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물질
무언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반쯤 잠들어 있던 터라 거슬릴 법도 했지만 레이첼은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몸이 따스해지는, 일상에서 많이 듣던 평온한 소리였다.
“계속 잘 겁니까?”
“응……. 잘 거야.”
머리를 쓰다듬는 큰 손이 따뜻했다. 레이첼은 그 부드러운 온기가 좋아 저도 모르게 제 뺨을 그 손에 가져다 댔다.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랑한 볼을 누군가 톡톡 건드렸다.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싫어. 귀찮아. 더 잘 거야.”
레이첼은 몸을 말며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응석을 부렸다. 배가 좀 고픈 듯싶었지만 잠이 더 고팠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니까. 늘어지는 몸을 그렇게 합리화한 그녀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안 됩니다. 잠깐만 일어나 봐요. 빗속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뭐라도 먹고 다시 자도록 해요.”
상대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갑자기 빼앗긴 온기에 억울해진 레이첼이 손으로 이불을 찾으며 실눈을 떴다.
“싫다니……!”
흐릿한 자색 눈과 서늘한 푸른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색에 게슴츠레했던 레이첼의 눈이 완전히 떠졌다. 넓어진 시야에 몇 번 본 우아한 남색 벽지와 흰 가구가 잡혔다.
“……백작님?”
“깨우기 참 어렵군요, 레이첼.”
그녀의 뺨에 여전히 손을 올리고 있는 이는 아이작이었다. 레이첼은 이 인간이 왜 여기 있나 생각하다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가 아이작의 것임을 깨닫고 상체를 빠르게 일으켰다. 푹신한 베개의 감촉이 팔꿈치를 스쳤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멍한 눈으로 잠시 벽난로를 쳐다본 레이첼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의 뺨에서 내려온 아이작의 손은 어느새 레이첼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제가 왜 여기에 있죠?”
“내가 주워 왔으니 여기 있지요.”
아이작은 빙글 웃으며 능청스레 답했다. 앞뒤가 생략된 답에 레이첼은 아이작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제 손을 빼며 뾰족이 물었다.
“여기가 백작저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제 말은 백작님이 어떻게 절 여기까지 데려오셨느냐는 거예요. 전 분명…….”
“말 그대롭니다. 빗속에 쓰러져 있는 그대를 내가 주웠습니다.”
결국 쓰러졌구나. 레이첼은 에단이 떠난 후 쏟아지는 비에 핑핑 돌던 머리를 기억해 냈다. 정말 버리고 가다니. 하여간 상종 못 할 인간 같으니라고.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아이작의 침실에 있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레이첼은 아이작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오솔길은 제법 외진 곳이었으니 말이다.
“원. 그렇게 격식을 차리니 멀어진 것 같습니다, 레이첼.”
“…….”
“운이 좋았습니다. 원래라면 빙 돌아가는 길이라 이용하지 않는데 어제는 어쩐지 그 길을 이용하고 싶더군요.”
“……어제요?”
“이런.”
레이첼의 반문에 아이작이 일어서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홱 소리와 함께 두꺼운 커튼이 젖혀지며 밝은 햇살이 들었다. 레이첼은 제가 이곳에서 밤을 새웠다는 사실에 핼쑥한 얼굴을 했다.
‘큰일 났다.’
이비는 외박에 자상한 어미였지만 연락 없는 외박에는 용서가 없었다. 레이첼은 들어오면 두고 보자며 우아하게 차를 들이켜고 있을 어미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
그리고 레이첼은 그제야 제 차림새를 알아차렸다. 어깨는 물론이요 등까지 훤히 드러나지만 가슴은 아슬아슬하게 가린, 처음 보는 레이스 슬립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이첼이 창가에 선 아이작을 쏘아봤다.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레이첼. 그대 꼴은 흡사…….”
“…….”
“물에 빠진 생쥐였는걸요. 게다가 진흙까지 잔뜩 묻힌 터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야 했습니다.”
레이첼이 슬립 한 장 차림인 것과 비슷하게 아이작 또한 평소와는 달리 편한 차림새였다. 회색 셔츠 한 장에 편한 바지를 꿰입고 있는 그는 항상 올리던 머리까지 내려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평소를 생각하면…….”
“레이첼?”
“아니에요.”
레이첼의 웅얼거림에 아이작이 침대 쪽으로 다가오더니 침대 머리맡 탁자에 올려진 유리잔과 주전자를 들었다. 곧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물이 잔 속으로 떨어졌다.
“목소리가 작은 걸 보니 목이 아픈 모양입니다. 물이라도 마셔요.”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작이 잔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잔을 한 번, 아이작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마시기 싫습니까? 다른 걸 가져다줄까요?”
목이 타긴 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아이작이 주는 무언가를 넙죽 받아 마시기에는…….
“……왜 그런 눈입니까?”
“…….”
‘이번에는 여기 뭐가 있을 줄 알고.’
레이첼은 자백제가 들어 있는 차를 마신 뒤 아이작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기억했다. 아무리 침대 위라지만 개처럼 엎드려 엉덩이를 맞는 일은 썩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귀여운 암캐 같네요, 레이첼.’
게다가 당시의 아이작과 그런 행동은 괴리감이 제법 있었기에 레이첼의 머릿속에 그날 일은 약간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혹 저번 일 때문에 그런 겁니까? 하지만 레이첼,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눈치 빠른 아이작은 레이첼의 거부가 어디서 오는지 쉽게 알아차렸다. 그는 허탈한 듯 웃더니 레이첼의 옆에 더욱 붙었다. 긴 팔이 드러난 어깨를 감싸고 사내의 넓은 가슴이 등에 닿았다.
‘또 시작이네. 발정 난 새끼.’
레이첼은 아이작이 지분대면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떨어지라 발로 뻥 차 침대 밑으로 밀쳐 버리고 싶었지만 신세를 진 것도 있고 당장 반항할 힘도 없었다.
‘한 번만 했으면 좋겠는데. 이 인간이 그럴 리는 없고…… 하아.’
레이첼은 곧 바뀔 시야를 생각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반응하지 않고 누워 있으면 적당히 하다 제풀에 떨어져 나가겠지. 어깨를 슬슬 문지르는 손바닥에 혐오감이 들었지만 레이첼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이작은 레이첼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제 머리를 한 번 신경질적으로 흩뜨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저번 일로 미움이 단단히 박힌 모양입니다, 레이첼.”
“…….”
“그때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
“질투가 나 그랬습니다. 그대, 분명 에단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지만…….”
차근차근 제 마음을 털어놓은 아이작은 레이첼의 입가로 들이민 잔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 그가 레이첼의 얼굴을 살짝 돌리더니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물을 모조리 마셨다. 예상과 다른 아이작의 말과 행동에 레이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 가까워 보여서요. 에단 그 친구가 샘이 나 그랬습니다.”
눈을 살짝 휜 아이작이 다시 탁자로 손을 가져갔다. 다시 한번 유리잔에 투명한 물이 찼다.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난 그냥 레이첼 그대가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습니다.”
눈가까지 내려온 은발이 부드러워 보였다. 레이첼은 새삼 얼굴 하나만은 제 취향이라 생각하며 아이작이 주는 잔을 받았다. 그는 레이첼이 물을 마시자 잔잔히 웃으며 자연스레 제 품에 레이첼의 머리가 닿도록 했다.
레이첼은 묘한 눈을 하고 힐끔 시선을 올렸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턱선과 함께 길게 뻗은 속눈썹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그녀를 마주하려 시선을 내린 푸른 눈과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
꼴깍 목 뒤로 넘어가는 물이 어쩐지 달큼했다.
* * *
바이허 백작의 침실에서는 대낮부터 열기가 흘렀다. 벽난로 불은 꺼진 지 오래건만 침대 위 정사를 벌이기 시작한 남녀는 서로를 핥고 탐하느라 방 안 공기가 차가워진 것도 몰랐다.
“하아…… 레이첼.”
아이작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그는 레이첼과 처음 관계를 했을 때보단 거칠었고 그녀를 암캐 취급 하며 거칠게 다뤘을 때보다는 부드러웠다.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댄 채 제 위로 레이첼을 올린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레이첼의 머리 뒤쪽을 잡고 있었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 가며 들이치는 혀에 레이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음…… 백작님. 흐응…… 조금만……읏.”
“아이작이라 불러요, 레이첼.”
레이첼은 일어나자마자 아이작과 몸을 섞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어쩌나. 올려다본 아이작의 얼굴은 제법 잘난 것이 몸을 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고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애초에 아이작 바이허를 사귄 이유가 무엇이었나. 그녀 취향에 꼭 들어맞는 얼굴 때문이 아니던가.
게다가 진심이든 아니든 먼저 사과를 한 그에게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탓도 있었다. 레이첼 주변에 그쯤 되는 사내들은 모두 저 잘난 맛에 살았고 곧 죽어도 그녀에게 숙이지는 않을 이들이었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사과는 새로운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이작……하으.”
숨 쉬기가 힘들어진 레이첼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 레이첼의 뒤통수를 더욱 세게 쥐더니 그녀의 고개를 제 쪽으로 누르며 입술을 빨고 입안을 샅샅이 건드렸다. 질척이다 못해 넘쳐흐르는 타액이 두 사람의 입가에 잔뜩 묻어났다.
“다리 좀 더 벌려요.”
“하으……아!”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벌어진 다리를 파고든 성기가 존재감을 발했다. 레이첼은 제 안에 들어찬 과한 압박감에 아랫배가 불룩함을 느끼며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조, 조금만 살살…… 으응…… 응!”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간 슬립의 레이스가 아이작의 허벅지를 자극했다. 아이작은 허리를 감았던 손을 내려 레이첼의 엉덩이를 세게 쥐곤 제 쪽으로 최대한 밀착시켰다. 그러잖아도 깊이 박힌 남성이 끝까지 찔러 오자 레이첼이 자지러지며 팔에 힘을 줬다.
“움직여야지.”
엉덩이를 주무르던 아이작이 약하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소리와 함께 레이첼이 허리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물건이 그녀가 움찔거릴 때마다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다. 아이작은 훌쩍이면서도 제 말대로 허리를 돌리는 레이첼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다 허리를 살살 튕겼다.
“아으…… 아파……. 흐으……. 흣!”
“그래서 싫습니까?”
발갛게 흥분한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괴롭긴 했으나 콱 채운 이것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아이작의 어깨와 가슴에 제 뺨을 비비며 꼴깍꼴깍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이작은 그런 레이첼을 달래듯 어르면서도 제 것 밀어 넣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읏!”
계속되는 움직임에 레이첼이 달뜬 숨을 뱉으며 쾌락을 좇았다. 한껏 고양된 그녀의 표정에 아이작의 얼굴에는 슬쩍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그녀를 모욕하며 엎어 버리고 싶은 걸 꾹 참은 채 제 가슴팍에 붙은 레이첼의 머리를 떼어 냈다. 그리고 인내를 보상받듯 다급히 여기저기 입 맞췄다.
이마는 물론이요 눈 코 입 할 것 없이 붙는 사내의 열기에 레이첼은 기겁하며 도망가려 했지만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단단한 손에 옥죄이듯 잡힌 그녀는 그나마 자유로운 발가락을 굽히며 제게 붙는 사내를 받아들였다.
방 안에는 습한 소리가 가득 찼다. 수십 번 레이첼에게 입 맞춘 아이작이 몸을 돌려 제 무릎 위에 레이첼을 앉히고 침대 헤드에 여린 여체를 바짝 기대게 했다. 잠시 나왔다 다시 치고 올라오는 사내의 성기에 레이첼이 칭얼거리다 차분히 내려온 아이작의 은발을 세게 쥐었다. 당겨지는 머리에 항상 나른했던 푸른 눈이 번뜩이더니 쉬어 버린 듯 갈라진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입 맞춰요. 레이첼.”
평소와 다른 사내의 목소리에 레이첼의 속에서 장난기가 일었다. 짓무른 눈가를 한 채 그녀는 살살 웃더니 혀를 내밀어 아이작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한 번. 두 번. 감질나게 닿았다 떨어지는 혀는 입맞춤이라기보다 희롱에 가까웠다. 그 짓궂은 장난에 아이작의 팔 근육은 꿈틀대더니 그의 손에 힘줄이 콱 섰다.
“망할…….”
아이작은 무어라 낮게 지껄이더니 급급한 듯 고개를 쭉 내밀었다. 먼저 입 맞추라 명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한쪽 팔로 레이첼을 지탱한 그는 자유로운 오른손을 이용해 레이첼의 머리를 잡아 둔 채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여린 입안에 침투했다. 천장과 치아를 모두 훑어 낸 그가 혀뿌리마저 뽑을 듯 거칠게 키스하자 레이첼이 어항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뻐금댔다.
