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거짓 성녀
마차는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고급스러웠다. 푹신한 시트에는 부드러운 천이 덧대어져 있었고 여섯 사람도 탈 만한 넓은 공간은 말들의 격한 움직임에도 별 충격이 없었다.
“풀어 주세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레이첼은 넓은 공간이 무색하게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것도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그건 안 되겠는데. 난 황제 폐하의 명으로 성녀 후보를 모시는 중이라…… 출발할 때처럼 도망치면 내가 곤란해. 여긴 아까처럼 널 잡아 줄 시녀들이 없잖아.”
레이첼은 에단을 노려봤다. 느긋하게 등받이에 기댄 자세가 어찌나 얄미운지. 레이첼은 제 몸을 두르고 있는 밧줄이 더욱 죄어 오는 느낌에 몸을 비틀었다.
“갑자기 무슨 성녀 후보예요! 각하도 아시잖아요, 제가 성녀랑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확실히 어울리지는 않지. 하지만 신의 뜻을 한낱 인간인 내가 어찌 알겠어?”
에단은 손을 모으고 신에게 기도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공경 가득한 목소리도 그렇고 언뜻 보면 신실한 신도가 경건히 기도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완벽한 태도에 레이첼은 에단이 내막을 알고 있다 더욱 확신했다.
“거짓말 마시고요! 제가 각하와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니고 무슨 일인지 빨리 바른대로 말해요!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성녀 후보님께서 가셔야 할 곳으로 간다니깐. 그게 어디겠어, 신전이지.”
열이 잔뜩 난 레이첼과 다르게 에단은 기분이 좋았다. 레이첼의 모습이 그가 아는 평시와 같았기에.
‘잊은 모양이지. 이럴 때는 단순해서 좋아.’
사실 그는 레이첼을 만나기 전까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길 위에 그녀를 두고 온 이래 혹여나 레이첼이 더 차가워지진 않을까 자신을 더 미워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탓이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는 얼마나 심장이 뛰던가. 오랜만에 그녀를 본 순간 에단은 제 심장이 당장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할 정도였다.
“뭐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 공부나 좀 더 하라 보내는 거야. 너 신학은 항상 낙제점을 받았잖아? 이참에 다른 건 몰라도 기도문 정도는 다 외워 보지 그래.”
부드러운 대꾸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에단은 저를 노려보는 사나운 보라색 눈조차 사랑스럽다 생각하며 레이첼에게 방긋 웃어 줬다. 물론 그로서는 주체 못 할 기분에 그런 것이었지만 레이첼에게 그 웃음은 약 올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레이첼이 입을 허 벌리다 다시 울화통을 터뜨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왜 말이 안 돼. 그때 수업은 결국 통과 못 했잖아. 네게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멀리 성소로 가는 것도 아니고 수도 인근 신전으로 가는 거니깐. 거기 경치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꽤 오래전에 지어진 곳이라 위치 선정이 아주 예술이라고.”
에단은 숲으로 둘러싸인 목적지를 생각했다. 아담하지만 오래된 신전은 수도와 가까웠지만 동시에 외지고 조용했다. 게다가 작고 평화로운 만큼 사내들이라고 해 봤자 몇몇 어리고 늙은 사제뿐 레이첼이 관심을 가질 만한 젊은 성기사 따위 없었다. 에단은 그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런 눈 마. 네게 신학 수업 들려준다고 나랑 아이작 그놈이 얼마나 돈을 들였는지 알아? 기부라는 명목으로 자그마치 일만…….”
“그러니깐 그 비싼 수업 싫다고요! 싫어요! 수도 인근이라 해 봤자 신전이 있는 곳이면 시골구석일 텐데 이유도 모른 채 거기서 어떻게 버텨요? 게다가 곧 있으면 사교 시즌인데…….”
레이첼이 발을 구르며 싫다 고함을 지르자 에단은 살짝 섭섭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저를 위해 한 노력이 얼마인데. 성녀 후보로 만드느라 돈은 돈대로 나가고 황제에게 딱 한 번 청할 귀한 기회도 썼는데. 왜 그런 건 몰라주고 저리 고함만 치는 거지? 삐딱하게 올라간 눈썹만큼 그의 말도 퉁명스러워졌다.
“사교 시즌이 뭐? 어차피 당분간은 조용히 근신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신을 왜 해요! 당장에라도 돌아다녀야지!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어요. 자유롭게 노는 것도 좋지만 우선 혼인을 해야 한다는 걸요. 결혼 약속이라도 해야 이상한 놈이 안 붙지. 그러고 보니 저번에 폴 경이 꽤…….”
레이첼은 애블랑 자작의 묵인 아래 카샨에게 납치당한 후 다짐했다. 자신을 건드리지 못해 안달 난 사내들과 아비에게서 저를 지켜 줄 남편을 찾겠노라고. 물론 그녀에게 찝쩍거리는 사내들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 안 되면 외국인도 괜찮지. 아예 딴 나라로 넘어가면…….”
“외국인은 무슨! 입 닥치지 못해!”
레이첼의 말에 에단이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혼인? 폴 경? 외국인? 이 계집애가!
“네가 사고 친 거 수습해 줬으면 감사하다 해야지. 어디서 외국인 타령이야!”
“갑자기 왜 소리를 치세요! 그리고 제가 무슨 사고를 쳤다 그러세요!”
“이번 일은 다 네 탓 아니야? 정부는 싫다면서 황태자를 왜 꾀어! 감당도 못 할 인간한테 왜 헤실거리냐 말이야! 그렇게 꼬리를 흔들고 다니니깐 일이 벌어지는 거 아냐! 그런데 결혼? 하!”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에단은 피가 거꾸로 솟으며 미칠 것 같았다. 저 계집애가 결혼한다고? 저게? 누구랑? 나 말고 누구랑? 어떤 새끼랑?
“그런 적 없어요! 이번 일은 제 탓이 아니란 말이에요. 전 가만히 있다 그냥 끌려간 거라고요.”
“나한테 네 변명은 안 통해. 네가 먼저 그런 게 아니면 한번 널 버린 황태자가 왜 네게 관심을 보여?”
“내가 어떻게 알아요! 갑자기 그러는 걸. 난 정말…….”
“전하께서 뭐라도 준다 하던? 보석이나 드레스라도 쥐여 준다 한 건가? 그래서 나나 아이작한테 하던 것처럼 수치도 모르고 그렇게 굴었나? 뭐라도 하나 얻으려고?”
“…….”
“하기야 넌 예전부터 그랬지. 반짝거리는 거나 쓸데없는 천 쪼가리 하나에 웃음이나 팔고! 천박해서는!”
과하게 흥분한 그는 레이첼의 보라색 눈이 흔들리며 상처 입는 걸 보지 못했다. 레이첼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결국 맞받아치는 걸 포기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네 탓이야, 네가 먼저. 그런 말들은 항상 분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팠다.
“야! 또 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에단이 그제야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첼에게 다가온 그는 팔을 그녀에게로 뻗었다 거뒀다 반복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뒤늦게 그러면 뭐 하는가. 입에서 쏟아진 말은 모래에 쏟아진 물과 같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울지 마. 그렇게 울면 내가 꼭 개새끼 같잖아.”
“다 짜증 나! 이거 풀어요! 풀어 달라고요! 각하랑은 한시도 같이 있기 싫단 말이에요!”
“가만있어! 계속 이러면 아예 고정해 묶어 버리는 수가……. 이거 뭐야?”
버둥거리는 몸을 붙든 에단의 눈에 그제야 레이첼의 뺨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으로 일부 가려져 있던 뺨에는 희미한 자국이 반듯하게 나 있었다. 각진 모양이 손은 아니었지만 무언가에 맞은 자국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얼굴이 부은 것 같기도 하고……. 이 계집애는 왜 맨날 어디서 맞고 다니는 거야!
“어디서 그랬어? 아까 그 여자야? 아니면 혹 황태자가 네게 손찌검을 했나?”
“알 필요 없으시잖아요.”
레이첼은 에단의 손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주 보지 않는 시선과 차가운 어투. 비가 왔던 그날, 끝까지 제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모습과 같았다.
“제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각하께서 당최 뭐라고 일일이 이렇게 관심을 두시는지 모르겠어요. 신경 끄세요.”
넌 왜 내가 다가갈 때면 항상 벽을 쳐? 아이작에게는 그러지 않잖아. 그는 잘못해도 다시 받아 주면서 왜 나에게는 항상……. 조금 전 욱하고 올라온 분기와는 다른, 차갑고 서느런 부아가 피를 타고 머리를 식혔다. 레이첼에게서 떨어진 에단이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궁금해할 필요 없지.”
자신의 호의조차 매번 이런 취급이었다. 걱정도 위로도 이 계집에게는 길가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했다. 왜 알아주지 않아? 에단의 속 깊은 곳에 위악이 차올랐다. 이 계집애는 찍어 눌러야 해. 제 주제를 알게 해 줘야 해.
“듣지 않아도 뻔한 거 아닌가. 또 분수에 맞지 않게 날뛰었겠지. 뻔해.”
검은 눈이 처참히 일그러지는 흰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표정을 지운 얼굴이 잔인한 말을 뱉었다.
“왜? 아니야? 전하께서 잠자리 상대에게 모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으니 전하는 아닐 테고……. 그분의 위세를 믿고 날뛰었나? 침대 몇 번 데우고? 그래, 그러고 보니 델 후작 부인과 마찰이 있었다지? 그녀에게 맞았나 보군.”
조금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상처 입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감정에 꽤 솔직한 여자는 어떻게든 표정을 갈무리하려 했지만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글썽이는 눈물을 통제하지 못했다. 에단은 저로 인해 생기는 그 눈물에 가슴이 저릿한 걸 느끼면서도 희열에 허덕였다.
“그녀를 건드리고 용케 살아남았군. 네 주제에.”
그만해야 하는데. 조금 전처럼 울 텐데. 많이 울면 저 눈이 부을 텐데. 쟨 얼굴을 중요하게 여기니 부은 눈은 싫어할 텐데.
짧은 희열 뒤 남은 건 자괴감뿐이었다. 서서히 올라오는 불안에 에단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맞은 꼴을 보니 속상하고 아파서 달래 주려 했는데 왜 이렇게 됐나. 왜 너와 나는 항상 이런 결과를 맞이하나.
“전하께서 널 예뻐한다 한들 그분은 널 구해 주지 않아. 아무렴 아비의 정부요 어미의 핏줄인데 한낱 자작 영애인 너와 그녀가 비교될까. 널 구해 준 건…….”
하지만 입은 감정의 지배를 벗어났다. 에단은 자신을 욕하는 더러운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주절거리는 제 입을 막지 못했다.
“됐어요.”
어느 순간 딱 잘린 답이 돌아왔다. 에단은 짧은 말을 뱉는 레에첼을 본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습 못 할 사고를 친 기분이었다.
레이첼은 언제였는지, 그 짧은 순간 눈물을 삼키고 표정조차 숨겨 버렸다. 아무런 상처도 감정도 없는 눈이 잠시 그를 보다 내려갔다. 일말의 기대조차 버린,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었다.
“모두 옳은 말씀이세요. 제가 주제도 모른 채 떠들었어요. 이제 얌전히 있을 테니 조용히 가요, 각하.”
순종하는 말이 그렇게 불쾌할 수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른 말이었건만 에단은 자신이 어쩐지 저 멀리 마차 밖으로, 레이첼의 시선 밖으로 던져진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젠장!’
에단은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를 보지 않는 고개를 꺾어 눈을 맞추고 제 품에 가둬 알았다는 대꾸를 듣고 싶은 걸 겨우 내리눌렀다.
“……그래.”
삭은 목소리를 끝으로 마차 달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서로를 보지 않는 두 사람은 그 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한나절을 달려 도착한 신전은 에단의 말처럼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녹음에 둘러싸인 흰 건물은 성소의 신전처럼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고즈넉한 멋이 있었고 주변이 번잡스러운 수도 신전과 달리 조용했다.
“……내려.”
먼저 내린 에단이 발디딤대 옆에서 손을 뻗었다. 설마 이 손도 무시하지는 않겠지. 살짝 고개 든 그의 얼굴은 마차에 타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했으나 목울대는 불안한 듯 울렁였다.
