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사내들
애블랑의 세 자매가 속한 리온 제국의 귀족 사회는 오래전부터 둘로 쪼개져 있었다.
모나타와 캐틀렛.
각 세력의 주축이 되는 두 가문은 모두 유서 깊은 공작가로 비등한 토지, 재산, 휘하 가문을 가지고 있었다. 황가 다음으로 고귀한 가문들인 데다 원체 가세가 비등하니 두 가문은 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숙명의 적수라 하나. 두 가문의 알력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닌 예부터 내려오는 리온의 역사였다.
‘증오스러운 모나타.’
‘혐오스러운 캐틀렛.’
수없이 반복된 미움의 역사 속에서 두 가문의 사이는 현재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카시우스 황제와 그 곁에 있는 두 여인의 관계 때문이었다.
‘나는 폐하의 곁 하나뿐인 황후입니다. 어떤 여인도 나보다 고귀할 수는 없습니다.’
앤 캐틀렛. 연한 푸른 눈이 우아한 그녀는 황후이자 캐틀렛 공작의 하나뿐인 누이동생이었다.
‘나는 폐하께 사랑받는 유일한 여인이에요.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폐하의 곁에 머물지 못하지요.’
아샤타 모나타. 주홍빛 머리카락이 매혹적인 그녀는 황제의 하나뿐인 정부요 모나타 공작의 하나 남은 여동생이었다.
언뜻 본다면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두 여인의 뒤에 있는 공작가가 아무리 비등하다고는 하나 황후와 정부의 싸움이라니. 애초에 시작조차 될 수 없는 다툼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두 여인을 둘러싼 속사정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황후라 해도 후처가 아닌가? 애초에 내 언니에게 지고 노처녀로 늙어 가던 여자야. 폐하께 눈길조차 못 받는 반푼이 황후 주제에 무슨!’
두 여인의 힘만 보건대 우세한 건 정부인 아샤타였다. 그녀는 앤 황후보다 젊었으며 아름다웠다. 게다가 아샤타의 죽은 언니이자 전 황후 아샬린 모나타는 황제가 너무도 사랑해 따라 죽으려 한 여인이었다. 황제는 아샬린의 핏줄이자 그녀를 꼭 빼닮은 아샤타를 귀애했다.
‘게다가 내 조카님이 폐하의 유일한 후계이니 황후는 빈껍데기에 불과해.’
황제는 정치적 이유로 앤을 황후로 들였지만 그녀에게서 후계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소생이 사랑해 마지않던 전 황후의 소생인 카샨 황태자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샤타는 죽은 언니와 조카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카샨 황태자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했다.
‘모나타 정도 되는 가문에서 정부를 내다니! 같은 공작가라는 게 수치스럽군.’
당연히 캐틀렛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황제의 뜻인데. 불만을 표출할지언정 황제의 사생활에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폐하께서 선택하신 여인이자, 돌아가신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핏줄을 보고 수치스럽다니! 그건 황가에 대한 모독이오!’
하지만 명예롭지 못한 것도 사실. 모나타와 캐틀렛은 서로에게 유리한 부분을 내세우며 싸움을 이어 나갔다.
자고로 애증에 기반을 둔 다툼은 그 무엇보다 골이 깊은 법. 당연하게도 싸움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각해졌다. 더불어 두 공작가를 주축으로 한 귀족 사회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만 갔다.
게다가 두 가문 간 다툼의 시초에는 전 황후를 포함한 귀족 사회의 구성원들 여럿이 변을 당한 ‘뱃놀이 사건’이 있었다.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둘로 나뉜 사람들은 상대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가증스러운 캐틀렛에 붙다니! 위선자 놈들!’
‘끔찍한 모나타를 따르다니! 배알도 없는 것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길다면 긴 세월 동안 두 세력의 다툼은 여전했다. 아니 미움과 증오는 더 심해졌다.
그러나 언젠가 변화는 찾아오는 법. 지긋지긋한 대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변화는 우습게도 모나타와 캐틀렛 두 가문의 핏줄로부터 시작됐다.
‘로지오 님은 어쩜 저리 훌륭하실까. 이제 막 스물이 되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로잘린 님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 뭇 사내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겠어요.’
모나타 공작의 후계인 로지오 모나타와 캐틀렛 공작의 하나뿐인 외동딸 로잘린 캐틀렛. 두 사람은 얼마 전 가문, 부모, 지위, 명예 등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깊은 밤중 사랑의 도피를 했다.
* * *
“하나만 더. 레이첼 네가 에단 마일런 후작과 다시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은 아니겠지?”
“어?”
레이첼은 아이작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와는 달리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무어라 답할 수 없었다. 에단과 그녀의 관계는 묘했다. 그 밤 이후 레이첼은 에단에게 먼저 만남을 청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를 만나러 오는 에단을 딱히 피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리로 가지. 특별한 공연을 한다더군.’
에단은 그녀에게 따로 만남을 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자연스럽게 레이첼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것저것 그녀가 가지고 싶어 하는 걸 사 줬으며 여기저기 그녀를 데리고 갔다. 입장료가 비싼 공연부터 예약하려면 석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당,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보석상까지. 그와 만날 때마다 볼이 터져 나가게 먹고 양손 가득 선물을 받은 레이첼은 찝찝함을 느꼈으나 에단을 물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주는 것들이 너무도 좋았기에.
“레이첼?”
“…….”
“왜 답이 없지?”
“…….”
제인의 눈초리가 다시 사나워졌다. 가라앉는 분위기에 로즈는 어버버하고 있는 레이첼의 팔을 쿡 찔렀다. 거짓말이라도 하라는 신호였지만 레이첼은 끝내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교제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때 같은 일은 절대 없어. 그와는 그냥…….”
“레이첼 애블랑!”
원치 않은 답에 제인이 소리를 높였다. 부채를 완전히 접은 그녀는 고개를 떨군 레이첼을 매섭게 봤다. 내리깔린 레이첼의 자색 눈에는 고집이 가득했다.
“세상에.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
“네 주제를 알아야지! 너 그가 누군지 모르니?”
“…….”
“마일런 후작은 캐틀렛 공녀님의 약혼자야! 캐틀렛가의 사위이자 장차 캐틀렛 공작이 될 사람이라고!”
“…….”
“너 같은 건 그의 정부도 못 돼. 기껏 해 봤자 그가 혼인하기 전 놀아날 상대밖에 더 될까? 그런데 어디서 겁도 없이 그와 어울려!”
“언니. 그만해. 다른 사람들이 보겠다. 레이첼. 너도 빨리 잘못했다 말해.”
로즈가 제인에게 속삭였다. 자매는 연회장 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구석진 자리라 한들 몇몇은 자매의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 나는…….”
“시끄러워! 어디서 계속 변명이야. 조금 전에도 말했지. 아버지와 네 형부는 아직 캐틀렛 공작 각하 밑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했어. 그런데 네가 또다시 그와 놀아나는 사고를 치면 각하께서 아버지와 내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시겠니? 맙소사! 그 일을 겪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제 2년이야! 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니?”
제인은 끝없이 레이첼을 꾸짖었다. 여동생에게 하기에는 가혹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호된 꾸지람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 울컥한 레이첼은 제인에게 덤벼들었다.
“로잘린과 에단의 약혼은 이미 깨졌어! 로잘린은 모나타가의 로지오랑 도망갔잖아. 두 사람은 이제 더는…….”
짝―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회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동시에 레이첼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언니!”
로즈가 재빨리 제인의 손을 잡았으나 레이첼의 뺨은 이미 붉게 물들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이쪽을 봤다.
“어리석은 것.”
레이첼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부여잡은 그녀는 필사적으로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그 사달을 내고 또!”
“…….”
“제 앞길을 스스로 막지. 멍청한 것!”
제인의 비난은 계속됐다. 그녀는 분을 주체하지 못한 듯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런 언니를 한 차례 노려본 후 몸을 홱 돌렸다.
“레이첼! 어디 가?”
로즈가 급히 레이첼을 불렀다. 그러나 레이첼은 걱정하는 자매를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벗어났다.
* * *
“언니 미워!”
다행히 황궁은 넓고 숨을 곳은 많았다. 레이첼은 손님들을 위한 정원에 숨어들어 홀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자존심 때문에 떨어지지 못한 눈물이 뒤늦게 방울방울 흘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끅끅거리며 소매로 얼굴을 문대자 연한 빛의 옷감이 금방 젖었다. 레이첼은 진한 빛으로 얼룩진 소매를 바라보다 그 밑에 자리한 팔찌를 봤다. 그녀의 눈 색과 어울린다며 며칠 전 에단이 선물한 자수정 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따위 것!”
괜히 짜증이 난 레이첼은 팔찌를 벗었지만 영롱히 빛나는 물건을 차마 던지지는 못했다. 정원은 따뜻한 계절에 맞게 꽤 울창했기에 팔찌가 잘못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쉽게 찾을 수 없으리라.
“개새끼! 나쁜 놈! 머저리!”
팔찌를 집어 던지지 못한 레이첼은 대신 팔찌를 선물한 에단을 욕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에 에단이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로 인해 혼난 것은 사실 아닌가. 그녀는 괜히 자리에 있지도 않은 에단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대는 여전하군. 레이첼.”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첼은 갑자기 들린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친 얼굴에 얼굴을 굳혔다.
웃으며 레이첼에게 인사한 이는 눈부시게 잘생긴 사내였다. 레이첼의 연한 백금발과 달리 황금을 녹인 듯 진한 금발과 그와 꼭 같은 색의 눈동자를 지닌 그는 선이 뚜렷한 조각과 같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거의 2년 만인가?”
사내의 이름은 카샨 카시우스. 그는 황제의 하나뿐인 핏줄이자 리온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로 황제 다음가는 고귀한 이였다.
“……황태자 전하.”
레이첼이 얼굴을 구기며 짓씹듯 사내를 불렀다. 쌀쌀맞다 못해 경멸이 묻어나는 목소리였건만 사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생글거렸다.
“여전히 어여쁘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좀 있지.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듣고 싶군.”
“여기서 쉬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먼저 물러날 테니 편히 쉬시지요.”
카샨은 반가운 듯 말을 이었지만 레이첼은 무례하게도 황태자인 그의 말을 싹둑 자르곤 등을 돌렸다. 그와는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줄은!’
“당장 멈추는 게 좋을 거야. 꼭 명령이라 말해야 할까?”
카샨이 급히 가려는 레이첼을 멈춰 세웠다. 레이첼이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질끈 물었으나 황태자라는 신분으로 하는 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얌전히 자리에 서자 카샨은 빙긋 웃더니 레이첼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여전히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군. 하긴 그래서 제법 귀여웠지, 그대는.”
“…….”
“오랜만이잖나. 그리 쌀쌀맞게 굴지 마. 그때도 말했을 텐데. 여자란 침대를 제외하곤 나긋나긋한 게 좋다고 말이야.”
긴 손가락이 레이첼의 턱을 두드리다 잡아 올렸다. 갑작스레 들린 고개에 레이첼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선명했지만 카샨은 힘을 빼지 않은 채 레이첼의 얼굴을 여기저기 살펴봤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바뀐 게 없어. 이 반반한 얼굴도 그렇고……. 아. 몸은 더 구미가 당기는군.”
