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배신과 믿음(3권) (8/12)

7장. 배신과 믿음

에단과 아이작은 레이첼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존재를 알려 왔다.

‘……하는 짓들이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레이첼은 야외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야생 개망초 꽃다발과 나무 바구니를 노려봤다. 수수하면서도 양껏 포장된 개망초는 오늘 꺾은 듯 싱싱했고 바구니 안에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바구니와 꽃다발은 각각 에단과 아이작이 보낸 것이었다. 레이첼은 한숨을 푹 쉬며 개망초 꽃다발에 꽂힌 편지를 꺼내 열었다.

「화해를 청합니다.」

향긋한 꽃 내음과 함께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레이첼은 아이작의 콧날만큼이나 유려한 글씨를 잠시 바라봤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내용. 꽃말에 맞춰 용서와 화해를 청해 오는 아이작의 사과는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됐지만 아이작에 대한 감정이 그날 이후 완전히 식어 버렸기 때문일까, 아이작의 편지와 선물은 그녀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편지를 탁자 구석에 아무렇게나 올린 레이첼이 이번에는 바구니를 열었다. 아이작이 보낸 꽃다발과 달리 에단이 보낸 바구니에는 쪽지나 편지 따위 없었다. 레이첼은 입을 삐죽이며 내용물만 그득한 바구니 안을 살피다 붉은 열매가 군데군데 박힌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굴 살찌우려 작정했나. 나중에 드레스 못 입게 되면 어쩌려고 이런담.”

혀가 아릴 만큼 달달한 맛에 기분이 느슨해졌다. 레이첼은 괜스레 트집을 잡으며 에단을 욕하다 이번에는 아몬드 쿠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침에 먹은 성수가 다른 날보다 쓴 탓에 쿠키 열 개는 너끈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여기 계십니까?”

“응?”

그렇게 한자리에서 몇 개의 쿠키를 삼켰을까. 오독거리는 소리를 즐기던 차 붉은 머리의 기사가 레이첼 앞에 나타났다.

“또 이런 음식들을……. 이런 것들은 몸과 정신을 해합니다.”

바구니와 레이첼 입가의 쿠키 부스러기를 본 아제프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첼은 당장에라도 바구니를 빼앗을 듯 손을 뻗는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내 거예요. 손대지 마세요.”

“지나치게 향락을 추구하는 음식 아닙니까. 신앙이 망가지십니다. 이리 주십시오.”

며칠 잠잠하니 보이지 않았던 그는 다시 레이첼의 곁을 머물며 전보다 더 심하게 그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레이첼은 에단과 아이작에게서 벗어나서도 영 귀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과자 하나 가지고 무슨 신앙을 운운…….”

“먹을 것을 탐하지 말라. 겸손하고 소박한 식사야말로 여신께서…….”

“또 잔소리…… 그놈의 잔소리…….”

레이첼이 고개를 저으며 반항했으나 아제프는 강경했다. 지겹지도 않은지 매일 외는 구절 중 일부를 읊은 그는 결국 레이첼의 품에서 바구니를 앗아 갔다. 아직 못 먹어 본 종류가 많은데……. 레이첼은 제게서 기쁨을 앗아 간 아제프를 원망스레 노려보다 가여운 얼굴로 바구니를 응시했다.

“그럼 하, 하나만 더…….”

“안 됩니다.”

“끝에 초코 쿠키 하나만…… 그거 하나만 주면 그만 먹을게요. 네? 하나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나태해지셨는지 아십니까?”

레이첼이 아양까지 부리며 매달렸지만 아제프는 단호했다. 매정하게 레이첼을 떼어 낸 그는 레이첼의 몸이 전보다 무거워졌음을 지적하기 위해 그녀를 훑었다.

“움직이지는 않고 계속 향락을 추구하시니 몸이…….”

하지만 레이첼의 허리는 여전히 드레스에 맞지 않게 가늘었으며 팔다리는 여전히 야위어 있었다. 그나마 살이 쪘다고 한다면 저기……. 아제프는 저도 모르게 레이첼의 가는 목 아래 부푼 가슴을 빤히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제 몸이 뭐요?”

“…….”

“어머, 아제프 경, 귀는 왜 빨개지셨어요?”

그의 시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꿰뚫은 레이첼이 팔짱을 꼈다. 덕분에 더욱 도드라지게 된 가슴이 둥근 모양으로 부각됐다. 이제 귀를 넘어 온 얼굴을 붉히게 된 아제프는 더듬거리다 레이첼에게서 빼앗은 바구니를 불쑥 내밀었다.

“……드십시오.”

“흐음…… 고마워요, 경.”

“오늘만입니다.”

혀를 날름 내민 레이첼이 진한 갈색 쿠키를 꺼내 들더니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아제프는 그런 레이첼을 보며 한숨을 푹 쉬다 레이첼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탁자 끝에 물 잔이 있건만 왜 제 수통을 주는지. 레이첼은 조금 의아했으나 목이 메었기에 낚아채듯 수통을 들고 갔다. 우물에서 막 떠 온 듯 물은 시원하고 청량했다. 양껏 목을 축인 레이첼이 수통을 내리고 입술가를 핥았다. 그리고 어쩐지 멍하니 있는 아제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경이 전보다는 신사다워졌다는 걸.”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이제 좀 사람 같아서요.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아제프 경 첫인상은 정말 별로였던 거 알아요? 아니, 최악이었지.”

그와의 첫 만남을 상기한 레이첼이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 아제프를 관찰하듯 봤다.

“매번 이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아. 얼굴도 잘생겼고 그 꼬장꼬장한 성격만 아니었으면 내가 한 번쯤은 경하고도 놀아 줄 텐데!”

“…….”

“영광으로 생각해요. 나 이래 봬도 인기도 제법 많은 데다 나만큼 예쁜 숙녀 어디 가서 보기 힘들어요. 물론 경께는 여신님이 제일이겠지만.”

자색 눈이 오롯이 그에게만 집중됐다. 제 얼굴 여기저기를 살피는 눈에 아제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아비를 만난 후 기도를 올리고 진정시킨 마음이었다. 번뇌에서 조금은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제자리임에 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을 반겼다. 그리고 그런 제 감상에 다시금 절망했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심장 한편이 뻐근해지며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금이 그어진 콧잔등에 레이첼이 무안한 얼굴을 하더니 급히 사과했다.

“아…… 농담이에요, 농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경이 신실한 성기사인 걸 잠시 잊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수그러진 고개와 함께 머물던 시선이 사라졌다. 아제프는 아니라고 소리치며 당장에라도 작은 얼굴을 움켜쥐고픈 욕망을 눌렀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나는……. 여신이시여.

그의 눈치를 살피던 레이첼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도망쳐 쭈그리고 앉았다. 갖가지 야생화들이 어우러져 핀 들판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날씨가 서늘해지며 꽃들은 마지막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제프는 스러져 바람에 날리는 꽃잎 사이 빛나는 머리칼을, 그 아래 말간 얼굴과 동그란 눈, 도톰한 붉은 입술을 찬찬히 살폈다.

사랑스럽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제프는 제 신앙의 어느 한구석이, 아니 전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앞에 저 여자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제 눈은 분명 여신만을 위한 것일 텐데. 이 두 눈을 뽑아야 하나.

아제프는 더듬더듬 제 눈가를 만졌다. 왼뺨 위에 웬 축축한 것이 손가락을 적셨다. 그의 얼굴을 힐끔 본 레이첼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던 순간…….

“레이첼!!!”

멀지 않은 곳에서 사내의 고함이 들리더니 날카로운 무언가가 레이첼의 뒤 수풀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 * *

에단은 아이작처럼 편지를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레이첼의 곁을 맴도는 중이었다. 몰래.

‘젠장.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미움받을까 두려워 나설 수는 없었지만 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잠행을 펼치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 기사 수업을 받으면서도 이리 열심히 해 본 적이 없는 기술이었다. 그가 누군가. 명문 마일런가의 주인! 마일런 후작이었다.

‘머저리.’

에단은 자신이 몰래 숨어 꾸물대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모지리라 자책하면서도 숨어 있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레이첼에게 크게 차이고 며칠 우울히 침대에만 있다 참지 못하고 신전에 숨어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진중했다. 그녀가 제게 한 말을 꼼꼼히 되짚으며 나서지는 못해도 멀리서 바라만 보자 다짐했더랬다.

‘저…… 저 계집, 아니지, 쟨 잘못이 없지. 문제라면 저 새끼! 저 성기사랍시고 나대는 저 개새끼가 문제지!’

하지만 며칠 그녀와 꼭 붙어 지내는 아제프를 보자 훅 올라오는 질투심과 분을 막을 수 없었다. 성기사를 가장한 저 개새끼는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레이첼에게 치근덕거렸다.

지금도 보라지. 자신이 준 간식을 빼앗아 가질 않나 제 놈의 체취가 묻었을 수통을 건네질 않나. 게다가 파 버리고 싶은 눈깔로 그녀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저가 불편해 웬 잡풀들이 자란 들판으로 도망을 간 참인데! 저 여린 피부에 벌레가 앉기라도 하면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망할 새끼가! 그 눈 못 치워!’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흠씬 두들기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레이첼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간식은 받아 줬지만 분명 자신이 나타나면 인상을 왈칵 찌푸리거나 눈물을 흘릴 게 분명했다. 나서지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하다니. 제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했다.

‘그래, 시간도 얼마 없는데 저 새끼한테 집중하지 말고…….’

에단은 끙끙거리며 제 머리를 쥐어뜯다 벌건 눈을 한 채 레이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전 안에 있는 그녀는 볼 수 없었기에 하루 몇 시간 그녀가 밖에 있을 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쁘네.’

막상 아제프에게서 관심을 끊고 레이첼을 바라보자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에단은 언제쯤이면 다시 저 앞에 나설 수 있을까, 그럴 용기를 낼 수는 있을까 생각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 그녀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 제게 과한 걸 요구 마세요. 어차피 각하께는 영영 드릴 수 없는 거니까요.’

레이첼이 울면서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에단은 알았다. 자신이 과거 그녀에게서 얼마나 과분한 것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과분한 것을 자신이 어떻게 패대기쳤는지도.

‘뭐라고 해야…….’

