 그녀가 요절한 후 성기사도 따라 죽었다는 비극적인 소문만 무성히 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성기사는 살아 있었고 아들도 건재해 코앞에 있다니……. 레이첼은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당시 차남이셨던 아버지께서는 가문에서 내쫓기셨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전 아직도 리이트라는 성을 쓸 수 없었을 겁니다. 밖에서는 저 때문에 어머니께서 받아들여졌다고 말하는 모양이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완고하신 분이라 제 존재로 부모님을 받아들이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문이 끊기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으셨던 거지요.”
“…….”
“물론 제 부모님께 가문의 성 따위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두 분께 가장 큰 문제는 저였습니다. 도저히 속죄할 수 없는 죄악의 증거였으니까요.”
스스로를 죄악이라 칭하는 그의 표정은 무감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레이첼은 괜히 말을 꺼낸 제 입을 때리고 싶었지만 잠자코 듣는 것 외에 그녀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제가 자랄수록 어머니께서는 약해지셨습니다. 나날이 마르셨고 아버지께서는 그걸 신벌이라 하셨습니다. 고귀한 이를 타락시킨 벌을 어머니 홀로 받는 거라고.”
“…….”
“저 또한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성녀가 되셨겠지요. 속된 세상에 속하지 않고 누구보다 여신께 사랑받는 이로 명예롭게 사셨을 겁니다.”
“…….”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는 제가 신전으로 가 여신께 삶을 바쳐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속죄의 길이라고요. 그래서 쭉 신전에 머물렀습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만…….”
남아 있던 취기도 점차 가셨다. 차가운 바람이 레이첼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냥 들었어도 안타깝고 뭐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제프의 파문을 자초한 사람이었다.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미안하다 몇 마디 던지고 말 일이 아니었는데……. 내심 그는 리이트가의 후계이니 성기사 작위쯤이야 없어도 괜찮을 거라 여겼던 자신의 이기심에 역겨움이 몰려왔다.
“어…… 경…… 파문…… 그러니깐…….”
“예, 파문당했지요.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다시 성기사가 되는 일은 어려울 겁니다. 한번 파문당한 기사가 돌아간 사례는 드무니까요.”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이 레이첼을 강타했다. 레이첼은 죄스러움에 차라리 바스러져 사라지고 싶었다. 간신히 입을 뗀 그녀가 무거운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미안해요. 나만…… 나만 아니었으면 그런 일 겪지 않아도……. 정말 미안해요.”
“그건 당연히 행해야 했던 일입니다.”
“경으로서는 차라리 제가 성녀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알다시피 난 성녀가 아니에요. 경께서 뭘 보고 그렇게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그 자리와는 아예 먼 사람이라…… 미안해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요.”
레이첼의 풀 죽은 목소리에 아제프가 놀란 눈을 했다. 이런 반응을 보려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는 울먹이는 레이첼에게 다가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런 말 마십시오. 그대가 성녀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모든 건 저 자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파문당한 일도 결국 여신의 뜻입니다. 제가 올바른 신도였다면 여신께서도 절 그 자리에 두셨겠지요.”
“난 경만큼 신앙심 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정말요! 그런데 내가…… 아니, 그 개새끼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제프는 잠시 고민하다 레이첼의 얼굴을 조심스레 잡았다. 엄지손가락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지우고 지나갔다.
‘왜 울고 계십니까.’
그때도 지금도 그녀가 울지 않았으면 했다. 눈부시게 웃어만 주고 기뻐하기만 했으면…….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레이첼을 봤을 때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이 여인의 눈물은 너무도 아팠다. 스스로 등을 때리고 자해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제프는 레이첼이 웃어 주기만 한다면 뭐든 내버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여신을 저버렸다는 죄책감과 그로 인한 불면증도 상관없었다. 파문당했다는 충격도 레이첼의 눈물만큼은 아니었다. 신실한 성기사, 아제프 리이트의 마음속 여신은 어느새 바뀌었다.
아제프는 언젠가부터 밤새 앓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자리는 항상 더러운 욕망으로 축축이 적셔져 있었다. 처음은 침구를 태우기라도 했지 나중에는 그러지도 못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이 그러했으니.
최근 그는 꿈에서 더러운 죄악을 채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음까지 했다. 지저분한 욕정에 그는 침대 위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싶었다. 하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손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는 신전에서 벗어나 일반인으로 완전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신앙이 이것밖에 되지 않나 괴로웠지만 돌아가면 영영 볼 수 없지 않은가.
성녀 자리를 원치 않는 여인이 성녀이기를 원했던 것도 어쩌면 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더럽고 추악한 욕망 하나로 싫다 하는 이를 강제로 시야 안에 두려 했는데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큰 죄악이 그를 집어삼켰다.
“속죄는 이미 글렀습니다. 전 더는 신전에 몸담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신전에 적을 두는 건 그 자체가 여신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아, 이 또한 거짓이니. 여신께서는 자비로워 끝내 그가 속죄한다면 언젠가는 받아 주실 분이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여신이시여, 저는 살아생전 이 죄악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나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말도 안 돼요! 억울하지도 않아요? 다시 방법을 찾으면…….”
레이첼이 소리를 높이며 잡힌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제프는 저를 위해 오롯이 저만을 향한 눈물을 바라보다 손에 힘을 줘 레이첼의 얼굴을 고정했다.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 마십시오.”
여인의 입술을 사내가 순식간에 삼켰다.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온몸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아제프의 입술은 뜨거웠다. 레이첼의 자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쥔 채 아주 작은 틈을 남긴 아제프가 일그러진 얼굴로 애끓게 속삭였다.
“레이첼, 내게는 이미 그대가 여신보다 깊어졌습니다.”
* * *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레이첼은 관목이 울창한 황궁 정원 어딘가에 우뚝 섰다. 숨이 차 더는 뛸 수가 없었다.
사내들의 신체 접촉이야 기겁할 정도로 드문 일은 아니었다. 둘만 있으면 아예 대놓고 덤벼드는 놈들도 있었기에 아제프의 입맞춤 정도야 뺨 한 대 치고 넘길 수도 있었다.
‘……따라오지 마세요.’
그러나 어쩐지 그의 입맞춤은 넘기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사내에게 입맞춤을 받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난 정말 이 얼굴로 사내나 꾀는 계집인가. 이유 모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별거 아닌 일인데. 그도 나쁜 마음을 품고 그런 것은 아닌데.
레이첼이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을 때였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들린 인기척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섰다.
“안녕하십니까, 애블랑 영애.”
“누구…….”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잘되었습니다. 궁이라 골치가 좀 아프긴 하나 마침 마차도 준비돼 있고…….”
레이첼이 미처 반문하기도 전이었다. 사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짝―
기이한 느낌에 레이첼이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바로 뒤 관목에서 손이 튀어나오더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향의 손수건이 레이첼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읍!”
외마디의 비명도 없었다. 떨어지는 사내의 겉옷과 함께 레이첼의 몸이 축 늘어졌다.
“빨리 가자.”
어두운 밤 관목 사이로 몇몇 그림자가 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곧 레이첼은 황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