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적반하장
레이첼은 눈에 띄게 예뻤다. 어릴 때부터.
어린 레이첼이 애블랑가의 자랑거리인 백금발을 찰랑거리며 잔디를 뛸 때면 또래는 물론이요 어른들도 그녀를 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마주할 때면 모두들 감탄을 뱉었다.
“정말 예쁜 아이예요. 장래가 기대되겠어요!”
“어쩜 이런 아이가 있을까. 천사가 따로 없네요. 부러워요, 부인.”
애블랑가는 원래부터 구성원 모두 외관이 뛰어나다 소문이 자자했다. 자작은 멋들어진 백금발에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고 이비의 얼굴은 그녀의 출신을 감출 만했다. 둘 사이 난 아이들은 어떤가? 다들 또래 중에는 견줄 아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도 레이첼은 유독 튈 정도였으니.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빼어난 외모로 유명했다.
“……오늘은 또 어디로 데려가시려고요?”
“아아 뒤프랑 백작 부인이 간곡히 부탁하는데 내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애블랑 자작은 이유가 어찌 됐건 레이첼로 인해 주목받는 것이 그저 좋은 모양이었지만 이비는 달랐다. 그녀는 레이첼이 여기저기서 관심받는 것을 퍽 달가워하지 않았다.
“저번처럼 술자리에 데려간다거나 하면 알죠?”
“걱정 마. 오늘은 레이첼에게도 좋은 자리야. 백작 부인이 초상화를 그리는데 레이첼을 배경에 있는 아기 천사 모델로 하고 싶다잖아.”
그녀와 애블랑가 자녀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 안에서 지위가 낮은 편이었다. 이비는 자작이 레이첼을 구경거리처럼 내보일 때면 남몰래 한숨 쉬었다. 그녀는 저를 은근하게 무시하며 깔보는 무리들이 레이첼을 구경하며 무어라 떠드는지 알았다. 이곳에서 어미의 신분은 곧 자식의 신분이었다.
“나보고 어머니를 닮았대. 얼굴을 타고났으니 몸가짐만 바르게 하면 어머니처럼 훨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 했어. 그런데 몸가짐이 뭐야?”
자식의 상처를 어떤 어미가 반길까. 이비는 레이첼의 유명세가 높아질수록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걱정한다 해서 불행이 피해 가지는 않는 법. 레이첼이 여덟 살이 되던 해 이비의 걱정대로 일은 터졌다.
캐틀렛 공작이 레이첼을 보러 자작가를 찾은 것이다.
“각하! 누추한 곳입니다만 어서 오십시오. 영광입니다!”
“……아이는?”
캐틀렛 공작은 죽은 아내와 이름이 같은 레이첼의 유명세를 듣고 관심을 보였다. 그는 레이첼이 이제 막 어미를 잃은 외동딸 로잘린의 친구가 되어 주길 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가여운 내 딸은 얼마 전에 어미를 잃었지. 슬픔에 잠긴 그 아이에겐 친구가 필요해. 그 아이의 관심을 끌 만한 친구가 말이야.”
“그 일은 유감입니다.”
“이름이 레이첼이라 했던가. 그 사람과 이름도 같고…… 딱 내가 찾던 아이야. 내 아내가 죽기 전 딸아이에게 남긴 인형과도 닮았군. 성격도 유순해 뵈고…… 신분이 낮은 게 흠이긴 하다만 아이에게 엄격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어떤가? 자네 딸을 공작저로 보내겠나?”
자작은 기뻐 날뛰었지만 이비는 반대했다. 공작은 제 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딸과 또래인 레이첼을 향한 태도는 좋은 물건을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곱고 순해 딸자식 옆자리에 딱이라니. 내 딸이 인형인가. 이비는 레이첼을 그런 자리로 들여보내기가 꺼려졌다.
“멍청한 소리 마시오! 그 캐틀렛 공녀의 소꿉동무라니! 원래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인연이란 말이오.”
“난 못 보내요! 이제 여덟이에요. 집에서 나가서 애가 무슨 일을 겪겠어요?”
“무슨 일을 겪기는! 운이 좋으면 공녀님의 시녀가 될지도 몰라. 공작님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오! 캐틀렛의 권세가 장차 누구에게 가겠소? 모나타에서는 이미 여공작이 나왔소. 잘하면 캐틀렛가도…….”
“그래도 안 돼요! 거기 가서 레이첼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 알고요!”
이비가 끝까지 반대했지만 자작은 완고했다. 캐틀렛 공작에게 연을 대고 싶어 하던 그는 대번에 공작의 말을 수락했다. 그리고 반대하는 이비를 신분을 거들먹거리며 구슬렸다.
“이건 기회요, 이비. 당신도 걱정하지 않았소? 아이들의…… 레이첼의 미래를. 캐틀렛 공작가로 가기만 해 보시오. 이 아이에게 당신네 가족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아무도 개의치 않을 거요. 레이첼은 좋은 신랑감을 찾을 테고 부유하게 살겠지. 게다가 각하께서 약조하셨소. 레이첼과 공녀를 같은 스승 밑에 두겠다고! 우리가 가난하지는 않지만 공작가에 비하겠소? 애초에 스승으로 오는 자들의 신분이 다른데! 거기서 받는 교육은 분명 뛰어날 거요.”
질 좋은 교육과 캐틀렛가의 권세가 주는 이점에 이비는 결국 설득당했다. 당시 그녀는 제 신분에 제법 주눅이 들어 있을 때였으므로 자작의 말이 어느 정도 옳다 생각했다.
부모의 판단 아래 레이첼은 캐틀렛 공작가로 가게 됐다. 가기 싫다 서럽게 우는 레이첼을 본 이비는 마음을 바꿔 다시 생각해 보자 자작을 설득했지만 그는 냉정했다.
“도착해서는 뚝 그쳐야 한다.”
그는 우는 레이첼을 캐틀렛가 마차에 집어넣고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다만 그도 아비긴 했던지라 레이첼이 마차 창에 손을 올린 채 눈물을 글썽일 때는 얼굴을 굳힌 채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게 다였지만.
“어머니! 가기 싫어요! 집에 있을래요!”
레이첼은 집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며 창을 두드렸다. 하지만 어린 그녀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 *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캐틀렛 공작가에서 레이첼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대다수가 저를 귀여워해 주던 애블랑가와 다르게 공작가의 대다수 사용인들은 주인 아가씨의 부속품 격으로 온 아이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아가씨께 폐가 돼선 안 된다.”
“불편함 없게 곁에서 잘 보필해 드려야 해.”
그들의 아가씨 로잘린은 동갑도 아니요 레이첼보다 한 살 많은 아이였다. 레이첼은 언니 격이라 할 수 있는 아이를 잘 보필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보필이 뭔지도 잘 모를 나이였다.
“아비는 물론이요 어미의 출신도 천하거늘, 각하께서는 왜 이런 아이를 아가씨 곁에…….”
특히 로잘린의 유모는 레이첼을 대놓고 마땅찮아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원래 제 딸을 로잘린의 소꿉동무로 밀어 넣으려다 레이첼 때문에 실패해 크게 낙담하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오렴. 방을 안내해 주마.”
하지만 이미 윗선에서 결정한 것을 어쩌랴. 로잘린의 유모가 레이첼을 싫어한다 해서 레이첼이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작은 약조한 것은 철저히 지켰다. 레이첼은 자작가에 있었더라면 꿈도 못 꿀 교육을 받았으며 물질적으로 한층 좋은 삶을 영위하게 됐다.
매끼 풍족하다 못해 넘치는 식사, 고운 드레스, 부드러운 침구. 레이첼에게 주어지는 건 죄다 최고급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 애블랑가와 다르게 압박을 느끼며 생활하게 된 레이첼은 감정적으로는 한층 움츠러들었다. 비록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때부터 제가 무조건 사랑받는 아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네가 레이첼이구나. 안녕! 난 로잘린 캐틀렛이야. 반가워.”
“안, 안녕?”
“아가씨께 그 무슨 무례냐. 똑바로 다시 인사하렴.”
“유모는 나가 있어. 내 친구잖아. 상관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가씨, 이런 일은 제가…….”
“나가라고! 다시 말하기 싫어! 나가!”
습관적으로 눈치 보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 와중 그나마 다행인 점은 캐틀렛의 하나뿐인 공녀 로잘린이 레이첼에게 친절한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같은 이름의, 저보다 한 살 어린 레이첼에게 제법 호감을 보였다.
“다시 인사할까? 난 로잘린. 로잘린 캐틀렛이야.”
“……난 레이첼 애블랑이야. 만나서 반가워.”
“그래, 레이첼. 다시 한번 반가워. 아버지께 듣던 대로 내 인형과 똑 닮았네. 마음에 들어.”