오는 내내 에단은 레이첼과 화해하고 싶어 손을 꼼지락거렸다. 얼마 만에 본 건데 다 망쳐서는. 하지만 도저히 먼저 사과할 수는 없었기에 에단은 레이첼의 눈치만 살피다 그녀를 휘감고 있는 밧줄을 슬그머니 풀어 줬다.
에단의 딴에는 사과의 의미였으나 레이첼은 끝내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상대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 그 냉랭한 태도에 에단은 순간이지만 마차 바닥에 무릎 꿇고 빌까 고민했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미쳤군.’
내가 저 계집애한테 무릎을 꿇는다니. 제 머저리 같은 생각에 놀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먼저 숙이지는 않겠다 다짐했다. 비가 왔던 그날도 그렇고 왜 매번 제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일이 제 입에서 비롯되었음을 애써 외면한 그는 쓸데없이 고고한 자존심을 내세웠다.
“안 잡을 거야?”
하지만 비이성적인 사고는 당장 레이첼이 손 잡아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에단은 뚝 분질러진 자존심에 아려하면서도 레이첼에게 재차 먼저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모른 척하며 홀로 발디딤대를 짚고 사뿐 뛰어내렸다. 허탈해진 에단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해 봤자 얻을 것도 없었다.
두 번의 무시. 레이첼의 무관심에 그는 이미 전의를 잃은 패배자로 전락했다. 괜히 골이 난 에단은 이름 모를 잡초를 구둣발로 짓누르며 화풀이를 하다 그를 이상한 듯 보는 레이첼을 보고는 힘을 뺐다. 자신이 가여워 보이면 좋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잠시 하며.
해가 진 지 오래라 별빛만이 길을 밝혔다. 에단은 가만히 서 별을 보는 레이첼에게 따라오라 말하려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 앞 짧은 오솔길이 잘 정돈되지 않은 탓이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레이첼의 발목은 가는 생김새만큼이나 약했다. 에단은 그녀가 넘어져 며칠 고생하던 것을 몇 번이고 봤다. 춤이라면 좋아 어찌할 줄 모르면서 발목은 왜 그따위로 약해 빠졌는지. 드레스 아래 둥근 복숭아뼈를 떠올린 그가 얼굴을 붉히다 손을 뻗어 레이첼을 잡아끌었다.
“무슨!”
별안간 팔을 잡힌 레이첼이 성질을 드러내며 몸을 비틀었지만 에단은 쉬이 그녀를 제압했다. 그리고 제 팔에 작은 손을 올리게끔 했다.
“길이 어둡고 험해. 볼썽사납게 넘어지기 싫으면 잡아.”
“안 넘어져요. 그러니 놓아 주세요.”
레이첼이 벗어나려 할수록 에단은 그녀에게 가까이 붙었다. 결국 한참 애쓰다 지친 레이첼이 먼저 뜻을 꺾었다.
“끝까지 멋대로지.”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잖아. 그래도 명색이 성녀 후보인데 이런 길에서 에스코트도 못 받아 넘어진다면 사제들이 널 무시할 거야.”
에단은 레이첼이 툴툴거리면서도 제 팔을 잡고 걷자 달래듯 부드러이 말했다. 셔츠에 얇은 코트까지 걸친 팔이었건만 작은 손이 올려지자 간질간질한 동시에 그 부위만 홧홧했다.
“너무 감격스럽네요. 절 그렇게 생각해 주실 줄이야. 전혀 몰랐어요. 틈만 나면 절 깎아내리시기에 제 명예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죠.”
“그건!”
빠르게 내뱉어지는 비꼼에 에단이 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레이첼은 삐죽 나왔던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매번 이리 찍어 누르고 소리치는 이와는 상대하기 싫었다.
“넌 항상…….”
날 섭섭하게 하잖나. 나만 밀어 내고. 에단은 격한 마음에 그리 말하려다 삼켰다. 이래서야 아까와 똑같을 뿐이었다. 싸우고 또 틀어질 테지. 사이는 계속 악화할 테고. 그런 관계는 더는 싫었다.
‘에단, 숙녀는 말이야…….’
시원찮은 아이작 놈의 말을 따르긴 싫었지만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단은 자신이 한 번쯤 져 보기로 했다.
네 고개를 꺾는 대신 내 고개를 꺾으면 날 봐 줄까?
그는 잠시 머뭇대다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 만에 쥐꼬리만 한 소리가 웅얼웅얼 기어 나왔다.
“내가 잘, 잘못…….”
“애블랑 영애.”
에단이 얼굴까지 붉히며 나오지 않는 사죄를 뱉으려 할 때 어둠 속에서 웬 형체가 레이첼을 부르며 불쑥 튀어나왔다. 정확히는 길이 어두워 서 있던 이를 늦게 발견한 것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목소리는 두 사람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꺄아!”
레이첼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를 밟았다. 둥근 돌이 마찰에 튀며 가는 발목이 바깥쪽으로 꺾였다.
“아악!”
“야! 괜찮아?”
에단이 급히 레이첼을 잡았지만 발목은 이미 어긋난 후였다. 찌르르한 아픔에 레이첼이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단 채 에단의 부축을 받았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자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검은 눈동자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주춤거리는 상대를, 정확히는 사내를 쏘아봤다.
“죄, 죄송합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사과의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사내 또한 얼마나 당황했는지 보여 줬다.
에단은 사내의 사죄 따위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아픔에 끙끙거리는 레이첼을 거의 안아 들다시피 한 그가 사내를 노려보며 뇌까렸다.
“네놈이 왜 여기 있지?”
* * *
‘성녀 후보님을 지키겠다 이런 시골까지 오신 분을 거절할 수야 없지요.’
‘아제프 리이트는 파문당한 몸이야. 성기사가 아니라고. 당장 내보내!’
‘주교님께서 친히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아제프 경께서 삼일 밤낮 쉬지도 않고 기회를 부탁했다 하시더군요. 그래서 기회를 주시기로 하셨답니다. 여기로 오신 성녀 후보님이 진정 성녀가 되신다면 파문을 철회하시기로 말입니다.’
‘파문 철회? 말도 안 되는 소리! 받을 거 다 받아 놓고 모르는 척 마. 쟤가 여기로 온 건 내가 돈을 들여서야. 성녀는 이미…….’
‘신도님, 여신님을 향한 실신한 성의 표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성녀님은 하늘이 내리시는 것. 과정이야 어떻든 모든 것은 여신의 뜻 아래이니 한낱 인간은 기다릴 뿐이지요.’
에단은 사제의 말에 이를 갈았다.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에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힐 것 같은 분위기였건만 나이 많은 사제는 시종일관 편안한 모습으로 대꾸하다 신전을 돌봐야 한다 미꾸라지처럼 사라졌다. 에단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큰 도움 감사드립니다. 두 분께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레이첼이 성녀 후보로 확정된 다음 바람처럼 사라지길래 신경조차 쓰지 않았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에단은 레이첼이 있을 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갑자기 나타난 아제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제프는 성녀 후보 둘을 홀렸다는 소문이 무색하지 않게 아름다운 사내였다. 장밋빛 머리카락은 누구와 있어도 눈에 띄었고 옆으로 긴 회색 눈은 그 아래 콕 그려진 점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이유 모를 색기를 흘렸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여인네 같다 비웃었지만 이목구비 단정한 생김새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레이첼이 관심 가질 만한 낯짝이 그려지자 에단의 얼굴이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여기 머무르면 내내 옆에 있겠단 말이잖아! 망할 새끼가!’
레이첼을 여기에 두려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인데. 그녀가 관심 가질 만한 젊은 사내놈이 없어서 아닌가. 아제프가 호위를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레이첼에게 붙어 있을 걸 생각하니 에단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끌고, 왔던 길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머리 같은 놈!”
발걸음이 차차 사나워졌다. 작은 신전의 반을 순식간에 걸어온 에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린 레이첼의 목소리에 발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새처럼 조잘대는 레이첼의 목소리 사이 간간이 익숙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아! 아파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살살 하겠습니다.”
레이첼은 신전의 작은 정원에 있는 등받이 없는 대리석 의자에 앉아 삐끗한 발을 편안히 뻗은 채였다. 어둑해진 밤. 캄캄한 주변에 자그마한 발이 더욱 희게 빛났다.
아제프는 그 발을 보물이라도 되는 양 한쪽 무릎을 꿇고 받친 채 조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머리를 느슨히 묶은 채 검은 바지에 수수한 천 재질 상의를 입은 그는 제복을 차려입었을 때와 꽤 다른, 제법 친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정말 죄송합니다. 매번 저 때문에…….”
“뭐, 괜찮아요. 경께서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보다 좋으시겠어요. 소원하던 제 발도 마음껏 보시고. 어때요? 외간 여자 발 주무르니깐 좋아요?”
레이첼이 발랄한 목소리로 장난을 치자 아제프의 귀가 일순 붉어졌다. 그가 잠깐 손을 멈춘 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건…….”
“됐어요. 하여간 매사 진지하시기는……. 경한테는 도통 못 이기겠어요.”
레이첼이 시시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가 봐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에 얼굴이었지만 아제프는 어쩐지 다시 그녀의 발 만지기가 부끄러워졌다.
배 깊숙한 곳 이상하리만치 은밀한 감각이 몰렸다. 작은 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열이 오르고 튀어나온 복사뼈는 바라보기 힘들 만큼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꿇고 계시면 옷에 풀물이 들 텐데…….”
아제프가 계속 머뭇거리자 하늘을 바라보던 레이첼이 이상하게 여겨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제프가 떨리는 손을 감춘 채 흰 발을 다시 주물렀다.
“괘념치 마십시오. 고작 옷일 뿐입니다.”
소탈한 잿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간소한 차림새의 기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시골 신전을 배경으로 한 동화가 생각날 만큼 훈훈했다. 그러나 보기만 해도 따스한 그 광경을 당장에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이가 있었으니…….
‘……죽여 버릴까?’
에단은 다정히 붙은 두 사람을 목도한 순간 질투심에 졸도할 것 같았다.
* * *
높다란 성좌에 앉은 이는 나이 지긋한, 왜소한 노인이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의상을 갖춘 그는 자칫 우스워 보일 법도 했으나 꼿꼿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모든 걸 상쇄시켰다.
“석 달 뒤면 성녀가 나겠군. 그래, 이번 성녀가 될 분은 어떠한가?”
성좌 아래 공손히 손을 모은 주교가 노인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루치아 님은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거부 반응도 없고……. 10년은 족히 소임을 다할 것입니다.”
“다행이야. 이것으로 땅에 떨어져 있던 여신의 권위가 다시 살아날 터이니…….”
“20년도 넘게 걸렸습니다만 이제 끝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이들이 여신을 우러러보겠지요.”
“20년이라……. 참으로 길긴 했지. 아제프 경…… 아니, 이제 리이트 후작인가. 그자가 아그네스를 훔쳐 가지만 않았어도……. 쯧!”
“석 달 뒷면 20년의 부재가 우스울 겁니다. 기적이란 목마를 때 다가오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 말입니다.”
주교의 말에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으로 치장된 긴 관이 노인의 고갯짓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빛을 뽐냈다.
“그렇지.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니 오랜만에 찾아온 기적에 눈물을 보이겠지. 그래, 남은 석 달 새로이 태어날 성녀를 잘 보필하고……. 다른 후보들은 어떤가? 몇몇은 슬슬 집으로 보낼 차비를 해야 할 터인데.”
노인의 말에 주교는 남은 성녀 후보들을 헤아려 봤다. 열댓 명 남은 후보 중 만족할 만한 값을 치른 이들은 몇 없었다. 당연한 것이, 다수의 후보가 미약한 가문 출신이거나 평민이었다.
“네 명은 곧 가문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만 나머지 쓰임을 다한 이들은 신전에 남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동안 그들 앞에 들어간 금화만 헤아려도…… 괜찮은 신전 다섯은 짓겠군요.”
신전에 남는 성녀 후보들은 새로운 성녀가 태어남과 동시에 평사제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될 터였다. 그녀들은 지금까지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고 가문에서 낸 기부금이 아예 없는 이들은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게 될 예정이었다.
“주교, 값이란 말보단 마음 표시라 함이 더 맞지 않겠소?”