그 마음의 무게를 알게 되자 도통 레이첼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파렴치하고 부끄러워서.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녀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내 것인데. 레이첼이 가장 싫어할 마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를 향한 이 마음과 소유욕만은 포기가 안 됐다. 그걸 포기할 바에야 혀를 깨물고 죽고 말지.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는 상황. 해결 방안 없는 위기에 봉착한 에단이 착잡한 얼굴로 레이첼을 지그시 바라봤다.

레이첼은 그의 존재조차 모른 채 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날리는 꽃잎을 잡아 보려고도 하다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기도 했다.

‘에단, 이거 봐 봐. 어때? 나 예쁘지?’

언젠가는 제 앞에서 저런 얼굴로 꽃을 꺾어 선물하던 이였는데. 손수 만든 화관을 씌워 주고 환하게 웃어 주던 이였는데. 에단은 괜스레 감상에 잠겨 울컥했다. 까만 동공에 울렁이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찰나,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잡혔다. 멀리였지만 소름 돋는 차가운 빛. 에단은 재빨리 눈가를 닦고 레이첼 뒤 수풀을 관찰했다.

들짐승이었다. 길게 난 수풀 사이 금방이라도 도약할 것만 같은 그것은 거대한 엄니를 가지고 있었다.

‘미친!’

그가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짐승이 땅을 박찼다. 에단이 고함치며 몸을 날렸다.

“레이첼!!!”

* * *

“으음…….”

오른쪽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레이첼은 가까스로 눈을 뜨며 욱신거리는 눈과 귀 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일어나셨어요!”

그녀가 눈을 뜨기 무섭게 아이가 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어슴푸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야! 괜찮아?”

“괜찮으십니까?”

눈을 몇 번 끔뻑거리자 흐릿했던 얼굴들이 선명해졌다. 레이첼은 저를 내려다보는 여러 쌍의 눈에 몸을 일으키려다 핑 도는 시야에 다시 몸을 뉘었다.

“아으…… 이게 무슨 일…….”

“레이첼 님! 괜찮으세요? 피를 막 흘리셨…….”

그녀 곁에 바짝 선 지크가 레이첼을 향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무어라 말하려다 아제프에게 제지당했다. 아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무시무시한 아제프의 표정에 겁을 먹고 물러섰다.

‘피?’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언뜻 무언가 기억났다. 짐승의 거친 숨소리와 울음. 그리고 살기 가득한 눈동자.

‘레이첼!!!’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고 몸이 기울어졌던 것까지 생각났다. 하지만 그 뒤로는……. 생각해 내려 했지만 머리만 더욱 깨질 듯 아파졌다.

“나…… 어디 다쳤어요? 머리가…… 아으…….”

“……가볍게 넘어지셨습니다.”

가볍게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들어간 것 같다면 착각일까? 이렇게 아픈데 가볍게는 무슨! 레이첼은 무덤덤한 아제프의 말에 성질을 내려다 더듬더듬 아픈 제 머리를 만졌다.

‘정말 멀쩡하네.’

아픈 것에 비해 머리는 멀쩡했다. 깨끗한 피부에는 그 흔한 긁힌 상처조차 없었다. 하기야 피를 흘렸다면 붕대라도 감아 놨겠지.

‘하지만 분명히…….’

하지만 희미한 기억 속 그녀의 감각은 분명 비릿한 내음과 붉은 잔상을 기억했다. 레이첼은 이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안 보여?”

그때 누군가 볼멘소리로 그녀에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레이첼은 별달리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삐딱하니 돌렸다.

“오지 말라 했는데 여긴 또 무슨 일…… 어?”

징글징글한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기 무섭게 그녀는 핀잔주려 했다. 그러나 마주친 에단의 꼴은 빈말로도 멀쩡하지 않았다.

에단은 머리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특히 팔의 상처는 심각한 모양인지 흰 붕대 군데군데 붉은 피가 언뜻 비쳤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레이첼 그녀였지만 환자는 그녀가 아닌 에단 같았다.

‘레이첼!!!’

목소리의 주인공이 에단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들짐승이 저를 덮치는 순간 튀어나온 검은 머리의 사내. 피에 대한 기억도 그의 피였던 모양이다.

“……다쳐서 남은 거야, 다쳐서.”

그녀가 막상 저를 보자 에단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보지 않냐 꿍얼거린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친 팔을 살짝 움직이며 티 내는 꼴이 저를 봐 달라 시위하는 것임을 못 알아챌 레이첼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자신이 알 게 뭐냐며 차갑게 일갈하려 했지만 결국 입을 닫았다. 막상 다친 꼴을 보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꼴 보기 싫은 건 여전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를 구하다 다친 것이 아닌가.

‘……에단한테는 이리하지 않잖습니까. 그도 마찬가지인데 나한테만 이리 구는 건 가혹합니다.’

돌연 아이작의 말이 생각났다. 그에게 따박따박 대꾸할 때는 개소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사실로 느껴졌다. 내가 진짜 저놈을 다른 이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걸까? 아직도?

‘아냐. 누구라도 나 대신 다치면 마음이 불편할걸.’

괜스레 짜증이 솟은 레이첼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소리 나게 머리까지 올렸다. 그리고 이불 밖 저를 보고 있을 이들을 향해 휘휘 손사랫짓을 했다.

“……나 머리 아파. 조금 더 쉴래요. 다들 나가 주세요.”

* * *

“네놈은 그게 뭔지 알지?”

에단은 방에서 나오기 무섭게 아제프의 멱살을 잡았다. 벽에 쿵 하고 제법 세게 부딪혔건만 아제프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에단을 덤덤하게 마주 봤다.

“……각하께서도 보셨잖습니까. 순식간에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흔적도 없이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건 분명 여신께서 보이신 기적입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담긴 내용은 쉽사리 올릴 것이 아니었다. 설마설마하던 것을 상대에게서 듣자 에단은 이를 콱 물고 죽일 듯 아제프를 노려봤다.

“그만.”

“성소에 있는 후보분들 중에서도 몇 분이 저런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레이첼 님만큼 단기간에 저렇게 빠른 회복을 보인 분은 루치아 님뿐…….”

쾅―

“크흑!”

아제프의 팔을 앞으로 당긴 에단이 그대로 그를 벽에 내리꽂았다. 온 힘을 다한 사내의 힘에 아제프가 신음을 흘렸으나 에단은 그가 괴로워하건 말건 다시 한번 멱살을 잡아 제 앞으로 끌었다. 힘줄 돋은 손이 살벌했다.

“그만하라 했지.”

“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레이첼 님은…….”

“성녀는 이미 정해졌고 두 명의 성녀는 필요치 않아. 그건 네놈도 알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이번 대 성녀는 루치아로 이미 내정되었다. 아제프도 그 정도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그만한 신성을 받은 분이 또 나타났다면…… 그는 여신께 맹세한 이로서 그 사실을 알릴 의무가 있었다.

“너도 봤겠지만 레이첼 쟤는 성녀니 뭐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돌아다니고 춤추고 사치 부리길 좋아하는 애야. 지금은 사정이 있어 이곳에 있지만 이딴 곳에 평생 갇혀 기도나 외는 삶 따위 원하지 않는다고. 알겠어?”

“하지만…….”

“이미 성녀가 정해진 판에 자질이 있다 알려져 봤자 갇히는 것밖에 더 해? 평생 네놈들이 강요한 규율 속에서 착취당하는 것밖에 더 하냐고.”

에단의 말에 아제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탈락한 성녀 후보들. 성녀가 되지 못한 그 여인들. 몇몇은 가문으로 돌아갔지만 신전에 남은 이들의 운명은 헌신뿐이었다. 평사제로 온종일 봉사하고 성녀 대신 먼 곳으로 파견을 나가며 희생만 남은 삶. 그녀들의 인생은 신앙 그 자체였지만 명예도 안락함도 없는 말 그대로 신만을 위한 가시밭길이었다.

“밖에 있는 이들이 진정 모를 줄 아나? 네놈들이 탈락한 성녀 후보 중 만만한 이들을 어찌 다루는지. 돈을 내지 않는 후보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모를 수 있나.”

그렇기에 아제프는 에단의 말에 화를 낼 수 없었다. 본래라면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헌신하는 분들을 모욕하지 말라 화를 내야 하는데 레이첼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 생각하니 온몸의 구멍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탈락한 성녀 후보들은 점차 말라 갔다. 그녀들 중 다수는 웃음도 울음도 잊었다. 성녀일지 모른다 떠받들어지다 갑자기 모든 걸 박탈당하고 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을 노동에 시달려야 하니 당연했다.

그녀는 지금처럼 웃고 빛나야 하는데. 산 채로 말라비틀어질 레이첼을 생각하자 여신도 신앙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뇌리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레이첼의 환한 웃음뿐이었다.

“레이첼 님이 성녀가 되시면…….”

아제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레이첼이 성녀가 되면 어떨까. 내정돼 있다 스러질 루치아를 생각하면 못 할 말이었지만 아제프는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자신을 세뇌했다.

‘원래부터 난 그분을 성녀로 보지 않았나. 레이첼 님이 성녀가 되면 다 해결될 일이야.’

게다가 레이첼이 성녀가 되면 성기사로 그녀 곁에 계속 머물 수도 있었다. 아제프는 제가 지킬 레이첼을 상상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신앙이 욕망에 물들었다. 아제프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나만이 오롯이 그녀 곁에…….’

“웃기네.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증명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사제께 말씀드리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순진한 소리! 성녀 추대가 왜 몇 년이나 걸리는데. 그게 다 신전 내 알력의 결과 아닌가.”

에단은 단호히 아제프의 망상을 잘라 냈다. 레이첼이 진정한 성녀라 한들 성녀가 될 일은 없었다. 신전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잘 길들인 후보를 원할 테니.

“네놈도 대강 사정은 알 거 아냐. 네 윗분 사정. 그러니깐 아까 그 어린애를 입단속시킨 거겠지.”

에단의 말에 아제프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왜 지크의 입을 막았는가. 그녀에게 강한 자질이 있다는 걸 왜 숨겼는가. 올바른 절차라면 바로 사제에게 말하고 보고가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했었는데.

“난 네놈의 그 잘난 주교에게 돈을 내며 약조받았어. 성녀가 서면 쟤는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에단은 충격으로 굳은 아제프의 표정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털어 내듯 멱살을 놓았다. 그가 레이첼이 있는 방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며 경고하듯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입 다물어. 아니면 네놈하고 아까 그 어린애부터 죽여 없애 버릴 거야. 알았나?”

* * *

“참으로 뻔뻔하군, 백작.”