“하으…… 하아…… 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막힌 레이첼이 본능적으로 내벽을 조였다. 만족스러운 자극에 레이첼의 아래를 드나들던 아이작이 입을 떼곤 그녀의 척추를 따라 등을 쓸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톡톡거리는 손길에 레이첼이 바르르 떨리는 제 입술을 축였다.
“흐응…… 읏! 으응…… 아!”
긴 백금발이 흔들리며 그 일부가 젖은 등에 붙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박자에 맞춰 벌어진 접합부가 질척였다. 습기 가득한 소리에 레이첼은 눈을 꼭 감았다. 맞붙은 살 사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열에 슬립은 물론이요 몸은 이미 푹 젖어 있었다.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젖을 대로 젖은 내부에 성기를 찔러 넣으며 훅훅 숨을 질렀다. 그가 한번 숨을 쉴 때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땀이 날카로운 턱을 타고 내려오더니 종국에 후드득 떨어졌다.
남녀는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엉겨 붙었다. 어찌나 끈적한지 두 사람이 뿜는 열에 벽난로에 다시 불이 필 지경이었다.
* * *
아이작과의 정사는 레이첼이 지쳐 눈조차 뜨지 못할 즘 끝났다. 쨍하게 떠 있던 해는 반쯤 모습을 감춘 뒤였으며 하늘은 불그스름해졌다.
꼼짝 못 할 정도로 혹사당한 레이첼은 하녀가 그녀를 씻겨 주는 와중에도 고개를 꾸벅거리며 떨궜다. 아이작은 노곤노곤 눈을 감는 레이첼의 머리를 직접 말려 주고 정리해 줬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귀찮을 줄만 알았는데.”
레이첼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일을 치르느라 더러워진 시트는 말끔해진 후였다. 그리고 레이첼의 머리가 어느 정도 정돈됐을 때 아이작은 그녀 앞에 잘 차려진 식사를 대령했다.
레이첼은 부드러운 흰 빵과 진한 수프를 오물거리며 잘도 먹었다. 평소 그녀는 사내들 앞에서 철저히 식사 예절을 지켰지만 하루 이상을 굶었고 격한 정사를 벌이고 난 터라 식욕을 이기기 힘들었다. 다람쥐처럼 뺨이 빵빵한 것이 보기 흉할 법도 했건만 아이작은 보기 좋다며 쿡쿡 웃었다.
“웃지 마세요.”
“아. 기분 나빴다면 실례. 하지만 레이첼 그대가 귀여운 걸 어떡합니까.”
레이첼과 아이작 사이 분위기는 전의 만남보다 풀려 있었다. 레이첼은 새삼 육체의 대화가 대단하다 느끼며 아이작의 침대를 뒹굴었다.
‘항상 느끼지만 침대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니깐.’
배도 찼겠다 그녀가 부드러운 침구의 감촉을 만끽하며 웃을 때였다. 언제 누웠는지 옆으로 누운 아이작이 레이첼과 눈을 맞추더니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백작님?”
그제야 레이첼은 아이작이 좀 이상하다 생각했다. 본래 그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기에 제 침대를 식사 공간이나 쉬는 곳으로 남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잠자리를 함께한 연인에게도 통용되는 규칙이었다.
“이 침대가 마음에 듭니까?”
“뭐…… 적어도 제 방 침대보다 좋으니까요.”
“편하다니 다행입니다.”
전이라면 이미 레이첼을 손님방으로 안내하거나 마차를 내줄 아이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쩐 일인지 제 침대를 제 것처럼 쓰는 레이첼을 구경할 뿐이었다. 왜? 부담스러워진 레이첼은 슬금슬금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다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이작은 레이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전 같으면 주절주절 떠들어 댈 텐데. 아니면 후희를 핑계로 그녀의 가슴이나 목을 지분거릴 인간인데.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곧 죽는다던데 이 인간이 왜 이러지?’
레이첼은 이것저것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아이작의 시선을 피했다. 머리를 잡힌 터라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레이첼은 문뜩 저와 아이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관계는 이상했다. 분명 헤어지긴 했지만 몸은 뜨겁게 섞었고. 그냥저냥 하룻밤 보내는 관계라 생각하면 괜찮았지만……. 레이첼은 아이작이 혹 아직 저와 헤어지지 않았다 생각하는 게 아닌지 걱정됐다.
그의 얼굴은 분명 레이첼을 혹하게 할 만큼 잘났고 그와의 잠자리는 말할 것 없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레이첼은 이 이상 아이작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이작의 민낯을 한번 본 터. 지금 당장은 무슨 변덕으로 이러는지 몰랐지만 그 또한 여느 사내들과 같이 그녀가 다룰 수 없는 권력자이자 본질은 고압적인 사내였다.
‘확실히 하고 집에 가자.’
레이첼은 분위기가 괜찮은 참에 제대로 관계 정리를 하고 돌아가자 마음먹었다. 아이작이 자신을 가지고 논 것이냐 따진다면 할 말은 없었다만 그녀의 경험상 이런 의사 전달은 빠를수록 좋았다.
“백작님.”
“레이첼.”
그녀가 아이작을 부르기 무섭게 아이작도 그녀를 불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레이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닙니…….”
아이작은 레이첼의 양보를 거절하려다 입을 닫았다. 한순간에 굳게 닫힌 입매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 한참을 머뭇대다 입술을 살짝 벌렸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그 뒤로 거의 다 진 해가 마지막 빛을 발하며 은발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럼 레이첼.”
사내가 천천히 팔을 뻗어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쥔 후 입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 * *
구혼.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행위 중 하나이자 반려가 되어 달라 청하는 말. 그걸 예상치 못할 때 들으면 어떨까.
레이첼에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갑자기 왜? 곤혹스러워진 그녀는 놀란 눈을 한 채 아이작을 바라봤다.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첼과 다르게 아이작은 청혼을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은 눈.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
그 조용한 얼굴을 본 순간 놀랍게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레이첼은 제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있음을, 제 뺨이 붉어졌음을 직감하고 시선을 떨궜다. 도저히 상대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별로 기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레이첼이 눈을 피하자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속에 담긴 실망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분명 기쁘기만 한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이첼은 괜히 드는 죄책감에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절로 손이 발발 떨렸다.
“하긴 잠자리 직후 반지도 없이 하는 청혼은 좀 그렇던가요.”
조금 전보다는 실망감이 가신 듯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아이작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차마 볼 수 없었던 레이첼은 고개를 더 옹송그린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왜? 레이첼은 허락도 거절도 아닌 물음을 던졌다. 아이작은 혼란에 휩싸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보라색 눈을 보다 담백하게 말했다.
“뭐…… 별 이유는 아닙니다. 그냥…….”
“…….”
“빗속에 쓰러진 걸 보니 이리해야 할 거 같아서.”
“…….”
“짧은 시간 매번 위기를 겪는 그대를 지켜 주고 싶다 생각해서.”
“…….”
“그게 다입니다.”
아이작은 비에 젖은 채 쓰러진 레이첼을 본 순간 충동적으로 다짐했다. 이 여자를 내 옆에 둬야겠다. 갑자기 왜 그런 욕구가 솟았는지는 그도 몰랐다. 몰랐기에 계속 튀어나오려는 말을 누른 채 몸이나 섞고 보내자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침대에서 그가 말려 준 머리를 비비며 행복한 듯 몸을 뉜 레이첼을 보자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 그는 제 둥지 안에서 제 체취를 묻힌 채 웃는 레이첼을 가만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청혼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을 내지르는 순간까지도 머리는 안 된다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의 입은 주인의 생각보다 훨씬 감성적이었고 솔직했다. 말을 뱉은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작은 레이첼보다 저 스스로가 더 당황했다 확신했다.
“……그대 얼굴을 보아하니 답은 거절인 것 같군요, 레이첼.”
아이작은 레이첼의 지금 반응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거절 아닌 거절. 수락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장은 죄이듯 괴로웠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다행이다. 그는 분명 레이첼의 거절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만일 수락했으면 난 어떻게 했을까?’
아이작은 내려앉았다 다시 제자리를 찾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 자신에게 물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걱정하는 와중에도 레이첼 한정 무력하고 충동적인 그의 감정은 분명 그녀에게 면사포를 씌웠으리라.
‘로지오 모나타가 로잘린 캐틀렛과 도망쳤습니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음번 공작위는 공녀에게 돌아가겠지요. 그녀는 야심만만한 사람이고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번 사업에 모나타가의 영향이 큽니다. 그들이 발을 빼면…….’
그가 엮인 수많은 연들. 그중 몇은 아주 중요했고 아이작은 그것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이상이 되기 위해서 혼인이 가장 큰 패 중 하나인데. 그런 중요한 걸 고작 자작가 영애한테 쓰다니. 손익 계산으로만 따진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백작님. 저는…….”
레이첼은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미안한 듯 말을 흐렸다. 아이작은 곤란한 듯 그를 보는 눈에 일부러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레이첼…….”
속마음은 안도였으나 레이첼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청혼한 주제에 거절을 바란 나쁜 놈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녀를 손에 쥐고 가지고 싶었다.
정말 결혼이 될 수도, 그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 다행히도 그가 귀애하는 이 여인은 그보다 한참 낮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가 레이첼을 지금보다 더 낮은 위치로 떨굴 수 있는, 그녀를 언제고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정부는 절대 싫다 외칠 테지만…… 레이첼의 남편이 될 이가 내 바로 아래나 만만한 기사쯤만 되면…… 아니면 애블랑가가 아예 없어지는 것도 좋겠지.’
비열한 생각이었지만 어쩌랴. 그만큼 이 여자를 손안에 두고 싶은데. 아이작은 거부당한 불쌍한 사내의 탈을 쓴 채 제게 떨어질 레이첼의 앞날을 여러 방향으로 그려 봤다.
‘아이작.’
‘백작님.’
‘주인님.’
상상 속의 그녀는 그의 부인, 정부, 노예 등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완전히 다른 여러 모습에도 공통점은 존재했다. 그의 품속에서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는 눈. 그것만은 같았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대신 전에 헤어지자 했던 말은 거두어 주세요.”
“네? 그건 좀…….”
“부탁입니다, 레이첼. 그게 힘들면 피하지만 말아 줘요. 그대를 못 보는 건 내게 너무 힘듭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보라색 눈을 보니 음습한 상상을 한 것이 아주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끝내 거짓만을 말하며 레이첼을 기만했다. 레이첼은 안쓰럽게 그를 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한 내 여우.’
똑똑―
아이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레이첼의 손에 키스할 때였다. 굳게 닫힌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아이작이 레이첼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준 뒤 문가로 갔다.
“주인님.”
“뭔가?”
작게 열린 문틈으로 하녀로 보이는 이가 빼꼼 얼굴을 보였다. 상대가 여자임을 안 레이첼이 목까지 올린 이불을 조금 내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별로 중요한 이가 아니면 다음에 오라 했으면 하는데.”
“그게…….”
하녀가 곤란한 듯 쩔쩔매다 눈치를 보듯 문 안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아이작이 짜증스러워하는 얼굴로 다음 말을 종용했다.
“모나타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 * *
레이첼은 홀로 남겨졌다. 가고 싶었지만 아이작이 급히 떠난 탓에 챙겨 입을 드레스가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녀라도 불러 물으면 좋으련만 혹여나 마주칠 공녀 때문에 문밖으로 나서기가 꺼려졌다.
‘그러니깐 왜 꺼려지느냐고…….’
꼭 스스로가 잘못을 저지른 이 같았고 있어서는 안 될 이물질이 된 기분이었다. 해가 어둑해진 탓에 방 안 푸른 벽지가 음울히 빛났다. 괜히 드는 저조한 기분에 레이첼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물질.
레이첼은 다른 무엇보다 이런 감상이 별로였다. 딱히 잘못한 게 없는 거 같은데, 사람들은 잘난 사내와 엮이는 그녀를 꼭 창부나 죄인처럼 취급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아무한테도 문 열어 주지 말고.’
조금 전도 그랬다. 과하게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으나 레이첼은 아이작이 제 존재를 잘못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급히 입는 옷. 당황한 듯한 눈. 입에 손가락까지 대어 가며 열지 말라는 문. 누가 보면 그에게 청혼 받은 여인이 아니라 그가 몰래 숨겨 둔 부적절한 여인으로 착각하리라.
물론 레이첼도 알았다. 아이작 바이허가 모나타 공녀와 약혼할지 모른다는 거. 공녀가 이 시간에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소문이 괜히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약혼한 것도 아니고. 약혼을 발표한 것도 아니질 않나. 분명 잘못한 것은 없는데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상황이 반대라면? 그는 공녀도 이렇게 숨겨 둘까?’