빛나는 금안이 레이첼의 얼굴과 몸을 품평하듯 아무렇게나 훑었다. 어떤 배려도 없는 눈길에 레이첼은 모멸감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상대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요 그녀는 수많은 자작가의 여식 중 하나일 뿐이었다.
“소문을 듣자니 침대에서도 이제 제법이라지? 가르친 보람이 있어. 그런 말도 몰고 다니고 말이야. 하지만 썩 기분이 좋진 않아.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남의 손을 탔다는 말 아닌가.”
레이첼을 뚫어져라 보는 금안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어느 감정을 가졌든 카샨이면 끔찍이 싫었던 레이첼은 그의 얼굴을 외면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놓아 주세요.”
“…….”
“전 더는 전하의 장난감이 아니에요.”
냉랭한 말에는 제법 힘이 들어 있었다. 레이첼이 후들거리는 손을 힘겹게 올려 카샨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사내의 힘은 여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강했다. 그는 장난치듯 레이첼의 얼굴을 가볍게 흔들더니 스치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깐 나갔다가 왔더니 버릇이 나빠졌군. 재교육이 필요하겠어, 레이첼.”
“전 전하께 교육받을 처지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만 놓으세요. 아, 아프단 말이에요.”
“고작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대, 그때는 제법 얌전했던 거 같은데 말이야.”
“계속 이러신다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레이첼의 반항이 계속되자 웃고 있던 카샨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나머지 손으로 레이첼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에게 제 몸을 더욱 바짝 붙이곤 질척거리는 손길로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질러 봐. 하지만 소용없다는 걸 잘 알 텐데?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그대를 범한들 아무도 말리지 못해.”
레이첼은 자신감 넘치는 카샨의 말에 삐죽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물론 그는 그녀보다 훨씬 고귀했고 대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황태자라고 한들 황궁에서 귀족가의 여인을 함부로 범할 수는 없었다. 특히 보는 눈이 많은, 대낮의 연회 날이라면 더더욱.
‘개소리하고 있네. 여전히 저 잘난 맛에 살잖아. 미친놈이.’
전이라면 두려움에 제발 놓아 달라 빌며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레이첼 또한 귀족 사회의 생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타인의 시선임을 이제는 알았다.
“거기 누구……읍!”
레이첼이 고함을 질러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카샨의 손이 한 박자 빨랐다. 그는 레이첼의 입을 틀어막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영악해졌어. 겉은 여전한데 속은 그새 상했나 보군.”
“으브…… 읍! 읍! 읍!”
“알았으니 얌전히 좀 있어 봐. 나 참, 언제 이렇게 이를 세우는 짐승이 돼서는…… 윽!”
뾰족한 손톱이 카샨의 손등을 긁고 지나갔다. 레이첼은 카샨이 따가움에 힘을 빼기 무섭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명령이니 당장 거기…….”
“싫어요!”
도망가는 레이첼은 다람쥐처럼 재빨랐다. 카샨은 손을 뻗어 레이첼을 잡으려 했다.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그의 손에 감겼다가 한순간 빠져나갔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전하!”
사냥감을 놓친 기분에 카샨이 차가운 얼굴로 레이첼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순간 가까이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샨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전하! 지금……!”
“그만. 알았다. 폐하께서 찾으시는 모양이지.”
얼마나 그를 찾아다녔는지 시종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가여울 법도 했지만 카샨은 시종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푸른 관목 사이로 총총 사라지는 레이첼을 한 번 더 볼 뿐이었다.
* * *
“재수 없는 새끼! 언제 돌아온 거야? 몇 년은 더 거기 있을 거라더니.”
레이첼은 카샨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그를 욕했다. 일국의 황태자에게 하는 언사로는 매우 부적절했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을.
레이첼은 카샨이 매우 싫었다. 아니, 싫다는 말로는 그녀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혐오했다.
‘뭘 기대한 거지?’
‘설마 사랑한다 말해 줄 거라 생각했나? 이 내가? 가진 거라곤 고작 얼굴뿐인 그대에게?’
카샨은 그녀에게서 순수함을 빼앗아 간 이였다. 레이첼을 아는 이라면 네게 순수라는 게 있었느냐 코웃음을 치겠지만 적어도 레이첼은 그렇게 믿었다.
“요새 영 재수가 없네. 어째 만나는 인간들마다 미친놈들뿐이야.”
점술사라도 찾아가 봐야지 원. 레이첼은 근래 만났던 사내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니는 걱정이 되는 거니깐.’
그래도 재수 없는 이를 만난 탓인지 제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한층 누그러졌다. 어쨌건 제인은 핏줄이자 그녀를 돌봐 준 이가 아닌가. 게다가 제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레이첼은 제인에게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저 다가가 대화를 해 보자 다짐했다.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레이첼은 관목 사이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부은 뺨은 식히고 가야 했으니 천천히 걷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은 죄다 연회장에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정원은 한산했다. 레이첼은 오랜만에 온 황궁 정원을 유심히 봤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흐드러지게 핀 꽃부터 시작해 차이듯 많은 풀까지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냥 놓인 조각상 하나도 장인의 솜씨요 장미 덩굴이 자라나는 구조물은 금도금을 했다. 레이첼은 새삼 황궁의 돈지랄에 감탄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를 걸었을까. 작지만 우아한 가제보가 나타났다.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가 어찌나 탐스러운지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다가갈수록 진해지는 장미 향이 향기로웠다.
“어?”
가제보에는 선객이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 레이첼은 그림자에 가려진 아제프를 뒤늦게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애블랑 영애.”
아제프는 레이첼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레이첼을 보자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정중한 태도에 레이첼도 얼떨결에 허리를 숙였다. 음영 아래 짙어진 잿빛 눈이 그런 레이첼을 샅샅이 살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어요. 감사드려요, 아제프 경.”
인사 후 침묵이 내려앉자 어색해진 레이첼이 뒤늦은 감사를 전했다. 사실 당시 상황만 생각한다면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과묵한 기사에게 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닙니다.”
뤼드발렌 거리에서의 일을 입에 올리자 아제프가 냉큼 답했다. 제법 큰 소리에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날 일은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지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애블랑 영애.”
아제프는 레이첼이 놀란 듯싶자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레이첼은 그의 사과에 어색한 듯 웃었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서먹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봬요, 아제프 경.”
몇 번 눈을 깜빡인 레이첼이 결국 헤어짐을 고했다. 사교성이 제법 좋은 그녀였지만 아제프의 침묵에는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차라리 처음 보는 이라면 모를까. 눈물, 콧물 등 못 볼 꼴 다 보인 사내에게 친밀히 대하는 것은 철판을 깐 레이첼이라도 힘들었다.
“잠깐.”
레이첼이 고개를 까딱이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지금껏 침묵을 고수하던 아제프가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초조함이 가득했다.
“무슨 일……으악!”
레이첼은 또 무슨 일인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고개가 돌아간 순간 다리가 꼬이며 그녀는 자신의 하늘색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 세상이 크게 기울어짐과 동시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가제보의 하얀 천장이 보였다.
‘여신이시여!’
레이첼은 찰나의 순간 가제보의 계단이 천장과 같은 대리석 재질인 걸 기억하고 신을 찾았다. 황궁 연회에서 뒤로 넘어가 머리가 깨져 죽다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탁―
다행히 레이첼이 완전히 넘어가기 전 아제프가 그녀를 낚아챘다. 레이첼의 소맷자락을 잡은 그는 놀란 듯 레이첼만큼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안도한 레이첼이 한숨을 쉬려던 찰나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 일어났다.
찌익―
하늘하늘한 얇은 옷감의 소맷자락은 값을 깎은 만큼 바느질을 대충 한 것인지 비명을 내지르며 찢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얇은 소맷자락에 매달려 있던 레이첼의 몸은 이번엔 비명 지를 틈도 없이 넘어갔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레이첼은 눈앞이 뱅뱅 돌아감을 느꼈다. 하지만 큰 소리가 난 것에 비해 레이첼은 멀쩡했다. 그녀의 머리는 걱정처럼 깨지지 않았으며 몸뚱이는 조금 욱신거리는 걸 제외하곤 문제가 없었다.
“으윽…….”
그건 순전히 그녀를 껴안은 채 같이 뒹굴어 준 사내 덕이었다. 레이첼은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아제프를 불렀다.
“아제프 경!”
아제프는 기사답게 끄떡없었으나 부딪힌 몸이 아프긴 한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첼은 아제프에게 넌 괜찮으냐 물으려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기겁하곤 그의 품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둑한 밤 으슥한 관목 뒤라면 모를까, 벌건 대낮에 장미 향이 가득한 풀밭에서 함께 뒹구는 남녀라니. 아무리 사고였다지만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 날 꼴이었다.
“괜찮으세요? 하…… 하필 잡으신 게 이런 드레스라. 드레스가 오래된 모양이에요. 아니,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데. 왜, 아시죠? 저기 중앙 거리에 있는…….”
풀을 덕지덕지 묻힌 레이첼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사내 앞에서는 왜 이런 꼴만!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당황한 그녀의 입이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 내뱉었다.
“물론! 별 관심은 없으시겠지만 드레스를 거기서 지어서…….”
레이첼은 제 입을 막고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게 내 머리를 거쳐 나오는 말이 맞나? 생각하고 거쳐서 나오는 말이 맞나? 덜렁거리는 소매만큼 레이첼의 정신은 너덜너덜해졌다.
“손목이 아프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
“저번에 제가 손목을 잡아서 멍이…….”
그새 일어선 아제프가 제복에 묻은 풀을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그의 눈은 훤히 드러난 레이첼의 얇은 손목에 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레이첼은 울상을 짓다 말고 아제프를 따라 제 손목을 봤다.
비싼 약이니 고마워하라는 에단의 말은 재수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멍 자국은 옅어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은 자신도 신경 쓰지 않았던 손목을 챙기는 아제프를 새삼 다른 눈을 하고 쳐다봤다.
‘……제법 정상적인 남자가 아닐까?’
화려한 붉은 머리에 옅은 잿빛 눈. 꼼꼼히 살피니 퍽 잘난 사내였다. 첫 만남이 어그러져 그렇지 정상적인 만남을 가졌다면 분명 관심을 가졌을 얼굴이었다. 레이첼의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날은 특이한 경우였고 고지식해 보이긴 해도 일단 신사답잖아. 아이작 놈하고는 헤어졌으니깐 걸리는 것도 없고. 성기사인 게 좀 그렇지만 성소에서 쫓겨났다 하니깐 이참에 아예…….’
그러잖아도 레이첼은 저를 뜻대로 하는 사내들에게 질린 참이었다. 지긋지긋한 것들. 하지만 그렇다고 사내 만나기를 쉬고 싶지는 않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아름다울 때. 즐기자는 게 그녀의 신조였다.
“애블랑 영애?”
“네, 아제프 경.”
목표를 포착한 레이첼이 사근사근해졌다. 레이첼은 최대한 예쁘게 머리를 정돈하며 아제프를 마주 봤다. 창백한 얼굴에 유려한 콧대가 계속해서 보니 더욱 근사한 사내였다.
“……구두가 벗겨졌습니다만. 안 아프십니까?”
한참 아제프의 얼굴을 감상하던 레이첼은 그의 말에 그제야 밑을 내려다봤다. 하늘색 드레스와 맞춘 구두 한 짝은 어느새 아제프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다시금 민망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레이첼은 조금 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얀 스타킹을 신은 조그마한 발을 살포시 내보이며 눈웃음을 쳤다. 수줍은 미소가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사랑스러웠다.