“예예. 마음 표시가 맞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마음이 부족한 이들은 당연히 신전에 남아 신앙을 더 갈고닦아야 할 터이고…….”
노인의 시큰둥한 말투에 주교가 허리를 연신 굽히며 그렇다 말하려다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특이한 후보가 하나 있습니다.”
노인이 사제에게 말해 보라는 듯 손가락을 쫙 폈다. 동시에 쭈글쭈글한 열 손가락 가득 여러 보석 반지가 번쩍였다.
“성소에는 없습니다만 레이첼 애블랑이라고 얼마 전 들어온 후보가 있습니다. 값…… 마음 표시가 제법 넉넉하여 새 성녀님이 탄생하면 돌려보낼까 싶은데…….”
“이 시기에 얼마 전에 들어왔다? 특이하군. 하지만 충분히 마음 표시를 했다면야 신앙심이 부족하지는 않겠지. 그 외에 뭐 다른 특이 사항은 없나?”
“없습니다.”
바로 떨어지는 답에 잠깐 흥미를 보였던 노인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식었다. 노인은 이제 귀찮다는 듯 주교를 향해 손짓하곤 성좌에 묻히듯 몸을 기댔다.
“그렇다면 됐지. 적당한 때 내보내시오. 얼마 있지도 않을 후보이니 그동안은 잘 챙기라 이르고.”
주교가 마지막으로 인사한 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몇 미터는 될 법한 문이 쿵 닫혔다.
신전의 고위 사제조차 두려워하는 주교. 그 주교들 가운데서도 강성한 권력을 차지한 케일럽 주교가 깍듯이 허리를 숙인 노인은 성녀와 함께 신전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교황이었다.
* * *
신전 생활은 레이첼의 예상 그대로였다. 지루하고 지나치게 평온했다.
“레이첼 님. 이만 기도실로 가셔야 합니다.”
신전의 대표 사제는 너그러운 듯 굴었지만 칼같은 이였다. 레이첼은 계속 게으름을 부린다면 기도 시간을 늘리겠다 허허 웃는 사제의 목소리에 이른 아침부터 세 시간 이상 기도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뭐, 그렇다 해서 그녀의 기도문 암기 실력이 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기도실에 가 무릎을 꿇고 있으면 바쁜 사제는 사라졌다. 며칠 만에 레이첼은 불편한 바닥에서 기도하는 척하며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
“눈 감고 계신 거 다 보입니다.”
“…….”
그녀에게 온종일 붙어 있는 아제프 탓이었다. 기도실 밖에서 대기하던 그는 어느 순간 기도실 안 그녀 옆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어쩜 그리 잘 알아채는지. 레이첼은 그녀처럼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혹 다른 눈이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계속 이러시면 사제님께 기도 시간을 늘려 달라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치사해요! 치사해! 난 원래 아침잠이 많단 말이에요.”
“여신의 앞에서 나태 부리는 모습은 안 됩니다. 레이첼 님께서는 신실한 성도이자 성녀 후보로서…….”
“아악! 알았어요! 기도하면 되잖아요!”
“소리도 높이지 마십시오. 항상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공손히 기도에 임하셔야 합니다.”
“하아…… 이러다 내가 제명에 못 살지.”
“뭐라 하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기도한다고…… 기도한다 말한 거예요.”
“…….”
괴로운 기도 시간이 끝나면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신전 내에만 머물며 최소한의 일정을 소화하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이첼은 사제의 잔소리를 피해 성녀 후보로서 할 도리를 하며 간간이 그녀를 찾아온 이들과 실컷 떠들었다.
“언니! 로즈!”
“레이첼!”
제인과 로즈는 레이첼을 금세 찾아왔다. 매번 투닥거리던 자매였건만 얼마나 반갑던지. 오랜만에 자매를 본 레이첼은 답지 않게 눈물을 쏟으며 제인의 품에 안겼다. 제인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레이첼을 꼭 안아 주며 다독거렸다.
“레이첼, 이번 일로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지겠다 선언하셨어. 이번에는 제대로…….”
“로즈, 그 일은 말하지 마렴.”
“뭐 어때. 레이첼도 알아야 할 거 아냐. 레이첼, 어머니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어. 글쎄, 아버지 얼굴에 이혼장을 팍 던지는데…… 오, 세상에,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라니깐. 지금까지는 싸우시더라도 항상 선이 보여서 시큰둥했는데 이번에는 작정하신 거 같더라고.”
두 사람이 가져온 소식 중 부모에 관한 건 레이첼을 놀라게 했다. 제 일이 부모의 불화로 이어지다니. 마음 한구석이 까슬해지는 느낌이었지만 레이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아비인 애블랑 자작에게 이만하면 딸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다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사도 안 하나?”
에단은 애블랑 자매보다 훨씬 자주 레이첼을 방문했다. 아예 신전 근처 집을 하나 사들인 그는 그곳을 별장으로 쓰며 거의 매일 그녀를 찾았다.
“또 오셨어요? 각하께서는 한가하셔서 좋으시겠어요.”
“돌아갈까?”
“가시더라도 그건 놓아두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레이첼은 뻔질나게 드나드는 에단을 황당해하면서도 물리지는 않았다. 그가 매번 가지고 오는 간식 바구니는 레이첼에게 새로운 신앙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슈와 달콤한 레이어 케이크. 고소한 쿠키와 설탕에 절인 상큼한 과일. 레이첼은 에단이 올 때면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에단은 그녀가 반기는 것이 제가 들고 오는 바구니뿐인 것 같아 섭섭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기에.
“식사가 그렇게 형편없나? 너 이런 거에 크게 욕심내지 않았잖아.”
“형편없다기보다는 힘들어요. 매 끼니 나오는 음식들은 별 상관 없는데 성녀 후보라고 꼭 마셔야 한다는 건…… 으웩. 말하지 마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
신전의 담백한 빵과 수프 정도야 견딜 만했다. 레이첼은 식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음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한 번 꼭 마셔야 한다는 푸른 음료는 그런 그녀도 견디기 힘들었다. 맑고 청량한 색과 다르게 맛이 얼마나 끔찍한지……. 한 모금이라도 삼키고 나면 온종일 입안에서 괴로운 맛이 났기에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단 간식이 애타게 기다려졌다.
“그렇게 괴로우면 마시지 마. 너 싫다는 건 죽어도 안 하잖아.”
“그러잖아도 사제님만 없으면 몰래 버리려 했는데…… 파수꾼이 한 분 더 계셔서요.”
레이첼이 힐끔 뒤를 보다 아제프와 눈이 마주치고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그는 뚫어져라 레이첼을 보고 있었다. 거머리 같은 놈. 에단은 끝내 이 자리에까지 동석한 그를 대놓고 노려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무시해. 사제에게 말해 두겠어. 감히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인가. 자격도 없는 게.”
“쉿! 듣겠어요, 듣겠어!”
“들으라고 한 말……읍!”
작은 손이 동그란 슈를 집어 에단의 입에 물렸다. 에단은 슈를 뱉고 무슨 짓이냐 일갈하려다 레이첼이 제게 무언가 먹여 준 게 아주 오랜만이라는 걸 깨닫고 얌전히 받아먹었다.
‘이대로면 다시 예전처럼…….’
큰 슈를 다 먹은 그는 레이첼과의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 먹여 주는 걸 무척 좋아했다. 이처럼 자잘한 간식거리는 물론이요 식사 때도 자주 그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 줬다.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에단은 홀린 듯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얇은 손가락 끝을 살짝 핥았다.
“무슨 짓이에요!”
레이첼이 기겁하며 손을 뺐다. 드레스에 손을 벅벅 문대는 것이 싫다는 티가 확연했다. 하지만 조금 전 먹은 슈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단맛에 에단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몽롱한 눈을 한 채 그가 시답지 않은 변명을 했다.
“크림이 손에 묻었길래……. 아깝잖나.”
* * *
파수꾼이 요 며칠 이상했다. 레이첼은 그녀 주변을 맴도는 아제프에게서 설명하기는 묘한, 그러나 확실한 위화감을 느꼈다.
‘왜 저러는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첼에게서 평소보다 한 발 더 떨어진 그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얼굴을 굳히고 눈을 내리깔았다. 항상 먼저 시선을 피하는 건 그녀였건만……. 레이첼은 원래도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더 무감해지는 걸 보고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뭐 상관은 없는데…….’
아제프는 그녀의 이해 밖 사람이었으니 갑자기 바뀐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묘하게 거리를 두면서 레이첼의 삶은 한결 편안해졌다. 예를 들어 그는 며칠 전부터 다시 기도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레이첼은 기도하는 척 다시 잠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아! 거슬려. 갑자기 왜 저러는…….”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이첼은 차라리 가서 대놓고 물어볼까 고민하다 제 소매를 흔드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레이첼 님, 보, 보고 계세요?”
내려다본 아래에는 분홍 머리 소년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동그란 얼굴과 하늘색 큰 눈이 귀여운 소년은 아홉 살이라는 실제 나이보다도 어려 보였다.
“지크, 보고 있어. 그러니 울지 마, 응? 뚝 그쳐야지.”
“저는 레이첼 님이 귀찮으신가 해서…….”
소년의 이름은 지크. 고아로서 신전에서 자란 그는 예비 사제로 신전에 머무는 아이였다.
“그럴 리가. 잠시 딴생각을 한 거뿐이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집중력이 좀 없잖아.”
레이첼은 소년을 제법 귀여워했다. 레이첼이 잘해 준 덕인지 지크도 그녀를 잘 따랐다. 한적한 산골 신전에 살며 1년에 한두 번 주변 마을을 가는 것이 다인 소년은 레이첼을 처음 본 순간 천사라 소리치며 기절했다.
다소 황당한 만남이었지만 레이첼은 순진한 지크가 마음에 들었고 아직 셈을 할 줄 모른다는 말에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사제들은 셈을 할 줄 알게 되면 욕심이 커진다 난감해했지만 레이첼은 말도 안 되는 사제들의 말을 무시했다.
“자! 마저 해야지. 어디까지 했지?”
“여기. 여기까지 풀었어요.”
“대단한데. 벌써 다 푼 거야?”
배움이 조금 늦긴 했으나 지크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지크는 머리를 슬쩍 더 들어 올렸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애정 한 톨 더 받아 보겠다 몸부림치는 지크가 안쓰러웠다. 이곳 사제들은 자신에게는 친절했으나 언젠가 사제가 될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구석이 있었다.
“다 맞았네. 약속대로 상을 줘야지.”
상이라는 말에 지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레이첼은 그런 소년의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이곤 허리를 숙여 둥근 이마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저 더 열심히 할게요.”
“그래. 잘하면 또 상을 줄게.”
얼굴을 붉힌 채 지크가 펜을 세게 쥐었다. 레이첼은 그런 그가 기특하다는 듯 옆에서 흐뭇한 웃음을 짓다 턱을 괴고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신전에서의 생활은 따분했지만 이럴 때면 소소한 만족감이 들었다. 마음이 복잡하지도 제 상황에 불안하지도 않았다.
“여기가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아요. 기호가 하나 더 있는 것뿐인데…….”
꼭 붙어 있는 레이첼과 지크는 사이좋은 남매 같았다. 아제프는 두 사람을 뒤에서 빤히 보다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린 레이첼에게 시선을 모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고운 손은 어린 소년의 어깨를 작게 도닥이고 있었다.
그 손이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정확히는 손에 닿은 소년의 어깨가 거슬렸다. 당장에라도 소년을 치워 버리고 싶은 충동에 아제프는 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레이첼 님을 방해한다 말하면…….’
모함이라니. 제 생각에 놀란 아제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주먹을 세게 쥔 그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일부러 꺾어 조각상을 바라봤다.
“……제 죄를 용서하소서.”
여신을 본떴다는 조각상은 여느 때와 같이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아제프는 그 따스한 표정에서 전과 같은 경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순간조차 여신의 얼굴에서 다른 이를 투영한 탓이었다.
조각상을 향했던 고개가 다시금 돌아갔다. 아제프는 통제할 수 없는 제 행동에 미간을 구겼다. 이래서는 안 됐다, 더는!
“여신이시여…….”