모나타 공녀가 그의 침실에서 그의 청혼을 받고 레이첼이 이 시각 아이작을 찾았다면? 레이첼은 공녀와 저를 바꿔 보곤 고개를 저었다.
‘맞이하기는커녕 바로 축객령이 내려졌겠지. 거칠게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고.’
그러고 보니 청혼 후 아이작의 행동도 미지근한 구석이 있었다. 레이첼은 흥분에 조금 들떴던 피가 순식간에 팍 식음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여간 뭘 기대한 건지. 당연하잖아, 다들 수준에 맞게 짝 찾는 건.”
당연해. 그게 맞아. 비슷한 말이 레이첼의 입에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쩐지 꺼진 벽난로가 극도로 차가워진 듯싶어 그녀는 이불을 좀 더 올린 채 몸을 웅크렸다.
* * *
수도 한가운데에 위치한 신전은 거대하고 화려했다. 수십 개의 기둥에는 각각 위대한 성녀와 성인들이 양각되어 있었으며 기둥들 가운데 우뚝 선 여신상은 리온의 자랑이 될 만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니까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꼬박꼬박 연락도 하고…….”
“시끄럽구나 레이첼.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오늘은 여기서 얌전히 기도하는 거야.”
“내 나이가 몇인데 회개 기도를 해요. 이런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건데……. 혹 누가 보면 어떡해요!”
레이첼에게는 웅장한 신전 건물이 갑갑한 감옥으로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는 이비에게 끌려 이곳에 벌을 받기 위해 왔다.
“레이첼!”
우아한 부인이 딸자식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타박하자 신전의 평사제부터 심부름하는 청년, 기도를 위해 온 귀족까지, 사내란 사내의 시선은 모두 이 특출난 외모의 모녀에게 모였다.
“……어머니. 조금만 조용히…… 조용히…….”
레이첼은 지금 상황에 쏠리는 눈이 부끄러워 고개를 수그렸으나 이비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레이첼에게 소리를 높였다.
“이 어미가 보기에는 이게 딱 맞는 벌인데……. 하지만 네가 정 싫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럼 집으로 가 경전을 필사하겠니?”
“얌전히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
경전 필사란 말에 레이첼이 수치도 잊은 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비가 말하는 경전은 총 열여덟 권. 그걸 필사하려면 열흘 밤낮을 다 써도 시간이 부족했다. 차라리 반나절 무릎 꿇는 게 낫지!
“호호. 그래. 잘 생각했다, 내 딸. 그럼 이 어미는 구두 좀 구경하고 오마. 사제님께 특별히 부탁했으니 도망칠 생각 말고 얌전히 기도만 해야 한다. 네 잘못에 대해서도 좀 생각하고.”
레이첼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비를 가련한 눈으로 봤다. 하지만 냉혹한 그녀의 어미는 레이첼을 개인 기도실에 집어넣더니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정말 싫은데…….”
꼼짝없이 벌을 서게 된 레이첼이 한숨을 쉬곤 가져온 베일을 꺼냈다. 털썩 준비된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 그녀에게서는 절망마저 흘렀다.
“모든 만물의 어머니이신…….”
레이첼은 손을 모은 채 기도를 시작했다. 길게 눌러쓴 베일과 신전 방문에 맞게 차려입은 목까지 올라오는 드레스가 갑갑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디서 누군가 보고 있겠지?’
이비는 분명 사제에게 부탁했다 말했다. 헛된 말은 안 하는 어미의 성격상 모르긴 해도 정말 사제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괜히 꾀를 부리다 배로 벌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에 레이첼은 얌전히 기도했다. 총 백 장 중 딱 세 장 외운 기도문이 웅얼웅얼 끝없이 반복됐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레이첼은 눈을 감은 와중에 제 뒤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어미가 말한 감시자가 분명하다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좀 더 열성적으로 기도문을 읊었다.
“……품에 영광이 있으리라.”
세 번째 장의 마지막 구절을 읊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니 부끄러웠다. 사제가 보기에는 얼마나 한심할까. 귀족의 소양 중 하나가 백 장에 달하는 기도문 전문을 외우는 것이었지만 레이첼은 다른 수업은 몰라도 신학만은 끔찍이 지루해했기에 매를 맞으면서도 기도문 외우기를 게을리했었다.
‘이런 거 써먹을 곳 없다 생각했는데. 하아…… 어머니. 당신이 이 딸을 부끄럽게 하나이다.’
“모든 만물의…….”
별도리 없었다. 멈추는 것보다야 낫지. 그리 생각한 레이첼이 또다시 맨 앞장으로 갔다. 하지만 그녀가 첫 문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 뒤에서 그녀를 한심스레 여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틀렸습니다.”
* * *
급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레이첼은 꿇어앉은 채로 뒤로 돌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고이 내려쓴 베일이 너울거렸다.
“……아제프 경.”
상대를 마주한 레이첼의 눈이 조금 커졌으나 곧 시큰둥히 제 크기를 찾았다. 척 봐도 미지근해진 그 얼굴에 아제프는 턱을 쓸며 미간을 좁혔다. 눈앞의 여자에게 얼마 전에 차인 곳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애블랑 영애.”
“별 반가운 사이도 아니고 그냥 지나갈 것이지 왜…….”
꿍얼거리는 소리는 다 들리는 혼잣말이었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아제프는 허리를 살짝 숙이려다 말고 레이첼을 쳐다봤다. 그새 몸을 돌린 그녀는 그의 시야에 베일이 드리운 작은 등만을 보일 뿐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애블랑…….”
아제프는 한 발 다가서며 다시 레이첼을 부르려 했지만 기도실 창으로 들이치는 빛 아래 작고 하늘거리는 그녀의 자태를 본 순간 머뭇거리고 말았다. 작은 몸을 오그린 채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은 그의 깊은 신실함을 자극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결국 그는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마저 조용히 있자 작은 기도실은 옅은 숨소리만이 남았다.
잿빛 고아한 기도실에서 조용히 손을 모은 여인이라. 아제프는 조금 전 기도문이 틀렸다 지적한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레이첼의 신앙심에 새삼 감동한 눈을 했다.
하나 아제프가 지켜보고 있는 레이첼은 애초 신실함과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그녀가 기도까지 하며 등을 돌린 목적은 단 하나. 엮여서 좋을 것 없는 성기사를 그녀 딴에는 그나마 예의 바르게 쫓아내고자 한 행동이었다.
‘……언제 가는 거야?’
명화 속 그림처럼 최대한 예쁘게 자세를 잡은 탓에 등과 무릎은 아려 왔고 고개는 뻣뻣한 것이 아팠다. 결국 레이첼은 몇 분 더 자신과의 실랑이를 하다 참지 못하고 일어서 아제프를 홱 돌아봤다.
“경께서 제 기도를 방해하고 계신 거 같은데…… 그만 나가 주시겠어요?”
아제프는 레이첼의 뾰족한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새 레이첼을 따라 손을 모으고 있던 그의 입가에서 아쉽다는 듯 느린 한숨이 흘렀다.
“방해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전의 일을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아 본의 아니게 방해를 했습니다.”
“……다짜고짜 숙녀에게 스타킹을 벗어 보라고 한 거에 설명이 필요할까요?”
레이첼은 아제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확히 불쾌하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가. 안 그럴 것 같았던 성기사가 대번에 얼굴을 바꾼 채 발을 주물럭거리다니. 레이첼은 그때를 떠올리며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그때의 일은 오해십니다. 제 말을 들어 보시면 저를 이해하고도 남으실 겁니다. 그건 정말 중요한…….”
“그럼 한번 말씀해 보세요. 성기사씩이나 되셔서 숙녀에게 스타킹을 벗어 보라며 발정 난 개처럼 덤벼들었던 걸요.”
“발정 난 개…….”
아제프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누군가. 이 나라 리온에서 가장 신실한 성기사라 칭송받는 이 아닌가. 발정이라니. 듣기는커녕 떠올려 본 적도 없는 단어에 그의 머리는 잠시 사고하길 거부했다.
“단언컨대 결코 그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뭐 하러 영애같이 방탕한 여자를…….”
다른 어떤 오해보다 그런 종류의 오해가 그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순간 울컥한 그는 급히 말을 뱉다 그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방탕한 여자요?”
“……실례했습니다.”
커졌던 목소리가 현저히 작아졌다. 레이첼은 저와 시선 마주치길 피하는 성기사를 보며 한마디 내지르려다 이곳이 기도실이요 이비가 제게 붙여 뒀을지 모르는 간자를 떠올리며 억지로 빙긋 웃었다.
“경. 용건만 빨리 말씀하셨으면 좋겠어요. 보시다시피 제가 바빠서.”
‘빨리 꺼져.’
아제프는 레이첼에게 조금 미안한 표정을 비쳤다. 비록 스스로 한 말이 거짓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도 리온의 귀족. 숙녀에게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릴 줄은 아는 이였다. 주춤주춤 레이첼의 눈치를 보던 그는 그녀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작게 허리를 굽히곤 기도실 제단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일단 앞을 좀 봐 주십시오. 뭐가 보이십니까?”
“쓸데없는 조각…… 아니 여신께서 선택하신 초대 성녀님께서 계시네요.”
레이첼은 아제프가 보는 것이 사람 크기로 조각된 초대 성녀의 조각상임을 눈치챘다. 레이첼만큼이나 길고 물결치는 머리를 가진 성녀는 자애로운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맞습니다. 초대 성녀 이사벨라 님이시죠. 이분께서는 비천한 인간들을 위해 여신께서 친히 고르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분의 희생으로 인해 인간들은 멸망 전에 모두 구원받고 햇빛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들은 저 아래 보이지 않는 마굴로 모조리 던져…….”
“아제프 경. 저는 입으로 하는 신학보단 조용히 혼자 하는 기도 시간이 더 알찰 거라 확신해요.”
“…….”
“그러니 용건만 간단히 해 주시겠어요?”
경외 가득한 얼굴을 하고 초대 성녀에 대해 떠들던 아제프는 레이첼의 말에 제 안 무언가 사그라듦을 느꼈다. 기도문 때도 알아봤지만 이 여인은……. 그는 속으로 아직 당신의 위대함을 모르는 이 여인을 용서해 달라 여신에게 빌며 올렸던 팔을 내렸다.
“그럼 성녀님의 발을 좀 봐 주시겠습니까?”
아제프의 뜬금없는 말에 레이첼은 기도하며 스치듯 본 성녀의 발에 시선을 던졌다. 초대 성녀의 발은 미화가 들어간 조각상답게 아주 정교했다.
쭉 뻗은 발등은 미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발꿈치는 매끄러운 원을 만들었다. 열 개의 발가락은 제각각 틀어짐 없이 자리했으며 그 크기와 길이가 완벽해 조각한 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저것만 떼어 내 팔아도 꽤…….”
“애블랑 영애. 설마 그 나이가 되도록 이사벨라 님에 대해 배우지 못한 겁니까?”
“그런 얼굴 마세요. 제가 아제프 경보다 배움은 좀 모자라지만 성녀님 발이 지니는 의미를 모르지는 않아요.”
초대 성녀의 발이 지닌 의미는 꽤 컸다. 항상 맨발로 다녔다 전해지는 그녀는 여신의 은총을 받아 어디에 발을 디뎌도 상처 입지 않았다. 여신을 의심한 어느 왕이 성녀를 칼날 위와 타오르는 가시 장작 위로 걷게 했지만 그녀의 발은 무사했고 그 일로 왕은 물론이요 사람들은 더욱 그녀를 칭송했다 경전은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술일 뿐 아닌가. 레이첼은 성녀의 발에 그다지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물론 매년 열리는 초대 성녀 이사벨라 행사 때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맨발로 꽃잎이 흐드러지게 뿌려진 연회장 홀에서 춤을 추긴 했지만 그건 특이한 연회가 좋았던 거지 성녀에 대한 경외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제가 그때 왜 그랬는지도 이해하시겠습니까?”
“아뇨. 전혀 모르겠어요. 성녀님의 발과 아제프 경의 이상 행동의 상관관계가 뭘까요?”
“잘 보십시오. 영애의 발과 초대 성녀님의 발 크기가 똑같이 일치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때는 애블랑 영애께서 거부하시는 터에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저 발꿈치 들어간 모양, 복사뼈의 위치, 발가락 길이 모든 게 흡사합니다!”
레이첼은 아제프의 말에 당최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친 건 전부터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단단히 미쳤을 줄이야. 아제프에게서 한 발 떨어진 그녀는 질린다는 눈을 하고 실성한 성기사를 봤다.
레이첼의 그러한 표정에도 아제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말이 어찌나 빠르고 많은지 평소 그를 아는 이들이 봤다면 기함할 정도였다.