“어머. 부끄러워라. 좀 신겨 주시겠어요? 아제프 경.”
“알겠습니다.”
아제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레이첼은 새빨간 정수리를 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가는 몸이 흔들리며 작은 손이 사내의 왼쪽 어깨를 짚었다. 레이첼의 오른발을 조심히 잡으려던 아제프는 갑작스레 닿은 손에 몸을 움찔거리며 레이첼을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균형 잡기가 힘들어서…….”
“괜찮습니다.”
허락을 받은 레이첼의 손가락이 은밀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을 괜스레 톡톡 움직이며 아제프를 마주 봤다. 아제프의 눈에 레이첼의 얼굴이 선명히 담겼다.
방긋 웃고 있는 레이첼은 순진무구해 보이면서도 은근한 색기가 있었다. 그녀는 모두 찬탄해 마지않는 백금발을 일부러 넘기며 손가락을 아제프의 목 쪽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은밀한 열감을 품은 채 장난질을 쳤다.
하나 그 비밀스러운 손짓에도 아제프는 고개를 똑 내렸다. 그는 레이첼이 제 목을 지분거리든 어깨를 만지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게!’
“저기…….”
괜히 오기가 생긴 레이첼이 아제프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고개를 들면 이번엔 실수인 척 뺨이라도 쓸어 볼 참이었다. 그러나 말을 채 던지기도 전 아제프에게 붙들린 레이첼의 오른발이 죄여 왔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레이첼은 인상을 찌푸리다 그만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악!”
다행히도 푹신한 풀들이 그녀를 받쳐 줘 아프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레이첼은 제게 고통을 준 장본인을 노려보기 위해 상체를 발딱 들어 올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레이첼을 넘어뜨린 당사자는 넘어진 그녀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녀의 발을 유심히 볼 뿐이었다. 작은 발을 꼼꼼히 살피는 눈길이 꼭 정신 나간 이 같았다.
“아제프 경!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오싹함을 느낀 레이첼이 붙들린 발을 빼내려 버둥거렸다. 아제프는 그제야 상념에서 헤어 나온 듯 레이첼을 봤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마땅히 취해야 할 사과나 행동 대신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것 좀…… 스타킹 좀 벗어 보십시오, 영애.”
레이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스타킹을 벗으라니. 이자가 미쳤나. 레이첼은 황궁 연회에 맞춰 의복을 꼼꼼히 갖춰 입고 왔다. 갖가지 속옷은 물론이요 리본 가터와 속바지, 코르셋까지 입었다. 당연하게도 스타킹을 벗으려면 여러 단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단계들을 거치면 그녀의 꼴은 홀딱 벗는 것과 같았다.
‘스타킹을 벗으려면 우선…… 아니지! 내가 침대도 아닌 곳에서 왜 이따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경! 무슨 말씀이세요! 스타킹을 벗어 보라니 그 무슨!”
레이첼은 첫 만남 때처럼 한바탕할까 하다 인내심을 발휘했다. 다른 사내가 말했다면 당장 침대로 가자는 말로 알아들었겠지만 상대는 성기사. 게다가 짧긴 했으나 레이첼이 보아 온 아제프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먼 이였다. 그래. 한 번 그 꼴을 보였음 됐지. 두 번은…….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러니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꺄아!!!”
그러나 이어진 아제프의 행동에 레이첼의 인내심은 뚝 끊겼다. 아제프는 뭐에 씐 사람처럼 레이첼의 발을 꾹 쥔 채 흰 스타킹을 벗기려 했다. 발을 감싸던 스타킹이 팽팽히 당겨졌다. 당황한 레이첼이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쭉 뻗었다.
퍽―
“윽!”
작은 발이 정확히 아제프의 턱을 후려쳤다. 급소를 맞은 그는 레이첼의 발을 놓고 비틀거렸다.
도망쳐야 해! 레이첼은 잠시라도 아제프를 멀쩡한 이라 생각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첫 만남에서 그가 얼마나 미친놈 같았는지 기억해 낸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레이첼은 아제프가 들고 있던 구두를 주워 들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균형이 맞지 않은 발이 불편했지만 당장 구두를 신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잠…… 잠깐!”
아제프가 급히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해괴한 그의 행동에 이미 겁을 먹은 레이첼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미친놈!!!”
물론 욕하는 걸 잊지 않은 채…….
* * *
레이첼이 쫓기는 토끼처럼 도망치고 있을 때 연회는 여전히 격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품위 있게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은 저마다 우아한 미소를 띤 채 담소를 나눴다. 물론 모조리 꾸며진 거짓이었지만.
사람들을 갈라놓은 선은 여전했고 조용한 전쟁은 시작된 참이었다.
“그 웃음으로 남쪽의 델 영지를 차지했다지요? 일개 정부가 델 후작 부인으로 불리다니 나 참 부끄러워서는……. 고귀한 공작가 출신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배웠지요.”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하사하신 목걸이 말입니다. 델 후작 부인이 고르고 남은 걸 선물하신 거랍니다. 세상에. 얼마나 우스운 일이에요?”
“그래 봤자 천박한 정부가 아닌가. 정부와 어울리는 꼴이라니. 하여튼 저쪽 인간들과는 상종을 못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이제 연치가 많으시니 줄을 대야 할 곳은 뻔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미래에 뜰 태양이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는 장님들인가?”
캐틀렛과 모나타. 각 편의 사람들은 서로를 비웃으며 작게 손뼉을 쳤다. 모욕적인 말을 뱉으면서도 모두의 얼굴에는 고상한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영지에 포도 농사가 잘되었다든가, 누구네 자녀가 혼인했다든가 같은 훈훈한 덕담이 오가는 줄 착각할 만큼.
그러나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이렇듯 둘로 나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세력이었음에도 당당히 대화를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에단과 아이작이었다. 외모, 재력, 권세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잘난 두 사내는 주변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함께 서 있었다.
“두 분은 오늘도 함께네요. 공작님들 밑에서 저렇게 지내시기도 쉽지 않을 텐데…….”
“아카데미 시절부터 교류하셨잖아요. 그리고 왜 그 일 때문에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실 테고…….”
에단 마일런. 그는 죽은 캐틀렛 공작 부인의 먼 친척이요 오랫동안 로잘린의 약혼자였다. 비록 지금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도망간 로잘린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다시 두 사람이 합칠 거라 떠들곤 했다.
그리고 아이작 바이허. 할머니로부터 고귀한 황가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모나타 공작이 제 딸자식의 짝으로 전부터 점찍어 놓은 사내였다. 사람들은 올해가 가기 전 그와 마들렌 모나타가 약혼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이렇듯 공작가와 가까운 사이의 두 사내는 어찌 보면 공작들 바로 밑에서 각 집단을 이끄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사이는 좋지 않아야 옳았다. 하지만 저 밑 말단 구성원까지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신기할 정도로 잘 어울려 다녔다.
흑발과 은발. 가진 머리카락 색조차 상반된 빛깔인데 저리 돈독하다니.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들은 진실로 절친해 보였다.
“우습지도 않아. 자네가 지금 나를 노려볼 처지인가?”
“좋게 말로 할 때 듣지? 어디에다 뒀어?”
하지만 그건 멀리서의 이야기요, 실상 둘의 분위기는 훈훈함과 거리가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웃는 낯짝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나오는 말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아까부터 말이 계속 뱅뱅 도는군. 에단,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레이첼을 어디에 숨겨 뒀나? 분명 오늘 연회에 참석한다 들었건만 보이질 않는군.”
“뻔뻔해서는! 아이작 네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하는 놈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나한테 덮어씌워? 그래도 친구라고 지금껏 봐줬더니…….”
두 사내는 레이첼의 행방을 두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기민한 정보책이 알려 준 바에 따르면 분명 레이첼은 오늘 연회에 참석한다 했다. 심지어 에단은 레이첼이 오늘 연회 때 착용할 자수정 팔찌도 선물했으니 그녀가 연회에 참여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애블랑가의 나머지 여식들뿐, 그들이 찾는 레이첼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단. 자네가 레이첼에게 보낸 내 편지를 중간에 가로챈 걸 모를 줄 아나?”
“증거 있나?”
“장난치지 말고 말해 주게. 난 진지해. 자네 덕에 레이첼과 일주일째 연락이 되질 않아. 이러다 그녀가 나와 헤어진 거라 생각하면 책임질 건가?”
에단은 아이작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친우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레이첼이 그와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멍청해서는. 그는 아이작이 냉철한 판단력으로 하는 사업마다 성공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이작하고는 정리한 건가?’
‘바이허 백작님이요? 그러고 보니 연락이 없네.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아서 다행……. 어머! 각하! 이거 좀 보세요. 남부에서 나는 사파이어는 색이 더 진하다던데. 크기는 작아도 빛깔이 너무 예쁘다. 제 머리색과 잘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게 보지 말고 그냥 말해, 사 달라고. 그리고 내가 묻잖나. 아이작하고는…….’
‘정말요? 그럼 사양 않고…….’
‘아니. 일단 아이작하고 어떻게 된 건지 말을 하라잖나! 이따위 것은 그 뒤에 말하고!’
‘뭐가 그렇게 궁금하세요? 바이허 백작님하고는 뭐…… 헤어진 거겠죠? 그보다 이거 귀걸이로 만들면 예쁠 거 같지 않아요? 크기가 딱…….’
손톱만 한 돌덩이보다 못한 관심이라니. 에단은 레이첼의 시큰둥한 얼굴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 레이첼에게 이것저것 많이 안겨 줬다. 사파이어부터 가지고 싶다는 모자, 드레스, 구두……. 덕분에 레이첼과 헤어졌을 때 에단의 주머니는 가벼워지다 못해 푹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그는 상관하지 않고 헤실거리며 귀가했다.
“……하기야 착각은 자유니깐 상관없나.”
“뭐라 했나?”
옹졸한 승리감에 도취된 에단은 히죽 웃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레이첼과의 대화를 술술 불고 싶었다. 그 애는 너한테 관심 없다! 넌 이미 눈 밖에 났다!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싸웠다 한들 아이작은 친우가 아닌가. 그것도 안타깝고 불쌍한 친우. 에단은 아이작의 팔을 툭툭 치며 위로했다.
“그러게 내가 진작 말하지 않았나. 그 앤 여우라고.”
“…….”
“자네가 당한 거야, 아이작. 잠깐 네 얼굴이랑 주머니에 관심이 있었겠지. 레이첼이 관심 있어 하는 건 뻔하잖아?”
아이작은 기가 막혔다. 저 승자 같은 태도는 무어란 말인가. 그는 기분 좋게 올라간 에단의 입을 쭉 찢어 버리고 싶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제가 보낸 편지가 제대로 가지 못한 건 에단의 훼방 때문이었다.
‘예. 확실합니다, 백작님. 아가씨께 제가 직접 전했습죠.’
아이작은 감히 주인에게 거짓을 고하고 도망간 하인 놈을 꼭 잡아 족치리라 다짐했다. 에단에게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돈만큼, 아니 그 배는 괴로움에 허덕이게 해 주리라. 바이허가 특유의 푸른 눈이 음습하게 빛났다.
“내가 이대로 당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단.”
“도통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묻지. 레이첼은 어디 있나? 오늘은 꼭 만나야겠네.”
