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새장
“아버지! 당장 열어 주세요! 아버지!!!”
레이첼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쾅쾅 소리만 요란할 뿐 밖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일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레이첼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전에서 돌아온 이후 숨죽이듯 이비의 가문에 있던 그녀를 자작이 갑자기 끄집어내더니 따라오려는 이비에게는 당분간 자작가로 오지 말라 냉엄하게 말했다.
‘이비. 당신은 당분간 여기서 지내는 게 좋겠어. 레이첼은 내가 데려가리다.’
이비는 당연히 용납하지 못한다며 레이첼을 따르려 했지만 자작은 그런 그녀를 밀어 바닥에 넘어뜨리더니 자신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애블랑가에서 내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자작이 이비에게 그리 냉정한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당사자인 이비는 물론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정작 일을 벌인 자작은 발버둥 치는 레이첼을 마차에 태우더니 곧 자작가 어느 방에 그녀를 가뒀다.
‘설마 일이 틀어졌나?’
레이첼은 혹 카샨의 일로 자작가에 불똥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일로 제가 사형이라도 받은 거라면 아비가 어미에게 그리 군 것이 이해됐다. 아무리 냉정하게 군 것이라도 자식의 죽음을 알리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하지만 사형을 선고받았다기에는 당장 그녀가 머무르는 곳이 자작가인 게 이상했다.
“돌아 버리겠네! 며칠 동안 조용해서 아제프 경이 잘 해결한 줄 알았는데. 하긴 황태자가 쓰러진 일인데 잘 해결되는 게 이상하지.”
‘겨, 경…… 전하께서 설마…….’
‘걱정 마십시오. 기절하신 것뿐입니다.’
‘하, 하지만 어떡해요? 황족…… 그것도 황태자 전하라고요!’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나머지 일은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신전에서 카샨이 쓰러지기 무섭게 레이첼은 달아났다. 아제프에게 모든 걸 맡기기에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것보단 두려움이 컸다. 황태자가 쓰러지다니. 이유가 어찌 되었건 잘못하다간 그녀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위험해질 일이었다. 황족 시해 미수죄. 그건 반역과도 같은 게 아닌가.
“……차라리 조용히 있을걸.”
레이첼은 자신이 일을 크게 키운 것 같아 후회가 막심했다. 딱 한 번 눈 감고 참아 볼걸. 소리 지르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둘걸. 분명 끔찍했겠지만 제가 얌전히 몸을 내줬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 새끼랑 처음도 아니고 얌전히 있었으면…….”
비참한 제 처지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죽기 싫어 얌전히 몸을 주지 않았다 후회하는 상황이라니 이 얼마나 참담한가. 그녀는 정조를 지키지 못할 바에야 죽음을 택하는 책 속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살고 싶어! 흐아앙!”
찔끔찔끔 흐르던 눈물이 결국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레이첼은 문에 기대앉아 바닥을 두드리며 살려 달라 허공에 대고 애원했다. 누군가 봤더라면 귀족 영애가 보기 흉하다 손가락질할 꼴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홀로 방에 감금된 참이었다.
얼마 동안 울었을까. 신경질적인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여인의 날카로운 일갈이 들렸다.
“시끄러워. 조용히 못 해?”
“……제인 언니?”
익숙한 목소리에 레이첼은 문에 바짝 붙었다. 문 너머 들린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언니 제인이었다.
“누가 널 죽여?”
“언니? 정말 언니야? 언니 거기 있어?”
“그래, 있어. 그보다 네가 왜 죽느냐고. 레이첼, 너 또 사고 쳤니?”
레이첼은 사고라는 단어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사고라면 사고였다. 하지만 사고를 쳤다기에 나는 신전에서 기도만 했을 뿐인데 일이 그렇게 된 거니깐…….
“아, 아냐. 나 사고 안 쳤어.”
‘사고가 저절로 일어난 것뿐이지.’
“그런데 왜 죽기 싫다 난리야? 너 솔직하게 말해.”
“으응? 그냥…….”
‘무슨 일을 치긴 쳤군. 이번 일과 관계된 일인가? 하지만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면 이런 경우를 만들지?’
“너 제대로 설명…….”
“언니! 아버지께서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야? 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갇힌 거야? 어머니께는 왜 그러시는 거고.”
제인은 레이첼의 떨림을 눈치채고 그녀를 더 다그쳐 보려 했다. 하지만 이내 레이첼이 던진 질문에 그녀가 이번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해지자 입을 다물었다.
‘모르고 있어. 하긴 당장 정부로 들이밀어질 거라 알면 얌전히 있을 리 없지. 알면 난동 부릴 테니 일단 입 다물고 아버지께 가서…….’
“…….”
“언니?”
제인이 침묵하자 레이첼이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언니……. 제인은 제게 벌어진 일을 전혀 모르는 듯 보이는 동생의 목소리에 순간 울컥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절대 안 돼. 아무리 사고뭉치여도 그런 자리로 보낼 수는 없어.’
* * *
“아버지!”
“목소리가 크구나.”
“아무리 황태자라 하더라도 정부라니요, 그건 레이첼의 앞날을 망치는 거예요.”
“…….”
“델 후작 부인을 보세요. 공작가 출신에 아샬린 황후의 핏줄이어도 뒤에서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요. 그런데 레이첼이 그런 자리로 간다면요? 변변찮은 뒷배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견디겠…….”
“입 다물어라! 제인.”
쾅―
“뒷배가 없긴 왜 없어. 내가 있고 캐틀렛 공작 각하께서 계시지 않아!”
제인은 기가 막혔다. 자신의 아비지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애블랑 자작가는 정부가 된 레이첼을 보호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그리고 캐틀렛 공작은 그 성미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춰 보건대 레이첼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그녀의 쓸모가 다하면 곧바로 버릴 인물이었다.
“레이첼이 전하의 곁으로 가면 내 입지가 굳건해질 거다. 그리고 전하께서 레이첼을 보호해 줄 텐데 무슨 걱정을 그리 많이 하는 게냐.”
“아버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레이첼은 희생양 그 이상도 이하도 못 될 거예요. 게다가 황태자 전하의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곧 호프먼의 공주가 온다고요! 그러면 공주의 명예나 호프먼의 눈치 때문에라도 레이첼은 힘들어질 거예요.”
“호프먼은 리온보다 작은 나라다. 황태자 전하께서 소국의 공주 눈치를 왜 본단 말이야. 괜한 걱정 말아라.”
“그 소국의 공주보다 훨씬 못한 게 레이첼의 처지라고요! 아버지께서 무시하는 공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자작 영애인 레이첼이에요.”
“…….”
“아버지 제발…… 이번 일은 물리세요. 레이첼에게 못 할 짓이에요. 게다가 가문에 돌아올 이익도 크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일이 잘 풀리면 애블랑은 몇 단계나 위로 올라설 거다.”
“아버지!”
제인은 앉아 있는 자작의 발치로 몸을 던졌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그녀는 평소의 냉철함을 버린 채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저 하나로 부족하세요?”
“…….”
“저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애블랑가의 딸로서 한 번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고 부족했을지 몰라도 사교계에서 어머니 대신 가문의 입지를 다졌어요.”
“…….”
“혼인도 아버지께서 원하는 사람과 했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대로 그이와 함께 캐틀렛가에 충성도 했어요. 저나 그이나 한 번이라도 아버지를 어긴 적이 있던가요? 저 동생들에게 미움받으면서도 아버지 편을 들고 가문을 위해 말했어요.”
“…….”
“저랑 어머니께 약속하셨잖아요. 동생들한테는 강요 않으시겠다고요. 레이첼과 로즈는 편히 두신다면서요!”
“제인 이번 일은…….”
“그런데 왜 이러세요! 늦더라도 천천히 나아가면 될 일인데 왜 레이첼에게 희생을 강요하세요!”
자작은 오래도록 감정을 드러낸 적 없는 첫째 딸을 봤다. 제인은 장녀답게 항상 단단했다. 본인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아비인 그를 어긴 적이 없었으며 항상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준 착한 여식이었다.
그녀의 노력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작도 웬만하면 제인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잘된다면, 작은 가능성이더라도 레이첼이 델 후작 부인처럼 성공한다면 다시는 ‘그때’와 같은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리라.
“제인. 나는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 레이첼 하나를 희생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면 그리해야 해.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힘들더라도 가문의 일원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일이 잘 풀리면 ‘그때’처럼은…….”
“……혹 에드워드 삼촌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제인은 자작의 말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처럼…… 아비가 그리 말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에드워드 삼촌 때문에 그러시는 거냐 물었어요.”
자작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곧 긍정. 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맞군요. 삼촌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떡할 테냐!”
버럭 화를 내지른 자작의 목소리에는 노기와 함께 열등감,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너 말 한번 잘했다. 그래. 에드워드 때문이다. 에드워드! 내 가여운 동생!”
“…….”
“그 애는 세상없을 천재였어! 후작가건 백작가건 그 아이만큼 뛰어난 자질을 가진 또래를 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데!”
“…….”
“그 아이는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가문이! 내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애블랑. 제인은 아비의 막내 형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기사의 자질을 가진, 아비와는 열다섯, 그녀와는 열 살의 나이 차가 나는 삼촌. 그는 강간당할 뻔한 여성을 구해 주다 사람 하나를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상해를 가했다고는 하나 원래라면 적당한 벌을 받고 끝날 문제였다. 먼저 죄를 저지른 것은 상대 쪽이었으니. 하지만 하필 건드렸던 이는 모나타 공작가의 방계 귀족이었고 애블랑가에서 나서 볼 새도 없이 에드워드는 발목의 힘줄을 내어 줘야 했다. 의원이 빨리 치료를 한 덕에 걸을 수는 있었지만 뛸 수 없게 된 몸은 기사를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충격받은 에드워드는 그길로 가문을 떠났다. 그리고 아주 가끔 편지만 전해 올 뿐 그는 수도에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원래부터 가문을 일으킬 욕심이 많았던 애블랑 자작은 아끼던 막내 형제의 일 이후 캐틀렛 공작에게 더욱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식들에게도 제 굴종을 따르길 강요했다.
‘공작 각하께 예의 바르게 굴어야 한다. 특히 레이첼, 넌 공녀님께 잘해야 해.’
제인은 지금까지 가족 구성원 그 누구보다 아비를 이해했다. 그녀는 아래 자매들과 다르게 에드워드와 제법 친밀했기에. 어미인 이비는 몇 번이고 너마저 그러냐며 그녀를 말렸지만 사람이라면 복수를 꿈꾸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제인 또한 에드워드의 복수를 꿈꾸며 모나타만큼이나 힘 있는 캐틀렛에 머리 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아비는 막내 형제의 복수를 생각하느라 여식을 사지로 몰고 있었다. 게다가 아비의 행동이 복수만을 위한 것일까? 지금에서는 그것도 의문이었다.
‘절대 안 돼.’
제인은 정부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태롭고 불명예스러운지 잘 알았다. 잘되어도 손가락질이요 못되면 버러지만도 못한 게 정부의 삶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린 자매를 그런 사지로 보내는 아비가 이해되지 않았다. 형제를 그리 잃어 놓고 제 동생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아비가 미웠다.
“……맞아요. 그런 아버지 탓이었죠. 아버지가 약하고 아버지가 가문을 못 일으켰기 때문이었어요.”
“뭐?”
“그러니 레이첼이나 로즈에게 아버지 책임을 떠넘기지 마세요. 에드워드 삼촌께서 그렇게 된 건 다 아버지 탓이니깐.”
“너…… 네가!”
제인은 처음으로 아비를 거역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자작이 손을 올렸으나 제인은 아비가 손을 내리치기 전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세게 훔치고 아비를 또렷이 노려봤다.
“전 레이첼을 그런 자리로 보낼 수 없어요. 그러니 아버지, 한 번도 당신을 어긴 적 없는 제가 일을 치기 전에 순순히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 *
카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는 와중에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무례하게 굴던 캐틀렛 공작이 먼저 숙이고 들어온 것도 기분 좋았지만 그보다는 뒤따라온 선물이 더 마음에 찼기 때문이다.
‘여자? 성의 표시는 좋지만 난 그런 선물은 별로인데.’
여인 같은 질 낮은 선물 따위 본래라면 받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허리를 굽혔다고는 하나 캐틀렛 공작의 사람일 것이 뻔한 여인을 미쳤다고 들이겠는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이름에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도 분명 기꺼워하실 겁니다.’
‘……내가?’
‘레이첼 애블랑이라고 제 휘하 한미한 자작가 여식입니다.’
길게 웃음 짓는 입은 분명 무언가 아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카샨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공작의 말대로 오히려 기꺼웠다.
“쫓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오니 화를 내기도 그렇고 참…….”
카샨은 빈 새장을 툭툭 치며 손장난을 치다 제 침실에 붙어 있는 곁방 문을 보고 그리로 들어섰다.
“제법 괜찮게 꾸몄군.”
침실에 딸린 곁방은 본래 그가 아끼는 수집품들을 모아 두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유독 큰 침대를 가진 침실일 뿐 본래 자리했던 수집품들은 모조리 비워졌다.
카샨은 침대에 앉으며 방 크기를 가늠해 봤다. 침실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얼굴 하나 겨우 내밀 작은 창이 전부인 이곳은 곁방이라는 이름답게 작고 폐쇄적이었다.