저를 번뇌하게 마옵소서. 아제프는 그렇게 간청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말을 꺼낸다면, 진정으로 그리 기도한다면…….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 * *
고요한 일상에 새로운 손님이 닥쳤다. 레이첼은 이제는 제 전용이 된 정원 대리석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불쑥 나타난 아이작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이첼!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그대를 그리느라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아이작은 레이첼을 보기 무섭게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 전까지 고상한 척 무게를 잡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에 에단이 스산하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미친놈.”
“백작님?”
레이첼은 제 양손을 붙들고 연신 입 맞추는 아이작을 얼떨떨하게 봤다. 잘난 얼굴은 여전했지만 항상 단정했던 행동이 흐트러진 느낌이라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다.
“야, 떨어져.”
에단은 레이첼에게 딱 붙은 친우를 노려봤다. 그로서도 아이작의 등장은 예상 밖 일이었다. 분명 모나타와 관련해 바쁜 일이 있다 들었건만 아이작은 어쩐 일인지 에단이 사들인 별장까지 찾아와 그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나도 여기 있겠네. 이번 일에는 내 지분도 있잖나.’
에단이 연신 꺼지라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아이작은 에단이 무어라 지껄이든 무시하더니 결국에는 신전까지 동행했다.
“레이첼,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때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안부를 묻는 아이작의 푸른 눈에 눈물이 아주 조금 고였다. 무슨 저런 거짓을 꾸며 내나. 결국 부글거리는 속을 참아 내지 못하고 에단은 아이작의 옷을 세게 잡아끌었다.
“떨어지라고!”
아이작은 뒤로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레이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레이첼의 손에 쪽쪽 입 맞춘 그는 아련한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떨궈 놓고 왔어야 했는데. 망할!’
그런 친우의 눈이 그토록 거슬릴 수 없었다. 가벼운 행동과 상반된 저 눈. 분명 에단 그도 그러했겠지만 아이작은 오랜만에 만난 레이첼을 진실로 반가워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백작님. 각하께서는 뭐…… 오늘도 오셨네요.”
“그놈은?”
에단은 제게 시큰둥하게 인사하는 레이첼을 불만족스럽게 훑어보다 항상 거슬리게 붙어 있던 누군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물었다.
“아…… 아제프 경이요? 기도한다 방해 말라…… 백작님?”
레이첼이 에단의 물음에 답을 하기도 전 아이작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다가섰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레이첼의 얼굴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만지고 손을 붙잡는 모양새가 꼭 연인 같았다.
“이런,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제대로 식사는 하고 있는 겁니까? 어디 불편하지는 않아요?”
“네, 별문제 없는데…….”
붙어 있는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거리감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애정 표현을 하고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평화로운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에단은 레이첼의 자색 눈 깊숙이 내재된 반가움과 입가의 미미한 미소를 읽었다.
‘왜…….’
어제까지 가졌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자신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는 것조차 거부했으면서 왜 아이작에게는 저리 쉽게 구나. 억울했다.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응. 덕분에 아주 뜨거운 밤을 보냈네.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가 늦었군. 그날 자네가 레이첼의 위치를 알려 준 덕에 그녀와 화해했네.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 역이라……. 제법 효과가 좋았지. 고맙네.’
웃고 있는 레이첼을 보며 에단은 아이작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비 오는 날 제 도움은 그렇게 거절한 주제에 아이작과는 몸을 섞었다 했다. 아이작이 저를 구해 준 것조차 제 도움이었건만 어째서…….
‘설마 진정으로 아이작을 마음에 품고…….’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단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쥔 채 두 사람을 다시 살폈다.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빛. 서로를 감싼 분위기. 아…… 에단은 저 장면을 알았다. 사내만 자신으로 바꾸면 꼭 과거와 같았다.
‘사랑해, 에단.’
싱그럽게 웃던 얼굴과 저만 바라보던 눈이 떠올라 울컥했다. 저건 내 것인데. 분명 내 것이었는데. 억울함과 동시에 질투심이 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씨발. 어디까지 미치는 건지. 정신 차려, 멍청한 놈.’
간당간당하게 이성을 유지한 에단은 일단 두 사람을 떼어 놓자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그러나 막 정신을 차리려는 그의 귀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레이첼 그대를 언제고 잃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 레이첼, 제가 다시 청혼하면 그때는 받아 줘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청혼?”
아이작은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에 미간을 좁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인데 눈치 없이 웬 훼방인지. 친우를 흘겨본 그가 손을 홰홰 내저으려다 멈칫했다.
‘흠? 그러고 보니 나보다 한참 더 여기 있었겠다…… 좀 골려 볼까?’
짜증을 담았던 푸른 눈에 번뜩 이채가 스쳤다.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려던 아이작은 레이첼을 품에 안고는 둥근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에단을 향해 세상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내가 자네에게 말 안 했던가?”
“못 들었어. 그러니 말해.”
“얼마 전 레이첼에게 청혼했네.”
순간 에단의 귀에 긴 이명이 들렸다. 청혼. 그는 레이첼이 누군가와 결혼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 친우라는 놈이 그녀에게 청혼했단다.
머리를 뒤흔든 말에 에단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아이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환한 미소가 레이첼을 향해 싱그럽게 피어났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흐음. 말이 나온 김에 레이첼, 어떻습니까? 지금 제가 청혼하면 받아 줄 건가요? 이번에는 반지도 준비했는데.”
* * *
갑자기 끌려 나온 레이첼은 저를 붙든 에단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잔뜩 얼굴을 구긴 그는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걸으면서도 연신 욕지거리를 했다.
“아파요!”
버둥거렸지만 사내의 손은 단단했다. 에단은 레이첼이 괴로움에 파들거리는 걸 보면서도 힘을 풀지 않았다.
“아프다잖아!”
에단은 레이첼이 반말을 할 때쯤 걸음을 멈췄다. 신전 구석 한적한 우물 근처에 도착한 그는 차가운 돌벽에 레이첼을 밀어붙이고는 사납게 물었다.
“아이작이 청혼하니 좋던가? 그래서 그리 헤실거린 건가?”
“뭐라고요?”
기가 막힌 레이첼이 에단을 향해 입을 뻐금거렸지만 에단의 눈에는 그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레이첼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빌어먹을 장면만이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막 정사를 끝낸 남녀가 서로 껴안고 이야기하다 종국에는 결혼 이야기까지…….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친우를 향한 살인 충동이 들었다.
“왜 거절했나? 바이허 백작 부인 정도면 네게 차다 못해 넘치는 자리인데. 도대체 얼마나 욕심을 부릴 참이지?”
“그만하세요.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네가 원하는 놈이 도대체 누구야! 아이작이야? 아니면 신 핑계로 내내 네 주변을 맴도는 그 머저리? 그것도 아니면 황태자인가?”
“그만하라…….”
“그럼 난 뭐지? 도대체 난 네게 뭐냔 말이야!!!”
쾅―
낡은 돌벽이 에단의 손바닥을 긁었다. 거친 표면 때문에 손바닥에 피가 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에단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크게 숨 쉬는 레이첼을 향해 음울히 읊조렸다.
“애초 내가 네 마음을 차지한 적이 있긴 해?”
윽박지름에 가까운 물음이었지만 속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하나 잔뜩 얼어붙은 레이첼에게 그런 감정이 와닿을 리 없었다. 어깨 위로 부스스 떨어지는 돌가루에 굳어 버린 그녀는 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구는 사내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살폈다.
“내가 네게 조금이라도 특별한 적이 있어?”
“…….”
“네가 날 가지고 놀았던 게 아니라면…… 네 주변 사내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면 이러면 안 돼. 안 된다고…….”
다행스럽게도 에단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어 갔다. 피가 나는 손으로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쥔 그가 아까 아이작이 입맞춤한 자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난 너와 예전부터 함께였고 네게 오래전부터 마음을 전했어. 그러니 난 그들과 달라. 다르다고. 그렇지?”
꾹 내리누른 입술 온도에, 겁에 질려 있던 레이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단은 그새 돌변해 있었다. 조금 전 폭주할 것같이 고함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레이첼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꼴이 흡사 주인 눈치를 보는 개 같았다.
“대답 좀 해 봐. 너 내가 네게 무슨 마음을 가졌는지 잘 알잖나.”
“…….”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레이첼 애블랑 널…….”
“…….”
“연모한다. 사랑하고 있어.”
사내가 훅 고백을 해 왔다. 오락가락하는 태도만큼이나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레이첼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입술을 내리 물고 고개를 내렸다.
레이첼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자 초조해진 에단은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조금 세게 당겼다. 자신을 봐 달라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나 바짝 당겨진 머리카락에도 레이첼은 그와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불안해진 에단은 제가 레이첼에게 했을 법한 잘못을 빠르게 되짚어 봤다. 먼저 사과하면 돌아볼 거야. 답을 주겠지.
다른 건 몰라도 제 마음이 거절당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존심 때문에 거절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존심은 핑계였다. 사실은 그저 눈앞의 이 작은 여자한테 거부당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한때 저를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 말고 다른 사내에게 가 버릴까 섬뜩했다.
에단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혹 그날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은 건가? 빗속에 널 두고 와 그런 거야?”
“…….”
“아니면 내가 네게 말을 심하게 해…… 속상하게 해 아직 화가 난 건가?”
“…….”
“그것도 아니면 내가 널 과거에 힘들게 해서?”
“…….”
“다 사과하겠어. 내가 잘못했다. 사실 전부터 사과하려 했는데…….”
“필요 없어요.”
꾹 다물린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래를 향했던 고개가 꼿꼿해졌다. 레이첼은 제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는 에단의 손을 꾹 잡아 떨구곤 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 하지 마세요.”
에단은 레이첼의 얼굴에 충격받았다. 건조한 어투와 다르게 붉게 물든 눈시울과 독기 가득한 눈. 레이첼은 그를 향해 가감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왜? 자신은 분명 잘못을 빌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당연히 이다음 순서는 용서와 좋았던 때로의 회귀여야 하는데. 그런데 넌 왜…….
“……어째서?”
“다른 건 몰라도 감정마저 강요당하고 싶지 않아요.”
에단은 용서를 구하는 순간까지도 제멋대로였다. 레이첼은 그런 그의 태도가 경기 날 정도로 싫었다. 아프다 했건만 멋대로 끌고 오더니 벽을 치며 겁을 줬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제 마음 가는 대로 떼쓰듯 고백을 하더니 받아 줄 낌새가 없자 용서를 빌었다. 그것도 해 준다는 식으로.
‘지긋지긋해.’
저를 둘러싼 대다수 사내의 행태가 이러했다. 몸은 물론이요 감정, 상황, 모든 게 저에게는 강요였건만 그들은 흡사 본인들이 베푼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레이첼은 그런 모든 것들이 진절머리 났다. 왜 자신은 모든 부분에서 아래요 그들은 모든 부분에서 위인가?
“강요하는 게 아냐. 다만…….”
“강요가 아니라면 그만두세요. 전 각하의 사과도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뭐?”
모두들 그녀 없이 안 될 것처럼 굴다가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제 뜻에 반할 때면 어김없이 화를 냈다. 사죄와 용서. 그 단어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마! 그럼 왜 다시 말을 걸어 주는 건데! 왜 다시 웃으며 맞아 주는 건데!”
꼭 지금의 에단처럼.
에단은 레이첼이 딱 잘라 거부 의사를 표하자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에게 붙잡힌 레이첼의 소매가 찢어질 듯 흔들렸다.
“다시 기대하게 했잖나! 마음이 조금은 풀려 그런 게 아닌가?”
높디높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사과도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다니. 그렇다면 왜 지금껏 자신을 상대해 줬던 건가? 그가 싫었다면, 용서할 수 없다면 기대도 줘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끝내 화내고 돌아서야지. 왜 다시 제 선물을 받아들이고 웃어 주냔 말인가.
“너 내가 여기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매일같이 만나러 오는 걸 반겼잖아! 설사 내가 들고 오는 그 구질구질한 간식거리 때문이라 해도…… 날 밀어 내지는 않았잖아.”
“당연한 거 아니에요?”
“뭐?”
“그 ‘대단하신 마일런 후작 각하’시잖아요.”
에단은 레이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상대해 주는 것이 제 작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레이첼이 성가시다는 듯 내뱉었다.