카샨은 제 앞에 앉아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는 아이작을 봤다. 어찌 보면 먼 친척이기도 한 아이작은 감히 황태자인 그의 계획을 망쳤노라 먼저 시인하면서도 여유 만만했다.

“뭐 주도는 에단 그 친구가 했습니다만 저도 관여한 건 사실이지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와 내게 그 뻔뻔한 낯짝을 들이민 이유는? 용서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질 않나.”

“레이첼 애블랑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허?”

카샨은 아이작의 어이없는 말에 느슨히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에단 마일런 그놈하고 작당을 해 멀쩡히 품고 있던 제 여자를 빼돌린 것만 해도 쳐 죽일 죄이거늘 뭐라고?

“백작, 레이첼은 내 소유야. 한 번 손에 쥐고 놀아 봤다 하여 착각하면 안 되지. 건방지지 않나.”

“소유하셨으면 이곳에 있어야지요. 빼앗긴 순간 그녀는 전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바이허 백작 부부가 죽고 웬 정신 나간 여자 밑에서 컸다더니……. 백작, 그대를 키워 준 여인이 폐하께 어떻게 내쳐졌는지 잊었나?”

카샨의 말에는 스산한 살기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예의 있는 미소를 엷게 띨 뿐 두려움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적당히 식은 찻잔을 내려놓은 채 말을 반복했다.

“전 그녀를 정식으로 제 곁에 두고 싶습니다.”

“가능할 거 같나?”

“예.”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어디 한번 해 봐. 청혼하고 곁에 두면 될 노릇 아닌가. 대단한 사랑이긴 하군. 바이허 백작이 한낱 자작가 그것도 반쪽짜리 귀족 여인을 원하다니.”

“…….”

“하지만 그 전에 그녀가 널 원한다던가? 그대가 레이첼과 교제했던 건 안다만……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이미 두 사람의 연은 끊어졌다던데.”

카샨을 만나러 온 아이작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변했다. 여전히 웃고 있는 낯짝이었지만 아름다운 색의 벽안은 어딘가 시리게 빛났다.

“……그래서 전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한 박자 느리게 나온 말에 카샨이 입매를 뒤틀었다. 도와줄 성싶은가. 아이작이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마드벨리 지역 사업 건, 모나타가와 황가가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그 사업에 가장 큰 수혜자는 바이허가였다. 지금도 잘난 바이허가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사업 건. 아이작 바이허 저자는 그걸 놓칠 리 없는 야심가였다.

“백작이 결혼한다는데 내 도움이 뭐가 필요하지?”

“아실 텐데요. 모나타가와 관계가 깨지면 지금 하는 사업에 큰 영향이 가서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것만 막아 주시면 됩니다.”

“공작에게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내가 그걸 도와줘 볼 이득이 있나?”

“이 일만 도와주신다면 레이첼과 결혼 후 한 달에 두어 번쯤은 전하께 그녀를 보내 드리지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카샨은 눈앞의 사내를 기이한 것 보듯 바라봤다. 한낱 계집에 안달이 나 중요시하는 사업의 방향까지 돌리려는 주제에 그 여자를 공유한다?

“……제정신이 아니군. 제 부인을 내 정부로 들이밀겠다?”

“신하가 아내를 바치고 무언가 받는 일이 없었던 일도 아니고 전하께도 괜찮은 제안입니다. 어차피 곧 결혼하실 거 아닙니까. 호프먼의 눈치도 있는 데다 미혼의 아가씨를 정부로 들이면 신전에서도 전하께 압박을 가할 텐데요. 부도덕하다고.”

“백작, 난 바보가 아니야. 자네가 아니더라도 레이첼의 허수아비 남편 노릇을 할 작자들은 많지. 당장 내일 죽을 노친네 하나 구해 곁에 붙이면 그녀는 평생 내 침실에 있을 텐데 내가 자네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있을까?”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뭐?”

“레이첼은 제법 영리합니다. 그렇게 하시려는 순간 그녀는 날아가 버릴 테지요. 휘둘릴 바에야 멍청한 과거를 선택할 여인입니다. 최악보다는 차악을 고르겠지요.”

얼핏 아리송한 말이었으나 카샨은 아이작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에단 마일런, 그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이작은 카샨이 제 말을 이해한 듯싶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지켜봤지만 두 사람의 유대감은 아직 단단합니다. 저라고 전하와 그녀를 공유하고 싶을까요?”

“…….”

“저로서도 어쩔 수 없어 제안하는 겁니다. 본래라면 사업을 마무리하고 천천히 그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만…… 에단 그 친구가 요즘 저돌적이라서요. 잘못하다간 영영 빼앗기겠더군요.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레이첼은 앙칼진 모습과 다르게 제법 마음이 여립니다. 덕분에 전 하루가 다르게 초조해하고 있고요.”

“초조해져 내 외사촌도 포기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라……. 신중한 백작답지 않아. 정말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나?”

“이미 결정한 일이니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 아닙니까. 정부보다야 부인이 낫지요. 법적으로도 그렇고 구속하기도 편하고요.”

카샨은 아이작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사랑한다는 이가 사랑하는 이를 다른 이의 정부로 만든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 아신다면 길길이 뛰며 다시 생각해 보라 명하시겠군.

“사랑…… 그래, 사랑한다는 이가 사랑하는 이에게 불명예를 안기나? 백작, 미리 말하지만 난 그녀가 내 정부임을 숨길 생각이 없어.”

사랑한다고 지껄이려면 적어도 내 아비만큼은 해야지. 카샨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심하고 어디 쓸모라곤 없는 그런 것 따위. 그가 보기에 아이작이나 저나 그녀에게 가지는 감정은 하나였다.

가지고 싶은 욕망. 소유욕.

아이작은 저를 향한 비웃음에 찻잔을 향하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 손가락질 받을 부인이라. 분명 그에게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레이첼을 그렇게라도 벌주고 싶었다. 내 감정을 모욕한 대가는 치러야지.

그렇게 다시 만나 달라 매달렸건만 돌아오는 건 그 눈, 머저리를 쳐 내듯 냉정한 그 눈뿐이었다. 에단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레이첼, 부인으로 맞아 주는 대신 내 아래에서 울고 다른 사내 아래에서도 울어 봐요. 그래야 지금껏 내가 그대에게 얼마나 물렀는지 얼마나 자비로웠는지 알게 될 테니까.

다른 사내와 그녀를 나눌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했지만 에단에게 돌아가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아이작은 다시 차를 들이켰다. 차 특유의 씁쓸한 맛이 온 입안에 돌았다.

“……제 마음이 언젠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불명예스러운 부인은 나중에라도 쉽게 내칠 수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말이 내포한 의미는 분명했다. 사랑이 식으면 버릴 참이다. 카샨은 아이작의 말에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을 믿지 않는 자신이 보더라도 아이작 바이허 이자는…….

“백작, 그대는 정말 구제 불능 쓰레기로군.”

* * *

황태자의 결혼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추운 겨울이 닥치기 직전 열리는 행사에 온 나라가 들떴다. 수도는 여기저기서 상경한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여관은 일반 평민들이 머무르는 곳부터 귀족들이 머무르는 곳까지 사람들로 터져 나갔다.

“호프먼의 공주가 불쌍해. 그거 보통 미친놈이 아닌데. 귀한 공주님이 견딜 수 있을까?”

“남 걱정 말고 레이첼 네 몸이나 사려. 이제 납치 안 당한다 장담할 수 있어?”

“그래도 명색이 국혼인데 당분간은 얌전하겠지. 그리고 내가 또 잡힐 거 같아?”

“응, 잡힐 거 같아. 올해만이라도 제발 조심하면 안 돼? 그놈의 파티도 그만 좀 가고. 황태자도 문제지만 그보다 레이첼 네 소문이 지금 어떤지 알아?”

“왜? 아이라도 가졌다 소문났어?”

레이첼은 카샨의 결혼식을 한 달 남기고 수도로 돌아왔다. 결혼식이 끝나고 2주 후면 새로운 성녀가 설 예정이었기에 그녀는 더 신전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끌려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날 또한 갑작스러웠다. 수도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레이첼은 한 시즌을 통째로 시골구석에서 보낸 것에 입술을 물며 짜증을 부리긴 했으나 곧 자신을 마중 나온 가족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찌 되었건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이질 않은가. 정부도 되지 않았고 몸도 성히 돌아왔겠다, 레이첼은 어미의 품에 안겨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다.

물론 수도로 돌아와 모든 것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몇 달을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레이첼에 대해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몇몇은 정말 순수한 호기심이었지만 대개는 악의를 가지고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제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모양이네.”

“헤이즐 가문에 브린디가 그러더라. 이번에 낳은 애가 날 닮아 예쁜 여식이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냐고.”

“그 미친 계집애! 그래서? 그걸 가만뒀어?”

당사자인 레이첼은 소문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성녀 후보였다 소문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꼬장꼬장한 몇몇 늙은이들이야 아들의 신부로 신전에 갇혀 있던 성녀 후보들을 원할지 몰라도 대다수는 성녀 후보라는 이름표를 가진 신부를 꺼렸다. 사교계에서 교류하고 다녀야 할 나이에 폐쇄적인 집단에 갇힌 그녀들은 친목을 다질 기회도 능력도 떨어지는 경우가 다수였기에 장차 가주와 함께 집안을 이끌어 가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니. 아파서 요양 다녀온 건데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냐 한바탕 울었지. 그랬더니 걔 약혼자까지 나서서 모함은 나쁜 짓이라 소리치던데. 덕분에 마지막에 울면서 나간 건 브린디였지. 가관이었어. 나가면서 넘어졌거든.”

“레이첼, 난 정말…… 네가 언제고 칼이라도 맞을까 봐 걱정돼.”

로즈는 레이첼의 뻔뻔함인지 강함인지 모를 것이 든 머릿속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실 납치부터 성녀 후보 생활까지 레이첼이 겪은 일은 보통 일이 아니질 않은가. 로즈는 혹여나 핏줄이 이번 일로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그보다 로즈, 어머니가 정말 아버지랑 헤어지실까?”

대다수의 사람이 큰 행사를 앞두고 활기찬 일상을 보냈지만 애블랑가 사람들의 일상은 별다른 행사가 없었던 작년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가족 내부, 정확히는 애블랑 자작 부부의 이혼 소송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번에는 정말 작정하신 거 같아. 언니가 없을 때 아버지가 몇 번 찾아왔는데 한 번을 안 보셨어.”