“좀 작긴 하다만…….”
카샨은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침대를 쓸었다. 곧 이 위에서 얌전히 저를 기다릴 선물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새 한 마리 길들이기에는 딱 좋은 크기지.”
* * *
‘레이첼. 아버지께서 널 황태자 전하의 정부로 보내려 하셔.’
‘뭐? 드디어 정신이 나가신 거야?’
‘레이첼, 쉿! 조용히 좀 하렴.’
‘언니. 차라리 문이라도 열어 줘. 너무 높아서 창으로는 빠져나갈 수도 없고 뒷문으로 도망치면…….’
‘안 돼. 나도 쫓겨난 거 몰래 들어온 거야. 게다가 당장 열쇠도 없고.’
‘그럼 어떡하지? 이대로 그 새끼한테 가는 거야?’
‘그 새…… 하아. 레이첼, 내가 어디 가서 말 함부로 하지 말라…… 아니지. 그래, 그 새끼지. 공주랑 얌전히 결혼이나 할 것이지 왜 발정 난 개새끼처럼 널…….’
‘언, 언니?’
‘내가 구해 줄 거야. 당장은 힘들겠지만 방법이 있을 거야.’
‘부인! 빨리 가셔야 합니다. 더 지체했다간 자작님께서 오실 거예요.’
‘알았네. 레이첼, 내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얌전히 있어. 괜한 소란 일으키면 아버지가 널 다른 곳으로 옮길지도 몰라. 알았지?’
‘언니! 잠깐만! 언니! 나만 두고 가지 마!’
제인은 그 말을 끝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레이첼이 방에 갇힌 지도 사흘이 지났다.
“아니 벌써 노망이 드셨나! 어떻게 딸을 그런 자리에 팔아 버릴 생각을 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눈물은 쏙 들어갔다. 하지만 사라진 눈물을 대신하듯 분은 더욱 치밀었다. 정부라니! 딸을 정부로 팔아넘기는 아비라니! 이야기에서나 듣던 못된 아비가 딱 제 아비가 아닌가.
“매일 얌전히 굴어라. 몸가짐을 바르게 해라. 온갖 잔소리를 하시더니 조신한 숙녀로 만들어 기껏 시킨다는 게 정부야?”
레이첼은 자작을 쉴 새 없이 욕하며 침대 시트를 쥐곤 양옆으로 세게 당겼다. 목숨 걱정은 없었으나 이대로 있다간 잘 포장된 채 리본까지 달고 카샨에게 바쳐질 참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건 싫었기에 레이첼은 창문 밖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제인은 분명 그녀보고 기다리라고 했으나 내일이면 황궁에 갈 거라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탓에 더는 기다릴 틈이 없었다.
“이건 왜 이렇게 안 뜯겨!”
얇은 시트는 보기와 다르게 질겼다. 레이첼은 아비와 카샨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시트를 찢으려 했으나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에이미가 들어올 때…….’
레이첼은 한참 끙끙거리다 신경질적으로 시트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단단히 잠긴 문을 바라보며 식사를 가져다주는 하녀가 왔을 때 탈출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고민했다.
“……에이미는 몰라도 그 이상은 힘들겠지.”
하지만 그 방법은 이후가 문제였다. 같은 여자인 하녀 하나쯤이야 어찌 이긴다 해도 저택을 지키며 감시하고 있을 남자 하인들은 그녀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게 뻔했다.
결국 레이첼은 다시 시트를 쥐고 이번에는 이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꿈쩍도 않던 시트가 찌직 소리를 내며 조금이나마 찢어졌다.
한번 길이 트이자 그 이후는 수월했다. 레이첼은 옳다구나 싶어 작은 손으로 시트를 찍찍 찢어 내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한참 만에 넓었던 시트는 사라지고 대신 제법 긴 밧줄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였다. 레이첼은 일반 밧줄보다 얇아 보이는 수제 밧줄을 한차례 불안스레 바라보다 곧 결연한 얼굴로 침대 기둥에 묶었다.
‘설마 길이가 부족하지는 않겠지. 이 고생을 했는데…….’
레이첼은 창밖 바로 아래를 살피며 밧줄을 내렸다. 다행히 걱정과 다르게 밧줄은 짧지 않았다. 땅까지 레이첼 키만큼 모자라긴 했으나 그 정도쯤이야 뛰어내리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두어 번 더 주위를 살핀 레이첼이 결심한 듯 밧줄을 쥐고 창가에 섰다. 밧줄을 내릴 때는 몰랐는데 막상 뛰어내릴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레이첼이 핼쑥한 얼굴로 몇 번이고 침을 삼키다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찔한 높이에 그녀가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 * *
똑똑―
로즈는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리며 사방을 살폈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들어왔던가. 비록 복도에 아무도 없다지만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여간 꼭 사고를 친다니깐. 덕분에 내가 피곤하잖아.’
로즈는 사고뭉치인 언니 레이첼을 평소 한심스럽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한창 피어날 자매가 정부로 가는 건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맏언니인 제인과, 일을 도와주겠다 제안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자작가에 몰래 들어왔다.
‘레이첼을 감시하는 하녀 하나가 바람을 피우고 있더군요. 그것도 이미 결혼한 남자와 말입니다. 사내의 이름을 말하니 순순히 열쇠를 내어 주겠다 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다른 이의 도움으로 제 집을 침입한 기분은 묘했다. 꼭 치부를 들킨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 외에 방법이 없는데.
‘네가 가렴, 로즈. 이런 말 하기 정말 싫다만…… 너만큼 집을 잘 도망쳐 나오는 애도 없을 테니.’
그래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평소 남장을 하고 몰래 집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철없다 혼만 났는데 이번 일로 언니가 제 능력을 인정해 준 것 같아서.
‘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 흐뭇한 얼굴을 한 로즈가 멀기는 하나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댄 그녀가 조심히 열쇠를 넣고 돌렸다.
철컥―
몇 발짝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을 소리였지만 로즈는 괜시리 심장이 빨리 뛰는 걸 느끼며 재빨리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풍경은 그녀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훌쩍거리며 침대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자매는 방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활짝 열린 창문과 침대 기둥에 묶여 있는 엉성한 밧줄만이 로즈의 눈에 들어왔다.
“……하아. 가만히 있을 것이지.”
레이첼이 이미 탈출했음을 알아차린 로즈가 재빨리 창가로 갔다. 다행히 멀지 않은 정원에서 익숙한 백금발이 보였다. 로즈가 눈으로 레이첼을 쫒으며 밧줄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건물을 채 내려오기도 전 정원에서 여럿의 고함이 들렸다.
“아가씨께서 탈출하셨다! 잡아!!!”
* * *
“후작님! 각하께서는!”
“비켜!”
“이러시면 기사들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쾅―
레널드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사흘 동안 기다린 에단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레널드를 비롯해 말리는 하인들을 죄다 밀친 채 캐틀렛 공작의 집무실에 성큼 들어섰다.
“레널드, 이만 나가 보게.”
안절부절못하는 레널드와 달리 캐틀렛 공작은 태연했다. 그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하며 레널드에게 나가 보라 손짓했다.
“무슨 짓입니까! 그 애를 왜 건드리세요!”
레널드가 나가기 무섭게 에단은 캐틀렛 공작에게 고함치듯 말했다. 그러나 공작은 그런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했다 이리 무례하게 구는 거냐, 에단.”
“다 알고 왔으니 모른 척할 생각 마세요. 레이첼 애블랑이요! 걔를 황태자에게 밀어 넣은 건 아저씨잖아요!”
캐틀렛 공작은 매서운 얼굴의 에단을 보곤 혀를 찼다. 이 아이가 어쩌다 그런 것에 홀려서는……. 죽은 아내의 친척이자 죽은 친우의 아들인 그는 레이첼의 일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반기를 든 적 없는 착실한 이였다.
“그 일은 그 계집애와 애블랑 자작이 자청한 일이야.”
“거짓말 마세요! 걘 정부라면 치를 떠는 애라고요. 그런데 자진해서 정부로 간다? 말도 안 돼요.”
“네 정부 자리를 거절했다고 다른 자리도 거절할 거라 생각한 거냐. 순진하구나, 에단.”
“아저씨!”
“레이첼 애블랑 그 계집은 발칙하고 욕심이 많은 편이다. 알지 않니? 2년 전에도 그 더러운 계집은 전하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입에 담기도 지저분하게 굴었지. 그러니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말거라.”
공작은 에단을 타이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나 에단의 태생이 레이첼과는 궤를 달리한다 생각했다. 자고로 고귀한 것은 고귀한 것들끼리 어울려야 하는 법. 눈을 미혹한 안개가 물러가면 그 또한 제정신으로 돌아오리라.
하지만 공작의 판단은 틀렸다. 레이첼의 이름이 공작의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에단의 눈빛이 침잠하듯 어두워지더니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애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에단. 정말 왜 이러는 거냐. 네가 그 계집의 역성을 든다 한들 그 계집은 창부나 마찬가지야.”
에단은 레이첼을 더럽다 창부라 칭하는 공작을 참기가 어려웠다. 분명 그 또한 레이첼에게 비슷한 말을 수없이 던졌지만 다른 이에게 물건처럼 거론되며 오명을 쓰는 그녀를 마주하자 걷잡을 수 없는 분이 끓었다. 검은 눈이 얼음장처럼 서늘한 빛을 냈다.
“어릴 적에 로잘린과 널 그 계집과 함께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 천한 계집만 아니었으면 너희 둘은 지금쯤…….”
“그만.”
속이 마구잡이로 할퀴어지고 그이는 듯한 아픔에 에단이 공작의 말을 끊었다. 그가 무언가를 다짐한 듯 캐틀렛 공작의 푸른 눈을 마주했다.
“……아저씨께서는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죠.”
턱을 치켜든 에단은 내내 구기고 있던 얼굴을 펴고 꽤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작은 변한 그의 태도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저씨, 아니 공작 각하.”
공작 각하. 변한 호칭에 인상을 찌푸린 공작이 에단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살짝 숙였다 편 에단은 공작이 입을 열기 전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게 무언가 강요할 생각은 마십시오. 전 더는 각하께 후견받던 소년이 아닌 마일런 가문의 가주입니다. 그러니 제 곁에 있을 사람은 제가 고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단언컨대 캐틀렛 공녀는 제 짝이 아닙니다.”
“에단!”
“한낱 자작 영애는 들일 수 있어도 다른 사내와 도망친 약혼녀를 다시 받아 줄 만큼 마일런가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공작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감히 누구와 누구를 비교한단 말인가. 공작이 생각하기에 로잘린은 수십 번 결혼했어도 레이첼보다 고귀하고 깨끗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딸아이가 장난감으로 들인 자작가 영애한테 밀리다니?
“에단! 너 지금 로잘린을 그 계집과 비교하는 거냐!”
공작의 푸른 눈이 형형히 빛나며 분노를 표했으나 에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선언하듯 딱딱하게 말했다.
“캐틀렛과 마일런이 결혼으로 이어질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러니 각하. 마일런과 계속 친분을 유지할 생각이시라면 레이첼 애블랑에게 손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 * *
애블랑 자작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길에는 고급스러운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매끄러운 은발을 깔끔히 넘긴 사내와 차가운 표정의 귀부인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부인. 자작가를 빠져나가면 레이첼을 어디로 데려가실 예정이십니까? 딱히 숨길 곳이 없으면 백작가에 머무르게 하시지요. 백작가라면 자작도 캐틀렛 공작 각하도 함부로 들이닥치지 못할 테니까요.”
“도움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일로 제가 백작님과 레이첼을 허락한 거라 생각은 말아 주세요.”
아이작은 단호히 선을 긋는 제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레이첼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졌지만 분위기가 어찌나 다른지. 아이작이 보기에 제인은 레이첼과 전혀 다르게 차갑고 딱딱하기만 한 별 재미없는 여인이었다.
“이런. 소문만큼 냉정하십니다. 하지만 젊은 남녀가 서로 교제하는 것이 그리 큰 흉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매정하게 구십니까. 그러지 말고…….”
“전 제 여동생이 백작님같이 잇속 밝은 바람둥이와 교제하는 걸 허락할 수 없어요.”
제인의 말에 아이작의 입이 순간 딱 붙었다. 자신이 범죄자도 아니고 눈앞의 여인은 그를 여동생을 가지고 놀다 잡아먹는 괴물쯤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레이첼의 앙칼진 성격이 제 언니에게서 왔나 보군. 자매가 쌍으로 처지를 몰라.’
아이작은 제인을 콱 짓눌러 버릴까 하다 그녀가 레이첼의 핏줄임을 상기하고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제법 심기가 상했기에 그는 대신 제인을 조금 골려 주자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싫었다면 도움도 거절하시지 그러셨습니까?”
“…….”
“부군인…… 그래, 랑트 자작이 도와주지 않던가요?”
남편이 언급되자 제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랑트 자작. 제인의 남편인 그는 애블랑 자작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레이첼이 황태자의 정부로 가면 제게 떨어질 빵 부스러기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감을 표했다. 그리고 도와 달라 청하는 제인에게 애블랑 자작의 말을 따르라 은근하게 종용했다.