“항상 제게 말씀하셨죠. 주제를 알라고. 전 각하 말씀을 따른 것뿐이에요. 저 따위가 무슨 용기가 있어 보기 싫다 하겠어요. 하찮은 자작가 여식이 고고하신 마일런 후작의 방문을 불쾌하다 어떻게 거절하냐고요.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요.”
말을 하면서도 레이첼은 자신에게 놀랐다. 에단과의 악연에서 받은 상처는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말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에 품고 있던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각하께서는 제가 얼굴을 찡그리기만 해도 건방지다 하셨죠. 처지도 모르고 방자하게 군다 타박하셨어요.”
“…….”
“로잘린 때문에 각하를 멀리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든 각하를 피하려는 절 납치해 묶어 두고 어떻게 하셨어요?”
자신도 즐긴다면 상관없다 여겼다. 예전과 다르게 그와 자신의 처지 차이를 인지하고 그의 횡포를 그가 제공하는 자잘한 보석이나 선물 꾸러미들로 셈할 수 있다 여겼다.
“싫다 거부하고 기를 쓰고 피해도 결과는 똑같잖아요. 각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텐데 제가 뭐 하러 힘을 빼며 감정을 드러내나요. 가만히 앉아 견디는 것도 힘든데.”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배려받지 못한 모든 순간이 떠오르며 눈물이 차올랐다. 레이첼은 새어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킨 채 에단의 몸을 밀어 냈다. 우뚝 제자리에 계속 있을 것 같던 사내의 몸이 쉬이 밀려 났다.
“이렇게 된 이상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각하께서는 제게 특별하지 않아요. 그러니 매번 이리 찍어 누르듯 감정을 강요하는 일 따위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끔찍해요.”
끔찍하다. 레이첼의 단언은 그동안 에단이 품고 있던 희망 한 줄기조차 완전히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에단은 그래도 항상 기대했다. 레이첼의 마음속에 마지막 남는 것은 저일 거라고.
왜냐고? 그들은 특별했으니깐. 함께 자랐고 함께 특별한 감정을 나눴으니깐. 여러 복잡한 상황에 다투기도 많이 다퉜고 연인 관계도 흐지부지 끝났지만 그래도 끝내 연을 끊지는 않았으니깐.
“내가 네게 그리한 건…….”
널 좋아해서야.
에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당장 제 고백이 강요요, 끔찍하다 말하는 여자에게 차마 다시 고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레이첼과 끝낼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추스르고 레이첼에게 애원했다.
“……다시는 강요하지 않아. 멋대로 고백하는 일도 없게 하겠어. 네가 싫다면 계속 거절해도 좋아. 하지만…….”
“…….”
“기회만은 앗아 가지 마.”
에단의 눈가는 그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엉엉 울며 매달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최소한의 바람을 레이첼에게 간청했다.
“내가 변하면…… 내가 잘하면 네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네가 싫다는 행동 따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날 봐 줄 수도 있는 거잖나. 그때처럼 마음을 나눌 수도 있는 거잖아.”
구구절절 제 마음을 구걸하는 와중에도 속마음은 시시각각 변했다. 이대로 그냥 끌고 가 가둬 놓고 저를 사랑할 때까지 묶어 두는 게 쉽지 않을까? 차라리 약을 먹여 제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더 확실한 방법 아닐까?
레이첼이 보인 벽의 높이가 높을수록 두께가 두꺼울수록 충동은 거세어졌다. 에단은 가까스로 그 자신을 통제하고 갈구하듯 레이첼을 바라봤다.
“그러니깐…….”
“아뇨. 마음은 평등할 때나 나눌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에단의 속도 모르고 레이첼은 단호히 선을 그었다. 미약한 목소리에서 칼처럼 떨어지는 부정에 음습한 욕망이 시시각각 검은 눈동자 안에 비쳤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 그래요. 굳이 신분이나 집안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건 각하와 전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알잖아요, 우리 끝이 어땠는지.”
“왜? 안 되는 건 없어. 우리는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넌 나를 사랑했어! 그건 분명한 거잖아. 그럼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거야.”
레이첼은 에단이 왜 이리 과거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과거 인연은 악연으로 변한 지 오래요 제 기억 속 그와의 추억은 기만이 되어 사그라든 지 오래인데 그는 어째서인지 그들의 과거를 환상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때는 멍청하게 각하와 제가 평등하다 여겼으니까요!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소중한 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각하께서 친히 알려 주셨잖아요. 각하와 전 평등하지 않다고. 다르다 계속 말씀하셨잖아요.”
“난 그런 적이…….”
“없다고 말씀은 못 하실 거예요. 연인이었지만 우리 사이의 위계질서는 확실했어요. 전 각하께 연회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작은 부탁 하나 하기 어려웠지만 각하께서는 무엇이든 항상 제게 당당하게 요구하셨죠. 심지어 제 의사도 묻지 않으시고 절 정부로 만들려고도 하셨고요.”
레이첼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펑펑 눈물을 쏟으며 그를 원망스레 올려다보는 눈에 에단은 목구멍이 콱 막힌 듯했다. 그가 침을 삼키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그건 네가 상처받을까 그랬던 거야. 그때는 상황이……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잘못하면 너를 잃을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난 결코…….”
“제가 알았든 몰랐든 그런 생각과 계획을 하셨다는 것 자체에서 알 수 있어요. 우린 같은 선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울음을 삼키면서도 레이첼은 또렷이 제 의사를 전했다. 에단은 레이첼의 보랏빛 눈동자 안에서 뿌리 깊게 내리박힌 불신을 봤다. 사내들에게 쉽게 웃어 주고 그들과 자주 어울린 것은 모두 연막에 불과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것이 아닌 가려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에단은 알았다.
“그러니 제게 과한 걸 요구 마세요. 어차피 각하께는 영영 드릴 수 없는 거니까요.”
그들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했던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대로라면 자신은 영원히 레이첼에게 거절당할 것을.
* * *
아제프는 하루 내내 기도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여신이시여…….”
갈라진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물조차 마시지 않고 쉼 없이 기도문을 외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를 용서……크읍.”
쉬어 버린 목에서 쿨럭쿨럭 기침이 터져 나왔다. 무리해 기도하느라 바짝 마른 목구멍에 건조한 공기가 닿은 탓이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기도를 멈출 수 없었다.
“……용서…… 용서하옵소서.”
그는 당장의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경건한 신전에 머무르고 있건만 어째서인지 추악한 감정은 나날이 커졌다.
시작은 사제 아이가 보기 싫었던 그날이었다. 여신께 번뇌 말게 해 달라 기도조차 드리지 못한 날 그는 꿈에서 누군가를 보며 성기사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잔뜩 땀에 젖어 일어난 순간 그는 제 하의가 불결한 것으로 축축이 젖어 있는 걸 느꼈다. 차라리 병자처럼 요의를 참지 못한 것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의 하의를 적시고 있는 건 그의 꿈만큼이나 지저분한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찬물에 씻고 침대 위 모든 천과 입었던 옷을 불에 태워 버렸다. 하지만 그것들이 재가 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 머릿속에 머무는 이를 지울 수 없었다.
‘더럽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채찍질한 지도 몇 시간. 몸은 한계에 다다라 갔지만 어찌 된 일인지 꿈속 지저분한 망상은 계속됐다.
‘차라리…….’
여신상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괴로움에 허덕이던 그는 문뜩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머릿속 존재를 죽여 없앤다면 그러면 자신은 평온을 찾을까?
‘죄를 죄로 막을 수는 없어.’
무고한 살생은 가장 큰 죄악 중 하나였다. 아제프는 제 미친 생각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짓씹고 옆에 놓인 채찍을 들었다. 다시금 자신에게 채찍질을 할 시간이었다.
그가 들어 올린 채찍의 가죽끈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아제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 등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짧은 가죽끈이 이미 터져 나간 등을 한 차례 더 때렸다.
“으윽…….”
고통과 함께 순간이나마 죄의식이 흐려졌다. 아제프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계속 내리쳐 벌을 받는다면 언젠가는 경건함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흐읍…… 으…….”
등에서 흐른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며 듣기만 해도 괴로운 신음이 몇 번이고 기도실을 울렸다.
창백한 성기사는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여신상을 바라봤다. 여신은 아직 답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가까스로 채찍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그만! 그만하거라!”
그러나 채찍질이 이어지려던 차 누군가 아제프의 손에서 거칠게 채찍을 빼앗아 던져 버렸다. 살가죽을 찢던 가죽끈이 핏자국과 함께 구석에 처박혔다.
“정신 나간 놈!”
익숙한 목소리에 아제프는 꿇어앉은 채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그의 바로 옆에는 그와 꼭 같은 붉은 머리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괴로운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상처를 파고들며 흐르는 땀에 아제프가 숨을 헐떡인 채 건조히 사내를 불렀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
* * *
부자는 닮지 않았다. 같은 색의 머리칼을 가졌음에도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아제프가 선이 고운, 여인과도 대등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그의 아비인 리이트 후작은 누구보다도 사내다운 단단한 생김새를 지녔다. 리이트가의 차남으로, 먼 옛날 신전에 속해 있었다던 그는 신전보다는 검투장에 어울릴 법했다.
“미친놈! 나 몰래 신전으로 돌아가더니 기어코 정신까지 놔 버렸구나!”
리이트 후작은 피를 뚝뚝 흘리는 아들의 모습에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움푹 파인 미간 주름이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잘 보여 줬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제프는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여전히 무릎 꿇은 그는 아비를 보지 않은 채 여신상을 바라봤다. 리이트 후작은 제게 딱딱하게 말하는 아들을 내려다보며 한 번 더 고함을 지르려다 아들과 닮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자.”
“…….”
“집으로 가.”
“…….”
“여긴 네가 이런 짓을 벌일 만큼 가치 있는 곳이 아니다. 여긴…….”
“그런 말 마십시오. 신전은 여신과 가장 가까운 신성한 곳입니다. 가치 없는 곳이라니……망발이십니다.”
아비의 말을 묵묵히 듣던 아제프는 아비가 신전을 삿되게 표현하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아들이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며 저를 탓하자 리이트 후작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너는 더는 성기사가 아니야! 넌 파문당했다. 이곳에서 자유롭단 말이다!”
“일개 직책 따위 무의미합니다. 전 여신께 바쳐진 몸. 주교께서 허락한 이상 제가 있을 곳은 여기입니다.”
“네가 왜 여기에 몸을 바쳐! 당장 일어나거라! 난 내 아들을 이딴 곳에 둘 수 없어!”
“그 입!!!”
쾅―
아제프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리이트 후작은 아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숨을 멈춘 채 굳어 버렸다. 천천히 몸을 들어 올린 아제프의 이마에선 등에서 난 피만큼이나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무십시오. 여신께서 보고 계십니다.”
차분한 목소리는 자해한 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리이트 후작은 그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언제 아들이 이렇게 망가졌던가. 누가 보더라도 그의 아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그네스…….’
아들의 어미를 떠올리며 리이트 후작은 주먹 쥔 손을 풀었다. 그는 이번에는 애원하듯 아제프를 불렀다.
“아제프.”
“…….”
“제발…… 돌아가자. 아그네스도…… 네 어미도 그걸 원할 거야. 그녀는 네가 평안히 살길 원했어. 이런 건 그녀가 생각했던 네 삶이 아니야.”
“우습군요.”
어미의 이름이 나오자 아제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얼굴이 조금 비틀리며 아제프가 아비를 돌아봤다.
“저를 데려가려 어머니의 이름을 올리시다니…….”
죽은 아내와 똑같은 눈이 리이트 후작을 응시했다. 리이트 후작은 아들의 잿빛 눈에서 제 죄악을 발견했다. 아들을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그때 분명 그러셨습니다. 제 존재가 생김에 따라 어머니께서 벌을 받은 거라고. 그렇기에 전 언제나 신앙에 목매야 하며 여신께 이 한 몸 바쳐 죄를 씻어 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건…….”
아들의 담담한 말에 괴로운 과거가 떠올랐다. 성녀 후보였던 아내의 죽음을 핑계 삼아 자신이 아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아제프는 다섯 살 때부터 자신을 스스로 죄악이라 칭하며 자해하는 법을 훈련받았다.
‘너 때문에…….’
‘……아버지.’
‘네 어미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너 같은 죄악의 씨앗을 품고 기르느라…… 신벌을 받은 거야.’