레이첼은 곧 로잘린과 친해졌다. 로잘린은 예민하긴 했으나 그 덕에 사용인들은 그녀의 말이라면 꼼짝도 못 했다. 호감을 보이는 또래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일보다는 수월했으므로 레이첼은 로잘린과 친해진 후로 좀 더 편히 생활할 수 있었다.
“애블랑 영애. 아가씨께서 찾으세요. 빨리요!”
“응, 알았어요. 잠시만요…….”
“뛰면 안 돼요! 또 혼나고 싶으세요!”
“로잘린이 빨리 오라 했다면서요! 계속 그러면 로잘린한테 다 이를 거예요!”
모시던 주인 아가씨와 레이첼이 친해지자 사용인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로잘린의 유모를 비롯한 몇몇은 여전했기에 레이첼의 눈칫밥 생활은 이어졌지만 아이는 아이. 어느새 적응한 레이첼은 혼이 나는 와중에도 공작가 복도 정도는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 * *
“빨간 머리는 별로야. 이 인형이나 레이첼 너처럼 환한 금발이면 좋을 텐데. 어머니도 금발이셨거든.”
“캐틀렛가 붉은 머리는 용기의 상징인걸. 어제 역사 시간에 배웠잖아.”
“그건 다 내 가문에 아부하는 거고. 하긴 그래도 내 머리카락이 쟤보단 낫지.”
“쟤? 우리 말고 누가 있어?”
“저기 안 보여? 오늘은 웬일로 나와 있네. 한 번도 못 본 모양인데 얼마 전에 아버지가 데리고 왔어.”
“공작님이?”
레이첼이 공작가에 머무른 지 1년이 안 됐을 때였다. 어느덧 새 환경에 적응한 레이첼은 로잘린과 정원에서 공놀이하던 중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내아이 하나를 봤다.
“머리도 눈도 온통 까매선. 아버지는 저런 까마귀 같은 걸 당최 왜 주워 오셨는지. 칙칙한 색이라 별로야.”
사내아이에 대한 로잘린의 평은 박했다. 분명 그녀들보다 나이도 많아 보였지만 로잘린은 사내아이를 낮잡아 보다 못해 싫어하는 듯했다.
‘잘생겼는데…….’
레이첼은 한눈에 아이에게 시선이 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디 위 하얀 꽃을 보고 있는 아이는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음침했으나 동시에 어쩐지 외로워 보여 가여웠다.
“왜 여기로 온 거야? 아는 애야?”
“……에단 마일런. 어머니 먼 친척이라 전에도 몇 번 봤어. 이 이상은 말하기 싫으니깐 묻지 마.”
“에단 마일런…….”
“왜 여기 와서 저런 얼굴로……. 가자! 레이첼. 난 쟤 보기 싫어.”
“왜? 같이 놀자. 쟤도 심심해 보이는데!”
“싫다니깐!”
“알, 알았어. 그래, 가. 딴 데로 가자, 로잘린.”
“그 태도는 뭐야? 날 애 취급 하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됐어! 너한테 실망이야! 먼저 갈 테니까 쟤랑 놀든 알아서 해!”
“로잘린, 그게 아니라…….”
“따라오지 마! 꼴 보기 싫어!”
베이지색 드레스를 홱 젖히며 돌아선 로잘린을 보며 레이첼은 한숨을 쉬었다. 로잘린의 제멋대로인 성격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로잘린을 급히 따라붙으려다 어른거리는 검은 머리에 멈칫 섰다.
‘따라가 봤자 지금은 화만 낼 거고…… 꽃반지나 만들어 주면 풀리겠지.’
레이첼은 조심스레 사내아이에게 다가갔다. 멀리서는 그래도 비슷한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자 머리 하나는 더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안녕?”
레이첼은 최대한 밝게 인사하며 활짝 웃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 외모에 대한 자각은 크지 않았지만 그녀는 제 이런 얼굴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내밀어진 손과 화사한 얼굴에도 사내아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작은 손을 한 번 힐끗, 레이첼의 얼굴을 한 번 힐끗 보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 올렸다.
콱―
이름 모를 하얀 꽃이 사내아이용 구두에 짓이겨졌다. 레이첼은 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승님께서…….”
“꺼져.”
레이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꺼지라니. 집에 있는 로즈를 제외하곤 누구도 레이첼에게 그런 험한 말을 쓰지 않았다.
홀로 있는 게 불쌍해서 와 줬더니……. 슬슬 분이 치솟기 시작한 레이첼이 삿대질을 했다.
“너!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그럼 누구겠어. 당장 꺼져, 이 계집애야.”
“계, 계집애.”
이번에는 로즈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레이첼은 생애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입을 벌린 채 들어 올린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사내아이는 레이첼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꽃을 밟고 흙바닥에 문대고 있었다.
“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시끄러워. 계집애를 계집애라 하지 그럼 뭐라 해? 별 같잖은 게…….”
“너…… 너어!”
레이첼은 대번에 사내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손가락을 갈퀴처럼 세운 그녀는 당장에라도 사내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사내아이는 쉽게 몸을 틀더니 오히려 역으로 레이첼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악!”
“아니면 로잘린 강아지라 불러 줘? 그것도 괜찮네. 너 로잘린만 졸졸 따라다니잖아.”
“아으…… 이거 놔! 놓으라고!”
“왜? 개새끼는 원래 이렇게 끌고 다니다…….”
“아, 아파! 아프다고!”
“놓는 거지.”
사내아이는 히죽 웃더니 팽팽히 당겨진 레이첼의 머리를 탁 놓았다. 반동에 잔디로 꼬꾸라진 레이첼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이 무슨……. 캐틀렛가에서 1년 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넘어졌으니 당연히 아프겠지. 그러게 왜 엎어져. 멍청하긴.”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나 로잘린 강아지 아니야! 난 로잘린 친구야! 친구!”
“친구는 무슨. 넌 친구가 매번 모자 들어 주고 시키는 대로 다 하냐? 아까도 보니 로잘린이 공 던지면 쪼르르 달려가 줍기만 하더니……. 하긴 어쩔 수 없나?”
사내아이의 새까만 눈에서 악의가 흘러나왔다. 그는 흙이 묻은 드레스를 터는 레이첼을 위아래로 훑어보곤 빈정거림을 이어 나갔다.
“듣자 하니 이름도 제대로 없는 집안 여식에 네 어미는 상인 나부랭이 출신이라며? 로잘린 강아지 노릇도 감사해해야겠다?”
레이첼은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캐틀렛가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 레이첼은 많은 말을 들었다. 그중에는 사내아이의 말처럼 직설적이진 않았어도 교묘히 가시를 숨긴 말들이 많았다.
‘로잘린에게 잘해 줘야 한다. 네 역할이잖니?’
‘네 집안에…… 어미는 또 어떻고……. 어휴. 내 신세야. 이런 애 시중을 들고 있어야 하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공녀님과 함께한다고 해서 네가 공녀님과 같다 생각하면 곤란하단다.’
공작을 비롯해 캐틀렛가에 상주하는 시중인들은 물론이요, 레이첼과 로잘린을 함께 가르치는 스승들조차 레이첼에게 은연중, 아니 대놓고 주제를 알라 말하곤 했다.
레이첼은 교육을 받을 때 항상 로잘린 뒤에 앉아야 했으며 로잘린보다 배는 많이 혼나야 했다.
‘네 역할이 그런 거다. 공녀님 덕에 내게 교육을 받게 됐으니 공녀님께 값을 치러야지.’
심지어 나이 많은 예절 스승은 레이첼이 로잘린과 함께 수업을 받는 대신 로잘린의 매를 대신 맞아야 옳다 말하곤 했다. 로잘린은 그걸 이용해 레이첼에게 심통이 날 때면 일부러 예절 스승에게 혼날 짓을 하고는 했다.
온갖 일이 생각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레이첼은 눈가가 흐려지려는 걸 간신히 눌러 참은 채 버럭 고함쳤다.
“그러는 너희 어머니 아버지는 얼마나 잘났는데! 로잘린처럼 너희 아버지가 공작님이라도 돼?”
“뭐?”
“그럴 리 없지. 공작님 아들이면 여기 와 있겠어? 집에 있겠지. 너! 너도 나처럼 집에서 로잘린 보필하라 보낸 거지?”
탁―
“악!”
레이첼이 다시 한번 잔디로 쓰러졌다. 엉덩방아를 세게 찧은 그녀는 벌떡 일어서려다 제 위로 그늘을 만든 아이를 노려봤다.
“이 계집애가 보자 보자 하니깐. 감히 누구랑 누굴 대는 거야!”
“…….”