“하기야 자작은 도움이 안 됐겠지요. 부인께서 더 잘 알겠지만 그는 아닌 척 은근히 욕심을 부리는 자 아닙니까.”
눈을 접으며 말하는 꼴이 얄미웠으나 아이작의 말은 사실인 데다 그의 분위기가 묘하게 강압적으로 변한 터라 제인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릴 뿐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자작 부인. 난 랑트 자작처럼 많은 걸 바라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도움을 준 거에 대해 감사 인사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다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보십니까?”
“감사 인사는 몇 번 드렸어요. 조금 전에도…….”
“그랬던가요? 하지만 제 귀에 들린 건 부인의 날카로운 말뿐이었던 거 같은데.”
“백작님. 절 놀리시는 거면 이쯤 하세요.”
비꼼이 이어지자 제인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한 소리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인이 아이작을 막 쏘아붙이려던 차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하인이 굳은 표정으로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주, 주인님. 일이…….”
하인의 얼굴에 결과를 예상한 아이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감사 인사는 받을 수 없겠군요. 일이 틀어진 모양입니다.”
* * *
“으음…… 윽!”
작게 뜬 눈 사이로 비치는 시야가 희뿌옜다. 레이첼은 어질어질한 머리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언니! 레이첼!’
‘로즈!’
‘애블랑 영애, 마차에 타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저 정말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몸 일으키기를 포기하자 부유하는 기억 사이로 로즈가 언뜻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애블랑 자작의 굳은 얼굴과 여러 기사가 생각났다. 기사들이 날 잡았고…….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멋대로 되지 않는 건 몸뿐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통증에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 뿐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머리 아파.’
깨질 듯 아픈 머리에 레이첼은 천장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은 열려 있지만 그 외의 감각은 공중을 부유하는 기분이라 시간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천장의 문양이 점차 선명해짐에 따라 레이첼은 제 몸에서 간질간질한 자극을 느끼고 눈을 끔뻑였다.
‘뭐가 있나?’
몽롱한 와중에도 점차 강해지는 자극에 레이첼이 무거운 고개를 가눠 밑을 봤다. 그리고 순간 그녀가 마주한 건…….
“응? 벌써 일어났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난 흰 가슴과 그 위 앙증맞은 유두를 게걸스레 핥고 있는 사내의 환한 금발이었다.
* * *
“건방진 입이야. 하지만 제정신이 아닐 테니 용서하지.”
레이첼은 제 가슴을 물고 빠는 카샨을 밀어 내려 했으나 위로 쭉 뻗은 채 침대 헤드에 결박당해 있는 팔은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비, 비켜 주세요.”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레이첼은 그나마 자유로운 입으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카샨은 그녀가 부정적인 단어를 뱉기 무섭게 이를 세워 벌주듯 그녀의 가슴을 세게 깨물었다. 레이첼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흣!”
카샨은 아픔에 떠는 레이첼을 키득거리며 구경하다 말랑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가 엄지의 평편한 부분으로 젖꼭지를 뭉근하게 쓸어 올리다 순식간에 손톱을 세워 찍어 누르듯 짓이겼다. 강약을 예상할 수 없는 손장난에 약 기운을 머금은 레이첼의 몸이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새 발정이 난 모양이야. 하긴 꽤 괜찮은 약이지.”
“아, 아니야. 흐읍.”
레이첼의 반응을 눈치챈 카샨이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아기처럼 레이첼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젖이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그는 꼭 젖이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쭉쭉거리는 습한 소리가 커질 때마다 레이첼의 눈은 한층 더 흠뻑 젖었다.
“하으…… 응…… 으응…….”
강한 흡입력이 주는 자극에 레이첼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에 취한 몸은 여전해 헐떡이며 야릇한 숨을 내쉬는 것 외에 레이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카샨은 얌전한 상태로 몸을 붉히는 레이첼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는 낯을 했다. 약을 써 재미가 없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고분고분한 레이첼은 마음에 꼭 찼다. 2년 전 귀여웠던 그때 같지 않은가. 그는 제 손길에 울면서도 순종적이었던 레이첼을 떠올리며 그녀의 가슴을 마음껏 희롱하다 한참 만에야 입을 뗐다.
“보기 좋군. 잘 차려진 만찬을 보는 기분이야.”
무릎을 세운 그의 눈에 레이첼의 흰 나신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흐르듯 곡선을 그린 몸에 얇고 긴 다리. 꽁꽁 묶인 채 결박된 손목과 모로 돌린 채 가엽게 눈물짓는 얼굴까지. 제 취향껏 차려진 레이첼을 보자 카샨은 순간 허기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급박해진 그가 상체를 숙인 뒤 한 손으로 레이첼의 양 뺨을 잡아 저와 시선을 마주치도록 했다. 가랑가랑 눈물이 맺힌 제비꽃색 눈이 그를 마주하자 척추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온몸을 훑었다.
“제길.”
낮은 목소리와 함께 느른한 금안이 위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낮게 욕설을 뱉은 카샨은 엄지손가락으로 레이첼의 뺨을 거칠게 문지르다 몸을 내려 레이첼의 배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터질 듯 팽창한 그의 성기가 레이첼의 가슴골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더니 부드러운 살덩이 사이에서 기분 좋게 마찰됐다.
데일 듯 뜨거운 물건이 제 가슴을 범하듯 움직이자 기함한 레이첼이 수치스러움에 그나마 자유로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나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러운 물건은 그런 레이첼을 따라붙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턱은 물론이요 간혹 입술까지 찔러 댔다.
“이, 이런 거 싫, 싫어. 흐윽…….”
카샨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첼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가슴을 한껏 즐기다 다시 몸을 세웠다. 성기 앞부분에서 나온 액이 레이첼의 가슴을 시작으로 옴폭 들어간 배, 그리고 더 아래까지 번들거리는 선을 그리며 내려갔다.
“흐으…….”
다리 사이를 쿡쿡 찌르는 물건에 잔뜩 긴장한 레이첼이 배에 잔뜩 힘을 줬다. 카샨이 레이첼의 두려움을 눈치챈 듯 비죽거리며 웃다 그녀의 뺨을 쓸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그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아악!”
예고도 없이 박힌 물건에 레이첼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퍼덕였다. 그녀의 가여운 비명에도 불구하고 카샨은 제 것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몸집을 키운 성기가 좁은 내벽 안에서 잔뜩 조여지자 그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한쪽 팔꿈치를 레이첼의 얼굴 옆에 짚은 카샨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력자 특유의 오만한 얼굴을 한 그는 레이첼을 깔보듯 내려다보다 울상인 그녀의 입에 제 손가락 하나를 욱여넣고 여린 입 안을 헤집었다. 고통에 입을 벌리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레이첼은 어떻게든 그 손길을 피해 보려 했지만 집요한 손가락은 반항하는 그녀를 쉬이 제압하고 혀를 찍어 눌렀다.
“정성껏 빨아 봐.”
체념한 레이첼이 입술을 오므려 명을 따랐다. 그러나 행동과 다르게 자색 눈은 눈물을 머금은 와중에도 쏘듯 카샨을 노려봤다. 제법 악에 받친 모습이었건만 카샨은 순종적인 행동과 다른 앙칼진 눈에 제 뒤틀린 소유욕이 충족됨을 느끼고 소리 내 웃었다.
“흐읍…… 흐으…… 응!”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는 허릿짓이 계속되자 고통에 이어 쾌감이 따라왔다. 레이첼은 더운 숨을 내쉬며 아래를 드나드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다 흥분해 거친 숨을 내쉬는 카샨을 올려다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흐으…… 재수 없는 새끼. 저건 또 무슨 얼굴이야?’
잔뜩 수축했다 이완되는 사내의 근육 곳곳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교만한 금안은 여전했지만 얼굴은 어쩐지 조금 전과 달랐다. 느른함이 사라진 모습. 그는 무언가 고민하듯 레이첼을 보며 이따금 제 입술을 훔쳤다.
“……입 맞춰 주세요, 전하.”
새빨간 혀를 보던 레이첼은 카샨의 손가락 빨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카샨은 잠시 놀란 눈을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벌어진 그녀의 입에 제 입을 가져다 댔다.
혀가 얽히며 타액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드럽게 감기는 혀에 맞춰 카샨의 몸짓도 부드러워졌다. 그는 거칠게 움직였던 조금 전과 다르게 레이첼의 허리를 더듬고 가슴 아래를 쓸며 은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레이첼은 그 손길이 참 징그럽고 개같다 생각하면서도 여기까지 온 이상 차라리 즐기자 생각했다. 강간이라 발광하고 울어도 카샨의 권력 앞에 제 억울함은 꺾일 것이요 애블랑 자작이 그녀를 카샨에게 바친 이상 아무도 그녀 편을 들어 주지 않을 터였다.
‘먼저 꼬리 친 발칙한 계집이 돼 있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행히 앞뒤 상황을 다 제치고 쾌락만을 생각하면 카샨은 나쁜 잠자리 상대는 아니었다. 레이첼은 그가 저를 애완동물처럼 다룬다면 자신은 그를 물건처럼, 그러니깐 자위 도구라 생각하겠다 다짐하며 그에게 맞춰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굴자 카샨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그는 레이첼과 계속 입 맞추는 와중에도 느리지만 강하게 허리를 쳐올리며 눈짓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곧 좁은 방은 곧 남녀가 얽혀 질척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레이첼이 다리를 들어 카샨의 허리에 감자 그녀의 허리를 잡은 카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느려졌던 속도가 다시금 빨라지며 레이첼의 몸이 앞뒤로 들썩였다.
“아아……아, 아으…… 흡!”
고통을 동반한 쾌락에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카샨은 끝까지 레이첼을 쫓아 그녀의 입에 입 맞추고 제 혀를 밀어 넣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쾌감과 막히는 숨구멍. 레이첼은 부족한 공기에 어지러운 와중에도 착실히 쾌락을 느꼈다. 동시에 움직임이 빨라진 카샨의 성기가 내벽 곳곳을 세게 쑤셨다.
“흐읍…… 읏! 하으…….”
아랫배를 가득 채운 부피감에 레이첼이 막힌 목으로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위도 아래도 콱 막혀 사내에게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끔찍한 일이었다.
‘……요망한 계집.’
레이첼과 비슷하게 카샨도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했다. 저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안이, 이대로 빨려 들어가 파묻혀 녹을 듯 눅진한 여인의 몸이 그를 돌아 버리게 했다. 이런 걸 두고 가다니……. 진작 정부나 측근 시녀로 만들어 옆에 묶어 뒀어야 했는데. 제가 가는 곳 어디든 끌고 다니며 내킬 때마다 저 얼굴에 몸에 그리고 안에 싸질렀어야 했는데. 하늘을 찌를 듯 오만한 그는 과거 레이첼을 버렸던 스스로를 멍청하다 욕하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깟 계집 하나 때문에 내가…….’
다행히 기분이 더 저조해지기 전 사정감이 몰려왔다. 카샨은 쓸모없는 후회 따위 배출하겠다 생각하며 입을 떼고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세게 당겼다. 갑작스레 젖혀진 탓에 목이 아플 법도 했지만 아픔을 호소하기 전 느리게 나갔다 다시 들이닥친 사내의 성기와 함께 강렬한 자극이 레이첼의 머리를 강타했다. 다리를 한껏 벌린 그녀가 원치 않는 사내의 정을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아으……!”
“하…….”
뜨거운 숨을 내쉬는 카샨은 사정 후에도 욕심껏 레이첼의 안에 성기를 박고 있다 한참 만에야 성기를 빼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정액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레이첼이 울음을 토해 내듯 신음했다.
카샨은 등 뒤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레이첼을 내려다봤다. 축 처진 그녀는 여전히 묶인 채 애처롭게 헐떡이고 있었다. 온통 붉어진 몸과 짓무른 눈가. 터진 입술까지. 한 번의 정사 동안 그녀는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하지만 카샨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인내했던 욕심을 터뜨린 그는 자제할 수 없는 욕망에 반쯤 미쳐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네까짓 계집은 죽을 때까지 다리를 벌려야 해. 오만한 지배자로 돌아온 그는 아제프 때문에 머리가 깨진 채 레이첼을 놓쳤던 일을 기억해 냈다. 폭군이 마음속 일말의 연민을 지운 채 레이첼의 손목을 결박한 줄을 풀었다. 푸른 멍이 드러나며 레이첼의 손이 자유를 되찾았다. 하나 그뿐, 이미 사냥당한 레이첼에게 카샨을 밀어낼 힘은 없었다.
“아윽…… 전, 전하. 그, 그만…….”
카샨은 레이첼의 긴 머리채를 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제 다리 사이로 끌었다. 겨우 쉬고 있던 차 벌어진 폭력에 레이첼이 새된 목소리로 그만하라 울었다. 가는 비명이 가여울 법도 했건만 카샨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레이첼의 입술에 제 성기를 비비며 느긋하게 말했다.
“리첼, 내 작은 새. 지금껏 미룬 일은 마저 하고 쉬어야지.”
* * *
“언니! 어서 와.”
“아샤타.”
델 후작 부인 아샤타는 방긋 웃는 얼굴로 언니인 모나타 공작을 맞이했다. 그녀가 구불구불한 주홍빛 머리를 흔들자 그 위를 장식한 보석들이 제각각 소리를 내며 빛을 발했다.
“차림새가 과하다.”