아이작은 애써 분을 꾹 눌러 참았다. 어쩌겠는가. 당장 급한 건 자신이었다. 그러잖아도 뤼드발렌 거리의 일로 레이첼이 단단히 토라진 듯싶었다. 빨리 화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미 레이첼은 끝났다 생각한 관계였건만 아이작은 질척하게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었다.
‘딱 집안 수준만큼만 앙칼지면 좋을 텐데. 예쁜 만큼 쓸데없이 자존심이 높은 이니…….’
물론 자존심은 상했다. 사랑하는 연인이라 한들 레이첼과 그는 본질적인 신분이 달랐다. 큰 틀에서 보자면 귀족이니 같다 할 수 있었지만 글쎄……. 아이작은 레이첼과 자신을 단 한 번도 동일 선상에 놓은 적이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애정 관계에서는 일단 신사인 내가 져 줘야지.’
만약 다른 여인이 그리 굴었다면 노란 장미 한 다발을 보내고 깔끔하게 그만의 방식으로 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이작은 레이첼과 헤어질 수 없었다. 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마르고 잠을 설치는데 끝을 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짝 타들어 가는 속에 아이작이 한숨과 함께 에단에게 굽히고 들어갔다.
“하…… 내가 졌네, 에단. 내가 부탁하지. 레이첼을 보게 해 주게.”
이쯤 되자 에단은 슬슬 이상함을 느꼈다. 먼저 연회장에 도착한 아이작이 레이첼을 숨겼다 확신했건만 거짓을 말한다기에 친우의 표정은 심각했다.
“정말 네가 데려간 게 아냐?”
“내가 데려갔다면 이미 그녀와 단둘이 휴게실로 숨어들었겠지. 왜 나와서 보기 싫은 자네와 쓸데없게 말 섞고 있겠나? 그녀와 보낼 시간도 부족할 텐데.”
단둘이. 폐쇄된 휴게실이라. 그 말은 먼저 봤으면 숨겨다가 제가 홀랑 먹을 생각이었단 말 아닌가. 에단의 머릿속에 아이작의 밑에 깔린 레이첼이 그려졌다. 푹신한 소파에 누운 레이첼은 긴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레스를 걷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하얀 다리를 아이작이 붙잡으면 붉고 작은 입에서…….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에단은 순간 울컥해 아이작을 노려봤으나 은발의 신사는 멀끔하게 넘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릴 뿐 에단의 사나운 눈초리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 묻는 걸 보니 자네도 모르는 모양이군.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자네와 뭘 한 거지? 시간만 버렸군. 레이첼……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하…….”
“그러게. 그게 점잖 빼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는데. 이런 연회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그렇지. 레이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보통 때라면 저쯤에서 여러 놈한테 웃어 주고 있을 텐데…… 안 보이는 걸 보니 혹 벌써 어떤 놈하고 눈이 맞아…….”
두 사람의 머릿속에 평소의 레이첼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여러 사내를 홀릴 만큼 매혹적인 아가씨였다. 사내들이 있는 자리는 아예 나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레이첼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참여할 수 있는 연회와 파티는 모조리 참석함은 물론이요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연회장을 휩쓰는 그녀는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사내들도 꾈 만큼 어여뻤다. 한번 연회가 끝나면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사내만 수십이 넘었으니 그녀의 외관과 개방적인 성격은 이미 리온에서도 유명했다.
“이 망할 계집애가 또 누구하고 감히!”
“에단. 계집이라니. 제발 레이첼에게 그런 언사는 그만두게. 전에도 그렇고…… 듣고 있기 거북하군. 신사답지 않아.”
“계집애를 계집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하지? 그리고 그 계집애는 신사답게 행동해 봤자 소용없어. 겁을 주고 꾹 눌러 줘야 그나마 얌전하게 지내지. 아니면 제 처지도 망각한 채 망아지처럼 또 날뛸걸? 쓸데없는 것 같으니라고! 애블랑 자작에게 말해 꽁꽁 묶어 두든가 해야지!”
끝없이 나오는 계집 소리에 아이작이 한숨을 쉬었다. 에단, 그의 친구는 레이첼과 관련된 일이라면 과하게 흥분했다. 아이작은 에단이 꼭 다섯 살배기 아이 같다 생각했다. 왜 그런 아이들 있지 않은가. 좋아하면 할수록 못 괴롭혀 안달이 난 싹이 샛노란 사내아이들.
“에단. 레이첼이 어떤 위치에 있는 여자건 그녀는 엄연한 숙녀야. 그리고 숙녀는 자고로 신사를 좋아하지, 어린애처럼 떼쓰는 사내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아. 하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군. 그녀는 내 연인이니 모욕 말고 그냥 신경 끄게. 그게 자네 최선이야.”
“연인은 무슨……. 그럼 넌 신사답게 가만있든가. 난 찾으러 가야겠으니.”
“그건 아니지. 그녀를 찾는 건 당연히 내 몫이네. 그리고 방금 전 내 말 못 들었나? 레이첼에게 신경 쓰지 말란 말이야.”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는 와중에도 경쟁하듯 연회장을 샅샅이 훑어봤다. 혹여나 레이첼이 나타날까, 그도 아니라면 레이첼에게 구애하는 사내 중 당장 이 자리에 없는 이는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부질없었다. 당장 자리에 없는 사내는 아는 이만 수십이요 그중 태반은 레이첼에게 구애하는 사내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찾는 레이첼은…….
“급하게 집으로 가야 하다 보니 신세를 지네요. 저 때문에 연회도 제대로 못 즐기시고……. 죄송해요, 폴 경.”
“아닙니다. 아름다운 숙녀분께서 부탁하시는 건데 어떻게 거절할까요. 그리고 애블랑 영애와의 시간은 연회보다 수십 배는 값지지요.”
“어머! 기사님이 말씀도 잘하셔라. 그럼 다음에 제가 한번 뵈러 갈게요. 신세도 갚을 겸 식사 한번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미 잘생긴 기사 하나를 낚아채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는 중이었다.
* * *
“싫어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근신령을 내리세요?”
“네 언니에게 다 들었다. 감히 공녀님의 약혼자와 또다시 놀아나? 그동안 친 사고로 부족한 게냐! 응?”
“아니에요! 제인 언니가! 언니가 오해한 거예요. 전 후작님과 어울리지 않았어요!”
“어디서 거짓말이야! 네 거짓말이 어디 한두 번이냐? 매일 얌전히 있겠다고 말만 하지 눈만 떼면 밖에서 사고를 치니, 내가 모자란 너 때문에 밖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제가 밖에서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러세요? 전 맹세컨대 아버지께 해가 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애블랑 자작은 레이첼을 매섭게 노려봤다. 먼저 잘못을 한 주제에 저런 얼굴이라니. 게다가 감히 부모, 그것도 아비에게 대드는 딸자식이라! 용서할 수 없었다.
“이런 고얀 것!”
짝―
보수적인 리온 안에서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가부장적인 그는 자식, 특히 딸자식의 버릇을 고치는 일이라면 한순간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그의 손이 올라가기 무섭게 꼿꼿이 서 있던 레이첼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악!”
바닥에 쓰러진 레이첼의 꼴은 참담했다. 자작이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하얀 뺨은 금세 부어올랐으며 입술은 터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자작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정이나 아픔도 없었다. 그는 쓰러진 와중에도 고개를 쳐들고 저를 노려보는 레이첼이 못마땅했다.
“왜 때려요!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아악!!!”
레이첼이 악에 받쳐 비명을 질렀다. 독기 품은 보라색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한 번 손을 올렸으니 이제 말로 하자 생각한 애블랑 자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이 아비를 노려보는 게냐? 어디서 이런 게 나와서는!”
“잘못 없이 맞았으니 노려보지! 그리고 저를 태어나게 한 건 아버지니 탓을 하려거든 스스로를 탓하세요!”
“이…… 이 녀석이!”
자작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레이첼이 어처구니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가 레이첼에게 성큼 다가섰다. 어디 제대로 매질을 당해 봐야지. 자고로 자식은 무조건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하거늘. 그동안 오냐오냐 봐줬더니 여식 주제에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당장 회초리를 가져와! 내 오늘 여식을 단단히 교육해야겠다!”
자작이 하인에게 명했다. 제게 떨어진 명에 하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했다. 오랫동안 애블랑가에 있었던 그는 주인어른이 너무하다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연약한 한 떨기 꽃 같은 아가씨였다. 저 여린 몸에 손을 댈 때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가져오지 않고 뭘 하는 거야!!!”
하나 벼락같은 주인의 명 앞에서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하인은 결국 허리를 숙이더니 매를 가져왔다. 적당한 굵기의 나무 회초리는 반질반질한 것이 손을 많이 탄 듯싶었다.
매를 본 레이첼이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사나운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맺혔다. 그녀는 저것이 얼마나 아픈지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원망 따위 말아라! 다 네 교육을 위해서니!”
“그만하세요!”
매가 자작의 손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2층에서 누군가 뛰어 내려왔다. 창백한 얼굴이 병약해 보였으나 레이첼과 꼭 같은 보라색 눈이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귀부인을 발견한 자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부인…… 몸도 안 좋은데 침실에 있질 않고.”
“이리 소란스러운데 어찌 모를 수 있겠어요? 그보다 그거 내려놓으세요. 회초리라니! 체면 상하십니다.”
“그건 아니 되오. 저 아이는 혼이 좀 나야 해. 레이첼, 냉큼 이리 오거라!”
“안 돼요! 이 아이에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이러세요? 참으세요. 네?”
귀부인의 이름은 이비. 그녀는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귀족인 애블랑 자작과 결혼한 여인이었다. 애블랑가의 안주인이자 레이첼을 비롯한 네 아이의 어미인 그녀는 소싯적 제법 이름을 알린 미인이었다.
“부인이 매일 싸고도니 이것이 아비에게 이리 바락바락 덤비지. 비키시오! 오늘 내가 저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 놓겠소!”
“제발…… 흑. 저를 봐서라도…….”
“부, 부인.”
애블랑 자작은 이비의 등장에도 완강한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그녀가 처연한 얼굴로 눈물짓자 곧바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집안의 독재자인 애블랑 자작이 유일하게 약한 상대. 그건 바로 이비 애블랑, 그의 부인이었다. 그는 나이가 있음에도 여전히 고운 제 부인에게 쩔쩔맸고 이비는 그런 남편을 제법 잘 이용했다.
“레이첼이…… 이 착한 아이가 무슨 사고를 쳤다 이러세요.”
“부인이 몰라 그러오. 이 애가 친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 아오? 하루가 멀다고 여러 사내하고 어울리질 않나, 제멋대로 외박을 하질 않나. 이참에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집안 망신을 시키고 돌아다닐 거요.”
“한창때잖아요. 가장 아름다울 때 숙녀가 여러 사내에게 구애를 받는 게 뭐 대수라 그러셔요. 밖에서 늦을 때면 집에도 알려 오고……. 다른 집 아이들도 그러질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레이첼이 좀 곱답니까. 분명 원치 않아도 들러붙는 이들이 많을 테지요.”
“그러니 더 집 안에 두고 관리해야지! 얼굴이 예쁘단 이유로 밖을 돌아다니면 손이나 타는 법이오. 외관이 잘났다 하며 돌아다니는 여자치고 내가 깨끗한 것들을 못 봤지. 나는 내 여식이 절대 그런 소리 듣게 둘 수 없소!”