“똑똑히 들어. 우리 가문은 너희 가문처럼 한미한 곳하고는 달라. 난 마일런가의 독자야. 마일런. 너같이 천한 계집애도 들어는 봤겠지?”
사내아이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잔뜩 흥분해서 발발거리는 꼴이 꽤 자존심이 상한 듯싶었다. 하지만 어떡하나. 레이첼은 사내아이가 말한 마일런 가문을 몰랐다.
“아니. 모르는데. 전혀 몰라.”
“뭐, 뭐라고? 야! 너 거짓말하지 마. 우리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데!”
아이가 워낙 펄펄 뛰었기에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살짝 눈치를 봤다. 정말 대단한데 내가 모르나? 하지만 대단하다면…….
“그렇게 대단한데 왜 여기 있어? 왜 로잘린네에 얹혀살아?”
“얹혀사는 거 아냐!”
“아니긴 무슨……. 로잘린이 말하는 것도 그렇고 혼자 서서 이러는 꼴을 보니 나랑 같은…….”
“아니라고!!!”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 못 믿겠다 주장하자 아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너무 큰 소리에 레이첼은 더 빈정대려던 것도 잊은 채 귀를 꽉 틀어막았다.
“깜짝이야! 시끄러워! 조금만 조용히 말할 수 없어?”
“아니라잖아! 아니야!”
“어?”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아이를 보던 레이첼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 작게 흐느끼는 소리.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니라고……. 아니란 말이야.”
“저기…… 울어? 너 우는 거야?”
저보다 큰, 오라비 또래의 아이가 울자 레이첼은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울어야 하는 건 나 아닌가? 그녀는 좀 억울해졌다.
“아니라 하잖……흑.”
하지만 어쩌겠나. 울고 있는데. 레이첼은 일어서 사내아이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려다 아이의 좋지 않은 성격을 생각하곤 슬그머니 소매를 잡았다.
“저기, 미, 미안해. 내가…… 그러니깐 난…….”
‘얘 성격에 분명히 내칠 거 같은데.’
아이는 레이첼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레이첼에게 더욱 바짝 붙었다.
레이첼은 그런 아이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조용히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천 아래 등이 위아래로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첼은 이비가 저에게 해 줬던 것처럼 사내아이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보다 큰 아이였기에 팔이 좀 아려 왔지만 레이첼은 수업 중 배운 배려와 인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참았다.
“사실 네가 왜 우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니라고……. 아니……끄윽.”
“……아니야. 됐어. 하아……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사내아이는 레이첼의 품에서 한참을 울다 해가 질 무렵 충혈된 눈을 하곤 도망치듯 사라졌다.
레이첼은 제 드레스를 다 적신 주제에 인사도 안 하고 사라진 아이가 원망스러웠으나 그보다는 그가 왜 울었는가가 궁금해 로잘린을 살살 구슬려 아이에 대해 물었다.
“걔네 어머니랑 아버지…… 그러니깐 마일런 후작 부부 말이야.”
“응.”
“……우리 어머니랑 같이 돌아가셨어.”
“어?”
“물에 빠져서. 후작 부인 쪽은 시신도 못 찾았다고 그러더라.”
“…….”
“난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걔는 불쌍하게 됐지. 부모 중 아무도 없잖아? 그래서 아버지가 데려오신 거야. 어머니 친척이거든.”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아홉 살 레이첼이 생각하기에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
기억에 남을 만남 이후 에단은 레이첼의 곁에 제법 자주 나타났다. 보통은 우연히 산책을 나왔다든가 어딜 가는 참이었다든가 하는 말을 해 댔지만 레이첼과 마주치면 그는 본래 목적을 포기한 채 그녀 곁에 머물렀다.
레이첼은 너무도 뻔한 그 모습이 같잖았지만 속사정을 알게 된 터라 별말 없이 그를 상대해 줬다. 얼마나 외로울까. 말은 안 했지만 레이첼은 에단을 퍽 불쌍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뭐야? 레이첼, 얜 왜 데려왔어?”
“성격 나쁜 건 여전하네. 아저씨도 안됐어. 하나 있는 여식이 너라서.”
“야!”
물론 갑작스럽게 끼어든 에단을 로잘린은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같이 보는 데다 공작까지 나서 에단에게 잘해 주라 타이르니 별수가 없었다. 그녀는 툴툴대면서도 에단과 매번 마주했고 자주 신경전을 벌이긴 했으나 그를 점차 받아들였다.
공작저는 곧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싸우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마음 한편을 포근하게 해 줬기에 사용인들은 일하다가도 가끔 뒤돌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예절 선생은 별로야. 아버지는 왜 그런 꼬장꼬장한 늙은이를 데려와서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부하는 것밖에 없잖아?”
“동감! 나도 싫어. 시도 때도 없이 손바닥 대라고 하는데…… 차라리 집사님이 예절 수업 가르쳐 주면 안 되나? 식사 예절도 그렇고 써먹는 건 다 집사님한테 배우는걸.”
“뭐야? 그게 널 때려?”
세 아이는 많은 일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 * *
“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
카우치에 편히 드러누워 책을 보고 있던 레이첼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곧 책 위로 희끗희끗한 머리가 나타나자 레이첼은 활짝 웃으며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레널드!”
깔끔한 인상의 노신사는 처음 본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한결같이 다정한 어른인 그를 제법 잘 따랐다.
“자세는 바로 하시고 드셔야 합니다.”
“뭐 어때요, 아무도 안 보는데…….”
“보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세가 틀어지면 나중에 고생하십니다. 그리고 자고로 숙녀라 함은…….”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만! 잔소리는 다른 분들로 충분해요, 레널드.”
레이첼이 투덜거면서도 자세를 바르게 하자 레널드는 미소 지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접시에는 딸기가 보기 좋게 올라간 푸딩이 있었다.
레이첼은 냉큼 접시를 받아 들었다. 진한 캐러멜소스가 듬뿍 뿌려진 푸딩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로, 만들기 어려운 것이었다.
“맛있으십니까?”
“네, 맛있어요.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로잘린도 없는데?”
당연하다는 듯 묻는 레이첼의 질문에 레널드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열여덟이 된 레이첼은 로잘린과 다르게 최근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돌봐 주는 이도 없이 종종 방치되곤 했다.
“아가씨가 계시지 않습니까. 원래라면 간식을 드실 시간이니까요.”
“로잘린도 없는데 내 간식까지 챙길 필요는 없어요. 정 필요하면 직접 내려가도 되고요. 본관에서 여기까지 오시기 귀찮잖아요.”
“그래도…….”
레널드는 손님께 그런 불편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말하려다 입을 물었다. 본 세월만 10여 년. 레이첼은 손님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소녀였다.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집에는 안 가고 싶으시고요?”
집이라는 말에 레이첼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화제를 돌리려 한 말이었건만……. 레널드는 레이첼의 상황을 생각하곤 실수했다 싶어 주먹을 살짝 쥐었다.
“집은 저번 주에 다녀왔는걸요. 곧 언니 결혼식이라 또 갈 거고…….”
레이첼의 뺨에는 희미하게나마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레이첼은 부푼 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레널드는 그게 애블랑 자작의 짓임을 알아챘다. 레이첼은 최근 아비인 자작의 뜻을 어기고 캐틀렛 공작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공작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난 자작이 레이첼을 어떻게 다뤘을지는 뻔했다.
‘당장 내보내! 로잘린도 다 컸고 별 필요 없는 아이에게 돈 들일 필요는 없으니……. 자작에게는 연락했나?’
‘예. 자작에게는 연락했습니다. 한데 그게…….’
‘왜? 로잘린이 아직도 못 보내겠다 하는 모양이지?’
‘예. 계속 곁에 두고 싶으시다 울고 계십니다.’
‘도대체 왜……. 시녀가 되지 않겠다 제 발로 명예를 찬 아이가 아닌가?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두 분께서는 오래 함께하셨으니 공녀님께서는 정이 많이 드셨을 겁니다.’
‘정이라……. 그래. 내 딸아이는 정이 너무 많아 탈이야. 그 사람을 닮아 그렇겠지만 이럴 때는 단호해졌으면 좋으련만…….’
로잘린은 레이첼이 제 시녀가 되길 원했다. 딸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좋다는 캐틀렛 공작은 레이첼의 출신을 못마땅해했지만 봐 온 정을 봐 애블랑 자작에게 먼저 언질을 넣었다.
당연히 자작은 기뻐하며 그 즉시 동의를 표했다. 주변 사람들도 레이첼이 출세한다며 부러움과 시샘을 가득 담은 축하의 말을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당사자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로잘…… 아니, 공, 공녀님의 시녀 자리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각하.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였다. 캐틀렛 공작은 벌벌 떨면서도 자신과 로잘린의 면전에 대고 싫다 말한 소녀를 못마땅하게 봤다. 그로서는 사교계 데뷔도 못 한 새파란 소녀가 감히 자신을 어긴 일이었으니 당연하리라.