모나타 공작은 여동생의 머리를 장식한 보석들을 뜯어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세금 문제 때문에 캐틀렛과 다툼 중인데 모나타 출신의 정부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차림새를 하는 건 괜한 말을 부를 수 있었다.
“폐하께서 선물하신 것들인데 감히 누가 뭐라 하겠어.”
“아샤타. 늘 말하지만 넌 황제 폐하의 사람이기 전에 모나타의…….”
“알았어요, 알았어. 밖에서는 자중할게. 그러면 상관없잖아?”
모나타 공작은 나잇값 못 하는 여동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한창때도 지났건만 그녀의 막내 여동생은 바뀌지 않는 외모처럼 여전히 철이 없었다.
“네가 꺼낸 말이니 밖에서는 꼭 자중해. 그보다 무슨 일로 날 불렀지?”
“잔소리 다음에는 바로 본론이야?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건 오랜만인데. 언니는 나한테 너무 매정해.”
“일이 바빠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어. 그러니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매정한 핏줄의 말에도 아샤타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꽃같이 어여쁜 그녀는 일은 혼자 하냐며 작게 툴툴거리다 모나타 공작의 팔을 잡아 화려한 카우치로 끌었다.
“별건 아니고……. 내가 듣기론 캐틀렛 공작이 우리 조카님한테 납작 엎드렸다는데 사실이야?”
생글거리며 웃는 아샤타의 눈은 소녀처럼 순진무구해 보였으나 모나타 공작은 핏줄의 눈에서 욕망을 읽었다. 또 시작이군. 핏줄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강 예상한 모나타 공작이 카우치에 앉아 대충 답했다.
“……그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긴 했지.”
“어머! 잘됐다. 그럼 언니, 리이트 후작도 일전에 우리 편으로 돌아섰고 캐틀렛도 우리 조카님 눈치 보면서 숙이고 들어왔는데 이참에 나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
“…….”
“나 우리 조카님 결혼식 때 폐하 곁에 서고 싶어. 물론 그 여자는 그날 안 보였음 하고. 사실 자기 자식도 아니고 황후는 올 필요 없잖아? 불청객일 뿐이야.”
아샤타의 요구는 여느 때와 같았다. 앤 황후 자리를 대신하고 싶다. 폐하 곁에 나만 서고 싶다. 정부로서 감히 상상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아샤타는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요구했다.
“그건 안 돼. 타국과의 공식적인 행사다. 공식 석상에서 폐하 곁에 서는 건 황후 폐하뿐이야.”
모나타 공작은 핏줄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자 지금껏 웃음을 잃지 않던 아샤타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지더니 찢어질 듯 높은 비명이 응접실 안을 울렸다.
“왜!”
“아샤타.”
“우리 조카님이잖아! 내 언니가 낳은 내 조카님이야. 캐틀렛이 아닌 모나타의 피를 이어받은 내 핏줄이라고! 그러니 그 여자보단 나한테 더 자격이 있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황태자 전하는 사적으로는 네 핏줄이되 공식적으로는 황후 폐하의 자식이야. 넌 모나타의 일원이지만 일개 정부다. 그런 말은 안 돼.”
일개 정부라는 단어에 아샤타의 눈에 독기가 잔뜩 올랐다.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 듯했지만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었기에 모나타 공작의 눈에는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일개 정부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가 어떻게 그렇게 말해?”
“그 길을 택한 건 너야. 스스로 선택했으면 책임도 져야지. 내 탓은 마. 당시 난 널 감금해서라도 막으려 했어.”
“언니가 적당한 때 도와줬으면 그 여자는 진즉 쫓겨나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을 거야! 지금쯤 내가 황후였을 거라고!”
“아샤타. 쓸데없는 말만 할 거면 이만 돌아가 보마.”
모나타 공작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언니가 그렇게 구니깐 조카님이 점점 날 멀리하는 거야.”
아샤타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리 높였던 조금 전과 다르게 소리는 현저히 내려가 있었다. 공작은 삐죽대면서도 한풀 꺾인 자매를 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할까 말까 하던 잔소리를 늘어놨다.
“이것도 몇 번 말했다만 조카님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시다. 내 앞에서는 모르겠지만 폐하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호칭을 조심해.”
“아주 혼자 잘났지!”
“…….”
“그럼 이건 알고 있어? 캐틀렛 공작이 조카님한테 여자를 바쳤대. 공작 밑 한미한 가문의 여식이라는데 조카님이 그 계집애를 내치긴커녕 요즘 끼고 산다 소문이 자자해.”
공작의 잔소리는 아샤타에게 일말의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여전히 카샨을 조카님이라 칭하는 아샤타를 보며 모나타 공작은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렸지만 그뿐, 여동생의 의미심장한 말에 집중한 공작은 같은 잔소리를 또 하지는 않았다.
“……듣긴 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한미한 집안의 영애일 뿐이야. 문제 될 건 없어.”
“흐응…… 정말 그럴까? 언니는 모르겠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건 말이야……. 알잖아, 황제 폐하께서 아샬린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영리한 분이시다. 여인에게 미쳐 가장 든든한 우군을 버리실 분이 아니지.”
카샨을 믿는 듯한 공작의 말에 이번에는 아샤타의 눈썹이 올라갔다. 눈을 또렷하게 뜬 그녀는 제 언니를 한심한 듯 바라보다 고개를 과장되게 흔들었다.
“아니. 이번에는 언니가 틀렸어. 상황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되지. 우리 조카님은…… 슬프지만 나나 언니한테 별달리 정을 느끼지 못하잖아? 뭐…… 마들렌하고는 좀 친하다지만 영리한 외사촌 아끼는 정도일 뿐이고.”
“…….”
“언니도 알 텐데. 루프첸에서 돌아온 후로 조카님이 나나 언니를 예전보다 더 멀리하고 있어. 모나타의 간섭을 싫어하는 티를 이제 대놓고 내고 있단 말이야. 물론 모나타를 버리진 않으시겠지. 하지만 언니, 우리 조카님이 캐틀렛은 버릴까? 언니 말대로 영리한 조카님이야. 게다가 하나뿐인 황태자로서 누구보다 고귀하게 자란 조카님이지.”
“…….”
“우리 조카님은 권좌에 올라서는 순간 캐틀렛과 우리를 경쟁시킬 거야. 정에 얽매이지도 않는 데다 그래야 본인과 황가가 더 우뚝 서니깐 당연히 그러겠지.”
“…….”
“그러니 내 똑똑한 언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캐틀렛을 지금 무너뜨리는 게 좋아. 조카님이 권좌에 오르기 전 캐틀렛이 무너지면 조카님이라도 어쩌겠어? 남는 게 우리뿐인데.”
아샤타의 말은 공작도 짐작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황태자가 아무리 모나타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나 그는 결국 리온. 황가의, 그것도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이미 죽어 버린 어미의 집안을 이용할지언정 아껴 줄까? 아낀다 한들 제 핏줄로 여기며 한 몸이라 생각할까?
당연히 아니었다.
“말하고 보니깐 똑똑한 언니가 이런 걸 모를 리 없고……. 설마 캐틀렛가 계집과 도망간 로지오 때문에 망설이는 거야?”
“…….”
“……보아하니 정답이네.”
모나타 공작이 좋은 시기 캐틀렛을 공격하길 주저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정치적 균형 때문이요 또 하나는 캐틀렛가의 여식과 도망간 아들 때문이었다.
“차라리 마들렌을 후계자 삼아. 로지오 걘 내 조카이긴 하지만 너무 유약해. 여자이긴 해도 마들렌 쪽이 나을걸? 마들렌은 언니를 빼닮아 영리한 아이야.”
아샤타는 답답한 듯 말했으나 모나타 공작은 아들인 로지오를 아껴 주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만약에라도 로지오가 하나뿐인 캐틀렛 공녀와 이어진다면…… 긴 도주 중 로잘린 캐틀렛이 모나타가의 아이라도 가진다면…….
‘……캐틀렛을 손쉽게 넣을 가능성이 생기겠지.’
무너진 가문보다는 멀쩡한 가문을 꿀꺽 삼키는 것이 낫지 않나. 어차피 당장 캐틀렛과 전쟁은 불가했다. 겨우 맞춘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황제가 두고 볼 리는 없었으니.
“쓸데없는 소리. 가문의 후계 결정은 내 몫이다. 주제넘게 굴지 마.”
모나타 공작은 속생각을 핏줄에게 말하지 않았다. 애매하게 영리한 여동생에게 모든 걸 말했다간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길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샤타, 그녀의 여동생은…….
“알았어. 그럼 딴건 몰라도 조카님 곁 캐틀렛가의 간자인 계집만은 처리해 줘. 그따위 가문의 어린 계집애가 조카님 곁에 붙어 속살거릴 걸 생각하니 비위 상해. 뭐, 하는 김에 황후마저 꺾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아샤타. 계속 말하지만 황후 폐하는…….”
“나도 계속 말했어.”
“…….”
“언니. 난 정말 잘해 낼 자신 있어. 아샬린 언니만큼 폐하의 사랑도 받고 있고 자식은 없으니 조카님을 몰아낸다거나 하는 딴마음을 품지도 않아. 내가 바라는 건…….”
황제를 사랑했다.
“오직 폐하 곁에 당당히 서는 것뿐이야.”
아샤타는 죽은 자매를 사랑한 황제를 사랑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이 죽은 자매의 대용품이 된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정부가 되는 불명예를 안고 그것도 모자라 혼자만의 사랑에 절절매고 있었다.
모나타 공작은 사랑에 빠진 여동생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누구보다 가문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그녀의 여동생은 불같은 이라 사랑 때문에 언제고 가문을 배신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차라리 황제가 죽은 아샬린를 사랑하듯 아샤타를 사랑했다면, 아니 아샬린에게 준 사랑의 반만이라도 아샤타에게 주었다면, 그랬다면 공작은 물심양면으로 아샤타를 도왔을 것이다. 캐틀렛에서 반발한다 한들 황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나타를 도울 터이니.
그러나 공작이 보기에 황제에게 아샤타는 죽은 아샬린의 대용품일 뿐이요 정치적인 도구일 뿐이었다.
‘아샬린이 살아 있었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모나타 공작은 아샤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어차피 황태자도 정해진바 죽은 여동생이 한번 차지해 껍데기뿐인 황후 자리를 정부가 된 여동생에게 얻어 주고자 가문의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 * *
“……좀 적당히 하세요. 힘들단 말이에요.”
침대에 늘어지듯 누운 레이첼이 카샨을 타박했다. 제법 신경질적인 목소리였건만 카샨은 낮게 웃음을 터뜨릴 뿐 기분 나쁜 내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레이첼의 위에 자리를 잡은 채 그녀의 목덜미를 빨고 있는 그는 배부른 맹수처럼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왜? 움직이는 건 나뿐이지 않나.”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느릿한 카샨의 말에 울컥한 레이첼은 고함을 빽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까슬거리는 목이 아파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황궁으로 끌려와 작은 방에 갇힌 이후 레이첼은 시도 때도 없이 몸을 겹쳐 오는 카샨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그는 온종일 발정이 난 것처럼 굴었다. 일국의 황태자란 인간이 어쩜 그리 시간이 자주 비는지. 레이첼은 도무지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허리 아파…….’
지금 막 끝난 정사도 레이첼이 꾸벅 졸아 가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시작됐다. 카샨은 레이첼이 몽롱한 정신으로 막 빵을 쥐고 있을 때 들이닥쳐 그녀가 쥐고 있던 빵을 던져 버렸다.
바닥으로 추락한 빵에 어찌나 서럽던지. 레이첼이 주린 배를 부여잡고 끼니는 챙겨야 되지 않느냐며 웅얼거리자 카샨은 그녀를 앉힌 채 하얀 크림을 먹이며 지분거림을 이어 가다 레이첼이 크림을 가슴께로 떨어뜨리자 그걸 치워 준다는 핑계로 그녀를 침대로 던져 버렸다.
“방금……으음…… 하셨잖아요. 그만. 정말 힘들단 말이에요. 저 힘들어요, 전하. 졸리고…….”
“계속 말했잖아, 그대가 어여뻐 가만둘 수 없다고. 리첼, 내 작은 새.”
“정말! 싫다는……아흑!”
카샨은 레이첼의 말을 웃어넘기며 이번에는 그녀의 귓불을 세게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레이첼이 비명을 터뜨리며 카샨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아플 법도 했건만 며칠 동안 욕구를 잔뜩 풀어 한껏 물러진 그는 습관처럼 말하던 감히라는 단어 대신 낮은 신음을 흘리며 물고 있던 레이첼의 귀를 길게 핥아 올렸다.
“귀가 또 붉어졌어.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 모자란 거지? 응?”
“그럼 그렇게 깨무는데 안 빨개지면 피 마른 시체지 인간이겠어요? 그리고 제발 좀 떨어지세요! 자고 싶어요…….”
한껏 풀어진 금안과 허벅지에 비벼지는 존재감에, 레이첼은 울먹이며 싫다 버둥거렸다. 계속되는 자극은 분명 나쁘지 않았지만 당장 체력적으로 너무 지쳤다. 그리고 날짜를 제대로 헤아린 것이 맞는다면 이쯤 돼서는……
‘위험해.’