“이사벨라서 4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상이 타락과 불신, 방탕으로 가득 찰 때 여신께서는 진정한 성녀를 내려 주신다고요. 그리고 그분의 첫 딸과 꼭 닮은 이가 같은 발을 하고 권능을 증명함으로써 세상에 존재를 드러낼 것이라 하셨지요. 그러니 제 생각에는…….”
아제프는 이사벨라 조각상과 레이첼을 번갈아 보며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이첼이 보기에 성녀상은 수많은 여성 조각상들과 비슷했다. 거의 똑같은 얼굴과 자애로운 표정,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성녀의 발과 제 발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은…… 대꾸가 아까울 정도의 헛소리였다.
“……전 초대 성녀님과 그다지 닮지 않았는걸요.”
“아닙니다. 전에는 저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영애께서는 이사벨라 님과 꼭 닮으셨습니다. 심지어 이사벨라 님도 금발에 자색 눈을 가졌다 전해지니 경전에서 말한 성녀께서 혹…….”
레이첼은 그동안 사내들에게 조각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했지만 오늘부로 더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잖은가. 눈앞 사내처럼 여신에게 지나치게 미친 놈이 더 있을지.
“아제프 경. 금발은 당장 제가 아는 영애만 스물을 넘어가는 데다 자색 눈도 흔치는 않지만 찾으면 제법 있답니다.”
“흔치 않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둘 다 가진 여인을 본인 외에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제 핏줄인 랑트 자작 부인도 저와 같은 색의 머리에 같은 색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또 어머니의 핏줄 중에도 저와 같은 색의 금발은 아니지만 금발에 자색 눈이 있고요. 따지고 보면 이사벨라 님의 금발은 저보단 그분들과 더 닮은 색이겠네요. 벽화 속 그림에서 뵌 이사벨라 님은 진한 금발을 가지셨으니까요.”
“…….”
“어머. 소개해 드릴까요? 한 분은 아제프 경을 제법 좋아하는데.”
아제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레이첼의 말이 맞았다. 이사벨라는 레이첼보다 진한 금발에 그만큼이나 선명한 자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따지자면 외모나 분위기도 다른 구석이 있었다. 적어도 그의 마음속 초대 성녀는 방탕함과 거리가 멀었으니.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전승의 주인공은 레이첼이었다. 이유는 직감. 알 수 없는 믿음이 레이첼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는 그걸 신의 계시라 확신했다. 아니라면 제 심장이 저런 여인을 향해 뛸 리 없지 않은가. 아제프는 레이첼과 마주친 후부터 나타난 제 떨림이 신의 뜻에 기인한다 여겼다.
“……가장 중요한 건 발입니다. 발을 확인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
“무례한 청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한 번만 스, 스타킹을 벗어…… 아니 맨발을 보여 주십시오.”
레이첼은 발에 집착하는 아제프가 변태가 분명하다 생각했다. 왜, 발에 유독 그런 걸 느끼는 사내들도 있지 않은가. 아제프가 제 발을 구경하며 만지작거릴 것을 상상해 버린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제프 경. 제가 ‘그런 뜻이!’ 이러면서 이 신성한 기도실에서, 외간 사내 앞에서, 드레스를 걷고 스타킹을 벗은 다음 맨발을 드러내리라 기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아니!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요. 성녀님의 조각상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누가 성녀님 발 크기랑 모양을 그려 놓은 것도 아니고. 이딴 걸로 그런 얼굴을 하고 발을 보여 달라 하면 내가 잘도 그러겠다!”
“성녀님의 발 크기와 모양은 글과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각상은 이사벨라 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녀를 본떠 만든 조각상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지요.”
“그래도 싫어요! 방탕하다 뭐다 하면서 만만하게 보시는 거 같은데 전 귀족 영애예요. 그런데 남에게! 그것도 핏줄도 아닌 사내에게 발을 어떻게 함부로 보일 수 있겠어요?”
잘 보여 줬다. 이사벨라 기념 연회 때도 그렇고 더운 여름이면 레이첼은 스타킹을 신지 않은 상태로 맨발을 물에 담근 채 사내들과 떠들곤 했다. 그리고 침대에서는 당연히……
‘……입는 게 더 좋다고 안 벗긴 놈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홀랑 다 벗겼지.’
양심에 좀 찔렸지만 여긴 침대도 아니고 당장 신전의 기도실이었다. 아무리 막 나가는 레이첼이라지만 이런 곳에서 드레스를 걷고 맨살을 드러내기에 그녀의 간은 평범했다. 게다가 자칫 오해를 사면 어떡하나. 다른 곳도 아니고 신성을 모욕한 행위는 큰 죄였다.
“중요한 일입니다. 이건 이 나라, 아니 세상을 위한 일이니 영애께서 협조하지 않으신다면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벗기시겠다 이거예요?”
“벗기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겁니다. 벗긴다는 그런 말보다는 신의 뜻을 이룬다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경, 신 부르짖으며 포장해 봤자 그건 강제 추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제가 신전에 경을 신고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비록 오해로 손가락질을 받는다 한들 행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세상에…… 경! 일이 커지면 당장 파문당할 텐데 걱정도 안 돼요?”
“……벌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박해는 선구자들의 유구한 역사였지요. 두렵긴 하지만 저 또한 진실한 이유가 있으므로 견딜 것입니다. 여신께 한 몸 바치기로 맹세한 이상 감내하면 언젠가는 모두 제 진실을 알아줄 테니 억울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애블랑 영애께서도 협조해 주십시오. 세상을 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제프는 그렇게 말하며 굳건한 눈을 하더니 레이첼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레이첼이 무어라 할 틈도 없이 그녀 앞에 꿇어 긴 드레스 밑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곧 얇은 스타킹과 그 아래 가는 발목이 그의 한 손에 잡혔다.
“……실례하겠습니다.”
턱 잡힌 발목에 레이첼이 기겁을 했다. 그녀는 아제프에게 잡힌 발을 들어 올려 그의 손을 털어 내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한지 발목에 붙은 손은 꼭 원래의 몸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제프 경!”
“영애. 잠시만…… 잠시면 됩니다. 설명해 드렸으니 제발…….”
“놔! 놓으라고!!!”
“제 손이 닿는 게 싫으시다면 검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살짝만 베어 내면 금방 끝나니 이만 반항을 멈추시……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베이지색 구두가 아제프를 걷어찼다. 구두를 신은 발은 전보다 한층 고통을 가미시켰다. 순간 머리가 아찔했으나 아제프는 지난번 실수를 떠올리며 레이첼의 발목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놓칠 수 없지. 여신에게 마음을 바친 성기사는 꼭 사악한 마귀를 처단하는 것처럼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레이첼이 한쪽 다리로 균형을 잡은 채 허우적거리는 걸 막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쪽 발 구두를 벗기고 스타킹을 힘껏 당겼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하던지 탄성도 거의 없는 스타킹이 늘어나더니 주르르 내려올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악! 그래 마음대로 해! 칼로 베든 뜯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리본 가터를 착용한 게 무색하게 내려오는 스타킹에 레이첼은 결국 반항을 멈추고 제 허리 위에 얹어진 아제프의 손을 쳐 냈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힘을 쭉 빼곤 씨근덕거렸다. 실랑이하며 흥분한 탓인지 송골송골 맺힌 땀과 함께 그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재수 더럽게 없어서는.”
레이첼이 욕을 하든 말든 아제프는 얌전해진 레이첼의 스타킹을 착실히 당겼다. 그러나 단단히 묶은 리본 가터는 제법 질긴 구석이 있어 어느 정도 내려오다 말았다.
“이게 왜…….”
끙끙거리며 당황하는 아제프의 표정에 레이첼이 가지가지 한다 생각하며 드레스와 페티코트를 한 번에 확 젖혔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드레스 자락과 함께 흰 허벅지가 드러나자 아제프가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인제 와서 무슨.”
뒤늦은 그 반응에 레이첼은 코웃음 치며 직접 리본 가터를 풀고 스타킹을 무릎 아래로 끌어 내렸다. 매끈한 다리가 각선미를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됐죠? 빨리 확인하고 끝내 주세요.”
아제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킹을 마저 벗겼다. 작게 떨리는 손이 좀 느리긴 했으나 반투명한 흰 스타킹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고 레이첼의 맨발은 그를 목표로 하던 성기사의 손에 들어갔다.
“아아…….”
아제프는 눈을 크게 뜨고 레이첼을 발 여기저기를 살폈다. 발등부터 뒤꿈치, 발가락, 힘줄까지 세세히 살피는 눈에 레이첼은 어쩐지 제 얼굴이 열이 나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생각했다.
“……아직 멀었을까요?”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상상만큼이나 기분은 더러웠다. 레이첼은 제 발을 조몰락거리며 만지는 아제프의 손을 구두 굽으로 밟아 종잇장으로 만들고 싶다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레이첼에게 혐오를 심어 주고 있는 성기사는 무에 그리 감동했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빛내고 있었다.
“하아……. 내가 미쳤지. 이런 일에 수긍을 하고 이러고 있으니.”
발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손길에 레이첼이 지그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쉴 때였다.
“그래. 여기에 있다는 말이지. 알려 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탁하신 건데 거절을 할 수는 없지요. 애블랑 영애도 분명 영광스러워…….”
여럿의 말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레이첼은 들려오는 인기척에 자신의 꼴을 떠올리고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비, 비켜 봐요! 빨리! 여기서 오해라도 사면…….”
그녀의 조급함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왔다. 상체와 얼굴이 가까워지며 맞붙다시피 한 두 사람의 꼴은 훨씬 미묘하고 은밀해졌다. 레이첼은 뒤늦게야 그걸 깨닫고 아제프를 밀어 내려 팔을 뻗었지만 순간 기도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의 손이 아제프의 양어깨에 막 닿은 참이었다.
“…….”
“…….”
“…….”
열린 기도실 문 너머 화려한 금발의 사내와 척 봐도 고위직으로 보이는 사제 둘이 모습을 보였다. 세 사람은 무어라 떠들며 문 안으로 들어서다 마주친 광경에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설명할 수 있나?”
한참 만에 금발의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도실 안 드레스를 걷어 올린 채 다리를 드러낸 젊은 여인과 성기사. 두 사람은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꼴로 엉켜 있었다.
* * *
“……설명할 수 있나?”
카샨의 물음에 레이첼은 빠르게 아제프를 밀어 냈다. 아제프도 상황을 인지하기는 한 모양인지 레이첼의 발을 꽉 붙잡고 있던 손이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어쩌나. 들어온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걸 본 참이었다.
“감히 이 신성한 곳에서!”
“전하, 이들을 당장 끌어내야 합니다. 성기사와 귀족 여인이 어찌 이런 짓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제들이 노성을 질렀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두 사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다 못해 거품을 물 기세였다.
‘망했다.’
두 사제의 반응에 레이첼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억울하다 한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꼴 아닌가. 스스로가 봐도 제 꼴은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드러난 다리와 사내와 맞붙은 몸. 짧은 순간 레이첼의 머릿속 종소리가 울리더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좌르륵 그려졌다.
당장 머리카락이 잘린 채 저 어느 시골구석에 처박히거나 그도 아니라면……. 레이첼은 이 기도실 벽만큼이나 흐린 잿빛 죄수복을 입고 돌에 맞아 죽는 저를 상상하며 입술을 덜덜 떨었다.
“모두 오해십니다.”
잘게 떠는 레이첼을 빤히 보던 아제프가 일어서더니 옷매무새를 바르게 했다. 옷을 툭툭 털어 내는 그는 레이첼과 다르게 태연해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야 결백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제들이 보기에 그 꼴은 능청스럽고 뻔뻔해 보일 뿐이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늘 어디서 거짓을 지껄이나! 성기사가 기도실에서 여인과 불경한 행태라니!”
“맞소! 그러고 보니 경은 성소에서도 비슷한 일을 저질렀지. 후작가 출신이라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거라 착각하는 모양인데 경은 당장 파문이오!”
“신께 맹세컨대 전 결백합니다.”
“전하께서도 보셨거늘 계속 거짓을 늘어놓을 것이오? 경의 뻔뻔함에 내가…….”
“브리트 사제. 사제는 지금 신보다 세속의 인간을 더 높이 사는 겁니까. 제 신앙을 걸고 맹세합니다. 저는 신께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의 뜻을 행하고 있었지요.”
“저, 저 파렴치한 자가……. 전하!”
사제가 곧 넘어갈 듯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카샨을 바라봤다. 카샨은 저를 세속의 인간이라 칭한 아제프가 살짝 못마땅하긴 했으나 매달리듯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보다야 그가 옳다 판단했다.