‘같이 교육하는 것이 아니었어.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눈에 보이지 않으면 로잘린도 정을 떼겠지. 별채로 치워 버려. 로잘린이 밖에 나갈 때면 일도 시키고 말이야. 캐틀렛의 핏줄도 아닌 데다 발칙하기까지 하니 본때를 보여 줘야지.’
레이첼이 본관에서 별채로 방을 옮겼다. 공작은 로잘린의 반대로 레이첼을 쫓아내지는 못했지만 제 눈앞에서 치워 버리라 명했다. 로잘린이 울며 떼를 써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주인의 미움을 산 자작가 소녀. 주인의 눈치에 민감한 사용인들은 레이첼을 티 나게 배제했다. 심지어 레이첼을 괴롭히던 몇몇은 날개를 단 듯 괴롭힘의 강도를 높였다. 레널드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으나 일일이 레이첼을 챙겨 주기에 그는 너무도 바쁜 사람이었다. 게다가 로잘린도 사교계 생활 후에는 레이첼에 대한 관심이 줄어 그녀에게 전만큼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레이첼의 신세는 방치된 로잘린의 인형과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작가 큰 영애께서 곧 혼인한다 하셨지요. 어디 보자…… 한 달 뒤니 결혼식이 끝나면 아가씨께서도 사교계 데뷔를 하시겠군요.”
사교계 데뷔라는 말에 레이첼의 얼굴에 기대감이 찼다. 여느 또래 아가씨들처럼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예쁜 드레스 입기를 즐기는 그녀는 사교계 데뷔를 꽤 기대해 왔다.
“완전히 하얀 드레스에 화관을 쓰는 건 그날만 가능하다 들었어요! 이번에 데뷔하는 애들이 많다지만 분명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겠죠?”
그늘져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사랑스러운 외관이 더욱 빛났다. 레널드는 잘 키운 딸을 보듯 레이첼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어느 분들 사이에 있어도 눈에 확 띄실 겁니다.”
“얼굴로 따지면 뭐,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내가 좀 예쁜가……. 참! 레널드. 난 라일락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쓸 거예요. 장미가 좋다지만 그건 너무 흔하니깐 싫고 지금 계절에는 라일락이 딱이에요.”
흥분해 조잘거리기 시작한 레이첼의 목소리가 점점 활기를 찾았다. 레널드는 이번 일이 있기 전의 모습으로 레이첼이 돌아온 거 같아 뿌듯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 공녀님의 시녀가 되면 매사 조심하고 침착해야 하는데 그러면 이런 모습은 보기 힘들겠지. 사랑받는 게 어울리는 아이야.’
생기 넘치는 소녀는 데뷔탕트가 끝나면 자작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래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비 때문에 좀 힘들긴 하겠으나 괴롭히며 압박하는 어른들이 많은 캐틀렛 공작저보다는 피를 나눈 가족의 품이 나을 테지. 몇 번 본 자작 부인과 그 아래 자녀들의 눈에는 자주 보지 못하는 핏줄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 있었다.
“라일락도 여러 색이 있다는데 최대한 내 눈동자 색하고 비슷한 거로 해서…….”
레널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첼은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일어나 화관 쓰는 흉내를 내며 빙빙 도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드레스가 몇 번 더 원을 그렸다. 레이첼은 춤추듯 손끝을 움직이다 문뜩 무언가를 보고 제자리에 섰다. 빛이 들어오는 아치형의 문가에는 어느새 큰 키의 청년이 와 있었다.
어두운색의 푸른 공단 셔츠가 잘 어울리는 미청년은 레이첼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문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낀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묻어났다.
“후작님. 언제 오셨습니까?”
“레널드. 오랜만이야.”
까만 머리카락 색과 꼭 같은 눈동자에는 레이첼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는 입술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레이첼이 반가운 듯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에단!”
* * *
에단은 열여섯이 되던 해 공작저를 떠났다. 후작위를 승계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성인은 아니었으나 후작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위를 노리는 승냥이 떼 같은 친척들이 많았지만 캐틀렛 공작의 비호를 받는 그에게서 마일런가를 빼앗을 간 큰 이는 없었다.
‘넌 여러모로 나를 도와야 하는 아이다. 그러니 너와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더 많은 공부를 하거라.’
에단은 후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캐틀렛 공작의 뜻을 따라 높은 신분의 청년들이 모인 기숙 학교로 진학했다. 보통의 귀족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갈, 진정한 상위층을 위한 곳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만큼 에단의 대부분 일상은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운 주말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말을 달려 캐틀렛 공작저를 방문했다.
장장 몇 년을.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야? 졸업식 가고 싶었는데 못 가 미안해. 각하께서 나는 그런 데 가는 게 아니라고…….”
“알아. 들었어. 뭐 끝까지 재미없었지. 졸업식도 여전했어. 네가 없으니깐 지루하고,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은 내내 똑같은 표정이더라. 왜 그 전에 여기 있던 예절 선생, 그 선생하고 표정들이 똑같았어.”
시험에 쫓기면서도, 감기에 걸려 가면서도 먼 길을 달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에단은 매주 한 번은 꼭 레이첼을 봐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예쁜데 거길 오면 어떻게 되겠어? 있는 놈들이라곤 내 또래 사내새끼들뿐인데. 분명 다들 너만 볼 거고…… 상상만 해도 싫어.”
“사내새끼라니 말 좀 예쁘게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너만 하겠어? 이 앙큼한 고양이!”
남녀라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어렸던 둘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정을 쌓았다. 우정이라 치부하기에는 좀 더 깊은 정을 말이다.
“그런 말 쓰지 말랬지! 어디서 그런 듣기만 해도 오글거리는 말을 배워서는…….”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하고 여기 입 맞춰 줘. 응? 나 많이 기다렸단 말이야. 졸업 때문에 열흘이나 못 봤는데 넌 나…….”
“들러붙지 마! 징그러워!”
“……안 보고 싶었어?”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당사자 둘도 몰랐다. 하지만 둘은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 빠르게 타올랐으며 이미 함께한 시간보다 더 많은 나날을 같이 보내자 수백 번 맹세한 후였다. 치기 어린 한때의 사랑이라기에 그들은 진지했다.
“응? 안 보고 싶었냐니깐?”
“나도…….”
“응, 레이첼.”
“……보고 싶었어.”
레이첼은 허리를 굽힌 채 입술을 내민 에단에게 살짝 입 맞추고는 새침하게 말했다. 에단은 레이첼이 제 입에 입 맞춰 주자 황홀한 듯 웃으며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둥근 이마에 몇 번이고 소리 나게 입 맞췄다. 뜨거운 입술과 숨에서는 숨길 수 없는 열기가 그득했다.
“사랑해, 레이첼. 사랑하고 있어, 레이첼 애블랑.”
에단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레이첼은 저를 바라보는 까만 눈과 제 얼굴을 더듬는 큰 손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을 넘치도록 느끼곤 눈을 예쁘게 접어 보였다. 그녀의 연인은 다정했고 그녀에게 사랑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참 에단과 눈을 맞춘 레이첼은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오면 하고자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푸른 공단 셔츠를 꼭 쥔 작은 손이 사랑스럽게 바르작거렸다.
“알지? 나도 조금 있으면 데뷔야. 데뷔탕트 때 너랑 첫 춤 추고 싶은데…… 나랑 같이 출 거지?”
레이첼의 질문에 에단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가제보 벽에 등을 기댄 채 레이첼을 안고 있던 그가 그녀를 떼어 놓은 뒤 슬며시 고개를 틀었다. 아주 미묘한 각도였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에단을 보며 레이첼은 설마 하는 눈초리를 했다. 이건 꼭 거절할 것 같은 반응인데. 하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랑 첫 춤을 춘단 말인가?
“……미안, 레이첼. 그건 힘들 거 같아.”
레이첼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지자 에단은 그제야 답을 했다. 레이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잠시 노려보다 몸을 틀어 에단의 품에서 벗어났다.
“왜? 작년에 약속했잖아. 데뷔탕트 첫 춤은 꼭 너한테 달라며.”
“아저씨가 로잘린과 함께하라 해서 말이야.”
“뭐? 왜?”
“그게…….”
에단은 무얼 말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 다시 닫았다. 눈을 감고 한숨을 쉰 그는 머리를 한 번 쓸고는 레이첼을 저 쪽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원래 첫 춤은 가족과 함께하는 게 좋아. 알잖아. 사교계 말 많은 거. 그냥 네 오라비나 자작에게 부탁하면…….”