레이첼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임신이었다. 당장은 카샨에게 잡혀 있지만 레이첼은 그의 정부가 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황족을 잉태하는 순간 도망은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질 것이요 정부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 될 터였다.
보통 상황이라면 사내가 안에 얼마나 쏟아붓든 별걱정 없었다. 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초는 비싼 만큼 효과가 탁월했고 복용만 꾸준히 한다면 임신 걱정은 거의 없었다. 대신 먹어 줘야 하는 주기가 다른 것들에 비해 현저히 짧았지만.
레이첼이 약효가 다할 일자를 생각하며 불안감에 입술을 물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보고 있던 카샨이 불쾌한 듯 물었다.
“왜 딴생각이지?”
“……읏! 임신이요! 이러다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레이첼은 카샨의 물음에 잠깐 머뭇거리다 그에게 귓불을 또다시 깨물린 후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아이를 원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타국의 공주와 결혼이 코앞인 데다 과거 그의 언사로 비춰 보건대 그는 사생아 따위 만들 생각이 없다 전에도 말했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아이의 미래에 관한 보장도 확실히 해 주지.’
물론 최근 했던 말이 좀 걸리긴 했지만 당시도 그는 아이에 관해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전하께서도 아이는 싫으시잖아요. 그러니깐 약을 좀 챙겨 주라 언질이라도 주면…….”
“내가 언제 아이가 싫다 했지?”
“네?”
“물론 사생아란 게 달갑지는 않지. 하지만 나쁠 것도 없잖나. 내 핏줄인데.”
“…….”
“당장 직계 황족이라고는 폐하와 나뿐인데 약을 챙겨 가면서까지 아이를 피하고 싶지 않아.”
너무도 담담한 카샨에 말에 레이첼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당장 도망칠 마땅한 방안도 없는데 피임조차 못 한다? 백지장같이 하얘진 머릿속에 아이를 가진 채 정부가 될 미래가 펼쳐지자 귓가에 댕댕 종소리가 울렸다.
“리첼, 걱정 마. 외모가 상할까 걱정인 거지? 하지만 넌 배가 불러도 아름다울 거다. 관리도 착실히 받게 해 주지.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면 내게 줄 게 하나 더 생기잖나.”
“…….”
“여기서 젖을 흘리는 것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아. 분명 맛있겠지.”
파랗게 질린 레이첼의 상태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카샨은 제 음습한 욕망을 주절거리며 레이첼의 젖꼭지를 쿡쿡 건드렸다. 사실 그로서도 스스로의 말은 즉흥적인 것이었다. 레이첼의 말대로 공주와 당장 결혼해야 하는데 사생아라니. 대외적으로 일은 복잡해질 것이요 말은 많아질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첼과 자신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자 심장 가득 꽉 찬 느낌이 드는 것이 어쩐지 만족스러웠다.
“아이에게는 유모가 붙을 테니 네 피부만큼이나 흰 젖은 다 내 차지지.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고 나면 말이야 당분간은…….”
“절대 안 돼요! 전하와 이 짓거리 하는 것도 신물 나는데 아이라니! 제정신이세요?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요!”
카샨의 상상이 구체화되어 말로 계속 나오자 참지 못한 레이첼이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껏 그를 떨쳐 냈다. 단단한 카샨의 육체는 작은 힘에 밀려 나진 않았으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약하게나마 움찔거렸다.
“그렇게 거부하니 불쾌하군. 왜 싫은 거지? 내 아이가 네게 싫을 이유가 있나?”
굳은 얼굴이 조금 전과 달랐다. 입매를 내린 그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냉기가, 레이첼의 몸을 누른 팔에는 은근한 힘이 실렸다.
“황족의 아이를 배태하면 쉽게 영지를 가질 수 있어. 게다가 내 첫 아이를 낳는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가지게 될 테지. 내 여자라 확정되는 건 물론이요 델 후작 부인만큼이나 호사를 누릴 수도 있을 거다. 그녀가 폐하 곁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진 않을 텐데.”
“전하! 전 젊은 미혼의 영애예요. 지극히 평범…… 아니, 많이 예쁜 미혼의 영애라고요. 여러 신사분하고 교제해도 모자를, 좋은 나이에 왜 아이를 가지고 정부가 되는 불명예를 택하겠어요?”
“어떤 놈하고 놀아나도 나만큼 네게 뭘 줄 수 있는 사내는 없어. 네 주제에 아무리 좋은 남편을 만나도 내 정부보다 부와 권력을 쥘 수 없을 거다.”
“전 명예와 바꾼 과한 부와 권력은 원하지 않아요. 제 목적은 적당히 놀다, 저를 사랑해 주는, 제게 맞는 신사분을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깐…….”
“나도 널 충분히 귀애한다.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
“제가 말하는 사랑은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애완동물한테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다, 설명해 봤자 이해 못 하실 듯하니 딱 요점만 말씀드릴게요. 전하, 전 전하의 정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깐 왜?”
되돌아온 질문에 레이첼은 머리끝까지 열이 차오름을 느꼈다. 왜긴 왜야! 정상적인 여자라면 정부 따위 원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네놈을……
“말이 안 통하네! 이쯤 하면 알아들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하. 정말 죄송하지만 전 정부를 자처할 만큼 전하를 원하지 않아요.”
싫어하니깐 그렇지.
레이첼의 대꾸에 카샨의 표정이 일순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원하지 않아? 누가 누굴?’
카샨은 레이첼이 지금껏 앙탈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2년 전 그녀는 분명 저만 보면 애가 타 어쩔 줄 몰라 했고 분명 그를 사랑한다고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 고백했다.
“넌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언제 적 이야기를 하세요? 그건 한참도 더 된 이야기잖아요. 그때는 제가 어린 데다 세상에 얼마나 멋진 분들이 많은지 미처 알지 못해서 전하처럼 재수 없는 놈도…… 아악! 부끄러우니 그때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제 삶에서 도려내고 싶은 순간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일이니까요.”
“지금도 나랑 함께 있질 않나.”
“……여기까지 오는 데 제 의사가 반영된 적이 있던가요?”
카샨은 레이첼을 지그시 노려보다 그녀의 턱을 꽉 쥐었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 분명 영악한 작전을 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2년 전과 달리 제법 앙칼지고 영악해진 듯싶으니 분명 제 마음을 사로잡을 궁리를 하는 것이겠지.
레이첼의 턱을 잡은 카샨이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으나 부루퉁한 얼굴 어디에도 짜증 외에 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순간 분이 끓기 시작한 그는 레이첼의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내가 왜 싫은 거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다만 난 일개 자작 영애인 네게 과분한 사내야. 2년 전이 아니라 지금의 너도 충분히 빠질 만하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당연한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해 봐. 리온에서 외모나 부, 권력, 셋 다 합치면 나만큼 잘난 사내가 있던가? 난 도통 알 수가 없군. 이런 내가 왜 싫지?”
“재수 없…… 제멋대로시잖아요. 그리고 분명 잘생기긴 하셨죠. 하지만 잘생기면 뭐 하나요. 성격은 개차반…… 독선적이신 데다 저랑 나이 차도 다섯 살이나 나는걸요. 제가 부유하고 잘생긴 연상의 신사분들을 선호하는 건 사실이지만 전하는 제 기준 범위를 벗어나셨어요.”
솔직한 감정을 자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울컥 튀어나오는 말을 조심조심 고쳐 가며 카샨에게 최대한 제 감정을 전했다.
“결정적으로 전에 저한테 어떻게 하셨어요? 장난질도 모자라 끔찍하게 구셨죠. 솔직히 말하자면 전하께서는 제가 만난 신사분들 중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최악이셨답니다.”
그녀가 말을 이을수록 카샨의 기세가 심상찮아졌다. 레이첼의 턱을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금안은 어둑한 빛을 띠었다.
‘이게…….’
카샨은 당장에라도 레이첼을 내치고 싶었다. 침대에서 끌어내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그녀를 관대하게 대했나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눈이 거꾸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인지 마음은 상했지만 눈은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붉은 입술만을 훑었다. 저 요망한 입에서 자신을 사모한다는 말이 나왔으면……. 저 눈이 자신을 보고 그때처럼 빛났으면…….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분명 어여쁜 애완조 정도가 아니었나.’
카샨은 스스로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 자조하면서도 제 아래 여인이 사랑스럽다 인정했다.
“그러니 제발 구질구질…… 아니, 미련 있으신 듯 굴지 마시고…….”
“……내가 색에 미쳐 버린 모양이군. 아니면 그대가 요물이거나.”
“예?”
뜬금없는 카샨의 말에 레이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그 얼굴에 가학심이 든 카샨은 계속 건방지게 굴면 밖의 기사들에게 던져 버리겠다 으름장을 놓으려다 상상만으로도 불쾌한 장면에 그만두고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지. 쉬어.”
조각한 듯 잘 짜인 몸이 내려오자 침대가 출렁였다. 레이첼은 카샨이 바닥에 놓인 상의 꿰입는 걸 멍하니 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잠, 잠깐! 전하, 지금껏 제 말을 어떻게 들으신 거예요? 약이라도…….”
“……시끄럽다. 얌전히 기다려.”
절절한 호소였건만 카샨은 무시한 채 방문을 나섰다. 곧 평소보다 신경질적으로 문이 닫히더니 철컥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레이첼의 비명이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
* * *
“에단. 그리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앉아서 생각해 보게. 파리처럼 뱅뱅 돌면서 다녀 봤자 머리만 어지러울걸.”
아이작은 응접실을 쉴 새 없이 걷는 검은 머리의 사내를 한참 보다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장 머리가 아픈데 저렇게 부산스러워서야. 들어온 생각도 다시 나갈 판이었다. 그러나 지적을 받은 검은 머리 사내는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말을 듣기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데리고 나오지도 못한 주제에.”
“이런.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레이첼이 직접 움직이다 잡힌 걸 어떡하나?”
“더 빨리 움직였어야지! 그리고 로즈 애블랑 하나만 들여보내면 어떡해? 만일을 대비해서 자작가 놈들을 때려눕힐 사내놈 몇이라도 같이 들여보내야지!”
아이작은 도리어 제게 화를 내는 에단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당최 일이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슬슬 짜증이 치민 그는 카우치 팔걸이에 올렸던 양손을 모으고 깍지를 끼더니 친우를 비꼬기 시작했다.
“사람을 더 끌고 갔으면 대번에 들켰겠지. 그리고 이번 일은 에단 자네가 문제 아니었을까? 공작 각하께 그리 티를 냈으니 일을 계획하신 각하께서 가만있을 리가 있나. 자작에게 경계를 더 하라 이르셨겠지.”
“난……!”
“쓸데없는 변명은 말게. 각하 앞에서는 당장에 쳐들어갈 기세더니 장장 사흘을 기다렸지. 에단. 난 적어도 그 시간에 계획을 짜고 랑트 자작 부인과 로즈 애블랑 영애와 함께 레이첼을 구출하려 했어.”
말문이 막힌 에단이 뻐금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블랑 자작가에 그렇게 체계적인 하인들이 많을 리 없었다. 분명 도움을 준 자가 있겠지. 에단은 그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네도 실망한 거 같아 별말은 안 했다만 할 거면 제대로 움직이게. 매번 그렇게 오락가락하니 나한테도 방해가 되잖나. 자네가 각하께 가서 눈치 없게 굴지만 않았다면 레이첼은 이미 내 집에 있었을 거야.”
“걔가 왜 여길 와!”
“오갈 데 없는 연인을 거두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웃기고 있네. 너 오늘만 해도 모나타 공녀와 만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아이작이 에단을 지그시 노려봤다. 모나타 공녀가 오늘 온 것은 어떻게 알고? 눈빛으로 묻는 그에게 에단이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비웃음을 날렸다.
“너나 오락가락하지 마. 매번 입으로는 연인, 연인 하더니 네 연인은 둘인가 보지? 응?”
“……자네한테 들을 말은 아니야. 에단,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각하와 다퉜다고는 하나 혹 모르지. 로잘린 공녀가 돌아오면 다시 결혼한다 하고 캐틀렛을 넘볼지.”
“난 네놈이 아니니 똑같이 보지 마. 그리고 각하와는 이번에 확실히 정리했어.”
“아 그런가? 놀랍군그래.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며칠이라도 독립한 걸 축하하네. 이제야 진정한 한 가문의 가주답군.”
“너!”
“주인님.”
비비 꼬인 아이작의 말에 험악해진 에단을 멈춰 세운 건 덜덜 떠는 하인이었다. 가여운 하인은 잔뜩 구겨진 상전들의 표정에 파리한 얼굴을 했지만 제 의무를 다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기다려 달라 말했는데 급하시다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하인의 뒤로 갔다. 그와 동시에 하인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이가 불쑥 앞으로 나오더니 뒤집어쓴 망토를 벗었다. 오는 도중 비를 맞은 모양인지 어두운 망토는 푹 젖어 있었다.
망토 아래 붉은 머리카락이 존재를 드러냈다. 망토의 주인을 확인한 에단의 얼굴은 한층 더 구겨졌고 아이작은 놀란 얼굴로 제 저택에 찾아온 손님에게 말했다.
“자네가 웬일인가?”
* * *
“저놈 저거 신전에서 내쳐졌다더니 아예 머리가 돌아 버린 거 아냐?”