카샨에게서 레이첼이 도망친 후 애블랑 자작의 신세는 말 그대로 추락했다. 캐틀렛 공작은 그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하며 내쳤고 끈이 떨어진 자작은 며칠 술을 마시며 제 뜻을 어긴 여식을 욕하다 뒤늦게 이비에게 찾아갔다.

하지만 이비의 오라비이자 레이첼과 로즈의 외삼촌인 하이먼은 그의 면전에 이혼장을 던져 버렸다. 철썩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창문으로 몰래 구경하고 있던 로즈의 귀에도 날카로운 그 소리가 선명했다.

‘네, 네놈이! 천한 것들이 나를! 이 나를! 감히!!!’

애블랑 자작은 평민 주제에 귀족을 모욕했다 난리를 쳤지만 하이먼을 필두로 한 이비의 가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신분만 아니라면 이비의 가문 아우룸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에 먼 나라와 무역 또한 활발히 하고 있는 이름난 곳이었다. 애지중지한 가문의 딸이 결론을 내리고 돌아온 이상 그들은 일개 자작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억지를 부려도 통하지 않자 자작은 술에 취한 척 이비를 찾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아우룸의 벽은 높았으며 중년 사내의 흉한 울음소리는 굳건한 철문을 결코 넘지 못했다.

“설마…… 이번에도 아버지를 동정하는 건 아니지, 레이첼.”

로즈는 신이 나 그날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하다 레이첼의 얼굴에 목소리를 깔았다. 조금 전 헤이즐가 영애를 골려 줬던 이야기를 할 때와는 현저히 다르게 죄책감이 말간 얼굴에 뚜렷했다.

“……아냐, 아버지는 뭐…… 어머니께서 경고도 하셨고.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거겠지.”

“아! 답답해! 또 왜 그런 얼굴인 건데? 응?”

“알아, 아버지가 전적으로 잘못하신 거. 하지만 내가 제인 언니만 같았어도 이런 일은……악!”

로즈는 자매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어디서나 당당한 그녀의 핏줄은 어째 아비와 연관된 일에서는 항상 죄인처럼 움츠러들었다. 물론 레이첼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뻔했다. 어릴 적부터 사고뭉치라는 말 아래 애블랑 자작에게 매번 혼이 나고 매질을 당한 자매였다. 애블랑가 자매들은 모두 한 번쯤 아비의 매를 맞아 봤지만 빈도로 따지자면 제인과 로즈를 합해도 레이첼의 반을 따라가지 못했다.

“왜 때려!”

“이제 정신 좀 차려! 왜 계속 멍청하게 구냔 말이야.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자초하신 거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어머니께만은 잘했어. 뭐…… 그 개차반 같은 성격 이번에는 좀 부리셨지만 항상 어머니께는 먼저 빌고 들어오셨지.”

“…….”

“어머니께서는 당신만 생각하신다면 아버지를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 다른 사람 시선도 있을 텐데 이혼하실 이유가 없지. 하지만 어머니께서 왜 이렇듯 단호하게 구실까?”

“…….”

“다 우리를 생각하셔서야. 어머니는 우리 자매가 아버지 밑에서는 불행하겠다 판단하신 거지. 그래서 아버지께 여지를 주시지 않는 거야.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생각해 힘든 선택을 하셨어. 그런데 레이첼 네가 그런 얼굴로 내 탓이다 하면 어머니 결심이 뭐가 돼? 응?”

이비가 거론된 후에야 레이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의 이혼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녀 또한 더는 자신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말하지만 부모님 일의 모든 잘못은 아버지께 있어.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매를 세상에 있게 하셨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소유하신 건 아니잖아?”

로즈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자매가 못마땅했지만 조금 전처럼 레이첼의 등을 치는 대신 부드럽게 손을 올려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 살 많은 그녀의 언니는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헛소문에는 강했지만 이럴 때만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 * *

벌써 한 시간째였다. 레이첼은 또각또각 신경질적으로 걷다 결국 참지 못하고 뒤로 돌았다.

‘저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분수대 뒤, 회색빛 조각상과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슬쩍 보였다 사라졌다. 레이첼은 잠깐 보였다 사라진 머리카락에 주먹을 꾹 쥔 채 분수대로 다가섰다.

“뭐 하자는 거예요?”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하자 숨어 있던 사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얼굴을 보였다. 못난 행동과는 다른, 준수한 얼굴 위 검은 머리는 급히 숨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분수대의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그냥 지나가다…….”

“거짓말.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분명 들킬 때를 대비한 말도 있었는데……. 에단은 우연한 일이다 둘러대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실 들키지 않게 제대로 미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몰래 쫓아다니는 건 비루하지 않은가. 추잡한 짓은 신전에서 끝을 내야 했다.

“이렇게 혼자 다니다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이렇게 된 이상 에단은 제 속내를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붕대를 감고 있는 손을 슬쩍 내밀어 보이는 모양새에는 꿍꿍이가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냉담하다 못해 냉기가 풀풀 넘치는 얼굴이 붕대를 보자 조금은 누그러진 채 새초롬해졌다. 에단은 한기만을 뿜어내던 얼굴에 변화가 생기자 속으로 손뼉을 쳐 대며 겉으로는 더욱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다쳤으면 돌아가 몸조리나 하세요. 신경 쓰이게 쫓아다니지 말고.”

“뭐 사러 가는 거 아니야? 혼자 다니면 무거울 텐데. 하인은? 없어?”

한 시간 내내 쫓아다녔으면 레이첼이 혼자인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레이첼은 뻔히 아는 사실을 묻는 에단을 기가 막힌 듯 쳐다보다 톡 쏘듯 대꾸하며 몸을 돌렸다.

“그래서 다친 손으로 짐이라도 들어 주시려고요? 쓸데없는 걱정 말고 가세요. 구경만 나온 거예요.”

“구경만 하면 재미없잖아. 짐은 못 들어 줘도 내가 다른 건 해 줄 수 있어. 예컨대 계산…….”

에단은 레이첼을 따라가며 뭐든 좋으니 사 주겠다 말하려다 곧 제 말이 레이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 멈칫했다.

전이라면 쉬웠다. 레이첼이 좋아하는 것들이야 자신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그런 선물을 쥐여 줌으로써 그녀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잠깐일 뿐 깊게 파인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해결책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경험하지 않았나. 에단은 잠깐 고심하다 마땅한 핑계를 찾았다.

“시골구석에 오래 있었더니 이곳이 너무 어색해. 도통 길을 찾을 수가 없어.”

꾸민 것이 너무도 뻔한 말에 레이첼이 헛웃음을 삼켰다. 저런 말을 저런 목소리로 하다니. 단 한 번도 남 비위라고는 안 맞춰 본 티가 났다. 그러나 에단이 제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기에 레이첼은 모르는 척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나랑 같이 다녀. 나를 도와 길을 안내해 주면 내가 그 값은 충분히 치르지. 어때? 네게도 좋은 제안 아냐?”

‘뭐, 마침 가지고 싶었던 것도 있고…….’

레이첼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어딜 감히, 라는 말이 나올 만큼 거만하게.

비위가 상할 법도 했으나 에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허리를 숙여 그 손에 살짝 입을 맞추고 제 팔을 내밀었다. 작은 손이 오랜만에 닿자 온몸이 기쁨에 전율했다. 한껏 밝아진 목소리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일단 점심인데 어디 가서 뭐라도 먹고 시작하지. 근처에 괜찮은 곳 없나?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각하.”

레이첼은 싱글벙글 웃는 에단을 유심히 보다 그의 말을 끊었다. 에단은 제 말허리가 잘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에 얼굴을 붉혔다. 레이첼이 저런 얼굴로 집중해 그를 볼 때면…… 얼굴이 홧홧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어?”

“모르는 척 마세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시지 않았잖아요. 가지고 싶은 거 사 줄 테니 얌전히 따라오라 손목이나 잡아채실 분이…….”

자연스레 과거 일들이 반추됐다. 에단은 얼마 전 자신을, 그리고 그 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레이첼이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스스로도 변화를 느끼는데 하물며 남이라고 모를까.

“왜…… 갑자기 왜 이러세요?”

다른 이가 보기에 지금의 자신은 비루할지 몰랐다. 한낱 자작가 영애에게 대 마이런가의 주인이 뭐든 들어주겠다 개처럼 엎드린 꼴이니.

하지만 어쩌겠나. 개가 되더라도, 아니 그보다 더 낮은 존재로 멸시받는다 해도…….

‘그러니 제게 과한 걸 요구 마세요. 어차피 각하께는 영영 드릴 수 없는 거니까요.’

다시는 그런 말을 들을 자신이 없는걸.

“말 못 해.”

에단은 레이첼이 제 뜻을 쉬이 꺾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한껏 가벼워 보였지만 실은 누구보다 단호한 여자였으니깐.

물론 어떻게든 힘으로 꺾으려면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할까 고민도 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끌고 가 제 곁에 붙들어 놓으면 그만이니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싶은 건 저 고운 얼굴과 몸이 다가 아니었으니깐.

“네가 강요하지 말라 했잖아.”

“각하께서 언제는 제 말을 들으셨나요.”

“아니.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참이야.”

에단은 욕심 많은 사내였다. 그는 레이첼이 예전에 제게 준 것을 되찾고 싶었다. 예컨대 제게만 집중되던 그 환한 미소와 저만을 위하던 눈물 같은.

무엇인가를 탐하고 누리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과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에단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값을 치르리라 마음먹었다.

“더는 미움받기 싫어. 그러니깐 이제부터라도 네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을 참이야.”

* * *

잠이 오지 않았다. 레이첼은 괜스레 베개를 때렸다. 팡팡 날카로운 소리와 달리 부드러운 침구는 잠깐 옴폭 들어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레이첼은 힘껏 내리쳤음에도 꿈쩍하지 않는 베개를 노려보다 그대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에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맛있는 걸 먹이고 그녀가 눈짓하는 물건을 선뜻 사 준 것뿐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런 일이라면 전에도 종종 있었으니. 하지만 오늘 에단은 매우 이상했다.

그래, 그는 딱 주인 잃은 개 새끼처럼 굴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어떠했나. 그는 거의 매초 그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췄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그녀가 불편할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물론 어색한 티는 다 났다마는 애초 이런 쪽의 노력이란 것은 에단의 오만한 성정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단과의 관계는 깨진 후 항상 제자리를 맴돌았다. 마주치면 싸우고 소리 지르고 그러다가 보통은 그녀가 굽혀졌다, 그의 직위나 힘에. 정확히는 회피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가끔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했더랬다. 그녀가 앞뒤 재지 않고 감정을 쏟아 낼 때면 에단이 먼저 도망치곤 했으니깐.