‘…….’
‘너나 나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고귀한 신의 사자일 텐데. 내가…… 네가 망쳤다. 그녀의 삶을 우리가 무너뜨렸어. 아제프, 넌 그녀를 죽게 한 죄악이야.’
변명하자면 그때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성기사였던 그가 감히 성녀 후보인 아그네스를 탐해 생긴 아들이었기에 아들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 믿었다.
어디서부터 제 죄를 고해야 할까. 대체 어디서부터 아들에게 사죄해야 할까. 리이트 후작은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심하다 일단 아들을 한 번 더 설득하기로 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너 하나뿐이다. 아제프, 넌 내 하나뿐인 아들이야.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서…….”
“가문은 입양한 아이에게 맡겨도 되니 이 길을 걸으라 명하신 건 아버지셨습니다.”
아비의 절절한 간청은 아들의 굳어 버린 심장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기에 세월은 너무도 많이 흐른 후였고 골은 깊어진 후였다. 아제프는 눈을 감고 제 죄를 사해 달라 기도하며 아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세요. 아버지 말씀대로 제 존재 자체가 죄악이니 제가 머무를 곳은 이곳뿐입니다.”
* * *
아이작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레이첼을 발견한 탓이었다.
‘……뻔하지.’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친우가 험악하게 얼굴을 굳히며 그녀를 끌고 갈 때면 결과는 뻔했으니깐. 레이첼과 에단, 두 사람은 만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 댔고 그 끝에 남는 건 항상 이런 장면뿐이었다.
단번에 다가갔으나 레이첼은 그가 다가온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훌쩍이는 소리와 잘게 떨리는 어깨.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작의 시선이 레이첼의 손목에 선명히 난 붉은 자국에 꽂혔다. 제법 아려 보였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멍 좀 들고 말 것 아닌가. 하지만 입안이 쓰고 까슬한 것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레이첼.”
아이작은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레이첼을 불렀다. 그제야 제 곁에 누가 와 있음을 깨달은 레이첼이 얼굴을 들었다. 흠뻑 젖은 얼굴이 어찌나 애처로운지. 아이작은 순간 구슬구슬 떨어지는 눈물을 모조리 마셔 버리고 싶었다.
“괜찮습니까?”
레이첼은 상처받은 게 분명했다. 연보라색 눈동자 안 움푹 팬 상처를 확인한 아이작은 위로하듯 부드럽게 웃으며 레이첼의 어깨를 잡았다. 작은 몸이 품 안으로 들어오자 옅은 제비꽃 향이 코끝을 스쳤다.
“에단 그 친구를…… 말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작은 레이첼을 구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막으려면 진즉 막았지 왜 구경했겠나. 그가 한 행위라고는 잠깐 손을 뻗은 것과 당황한 듯 표정을 지어내 보인 것뿐이었다.
아이작이 그리 행동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레이첼이 에단을 미워하길 바랐다. 또한 그녀가 다른 이에게 상처 입고 자신에게 기대길. 종국에는 자신에게만 길들길 고대했다.
처음 레이첼과 교제할 때만 하더라도 아이작은 에단을 경계하지 않았다. 레이첼에게 에단은 고작해야 나쁘게 헤어진 전 연인일 뿐이었다. 질척거리는 과거 사내를 좋아할 여인이 어디 있겠나. 에단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레이첼? 아아…… 그녀는 아름답지. 데리고 다니기 아주 적당해. 값어치를 하거든.’
게다가 그에게 레이첼은 예쁜 잠자리 상대일 뿐이었다. 침대 데우는 아름다운 여인. 초기 아이작에게 레이첼의 가치는 딱 그 정도였고 그렇기에 그는 레이첼이 다른 사내와 어떻게 지내든 절 즐겁게만 해 준다면 별 상관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이작은 어쩐지 두 사람의 관계가 영 거슬렸다. 정확하게는 에단을 향한 레이첼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레이첼은 과거 연인들에게 매정했다. 그들의 구질구질한 매달림에 관심은커녕 하찮아했고 선 긋기를 칼같이 했다. 그 매정한 태도에 그녀와 짧게나마 교제했던 사내 중 몇이 수도를 떠났던가. 레이첼은 과거의 사내에게만큼은 한겨울 눈보다 시린 여인이었다.
‘후작 각하께서는 원래 못돼 먹으셨어요. 어쩌나요, 친절한 제가 봐드려야지.’
그러나 에단만큼은 예외였다. 레이첼은 매번 에단과 다투면서도 끝내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어릴 적 함께한 세월의 영향이라지만 아이작은 그 사실이 못내 마뜩지 않았다.
사실 아이작이 초기의 마음만 간직했다면 못마땅하다느니 거슬린다느니 하는 감정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터였다. 원래 목표대로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가벼운 마음가짐이 쭉 이어졌다면…… 그랬다면 아이작은 에단에게 셋이서 놀아 보는 건 어떻냐 제의했을지도 몰랐다. 친우와 어여쁜 여인을 나누면 그 또한 색다른 재미일 테니. 아이작은 품위 있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난잡하게 노는 걸 제법 즐겼고 은밀히 부도덕한 쾌락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 그는 눈앞 여인에게 지나치게 빠졌다. 아이작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나눈다니. 그는 제 것이 아닌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한번 제 것은 영영 제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그의 기준에서 이미 그의 소유였다.
자조 섞인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아이작은 제 품 안에 들어온 레이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레이첼은 여전히 잘게 떨고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내 것이 될 텐데 다른 사내 때문에 우는 건 그만두면 안 되나? 말도 안 되는 억지였건만 아이작은 레이첼에게 그리 따져 묻고 싶었다.
“……이제 괜찮아요. 놓아 주세요, 백작님.”
한참 아이작의 품에서 운 레이첼은 발개진 눈가를 비비며 바스락거렸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밀어 내는 것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쓸데없이 자존심은…….’
귀엽기도 하지. 아이작은 도망가려는 레이첼을 붙잡고 당겼다.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품 안에서 달아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이런데 어떻게 놓아 줍니까. 그대는 피부가 약해 눈물 몇 방울에도 아파하지 않습니까.”
레이첼의 눈가는 쉽게 짓물렀다. 아이작은 침대에서 그녀를 몇 번이고 울리며 그 사실을 터득한 지 오래였다. 닦아 주지 않으면 내일까지 고생하겠지. 그가 상의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 둔 크림색 손수건을 꺼냈다.
“그대가 선물해 준 손수건입니다. 혹 닳기라도 할까 애지중지 아꼈는데 이럴 때 쓰는군요.”
손수건은 교제 초반 레이첼이 아이작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때 아이작에게 푹 빠져 있었으므로 며칠 동안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손수건 가장자리에 은실로 수놓아진 아이작의 이니셜은 제법 깔끔했다.
직접 선물한 손수건을 보며 레이첼은 아이작과 교제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이작은 레이첼이 만났던 어떤 사내보다 신사다웠고 다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벼운 만남으로 생각했던 그와의 만남에 진지하게 빠져들었다.
‘백작님은 제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다정하세요. 절 배려해 주고 아끼는 게 느껴져 좋아요.’
하지만 아이작도 결국 같았다.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지자 그 또한 똑같은 사내임이 드러났고 레이첼은 애매하게 남은 아이작과 끝을 상기하며 사내의 손을 밀어 냈다. 교제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 이렇게 기대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내가 해 주겠습니다. 자, 이리 봐요.”
“놓아 주세요. 불편하단 말이에요.”
이어지는 실랑이에 레이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순간 아이작은 훅 밀려오는 짜증을 막을 수 없었다. 아이작의 입가에 잔잔히 묻어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가만있어요. 내가 닦아 준다 하질 않습니까.”
남의 옷에 눈물을 펑펑 쏟았으면 작은 보상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예컨대 달래 줘서 고맙다며 사랑스럽게 웃어 준다거나 그도 아니면 차라리 계속 제 품에 이 예쁜 얼굴을 묻고 있든가. 그것도 싫으면 얌전히 있다가 요 도톰한 입술로 입이라도 맞춰 와야지. 아이작의 손이 레이첼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아, 아파요!”
억지로 고정된 레이첼이 아프다 소리 냈다. 아이작은 원망스레 저를 노려보는 눈초리에 한쪽 입꼬리를 조금 비틀었다.
아이작은 손수건을 구기듯 세게 쥔 채 레이첼을 가까이 끌었다.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레이첼의 뒷덜미를 잡아챈 후였다.
아이작은 레이첼을 내려다보며 픽 웃다 그녀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문지르듯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센 힘도 아니었건만 레이첼은 아이작이 주는 압박감에 얼굴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얌전히 말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요. 왜 매번 멍청하게 구는 겁니까?”
“…….”
“내 여우 아가씨는 왜 매번 이럴까? 우리 저번에 모든 걸 풀고 잘 지내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아이작의 말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의 목울대는 평소보다 빠르게 오르내렸으며 정중했던 말투는 시정잡배처럼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손수건을 던져 버린 그가 짓씹듯 레이첼을 윽박질렀다.
“안 피한다면서. 청혼은 거절해도 피하지는 않는다면서. 그런데 왜 이럴까? 응? 레이첼, 왜 이러는 겁니까?”
산 넘어 산이라고. 레이첼은 아이작이 왜 이리 미친놈처럼 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얼굴 정돈하겠다 말한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청혼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고. 기가 찬 레이첼은 공포심조차 잊은 채 아이작에게 덤벼들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어요. 미쳤어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이작의 손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면서도 레이첼은 그를 노려봤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서러움이 사라지고 오기와 분노만이 남았다.
“제가 손이 없어요? 내가 내 손으로 얼굴 좀 닦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 상해요? 왜요? 백작님 호의를 안 받아들여서?”
“…….”
“정말 그런 거면 머리가 상한 거니깐 여기서 저 괴롭힐 게 아니라 어디 저 멀리 요양이라도 가셔야 할 거예요!”
“…….”
“그리고 이제 좀 놔! 놓으라고요! 누가 둘 다 친구 아니라고 할까 봐 정신 나간 건 똑같아!”
눈물로 붉었던 눈가가 이번에는 흥분으로 발개졌다. 레이첼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아이작의 손을 긁으며 그를 자극했지만 아이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레이첼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를 제게 더욱 가까이 밀착시켰다. 이제는 거의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맞아요. 레이첼, 난 미쳤습니다. 머리가 상해 곪았어. 하지만 저 멀리 어딘가로는 못 갈 거 같군요. 아니, 갈 수 없습니다.”
“무, 무슨…….”
쉽사리 들린 긍정에 레이첼이 놀라기도 전이었다. 아이작은 사흘 굶은 맹수가 먹잇감에 달려들 듯 레이첼의 입술을 삼켰다. 레이첼은 주춤거리며 도망치려 했지만 곧 등에 벽이 닿았다.
퇴로가 막히자 기다렸다는 듯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이작은 양손으로 레이첼의 얼굴을 쥔 채 범하듯 제 혀를 작은 입속으로 넣었다.
레이첼은 몇 번이고 입안을 침범해 온 아이작의 혀를 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피비린내를 맛본 건 입맞춤의 끝자락이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아이작의 입술을 깨문 레이첼은 헐떡이며 아이작을 흘겨보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아이작의 푸른 눈은 정신 나간 이처럼 흐려져 있었다. 비실비실 광인같이 웃던 그가 긴 손가락으로 입술 사이 흐르는 피를 닦으며 무릎으로 레이첼의 다리 사이를 꾹꾹 눌렀다.
레이첼은 아이작이 다리 사이를 자극하며 벌릴 때마다 몸을 잘게 떨었다. 항상 찬양해 마지않던 아이작의 잘난 얼굴선조차 두려웠다. 매끈하게 잘 떨어진 그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칼로 변해 몸을 난도질할 것 같았다.
“백, 백작님…… 잠깐 진정하시고…….”
감정은 그대로 목소리에 묻어났다. 다른 놈도 아니고 이 새끼가 갑자기 왜? 레이첼은 공포심을 겨우 억누르며 아이작을 살살 밀어 냈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으니 자극하지 말고 벗어나야 했다. 안 그러던 놈이 갑자기 미쳐 버리면 그게 더 무서운 법이니깐.