“에단. 기사들은 청각이 예민한 법이네. 말을 조심해.”
“제정신이면 어떻게 걔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 아이작 넌 레이첼 애블랑이 성녀랑 어울린다 생각해?”
아이작은 카우치에 앉아 있는 아제프를 바라봤다. 조금 떨어진 곳인데도 해쓱한 얼굴이 한눈에 띄었다.
‘파문당하고 마음고생이 크다 듣긴 했다만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군.’
항상 무감해 보이던 아제프는 일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우울해 보였다. 살이 빠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과는 별개로 아이작도 에단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거봐. 네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그러니 저놈이 미쳤다는 거야. 파문당하고 돌아 버린 거지.”
레이첼 애블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면 그녀가 신전을 질색한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치를 좋아하고 놀러 다니기를 즐기는 그녀는 검소함을 추구하며 1년 내내 기도 올리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신전과 체질적으로 안 맞았으니.
게다가 그녀는 신전에서 가장 멸시하는 남녀 교제와 육체관계에 대해서도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레이첼이 신전 내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성녀라니. 이교의 신 중 하나인 향락의 바아에스가 리온의 신이 되지 않는 한 그녀가 깊은 신앙심을 가질 일은 없으리라.
“……확실히 어울리지는 않지.”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그렇잖아도 그걸 어떻게 빼 오나 머리가 아픈데.”
에단은 못마땅한 듯 아제프를 노려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러했지만 그는 아제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대놓고 싫었다. 레이첼의 시선을 끈 곱상한 얼굴도 그렇고 계속해서 레이첼과 엮이는 것도 그렇고. 에단의 눈에 아제프는 레이첼에게 꿍꿍이가 있는 음침한 놈일 뿐이었다.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한번 시작된 의심은 끝없이 자랐다. 사실 그렇잖은가. 저놈은 저처럼 악연이든 인연이든 레이첼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요 아이작처럼 잠깐이나마 레이첼과 교제한 사이도 아니었다. 해 봤자 연이라고 하기도 뭣한 만남뿐이면서 뭣 하러 계속 그녀 곁에 깔짝거린단 말인가.
‘그분을 저리 둘 수 없습니다. 레이첼 애블랑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이유도 우스웠다. 대뜸 와서는 성녀일지도 모를 그분을 한낱 정부로 둘 수 없으니 도와 달라니. 그런 가당치도 않은 이유를 댈 거면 본인이 미쳐 있는 여신에게 빌거나 신전에 가 사정할 것이지 왜 여기로 오느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 하나 때문에 황태자에게 주먹을 날려 파문당했단 소문이 돌던데 혹……. 아이작, 너 아는 거 없어? 설마 저놈 일에 레이첼이 연관돼 있지는 않겠지?”
“……소문 속 여인은 레이첼이 맞을 거야. 정확한 경위는 모르지만 레이첼이 신전에 있던 시각 황태자 전하와 아제프 경도 신전에 머물렀다 하더군. 그리고 레이첼이 두 사람과 각자 이야기를 나눴다 들었네. 기도실에 있어 정확한 대화 내용은 모른다 했지만 앞뒤를 따져 보면 뻔하지.”
아이작의 말이 이어질수록 에단의 얼굴은 순차적으로 일그러져 갔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빽 하니 높였다.
“이 망할 계집애가! 황태자 그놈이 갑자기 왜 정부 타령 했는지 이제 알겠네. 그 발랑 까진 버릇을 못 고치고 신전 내에서도 웃고 다니다 재수 없게 눈에 띄었겠지. 하여간 가만두고 볼 수가 없어!”
몇 년 전 레이첼과 끝났던 카샨이 왜 다시금 그녀에게 찝쩍거렸는지 이제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2년 전에도 예뻤던 레이첼은 나날이 더 아름다워지더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다다른 듯 가만있어도 반짝거렸다.
에단은 레이첼과 눈을 부릅뜨고 싸우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알았다. 악연으로 엮인 자신조차 그녀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마음을 전하는 판에 다른 사내들은 오죽할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웃음 지어 보였을 레이첼이 떠오르자 분이 차오르는 한편 그런 그녀를 봤을 카샨이나 아제프가 이해가 갔다. 온통 흰 신전 안에 있었다면 분명 더 눈에 띄고 매혹적이었을 테지.
실제 상황과 전혀 다른, 에단만의 상상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레이첼을 두고 싸운 두 사내가 그려진 후였다.
“에단. 전에도 말했지만 레이첼에게 그런 언사는 삼가게. 그리고 아제프 경이 쳐다보잖나. 말소리를 낮춰.”
“시끄러워, 아이작. 나한테 잔소리하지 말고 너나…….”
아이작 때문에 상상에서 벗어난 에단은 짜증스레 대꾸하다 문뜩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놈은 어떻게 상황을 그리 잘 안단 말인가. 꼭 누가 보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작, 네가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있지? 황태자가 연관된 소문이라 보통 은밀한 게 아니던데 넌 왜 그 이상을 알고 있느냔 말이야. 누가 보면 꼭 그 자리에 있었던 줄 알겠어?”
“…….”
“너 설마 레이첼한테 또 사람을…….”
“……연인을 항시 보호해야 하는 게 신사의 도리라 생각하네만.”
에단은 뻔뻔스레 답하는 아이작을 스산하게 노려보다 관뒀다. 레이첼에 관해서라면 저도 미치광이였지만 친우도 만만찮았다. 입으로는 매일같이 신사 타령에 근사하고 세련된 몸가짐을 갖추면 뭐 하나. 매번 하는 짓이 중범죄자인데.
‘그래도 내가 낫지. 적어도 난 이놈처럼 매번 사람을 붙이진 않잖아?’
레이첼의 입장에서야 에단이나 아이작이나 똑같은 놈들이었건만 에단은 자신이 아이작보다야 나은 사내라 합리화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뭘 생각하길래 혼자 고개를 끄덕이나?”
“신경 꺼. 그보다 저놈은 언제 돌려보낼 거지? 당장 생각할 시간도 없는데 빨리 내보내지 그래. 보고 있는 것만으로 거슬려 머리가 아파.”
이게 누구 집에서 멋대로 축객령을 내리라 말라야? 아이작은 에단의 염치없는 말에 어이없는 눈을 하다 아제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바쁜 와중에 쓸데없는 일에 엮이면…….’
“핑계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얘기하려고 했네. 아제프…….”
아이작은 짐짓 미안한 듯 아제프에게 축객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이름을 다 부르기 전 에단이 갑작스레 그의 어깨를 잡아 세게 당겼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의아해하는 아이작의 귀에 대고 에단이 무언가 속닥거렸다. 곁눈질로 아제프를 훔쳐보는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에단 자네 입으로 말했잖나. 레이첼은 신전과는 어울리지…….”
“어울리지 않으면 어때. 좋은 방법이잖아? 그리고 신전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 발랑 까진 그 성미가 조금이나마 고쳐지겠지. 사내놈들도 못 만날 테고.”
“……적응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게 거기서 버티겠어? 그리고 진정한 성녀는 무슨……. 내가 알기로 다음번 성녀는 이미 정해졌어. 몇 달 안에 사람들 앞에 내보인다더군. 그러니 적응해 봤자 고작 몇 달 거기 갇혀 있는 게 다야. 그리고 몇 달이면 황태자도 포기하겠지. 그때면 결혼해야 할 테니 말이야.”
“그래도…….”
아이작은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였지만 에단은 아이작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아제프에게 다가갔다. 그가 지금까지 중 가장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아제프 경, 내가 돕지. 진정한 성녀님을 추대하는 일인데 신자로서 빠진다면 그것도 문제니 말이야.”
* * *
카샨의 생각을 알게 된 후 레이첼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돈도 많으면서 왜 이딴 데 가둬 놔! 내 방보다 좁잖아!’
매번 느꼈지만 방을 둘러볼 때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갇힌 방은 있을 건 다 갖췄지만 몇 걸음 걸으면 벽이 가로막을 정도로 작았으며 출구라곤 카샨의 침실과 이어진 문 하나뿐이었다. 좁은데 가구만 그득하니 그러잖아도 답답한 마음이 곱절로 답답해졌다.
방을 왔다 갔다 하던 레이첼은 혹하는 바람을 담아 창가로 다가갔다. 투명한 창은 작았지만 그녀 하나 정도야 어찌 몸을 구겨 넣으면 나갈 수 있을 법도 했다.
문제는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반질거리는 창살이었다. 햇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창살은 어찌나 튼튼한지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잠시 쇠창살을 노려보다 몸을 거칠게 돌려 문가로 다가가 수십 번 잡았던 문고리에 또 손을 올렸다. 우아하게 휘어진 문고리는 부드럽게 내려가는가 싶었지만 곧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초조해진 레이첼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틈이 날 때마다 카샨에게 내보내 달라 간청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는 오히려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이를 가지면 산책 정도는 생각해 보겠다 말할 뿐이었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이 궁 앞 정원에 셋이 소풍을 가는 것도 좋겠지.’
장난스러운 어투였지만 레이첼은 카샨이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했다. 몇 번 몸을 섞는 것 정도야 괜찮았지만 임신은……. 잔뜩 예민해진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여기인가? 내 조카님이 더러운 창녀를 숨겨 둔 곳이.”
“후작 부인, 전하께서 아시면……!”
그리고 순간 두꺼운 문 너머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 * *
짝―
뺨이 화끈했다. 레이첼은 별안간 제게 닥친 화려한 여인을 멍하니 보다 부채로 뺨을 얻어맞았다.
상황을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일어난 일이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레이첼이 돌아간 뺨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자 여인이 고함을 쳤다.
“뭣들 하는 거야! 이게 날 건방지게 쳐다보잖아. 꿇려!”
여인의 뒤에 있던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레이첼을 붙잡고 내리눌렀다. 순식간에 꿇린 무릎에 레이첼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놔! 놔요!”
쨍한 목소리가 제법 날카로웠으나 레이첼의 앞에 선 여인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여인은 도도한 얼굴로 치맛자락을 잡더니 뾰족한 구두로 꿇어앉은 레이첼의 허벅지를 지그시 찍어 눌렀다.
“악!”
“그래, 아직 혼인도 안 한 처녀 몸으로 내 조카님의 정부가 된 기분이 어때? 이 천한 갈보야.”
내 조카님. 레이첼은 그제야 여인이 누군지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정부이자 황태자 카샨의 사사로운 핏줄. 정부임에도 고귀함을 뽐내는 그녀는 델 후작 부인 아샤타였다.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아니?”
아샤타는 무슨 일인지 레이첼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 보였다. 감히, 라는 말과 함께 입술을 잘근거리는 그녀는 당장에라도 레이첼을 쳐 죽일 듯 노려봤다.
‘일단 수그려야 하는 분위기지?’
레이첼은 사나운 그녀의 기세에 고개를 슬쩍 숙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 이상 아샤타를 화나게 했다간 뺨 한 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레이첼이 얌전히 숙이고 들어갔으나 아샤타는 그것도 싫은 듯 부채를 쫙 펼치고 화를 식히듯 팔랑거렸다.
“이따위 계집애 때문에 나를…… 감히 나를…….”
사실 아샤타는 레이첼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녀를 요절낼 생각이었다. 왜냐, 그녀에게 레이첼은 조카와의 관계를 어그러뜨린 천하에 못된 계집이었기 때문이다.
‘캐틀렛에서 바친 천한 창녀 하나를 끼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하. 내 조카님…… 여자라면 내가 구해 줄 테니 캐틀렛의 그 갈보를 내쳐요. 이미 몇 번 안아 닳은 계집일 텐데 계속 끼고 있으면 더러운 게 묻는답니다.’
아샤타는 모나타 공작의 만류에도 레이첼 일을 카샨에게 충고하다 그대로 역풍을 맞았다. 당연히 알겠다 할 줄 알았던 카샨이 그녀에게 냉한 눈초리와 함께 독설을 퍼부은 것이다.
‘언제부터 제 침실 사정까지 걱정하게 됐습니까, 델 후작 부인. 주제넘는다는 생각 안 합니까?’
이모님이 아닌 델 후작 부인이라니. 주제넘는다니. 그러잖아도 돌아온 이후 멀어진 것 같아 애달프게 하던 조카였다. 그런 조카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저를 노려보자 아샤타는 섭섭했다. 게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떻게 저에게 그리 말할 수 있냐 눈물짓는 그녀에게 카샨이 무어라 했던가.
‘어떻게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니? 델 후작 부인이라니! 난 네 이모야. 네 어미가 내겐 친언니였고 언니는 나를…….’
‘아버지 침실 일이나 걱정하세요. 그리고 언니? 보통 우애 좋은 자매라면 죽은 자매의 남편을 유혹하지는 않을 텐데요.’
‘카, 카샨, 그건 다 캐틀렛의 속셈을 막으려…….’
‘가문의 잇속 따짐을 이해하니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후작 부인, 난 내 어머니도 아닌 그대가 내 침실 사정에 관심 두는 게 불쾌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제게 존중받고 싶으시다면 제 일에 입 다무는 게 좋을 겁니다.’
‘너! 언니에게는 분명 얼마 전 이모님이라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나타 공작…… 그래, 헤리엇 이모님은 적어도 제게 도움이 되니 말입니다. 전 쓸모 많은 핏줄은 아낍니다. 누구와 다르게요.’