그러나 이번 같은 경우는……. 레이첼은 에단의 변화가 불편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에단의 변화에 따른 제 행동이 영 껄끄러웠다.

‘더는 미움받기 싫어. 그러니깐 네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을 참이야.’

에단이 그 말을 했을 때 레이첼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에단이 이끄는 대로 오늘 하루를 보냈다. 겉으로만 본다면 식당을 고른 것도 물건을 택한 것도 모두 그녀였지만 실상 레이첼은 오늘 저 자신이 에단에게 끌려다녔다 확신했다.

‘이래서야 정말…….’

에단에게만 태도가 다르다 화를 내던 아이작이 떠올랐다. 레이첼은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모로 돌려 손톱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여러 경험으로 레이첼은 제 마음이 어느 정도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갑자기 변한 상대 때문에 당황해 그렇다는 것은 변명일 뿐 애초 끝까지 내치지 못한 제 마음 한구석에는 미련이라는 구질구질한 감정이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야, 그 시골 촌구석에 박혀 있느라 내가 잠깐 외로웠던 거야. 다시 전처럼 다니다 보면…….’

답을 내렸음에도 레이첼은 제 마음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왜 내가 그런 놈에게……. 이 세상에 사내가 얼마나 많은데.

에단은 레이첼의 많은 사내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잘난 건 얼굴과 지위 그리고 재산뿐인 주제에 그녀를 상처 입혔으며 첫사랑이라는 풋풋한 감정을 모조리 매몰시킨 못난 사내였으니. 레이첼은 에단을 결코 용서하지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버리고 로잘린에게 간 순간 그녀에게서 버려진 이였다.

‘다음번 오송빌 백작 부인 파티에 같이 가지 않겠어?’

오늘 헤어질 때 에단의 권유에 생각해 보겠다 답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냥 거절할 것을. 괜히 이따위 것을 사 줬다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모로 누워 있자 장신구를 한 귀가 불편했다. 레이첼은 귓불에 달린 귀걸이를 조심스레 떼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아스포델꽃 형색을 본뜬 장신구는 앙증맞은 것이, 작지만 정교한 세공에 척 봐도 값비싼 물건이었다.

‘이 꽃은 연인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뜻이 있지요.’

깐깐해 보이는 보석상은 어울리지 않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첼에게 귀걸이를 내밀었다. 에단과 저를 번갈아 보며 웃는 그 얼굴에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이 사내와 난 연인이 아니다 주장할 수도 없었다. 연인이 아닌데 이런 선물을 받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레이첼은 손바닥 위에 핀 작은 꽃을 한참 바라보다 손바닥을 접으며 보석상이 알려 줬던 꽃말을 작게 읊조렸다.

“……나는 당신의 것.”

* * *

먼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좌중은 조용했다. 긴 대리석 탁자를 두고 수십의 사제들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나이 지긋한 사제들이 대부분이니 기도를 한다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자리에 있는 대다수는 침울한 얼굴에 몇몇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를 어쩐단 말이오. 이러다가 정말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한참 만에 어느 사제가 침통히 말했다. 고개를 수그린 채 이마를 짚은 그는 여신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허튼소리! 그럴 리 없소. 대업을 고작 며칠 앞두고 있는데…… 입을 조심하시오.”

“옳소! 큰일을 치르기 전에 무슨 부정 타는 소리요.”

몇몇 사제들이 벌컥 화를 냈으나 그조차 초조함과 불안감을 담고 있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브리튼 사제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맞는 말이오. 상태가 말이 아니시오. 더 악화되신다면…….”

말이 오가며 분위기가 일렁이자 중앙 상석 가까이 앉은 이가 손을 들어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가 대각선에 앉은 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후보의 상태가 어떠하오? 솔직히 말해 보시오.”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소.”

긴 침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림과 동시에 겨우 눌렀던 불안감이 이곳저곳에서 표출됐다. 가만히 있던 이들 중 몇이 일어나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높였다.

“내 뭐라 했던가! 성수를 너무 과하게 드린다고 하질 않았나! 이럴 줄 알았지. 이제 어쩔 거요? 이러다 루치아 후보가 죽기라도 하면 대체할 인력이라도 있소?”

“지금이라도 다른 후보 중에서 구실 할 이를 찾으면 안 되겠습니까? 왜 몇몇은 제법…….”

“다른 후보들은 모두 불량품이나 다름없소. 괜찮은 이들이 있다고는 하나 기적을 보일 만큼은 아니오. 그 정도로 요즘 사람들이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습니까?”

20년 이상 제대로 된 성녀가 없었던 만큼 신전의 위상은 예전만 못했다. 사람들의 눈빛은 존경에서 의심으로 바뀌었으며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은 신보다 인간이 더 위대하다 공공연히 외쳤다. 당연히 들어오는 기부금은 날이 다르게 줄어 예전과 비교하면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대로면 우리는 파산이오! 당장 황가의 기부금에 의지하고 있는 게 얼마요? 이러다 오만한 황제가 신전마저 집어삼킬 거요!”

그리하여 신전은 다시금 올 부흥을 꿈꾸며 카샨의 결혼식 뒤에 있을 성녀 추대식에 큰 힘을 쏟고 있었다. 일자를 결혼 후로 잡은 것도 최대한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였다. 성녀는 사람들에게 내보일 가장 큰 선전물이었으므로.

보통의 성녀를 추대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적당한 이를 뽑아 내세우면 될 일이니. 하지만 부흥의 밑거름이 될 성녀는 특별해야 했다. 예컨대 초대 성녀 이사벨라같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이라든가…….

초대 성녀 이사벨라는 여신의 가호를 입어 상처 입지 않는 발로 유명했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진정으로 상처 입지 않았을까?

“자자…… 여러분 모두들 진정하시오. 루치아 후보는 기적의 성녀가 되기 충분한 인재요. 그러니 모두 기도합시다. 우리같이 신실하고 고귀한 이들이 기도하면 여신께서도…….”

“지금이 기도나 할 때요? 방안을 찾아야지요, 방안을! 손 놓고 있으면 끝이라니깐.”

“어떻게든 루치아 후보를 내세워야 합니다. 어차피 취임식 몇 시간만 제대로 움직여 기적을 보이면 끝 아닙니까. 이후로는 핑계를 대며 내보이지 않다 여신의 곁으로 떠났다 공표하면 되지요. 어차피 성녀들은 오래 못 살지 않습니까.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겁니다.”

“그것마저 힘드니 이러는 거 아니오. 아예 거동을 못 하는 상태요. 정신도 못 차리고……. 게다가 이미 푸른 반점이 생겼소.”

푸른 반점이라는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상황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방안이 없었다. 모두들 고개를 떨구다 제 발치를 바라봤다.

그들의 발아래 성소 지하에는 은밀한 비밀이 있었다. 지하에 있는 울고 있는 여신상의 눈에서 나오는 샘물. 색이 기이할 정도로 푸른 샘물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여신의 물이었다. 여신은 제 눈물로 기적을 만들어 냈다.

‘오…… 여신이시여.’

성수를 머금은 몸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정확히는 성수를 복용할 시 기이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 생겼다. 초대 성녀 이사벨라의 발 또한 칼과 불에 다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신은 자신이 선택한 딸에게만 그 기적을 허락했으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수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누가 성수를 발견했는지 누가 이런 걸 밝혀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초대 성녀의 기적과 성수가 연관 있음만은 분명했다. 밖의 사람들은 몰랐지만 신전의 금서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초대 성녀가 만들어진 성녀임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고 성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신전의 이들은 은밀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대에서도 초대 성녀 이사벨라와 같은 강대한 성녀를 만들겠다고.

물론 쉽지는 않았다. 성수는 남성에게는 아예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인간 여성만, 그것도 극히 소수만이 여신에게 선택됐다. 게다가 선택받은 이들 중 대부분은 보통 이들보다 아주 조금 더 빠른 회복력을 가지게 될 뿐 큰 기적을 보이지는 못했다.

‘유리아 후보님의 몸에 푸른 반점이…….’

‘이브 후보님께서 신벌을 받으셨습니다.’

‘여신께서 바네사 후보님께 내렸던 자비를 거두셨습니다.’

또한 성수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선택받은 이라 해도 강대한 기적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성수를 지속적으로 음용해야 했다. 하나 성수를 지속적으로 음용할 시 몸에는 어느 시점에는 꼭 푸른 반점이 나타났다. 성수의 색만큼이나 푸른 반점. 신벌을 뜻하는 그것이 찾아오면 곧이어 죽음이 뒤따랐다.

‘루치아 님께서는 10년은 거뜬하실 겁니다. 기적의 성녀가 되실 만한 재목이지요.’

다만 반점이 나타나는 시기는 사람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보통은 자질이 뛰어날수록 반점도 늦게 나타났다.

신전은 자질이 훌륭한 후보를 가지고 간혹 뛰어난 성녀를 만들어 냈다. 초대 성녀처럼 다치지 않는 성녀를 두고 사람들은 기적의 성녀라 부르며 칭송했다.

몇몇 기적의 성녀가 나오고 어느 정도 연구가 진행됐다. 신전은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부작용을 늦추는 방안을 찾아냈다.

본래의 색보다 연한 빛을 띠는 성수. 그건 제법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희석된 성수는 자질이 부족한 이들을 가려내는 데도 유용했으며 반점이 찾아오는 시기도 늦췄다. 곧 신전 내에는 후보들에게 어느 시기 얼마만큼 희석한 성수를 줘야 하는지 지침서가 생겼다.

자질 있는 몇몇은 시일이 지날수록 희석을 낮춘, 원액에 가까운 성수를 제공받았지만 그를 제외한 대다수의 후보는 신전에 들어온 지 1년 뒤면 성수를 가장한 가짜 성수를 마셨다. 자질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성수가 아깝다는 뜻이요 불필요한 죽음을 애초 방지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질없는 성녀후보들은 죽음을 피했을 뿐 다른 의미로 신전에 이용당했다. 신전의 고위 인사들은 가짜 성수를 마시는 후보들의 환속을 돈으로 나누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전 성녀가 될 수 없잖아요. 엘리샤 후보처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안 됩니다. 엘리샤 후보는 세속으로 보내라는 여신의 뜻이 있었지만 그대는 평생 여신의 종으로 지내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후보는…… 아니 이제 평사제지. 너는 다음 달 티티아로 갈 것이다. 가서 그곳에 여신의 목소리를 전해.’