‘신에게 일생을 바쳤다 주장하면서 아부만 떠는 이런 놈들보다야 저놈이 낫지. 게다가 하필…….’
카샨은 아제프를 힐끗 보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일어선 성기사와 다르게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레이첼은 희게 질린 채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저놈이야 후작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이쪽은 내 도움 없이는 힘들겠지. 하지만 이 이상 천해지는 꼴도 볼만은 할 것 같고……. 어찌한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 제법 구미가 당겼다. 카샨은 이대로 사제들의 손을 들어 줘 레이첼에게 큰 벌이 떨어지게 유도할까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죽거나 저 고운 얼굴이 상하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귀족의 신분을 박탈당한다면 손에 넣기 더 쉬우리라. 카샨은 정부도 못 될 신분으로 제게 묶일 레이첼을 상상하며 빙글 웃음을 흘렸다.
“전, 전하, 아니에요. 흐윽. 정말 아닌데…….”
그러나 들려온 울음소리에 그의 흥취는 단번에 깨져 버렸다. 레이첼은 눈물 가득한 얼굴로 카샨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카샨은 울먹이며 일부러 저를 부르는 레이첼이 발칙하다 생각하면서도 그새 매달릴 이라곤 그밖에 없다 판단한 그녀가 귀여웠다.
‘저런 얼굴은 오랜만이기도 하고 지금도 충분히 미천하니 이 내가 한 번쯤은 봐줘야겠지. 뭐…… 이걸로 전처럼 귀엽게 굴 테고 말이야.’
“브리트 사제, 하디그 사제. 두 사람은 아제프 경을 데리고 일단 물러났으면 하는군.”
한껏 너그러워진 카샨은 레이첼을 지그시 바라보며 제 뒤에서 방방 뛰고 있는 사제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가 당연히 제 편을 들어 주리라 생각한 사제들의 얼굴에 당황함이 번졌다.
“전하! 하지만!”
“아제프 경은 리온을 대표하는 성기사 중 하나지. 시끄러워져 봤자 좋을 게 뭐 있나? 그리고 오해라 하지 않아. 신께 신실한 성기사는 의심할 수 없는 법이지.”
카샨이 대놓고 아제프의 손을 들어 주자 사제들의 눈이 한 바퀴 굴러갔다. 그가 아제프의 아비인 리이트 후작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생각한 그들은 자신들끼리 눈을 맞추더니 바닥에 있는 레이첼로 표적을 바꿨다.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아제프 경은 충실한 기사이니 의심하면 안 될 일이지요. 하지만 저 간악한 여인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감히 성기사를 유혹하려 했으니 당장 끌어내…….”
“하디그 사제, 입을 조심하게. 애블랑 영애는 나와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야. 그녀는 신께 제법 충실해 성기사와 기도실에서 그런 일을 벌일 이가 아니지. 내가 보장하네.”
사제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눈엣가시인 아제프를 대놓고 쳐내진 못해도 저 소문 무성한 여인을 이용해 흠집 내려 했건만 황태자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을 기세였다. 레이첼의 외모와 소문에 대해 여러 번 들은 그들은 혹 저 간악한 여인이 황태자와도 몸을 섞은 것인가 그녀를 경멸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전하, 기도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갔는데 만약 벌이 없었단 것이 밝혀지면 저희들은…….”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이럴 건가? 두 사람은 내가 신께 보이는 성의가 우습나? 이대로 내가 지원을 끊으면 두 사람의 입지에 문제가 생길 텐데.”
“전, 전하. 그건…….”
“두 사람이 입을 다물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일이야. 그리고 대신 약조하지. 얼마 뒤 있을 내 결혼식을 축복해 주는 대가로 신전에 좀 더 많은 성의를 보이겠네.”
결국 두 사제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샨은 일이 해결됨과 동시에 레이첼을 향해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더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사제들에게 명했다.
“그럼 나가 봐. 아제프 경, 자네도 나가 보고.”
“저와 애블랑 영애는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꺼져.’
아제프는 카샨의 말을 단호히 거절하려 했다. 다른 이들의 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여전히 레이첼의 발을 살피던 그는 일련의 과정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제프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레이첼은 그에게 입 모양으로 꺼지라 말했다. 붉어진 눈가가 매섭다 못해 그를 갈기갈기 조각낼 듯 사나웠다.
“경. 지금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모양인데, 난 자네에게…….”
“……가 보겠습니다.”
아제프는 카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레이첼의 입 모양을 읽어 내기 무섭게 얼굴을 굳힌 그는 몸을 돌리더니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그대로 나가 버렸다.
“자네들도 나가 봐. 누구도 이쪽으로 못 오게끔 하고.”
사제들은 일국의 황태자에게 무례한 아제프의 행동에 경악하다 카샨의 잔뜩 모인 눈썹을 보곤 겁을 먹은 채 그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탁―
문이 닫히기 무섭게 레이첼이 작게 한숨을 흘렸다. 그녀가 잔뜩 긴장한 어깨에 힘을 빼자 음습한 그림자가 몸 위로 졌다.
* * *
잿빛 기도실에는 레이첼과 카샨 두 사람만 남았다. 카샨은 레이첼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고압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레이첼은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죄인처럼 수그리고 있었다.
“풀어 놨더니 아주 적당히를 모르는군. 도대체 사내가 몇이지?”
“…….”
“어이가 없어.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런 상황까지 내가 봐야겠나?”
레이첼은 저번처럼 받아치는 대신 얌전히 있었다. 반항할 상황도 아니거니와 카샨은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게 무색하게 험악한 얼굴을 했다. 신세 진 것도 있겠다 이럴 때 그를 자극해 봤자 좋은 꼴 못 본다는 걸 잘 아는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가여운 몸짓을 할 뿐이었다.
“그새 몇 놈한테나 가랑이를 벌린 거지? 기껏 길들여 놨더니 아무한테나 꼬리를 흔들고 다닌 모양이야. 응? 리첼.”
리첼이라는 명명에 레이첼의 잔뜩 수그러진 어깨가 움찔거렸다. 가랑이를 벌린다느니 모욕적인 말은 몰라도 저 단어만큼은 싫었다. 꼭 그때처럼 그가 기르는 애완동물이 된 기분 아닌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전에도…….”
울컥한 레이첼은 상황도 잊은 채 고개를 들고 카샨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수직으로 내리찍히는 시선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사나웠기에 그녀의 고개는 곧바로 다시 떨어졌다.
“다시 사제들을 불러들여야겠군? 서럽게 울더니 그새 기가 살았어. 내가 만만한가?”
카샨은 겁에 질려 발발거리면서도 반항할 기세를 보이는 레이첼을 지그시 노려봤다. 영악한 것. 레이첼은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끝까지 해코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니 저리 두려워하는 중에도 반항하는 것이겠지.
레이첼의 구원자가 된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사제들보다도 그녀에게 공포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감히. 날 뭐로 보고. 카샨은 이번에야말로 무르게 굴지 않겠다 다짐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꼴이 꽤 귀여워 참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가만 생각하니 화를 참을 수 있어야지.”
“…….”
“그새 겁을 상실해 바락바락 덤비는 꼴이나 잠시 풀어 줬을 때 자유로이 다니는 건 그렇다 해도…… 주인이 돌아왔으면 얌전히 있어야지. 보이는 족족 사내를 후리고 다녀?”
“…….”
“알아보니 아직도 엮인 사내가 여럿이더군. 마일런 후작에 바이허 백작. 그리고 아제프 리이트라……. 나 참.”
‘그 셋은 저도 싫은데요!’
레이첼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누군 엮이고 싶어 엮이나. 그녀도 그들과 더는 엮이기 싫었다.
“지금까지는 잘도 도망쳐 다녔지. 하지만 이제 안 돼.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
“장소가 좀 찝찝하지만 뭐 나름 색다르기도 하고 자고로 빚은 당장 받아 내는 게 최선이지. 그러니 구해 준 값을 해 줘야겠어, 리첼.”
“그 리첼 소리 이 정도 들어 줬으면 빚은 없는 셈……악!”
리첼이라는 단어가 또 들리자 레이첼의 목구멍이 겁을 상실한 채 다시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 머리에서 아찔한 아픔이 전해졌다.
“아악! 전하! 아파요! 전하!”
한순간에 휘어잡힌 머리채에 레이첼이 바동거렸다. 바짝 들어 올려진 고개와 함께 잔뜩 찌푸린 채 고통을 호소하는 하얀 얼굴이 안타까울 법도 했건만 카샨은 무심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드레스 앞섬을 뜯어내듯 내렸다. 거친 손길에 천 일부가 찢어지고 내려가더니 분홍빛 정점과 함께 탐스러운 가슴이 모습을 보였다.
“리첼, 널 버리고 갔을 때도 이건 항상 생각났지. 원래라면 내 정부도 못 될 게 몸 하나는 동하게 해서 말이야.”
카샨은 크고 말랑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곧 가운데 둥근 젖꼭지를 꼬집으며 당겼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던 얼굴이 파렴치한 모욕에 붉게 물들었지만 카샨은 교만한 권력자 대부분이 그러하듯 신경 쓰지 않은 채 제 즐거움만 챙겼다.
‘버릇을 다시 단단히 들여 놔야겠지.’
어차피 내가 키우다 버린 것인데.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제 아래 피식자를 착취하는 권력자의 느른한 만족감뿐. 레이첼의 가슴을 질릴 만큼 희롱한 그는 허리를 펴고 팽팽히 젖힌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붉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세게 문지르다 작은 입에 넣어 축축한 혀를 찍어 누르고 고른 치아를 훑었다.
“처음은 여기가 좋겠군.”
어느새 레이첼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눈물을 쏟고 있었다. 카샨은 공포로 흠뻑 젖은 그 얼굴에 만족감을 느끼고 키득거리며 웃더니 레이첼의 얼굴을 제 아랫도리로 바짝 끌었다. 이미 그의 물건은 성이 난 채 여자의 입이건 아래건 구멍이란 구멍은 다 헤집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리첼, 내 작은 새. 처음 가르쳐 줬을 때처럼 성심성의껏 해야 할 거야. 아니면 아제프 경은 물론이고 나를 유혹한 것까지 포함해 죄를 물을 테니. 애블랑가가 결딴나는 걸 보고 싶진 않겠지?”
* * *
휘어잡힌 머리카락이 아팠으나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코앞 사내의 아랫도리였다. 천 너머 불룩하게 무게감을 자랑하는 그것은 당장에라도 퉁 하고 튕겨져 나와 그녀의 입을 헤집을 것만 같았다.
“어서.”
재촉하는 사내의 눈초리에 바짝 올려진 레이첼의 턱을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타인에 의한, 복종과 굴종만이 강요되는 상황에 레이첼의 눈이 공포로 흠뻑 젖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혹시나 하는 기대에 눈물 가득한 눈이 마지막으로 카샨의 자비를 바라듯 일렁였다. 하지만 카샨은 레이첼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더니 재촉하듯 레이첼을 끌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과 넘치는 눈물은 지금의 그에게 자극일 뿐 다른 것은 될 수 없었다.
결국 체념한 듯 레이첼이 눈을 내리깔았다. 카샨은 처연한 표정을 한 채 순해진 레이첼을 만족스러운 듯 내려다보다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마음 같아선 하의를 끄르는 시중까지 저 희고 작은 손에 맡기고 싶었지만 양순한 얼굴이 꽤 마음에 찼으므로 그는 이 정도 수고야 제 손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샨이 막 손을 움직이려던 차에 레이첼의 입술이 비틀리듯 씰룩이더니 곧 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아아앙!”
통곡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저렇게 갑자기 울 수 있는가? 카샨은 길바닥에 넘어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 재끼는 레이첼의 울음소리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문가를 봤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사제들에게 눈치를 줬으니 웬만해서 사람들이 몰려올 일은 없을 터였지만 혹시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지고한 황태자라지만 신전에서 여인과 교접하는 행위는 큰 죄였다. 게다가 그 교접의 행태가 강제적인 것이라면 들키는 순간 그가 곤란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입 다물어.”
불안해진 카샨은 레이첼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레이첼은 그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진 틈에 고개를 세게 저어 그에게서 벗어나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카샨은 보고 말았다.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레이첼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이지만 슬쩍 올라가는 것을.
‘이게.’
으득―
순간이지만 당했다는 기분이 들기는 충분했다. 분이 터진 카샨은 굴욕을 느끼고 이를 갈았다. 감히 제까짓 것이 나를 놀려 먹어? 울음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이 갈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레이첼은 그 선명한 소리에 시선을 위로 힐끗 올렸다 이글거리며 분을 내는 황금색 눈을 보고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할까 고민하다 차라리 다른 이들이 있는 밖이 안전하겠다 판단하고 몸을 일으켰다.