카샨은 아샤타를 향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루프첸으로 가기 전에도 그녀를 썩 내켜 하지는 않은 조카였지만 대놓고 그녀에게 쓸모없다는 말을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아샤타는 카샨이 갑자기 왜 저러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캐틀렛 공작과 앤 황후는 우애가 좋지요. 캐틀렛 공작이 여우 같은 창부를 전하 곁에 붙여 뭐라 속삭이게 했겠습니까? 황후를 위해 부인을 모함하라 하지 않았을까요?’
‘설마…… 그 반푼이 황후 노릇 하는 계집이!’
‘황후는 항상 후작 부인을 질투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매번 여기로만 오시고 하나뿐인 황태자 전하께서도 황후보다야 부인을 더 가깝게 여기시니…… 캐틀렛 공작에게 부탁해 우선 전하와 부인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전하를 이용해 폐하와 부인 사이도…….’
측근이 속삭이는 말이 아샤타가 듣기에 그럴 법했기에 그녀는 이를 갈며 레이첼을 손봐 주마 생각했다. 그리고 기회는 이르게 찾아와 아샤타는 카샨이 궁을 비우기가 무섭게 당장 들이닥쳤다.
“네 어미는 평민이라지? 아비는 별 볼 일 없는 자작에 어미는 평민이라……. 하! 너 따위는 네 조카님에게 가랑이 벌릴 처지도 못 돼! 내가 듣기로는 네가 나 정도는 될 수 있다 큰소리쳤다지?”
그 무슨 해괴한 소문이지?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처음 들어 보는 말에 억울해진 레이첼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얼굴을 보이기 무섭게 아샤타는 다시금 부채를 들어 올렸다.
“부, 부인, 여기는 전하의 침실입니다. 이러다 전하께서 알게 되시면…….”
“한창 외국 사절을 만나고 계실 테니 저녁이나 돼서 올 테지. 그리고 이따위 계집 하나 죽인다 한들 조카님이 나를 어떻게 할 것 같아? 난 아샤타 모나타야! 헤리엇 모나타가 내 언니요 폐하께서 나를 지켜 주시는데 조카님도 날 어쩌지 못해!”
짝―
안절부절못하던 시녀가 아샤타를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아샤타는 부채로 레이첼의 뺨을 한 번 더 치곤 떨궈진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려 오밀조밀한 얼굴을 구경하다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한쪽 뺨이 부었음에도 여전히 반반한 낯짝이었다. 제법 예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피어난 얼굴을 보자 아샤타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그녀는 부채를 잡지 않은 왼손으로 레이첼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이 얼굴을 믿고 발칙하게 구는 모양이니 벌을 내려야겠다. 몇 번 더 치는 걸로는 망가지지 않겠지? 얼마를 내리쳐야 할까? 응?”
조금 전보다 더 괴괴한 빛을 내는 녹안이 주홍색 머리와 대조되어 스산했다. 말리려던 시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 레이첼을 가여운 듯 바라봤다. 상전이 저렇게까지 돌아 있을 때는 아무도 말리기 힘들었다. 태어나기도 고귀한 공녀요 10년 넘게 홀로 황제의 정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샤타를, 말릴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저 어여쁜 얼굴도 끝이구나. 제 여동생 또래 여자아이의 얼굴이 망가질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하지만 어쩌겠나. 상전의 뜻이 그렇다는데.
“잠, 잠깐!”
일어날 일을 예상한 레이첼이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으나 시녀들의 악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샤타의 접이식 부채가 올라가더니 그대로 떨어졌다. 짝, 짝, 짝 부채질 세 번에 레이첼의 오른뺨이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흐윽…… 여기서 이러실 수는 없어요. 전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레이첼이 서러운 듯 울음을 뱉으며 카샨을 입에 올렸다. 카샨의 이름이 나오자 아샤타의 눈꼬리는 더 올라갔으며 주변 시녀들은 불안한 듯 몸을 떨었다. 실상 이러고 있는 게 알려진다면…… 아샤타는 본인 말대로 무사할지 몰랐으나 그녀들은 아니었다. 아직 알려지진 않았으나 황태자가 침실에 들인 여인 아닌가.
‘얘넨 겁먹으면서도 왜 힘을 안 푸는 거야. 당최 도망칠 수가 없네. 문도 열려 있고 아무도 안 오는 걸 보니 잘하면 지금이 도망칠 기회인데…….’
레이첼은 주춤하는 시녀들을 살펴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큰 소리를 지르고 궁이 떠나가라 빽빽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힘을 푸는 순간 밀치고 도망갈 생각을 하며.
“이…… 이게! 뭣들 해! 다들 빨리 이년의 입을 막아!”
“살려 주세……으읍! 읍! 읍!”
입이 막혀 버겁게 헐떡이는 레이첼을 아샤타가 더욱 세게 쥐고 흔들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는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 발발 떨고만 있지 저리 고함을 지르지 못한다.
“간악하게 수를 쓰려 해? 내가 너 같은 걸 한두 번 본 줄 알아?”
가여운 척 굴며 사내를 앗아 가려는 계집들이나 하는 수작질이었다. 황제의 곁에서 정부도 못 된 영악한 것들이 핍박을 받았다며 그녀를 모함할 때 자주 저러곤 했다. 죽여 버리고 싶은 것도 같은데 하는 짓도 그 계집들과 어찌나 같은지. 아샤타의 눈이 더욱 독기를 품었다.
“내가 오늘 널 꼭 죽여 주마.”
아샤타가 레이첼의 머리채를 다시 한번 이리저리 흔들며 입술을 악물 때였다. 무언가에 차인 듯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의 주인이 문 너머 모습을 드러냈다.
“전, 전하!”
“으븝? 으브븝!”
아샤타의 부채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 레이첼은 홀로 반가운 얼굴을 하며 카샨을 맞이했다. 꼴 보기 싫은 인간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레이첼이 카샨을 향해 읍소하듯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다 곁눈질로 아샤타를 가리켰다. 너 제때 잘 왔다. 얘 좀 어떻게 해 봐, 하는 얼굴에는 다른 이들 같은 심각함은커녕 안도감과 뒷배가 생겼다는 자신감밖에 없었다.
레이첼의 표정에 카샨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중요한 회의마저 팽개치고 살려 주려고 왔더니 겁에 질려 있긴커녕 평소 발칙한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하지만 자색 눈을 영악하게 움직이는 것도 결국 제게 기대 그러는 것이라 어쩐지 마음이 퍽 흡족했다.
‘저 여자에게 걸린 것치곤 다행히 꽤 멀쩡…….’
카샨은 아샤타가 황제의 눈에 조금이라도 띈 여인들을 어찌 다뤘는지 잘 알았다. 대다수는 고운 얼굴에 선이 그였으며 그녀의 심기를 조금 심하게 건드렸다 싶었던 이들 중 하나는 얼굴 가죽 여러 군데가 불에 지져진 채 궁 밖으로 내쳐졌다. 황제의 총애와 모나타 공작 때문에 모든 일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긴 했으나 궁 내에서는 아직도 그 잔악한 일에 대해 수군거렸다.
다행히 레이첼은 몸 성히 무사한 듯싶었다. 그러나 곧 황가의 상징이라는 황금빛 눈동자에 부푼 뺨이 들어왔다. 부챗살의 모양대로 반듯하게 물든 자국은 꽤 붉어 레이첼의 의기양양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흰 피부가 터져 피가 흘렀겠지. 카샨의 눈이 빠르게 식어 갔다. 날붙이처럼 차가워지는 시선에 레이첼을 잡고 있던 시녀 둘이 흠칫 떨더니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았다. 툭 하고 상체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가름과 동시에 카샨이 아샤타를 향해 느리지만 또렷이 모욕적인 말을 뱉었다.
“주제넘은 간섭은 불쾌하니 아버지 침대나 잘 데우라 했을 텐데요, 이 쓸모없는 창부야.”
* * *
“카샨 너! 네가 어떻게!!!”
레이첼이 듣기에도 심한 그 말이 뱉어진 이후 좁은 방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핼쑥하게 질린 아샤타는 몇 초간 부들부들 떨다 카샨에서 욕지거리를 하며 덤벼들었다.
“부인! 안 됩니다. 진정하세요!”
“황태자 전하십니다. 부인, 이러시면…….”
자작 영애에게 하는 손찌검은 몰라도 황태자에게 손대는 것은 아무리 황제가 아끼는 정부라 한들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가만있던 시녀들은 급히 아샤타를 붙잡았고 카샨은 제 시녀들에게 잡힌 아샤타를 경멸하듯 노려보다 또 한마디 뱉었다.
“아깝게 됐군. 영영 궁 밖으로 내칠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야.”
카샨의 비꼼 가득한 말에 아샤타는 주저앉아 울다 실신했다. 핏기 가신 얼굴이 위험해 보였으나 카샨은 그런 어미의 핏줄을 제 궁에서 당장 끌어내라 명했다. 결국 아샤타는 궁의를 부르는 고함과 시녀들의 비명 속에 내쳐지듯 끌려 나갔다.
소란이 가신 후 남은 건 레이첼과 카샨뿐이었다. 레이첼은 자신을 뾰족한 눈으로 노려보는 카샨을 피해 몸을 고슴도치처럼 옹송그리고 있다 한걸음에 다가온 그로 인해 단숨에 침대로 내쳐졌다.
“전, 전하? 꺄아!”
“누가 멋대로 흠집을 달고 오라 했지?”
“아니 이건…….”
“시끄럽다.”
카샨은 제 허락도 없이 얻어맞았다 레이첼을 타박했다. 하지만 차가운 어투와 다르게 부은 뺨을 살살 만지는 꼴은 꽤 다정했기에 레이첼은 그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음을 알아챘다. 긴장을 푼 그녀가 카샨의 눈치를 살살 보며 이 상황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아픈데. 그냥 넘어가시면 안 돼요?”
“함부로 다친 벌은 받아야지.”
“제 탓이 아닌걸요. 그리고 제 몸인데 왜 전하의 허락을……으응. 전하, 저 뺨도 아프고 당장은 쉬고 싶어요. 그러니깐…….”
“약을 가져오라 이르겠다. 그러니 얌전히 있어.”
물론 기분이 좋다 해서 레이첼 말을 들어줄 카샨은 아니었다. 그는 기분과 관계없이 제 뜻을 관철해야 하는 인간이었다. 그가 싫다 고개를 젓는 레이첼 위로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아…… 짜증 나. 차라리 몇 대 더 맞고 기절할걸.’
사내의 품에 갇히게 됨과 동시에 더운 입술이 부은 뺨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따끔거리는 감각이 배가되자 레이첼이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틀었다.
“으…… 전하. 아파요. 아프다구……으응…….”
보라색 눈에 눈물이 맺혔으나 카샨은 괘념치 않았다. 그는 까슬거리는 혀로 맛보듯 레이첼의 붉은 뺨을 건드렸다. 축축한 혀가 뺨에 닿을 때마다 레이첼의 몸이 움찔거렸다.
맞닿은 아래서 바르르 떠는 여체의 부드러움이 느껴지자 카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침대 시트를 붙잡고 있던 손이 레이첼의 얼굴을 쓸다 콱 붙잡았다.
“아흑……!”
레이첼의 뺨을 할짝대던 혀가 목에 닿았다. 동시에 큰 손이 드레스 밑을 파고들었다.
“하…… 하실 거면 약을 주세요.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단 말이에요!”
“아직도 피임초를 찾나?”
레이첼의 요구에 카샨의 눈썹이 삐죽 섰다. 몇 번이고 말해 줬음에도 왜 계속 아이는 싫다 앙알거리는 걸까. 분명 보상도 충분할 거라 말했는데. 카샨은 레이첼의 거부가 날이 갈수록 더 불쾌하다 생각했다.
“……리첼, 내 작은 새. 장담하는데 한 달 안에 그대는 내 아이를 가지게 될 거야.”
“정말 왜 이러세요!”
레이첼이 기겁하며 카샨을 밀어 냈으나 그는 굳건했다. 삐뚜름한 미소를 띤 그는 레이첼이 오므린 허벅지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몸을 붙였다.
“또 침대에 묶이고 싶나? 이 배가 불러 올 때까지 묶어 둘까? 응?”
포식자는 포식자였다. 며칠 유하게 굴었다 한들 빼앗는 본성은 변함없었다. 카샨은 제 욕구가 충족되지 않자 나른하고 자비로웠던 모습을 던져 버린 채 이를 드러냈다.
“싫……읏! 싫다니까요!”
레이첼의 거부가 거세지자 카샨의 손 또한 더욱 거침없어졌다. 힘줄 솟은 손은 희고 매끄러운 허벅지를 쥔 채 한껏 벌렸고 붉은 혀는 레이첼의 목 주위 여기저기를 핥았다.
똑똑―
“전,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러나 카샨이 막 자리를 잡고 하의를 풀려던 차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카샨은 문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부름에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닫힌 문을 노려보는 눈이 어찌나 형형한지 레이첼은 위기에서 벗어났음에도 오금이 저렸다.