애블랑 자작이 생각하는 귀족 여인의 미덕은 이러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지만 몸가짐은 조신해야 했고 사내의 이름은 되도록 모를수록 좋았다. 교육은 적당히, 부인의 도리는 과하게 배워야 했으며 결혼 전에는 아비의 말에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다.
애블랑 자작이 생각하기에 레이첼은 모든 미덕을 어기고 있는 여식이었다. 제인의 반만 닮았어도 좋으련만……. 애블랑 자작은 첫째 딸인 제인과 레이첼을 비교하길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오. 저 아이가 언니인 제인만큼만, 아니 그 반만이라도…….”
애블랑 자작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제 가치관에 도취된 그는 이번에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귀족 여인의 미덕을 레이첼에게 제대로 일러 주겠다 결심했다. 그러나 이비는 애블랑 자작의 헛소리를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저도 그리 생각하셨어요?”
곱고 가는 목소리였건만 온도는 차가웠다. 핏대까지 세워 떠벌거리던 애블랑 자작은 달라진 부인의 목소리에 아차 싶었던지 말을 더듬었다. 그의 부인은 젊은 시절 아름다운 만큼 많은 구혼자를 거느리던 여인이었다.
“당…… 당신은 다르지.”
“뭐가 달라요? 자작님 말씀대로라면 저도 젊은 시절 손을 많이 탄 여자니 더럽다 손가락질당해야 옳겠군요? 저를 그리 생각하셨어요?”
“아니오! 절대 아니야!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소!”
“…….”
“내가 잘못했소. 화가 나 말이 잘못 나온 게지. 내가 실수했어.”
몇 마디로 승부가 갈렸다. 애블랑 자작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풀이 죽은 아비를 본 레이첼이 삐죽 웃음을 흘리며 이비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일부러 제 뺨을 어미에게 내보였다. 그제야 여식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이비가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
“애를 그새 때렸어요?”
병약했던 귀부인이 한순간 사라졌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은 애블랑 자작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만큼 사나웠다. 애블랑 자작은 레이첼을 노려보다 이비의 거친 숨소리에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그의 아내는 몇 번이고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에게 손대는 것만은 더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고.
하지만 괘씸한 자식이지 않은가. 다른 아비들이 그러하듯 가죽 허리띠로 내려친 것도 아니고. 애블랑 자작은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 그게……. 워낙 말을 안 들으니 교육 차원에서…….”
“이 머저리 같은 양반! 내가 뭐라 했지요? 또다시 레이첼한테 손대면 가만있지 않겠다 했지! 그런데 또 애한테 손을 대? 벌써 몇 번째야!”
“아니. 내 말도 좀 들어 보오. 그럴 만해서 그런 거요. 레이첼이 또다시 마일런 후작과 어울린다 제인이 일러 왔소. 다른 이도 아니고 이 아이의 언니가 일러 왔단 말이오. 부인도 알잖소, 후작과 엮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러잖아도 아직 캐틀렛 공작 각하의 눈에 들지 못하고 있는데 공녀님의 약혼자로 내정된 그가 레이첼과 놀아나면 내 처지가…….”
“시끄러워! 네가 무능한 걸 왜 애를 탓해? 이 구제불능아!”
자작은 손까지 모아 구구절절 제 처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따위 변명이 이비에게 통할 리 없었다. 화가 난 어미는 자식을 등 뒤로 숨긴 채 남편이라는 작자에게 삿대질을 시작했다.
“얘가 마일런 후작과 어울리는 것도 다 당신 탓이잖아. 어릴 때 그런 자리로 안 밀어 넣었으면 애가 후작이건 캐틀렛이건 그 인간들하고 엮일 일이 뭐가 있어? 평탄하게 잘 살 애를 거기로 밀어 넣은 건 당신이야!”
“아니 그건 다 저 잘되라고……. 저 아이 처지에 그런 기회가 없단 걸 잘 알잖소. 레이첼이 캐틀렛 공녀님과 아는 사이가 되면 나중에 그쪽 시녀 자리도 얻을 수 있고 혼인도 훨씬…….”
“입 닫아! 자식 팔아 성공하려던 주제에!”
“팔다니 말이 너무 심하오! 계속 말하지만 난 다 저 잘되라고 그런 거요. 레이첼 정도의 위치에 공녀님 말단 시녀 자리라도 들어가면 그건 영광이요, 잘하면 가문에 도움도…….”
“입 닫으라 했어! 남의 시중드는 자리가 뭐가 좋아? 남한테 고개 숙이는 자리가 뭐가 영광스러워 이 앨 그런 자리에 보내려 해! 우리가 못살아? 그런 자리에 안 보내면 굶어 죽어? 레이첼이 뭐가 모자라 또래 여자애한테 고개를 숙여 가며 시중을 들어야 해?”
“그건 당신 출신이! 집안이 천해서 그런 거요! 당신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내가 몸담은 이 사회에서는…….”
온갖 욕을 들은 애블랑 자작은 욱하는 심정에 저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냈다. 뱉고 난 후 아차 싶어 입을 재빠르게 닫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뭐?”
“이, 이비, 나는 그게 아니라…….”
“내 출신이…… 집안이 천하다고?”
이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조금 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서늘함에 애블랑 자작은 물론이요, 레이첼도 꼴깍 침을 삼켰다.
“그럼 천한 나와 결혼한 당신은 뭐예요. 천한 내 집안 도움 받은 당신 가문은 또 뭐야?”
이비의 삶은 애블랑 자작과 결혼 후 지독히 힘들어졌다. 아껴 주는 부모 형제와 살 적에 그녀는 곱고 귀하다는 소리만 들었다. 하지만 남편이 속한 귀족 사회는 평민인 그녀를 냉대했다.
‘천한 신부.’
‘얼굴로 순진한 귀족 청년을 꼬여 낸 천것.’
신혼 초와 그 후 몇 년 이비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명확했다. 당장 남편의 가족부터 그녀를 어떻게 대했나. 그들은 손자 에드가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녀를 아들의 정부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펑펑 써 댔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이비는 괜찮았다. 그녀는 제가 고른 사랑으로 인생이 힘들어질 것이라 예상했으며 고난을 꿋꿋이 헤쳐 나갔다. 덕분에 애블랑 자작은 그녀에게만은 제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귀족 사회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인정했다. 가녀린 외모와 다르게, 단단하고 속 깊은 성미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자존감이 이뤄 낸 반쪽 승리였다.
하지만 귀족 사회에서 자식들이 반푼이 귀족이라 차별받을 때면, 믿었던 반려가 그녀의 집안을 모욕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의 아비가 딸들에게 보수적이다 못해 학대에 가까운 사상을 강요할 때면, 어김없이 회의감이 몰려왔다.
견뎠다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비는 고단하고 서글펐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변한 듯 보였으나 결국 본질은 그대로인 남편을 봤다. 그녀의 화에 주눅이 들어 보인다 한들 이 시간이 지나면 이이는 또 이러겠지. 나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내 핏줄은 천하다 할 테고 자식을 위함이라 말하면서 자식에게 손을 올리겠지.
이러한 다툼은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화를 내면서도 기대를 했다. 서서히 변하고 있다 믿었다.
“패트릭 애블랑. 착각하지 마. 난 당신이 귀족이라 선택한 게 아니야.”
단단한 그녀도 한순간 모든 걸 놔 버릴 수 있었다. 벌겋게 부은 자식의 뺨을 도대체 몇 번 더 마주 봐야 하나. 그들이 천하다 손가락질한 그녀조차 부모에게 손찌검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귀한 딸은 왜 제 아비에게 이토록 모욕당해야 하나.
“난 당신보다 훨씬 좋은 선택지가 많았어. 우리 집보다 부유한 이에게 구혼도 받았고 당신 집보다 훨씬 고귀한 집안에 들어갈 수도 있었어. 아니, 애초에 당신네처럼 망해 가는 집안 따위 우리 집안에서 살 수도 있었지. 당신도 알잖아. 빚에 넘어가기 직전인 당신 작위를 누가 구명해 줬지? 우리 오빠잖아!”
“이비, 난…….”
“……더는 용서할 수 없어. 레이첼!”
심각해지는 부모의 싸움에 아픔도 잊고 있던 레이첼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미를 봤다. 이비는 조금 전까지 고함지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은 말은 어느 때보다 애블랑 자작을 떨게 했다.
“여기서 나가야겠구나. 로즈 데리고 나오렴. 당장!”
* * *
“어머니는 언제까지 여기 계시려는 걸까? 아까도 집에서 사람이 왔던데…….”
“뭘 걱정해. 아버지가 굶어 죽을 것도 아닌데. 이참에 아예 끝을 내시라지. 계속 생각해 왔던 거지만 아버지한테 어머니는 과분해.”
“하지만…….”
“야! 넌 그날 뺨까지 맞아 놓고 아버지를 감싸고 싶냐? 너 바보야?”
레이첼도 알았다. 잘못한 것은 아버지라는 것을. 하지만 부모의 싸움에 그녀는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제 일만 아니라면 그렇게 싸우실 분들이 아닌데. 별문제 없이 잘 사실 텐데.
‘형제 중에 내가 제일 문제인 건 뭐, 사실이니깐…….’
아비에게는 잘못이 없다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에단과 놀아나지 않았으며 아비와 가문을 욕먹일 짓은 하지 않았다 주장했다. 전부 제인의, 언니의 오해라 소리쳤다.
‘창부 같은 게!’
‘하긴 그렇게 몇 사내나 홀렸을지…….’
‘애블랑가를 보면 답이 나오는군. 여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모양이지.’
그러나 레이첼은 좀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실제 밖에서 듣는 소리 중에는 가문과 부모의 이름을 더럽혔다 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숙녀의 표본인 제인과 다르게 그녀는 조신한 숙녀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여우나 제멋대로 날뛰는 망아지, 심한 이들은 뒤에서 그녀를 창부라 불렀다.
레이첼은 자신의 별명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부모나 형제가 거론될 때면 그런 별명들이 싫었다. 폐를 끼치는 느낌이요 부모의 속을 썩이는 몹쓸 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동시에 바로 위 오라비와 언니가 바르게 자랐다 칭찬받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밖에서 무슨 말을 듣고 오신 게 분명해. 그러니깐 그러신 거야. 알잖아, 몇 개월 동안은 매는 물론이요 내가 외박해도 별소리 안 하셨어.”
“짜증 나! 넌 왜 계속 아버지를 이해하려 해?”
로즈는 자매의 답답한 소리에 고함을 빽 질렀다. 몇 개월간 개짓거리를 안 하면 뭐 하나. 한 번이라도 다시 하면 제자리인 것을. 레이첼이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녀를 이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로즈는 일부러 그 사실을 외면했다.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아, 몰라! 기껏 오기 싫은 데까지 같이 와 줬더니 계속 이럴 거야? 너 파티 좋아하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즐기기나 해.”
레이첼은 더 말하려다 그만뒀다. 하기사 이런 파티와 구질구질한 한탄은 어울리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조명 아래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남녀들이 손을 맞잡고 뱅뱅 돌고 있었다.
‘그래, 머리 아픈 일은 집어치워야지!’