‘타, 타티아는 전쟁터잖아요. 거기 가서 살아남은 사람은…….’

‘조용! 여신의 종 주제에 어디서 그런 걸 따져! 네가 진정 여신을 섬겼다면 여신께서 널 보호해 주실 거다.’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신전은 돈도 벌고 사람들의 신망도 샀다. 그러나 그러한 명예 아래에는 여러 성녀와 후보들의 눈물이 있었다. 대부분의 성녀들은 부작용으로 젊은 나이 요절했으며 후보들 중 다수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삶을 착취당했다.

“그러니 애초 적당히 해야 했는데 밀어붙여서는…….”

“이 일이 내 탓이라는 거요?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기적을 보여야 했소. 아니면 백성들이 우리를 믿겠소? 그러잖아도 신보다 인간이 우선이다 뭐다 외치는 미치광이들이 늘어 가는데. 그리고 모두 동의했잖소!”

많은 죽음이 있었지만 신전은 기적의 성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기적의 성녀는 말 그대로 신전의 얼굴이요 신망의 대상이었다. 그 존재가 있고 없고에 따라 신전의 힘의 크기가 달랐다.

이번 대 교황의 치세 아래 성녀 후보가 강대한 능력을 보이는 건 20여 년 전 성기사와 도망친 아그네스 이후로 루치아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모두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취임식 때 칼과 불 위를 걷기를.

그러나 과한 기대는 도리어 해가 됐다. 사제들은 성녀 취임식을 앞두고 루치아에게 평소보다 다섯 배 많은 양의 성수를 마시게 했다. 그녀는 초대 성녀와 같이 완전히 깨끗한 발을 가지고 기적을 행해야 했으므로.

루치아는 취임식이 얼마 남지 않은 날 갑자기 쓰러져 앓기 시작했다. 푸른 반점이 몸에 피어나고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 어디서 많이 본 부작용……. 사제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황금 거위의 배를 갈랐구나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야 합니다. 이번 성녀는 꼭 초대 성녀를 본받아 칼과 불 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야 하오. 취임식을 늦추는 건 괜찮지만 성녀가 나오지 않는 건 안 돼. 어떻게든 노력하면 여신께서도 봐주시겠지. 이대로 또 수십 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늙은 사제의 말은 애처로웠으나 사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루치아 후보는 취임식에 나가지 못할 것이며 자신들은 또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좌중이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가장 상석에 앉은 교황을 바라보며 속으로 루치아 후보를 질책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위대한 업을 이루는 것인데. 하나의 목숨으로 여신께서 세상에 받들어지실 텐데.

교황 또한 엄중한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고함치는 사제들에게 한마디 할 법했지만 그조차 상황의 심각성 때문인지 입 다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반지 가득한 손가락이 짜증스레 의자 팔걸이를 쳤다.

‘내 생에 기적의 성녀를 보고 갈 수 있을 터인가.’

회한 가득한 눈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기적의 성녀가 있고 없고에 따라 교황의 이름값이 달랐다.

모두에게 절망이 서리는 그때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이가 손을 들었다. 사제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저이는…… 시골에나 있는 양반이 이 와중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교황께 그 면박을 당하고 쫓겨났으면서 아직 이 자리에 있었습니까.”

손을 든 이는 시골에 있는 작은 신전의 사제였다. 고위 사제들의 회동에도 겨우 참석한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교를 노릴 만큼 신전 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황의 미움을 사 쫓겨나다시피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말하라.”

교황이 마땅찮은 듯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다 천천히 손을 들어 사제를 지목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황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이가 있습니다. 제 신전에 기거하는 소년이 기적을 보았지요.”

* * *

‘내가 미쳤지!’

레이첼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지러운 머리에 마차의 덜컹거림이 더해져 속이 울렁거렸다.

‘주인님께서는 안 계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찾아간 후작저건만 에단을 대신해 나온 건 나이 많은 사내였다. 부루퉁한 얼굴이 어찌나 선명한지 레이첼은 빌이라는 작자가 저를 좋아하지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며칠 안 남았는데…… 정말!”

에단과 오송빌 백작 부인의 파티에 함께 간 것이 화근이었다. 백작 부인의 파티에서 에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파트너였고 술도 좀 들어갔겠다 레이첼은 황태자의 결혼 연회에도 그와 함께 동행하기로 약조를 했다. 세속적으로 느껴졌지만, 후작인 데다 한 인물 하는 그가 파트너일 때의 후광은 보통의 파트너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에단이 없다면? 황태자의 결혼 연회는 중요한 자리인 만큼 만반을 기울여야 했고 파트너 없이 간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도대체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연회까지는 사흘 하고도 반나절이 남았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드레스를 새로 주문하지는 못하더라도 장신구나 색 등을 미리 맞출 필요가 있었다. 레이첼은 지금도 가고 있는 시간을 생각하며 에단이 도대체 어디로 갔나 머리를 쥐어짰다.

빌이라는 사내에게서 주인을 걱정하는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에단이 그에게는 무언가 언질을 주었다는 뜻이다. 자존심에 차마 에단이 어디로 갔나 묻지는 못했지만 늙은 사용인의 태도에 레이첼은 크게 분노했다.

사용인은 아는 그의 행방을 사흘 뒤 파트너인 저는 전혀 모르고 있다니. 게다가 에단이 만약 그녀가 파트너임을 집안사람들에게 알렸다면 그 늙은 사내의 태도가 그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꼭 그때 같잖아.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 몸을 흠칫 떨며 창백해질 정도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때는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레이첼이 눈에 힘을 주곤 가까스로 눈물을 막을 때였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도착을 알리듯 똑똑 문을 두드렸다. 레이첼은 눈가를 슬쩍 매만지고는 마차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든 나타나기만 하면 요절을 내야지.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 도도히 고개를 치켜든 그녀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양산을 펼칠 때였다. 작은 그림자가 레이첼을 막았다.

“어머.”

화려한 공단 드레스에 이어 붉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레이첼은 저를 가로막은 이를 밑에서부터 보다 곧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곤 눈을 크게 떴다.

“너!”

입을 벌린 채 놀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며 상대가 말갛게 눈웃음 지었다.

“오랜만이야, 레이첼.”

* * *

당황한 레이첼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 로잘린은 한 발 더 다가왔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하녀에게 물러나라 손짓을 하며 멋스럽게 내린 잔머리를 넘긴 그녀는 도망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니.”

“…….”

“떠나 있는 동안 얼마나 그립던지. 여기도 그렇고…….”

“…….”

“너도.”

누가 보면 잠깐 여행을 다녀온 듯한 말투였다. 태도가 어찌나 의연한지 사내와 야반도주를 한 미혼 영애의 귀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은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대하듯 자연스러운 로잘린의 태도에 심기가 뒤틀렸다. 내가 지금껏 어떤 일을 당했는데. 지금 그녀를 속 썩이는 에단과의 악연도 눈앞 로잘린의 도망이 시작 아니었나.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한바탕해 주고 싶었지만 친우도 아닌 지금 로잘린에게 그런 일을 벌였다간 제 삶만 피곤해질 것이 자명했다. 레이첼은 로잘린을 무시한 채 몸을 틀었다.

“감히 공녀님께 이 무슨 무례인가요! 당장 사과드리세요, 애블랑 영애!”

하지만 누군가에게 레이첼의 태도는 엄청난 무례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레이첼이 못 본 척 로잘린 일행을 지나치려 하자 뒤에 있던 하녀가 대번에 앞으로 튀어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을 붉힌 채 씩씩대는 꼴이 어찌나 대단한지. 레이첼은 하녀의 충심이 참으로 크다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됐어. 그만하렴.”

“하지만 공녀님, 감히 공녀님께……!”

“내 친우란다. 걱정 말고 물러나렴.”

“친우라니요. 공녀님의 것을 빼앗는 도둑 암고양이 같은 계집인데…….”

“리즈벳. 그만하라 했어.”

로잘린이 하녀의 말을 한 박자 늦게 끊어 냈다. 레이첼은 로잘린이 일부러 그리한 것을 알았지만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에단과의 일 이후로 주변 사람들, 특히 제 아비를 비롯해 캐틀렛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저런 식으로 동정을 사기 바빴다. 물론 대다수 공작가 사용인들은 그들의 아가씨를 가엽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 레이첼은 주제도 모른 채 얼굴 하나만을 믿고 아가씨의 약혼자를 빼앗은 악녀가 되었다.

‘지겹지도 않나.’

너무 많이 겪어서일까? 별로 우습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레이첼은 사교계에서 나도는 악소문에도 자신이 잘 견딘 이유가 혹 로잘린 덕이 아닐까 잠깐 생각하다 냉큼 손을 잡아 오는 그녀 때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레이첼, 무례를 용서해. 이 아이가 아직…….”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캐틀렛 공녀님. 그럼 이만.”

레이첼은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았다. 손을 쏙 빼 버린 그녀는 로잘린에게 대강 인사치레를 한 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로잘린은 무에 그리 미련이 남는지 뒤에 서 있던 사용인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곧 레이첼은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벽에 갇혔다.

‘아 젠장…….’

“아버지께 들었어. 아직 에단과 만난다며.”

주제도 모르고. 다시 레이첼의 손을 잡은 로잘린은 말을 하다 중간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주 작은 소리이긴 했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귀에 박히는 소리는 명확했다.

“에단이 그러더라. 널 절대 포기 못 한다고.”

독기 서린 눈빛이 레이첼의 얼굴로 날아들었지만 레이첼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레이첼의 관심을 끈 것은 로잘린의 말이었다. 에단이 그랬다니. 꼭 만난 것 같지 않은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인지 로잘린이 눈을 샐쭉 접으며 말을 이었다.

“에단과 다시 약혼을 추진 중이야. 불미스러운 일로…… 그러니깐, 서로의 잘못으로 우리 인연을 끝낼 뻔했지만 그러기엔 캐틀렛과 마일런의 연이 깊잖아. 저번 주말 내내 에단한테 용서를 빌었는데 조금은 마음이 풀린 듯도 싶고 어쩌면 그이도…….”