레이첼이라고 그런 걸 몰라 에단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남자 핏줄에게 첫 춤을 맡기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먼저 부탁을 한 건 그가 아닌가. 레이첼은 에단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평판에 작은 흠집이 나는 건 참을 요량이었다.
“내가 그런 걸 몰라서 그런 게 아니잖아. 에단. 똑바로 내 얼굴 봐.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
“너하고 로잘린 말이야. 소문으로는 각하께서 두 사람을 약혼시키려 한다는데…….”
에단이 침묵을 고수하자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 품고 있었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사실이야?”
사교계는 물론이요 캐틀렛가 내에서도 작년부터 묘한 소문이 돌았다. 로잘린 캐틀렛과 에단 마일런이 곧 약혼한다는 소문.
공작이 에단을 아끼고 사윗감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레이첼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에단은 물론이요 로잘린 또한 에단에게 관심 없다 수십 번은 말했기 때문이다.
‘걱정 마, 레이첼. 난 그에게 관심 없어.’
조금 더 자란 후의 그녀였다면 코웃음 쳤을 만큼 순진한 믿음이었지만 열여덟의 레이첼은 그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멍청하고 순수했다.
“아아…… 그런 소문이 도나?”
에단의 눈에 아주 잠깐 죄책감이 스쳤다. 입술을 꾹 내리 문 그는 괴로운 표정을 잠시 지었다. 하지만 단단한 믿음에 눈이 가려진 레이첼은 그 표정을, 찰나의 순간을 잡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초조한 마음으로 에단의 답을 기다렸다.
“그보다는 레이첼, 이걸 봐 봐. 이번에 내가 구해 온 건데…….”
에단은 답하기를 피했다. 대신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짙은 녹색 벨벳 상자는 척 보기에도 귀한 물건을 담을 것 같이 고급스러웠다.
“어때? 예쁘지? 네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릴 거 같아 어렵게 구했어.”
에단이 빠른 손놀림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정밀히 세공된 에메랄드 목걸이가 있었다. 알들이 굵지는 않았지만 진한 색의 에멜랄드 아홉 개가 같은 개수의 진주와 함께 자잘한 금 체인에 엮여 빛나고 있었다.
평소라면 감탄을 하며 채워 달라 졸랐을 것이다. 감동한 눈도 했겠지. 하지만 레이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목걸이에 눈에 가지 않았다. 그녀가 에메랄드 목걸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에단의 눈을 보며 진실을 요구했다.
“말해 줘. 응? 로잘린도 너도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좀 불안해. 내 처지도 있고 각하께서는 너를 아끼시니깐…….”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에단이 구두로 짜증스레 흙바닥을 긁었다. 목걸이를 대충 상자에 넣은 그는 상자를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더니 한참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사이 침묵이 흘렀다. 레이첼은 조마조마한 마음에도 인내심 있게 에단의 말을 기다렸다. 결국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에단이 흐릿한 목소리로 부정하며 레이첼을 꼭 안았다.
“……아니야.”
어쩐지 좀 어눌하다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레이첼은 그 말에 안도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아홉 살 때부터 알아 장장 9년을 함께한 사이였다. 성격이 좀 포악하긴 했으나 이런 일에 거짓을 고할 이가 아니었다.
작은 몸을 꽉 잡은 손아귀 힘은 강했다. 레이첼은 에단의 얼굴을 보고 싶어 고개를 들려 했지만 뒤통수를 세게 잡힌 터에 그의 품에 잠자코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에단은 레이첼을 품에 가둔 채 또 한참을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그는 레이첼이 저리는 몸에 괴로워할 때쯤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것만은 약속해. 레이첼. 내겐 너뿐이야.”
* * *
레이첼의 데뷔탕트는 성공적이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연보라 라일락 화관을 쓴 그녀는 연회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드레스 자락을 쥔 채 반짝이는 백금발을 흩날리며 춤을 추는 레이첼은 요정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새로이 등장한 아름다운 소녀에게 넋이 나가 그녀의 파트너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저기, 저 아가씨는 누구예요?”
“애블랑가의 둘째 여식이래요. 아직 어린데 눈에 확 들어오네요.”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도 제법 유명했죠. 공작가로 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자작이 자랑할 만해요. 정말 곱게 컸는걸요.”
예쁜 외관과 춤을 사랑하는 발랄한 성미. 사교계와 레이첼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녀는 캐틀렛가에서 숨죽이고 있던 본래의 성격을 마음껏 뽐내며 이제 막 결혼한 제인의 곁에서 연회장을 뽈뽈뽈 잘도 돌아다녔다.
“왜 애블랑 자작 부인이…….”
“출신 성분은 숨기기 어렵다잖아요. 벌써 저렇게 눈웃음을 치고 다니니 원……. 조신하지 못해서는.”
“자작 부인의 출신 모르십니까? 피가 어디 가겠어요?”
물론 몇몇은 그런 레이첼을 깔봤다. 그러나 얕잡아 보는 그들조차 레이첼의 미모 하나는 인정하며 그녀가 가장 주목받는 영애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레이첼이 한껏 주목받으며 이름을 알리자 자작은 누그러졌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레이첼을 못마땅한 듯 봤지만 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다.
“레이첼 애블랑.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자고로 미혼의 여성은 말이다…….”
대신 그는 미혼의 여성이 가져야 할 몸가짐에 대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때의 레이첼은 사내들은 적당히 멀리하며 제인의 곁에 꼭 붙어 다녔기에 잔소리가 그 이상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목걸이가 정말 예뻐요. 애블랑 영애의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듯한데 어디서 구하셨어요?”
“저하고도 한 곡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애블랑 영애는 어쩜 그렇게 춤선이 고우세요?”
“정,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거 제가 직접 꺾어 온 꽃인데…….”
레이첼은 행복했다. 아직 앳된 이 아가씨는 제게 오는 관심을 즐겼다. 물론 그녀의 연인은 불만스러운 낯을 했지만 어쩌겠나. 그는 레이첼에게 무어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왜 그렇게 헤실거려? 저 자식이 너한테 뭐라 하던데 무슨 말 했어?”
에단은 단 한 번도 레이첼을 연회 파트너로 동반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곁에 있는 건 언제나 로잘린이었다. 레이첼은 그에 대해 불만을 몇 번이고 토로했지만 에단은 언제나처럼 캐틀렛 공작 핑계를 댔다.
“아이딘 경이 다음 연회 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그러겠다 했지. 어차피 에단 넌 로잘린이랑 같이 올 거라며.”
“야! 나랑 너랑 같아? 난 아저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리고 알잖아, 로잘린 그 까다로운 성미. 나라도 옆에 있어야지 아니면 또…….”
“그래서? 그럼 난 혼자 와야 해?”
“네 오라비가 있잖아. 에드가한테 부탁하면 될 걸 굳이 저런 어중이떠중이하고 왜 오려는 거야.”
“잘생겼잖아. 그리고 에드가 오라버니는 유학 준비로 바빠 그날 연회 참석은 어렵대.”
“그럼 너도 좀 쉬어. 괜히 와서 뭐 해. 저런 놈들이랑 춤추는 것밖에 더 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내가 왜? 나도 춤추고 싶어. 어제 어머니가 새 드레스를 사 주셨단 말이야. 이번 연회를 위해 맞춘 건데……. 싫어. 아이딘 경하고 올 거야.”
“레이첼!”
격렬하게 싸울지언정 레이첼은 에단의 말에 끝내는 져 줬다. 하지만 앙금은 계속해서 쌓여 갔고 연인은 서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주 다퉜다.
“경고했어. 그 자식이랑 오지 마.”
“싫어.”
고함치고 소리 지르는 날이 이어졌다. 연인은 마주쳐도 고개를 돌려 서로를 피했다.
‘약속해, 레이첼. 내겐 너뿐이야.’
그래도 레이첼은 에단을 믿었다. 그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캐틀렛 공작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그리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레이첼이 사교계에 얼굴을 보인 지 딱 1년이 되던 날 그녀의 믿음은 산산이 조각났다.
* * *
레이첼 바로 아래 동생 로즈의 데뷔 날이었다. 로즈는 치렁치렁한 하얀 드레스가 싫다며 에드가와의 첫 춤도 거부한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데뷔 첫날부터 사고라니. 레이첼은 제 동생이지만 참 대단하다 생각했다.
“이게 어디 가 있는 거야? 제인 언니한테 괜히 내가 혼날 텐데. 아오…….”
“레이첼!”
“응? 로잘린?”
레이첼은 로즈를 찾다 로잘린과 마주쳤다. 붉은 머리와 어울리는 녹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로잘린은 레이첼을 보며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레이첼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를 꺼냈다.