가만히 레이첼을 내려다보던 아이작은 그녀가 움직이기 무섭게 다시 세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부딪힘의 여파로 신음을 흘리는 레이첼의 드레스를 헤집어 올렸다. 그의 무릎이 이번엔 속옷 바로 위에 닿은 채 은밀한 부위를 자극했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됩니까? 얌전히 있어야지 또 어디로 도망가려고……. 그리고 내가 가면…….”
음습한 열감을 품은 채 벽안이 레이첼의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훑었다. 오르내리는 거친 숨과 함께 이 가는 소리가 선명히 울리며 아이작이 짓씹듯 말을 이었다.
“……에단한테 여길 벌려 줄 거잖아요. 씨발, 그건 안 되지.”
* * *
아이작은 보라색을 싫어했다. 특히 흐리멍덩한 연한 보랏빛이라면 더더욱.
혹자는 보라색이 붉음의 정열과 푸름의 우아함을 모두 담았다 칭송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보라색은 그저 천박함의 상징이었다.
‘그 여자의 색.’
아이작은 부모가 한날한시에 죽고 방계 황족 여인에게 보내졌다. 바이허성은 본래 현 황제의 고모가 결혼하며 하사받은 것으로 아이작도 따지자면 황가의 자손이었기에 현 황제가 특별히 배려한 조치였다.
어린 아이작을 맡게 된 여인은 아름다웠다.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그녀는 남편이 죽었음에도 당당했다. 그녀는 다른 미망인들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지도 집에 틀어박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제 눈동자와 같은 보라색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항상 어디론가 돌아다녔다. 아이작과의 첫 만남에서도 그녀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말 예쁜 아이구나.”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은발에 벽안을 가진 아이작의 외모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도 없는 그녀는 아이작을 아끼며 정성껏 돌봐 줬다. 부모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아이작도 그녀의 사랑을 갈구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여인에게 바란 사랑과 여인이 생각한 사랑은 달랐다. 여인은 점점 아이작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에게 이성으로서의 사랑을 원하며 학대를 자행한 것이다.
여인의 저택에 들어온 지 2년이 지나자 아이작은 여인과 다른 사내의 정사를 의자에 묶여 지켜봐야 했다. 온통 보라색 천으로 꾸며진 여인의 침실에서 울리는 신음과 살색 향연에 아이작은 견디지 못하고 졸도했다. 그러나 여인은 끝내 어린 그를 깨워 가며 제 정사를 지켜보게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황제가 두려워 여인이 직접 그에게 손대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 아흣. 으응…… 아이작! 아이작! 으으응…….”
그렇게 몇 년이었다. 아이작은 보라색 방에 갇혀 수십 번 여인의 정사를 지켜봤다. 처음에 기절했던 그는 나중 돼서는 눈 하나 깜빡 않고 그 꼴을 보아 넘겼지만 속으로는 그 방 모든 것에 구역질했다.
“가지 마, 아이작. 가지 말렴, 응?”
“…….”
“아카데미에 가지 말고 나랑 살자. 이제 너도 나를 안아 줄 수 있잖아.”
아이작이 그 지옥을 벗어난 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였다. 여인은 아이작의 다리를 부러뜨려 그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 했지만 아이작은 기어코 부러진 다리를 끌고 탈출했다.
어린 바이허가의 후계가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아카데미 앞에 쓰러졌단 말에 황제는 노했다. 오랜 조사 끝에 여인은 학대 정황이 밝혀져 신분을 박탈당하고 제 저택에 감금됐다.
「사랑하는 아이작에게.」
아카데미에서 생활을 이어 가며 아이작은 몇 번이고 여인의 편지를 받았다. 고급스러운 연보라색 편지. 아이작은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그걸 열어 보지 않은 채 태워 버리다 나중에는 아예 편지를 받지 말라 사관실에 전했다.
아이작이 아카데미 생활을 한 지 3년이 되기 전에 여인은 제 저택에서 목을 맸다. 침대를 꾸민 보라색 캐노피로. 여인이 자살했을 때 아이작은 이미 여인의 이름조차 잊었다. 하지만 여인이 좋아하던 보라색만은 그녀의 상징으로 그의 머릿속에 박혔다. 끔찍한 일이었다.
‘바이허가의 후계는 그 얼굴값을 한다지. 아카데미 졸업 전인데도 여인들이 줄을 서 기다리잖나.’
여인을 멀리할 법도 했지만 아이작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카데미 재학 중에도 여러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 잘난 외관에 멋들어진 행동거지. 그의 곁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다.
“아이작, 너 그러다 언젠가 정말 칼 맞는다. 어제도 어떤 계집애가 너보고 죽겠다 난리였다며.”
아이작과 같은 날 부모를 잃은 친우는 그런 그의 생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어린 때부터 단 한 명의 여인에게 목매는 친우를 비웃을 뿐이었다.
“걱정 말게, 에단. 난 자네와 다르게 신사적이라 그럴 일 없어. 그보다 자네의 아가씨는 잘 지내나? 언제 한번 오라 하지 그래.”
“미쳤어? 걔는 절대 여기 와서는 안 돼! 너 같은 놈들이 득실거리는데 어쩌자고…….”
“어지간히 싸고도는군. 에단, 친우로서 내가 충고하는데 여인은 그렇게 옥죌수록 달아나는 법이야.”
“어쩔 수 없어. 레이첼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단 말이야. 분명 보기만 해도 훔쳐 가려는 놈들이 줄을 설 거야.”
“허? 미친 건 자네로군.”
친우가 아껴 마지않는 여인이 가끔은 궁금했지만 아이작은 일부러 관심을 끊었다. 친우에게 맨 처음 들은 여인의 특징이 영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연보라색 제비꽃색 눈동자라니. 친우는 그 눈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하루에도 몇 번 말하곤 했으나 아이작은 보라색 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많은 여인 중 그가 유일하게 거부하는 여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보라색, 그 끔찍하고 천박한 색을 가진 이들 아닌가.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자네는 캐틀렛 공녀가 있잖나.”
아이작은 천한 색을 가진, 한미한 자작가 여식에게 빠진 친우를 동정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그녀를 꼭 친우에게서 떼어 놓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친우와 손을 잡은 채 빙빙 원을 그리는 레이첼을 봤을 때 아이작은 보라색 그 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답다 저도 모르게 찬탄했다.
“백작님께서는 보라색을 싫어한다 들었는데…….”
“얼마 전 개안했습니다. 예술적인 감각으로 보자면 보라색만큼 아름다운 색도 없더군요.”
그 후로 아이작은 보라색이 싫다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보라색을 가진 여인들도 그의 품에 안겼다. 아이작은 보라색을 가진 여러 여인을 안으며 제 트라우마를 깨 준 레이첼을 가끔 떠올렸다. 친우와 교제하는 여인만 아니면 한 번쯤 놀아 볼 만할 텐데…….
“……헤어졌나? 왜 질질 짜?”
“못된 계집애! 망할 계집애! 빌어먹을……흐으…….”
“……차였군.”
그렇게 생각하던 차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친우가 그녀와 헤어진 것이다. 정확히는 차였지. 좋은 기회였으나 아이작은 잠시 레이첼에 대한 관심을 껐다. 당장 안아 보고 싶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우의 여인이었으니깐. 에단은 아이작에게 둘도 없는 친우였고 아이작은 그와의 관계를 중히 여겼다.
시간은 적당히 빠르게 지났다. 아이작은 그동안 수십의 여인들을 만났고 한 사람만 보던 에단 또한 제법 많은 여인을 만났다. 아이작은 이제는 레이첼에게 다가가도 좋다 여겼다.
‘적당히 잘 노는 건 침대 위에서 잘한단 뜻이니 좋지만…… 에단 이후로 사내만 몇인지. 이러다 이 내가 열 손가락 밖의 사내가 되겠어.’
2년에 가까운 시간이면 친우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갖춘 것이리라. 사실 친우한테 장난감을 양도받으며 그만큼 기다리는 우정 깊은 사내가 어디 있겠나. 아직도 미련을 끊지 못한 에단이 좀 걸렸지만 아이작은 제 얼굴을 보며 헤실거리는 레이첼의 손을 잡고 속살거렸다.
“레이첼.”
“네, 백작님…….”
“저와 교제해 주시겠습니까?”
* * *
“……에단한테 여길 벌려 줄 거잖아요. 씨발, 그건 안 되지.”
잔뜩 부풀었던 두려움과 흥분이 천박한 그 말에 급격히 빠져나갔다. 다 큰 사내가 친우와 저를 비교하며 저런 말이라니. 레이첼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온도로 아이작을 바라봤다.
저급한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거친 숨결. 항상 어른스러워 보였던 그가 어린애 같았다. 아이작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이 뭐였는가. 항상 여유로웠던 그 태도 아니던가. 레이첼은 아이작의 핏발 선 눈을 마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구시는 거 매력 없어요, 백작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듬거리던 레이첼의 무덤덤한 대꾸에 아이작의 눈이 순간 커졌다. 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눈치챈 레이첼은 그의 무릎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전 매력 없는 신사분들은 상대하지 않는답니다.”
“…….”
“확실히 해야 할 거 같은데…… 백작님과 전 이미 헤어졌어요. 그동안은 절 도와주신 것도 있고 저번에 모른 척은 말아 달라 부탁하셔서 참았지만 더는 이런 취급 못 참겠어요.”
아이작은 지나치게 평온한 그 태도를 본 적이 있었다. 레이첼은 제게 매달리던 전 연인들에게 꼭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곤 했다.
“연도 끊겼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는 거 그만두세요. 백작님답지 않아요. 저도 지치고요.”
작은 손이 살짝, 그러나 단호하게 아이작의 무릎을 밀어 냈다. 아이작은 쉽게 툭 떨어져 나가는 제 신체 일부를 멍하니 바라보다 서늘한 레이첼의 눈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네 아비를 생각해 봐준 거야. 숙녀가 싫다는데 그런 더러운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어지?’
‘내 다, 다리! 다리가…….’
‘이런 식이니 차였지. 교제라 이름 붙였다 한들 두 번 만났다 들었건만. 한심해.’
언제 적이던가. 그는 레이첼과 일주일 교제했다던 멍청한 애송이 놈을 손봐 준 적이 있었다. 감히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며 그녀를 강제로 범하려 했기에 다리 두 짝을 모두 분질러 버렸더랬지.
그리고 돌아서며 생각했다. 여자한테 매달려 앞뒤 분간도 못 하는 머저리라고.
“앞으로는 절 찾지 마세요. 끝난 사이에 부담스러워요.”
그런데 왜 지금 자신이 그 머저리가 된 기분인가. 열패감에 휩싸인 아이작은 제 품 안에서 슬금슬금 도망치는 레이첼을 붙잡으며 입술을 물었다.
“그건 안 됩니다.”
“하아…… 백작님. 이러셔도 소용없어요.”
“약속을 한 건 레이첼 그대입니다. 날 피하지 않겠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보지 않겠다 하면 난 어떻게 합니까.”
“양심도 없어.”
붙잡힌 레이첼은 아이작의 손을 떼어 내려 시도하다 포기하곤 그를 올려다봤다. 끝을 낼 때 사내들은 왜 항상 이리 질척이는지. 지겨웠다.
“저로서도 껄끄러운 일이라 말 안 하려 했는데 너무 뻔뻔하신 거 아니에요?”
레이첼이 자유로운 손으로 머리를 정돈하듯 쓸어 넘기더니 곧 얼굴 가까이 부채질했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모양새가 제법 앙칼졌지만 아이작은 그 모습에서조차 눈을 뗄 수 없었다. 저를 경멸한들 좋았다. 봐 주기만 한다면.
“백작님이 쉴 새 없이 말하는 약속! 그래, 그 약속 한 날 백작님께서 저를 어떻게 취급하셨어요? 본인 말대로 반지도 없이 하룻밤 자고 나서 바로 청혼하더니 공녀님이 오시기 무섭게 저를 방에 가둬 두셨죠?”
“…….”
“저 그날 제대로 된 옷 하나 걸치지 못하고 장장 세 시간을 백작님 침대 위에 숨어 있었어요. 꼭 숨어야 하는 부적절한 정부처럼요.”
“…….”