“전하,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레이첼의 목소리는 언제 울었냐는 듯 평시로 돌아와 있었다. 사실 슬프게도 그녀는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외모가 빛이 날수록, 그리고 그에 따른 소문이 퍼져 나갈수록 그녀는 아슬아슬한 일을 많이 경험했다.
그녀보다 신분이 높은, 소위 잘났다 추켜올려지는 사내 중 몇몇은 연회를 즐기며 화려하게 치장하는 그녀에게 은밀한 요구를 해 왔다.
‘이런 차림새에 이리 늦게까지 연회에 참석하는 걸 보면 이런 걸 바란 것이 아닌가, 애블랑 영애.’
‘사내들을 침대로 끌어들인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 나는 어떤가? 영애의 하룻밤 상대로는 충분할 텐데.’
‘보석을 좋아한다지? 내가 자주 거래하는 상단이 있네.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깐…….’
그들이 노골적으로 구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신함과 거리가 있는, 아름답지만 만만한 여인이니깐. 사내들은 레이첼이 귀족 영애답지 못하다 욕하면서도 그녀의 하룻밤을 가져 보려 별 같잖은 소리를 짖어 댔다.
그래서 레이첼은 사내들을 더 가려 사귀었다. 그녀와 하룻밤이라도 보낸 이들은 죄다 젊었고 약혼녀나 아내가 없었으며 부자였고 신분이 잘났다.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그녀가 얼굴 하나만 믿고 까다롭게 사내들을 가린다 뒤에서 온갖 욕을 다 퍼붓긴 했으나 레이첼의 그런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다. 저 정도 잘난 이가 아니면 레이첼 애블랑을 침대에서 볼 수 없다며 다수의 이들이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으니 말이다.
‘고작 자작 영애 주제에 나를 거절해?’
물론 몇몇은 그녀의 신분을 빌미로 강제로 그녀를 취하려 시도했다. 몇 번의 위기를 겪은 후 레이첼은 처신이 올바르지 못하다 욕을 먹을지언정 또다시 위기에 처할 때면 항상 크게 울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주변 이목을 끌었다. 귀족이란 이들은 대부분 앞에서는 주위를 의식하고 평판에 신경 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깐.
지금의 상황에서도 레이첼의 판단은 옳았다. 황태자인 카샨 또한 심히 당황하지 않았는가? 레이첼은 저 새끼도 무서운 게 있긴 하구나 속으로 박수를 치며 발을 박찼다. 누구보다 잘났다 고개 치켜들어 봤자 신전에서 이런 짓 할 담은 없는 거잖아?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러나 레이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카샨의 상황 판단이 제법 빠르다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이 나라 차기 황제였고 덕분에 빠르고 정확한 판단에 관한 한 다른 이들보다 많이 교육받았다. 더불어 황제의 자질 중 하나는 뛰어난 무력. 레이첼이 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이제 한 발을 뗄 때 제법 혹독한 훈련을 받은 카샨의 손은 이미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어딜!”
“아악……읍!”
카샨은 맹수가 새를 사냥하듯 레이첼의 머리채를 다시 낚아챘다. 그러고는 그녀를 제 품으로 쭉 끌어당기더니 큰 손으로 비명 지르는 입을 틀어막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의,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으으읍! 읍!”
“하…… 잠시도 틈을 보일 수가 없어. 뭐 나름의 재미가 있다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냥감을 사냥한 듯 저릿한 감각에 카샨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그는 버둥대는 레이첼의 몸을 돌려 억지로 뒷걸음하게 하더니 벽으로 세게 밀쳤다. 여전히 그녀의 입을 막은 채.
“이제 알겠군. 내가 너 따위 계집에게 왜 이러는지.”
차가운 벽 온도에 레이첼은 쭈뼛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뒤는 벽이요 앞은 그보다 더 단단한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샨의 몸이 조금 전 꿇어앉아 올려다볼 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레이첼은 어떻게든 카샨을 밀어 내 다시 도망칠 틈을 노리려 했으나 사내는 두 번 당할 이가 아니었다.
“사실 저번도 그렇고, 내 손으로 한번 버린 계집이 왜 계속 거슬리는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앙칼지다 못해 무례한 게 제법 취향이었나 봐. 이 고운 얼굴이나 동하게 하는 몸이야 지금이나 2년 전이나 같지만…… 사실 그때는 심심한 구석이 있었지.”
재촉하면서도 그녀가 스스로 움직이게끔 기다릴 때와는 달랐다. 카샨은 레이첼의 온몸을 단단히 제 품에 가둔 채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 모양을 바꿔 양 뺨을 세게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곧 유린하듯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흐으……읍! 읍! 읍!”
레이첼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바동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일수록 가해지는 무게감이 더할 뿐이요, 입맞춤은 집요해졌다. 숨 쉴 틈도 없이 입안을 헤집는 혀 때문에 레이첼은 종국에는 결국 반항마저 멈춘 채 살기 위해 헐떡여야 했다.
“그러니 계속 자극해 보도록 해, 리첼.”
“살……읍!”
한참 만에 입을 뗀 카샨은 픽 웃으며 말했다. 레이첼은 이때다 싶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마저 예상한 것인지 카샨은 다시 레이첼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니 보답해야지.”
카샨의 입술은 축축해진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타액이 묻은 제 입술을 핥으며 레이첼을 더욱 세게 벽에 찍어 눌렀다. 큰 손이 레이첼의 드레스 속을 아무렇게나 파고들더니 곧이어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고 무릎 뒤를 만졌다. 달랑 올라간 한쪽 다리에 레이첼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카샨의 어깨를 짚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소리 내 키득거렸다.
“감아. 감는 게 편할 텐데?”
“으읍!”
막힌 입은 여전했기에 레이첼은 무어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이제는 무섭기보다 화가 더 치밀었다. 분이 난 레이첼은 매서운 눈초리로 카샨을 노려봤으나 그는 코웃음 치며 레이첼의 속옷을 대강 찢을 뿐이었다.
“하아…….”
깊은 날숨과 함께 카샨이 제 성기를 꺼내 들더니 레이첼에게 더욱 몸을 붙였다. 앞뒤로 문질러지는 감각에 레이첼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그녀의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깨무는 카샨의 얼굴에는 고양감이 가득했다. 그는 뭐가 그리 급한지 조금의 틈도 없이 레이첼의 귀를 깨물고 빨아 댔다.
질척이는 숨과 열기. 그리고 그보다 더 뜨거운 사내의 물건. 레이첼은 언젠가 카샨에게 꼭 이 일을 갚아 주리라 다짐하며 눈을 꼭 감았다.
‘괜찮아. 처음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즐기면…….’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더러운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제 몸 하나 멋대로 할 수 없다는 공포감과 비참함. 그리고 결국 찍어 눌린 듯 사내에게 복종하게 된 상황에 굴욕감을 느낀 레이첼의 눈에서 멋대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씨…… 괜찮을 리 없지.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왜 다들 발정이 나서는!!!’
최근 사내와 몸을 섞을 때마다 당했던 취급들이 떠오르며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정도가 가장 심하게 느껴지는 건 당장 눈앞에 있는 카샨이었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다른 이들도 별다를 게 없었다. 왜 사내들은 하룻밤 같이 밤을 지새우고 나면 자신이 꼭 그녀의 소유자인 양 굴까?
끅끅 막힌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귀를 발갛게 물들 정도로 지분대던 카샨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입이 막힌 채 울고 있는 레이첼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봐주면 주제도 모르고 다시 기어오르겠지.’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했지만 카샨은 애써 무표정을 고수했다. 달래고 어르며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계속 이리 서럽게 울며 싫다 웅얼거리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 그만두기에 그의 욕심은 너무도 커진 상태였다.
재회한 날 이후, 아니 떨어져 있을 때도 얼마나 이러고 싶었나. 얼마나 이 여자 몸이 떠올랐나. 어느 날은 밤새 레이첼에 대한 꿈을 꾸다 결국 아무 여자나 부를 겨를도 없이 스스로 제 것을 흔들었다.
그건 카샨에게 치욕이었다. 손짓만 해도 그에게 안길 여자가 얼마인데 내가 스스로……. 온전히 그의 마음이요, 레이첼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건만, 카샨은 레이첼의 탓이다 그리 여기고 있었다.
‘괘씸한 계집.’
눈앞에 없는 것도 아니며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신분의 여인도 아닌데 왜 자신이 욕구를 참아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이미 많이 인내했다. 그러니 이제는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울지 마.”
결국 카샨은 레이첼의 눈물을 닦아 줄 뿐 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성이 단단히 난 성기는 당장에라도 들여보내 달라 아우성치며 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레이첼의 뺨까지 흐른 눈물을 핥다 그녀의 은밀한 곳을 성기로 쿡쿡 찌르며 입구를 벌리기 시작했다.
‘씨발. 미친 새끼! 발정 난 개새끼!’
곧이어 닥칠 고통에 레이첼이 발발 떨며 입술을 꼭 물 때였다. 살짝 열린 눈 사이 붉은 무언가 스치더니 쉑 하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귓가를 스쳤다.
퍽―
“윽!”
그리고 찰나의 순간. 지고한 리온의 황태자는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 * *
카샨이 레이첼을 처음 본 건 어느 연회 때였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특별할 것 없는 연회. 그는 홀로 정원을 거닐다 그네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귀족 영애 하나를 봤다.
처음 카샨은 여인을 무시하려 했다. 여인네들이 저렇게 우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같잖은 사랑 놀이에 버림이라도 받았나 보지. 하지만 조금 가까이 여인을 보게 된 그는 곧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인의 차림새는 그의 기준에서 수수하다 못해 허름했다. 겨우 봐 줄 만한 재질의 드레스. 선물로도 안 받을 크기의 진주 귀걸이에 그와 세트인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 여인이 걸친 것들은 그에게는 싸구려에 가까운 것뿐이었지만 차림새가 문제가 아니었다. 울고 있는 그녀는 존재만으로 어느 사내건 확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앳된 얼굴은 우는 와중에도 생기가 넘쳤고 가는 몸은 꼭 그림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낭창했으나 굴곡이 뚜렷했다. 긴 백금발은 치렁치렁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와중에도 빛이 났으며 무엇보다 쉼 없이 눈물을 만들어 내는 연한 제비꽃색 눈은 사람을 끄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왜 울고 있지?”
“……누구?”
카샨은 무시하려던 계획을 잊은 채 홀린 듯 단번에 여인에게 다가갔다. 울며 그네에 앉아 있던 그녀는 갑자기 다가온 그를 경계했지만 외로웠던 모양인지 얼마간의 대화 후 쉬이 입을 열었다.
“그것참 상종 못 할 사내군.”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럼 괜찮은 사내인 것 같다 말해 줄까?”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카샨은 이 앳된 여인이 소문으로만 듣던 레이첼 애블랑임을 알게 됐다. 애블랑가야 듣도 보도 못했지만 레이첼이라는 이름은 오가며 주워들은 적이 꽤 있었다.
‘레이첼 애블랑이라……. 소문이 아깝지는 않아. 하지만 머리 빈 건 제 또래 여인들과 똑같군.’
그래서 레이첼이 우는 이유가 고작 또래 사내 때문임을 알았을 때 그는 약간의 실망과 동시에 기이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리 울지 마. 알잖아, 그자는 숙녀가 눈물을 보일 만큼 좋은 사내가 아니야. 연인의 친구와 약혼이라니. 최악이군.”
“하지만…… 하지만…….”
“그만 그쳐. 그는 영애가 이리 울고 있는 것도 모를 텐데. 억울하지도 않나?”
카샨은 레이첼을 위로해 주는 와중에도 어쩐지 망가뜨리고 싶었다. 연인인 사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순수한 듯싶어 가엽기도 했지만 우스웠고 또 못마땅했다.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공작 각하께서는 그의 은인이나 다름없고 나는 그냥…….”
“그게 아니지. 그럴 거면 영애가 헤어지자 했을 때 깔끔히 헤어지든가. 그는 욕심쟁이일 뿐이야. 아름다운 그대도 가지고 싶고 약혼으로 지위도 챙기고 싶고. 인정해. 영애의 연인이라는 그자는 나쁜 말로 하면, 그래 쓰레기라 할 수 있겠군.”
왜 그게 그리 떨떠름한지는 몰랐다. 다만 그는 레이첼이 마음에 들었고 어쩌면 쉬이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기꺼웠다.
‘나가기 전 유흥은 되겠지. 침대에서 제법 가르칠 기분이 나는 외관 아닌가. 벗겨 놓으면 더 동하게 할 몸이고. 우는 것도 제법…….’