“……너한테는 미리 말해야 할 거 같아서. 나 에단하고 약혼하기로 했어. 석 달 뒤에 약혼식이 있을 거 같아.”
레이첼은 처음에 로잘린의 말에 너무 당황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커질 대로 커진 눈은 감정을 그대로 나타냈으므로 로잘린은 픽 웃으며 레이첼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왜 그렇게 놀라? 아버지가 에단을 후원까지 한 이유가 뭐겠어?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지 뭐.”
“너 분명 나한테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레이첼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떨리는 손만큼이나 목소리가 떨렸다. 로잘린은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친우의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반문했다.
“응? 뭐라는지 안 들려, 레이첼.”
로잘린이 레이첼 쪽으로 고개를 숙이자 길게 늘어진 귀걸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레이첼은 제 뺨에 부딪힌 금속의 차가운 재질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 내가 에단과 무슨 관계인지 알잖아. 그리고 넌 분명 에단한테 관심 없다고…….”
레이첼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에단과 제 관계를 알지 않냐 묻는 말에는 경악과 분노가 담겨 있었으나 감정적인 어투에도 로잘린은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응. 관심 없어. 캐틀렛 공녀인 내가 설마 다른 여자한테 정신 팔린 사내를 좋아할까? 천만에.”
“그런데 왜…….”
“하지만 약혼은 그런 거랑은 별개잖아. 안 그래?”
당연하다는 듯 평온한 어조였다.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에 레이첼은 제가 혹 이상한 건가 잠시 착각을 할 정도였다.
“나한테는 에단 마일런이 딱 맞아. 우리 가문과 비슷하거나 높은 집안을 보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혼약 상대가 내정되어 있는 데다 모나타가 출신 황후 태에서 나오셨고 모나타는 같은 공작가이긴 해도 우리 가문과의 사이를 생각하면 힘들지.”
“…….”
“그러니 내 혼처로 마일런가만 한 곳이 없어. 다른 후작가는 모나타 쪽이거나 내 나이와 맞는 젊은 사내들이 없거든. 그렇다고 공녀인 내가 후작가 이하로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싫고 말이야.”
“…….”
“뭐, 내가 모나타 공작처럼 여공작이 되면 백작가 사내쯤도 괜찮겠지만 난 아버지처럼 머리 아픈 일은 싫어. 그러니 에단 마일런과 약혼하고 그에게 공작위를 줄 예정이야. 물론 안전장치는 만들 테지만 그에게는 과분한 행운이지.”
로잘린은 계속해서 조잘거리며 제 처지에 관해 설명했다.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는 오래전부터 계획한 듯 말하는 것에 막힘이 없었다.
“어째서…….”
“레이첼. 아까부터 왜 그래? 그렇게 말꼬리 늘이면 내가 답답하잖아.”
“나보고는 에단과 만나도 좋다 했잖아! 분명 상관없다고.”
충격에 비틀거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레이첼이 고함을 쳤다. 속이 매스껍고 울렁거려 참기 힘들었다. 로잘린이 작게 손뼉을 치더니 레이첼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아 그거? 그래, 만나. 누가 뭐라니?”
“뭐?”
“혹시 내 아버지 때문에 그러는 거야? 걱정하지 마. 레이첼, 내 친구. 내가 널 받아 주기로 했어.”
자비를 베푼다는 듯 한껏 고양된 어조는 사근사근했다. 손에 깍지를 낀 채 다가온 로잘린이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슬쩍 잡았다.
“공작의 정부 정도면 너도 괜찮잖아? 귀족이긴 하지만 넌 하자 있는 핏줄을 타고났으니 말이야.”
하자 있는 핏줄. 레이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잘린이 그녀의 집안과 가족을 무시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친구라 불러 준다 한들 로잘린은 한 번도 레이첼과 저를 동등하게 본 적이 없었다.
‘너희 가문하고 수준이 비슷한 애들만 모여 있더라니깐. 질 떨어져서는.’
‘자작 부인? 예쁘지……. 하지만 얼굴만 어여쁘면 뭐 해. 제일 중요한 건 핏줄이잖아?’
‘너 지금 나보고 이걸 하라는 거야? 이건 레이첼 정도의 애들이나 차는 수준이잖아!’
같이 자라며 일상처럼 들었던 말들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귀를 닫는 것으로 로잘린의 말을 무시한 레이첼이었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간신히 화를 참은 레이첼이 손을 꾹 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생경한 고통이 전해졌다.
“우리 가문을 물려받을 아이가 내 태에서 태어나면 정식으로…… 아, 정부한테 정식이라는 말은 좀 그런가. 어쨌든 너를 인정할게. 수도 파티나 연회는 안 되겠지만 네가 지낼 지방의 파티 정도는 에단과 참여해도 괜찮아. 친구로서 하는 내 배려야.”
당연했다. 로잘린은 뼛속까지 공녀였고 캐틀렛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라는 제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게다가 워낙 귀하게 떠받들어져 자란 그녀는 남 눈치 보는 법을 아예 몰랐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설마 몰랐어? 에단과 내가 약혼하고 일이 년쯤 뒤에 결혼하면 넌 에발란스로 가게 된다며? 아버지는 네가 더 멀리 가야 한다지만 사실 난 상관없어. 오히려 난 네가 수도로 자주 와 줬으면 해. 아버지 마음이 풀리면 같이 살아도 좋고……. 수도와 가깝긴 해도 그런 시골 촌구석 좀 재미없잖아? 너 같은 애랑은 안 어울리지.”
“…….”
“그래도 이건 먼저 말해 둬야겠다. 레이첼. 너무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마. 뭐 예를 들어 마일런가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야.”
“…….”
“사실 넌 내 친구니깐 정부여도 마일런가 정도는 네 아이에게 물려줘도 괜찮다 싶었는데 말이야, 아버지가 그것도 안 된대. 마일런가는 유서 깊은 명문가라 사생아 손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나 뭐라나. 하긴 나와 에단 사이에 아이가 더 생길지도 모를 노릇이고…… 정부의 자식한테 마일런가는 아깝긴 해.”
“…….”
“아예 아이는 안 가지는 게 어때? 어차피 제대로 된 인정도 못 받을 텐데. 마음고생하는 것보다야 자식이 없는 게 좋지 않겠어? 어차피 귀염받으면서 편히 사는 게 정부들의 삶 아니야? 아이 때문에 외관 망칠 필요 없지.”
“…….”
“그래도 적당한 곳은 챙겨 줄 거야. 나이가 들고 시들면 아무리 너라도 좀…… 아! 이제 스물 된 너한테 이런 말은 좀 그런가? 어쨌든 노후는 걱정 안 되게 해 줄게.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 레이첼, 내 친구.”
내 친구.
그 단어에 과연 진심이 있을까? 레이첼은 로잘린이 저를 친구로 보는지도 이제 의문이었다. 레이첼의 입에서 실소가 흘렀다.
로잘린이 고약하게 떠드는 것을 몇 년이고 들어 준 그녀였다. 집안을 생각해 로잘린의 독한 말을 항상 웃어넘긴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고 싶지 않았다. 레이첼은 악의 없는 척 구는 로잘린의 면상을 똑바로 노려본 채 그녀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리고 서슬 퍼런 낯으로 로잘린과 눈을 마주했다.
* * *
“야! 로잘린.”
레이첼은 멍청하지 않았다. 저런 말을 악의 없이 내뱉는 이는 없었다. 서너 살도 아니고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한들 저런 말이 모욕임을 모를 이가 있을까? 로잘린의 성미와 머리를 아는 레이첼은 절대 아니라 결론 내렸다.
‘또 뭐가 제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지.’
레이첼은 팔짱을 꼈다. 앙다물린 입술은 결연했고 연한 자색 눈은 성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성을 마비시켰던 당혹감은 분노로 인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일부러 로잘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단단히 마음먹었다고는 하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준비가 필요했다.
“너 아까부터 계속 재수 없게 구는데 엄청 짜증 나는 거 알지?”
“뭐, 뭐? 재수 없다고? 레이첼 너…….”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이런 식으로 사람 가지고 놀지 말고.”
레이첼은 장담컨대 단 한 번도 로잘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녀에게 밉보였다간 가문 전체에 해가 될지도 몰랐고 로잘린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제가 아래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만 참으면 되니깐.
그녀는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로잘린을 대했다. 하지만 선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 정부라니. 적에게도 안 할 모욕을 자칭 친구라 하는 것이 내뱉고 있었다. 꾹꾹 눌러 왔던 분이 터진 레이첼은 앞뒤 가리지 않았다.
“고귀하신 캐틀렛 공녀님. 입 아파서 이런 말은 하기도 싫었는데…… 너 나한테 열등감 있어? 왜 이렇게 못나게 굴어?”