여인들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을 보니 기분이 그나마 나아졌다. 레이첼은 오늘 제가 걸친 것들을 생각하며 가면을 고쳐 썼다. 뺨이 부어 연회에 갈 수 없다며 울음을 터뜨리자 어미의 집안에서 일부러 열어 준 가장무도회였다. 망치기는 싫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난 춤이나 추러 간다.”
푸른 기사복을 입은 로즈가 어서 가라 손을 흔들었다. 레이첼은 귀찮다는 듯 구는 자매에게 입을 삐죽 내밀고는 일어섰다. 붉은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은빛 가면을 쓴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빛이 났다. 작은 몸집의 그녀가 홀로 걸어 나가자 여기저기서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쏟아졌다.
‘가장무도회에서는 역시 모르는 사내가 제일이겠지?’
간만의 재미에 레이첼은 헤실 웃었다. 몇몇은 아는 이들이었지만 대부분은 누군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녀는 제게 손 내미는 사내들을 하나하나 가늠하다 훤칠하니 키가 큰 사내 하나를 발견하곤 눈을 반짝였다.
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얼굴 전체를 가린 사내는 가장무도회와 잘 어울렸다. 화려한 가면은 눈이 뚫려 있었으나 깊이 그늘져 눈을 볼 수 없었으며 입술조차 가린 탓에 표정도 가늠할 수 없었다. 누구는 음습하다 할 만큼 폐쇄적인 모습이었으나 레이첼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대충 걸친 듯싶은 무도복은 세상 정밀하고 우아했다.
‘분위기가 낯선데. 저런 은발도 잘 없고…… 혹 외국인인가?’
사내는 레이첼을 향해 허리를 숙이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일부러 머뭇거리는 척을 하다 도도하게 손을 내줬다. 큰 손이 레이첼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싶더니 한순간에 힘을 줬다.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사내의 품속으로 들어간 레이첼은 묘한 기대감을 가진 채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 거리면 가면으로 가린다 해도 외관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까워진 사내의 가면 뒤 눈동자를 본 순간 레이첼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속으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 * *
“꼭 처음 만났을 때 같군. 안 그런가?”
가면 뒤 황금빛 눈동자를 확인한 레이첼이 사내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더욱 세게 옥좨 오는 힘에 손은 제자리요 얇은 팔만 반동에 조금 출렁일 뿐이었다.
“……놓으세요, 전하.”
주변 시선이 있는지라 레이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현저히 작았다. 카샨은 저를 경계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첼을 보다 느긋하게 웃었다.
“저번 일도 그렇고 섭섭한걸. 그만 뻗대.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봐주긴 뭘 봐준단 말씀이세요? 계속 말씀드렸죠. 전 더는 전하의…….”
“아아. 그래. 장난감이 아니라고. 그래, 그대는 살아 있으니 장난감 따위는 아니지.”
카샨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레이첼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는 뜨거운 손으로 레이첼의 뺨을 쓸었다.
“그보다는 애완동물에 가까울 듯싶군. 내 꾀꼬리. 내 리첼.”
리첼이라는 호칭에 레이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샨은 그걸 애칭이라 생각하는 듯싶었지만 레이첼에게 그건 멸칭이요 모욕에 가까운 단어였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레이첼의 목소리가 커지자 마음 맞는 남녀끼리 딱 붙어 있는 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주변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 익숙지 않은 카샨은 불쾌한 듯 입매를 비틀었다.
“나 참. 확실히 수준이 낮긴 하군.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저리 대놓고 보는가.”
“가면에 가발까지 쓰고 있는데 전하께서 지나가는 놈팡이인지 황태자인지 어떻게 구별해요?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더니 다 헛수고였네.”
레이첼은 카샨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핀잔을 줬다. 세상에 저밖에 없는 줄 아나. 사람들이 모조리 저를 알아보게. 특정 단어에 힘이 꾹 들어가자 카샨의 눈에 황당함이 어렸다.
“놈팡이? 내게 한 말인가?”
“…….”
“정말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통 적응을 할 수가 없군. 내가 알기론 그대는 분명…….”
“사람이 2년 동안 안 바뀌면 그게 문제지 바뀐 게 문젠가. 하긴 뻔하지. 저 잘난 맛에 사는 건 2년 전하고 바뀐 게 없어. 지긋지긋하기는.”
이번엔 레이첼이 카샨의 말을 끊었다. 맹랑한 말에 카샨은 화도 내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예의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리 당당히 저에게 대들다니. 자신을 경애하고 두려워했던 소녀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나 그게 싫지는 않았다. 카샨은 그때처럼 저 버릇없는 것의 뺨을 내려칠까 생각하다 삐죽 웃었다. 바락바락 덤비는 꼴이 제법 귀여웠다. 그는 화를 내려던 생각을 고쳐먹곤 긴 손가락으로 레이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꼭 키우는 개에게 하는 것처럼.
‘오래 보지 않아 그런가. 나도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지.’
“내게 그런 언사는 좀 무례한 거 아닌가. 그대도 알 텐데. 조용히 있다마는 내가 지금이라도 명령을 내리면 여기 있는 네 가족 친지들은 물론이요, 사람들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걸.”
그래도 위신이 있었기에 카샨은 짐짓 진지하게 레이첼을 협박했다. 그만하고 얌전히 제 뜻을 따르라는 소리였다.
“전하께 드린 말씀이 아닌데요. 다른 분을 생각하며 혼잣말한 거랍니다. 착각하시면 곤란해요.”
레이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빠져나갔다. 누가 저한테 한 소리라 그랬나. 게다가 아무리 황태자라 하더라도 증거 없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함부로 핍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착각한 거다? 이제 거짓까지 말하는가?”
“……툭하면 협박이야.”
물론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면 또 몰랐다. 그는 황태자였으니. 하지만 그렇게 하려 했다면 이리 그녀에게 끈적하게 굴지 않을 터였다. 이미 뺨이라도 내리치고 돌아섰겠지. 카샨의 성미를 아는 레이첼은 그의 목소리에서 큰 위협을 찾지 못했다.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거야! 나이도 많은 게…….’
오히려 레이첼은 제 허리를 지분거리며 귀에 더운 숨을 불어넣는 카샨에게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이런 불필요한 다툼은 그만하지.”
“다툼이라 생각하셨다니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만하실 거면 이 손도 좀…….”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으니 말이야.”
“알았으니 손 좀 떼고 얘기하심이…….”
“내가 귀족들이 주최하는 가장무도회도 아닌, 일개 상인 가문의 연회에 온 이유는 단 하나야.”
“아, 그래. 멋대로 하세요. 추행도 멋대로 하고 말도 멋대로 하고. 미천한 내가 뭐라 하겠어. 잘나디잘난 황태자 전하신데.”
“내가 레이첼 그대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 해. 굉장히 영광스러운 제안일 거야, 그대 처지에.”
레이첼은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카샨을 흘겨보다 힘을 탁 풀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뭐라 해도 제멋대로 할 속셈이었다.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비위 맞추며 헛소리 좀 들어 주다 그때처럼 도망가야지. 레이첼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기회를 살폈다.
“그렇죠. 제 처지에 전하께서 제안하신다면 들어야 마땅하겠죠. 정말 짜증 나게…….”
“레이첼 애블랑. 내 리첼. 내 작은 새.”
“아 정말!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아까부터 왜 계속 그렇게 부르세요!”
“그대가 내 연인이 되어 줬으면 좋겠군.”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레이첼은 카샨의 헛소리에 궁시렁거리던 걸 멈추고 딱 굳어 버렸다.
이 미친놈이 무슨 저딴 기분 나쁜 농담을 하는가. 레이첼은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카샨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눈 맞추며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았다. 저 딴에는 오래 생각한 계획이 틀림없었다.
“당황스럽겠지. 이 내가, 리온의 황태자이자 그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고귀한 내가 이런 말을 했으니. 하지만 나도 오래 고민한 후 이야기하는 거야. 사실 저번에 그대와 마주친 후로 심란해 정신이 없었거든.”
“…….”
“물론 약혼이나 혼인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니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해. 바란다 해도 그대 신분에 그것까진 힘들어. 이미 알고 있겠지? 몇 달 후면 호프먼의 공주가 나와 혼인하기 위해 리온으로 온다는 걸.”
“…….”
“공주가 리온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모든 행사에 그대를 데리고 다니지. 내 연인이라 떠들고 다녀도 좋아. 물론 공주가 오면 공식적인 자리는 양보해야겠지.”
“…….”
“불쾌하겠지만 그녀에게 깍듯이 대해야 할 거야. 뭐라 해도 그녀는 그대보다 위에 위치할 여인이고 난 집안 다툼은 별로거든. 알잖나, 내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드신지. 그래도 약속해. 자리만 잡히면 바로 그대를 정부로 인정하지.”
카샨은 제 자비로움과 낭만적인 면모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막상 감동한 목소리로 사랑을 내지르며 그에게 안겨야 할 대상은 조용했다.
“혹 그때처럼 버려질까 그런 표정인가? 걱정하지 마. 일단 승낙만 하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않게 해 주지. 원한다면 내 이름을 걸고 서약도 써 주겠어.”
너무 파격적인가? 카샨은 고개를 기울여 레이첼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가면이 닿았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입술을 타고 레이첼의 떨림이 그대로 전달됐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 모양이군. 진정된다면 그때처럼 먼저 안겨 오겠지. 귀여운 것.’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레이첼의 떨림은 더욱 커졌다. 카샨은 혹 레이첼이 너무 큰 감동에 울음을 터뜨린 게 아닌가 살폈다.
“레이첼?”
레이첼은 울고 있지 않았다. 대신 아니꼽다는 듯 툴툴거리던 조금 전보다 더욱 그녀는 얼굴을 팍 구기고 있었다. 온갖 모욕을 받았다는 듯 눈초리는 날카로웠으며 아랫입술을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날 지경이었다. 카샨은 당황스러워졌다. 꼭 싫어하는 듯 보이지 않나. 초조한 티를 내고 싶진 않았기에 그는 짐짓 평이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부족한가? 욕심도 많아. 하긴 여인들이란 원래 그런 존재지. 그럼…….”
“…….”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아이의 미래에 관한 보장도 확실히 해 주지. 물론 공주에게서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날 테니 황가의 성을 물려줄 순 없어. 대신 내가 가진 다른 성을 하사하지. 제법 괜찮은 곳들이니 그대와 아이들도 필시…….”
물론 카샨은 레이첼에게서 아이를 볼 생각이 없었다. 적법한 태에서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또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정부의 아이 따위 귀찮고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저런 표정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아이라도 끌어와야 할 듯싶었다.
“…….”
“……바라던 게 아닌가?”
기껏 아이까지 들먹였건만 레이첼의 반응은 여전했다. 끝나지 않는 침묵에 카샨은 낭패감을 느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말을 끊고 레이첼에게 물었다. 자신이 말했던 것은 모조리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다. 물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긴 했으나 카샨은 그때의 레이첼을 똑똑히 기억했다.
‘가지 마세요, 전하. 버리지 마세요. 네? 지켜 주신다 하셨잖아요.’
제 눈치를 보며 발치에 매달렸던 것이 선했다. 가지 말라, 버리지 말라 애원하며 눈물 떨구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제가 더 귀엽게 굴게요. 떼쓰지도 않을 것이고 울지도 않을 거예요. 전하께서 내키실 때마다 다리도 잘, 잘 벌릴…… 흑.’