다른 사내의 색에 좀 물이 든 듯싶었지만 보아하니 사내를 동하게 하는 몸은 아직 다른 이의 손을 타지 않은 듯싶어 구미가 당겼다. 카샨은 레이첼을 제 색으로 한번 물들여 보리라 다짐하며 그녀의 틈을 살살 파고들었다.
“그보다 복수할 생각은 없어? 숙녀를 이렇게 울게 하다니 내가 다 화가 나는군.”
“복수?”
그는 레이첼의 복수심과 슬픔을 살살 자극했다. 어차피 사교계 사내는 하나가 아니며 너를 저버린 그 사내보다 잘난 사내가 너를 사랑해 주면 그의 마음이 타들어 갈 거라 속살거렸다.
“그래. 영애의 마음을 아프게 했잖나. 똑같이 해 줘야지.”
“…….”
“어떤 이들은 복수가 허무하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똑같이 갚아 줘야지. 안 그러면 계속 영애를 만만하게 보고 정부가 돼 달라느니 그럴걸?”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요. 에단은…… 정말 잘났어요. 또래 중 누구보다 잘생겼고 또 가문도 좋고 그만 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사실 내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내 처지는 그에게 못 미치고 난 가진 것도 없으니깐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건 사실 당연할지 몰라요.”
“그래 봤자 황제 폐하 아래 신하가 아닌가? 정 마음에 차는 사내가 없으면 내가 도와주지.”
“그러고 보니 아직 누구신지도…….”
“하긴 영애는 나를 볼 기회가 없었겠지. 하지만 다들 대강 지레짐작은 하던데. 이 머리나 눈. 어디 가서 보기 힘들잖아.”
“죄송해요. 제가 아직 많은 분을 못 뵀다 보니…….”
“뭐 어쩔 수 없지. 듣고 놀라지나 마. 내 이름은 말이야…….”
카샨의 이름을 들은 레이첼은 놀라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예상한 카샨은 그녀의 손목을 끌어 다시 제 옆에 앉히더니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말이야, 이래 봬도 에단 마일런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외관이나 지위나 뭐로 보더라도.”
레이첼은 카샨의 제안에 한참을 고민하다 믿지 못하는 눈을 한 채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전, 전하. 왜…… 왜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일개 자작 영애고 전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대가 마음에 들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아려 지나칠 수 있어야지.”
카샨은 아무런 고민 없이 즉각 대답했다. 어찌 됐건 첫눈에 끌리는 건 반한 것이요 짧다 하더라도, 그게 어떤 형태라도 사랑 아니겠나? 그는 키우는 사냥개도 제 애마도 아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무언가 하나 더 귀애한다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나라면 그대에게 잘해 줄 거야. 울리지 않고.”
수려한 얼굴 안 햇살과 꼭 같은 색의 눈은 진중해 보였으나 레이첼은 판단력이 흐려진 와중에도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이였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 까마득히 높은 신분의 사내. 그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자는 위험하다고.
‘하지만 황태자 정도면 공작도 어찌 못 할 거야.’
불신하는 와중에도 마음은 계속 흔들렸다. 꽉 잡은 큰 손을 한번 믿어 보고 싶었다. 황태자 정도라면 캐틀렛가로부터 나나 가족을 지켜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강한 이에게 기대고 싶었다. 저를 보호해 주는 이를 간절히 원했다.
‘여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는 자네에게도 있네. 로잘린이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아나? 그 아이가 너무 울어 눈이 다 발갛게 변했어!’
‘잘못했습니다, 각하. 다 제 잘못입니다. 레이첼! 뭐 하는 게냐! 당장 각하께 무릎 꿇고 사죄드리지 않고!’
‘됐네. 그래도 어릴 적 같이 자랐으니 심하게 대하지 말라 로잘린이 이르더군. 그 아이는 마음이 약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정말 감사…….’
‘그만. 그래도 잘못을 했으니 벌은 받아야지. 귀족 영애인데 아랫것들에게 채찍질을 하라는 건 좀 지나친 거 같고……. 교육이다 생각하고 아비인 자네가 하는 게 좋겠군. 다섯 대…… 아니 여섯 대만 내리치게.’
‘각, 각하. 레이첼은 아직…… 철모르고 그런 것입니다. 각하께서 한 번만 선처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치게. 이것도 많이 봐줬다는 걸 알지 않은가. 아니면 하인을 시켜야겠나?’
‘각하!’
‘시끄럽네!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조금이라도 살살 하는 낌새가 보이면 처음부터 다시 처리하겠네. 그리고 너. 너는 자작이 매질하면 똑바로 숫자를 헤아려야 할 거다. 여섯까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다시 시작하겠다.’
공작의 앞에서 아버지 애블랑 자작에게 채찍질을 당한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등이 터졌는데 공작의 입장에선 당연하다며 끝까지 약혼하겠다는 연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연인의 약혼식. 복수심은 어린 그녀를 쉬이 집어삼키고 그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전하께는 저를 보호해 주실 수 있나요?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건가요?”
“물론. 약조해.”
카샨은 레이첼에게 달콤히 약조하며 의심 많은 그녀에게서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애초 자작 영애와의 약속이 황태자인 그에게 무에 그리 중요할까?
‘출발까지 얼마나 남았지?’
약조하던 순간 그는 레이첼을 쥐고 흔들며 즐길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남았나 헤아리고 있었다.
* * *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황후 폐하.”
캐틀렛 공작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오랜만에 온 앤 황후의 접견실을 훑었다. 넓은 접견실 안은 그 주인만큼이나 우아했다. 녹색 바탕 벽지는 선명했고 그 위 백합 문양은 하나하나 세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낮은 채도와 함께 어두운 실내는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리 앉으세요.”
“예.”
공작이 앉자 그녀는 놓고 있던 자수를 시녀에게 건네며 가볍게 손짓했다. 오래 함께한 측근 시녀가 황후의 의중을 알아듣고 조용히 허리를 숙이더니 주변 시중인들을 물리고 그 자신도 물러났다.
“요즘도 자수를 자주 놓으십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눈에 좋지 않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가끔 하는 취미인걸요.”
“그래도 좀 더 줄이십시오. 원래도 눈이 좋지 않으셨는데 계속 자수를 하시면…….”
공작이 손으로 눈을 문지르는 누이를 보며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하자 앤 황후는 핏줄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였지만 일상처럼 눌러앉은 침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공작은 방 분위기와 비슷한 그 미소가 못마땅한 듯 저와 똑 닮은 푸른 눈을 바라보다 툭 던지듯 물었다.
“폐하께서 여전히 힘들게 하십니까?”
핏줄의 물음에 앤 황후의 입가에 머무르던 미소가 잠시 사라졌으나 금세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저를 뚫어져라 보는 공작을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폐하께서는 여전하시죠. 힘들게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럼 델 후작 부인이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겁니까?”
“그녀를 본 지가 두 달은 넘었는걸요.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날 괴롭히겠어요.”
공작은 가슴을 탕탕 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눈앞 누이는 황제와 모나타가의 정부 때문에 벌써 10여 년 속을 썩고 있었다. 신분과 가문을 내세워 드잡이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고귀한 신분의 누이는 책에 나오는 성녀처럼 매번 무르게 그들을 대할 뿐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리 지내실 줄 알았다면 절대 황궁으로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에요. 오라버니께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선택은 황후 폐하 혼자만 하셨답니까. 먼저 의사를 물어 온 건 황제 폐하셨습니다. 그런데 황후 폐하를 박대하시니…….”
“그만. 오라버니, 그 정도만 하세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절 박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절 황후로 대우하고 계세요. 그러니 어디 가서 그런 말 마세요.”
단호해진 누이의 눈에 공작은 입을 꾹 내리 물었다. 하지만 불만 가득한 얼굴은 여전했기에 앤 황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한창 바쁘실 시기일 텐데.”
공작은 한 번 더 무어라 하려 했으나 오늘 꺼낼 말이 황후에게 좋지 않음을 기억해 내곤 한발 물러섰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아…… 리이트 후작 때문이로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공작의 놀란 표정에 앤 황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해 칩거한다는 소문이 있는 황후였지만 그녀도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었다. 조용히 있다 한들 그녀는 캐틀렛 공작가 출신. 그녀는 스스로가 가문이나 핏줄에게 폐를 끼치는 걸 용납 못 하는 여인이었다.
“후작의 하나뿐인 아들이 황태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들었어요. 그것도 신전에서.”
“맞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중립이었던 리이트 후작이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모나타 공작에게 머리를 조아렸다지요?”
“……원래라면 목이 떨어질 죄이니 말입니다. 모나타가에 도움을 주는 대신 모나타 공이 직접 황태자 전하께 부탁한 모양입니다.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요.”
“부탁이 있었다고는 하나 황태자의 성정에 무르게 굴었군요. 하긴 공작은 사사롭게는 황태자의 핏줄인 데다…….”
황후는 말을 하며 화려한 외모의 의붓아들을 떠올려 봤다. 황제와 꼭 같은 머리와 눈 색을 가진 의붓아들은 그녀가 기억하건대 젊은 시절 황제와 제법 닮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여자도 꼭 닮았지.’
죽은 황후와도 닮았고.
「아샬린. 미안하오. 그대 대신 다른 여자를 내 옆에 들였어. 하지만 걱정 마오. 그녀는 황후로 살되 죽을 때까지 나와 부부로는 살 수 없을 거요. 내 사랑은 영원히 그대뿐. 이 심장에 들어올 이는 아샬린, 그대뿐이오.」
앤 황후는 언젠가 본 황제의 편지를 떠올렸다. 죽은 전 황후에게 쓴 편지에는 온갖 감정이 구구절절 다 들어가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한 줌도 내보이지 않은 것들이었다.
“약점을 틀어쥐고 리이트가의 힘을 얻을 수도 있으니 청을 들어줬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회의 안건에서 후작이 모나타 공작의 편을 들었다 들었어요.”
“예. 덕분에 눈치 보던 귀족 몇이 아예 저리로 넘어갔습니다.”
공작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당장 줄다리기하는 안건 몇 개쯤이야 넘겨줘도 괜찮았다. 그가 살아 있고 누이인 앤이 황후 자리에 있었으니. 하지만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새 황제는 당연히 제 어미의 누이이자 가장 든든한 뒷배인 모나타 공작의 손을 들어 줄 터였다.
“리이트 후작…… 그래도 후작의 마음이 쓰렸겠군. 후작의 아들이 성소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온 성기사라던데 이번 일로 아예 제명되었다지요? 나중에 복귀시켜 준다 살살 달래 보는 건 어떻겠어요? 아직은 우리 가문이 모나타보단 신전에 더 입김이 세니 잘 구슬리면 이쪽으로는 넘어오지 않더라도 예전처럼 중립을 유지할지 몰라요.”
“저도 그래 볼까 했습니다. 하지만 리이트 후작이 신전을 싫어하는지라…… 그러잖아도 벼르고 있던 후작이 먼저 부탁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번 일로 아예 아들을 신전에서 제명시켜 달라고.”
“후작이 신전을 싫어한다? 난 그 반대로 알고 있는데……. 그는 신실한 성도 아니던가요? 왜 그는 애초…….”
“예전에는 분명 그랬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그가 신전을 적대하며 후원금도 끊고 발길도 끊었다 합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하지만 우리가 곤란해진 건 틀림없군요. 후작은 제법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니깐…… 그가 계속 모나타에 붙는다면 캐틀렛의 입지가 좁아질 거예요.”
“그래서 말입니다, 황후 폐하. 이런 말씀은 송구합니다만…….”
“눈치 보지 말고 말씀하세요.”
“로잘린의 일도 있고 모나타와 조금은 화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 전하께도 먼저 끈을 놔야 할 것 같고요.”
먼저 끈을 댄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캐틀렛 공작은 황후에게 죽은 전 황후와 델 후작 부인의 핏줄에게 숙이고 들어가겠다 말한 것이다. 말을 들은 앤 황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계속해 보라는 듯 공작에게 눈짓했다.
“물론 곤란해지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가문의 수장으로 전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전하를 제외한 다른 황자도 없는 데다 이대로 황태자 전하와 계속 척을 지게 되면 미래에 캐틀렛가는 위태로워질 겁니다.”
앤 황후는 쩔쩔매는 오라비를 지그시 바라봤다. 분명 캐틀렛이 황태자에게 숙이고 들어가면 모나타를 비롯해 그 가문 출신인 델 후작 부인은 더 고개를 빳빳이 들 터였다. 자신의 영향력은 지금보다 더 줄 테고. 하지만 오라비라고 그러고 싶겠나. 모나타라면 자신보다 더 치를 떠는 이인데. 분명 더 속이 쓰릴 테지.