“공녀님! 공녀님 탓이 아니에요. 그 일의 모든 잘못은 저것이…….”

“리즈벳! 입 닥치지 못하겠어? 오 이런. 미안해, 레이첼. 내가 다시 한번 사과할게.”

로잘린과 하녀의 즉흥 연극이 또 한 번 펼쳐졌다. 레이첼은 하녀가 제게 무어라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저번 주말? 에단과 연락이 끊긴 시점이었다.

결국 레이첼은 고민하다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이 이런 것임을 알았지만 심장이 두근거려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너, 어디서 오는 길이야?”

아니나 다를까 로잘린의 얼굴이 활짝 폈다. 작게 손뼉을 친 그녀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레이첼을 마주 본 채 발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에발란스에 있다 왔어. 너도 잘 알지? 왜 있잖아, 내가 에단과 결혼하면 네가 머물기로 했던 곳.”

“…….”

“정부로 지낼 네가 머물 뻔한 그 저택에 며칠 있었는데 제법 괜찮더라. 좀 협소하긴 했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데다 근방에 사는 자작가보다도 화려하더라고. 이런 말은 그렇지만 정부한테는…… 좀 과해 보이긴 했어. 잘못하면 정부 주제에 과하게 사치한다 욕을 먹겠더라고.”

“…….”

“에단도 같이 있었는데 퍽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넓고 조용하고……. 1년에 몇 달은 머무르기 좋겠다 말하는데 표정이 풀어지더라니깐.”

레이첼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로잘린의 수는 얕았다. 자신을 약 올리고 폄훼하며 에단과 그녀의 관계를 망쳐 놓을 심산이 뻔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에단이 아니라고 한들, 아니 어쩌면 정말 로잘린의 말이 맞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로잘린도 아는 에단의 위치를 자신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며칠 후 같이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할 그녀 자신만. 피가 팍 식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꼭 과거와 같이 느껴졌다.

‘사랑해, 레이첼. 너뿐이야.’

그녀에게 사랑한다 속삭였던 에단은 그때도 비밀을 만들었다. 연인인 그녀 몰래 약혼을 추진하고 그녀를 정부로 만들려 했더랬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에단의 성미도 그렇고 마일런가의 후계자가 큰 오명을 쓴 로잘린과 약혼할 리는 없었다. 저 모든 말이 로잘린의 수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와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왜 에단과 어울렸던가. 그 난리를 치고 애써 그의 고백을 거절해 놓고 왜 그와 다시 춤을 추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짝을 맞추었던가.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져 레이첼은 이를 꾹 깨물려다 참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더는 제 감정을 드러내 보이기는 싫었다. 입 안쪽을 티 나지 않게 물자 비릿한 맛이 온통 맴돌았다.

“레이첼, 우리 사이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레이첼이 어떤 기분이든 로잘린은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픈 말을 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퍽 다정한 것이 에단과 약혼을 밝히던 그날과 꼭 같았다.

“난 너와 다시 전처럼 지내고 싶어. 에단 문제는…… 그이와 약혼은 포기 못 하지만 그래도 내 조건은 유효해. 에단과 함께해. 두 사람이 지금 당장은 사랑한다는데 내가 어쩌겠니.”

지금 당장은, 이라는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네가 끝까지 있을까? 캐틀렛 공작만큼이나 짙은 푸른 눈에는 업신여김이 가득했다. 네까짓 것이. 레이첼은 순간 참고 있던 성질머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이도 가지렴. 내 결혼식에도 꼭 와 주고. 사실 네가 몇 달만이라도 에단에게 기쁨을 준다면 난 양보할 수 있어. 그러니깐 레이첼 내 친구…….”

“로잘린.”

줄줄 기다렸다는 듯 읊어 대는 말을 레이첼이 막았다. 한껏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가 로잘린에게 말했다.

“그 입 닫아. 아니, 좀 닥쳐.”

로잘린의 얼굴이 굳어짐과 동시에 헉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 정도로 뭘……. 레이첼은 주인이나 그 밑이나 정신머리 약한 건 똑같다 생각하며 속에 있던 말을 조금의 거름 없이 뱉었다.

“미안한데 더는 못 들어 주겠어, 네 착각, 아니 망상.”

“뭐? 망상?”

“넌 네가 대단한 줄 알지? 그런데 어쩌나. 너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 알아?”

“처, 처지? 너 지금 나한테 처지라고 했니?”

“대 캐틀렛가 공녀님. 지금의 넌 나보다도 못해.”

같이 지내 온 기간이 있는 만큼 레이첼은 로잘린이 어떤 부분에 가장 분노할지 알았다. 자존심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캐틀렛 공녀님은 저보다 못하다 생각되는 이랑 비교당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짐작한 대로 로잘린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곧 잘 익은 사과처럼 진한 빛을 띠었다.

“사내와 온 세상이 알도록 도망이라니……. 네가 친 사고가 그렇게 대단한 거야, 캐틀렛 공녀의 명예를 한낱 자작 영애만큼도 못하게 낮출 만큼. 매번 너 띄워 주는 인간들 사이에 있다 보니 상황 파악이 안 돼? 사내와 대놓고 도망쳤다 돌아왔는데 네가 어떻게 예전의 캐틀렛 공녀겠어?”

상황을 파악한 사용인들이 덜덜 떨며 상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로잘린은 그들의 상전이지 레이첼의 상전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제발 그만하라는 하녀의 간곡한 눈짓에도 멈추지 않았다.

“로잘린, 예전의 정을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건데 정신 차려. 사랑의 도피는 성공했을 때나 사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거야. 그런데 이렇게 돌아왔다는 건…….”

레이첼은 피식 웃으며 뒷말을 흐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참지 못한 로잘린이 고함쳤다.

“너! 너! 내가 너보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나는 캐틀렛 공녀야!”

“누가 아니래? 맞아. 너 캐틀렛 공녀야.”

“아버지께서도 아무런 문제 없다 하셨어! 그런데 너 따위가 감히 뭐라고 내게!”

“그래, 공작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니깐 네 오명을 막아 주시겠지. 누가 감히 각하 앞에서 널 조롱하겠어? 하지만 뒤에서 어떤 말이 오갈지는 뻔하지 않니?”

“너 말고 날 조롱할 사람은 없어! 난 캐틀렛가의 하나뿐인 여식이야. 다른 이들은…….”

“그 말이 맞는다면 각하께서 왜 널 이렇게 조용히 놔둘까? 너 언제 돌아왔니? 나 이래 봬도 며칠 제법 바쁘게 돌아다녔는데 네 얘기는 하나도 없더라. 꼭 없는 사람처럼.”

고르지 않은, 거칠고 가쁜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레이첼은 제 분에 못 이겨 졸도할 것 같은 로잘린의 뒤를 보며 조금 전 그녀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조롱하듯 손뼉을 쳤다.

“마차에 공작가 문양도 없고……. 혹 각하께서 조용히 지내라 하시지는 않았어? 잠깐이라도 얌전히 공작저에 있으라 명하신 건 아니냐 이 말이야.”

붉은 얼굴은 이제 와서는 파랗게 질렸다. 레이첼은 시시각각 변하는 로잘린의 얼굴색을 잠깐 구경하다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틀었다. 드레스 끝단의 세밀한 레이스 세공이 어찌나 발랄히 달랑거리는지 햇빛 아래 물결 같았다.

“바빠서 이만 가 볼게. 난 한가한 너와 다르게 황태자 전하 결혼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하거든. 나도 오늘 봐서 반가웠어, 로잘린. 그럼 안녕.”

이번에는 누구도 레이첼을 막지 못했다. 얼어 있는 사람들 사이를 쉽게 뚫은 레이첼은 시끄러운 비명과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미소를 지으며 생기발랄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환한 웃음도 잠깐. 목 놓아 우는 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레이첼의 표정은 이미 싸늘히 굳어 있었다.

* * *

“젠장!”

에단은 욕지거리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온통 들러붙은 나뭇잎에 여기저기 찌르는 가지까지. 날씨가 적당해 다행이지 비라도 오는 궂은 날씨였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으리라.

상황이 왜 이리 꼬였는지. 캐틀렛 공작과 담판을 짓고 빠르게 수도로 돌아오려던 차 모든 일이 벌어졌다.

수도 근교 에발란스는 마차를 빠르게 달리면 수도에서 왕복 이틀이면 되는 거리였다. 말을 달린다면 더 빨랐고. 휴양지로 유명한 곳인 만큼 길도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에발란스로의 쉽고 짧은 외출이 에단 생애 가장 큰 오점이 되기 직전이었다.

돌아가는 길 사고가 났다. 시작은 마차 바퀴였다. 포장된 길을 빠르게 달리던 마차는 모난 돌에라도 부딪힌 모양인지 제대로 부서져 있었다.

‘어떡할깝쇼, 주인 나리.’

다급한 마음에 하인에게 마차 수리를 맡기고 마차를 끌던 말 한 마리에 탄 것이 오판이었다. 잘 달리던 말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몇 시간 달리지도 못한 채 꼬꾸라졌다. 허허벌판이 펼쳐진 길에서.

몇 시간 동안 죽은 말 옆에서 초조히 서성였지만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에단은 걷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산을 탔다. 그러나 중반쯤 올라선 산은 점차 가팔라지더니 산세마저 험악해졌다.

‘분명 잔뜩 화가 난 채 기다릴 텐데.’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 조잘대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에단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말이라도 하고 내려올걸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레이첼에게 로잘린 일로 잠깐 다녀온다 어떻게 얘기하겠는가.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분명……. 에단은 더는 레이첼이 우는 모습도 화내는 모습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감정을 쏟고 나면 자신에게 미움만 가질 텐데 곧 죽는다 해도 그건 싫었다.

‘계속 무시할걸! 하필 왜 지금!’

힘겹게 산을 오르다 보니 자연스레 이번 일의 원흉이 생각났다. 캐틀렛 공작. 그는 에단에게 최대한 빨리 본인을 만나러 오라 명했다.

원래 에단은 공작의 부름 따위 무시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분명 의사를 밝혔고 더는 캐틀렛과 연관될 일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캐틀렛과 틀어지면 많은 이점을 잃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마일런이 망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레이첼을 한 번 잃어 본 그로서는 마일런가를 홀랑 말아먹더라도 레이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로잘린 내 불쌍한 딸이 죄인처럼 로지오와 도망친 데에는 에단 네 공이 컸다 들었다.’