절절하다곤 하나 저에겐 하찮은 것이라 내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변하지 않을 감정이었다. 맹목적인 숭배와 구애. 레이첼은 그를 그렇게 따랐다. 그는 황태자이고 그녀는 미천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샨은 레이첼이 쌀쌀맞아졌을지언정 속은 바뀌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그녀는 그를 외면할 수 없는 소녀였다. 한때 그녀가 꾸던 꿈은 그의 곁에서 그의 아이를 낳고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인가.
가면이 미처 가리지 못한 레이첼의 턱은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카샨을 털어 냈다. 레이첼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카샨이 쉬이 밀려 났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깐…….”
레이첼이 제 가면을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금발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얼굴의 절반을 가리던 가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카샨은 제 심장이 순간 쿵 내려앉음을 느꼈다.
아치 모양으로 예쁘게 굽어 있던 눈썹은 신경질적으로 올라가 있었으며 보라색 눈은 지금껏 본 적 없는 혐오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카샨이 확신했던 애정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리첼…….”
카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이첼의 애칭을 부를 때였다. 그걸 신호로 부들부들 떨던 레이첼이 들고 있던 가면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보석들로 꾸며진 가면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평소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물건 던질 생각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렇듯 비싼 물건이라면. 그러나 레이첼은 뻔뻔하고 구질구질한 전 연인, 아니 신분만 높은 난봉꾼을 도저히 참아 줄 수 없었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가면을 카샨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꺼져! 이 망할 자식아!”
* * *
“으브……읍! 읍!”
덜컹거리는 마차의 반동에 맞춰 레이첼은 고래고래 소리치려 했다. 하나 입은 막혀 있음이요, 신음이라도 들어야 할 사람은 마차 안 어디에도 없었다.
“읍! 으브븝! 읍!”
최근 들어 납치를 많이 당했기에 레이첼은 이런 상황에 제법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하다 한들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특히 목이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죄를 지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꺼져! 이 망할 자식아!’
레이첼은 몇 시간 전 제가 지은 대역죄에 대해 생각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꽁꽁 묶인 채 시트에 고정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을 묶은 밧줄과 마차 시트 모두 지나치게 부드러워 피부가 쓸리지는 않는다는 것일까.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그런 사고를!’
아무리 싫어한다 한들 카샨은 황태자였다. 그것도 하나뿐인 황태자. 그게 나타내는 의미가 무엇인가. 차기 황제. 리온의 주인. 그런 이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한 것도 모자라 폭력을 행사했으니 레이첼의 목은 지금 당장 바닥을 구르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황궁 지하에는…….’
레이첼은 소문으로만 들은 황궁의 고문실을 상상했다. 머리를 사내처럼 짧게 잘릴 것이고 피부는 지져질 것이다. 손톱이 뽑힐지도 모르지. 다시는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할 테고…….
“흐읍…… 읍…… 흐으…….”
억울함과 두려움에 눈물이 펑펑 솟았다. 남은 가족들도 걱정됐다. 저 때문에 혹시 모두 잡혀 오는 게 아닐까. 감옥에서 만신창이로 만날 부모와 형제들을 상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보자마자 비는 거야. 잘못했다고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 해야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노려보던 황금빛 눈이 떠올랐다. 어쩌자고 건드려서는! 가진 지위에 비해 치졸하다 못해 옹졸한 인간이니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나기만 한다면. 다시 눈앞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레이첼은 제 목숨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그의 발에 입맞춤하겠다 다짐했다.
물론 그의 제안은 죽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하지만 정말 죽인다 하면 어떡하지? 눈 딱 감고 알겠다 해야 하나?’
마차는 레이첼이 울며 고민하는 동안에도 쭉쭉 달렸다. 마차를 끄는 네 마리의 말이 어느 순간 높은 담을 두른, 우아하기 그지없는 어느 저택 안으로 쏙 들어섰다.
“으븝?”
달리던 마차가 멈추자 고개 숙인 채 있던 레이첼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 * *
“여기 있습니다. 예전에 즐겨 찾으셨지요.”
“고마워요, 레널드.”
레이첼은 레널드가 가져다준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적당히 따뜻한 차는 은은하게 향긋한 것이 고급이었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마차 문을 연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레널드. 캐틀렛가의 노집사인 그는 레이첼이 아홉 살 때부터 만나 온 이로, 따뜻한 미소를 띤 친절한 노인이었다.
“오시는 길 실례가 많았습니다. 불편하셨지요?”
“불편하기보다는 궁금해요. 레널드. 왜 이렇게 부르셨어요? 캐틀렛가에서 부르는 건데 제가 도망칠 리도 없고…….”
“죄송합니다. 최대한 정중히 모셨어야 했는데 오시는 것도 비밀에 부치라는 명이…….”
레널드가 레이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살짝 굽힐 때였다. 두 사람의 뒤에서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널드.”
응접실 입구에는 딱딱한 표정의 중년 신사가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레이첼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공작 각하.”
“주인님.”
“자네는 이만 물러나지.”
중년 신사는 레이첼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레널드에게 손짓을 했다. 늙은 집사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레이첼을 훔쳐보곤 허리를 숙였다.
레널드가 떠난 응접실에는 레이첼과 중년 신사만 남았다. 레이첼은 저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한 중년 신사와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을 봤다. 귀한 장미목 재질의 바닥은 관리가 잘되었는지 윤이 났다.
“…….”
“오랜만이구나.”
자리에 앉은 중년 신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레이첼에게 앉으라든가 차를 들라든가 같은 의례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카우치에 지팡이를 비스듬히 세운 그는 시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칙 불붙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매캐한 향이 응접실을 메웠다. 차라리 계속 말을 하면 좋으련만. 중년 신사는 레이첼을 세워 둔 채 천천히 연기를 뿜었다.
“그 얼굴은 여전하구나. 지나치게 곱고…… 너나 네 가문에 과해.”
시가 한 개비를 다 피운 중년 신사가 오만하게 레이첼과 애블랑가를 깔봤다. 가문과 그녀를 얕잡아 보는 말이었지만 레이첼은 작은 찡그림도 한마디 반발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저나 제 가문은.
중년 신사의 이름은 루커스 캐틀렛. 그는 앤 황후의 오라비이자 모나타와 더불어 리온에서 가장 잘났다는 캐틀렛 공작가의 주인이었다. 반백에 가까운 나이에도 관리를 잘했는지 붉은 머리는 멀끔했으며 그 덕에 그는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하지만 깊이 팬 눈매에는 숨길 수 없는 연륜이 묻어났다.
“네 아비는 여전하더구나. 얼마 전에도 찾아와 손을 비비더군. 자작이라지만 그리 품위가 없어서야. 쯧!”
레이첼은 공작의 심기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알아챘다. 평소 그는 오만하긴 했으나 저렇게까지 대놓고 남을 비하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오늘 납치도 그렇고 혹 심기를 거슬렸는가. 레이첼은 침을 넘기곤 입안을 살짝 물었다.
“벙어리가 된 것이냐? 듣자 하니 이리저리 떠들고 다니길 좋아한다더니 어째 도통 말이 없구나.”
“…….”
“하긴 넌 예전부터 그랬지. 네 손안에 쥘 만한 이들에게는 방정맞게 굴고 나같이 네 속셈에 넘어가지 않는 이들에게는 입을 꾹 닫았지. 약아빠져서는…….”
차가운 말과 그에 못지않은 서늘한 낯에 레이첼은 얼어붙었다. 이것으로 그가 제게 화가 난 것은 확실했다.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레이첼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혹 각하의 심기를…….”
“말더듬이같이 굴지 말아라. 난 네게 빠진 사내가 아니니. 듣자 하니 별명이 여우라지?”
눈물이 핑 돌았다.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이런 모욕이라니.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는 지금껏 레이첼이 상대했던 이들과 달랐다. 그녀에게 뭘 요구하는 이도 아니었고 그의 말 한마디에 아비와 오라비의 앞길이 달려 있었으며 가문의 존망이 걸려 있었다. 레이첼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죄지은 이처럼 고개 숙이는 것 외엔 없었다.
레이첼이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고만 있자 내내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충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앉거라. 이야기는 해야겠지.”
“……감사합니다.”
집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인 카우치가 이리 불편할 수 없었다. 레이첼은 공작이 가리킨 자리에 앉으며 떨떠름히 감사를 전했다. 공작은 그 감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바로 제가 할 말을 했다.
“고작 너 따위를 오래 볼 것도 아니고. 짧게 말하마. 주제도 모르고 왜 그러는 거냐?”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는 척 말아라! 마일런 후작! 에단! 그 아이 말이다.”
공작이 카우치 손잡이를 내리쳤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레이첼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고함과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공작의 미간이 한껏 파였다. 그곳에 모인 주름과 파란 눈엔 숨길 수 없는 경멸과 분이 있었다.
“저, 저는…….”
레이첼은 달달 떨리기 시작한 손을 소매로 숨긴 채 목소리를 내려 했으나 두려움이 너무 큰 탓인지 목소리는 나오다 말았다.
“모른다 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 애한테 왜 접근하는 거냐? 역시 돈 때문이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레이첼은 아비에게 뺨을 맞은 일을 떠올리며 손을 꽉 쥐었다. 아비는 알고 있었던 거다. 더 말이 나왔다간 위험할 것을.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각, 각하. 오해세요. 저는 마일런 후작과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오해라?”
“예. 오해십…….”
레이첼은 해명을 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공작은 에단과 그녀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레이첼의 용기가 무색하게 공작은 호통을 쳤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 레이첼을 가리켰다. 빛에 반사돼 반지에 새겨진 캐틀렛가의 문양이 사납게 번쩍였다.
“괘씸한 것! 너보다 신분 높은 사내들과 놀아나니 네가 그 위치인 줄 아는 게냐.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해!”
“…….”
“네가 그 아이 침대로 기어들었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아? 게다가 하룻밤 상대로 지냈다는 것도 용서 못 할 일인데 그 아이와 거리에서 만나?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보석도 받아 냈다지? 천박하고 더러운 것 같으니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단과 잠자리를 했으며 그에게 선물을 받았으니. 그러나 그 일련의 과정에 그녀의 의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가만히 있던 그녀를 납치한 것도 에단이요,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것을 무시한 것도, 거리에 있던 그녀 앞에 멋대로 나타난 것도 에단이었다.
억울했지만 레이첼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해 봤자 돌아올 것은 더한 모욕이요, 괘씸죄만 추가될 것이었다.
공작의 입장에서 에단은 잘못한 게 없었다. 천박하게 몸을 비벼 그를 유혹한 레이첼이 더러운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을 몇 년 전에 겪은 레이첼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감내하는 것뿐이었다.
레이첼을 노려보며 손가락질하던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세워 둔 지팡이를 든 그는 당장에라도 레이첼을 후려칠 듯 지팡이를 휘둘렀다. 나무 끝 쇠붙이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내가 2년 전에 뭐라 했느냐. 후작 곁에 알짱거리지 말라 했지! 감히 그 반반한 얼굴로 에단 그 아이에게 꼬리를 치더니 로잘린을 울리고 결국 오늘 이 사달을 만들어!”
“…….”
“지금까지는 넓은 아량으로 봐주려 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로잘린, 내 불쌍한 딸아이는 스스로 집을 나갔으니 그 책임을 져야지.”
“…….”