“백번 양보해서 반지 없이 청혼한 건…… 그래요, 감정에 이끌려 그럴 수 있다 해요. 하지만 청혼한 주제에 날름 다른 여자한테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요. 게다가 그 숙녀분이 백작님과 약혼 소문이 오가는 사이라면…… 제가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만나 준 것만 해도 대단한 일 같은데 아닌가요?”
당시를 회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잘난 얼굴만 아니었어도 진즉 끝내는 건데!
“이 이상 얼굴 붉히기 싫으니 약속 핑계로 만나자는 건 그만해요. 약혼이나 잘 하시고요!”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 약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그만. 변명은 그만두세요. 어차피 언젠가는 하실 거잖아요, 저 말고 그분이랑! 당당했다면 그날 절 숨기지는 않았겠죠. 절 바보로 아시는 거예요?”
레이첼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이작은 무어라 더 변명하려다 말았다. 이 이상의 거짓말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에단한테는 이리하지 않잖습니까. 그도 마찬가지인데 나한테만 이리 구는 건 가혹합니다.”
“이 대화에 후작 각하께서 왜 계속 언급되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그분에 대한 태도는 제 선택이에요, 백작님이 관여하실 바가 아니라.”
레이첼의 그 말은 아이작을 도발하기 충분했다. 아이작은 레이첼의 말에 심사가 꼬이다 못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선택이라니. 그 말은 에단이 그녀에게 저보다 특별하단 말 아닌가.
왜?
그는 진짜 널 버리고 약혼한 놈이고 난 아직 아닌데. 내가 약혼했다면 또 몰라. 내가 네게 더 양심적인데 넌 왜 나보다 에단 그를 더 귀히 여기지?
이건 명백한 차별이요 자신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 논리라면 나도 내 마음껏 그대를 대하겠습니다.”
아이작이 레이첼의 다리 사이에 다시 제 무릎을 욱여넣었다. 비집고 들어오는 힘이 아까보다 더했다.
“내가 그대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내 선택입니다. 그러니 그만 조잘거리고 다리나 벌려요.”
씨발. 레이첼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내가 한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결국 어떻게든 범하겠다 으르렁대는 개새끼를 보며 레이첼이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 번 하든가. 구질구질하게 붙는 사내 떼어 낼 수만 있다면야 저도 한 번쯤은 함께 즐겨 드릴게요. 뒹구는 상대로 백작님은…… 제법 괜찮거든요. 재수가 없어 끝맛은 별로지만. 정 별로면 먹고 뱉어도 되니깐 뭐.”
“…….”
“하지만 힘들지 않겠어요? 그래도 여기 신전인데? 그리고 허울뿐이더라도 전 성녀 후보고. 제가 소리라도 지르면 백작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거예요.”
“……소리 질러요.”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픽 웃었다. 어느새 레이첼의 멱살을 끌어당긴 그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레이첼을 훑더니 냄새를 맡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대로 하라 이 말입니다. 레이첼 그대 말대로 그대는 허울뿐인 성녀 후보라 몇 달 뒤에 나올 터이니 조금 일찍 신전을 나온다 한들 별문제 없지요.”
“그게 무슨…….”
“내 명예? 괜찮습니다. 고작 그대 하나 범했다고 무너질 게 아니니깐. 난 이래 봬도 제법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무시하는 것 같지만……. 애블랑가? 하! 우습지요, 우스워.”
빠르게 말하며 혼자 웃는 꼴이 흡사 광인이었다. 레이첼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가만히 있을걸. 자극하지 말자 다짐한 게 수분 전인데…….
“어차피 그대 성미에 여길 지겨워할 테고…….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좀 더 빨리 나오게.”
사내의 손이 봉긋 솟은 가슴을 쥐었다. 터뜨릴 듯 강한 힘에 드레스 상의가 구겨지며 레이첼이 신음을 내질렀지만 아이작은 오히려 더 과감히 움직였다. 어느새 하체에 닿는 묵직한 무게감에 레이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 미친놈이! 진짜 여기서 하려고?
“그거 아십니까? 20년 전쯤에도 신전에서 이런 짓을 하다 쫓겨난 성녀 후보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운 좋게도 함께 놀아난 사내의 아이를 가져 사내의 가문에 들어갔지만…… 레이첼 그대는 아닐 겁니다.”
“야! 하라고 했다고 진짜 하냐? 하지 마! 이 거머리야! 좀 떨어져서…….”
“난 그대가 내 아이를 배든 말든 끌고 나갈 겁니다. 사제들 앞에서 몇 번이고 그대를 범하면 그대는 필시 쫓겨나겠지요. 뭐, 물론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신앙심은 그다지 없었으니깐.”
“떨어지라니까!”
“레이첼, 내 여우. 저번에 내 방이 좋다 했죠? 거길 내드리지요. 평생 침대에 묶여 내 좆이나 받아요. 임신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안아 주겠습니다.”
긴 손가락이 드레스 안을 파고들더니 순식간에 속옷을 찢었다. 너무도 쉬이 찢어지는 천에 레이첼은 아이작을 향해 미쳤냐며 소리를 지르려다 음부를 벌리고 그 위 살점을 꾹 누르는 손길에 신음을 뱉으며 무너졌다.
“하으…….”
“아…… 이번에는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도 끼워 주지요. 물론 청혼은 아닙니다만 저번에 반지가 없었다 꽤 섭섭해하는 것 같아서요. 뭐…… 그래도 부족하다면 여기도 뭘 하나 박아 주고. 그대 보석 좋아하잖아요?”
아이작이 이번에는 톡 튀어나온 살점을 문지르며 비틀었다. 어디에 뭘 박아? 레이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특별히 알이 굵고 귀한 거로 구해 보겠습니다. 종류는…… 역시 그대와 어울리는 자줏빛이 좋겠지요.”
레이첼로서도 이런 희롱은 처음이었다. 창부들은 그런 곳에도 액세서리를 한다 듣기는 했지만 그녀는 창부가 아니질 않나.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사내에게 음핵을 꼬집히며 그런 소리를 듣자 진실로 그리될 것 같아 두려웠다.
“미쳤어! 난 그런 취급 따위…….”
목소리가 작아지며 칭얼거리듯 나왔다. 레이첼은 달달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채 아이작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짓은 오히려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작의 몸에 열기를 더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그대 말대로 내겐 약혼할 숙녀가 생길 것 같고 내가 배경 좋은 약혼녀를 두고 그대에게 청혼할 필요 있습니까? 레이첼 그대는 고작 자작 영애인 데다 나를…….”
바르작거리며 떠는 여인이 귀여운 듯 아이작의 목소리가 한껏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느릿한 어투와 다르게 비부를 헤집는 사내의 손가락은 살짝 휘어진 채 주름진 안을 긁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행해진 음탕한 손장난에 레이첼이 잘게 흐느끼자 아이작이 얼굴을 바꿔 차갑게 일갈했다.
“……한때 그대와 놀아난 그 멍청한 머저리들과 같은 취급을 하는데.”
결국 레이첼의 눈물이 그의 옷까지 적셨다. 눈가를 붉히며 우는 모습이 속상했지만 동시에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번에는 에단 때문에 눈물짓는 게 아니었으니깐. 순전히 그, 아이작 바이허로 인한 눈물이었으니깐.
“난 에단과 달라. 그대에게 어수룩한 그 친구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좋게 타일렀는데도 날 이렇게 취급한다면야 나도 똑같이 대우해 줄 수밖에요.”
뚝 떨어진 말은 섭섭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못났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강한 마음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 합리적인 그조차 매번 계산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무시당할 바에야 차라리 미움받으리라. 에단처럼 어쭙잖게 굴어선 품 안의 여인을 차지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당장에라도 다독여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누른 채 레이첼의 음부에서 손을 빼고는 바지 버클로 손을 가져갔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소리를 지를 거면 질러요. 난 상관없으니깐.”
달칵이는 금속음이 소름 끼쳤다. 레이첼은 있는 힘껏 반항했다. 싫어. 싫어. 이 미친놈이!
“하지 마! 야! 하지 말라고 이 미친 새끼야! 여긴 밖이야!”
“그래서 더 좋은 겁니다. 순진하긴…….”
“하지…… 하지 말라잖아!”
“항상 느끼지만 그대는 소문에 비해 참 어수룩합니다. 밖에서 하는 게 처음이라니. 하지만 걱정 마요. 곧 즐기게 될 테니까. 나중에는 알몸으로 목줄을 채우고 산책도 시켜 주지요. 야외에서 개처럼 붙어먹으면 색다른 기분일 겁니다.”
덤덤하게 말하며 웃는 얼굴에 레이첼이 씨발, 씨발, 울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비명을 더 지르고 싶다가도 정말 다른 이에게 보이면 그 후 어떻게 될지 그것부터 걱정이 됐다.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신께 헌신한다는 의미인 잿빛 드레스를 입고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는 여자를 누가 곱게 볼까?
다른 이의 눈이라도 신경 쓰는 이라면 눈 딱 감고 소리를 지르겠건만 눈앞의 사내는 정말 들켜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거길 차 버릴까?’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레이첼은 입술을 꾹 내리 물고 아이작의 빈틈을 노렸다. 얼굴을 쳐 봤자 끄떡도 안 할 것 같으니 그 더러운 걸 꺼내는 순간 어떻게든 차 줘야지. 다리를 못 쓰면 주먹을 내질러서라도 거길 후려칠 생각이었다. 딱 붙은 몸에 빈틈 따위 없어 보였지만 레이첼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고자나 돼 버리라지.’
레이첼이 온 집중을 다해 아이작을 주시할 때였다. 옅은 인기척이 들리더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레, 레이첼 님.”
* * *
지크는 두려움과 당혹감에 완전히 질려 있었다. 레이첼은 눈물이 가득한 아이의 눈을 본 순간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사제에게 들키는 게 낫지.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 앞에서…….
‘이런 미친!’
당황한 레이첼이 굳은 채 속으로 온갖 욕을 뱉을 때였다. 의외로 먼저 움직인 건 아이작이었다.
“제길…….”
그는 아이를 발견하기 무섭게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인상을 구기는 얼굴에는 미미한 부끄러움과 분노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소리 질러도 된다고 당당히 말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레이첼은 의아해하면서도 이 개새끼에게도 마지막 양심은 있구나 안도했다.
아이에게 아주 잠깐 시선을 준 아이작이 레이첼에게로 천천히 몸을 숙였다. 급히 떨어졌다 다시 훅 다가온 덕에 레이첼은 눈에 띄게 움찔거렸지만 아이작은 그런 레이첼의 반응을 무시한 채 허리를 숙였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과 벽안은 어느새 조금 전의 감정을 숨긴 채 무덤덤해져 있었다.
“가만히…….”
작게 중얼거린 아이작이 자연스럽게 레이첼의 드레스 상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그녀가 한 발짝 물러나려 했지만 아이작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그는 차분한 손길로 레이첼의 치맛자락을 마저 당겨 주름진 부분을 펴더니 일어났다. 그리고 무어라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레이첼 님!”
레이첼은 흙이 지저분하게 묻은 아이작의 바지를 응시하다 지크가 안겨 옴과 동시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지크는 연신 그녀에게 괜찮으냐 물으며 눈물을 흘렸다. 무슨 일이냐고 저 귀족분이 그녀를 괴롭힌 거냐 묻는 눈에는 순수함만이 가득해 레이첼은 아무 일 없었노라고 그냥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준 것뿐이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분명 괴롭히는 거로 보였는데…….”
“으응? 아니야, 저 개새…… 아니, 백작님은 내 옷이 너무 더러워져서 깨끗하게 해 주려 그러신 거야. 너도 봤잖니, 여기 이렇게 당겨 주시는 거.”
아이가 눈물을 멈춘 건 거의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레이첼이 아이와 함께 신전 안으로 다시 들어섰을 때 에단과 아이작, 두 사람은 소동을 벌인 것이 무색하게 조용히 사라진 후였다.
* * *
무수한 칼날과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도 성녀 이사벨라의 발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회색 잿더미 사이 희고 빛나는 발.
그녀가 보여 준 기적에 마라벨의 폭군 카이살은 눈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하기야 누군들 그 기적에 무릎 꿇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니 여신이시여, 당신의 종들이 바라노니 당신의 딸들로 하여금 세상에 기적을 보이소서. 그리하여 하늘 아래 모두가 당신을 섬기게끔 하소서.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