“열등감? 내가?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야? 너 제정신이니?”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너……!”
“해야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너 그래도 나보고 친구라 하면서 정부? 정신 나간 건 너야.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레이첼이 강하게 나오자 로잘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레이첼은 레이첼이었다. 그녀가 심하게 굴 때도 레이첼은 보통 멍청히 헤실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애써 태연한 모습을 하려 했지만 한번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로잘린은 자신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 소리를 높였다.
“왜 몰라! 난 다 너를 생각해서…….”
“시끄러워. 나 아직 말 안 끝났으니깐 입 닫아. 말 끊어 먹는 거 맨날 참아 주니깐 난 입이 없는 줄 아나. 오냐오냐 자라더니 세상에 아주 저밖에 없는 줄 알아요.”
쏘아 대는 말에 로잘린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입을 쩍 벌렸다. 커다랗게 뜬 푸른 눈은 레이첼을 경악에 차 바라봤으며 잘 가꿔진 손가락은 레이첼을 덜덜 떨며 가리켰다.
“너…… 너 지금…….”
“내 가문이 네 가문보다 뒤처지는 거? 사실이지. 내 신분이 너보다 처지는 거? 그래. 인정해. 네가 더 잘났지. 그런데 나도 귀족이거든? 애블랑가도 이름이라는 게 있는 곳이다 이 말이야.”
“…….”
“나 네 시녀 자리도 거절했어. 너 계속 이유를 알려 달라 했지? 이유가 뭐겠어?”
“…….”
“너 같은 거 옆에서 시중들기 싫어서 그랬다! 나도 나름 잘났는데 맨날 네가 징징거릴 거랑 잘난 척할 거 생각하니 끔찍이 싫어 그랬어! 이 재수 없는 것아!”
재수 없는 것. 로잘린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태어나서 이런 말을 언제 들어 봤을까? 날 때부터 떠받들어진 그녀다. 그런데 재수 없다니. 로잘린의 몸이 좌우로 휘청였다.
“아…….”
이마를 짚은 로잘린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신음을 흘렸으나 레이첼은 멈추지 않았다. 10년 넘게 쌓아 왔던 말 중 일부라도 뱉자 이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묘한 쾌감에 빠진 레이첼은 뒷수습은 생각도 않은 채 계속해서 로잘린을 몰아붙였다.
“너, 공작 각하랑 네 가문 이름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뭐야?”
“…….”
“없잖아. 게다가 에단이 없으면 이런 연회 하나 혼자 못 오는 네가 뭐 잘났다고 정부? 배려해? 장난도 정도껏이지. 네 앞가림이나 잘해.”
레이첼의 입에서 에단의 이름이 나오자 로잘린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며 핏발이 섰다. 비린 맛이 날 정도로 입술을 내리 문 그녀가 레이첼에게 간신히 말했다.
“너…… 얼굴 하나 잘났다고 감히 나한테…….”
“그래! 나 이 얼굴 믿고 너한테 뻗댄다! 고귀한 너보다 잘난 게 이 얼굴밖에 없어 그런다 왜! 그래서 그게 불만이셨어? 응?”
“……주제도 모르고 내 걸 앗아 간 주제에.”
다문 잇새로 싸늘한 말이 흘렀다. 레이첼은 이 와중에 주제 따지느냐며 비웃으려다 로잘린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로잘린의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지독한 빛이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레이첼. 아버지 아니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
‘어? 너무 막 나갔나?’
로잘린의 입에서 캐틀렛 공작이 언급되자 잊고 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레이첼은 속으로 망했다 소리쳤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며 온몸이 싸해졌다.
레이첼의 공포를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인지 로잘린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레이첼을 흘겨보다 몸을 소리 나게 돌렸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버지 힘을 빌려야겠어. 기대해, 레이첼.”
* * *
“도대체 요즘 왜 이래? 너 어제 새벽까지 파티에 있었다며. 미쳤어? 그때까지 있는 것들이 얼마나 발랑 까진 놈들인지 몰라 그래?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도 이제 성인이야. 이 정도 술은 괜찮아.”
에단은 창백한 얼굴로 물을 마시고 있는 레이첼을 타박했다. 아는 이에게 들은바 레이첼이 전날 파티에서 밤을 새웠다는 사실에, 정확히는 여러 사내와 웃고 떠든 것에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약혼한다며?”
“어?”
“언제까지 속이려고 했어?”
그러나 레이첼의 말에 에단은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없었다. 카우치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녀는 에단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마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과 작은 몸에서는 전날 마신 포도주의 향이 묻어 있었다.
“……너 뺨이 왜 그래?”
에단은 레이첼과 똑바로 마주한 후에야 그녀의 뺨이 붉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인상을 찌푸린 그가 레이첼의 턱을 잡은 채 이리저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 봐 봐. 하…… 입술은 또 왜……. 자작이야?”
애블랑 자작이 몇 번 레이첼에게 손을 댄 사실을 알고 있는 에단이 짜증스레 물었다. 레이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약혼 이야기도 그렇고 혹시…….”
“…….”
“……아저씨가 그랬어?”
레이첼의 침묵에 에단은 제가 답을 맞혔음을 알았다. 무언가 짐작한 듯 미간을 찌푸린 그는 레이첼을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고는 몸을 돌려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젠장.”
“……거짓말이지?”
등 뒤로 레이첼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늘어지는 그 소리에 에단은 어찌할 바 모른 채 잠시 굳었다 다시 한번 욕을 하고 몸을 돌렸다.
에단은 레이첼을 차마 보지 못했다. 스스로를 방어하려 해 봐도 약혼은 연인에 대한 모욕이요 능멸이었다. 하지만 로잘린과의 관계는 형식적인 것일 뿐인데. 그는 제 진실한 마음을 변명으로 삼으며 레이첼에게 짧은 사과를 건넸다.
“……미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레이첼은 눈앞의 사내에 대한 믿음이 모조리 사라짐을 느꼈다. 결국 로잘린의 말이 맞는 건데. 난 왜 당당했나.
‘……주제도 모르고 내 걸 앗아 간 주제에.’
눈앞이 까매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레이첼은 당장에라도 에단을 놓고 싶었다. 동시에 약혼하지 말라 그에게 매달리고 싶기도 했다.
“정말 미안해. 그래도……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줘, 레이첼. 알잖아, 내 마음. 로잘린은 그냥…….”
“필요 없어!”
뻔뻔한 말에 레이첼이 민감히 반응했다. 그녀는 제게 손을 뻗는 에단을 쳐 내며 고함을 질렀다. 에단이 힘으로 레이첼을 잡아 제 품에 가두며 계속 말을 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함께할 수 있어. 같이 지내는 데 문제없을 거야.”
“필요 없으니 꺼져! 꺼지라고! 이 새끼야!”
“조금만 기다리면 다 해결되니깐…… 그러니깐 제발 레이첼.”
“놔! 더러우니 놓으라고! 개새끼! 더러운 새끼! 빌어먹을 놈!”
“……네가 한 번만 양보해 줘. 응?”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레이첼은 그를 물고 때리며 할퀴었다. 제법 아플 법도 하건만 에단은 모든 걸 감수하듯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얼마를 그랬을까. 온몸에 진이 빠진 레이첼은 무너지듯 얌전히 에단의 품에 안겼다. 그새 마른 입술은 또다시 터져 피가 묻어났으며 꼭 감은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라리 헤어져.”
“안 돼.”
“미쳤어?”
“헤어지는 건 절대 안 돼. 넌 내 사람이야. 내 거라고.”
“그럼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나보고 정…….”
레이첼은 정부라도 되라는 말이냐 소리치려다 입을 닫았다. 말을 하면 에단이 그렇게 해 달라 할 것만 같았다.
‘공작의 정부 정도면 너도 괜찮잖아? 귀족이긴 하지만 넌 하자 있는 핏줄을 타고났으니 말이야.’
세상에, 정부라니. 정부가 되어 달라 청하는 연인이라니. 레이첼은 창창하다 못해 어린 나이. 한 남자의 정부로 전락해 시골에 갇혀 지낼 자신을 상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아닐 거야.’
상상만으로도 두려운데 정말 듣는다면? 레이첼은 설마 에단이 그 정도까지 바닥은 아닐 거라 믿으며 침묵했다. 평소 그녀의 성미라면 직접 묻고 따질 것을 택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입을 봉함으로써 최악의 상황을 회피했다.
“용서해, 레이첼.”
레이첼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못 챈 에단은 힘이 빠진 그녀를 토닥이며 어린아이가 떼쓰듯 쉴 새 없이 말했다. 미안. 기다려 줘. 한 번만. 듣기 싫은 말에 레이첼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절대 안 돼.’