하나 명한 이가 황제인지라 카샨은 불만 가득한 얼굴임에도 몸을 일으켰다. 레이첼 위에서 내려온 그가 침대에 널브러진 그녀를 쏘아보며 빠르게 의복을 정돈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물론 나가는 순간 엄포와 함께 문 잠그기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카샨이 나가고 얼마 동안 레이첼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매 순간 찾아오는 위기는 어째 끝이 나질 않는지. 움츠러든 몸은 카샨이 나간 후 한참 만에야 풀어졌다.
‘돌아오면 또 저럴 텐데…….’
긴장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다시금 제 박자를 찾자 졸음이 쏟아졌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으나 지친 몸은 잠을 원할 뿐이었고 머리는 늘어지는 몸을 따를 뿐이었다. 결국 레이첼은 살랑살랑 오는 단잠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태자도 황제는 무서운가 보네. 황제 폐하 만세…… 가여운 백성 하나를 잠시 구하셨……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끝인가……?’
황제를 생각하자 실신한 채 나간 델 후작 부인이 떠올랐다. 그 새파란 얼굴……. 쫓겨나듯 나간 후작 부인의 얼굴이 선명히 생각남과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나한테 불똥이 튀진 않겠지?”
델 후작 부인, 그녀가 누구인가. 황제의 유일한 정부 아닌가. 아끼는 정부가 아들과 싸운 후 울며 실신했는데 그 원인이 한낱 자작 영애라면…….
“아니야. 아닐 거야. 아무렴, 폐하께서 전하를 부를 이유는 쌔고 쌨는걸. 나 때문이 아닌 거야. 음……그렇고말고.”
목을 더듬거리면서도 레이첼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과한 상상이요 지나친 걱정이야. 하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 나…….’
레이첼의 상상은 제 목이 댕강 잘리는 데까지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카샨이 굳게 잠그고 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표정한 여자들이 나타나 레이첼 곁을 둘러쌌다.
* * *
“죄송합니다, 전하. 급히 폐하를 뵙고자 한 분이 계셔서…….”
“누가 들어 있는가?”
“그건…….”
“됐어. 아무리 나라도 폐하를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차나 한 잔 더 가지고 와. 식었어.”
황제 카시우스는 카샨을 한참 기다리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은 제 것을 박아 넣고 오는 건데……. 하기도 전에 끝난 일에 카샨이 아쉬운 듯 입술을 핥았으나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 드시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세 번째 차가 나온 후에야 카샨은 황제에게로 안내됐다. 그러나 긴 기다림의 끝 아비가 꺼낸 첫마디는 예상한 그대로 불쾌한 것이었다.
“카샨, 이번 일은 네가 지나쳤다.”
“후작 부인이 먼저 실수한 겁니다. 폐하께서 그녀를 아끼신다고는 하나 제 궁에 무단 침범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 카시우스는 황좌에 앉아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하나뿐인 핏줄은 전반적으로 젊은 날의 그를 닮았지만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과 그 아래 떨어지는 턱선은 죽은 아내 아샬린을 닮아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사사롭게는 네 이모가 아니냐. 창부라니 그런 말은 해선 안 되지.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 곧 나를 모욕하는 일임을 모르느냐.”
황제의 목소리는 달래듯 부드러웠으나 내용은 단호했다. 카샨은 무어라 대꾸하려다 모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고개를 숙였다.
“됐다. 네 말대로 이번 일은 아샤타의 잘못이 더 크지. 네 허락도 없이 네 궁으로 들어가 행패를 부렸으니 혼이 좀 나야 해.”
“…….”
“이 일로 네게 벌을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네가 데리고 있는 그 아가씨는 내보내야겠구나.”
“폐하!”
말없이 있던 카샨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이첼을 내보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왜 이 일로 그녀를 빼앗겨야 하나.
“아들아, 너는 그 아가씨를 사랑하니?”
카시우스는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아끼는 물건을 빼앗기기 직전인 양 그의 핏줄은 억울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아끼고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샨이 수그러진 목소리로 애매한 답을 했다. 레이첼 앞에서야 뻔뻔하게 속삭일 수 있었지만 일국의 황제인 아비 앞에서는 사랑이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혀가 까슬거리고 안쪽으로 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카샨은 마른침을 삼키고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그래?”
카시우스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그러나 빤히 카샨을 바라봤다. 황제의 태연자약한 얼굴과 담담한 눈은 여전했지만 카샨은 어쩐지 아비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꼭 거짓을 말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끼는 것과 사랑하는 건 다르지. 예를 들어 난 아끼는 것은 많단다. 아샤타가 대표적이지. 하지만 난 네 어미 외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은 없단다.”
“곁에 두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별 탈 없이 데리고 있겠습니다.”
초조해진 카샨은 아비에게 애원하듯 청했다. 어릴 적에도 아비에게 이리 조른 일이 없었건만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꼭 다섯 살 아이가 떼쓰듯 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결혼하겠다 그 아가씨를 데려와야지. 호프먼의 공주를 결혼 상대로 고른 건 너 아니냐.”
“하지만 그녀는 황후가 될 재목이 아닙니다. 미천할뿐더러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곁에서 아양 부리게 두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저하는 거냐.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한낱 여인일 뿐 아니냐. 별 볼 일 없는 여인 하나 때문에 네 어미의 핏줄이자 내 귀여운 아샤타를 울리다니 그건 안 될 말이지.”
“아버지!”
“난 네 어미가 미천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한들 황후 자리에 뒀을 거다. 그런 게 사랑이지, 암……. 그러니 다시 물으마, 카샨. 정말 그 아가씨를 사랑하지 않아?”
카샨은 아비의 사랑 타령이 지겨웠다. 훌륭한 황제라 칭송받는 아비에게 단 하나의 단점이 무언가. 바로 제 어미를 너무도 사랑한 일 아닌가. 아비는 어미가 살아 있을 적에도,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너무 휩쓸렸다. 그리고 그걸 매 순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에 칼리온과의 무역을 끊었다 합니다. 칼리온 사절이 황후 폐하의 외모가 평범하다 했단 이유로요.’
‘황태자 전하는 얼마나 편하실까. 폐하께서 죽은 황후 폐하를 잊지 못해 뭐든 다 들어줘, 다른 후계자도 만들지 않아. 역사에서 가장 편히 황제 자리에 오른 사례가 될 겁니다.’
‘전하께서도 여인 하나에 빠지시면 폐하처럼 행동하실까요? 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폐하의…….’
주변에서 그런 아비를 보고 무어라 수군거렸던가. 또 자신은 얼마나 그 굴레에 갇혀 있었나. 사랑이라니. 카샨은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가 자신에게까지 씌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레이첼은…… 그 계집은 그냥 가지고 싶은 이입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니깐…… 그런 외모는 찾기 힘들지요. 데리고 있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포기하거라. 사랑하지도 않는다는데 내가 네 장난감 하나 들이자고 수고를 할 수는 없지.”
“폐하께서 수고하실 일은 없습니다. 델 후작 부인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사과하라 하면 하지요. 대신 레이첼은 그냥 눈감아 주시면…….”
“카샨. 다시 말하지 않겠다. 곧 신전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아가씨를 내보내. 황태자인 널 신전과 관련된 추문에 휩싸이게 할 수는 없지.”
카시우스는 길어지는 카샨의 말을 냉혹하게 잘랐다. 카샨은 그런 아비의 태도에 분한 얼굴을 하다 신전이라는 단어에 의아한 눈을 했다. 황제가 그런 아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다 팔걸이에 왼팔을 올린 뒤 턱을 괴며 느릿하게 말했다.
“마일런 후작이 날 찾아왔더구나. 네가 데리고 있는 아가씨가 성녀 후보가 될 자격이 있다지?”
“말도 안 됩니다. 성녀는 이미 정해져 있질 않습니까! 동부의 메페즈가 둘째 여식이 이미!”
“알고 있단다.”
“그런데 왜…….”
“네게서 그 아가씨를 빼내려 후작이 머리를 썼더구나. 뭐, 애초 후작의 청이라면 하나쯤은 무조건 들어주려 했지만…… 내가 거절할 것까지 대비해 확실한 방안을 가져온 거지. 어릴 적부터 알아는 봤다만 영리한 아이야.”
“후작은 제 여자를 차지하려 그러는 겁니다. 그는 레이첼을 좋아합니다. 일부러 그런 수를 쓰는 거라고요! 그리고 성녀가 내정된 마당에 성녀 후보 정도야 무시해도 그만 아닙니까! 제 청은 이리 거절하시면서 후작의 청은 왜 들어주십니까?”
“그것도 알고 있으니 소리를 낮추렴. 이 아비는 이제 나이가 들어 귀가 예민해.”
“…….”
“섭섭하니? 왜 네 편을 안 들어 준 거냐 묻고 싶은 게냐?”
무언은 긍정이었다. 카시우스는 야속해하는 아들을 찬찬히 살피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단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일단 아샤타가 그 아가씨 때문에 너와 다퉜다 울면서 귀찮게 하는 데다 후작은…….”
‘폐하, 일전에 어떤 부탁이든 하나는 들어준다 약조하셨지요?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기억한다. 죽기 전까지 아샬린을 구하려 한 그대 어미를 봐서 반역을 제외한 무엇이든 하나는 들어주마 내 약조했지.’
‘황태자 전하께서 레이첼 애블랑이라는 여인을 곁에 묶어 두고 계십니다. 그녀를 풀어 주십시오. 전 그녀의 자유를 원합니다.’
‘아, 그 아가씨……. 나도 그 아가씨 때문에 골치가 아파. 후작도 봤겠지만 아샤타는 눈물이 많은 여자라 달래기 쉽지 않지.’
‘……일부러 들으려 한 건 아닙니다만 후작 부인께서 눈물 흘리시는 이유도 레이첼 애블랑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녀가 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내 하나뿐인 아들이 원하는 아가씨야. 아들과 다투기도 싫은데 후작이 포기하는 게 어떻겠나? 솔직히 말하면 한낱 자작가의 영애일 뿐 아닌가. 그런 일로 카샨과 사이가 틀어져서 후작 그대에게 좋을 게 없을 텐데. 듣기로는 캐틀렛 공작과도 틀어졌다지?’
‘폐하, 외람된 말이지만 그녀는 폐하께서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궁을 나가야 하는 몸입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성녀 후보로 지목을 받은 참이라.’
‘성녀가 내정된 마당에 성녀 후보라……. 날 놀리는군. 내가 허락하지 않아도 데려갈 속셈이었나? 건방져.’
‘송구합니다.’
‘……좋아, 데려가게. 어차피 가게 된다면 허락해 빚이라도 청산하는 게 좋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이 일 이후로 내가 자네 청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후작, 내 아들은 미래에 황제가 될 텐데…… 지금 그 애한테 밉보이면 어쩌려고? 그 아가씨한테 그럴 가치가 있나?’
‘어쩌겠습니까. 제가 그녀를…….’
“……내가 묻기도 전에 말하더구나.”
‘사랑해 마지않는 것을요.’
“그녀를 사랑한다고.”
* * *
여자들은 겁에 질린 레이첼을 시트째로 둘둘 말아 끌고 가더니 씻겼다. 수치스러워할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레이첼은 잔뜩 굳은 채 목욕 시중을 받다 투박한 잿빛 드레스를 입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전하께서는 얌전히 있으라 하셨는데…….”
“폐하의 명이십니다.”
폐하. 그 단어에 입고 있는 음침한 색 드레스의 까슬까슬한 감촉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축축한 지하가 어른거리며 창살과 어두컴컴한 감옥, 거친 죄수들이 차례로 레이첼의 머릿속을 부유했다.
“아…… 폐하께서…… 어…….”
“시간이 없습니다.”
레이첼은 여인의 차가운 태도에서 제게 벌어질 일을 확신했다. 황실 모욕죄든 뭐든 분명 지하 감옥으로 가는 것이리라. 아니라면 이런 옷을 입고 이렇게 끌려갈 일은 없겠지.
“구해 줄 거면 끝까지 구해 주든가. 이게 뭐야…….”
여인은 불친절할지언정 예의를 잃지 않았다. 게다가 죄인은 신분이 아주 특수하지 않는 한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단어에 지레 겁을 먹은 레이첼은 괜히 카샨을 탓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가 찔끔찔끔 울며 도살장 가듯 굴자 여인은 잠시 해괴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 이내 무표정하게 얼굴을 정돈했다.
레이첼과 여인 무리들은 레이첼이 있던 황태자궁을 나와 긴 회랑을 지나고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걸었다. 장소가 황궁인 만큼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었건만 그들이 걷는 길에 찬탄은 없었다. 간혹 레이첼이 훌쩍이는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
레이첼을 이끈 여인이 어느 순간 발을 멈췄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이첼은 이제 끝이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햇빛일지 몰라. 머리 위 태양의 따사로움이 아련했다.
“응?”
하지만 레이첼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가 있는 곳은 정원의 끝 어느 아치문 아래였다. 이름 모를 꽃 덩굴에 감긴 아치문은 감옥의 입구라기에는 지나치게 생기가 넘쳤다.
“여기는…….”
쨍한 햇살과 지저귀는 새소리에 어리둥절한 레이첼이 여인을 바라볼 때였다. 다각다각 마차 소리와 함께 아치문 바로 앞으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 한 대가 서더니 그 안에서 사내 하나가 우아하게 내렸다.
여인이 레이첼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사내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애블랑 영애를 모셔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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