에단이 그렇게 나오자 캐틀렛 공작도 강수를 찾아냈다. 에단과 로지오 사이의 약조를 알아챈 그는 그것과 몇 건의 사업으로 에단을 압박했다.

‘네가 감히 내 딸의 불명예를 사주해? 에단 네가 다시 로잘린과 약혼하지 않는다면 난 폐하께 네 악행을 고할 수밖에 없다.’

물론 빠져나갈 구멍이야 충분했다. 사실 그로서는 로잘린과 로지오 사이에서 딱히 한 게 없었다. 로지오에게 로잘린과 도주하는 걸 모른 척하겠다 약조를 했다고는 하나 모든 일은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그의 죄라고 해 봤자 약혼녀가 도주할 것을 미리 알고도 방조했다는 것 정도일까.

‘가깝다 괜히 안심해서는.’

에단은 로잘린과 자신을 그만 이어 붙이라 경고할 겸 지금 함께 벌이고 있는 사업에서 자신이 깨끗이 물러나겠다 선언하기 위해 공작에게 갔다. 어차피 사업에 들인 원금은 몇 년간 회수하고도 남았으니 이 이상 캐틀렛과 얽혀 레이첼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찾아간 곳에는 공작과 함께 로잘린도 있었다. 그녀는 서럽게 울며 과거의 정을 언급했다. 그러나 에단은 시큰둥히 그녀를 밀어 냈다. 로잘린은 그에게 공작의 딸이요 어릴 적 친분 있는 여인일 뿐, 그 이상 그에게서 어떤 감정도 끌어내지 못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어떤 일을 벌이시더라도 전 공녀와 약혼하지 않겠습니다.’

‘뭐, 뭐라?’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전 도망가라 로잘린에게도 로지오 모나타에게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모든 건 로잘린 그리고 로지오 모나타 두 사람의 책임입니다.’

‘에단! 네가 나에게 조금만 잘해 줬더라면…… 그랬다면 나도 그러지 않았어. 그때는 너무 외로워서…… 나도……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래, 애초 이 아이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에단 너 아니냐. 약혼을 수락했으면서도 그 천한 계집에게 빠져서는……. 얼마 뒤 있을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에 로잘린과 함께해.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은 모두 잊고 너희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마.’

‘레이첼의 존재를 수긍할 테니 약혼하자 먼저 청한 건 캐틀렛과 로잘린…… 아니, 공녀입니다. 공녀, 처음 약조는 기억은 합니까? 그때 그대가 뭐라 했습니까. 이 약혼은 거래일 뿐이고 난 너 따위 까마귀 새끼한테는 관심 없으니 공작 노릇이나 잘하라고 하질 않았습니까.’

‘그건…….’

‘그런데 이제 와 내 허물이다 탓을 하면 곤란하지요. 거래로 이루어진 약혼을 먼저 깬 건 그대가 아닙니까.’

‘그럼 어떡하라고! 천한 계집애한테 빠져 있는 널 내가 사랑하기라도 해야 해? 이 내가? 캐틀렛 공녀인 내가? 난 못 해. 못 한다고!’

‘로잘린 진정 좀 하고……. 에단! 당장 사과하지……. 어디 가나!’

캐틀렛 부녀와의 만남 뒤에는 씁쓸함과 후회 그리고 자괴감만 남았다. 에단은 등을 돌리며 나오는 순간 로잘린과 자신이 다를 바 없었음을 깨달았다.

너 따위.

너 같은.

나와 비할 수 없는.

레이첼을 수식할 때면 항상 저런 단어들이 따랐다. 좋아한다 고백하고 연모한다 속삭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자신이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저보다 못하다 생각하며 레이첼이 항상 양보하고 이해하길 바랐다. 내가 널 영원히 사랑하겠다는데 그걸 이해 못 해 주나? 내가 너 같은 이를 사랑하는데……. 로잘린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그녀를 비하하는 말에 분노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그녀를 더 하찮게 여겼다. 이미 손에 들어온 이라 생각했으므로.

“벌받는 건가?”

에단은 시야를 가리는 가지를 꺾으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벌받는 거야. 나 따위 이대로 용서받지 말라 신께서 그녀를 보호하는 거야.

칼 같은 산바람이 에단의 등을 밀듯 불었다. 멀지 않은 곳 산등성이 보였다. 저길 넘어가면 마을이 있을 터였다. 거기서 어떻게든 말을 얻어 타고 가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에단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순간 쉑 하는 소리와 함께 웬 화살이 그를 막았다.

* * *

하루하고도 열댓 시간. 연회는 이제 이틀도 채 남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레이첼은 다른 파트너를 구하지 않은 자신을 멍청하다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마일런 후작쯤 되는 에단이 이리 중요한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리 없었다. 어제도 여전히 뚱한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한 후작가의 나이 많은 고용인을 생각한다면 후작저로는 한 발짝도 옮기기 싫었다. 하지만 고민 후 내린 결론은 어제와 같았다.

“각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로 오셨냐는 말도 없었다. 어기적어기적 느린 걸음으로 레이첼을 맞이한 빌은 성가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레이첼은 대놓고 자신을 괄시하는 그에게 짜증이 치밀었지만 주먹을 꾹 쥔 채 돌아섰다.

“……염치도 없지.”

그러나 중얼거리듯 뱉어진 뚜렷한 미움이 돌아선 레이첼을 붙잡았다.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해? 걱정과 불안이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이봐요.”

돌아섰던 레이첼이 반쯤 닫힌 문의 문고리를 잡자 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찼다. 문고리를 힘껏 당긴 레이첼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게 먼저 추파를 던진 것도 이번 연회 때 먼저 파트너가 되어 달라 청한 것도 그대의 주인이신 후작 각하세요. 그러니 날 사내에게 매달리는 창부 보듯 하지 말아요. 짜증 나니깐.”

직선적인 말에 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그가 문을 밀어 내듯 활짝 열었다. 빠른 속도로 열린 문에 레이첼이 부딪힐 뻔했다. 하나 늙은 사용인은 휘청거리는 레이첼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말했다.

“제 혼잣말을 들으신 모양입니다만 사실 아닙니까.”

“뭐라고요?”

“전 아가씨의 별명도 또 아가씨가 제 주인께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기가 막힌 레이첼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듯 짝다리를 하고 팔짱을 낀 빌이 레이첼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뱉었다.

“아가씨께서는 본인의 잘못은 없다 여기시겠지요? 하지만 주인님의 좋은 혼처를 아가씨께서 막은 건 사실입니다. 이 늙은이는 아가씨의 외양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늙은이가 주인께 해가 되는 이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탓하실 수는 없습니다.”

레이첼은 그제야 빌이라는 사용인이 왜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지 알았다. 캐틀렛 공작저 사용인들과 눈앞 빌이라는 이의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대표 격으로 보이는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후작가 사용인들 다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목구멍이 따가워 더는 말하기도 싫었다. 레이첼은 가까스로 네 주인이 오면 똑바로 물어보라 답한 후 고개를 조금 틀었다. 눈물이 핑 돌아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빌? 누가 왔어요?”

참아야 한다 몇 번이고 되뇔 때였다. 안쪽에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레이첼의 시야에 곧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 * *

레이첼은 반질반질한 돌이 깔린 마찻길을 따라 걸으며 로잘린의 말을 되씹었다.

‘오늘 낮에 아버지께 연락이 왔어. 에단은 에발란스에 있다 전하의 결혼식 당일쯤에야 온대. 사업상 바쁘다나.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더라.’

제집처럼 편안한 복장으로 친밀히 사용인을 부르는 모습은 흡사 후작가 안주인 같았다. 그 모습이 부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첼은 로잘린이 당연하다는 듯 후작저 안을 거니는 것을 보며 이유 모를 박탈감을 느꼈다.

‘아가씨, 날씨가 쌀쌀합니다. 그만 말씀하시고 안에 들어가 계세요. 이 여자…… 크흠! 손님은 제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리 딱딱했던 늙은 사용인이 로잘린에게는 그리 곰살맞을 수 없었다.

레이첼은 그 자리에 있으며 짙은 열패감에 휩싸였던 것을 인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나왔다는 것이다. 레이첼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잘린과 빌 두 사람을 잠깐 응시한 채 차분히 나왔다.

후작저에서 멀어질수록 걸음에는 힘이 없어졌다. 터벅거리는 발소리에 맞춰 레이첼의 고개가 한껏 내려갔다.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여기서 울어 버리면 인정하는 꼴 아닌가. 다시 에단 때문에, 그에 의해 상처받았다는 걸. 에단은 그녀에게 더는 의미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줄 눈물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시간이 없잖아. 지금이라도 떠보면…….’

연회에는 참석할 생각이었다. 내일이라도 손을 내밀면 고개를 끄덕일 몇몇이 있었다. 그들의 파트너에게는 못 할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혼자 가느니 미움받는 게 낫다 싶었다. 이기적인 못된 년이라 해도 좋았다. 죽어도 혼자 가는 건 싫었다. 로잘린의 말대로 당일에나 올 에단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너 따위 때문에 흔들릴 일은 없다는 것을.

계절이 계절인 만큼 몇 달 전과 다르게 해가 빨리 사라졌다. 좁은 골목 건너 붉은 노을 아래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가 일자로 서 있는 것이 작게나마 보였다. 두 대……. 얼마 남지 않은 대여 마차에 레이첼이 발을 재게 놀렸다.

“악!”

골목은 좁은 만큼 그림자가 짙었다. 파인 홈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레이첼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오래 고여 냄새나는 빗물이 드레스 자락을 적셨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레이첼은 핑 도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일어나려 애썼다. 사람이 없는 골목이라지만 골목 너머 몇몇이 비명 지른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별거 아닌 일인데 그 시선에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비참했다.

참았던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레이첼은 바닥에 짙게 남는 자국을 보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스스로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 모를 눈물에 화가 남과 동시에 서러움이 몰려와 그녀는 애써 아파서 우는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골목을 채 빠져나오기도 전 마차 두 대는 모두 떠났다. 목적을 잃은 발걸음이 골목 어귀에서 멈췄다.

“애블랑 영애.”

레이첼이 고개 숙인 채 한참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웬 목소리와 함께 긴 그림자가 골목 안쪽으로 늘어선 레이첼 그림자를 완전히 가렸다.

고개를 들자 창백한 피부와 장미색의 화려한 머리카락이 흐릿한 시야에도 확 들어왔다. 장갑을 낀 채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울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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