앤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이 일은 어찌 보면 자신에게도 죄가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은 자식 하나 낳지 못한 황후였고 정부보다 황제의 애정을 받지 못해 가문에 힘도 실어 주지 못했다. 그러니 그 정도 수모쯤이야 감내해야지.
“전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뿌리는 캐틀렛가 사람인걸요. 나 한 사람의 감정 때문에 가문의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지요. 뜻한 대로 진행하세요.”
“하지만 제가 그리 움직이면 델 후작 부인이 더 기세등등해질 겁니다. 지금도 정부 주제에 날뛰는데…….”
“그래 봤자 그녀는 정부예요. 폐하의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태자가 그녀와 핏줄이라고는 하나 법적으로는 내가 황태자와 더 가까운 가족입니다. 그녀는 제 위신에 상처를 입히지 못해요. 그러니 마음 놓고 앞으로 어찌할지나 말씀해 보세요.”
황후의 말에 공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생각해 둔 바를 밝혔다.
“황태자 전하께 우리 쪽 사람 하나를 붙일 참입니다. 정부로요.”
“정부? 황태자가 과연 받아들일까요? 황태자는 생각보다 영특한 이입니다. 정치적 목적이 있는 여자를 곁에 둘 리 없어요.”
공작의 말을 들은 앤 황후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정부라니. 황태자에게 통할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캐틀렛 공작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은밀히 알아본 일입니다만 전하께서 제 휘하 가문인 애블랑가의 여식 중 레이첼이란 아이에게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레이첼? 레이첼 애블랑? 그 아이라면 오라버니께서 일전에 말한 로잘린의 앞날을 방해하는 아이가 아니에요? 분명 마일런 후작에게 꼬리 치는 몹쓸 아이라고…….”
“맞습니다. 얼굴 하나는 타고난 계집이지요. 계속 괘씸한 짓을 하기에 아예 요절을 내 버릴까 했는데 알아보니 황태자 전하와 몇 년 전부터 인연이 있더군요. 게다가 전하께서 요즘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시는 걸 보면 꽤 깊은 감정을 품으신 모양입니다. 리이트 후작의 아들 일도 그 아이와 관련이 있다 하고……. 아마 함부로 놀아나는 더러운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전하와 아제프 리이트를 저울질하다 그 사달을 낸 게지요.”
“……확실한가요?”
“일이 있었던 날 사제에게 들은 말이니 거의 확실합니다. 레이첼 애블랑이 아제프 리이트와 만난 바로 다음 전하를 만났다 하더군요.”
앤은 얼핏 봤던 레이첼을 되짚어 봤다. 그러자 외관이 특출나게 눈에 띄었던 것만은 생생히 기억났다. 오죽했으면 여자라고는 별 관심 없는 황제마저 보석같이 영롱하다 감탄했을까?
‘확실히 사내라면 누구라도 빠질 만한 아가씨였지. 로잘린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지만 마일런 후작의 마음도 이해가 갈 정도였으니……. 하지만 행실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로잘린 일로 오라버니께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황태자의 정부라……. 이참에 그 아가씨를 마일런 후작 앞에서 확실히 치워 버릴 참이군요.”
“그 아이만 아니면 마일런 후작도 정신을 차릴 겁니다. 로지오 모나타와 도망친 일도 덮어 줄 거고요.”
“하지만 로잘린을 위해서라기에 어린 아가씨에게 좀 가혹하지 않나요? 정부라는 게 미혼의 영애에게는 맞지 않아요. 차라리 다른 이를 찾아보는 게 어때요?”
“애초 로잘린의 앞날을 망친 건 그 계집아이입니다. 가혹하기는 무슨! 몸도 함부로 굴리는 모양이니 딱 알맞은, 아니 오히려 과분한 자리지요. 상인 가문 출신 어미에 애블랑 자작 같은 아비라. 황태자의 정부가 가당키나 합니까. 하룻밤 놀잇감도 못 될 싸구려 계집인데.”
앤 황후는 공작의 거친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레이첼 애블랑이라는 영애는 제 오라비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것이 분명했다. 저런 천박한 언사는 잘 하지 않는데……. 그녀는 말을 가려 하라 지적할까 하다 씩씩거리며 분을 주체 못 하는 핏줄을 보고 관뒀다.
어차피 일개 자작 영애 아닌가. 공작인 오라비에게 그 정도 신분의 영애 하나를 가지고 쓴소리를 하는 건 옳지 못했다.
“알았어요. 그럼 그 아가씨의 의중은요? 물어봤나요?”
“물을 것도 없습니다. 자작이 흔쾌히 수락했으니까요.”
“본인에게는 묻지 않으시고요? 만약 싫다 하면 어쩌려고…….”
“여식이 아닙니까. 아비의 뜻을 따르겠지요. 그리고 싫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제 가문의 존망이 달려 있는데. 싫다 하는 즉시 자작부터 요절내는 걸 보여 주면 순순히 말을 들을 겁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핏줄의 계획은 썩 내키지 않았다. 본인이 수락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창창한 나이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강제로 정부로 들여보낸다? 분명 몹쓸 짓이었다. 앤은 불쾌한 마음에 한 번 더 핏줄의 계획에 넌지시 반대 의견을 내 봤다.
“……만약 황태자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요? 정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 확신할 수도 없어요. 이미 아시겠지만 황태자는 황제 폐하처럼 낭만주의자는 아니에요. 한 여자만 바라볼 이가 아니죠.”
“상관없습니다. 하룻밤 상대로 이용되고 버려지든 정부로 지내다 버려지든 그건 그 아이가 책임질 몫 아닙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가문에 도움이 된 후 버려진다면 혼인 상대를 물색해 줄 생각입니다. 원하는 눈높이만큼은 못 되겠지만 변방 자작가 후처 자리 정도는 갈 수 있겠지요.”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핏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쩌겠나. 레이첼 애블랑은 그녀의 핏줄도 아니요 저 아래 자작가 영애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앤은 가문의 이익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세요.”
“그런 아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께서 신경 쓸 아이가 못 됩니다. 그보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델 후작 부인이 이 일로 황후 폐하께 무례하게 굴면…….”
앤 황후는 슬슬 핏줄의 말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진행할 일 아닌가. 그리고 오라비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는 델 후작 부인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단지 가여워할 뿐. 그녀는 턱을 조금 치켜들고 또렷한 눈을 한 채 저를 염려하는 핏줄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녀는 저보다 더 가여운 존재예요. 공녀의 지위도 명예도 버리고 정부가 되었는데 기껏 하게 된 일이 죽은 자매의 대체품 노릇이라니……. 나라면 진즉 혀를 물고 죽었지. 난 그녀처럼 못 해요.”
“…….”
“폐하께서는 나를 보지 않으시나 후작 부인 또한 그분 안중에는 없어요. 그분이 보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이죠.”
“…….”
“아샬린.”
앤 황후의 입에서 죽은 전 황후의 이름이 씁쓸한 웃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는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선명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폐하의 곁에 있는 건 영원히 그 여자뿐. 그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어요.”
* * *
“바이허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빌.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다만 주인님께서…….”
“아직도 그러고 있나?”
아이작은 빌의 염려 가득한 표정에 알 만하단 얼굴을 했다. 그에게 급히 와 달라 부탁할 때부터 알아봤다. 친우가 어떤 꼴일지.
“아무 일도 안 하시고 아무 데도 안 가시고 술만 들이켜고 계십니다. 끼니도 챙기지 않으시니 이러다 정말 큰일 나면…….”
“알았네. 알 만하군. 2층에 있겠지? 서재인가, 침실인가?”
“지금은 침실에 계십니다.”
아이작은 혀를 차면서도 빌에게 들고 온 지팡이를 넘기고 발길을 옮겼다. 계단 하나하나 올라가는 발걸음마다 짜증이 서리긴 했으나 그보다는 염려가 더 엿보였기에 빌은 내심 두 사람의 우정이 여전하구나 안심했다.
“나 원. 내가 사내놈의 침실에 먼저 들어가다니…….”
한걸음에 2층으로 올라간 아이작은 에단의 침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인 친우의 꼴에 그는 있는 대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주 제대로 취했군. 에단, 이게 무슨 꼴인가?”
“……꺼져.”
에단은 엉망이었다. 풀어 헤친 셔츠와 푹 젖은 머리. 잔뜩 취해 핏줄이 불거진 눈동자와 험한 말까지. 그는 모르는 이가 보면 위험함을 느끼고 대번에 도망갈 모양새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술병을 구두로 툭툭 차며 에단에게 거침없이 다가섰다.
“윽! 술로 목욕이라도 했나?”
가까이서 본 에단에게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젖은 머리는 물이 아니라 술을 끼얹은 듯 지독했다. 아이작은 코 가까이 손부채를 부치다 적대감 가득한 검은 눈을 발견하곤 히죽 웃어 보였다.
“……자네가 이러는 건 레이첼 때문이겠지? 그녀에게 차였나?”
“꺼져.”
“난 자네가 도통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애초에 내 연인이야. 연인이 있는 여인이 다른 사내를 받아들일 리 있나? 당연한 일을 가지고 이리 폐인처럼 구니 원…….”
“닥쳐!”
쨍그랑―
에단의 손에 있던 술병이 아이작을 향해 날아갔다. 아이작은 과장된 몸짓으로 쉬이 병을 피하더니 계속해서 에단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다.
“에단. 나한테 화내도 소용없어. 자네가 그녀 마음을 못 얻은 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러게 내가 몇 번 말하지 않았나. 여인은 자고로 나처럼 다정하고 신사답게 해 줘야 한다니깐. 이참에 자네도 그 더러운 성격 한번 고쳐 보는 게 어떻…….”
“……잤나?”
에단은 아이작의 말을 자르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다. 혼자 신나게 떠들던 아이작은 에단의 질문이 뭘 뜻하나 잠깐 생각하다 곧 알아차리곤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분에 아주 뜨거운 밤을 보냈네.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가 늦었군. 그날 자네가 레이첼의 위치를 알려 준 덕에 그녀와 화해했네.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 역이라……. 제법 효과가 좋았지. 고맙네.”
“나쁜 계집!!!”
와장창―
아이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단이 이번에는 굴러다니던 술잔을 내던졌다. 크리스털로 정교히 만들어진 술잔이 벽에 부딪히더니 별처럼 빛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깊이 잠긴 듯 음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작은 어린아이처럼 질질 짜기 시작한 친우를 어이없이 바라봤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다지만 다 큰 사내가, 그것도 남 앞에서 여자 때문에 우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이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단. 속상한 건 알겠지만 사내가 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다섯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자네의 이런 모습은 보고 있기 힘들군.”
“꺼져! 꺼지란 말이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레이첼 말고도 세상에 여인은 많네. 물론 나한테는 레이첼뿐이지만 자네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지.”
에단은 당최 왜 왔는지 알 수 없는 아이작을 노려봤다. 저와 다르게 멀끔히 차려입은 아이작에게서는 여유가 넘쳤다.
레이첼과 잘 풀렸다는 증거겠지. 에단은 활기 넘치는 아이작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울며불며 싫다 해도 억지로 말에 태울걸. 왜 저 망할 자식에게 기회를 줬단 말인가. 끝없는 후회가 밀려오며 그는 눈앞 아이작보다 그날의 자신을 더 원망했다.
‘저 은발이 취향이라 했던가. 분명 그 손으로 저 새끼 머리를 더듬고 그 입술을 저 찢어 버릴 새끼 입에…….’
화를 참지 못한 에단은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아이작에게던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제게 날아오는 물건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하더니 한발 물러서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알려 줘야 할 말이 있는 데 이리 굴면 내가 말을 할 수가…….”
“나가!!!”
콰직―
“……없질 않나.”
“필요 없어! 꺼져!”
쨍그랑―
“레이첼의 안위에 관한 일이네. 정말 갈까?”
“…….”
레이첼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에단의 행동이 뚝 그쳤다. 아이작은 그새 선명해진 검은 눈에 질린다는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작 이리하지. 고요와 평화. 자고로 신사라면 이 두 단어를 아낄 줄 아는 법이지.”
“닥치고 빨리 말해! 레이첼의 안위? 무슨 일이야?”
“인내도 추가하는 게 좋겠군.”
“아이작. 죽고 싶나? 당장 말해!”
아이작은 부탁하면 들어준다 약을 올리려다 에단의 표정에 그만뒀다. 장난스럽게 굴긴 했으나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사실 급한 일이 아니면 오늘 에단을 보러 오지도 않았으리라. 술 취한 사내 뭐 볼 게 있다고 오겠는가.
“레이첼이…….”
몇 초간의 침묵을 가진 아이작은 그간의 장난스러움을 지워 버리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험해졌네. 까닥하다 우리 둘 손을 모두 떠날 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