당장 죽는다 해도 정부 따위 되기 싫었다. 에단에 비해 제 처지가 모자라긴 했으나 레이첼은 인정받지도 못하는 정부로 살며 인생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하나 제 삶을 파괴할 정도의 마음은 아니었다.
‘울고 떼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이참에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해.’
“알았으니 이거 놔.”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녀는 에단의 품에서 벗어나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빨개진 눈가가 아려 왔으나 눈물 따위 보일 수 없었다. 레이첼은 얼굴을 정리하고 에단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다.
“약혼하지 마. 하면 나랑은 정말 끝이야, 에단.”
에단은 레이첼의 단호한 말에 잠시 손을 멈췄다 다시 그녀를 토닥였다. 위로하듯 다정한 손길에 레이첼은 그가 알았다 말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동의한 거라고,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를 향한 마지막 믿음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레이첼! 내 친구. 우리 셋은 보통 인연이 아니니깐 직접 전해 주려 불렀어. 우리 약혼식 초대장이야.”
“…….”
“뭐 해 에단. 빨리 줘.”
에단은 로잘린과 팔짱을 낀 채 레이첼에게 직접 약혼식 초대장을 건넸다.
* * *
캐틀렛 공작의 하나뿐인 외동딸 로잘린과 마일런 후작의 약혼식. 캐틀렛 공작저에서 이뤄진 그 약혼식은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게 치러졌다.
“약혼식이 이 정도니 본식은 어느 정도일까요?”
“때가 되면 알겠지요. 몇 년 안에 식을 올리신다니깐……. 기대해 봐도 좋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그리 완벽한 식에도 주인공 중 하나인 에단의 얼굴은 구겨지다 못해 험악했다. 그의 눈앞,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누워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어느 손님방. 이불 속에 들어앉은 여자는 레이첼이었다. 구불구불한 백금발을 편히 풀어 헤친 그녀는 누군가와 입이라도 맞춘 것인지 부푼 입술을 한 채 에단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었지?”
에단은 회까닥 미치기 직전이었다. 식이 시작되기 전 레이첼이 보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는 에단이 뻔히 보고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다른 사내와 꼭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식이 시작되기 직전 그 사내에게 안기다시피 해 사라졌다.
“응. 알고 있었어.”
“뭐?”
“왜? 화가 나?”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꼴값 떨고 있네. 그 옷 입고 여기 와서 이러는 거 웃기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따질 거면 처음 봤을 때 들이닥쳐야 하는 거 아냐? 일 끝나고 뒤늦게 무슨…….”
갖춰 입은 까만 슈트. 로잘린의 드레스 색과 맞춘 붉은 크라바트. 레이첼의 말에 에단이 멈칫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자신은 식에 참석해야 했다. 여러 사람이 저만 보고 있었고 내키지 않았다 한들 자신은 주인공 중 하나였다.
에단의 표정을 본 레이첼이 비소를 머금었다. 몽롱한 자색 눈과 그늘진 눈가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잘 정돈된 손톱들을 시큰둥하게 부딪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긴 어려웠겠지. 식장에 들어가야 했으니깐 말이야.”
“…….”
“잘 어울리더라, 둘. 고귀한 사람들끼리 정말 잘 어울렸어. 공작 각하 입이 찢어지겠던데?”
에단은 그녀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했다. 그가 약혼했기 때문에. 레이첼은 그 이유로 그와의 신뢰를 저버리고 다른 사내와 침대에서 뒹굴었다. 그것도 대놓고.
이해한다 한들 용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긁고 찢어 놨다. 저 계집은 제 마음을 짓밟았다. 더럽게 다른 사내와 놀아났다.
“네가 감히…….”
에단은 단 한 번도 레이첼과 밤을 지새운 적이 없었다. 뒤로 문란한 사교계에서는 데뷔만 하면 함께 침대로 오르는 남녀가 태반이었지만 에단은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가 원할 때 잘 준비된 첫날밤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고작 그에게 화가 난다는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다른 사내에게 저리 쉽게 몸을 내주다니!
“내가 기다려 달라 그렇게 빌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래!”
“네가 언제 빌었어? 혹시 그날 기다려 달라 말한 걸 빌었다 표현하는 건 아니지?”
“레이첼!”
“귀 아프니 목소리 낮춰. 그리고 빌었다 해서 내가 네 뜻대로 해 줘야 해? 왜? 내가 너나 네 약혼녀보다 신분이 처져서?”
“말꼬리 물고 늘어지지 마!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나!”
“그런 말이 아니면 뭐야? 결국 나더러 참으라는 거잖아. 싫어. 왜 나만 참아야 해? 왜 다치는 건 항상 나나 내 가족이야!”
레이첼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에단은 그제야 레이첼이 또 다른 것에도 단단히 화가 났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이던가. 캐틀렛 공작이 레이첼과 애블랑 자작을 불렀다 들었다.
혹 또 맞은 것인가? 에단은 레이첼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레이첼의 얼굴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듣기 싫은 말 좀 들었다 응석을 피우는 거군.
“너 얼마 전에 아저씨께 불려 갔다 이러는 거면!”
에단의 말에 레이첼은 잠시 넋이 나간 듯했다. 에단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작고 흰 등에는 채찍 자국 여섯 개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오래도록 신경 쓰지 않으면 분명 흉터가 남으리라.
흰 얼굴에 바스라질 듯 금이 갔다. 입술을 앙다문 레이첼이 흐릿한 시야를 기어코 지우곤 선명한 눈을 했다.
“어리광 피우지 마! 그 정도가 무어라고! 아저씨 입장에서야 당연한 거지. 귀한 외동딸이 고작 자작가 영애한테 밀린 거니깐. 그것도 은혜를 베푼 자작가 여식한테!”
“…….”
“원래라면 너 당장 어디로 몰래 팔려 가도 어쩔 도리 없는 일이야. 캐틀렛가를, 아저씨 성정을 몰라? 오히려 이만하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에단은 홀로 열을 내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눈썹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에단을 바라만 봤다. 조금 전같이 악을 쓰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내가 네 아비를 얼마나 지켜 줬는지 알아? 내가 너를 지키려 어떻게…….”
그 얼굴이 속상해 에단은 제 섭섭함을 드러냈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는 자신이 레이첼을 위해 제법 희생했다 생각했다. 캐틀렛 공작과 좋은 사이로만 남을 수 있는 걸 어그러뜨리고 많은 부분을 양보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필요 없어.”
“뭐?”
에단은 믿을 수 없는 눈을 하며 레이첼을 봤다. 레이첼의 말간 얼굴에는 그가 원하는 감정 따위 없었다. 그녀는 침대 위 제 옆 빈자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필요 없다고. 안 지켜 줘도 돼. 너 말고도 날 지켜 줄 분이 생겼어.”
문뜩 레이첼을 껴안고 입 맞추던 사내가 떠올랐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금을 녹인 듯 화려한 머리색이 눈에 띄는 이였다.
성큼 레이첼에게 다가간 에단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부르튼 입술을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레이첼은 그와 아닌 다른 사내와 입 맞췄다.
“……너 설마. 아까 그 자식하고 계속 만날 참이야?”
“그 자식이라니. 너도 알 텐데? 귀한 너보다도 더 귀한 분이야. 나를 지켜 줄 확실한 힘이 있고…… 어쨌든 너처럼은 안 할 분이야.”
“간악한 계집!”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든 건 안다만…… 그런 부류의 계집들은 믿을 게 못 된다. 장담컨대 그 아이는 너보다 좋은 조건의 사내가 나타나면 바로 가벼운 엉덩이를 옮기겠지.’
공작의 말이 맞았다. 에단은 레이첼의 얼굴을 던지듯 놓았다. 깊은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그가 한 음절 음절 힘을 주며 짓씹듯 내뱉었다.
“……지저분한 계집애. 다시는 내 이름 부를 생각도 마. 너 따위에게 격식 없이 대한 게 문제지.”
레이첼은 에단의 말에 기도 안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다 예를 차리듯 팔을 들어 올리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곧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에단에게 닿았다.
“잘 알았으니 이만 나가 주세요, 각하. 보시다시피…….”
싸매고 있던 이불이 느슨해지며 레이첼의 상체가 드러났다. 드러난 흰 가슴께 여기저기 붉은 낙인이 열기를 머금은 채 남아 있었다. 그 광경에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단의 눈이 뒤집혔다.
“너…….”
그의 입에서 죽기 직전 짐승이 내지르는 신음이 나왔다. 쇠를 긁는 듯 괴이한 소리에도 레이첼은 끝내 차분히 말을 마쳤다.
“……제 꼴이 이래서요.”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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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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