“하지만 내가 조용히 있다 한들 널 용서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로잘린이 기어코 도망친 이유가 무어냐. 너같이 하찮은 여자에게 약혼자의 마음을 뺏기고 슬픔에 잠겨…… 그 여린 마음이 무너지고 종국에는 삐뚤어져서 모나타와 도망을 친 것이 아니더냐!”
로잘린. 레이첼의 잘난 옛 친구이자 캐틀렛 공작의 하나뿐인 외동딸. 레이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여인.
레이첼은 맹세컨대 로잘린의 도망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로잘린과 에단의 문제가 저 때문이라니. 두 사람 때문에 다친 건 오히려 레이첼 그녀였다.
‘약속해, 레이첼. 내겐 너뿐이야.’
‘걱정 마, 레이첼. 난 그에게 관심 없어.’
공작은 과거에도 지금도 모든 걸 레이첼 탓으로 돌렸다. 끝나지 않는 추궁에 레이첼은 쥐었던 주먹을 폈다. 내가 얼마나 더……. 허탈했다.
“아비부터 시작해 깡그리 없애 버릴 걸 내 집에 머물렀던 정을 생각해 봐줬더니 또 똑같은 짓을 해?”
“…….”
“너 같은 건 다 내 딸을 위해 들인 거다. 같이 먹이고 교육한 건 천한 너를 위함이 아니라 귀한 내 딸을 위한 것이었어! 그런데 감히 네년 따위가 내 가여운 딸의 짝을 넘봐?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공작의 모욕은 계속됐다. 발발 떨며 고래고래 고함치는 그는 체통도 버리고 온갖 욕을 퍼부었다. 공작이라고는, 캐틀렛가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때랑 똑같은 말인데도 참…….’
지독한 멸시에 레이첼은 가슴 어딘가가 칼로 그이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약한 것인지. 저런 말은 듣고 들어도 항상 괴롭고 아팠다.
“배은망덕한 것!”
“…….”
억울함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지만 레이첼은 끝내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가 얌전히 있자 어느 정도 감정을 푼 공작도 서서히 진정됐다. 그는 직각으로 세웠던 지팡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카우치에 털썩 앉았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
“한 번 더 에단 그 아이와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네 집안과 아비를 가만두지 않겠다. 물론 너도 마찬가지다.”
“…….”
“농담이 아니니 똑똑히 새겨들어. 지금은 앞에서나마 숙녀 소리를 듣겠지? 계속 내 말을 어긴다면 그 숙녀 소리 앞에서건 뒤에서건 못 들을 줄 알거라.”
“…….”
“하긴 얼굴 하나만은 쓸 만하니 거리에서 빌어먹어도 살 만할 테지. 아니면 내가 혼처를 주선해 주랴? 후처 자리에다 나이는 내 아비뻘이다만 네가 좋아하는 돈은 잔뜩 안겨 줄 게다. 물론 그 달은 몸은 다른 사내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희게 질려 있던 레이첼의 얼굴이 이제 희다 못해 파랗게 변했다. 공작은 협박과 모욕을 동시에, 그것도 아주 악랄하게 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며 레이첼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흐…… 흐읍…… 읍…….”
끅끅 울음을 참는 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레이첼이 우는 꼴을 본 공작은 그제야 만족스러워하는 낯빛을 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인을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울린 건 비열한 짓이었지만 그는 흡족했다. 감히 내 딸을……. 레이첼이 섧게 우는 걸 실컷 구경한 공작이 말했다.
“그런 걸 원하느냐 묻지 않느냐. 답을 해.”
레이첼이 흠뻑 젖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넘치는 눈물은 소매로도 감당되지 않았다. 그쯤이면 넘어가 줄 수도 있건만 공작은 계속해서 발을 탁탁거리며 노기를 드러냈다.
“감히 내 앞에서 무슨 추태냐. 똑바로 답하거라. 아니면 당장에라도 네 아비에게 연통을 보내겠다.”
“아, 아닙…… 흑…… 아닙니다, 각하.”
“그게 아니지. 일단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빈 다음 원치 않는다 공손히 답해야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 내 제안 아니냐. 로잘린과 함께 예절 교육을 받았다 들었는데 형편없어. 하긴 아무리 같은 교육을 받았다 한들 로잘린과 비할 순 없겠지. 애초 태생이 다르거늘…….”
공작은 레이첼이 무릎을 꿇고 제대로 답을 하기 전까지 봐주지 않았다. 온갖 감정에 울음을 그치기 힘들었던 레이첼은 결국 장장 두 시간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긴 시간 동안 공작의 발치에는 레이첼의 눈물과 피우다 만 시가 여러 개비가 쌓였다.
“여전히 형편없지만 그만하면 됐다. 레널드, 이 아이를 당장 내보내게. 내가 말한 이를 같이 보내 배웅하게 하고.”
“……감사합니다, 각하.”
한참 만에 자비를 베푼 공작이 일어섰다. 그는 응접실을 나가는 순간까지 레이첼을 못마땅한 듯 노려봤다.
“타시지요.”
공작저를 나올 때 레이첼은 올 때처럼 입이 막히거나 시트에 묶이지 않았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몸과 마음은 자연히 고요해졌다.
* * *
가랑비였던 것이 죽죽 빗줄기가 그이는 소나기로 바뀌었다. 마차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레이첼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저를 노려보는 여자를 발견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로잘린의 유모로 그녀는 레이첼을 매우 싫어했다.
“내리십시오.”
레이첼은 처음 로잘린의 유모가 저에게 왜 따라붙었나 의아했으나 여자가 내리라 문을 여는 순간 공작이 왜 그녀를 저에게 붙였는지 이해했다.
“각하의 명이십니다. 애블랑 영애를 적당한 곳에 내려 주라 명하시더군요. 걸으면서 반성 좀 하시라고요.”
여자가 내리라 한 곳은 건물 하나 없는 오솔길로 비 피할 장소는 물론이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내리라니.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비가 심해요. 적어도 비를 피할 곳에는 내려 주세요.”
“여기가 적당합니다. 내리시지요. 아니면 마부를 시켜 끌어내라 할까요?”
여자의 눈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레이첼은 저를 미워하는 여자에게 한마디 할까 하다 조용히 일어섰다. 차라리 비를 맞더라도 빗속을 헤쳐 나가는 게 낫지 공작에 이어 로잘린의 유모에게까지 저자세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 조심히 잘 살펴 가십시오.”
탁―
레이첼이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문이 닫혔다. 여자는 창밖으로 비 맞는 레이첼을 웃으며 구경하다 커튼을 홱 쳤다. 마차가 곧 레이첼의 옆을 지나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재수 없기는…….”
평소였다면 상대도 사라졌겠다 욕이라도 한번 했겠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레이첼은 조용히 읊조리곤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비는 야속하게도 더 거침없이 퍼붓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비가 슬슬 무서워졌다. 비에 젖어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가 그녀의 체온을 앗아 가고 있었다.
‘나무라도 찾아야…….’
파래진 입술을 깨물며 레이첼은 두 손을 맞잡고 비볐다. 축 처진 머리카락이 무거웠다. 레이첼은 눈으로 계속 들이치는 비를 막으려 눈꺼풀을 깜빡였다.
“흐윽……. 나 이러다…… 흑…… 정말 죽는 거 아냐?”
곧 눈꺼풀조차 비에 젖어 둔해졌다. 레이첼은 계속 걸음을 옮겼으나 길에는 비 피할 나무 하나 없었다. 그녀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제 얼굴을 적시는 걸 느끼며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 따위 상관할 바 아니었다.
“어머니…… 흐윽. 언니…… 로즈…… 흐아앙.”
“레이첼!!!”
레이첼이 가족을 찾으며 울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히잉 하는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를 찾는 소리가 났다. 딱 필요할 때 찾아온 희망에 레이첼은 곧바로 소리가 난 쪽을 봤다.
“레이첼!!!”
목소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멀리서 말을 탄 이가 보였다. 비로 인해 시야가 흔들리긴 했으나 단단한 사내의 인영에 레이첼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여기!”
레이첼을 발견한 것인지 사내가 이랴 하며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레이첼은 살았다는 기쁨에 방방 뛰며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인영이 가까워지며 말 위 사내의 형체가 드러남에 따라 레이첼의 표정은 굳어지더니 종국에는 쏟아지는 비만큼이나 싸늘해졌다.
“레이첼…….”
말의 더운 콧김과 함께 도착한 그녀의 구원자는 지금 당장 빗속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이였다.
* * *
에단은 말에서 급히 내렸다. 코트와 검은 머리는 레이첼의 드레스만큼 푹 젖어 있었다. 다만 차가워진 레이첼의 몸과 다르게 그의 몸은 급히 달려온 열기로 뜨거웠다.
“괜찮나?”
에단은 즉시 레이첼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채곤 여기저기 살펴봤다. 고삐를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손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괜찮나 묻잖아. 응?”
비로 축 처진 머리카락 아래 수려한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하였다. 검은 눈은 레이첼의 여기저기를 살피느라 바빴고 큰 손은 제 머리카락 대신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참이었다.
탁―
알 게 무어란 말인가. 레이첼은 안절부절못하는 손을 거세게 쳐 냈다. 꼴도 보기 싫어! 눈가가 시큰거렸지만 그녀는 꾹 참으며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그리고 한 발 그에게서 떨어졌다.
에단은 레이첼의 공격적인 반응에 잠깐 주춤했다. 하나 이내 무언가를 짐작했는지 다시 먼저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레널드에게 들었다. 아저씨께서 네게…….”
“듣기 싫으니 꺼져!”
거친 말이었으나 에단은 평소처럼 레이첼에게 무례하다던가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코트를 벗어 레이첼 머리 위에 씌우려다 이내 코트가 젖었음을 깨닫고 레이첼의 어깨로 손을 가져다 댔다. 파란 레이첼의 입술을 본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말에 태워 비를 피할 심사였다.
“일단 가. 가서 이야기하자.”
“싫다고!”
레이첼이 어깨를 뒤틀며 또다시 한 발 물러났다. 빨리 비를 피해야 할 터인데. 에단은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 말고 한숨을 쉬며 다시 인내심을 발휘했다.
“로잘린 때문에 예민하신 거 알지 않아. 화가 나더라도 네가 좀 참…… 아니다. 일단 가자. 여기 더 있다간 정말 병 걸려.”
아이를 어르듯 달래는 목소리에도 레이첼은 고집을 피웠다. 내가 왜 그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공작의 앞에 꿇은 채 모욕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모조리 이 사내 탓이었다.
“내 몸에서 손 떼!”
레이첼은 제가 당한 수치의 원인에게서 도움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 엮이면 무슨 일을 겪으려고. 끝없이 내리는 비에도 사내를 향한 온갖 감정은 쓸려 내려가지 못한 채 뭉쳐 응어리져 있었다.
“고집 피우지 말고! 당장 이리 와!”
레이첼이 또다시 저를 떨쳐 내자 에단의 입에서도 큰소리가 나왔다. 버럭 내지르는 목소리는 빗소리 사이에서도 선명했다.
레이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에단의 눈치를 살피지도 몸을 움찔 떨지도 않았다. 에단은 그런 레이첼을 잠시 노려보다 있는 힘껏 버티는 레이첼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싫다잖아!”
“윽!”
힘으로 도통 당할 수 없자 레이첼은 이를 세웠다. 손목에 박히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에단은 저도 모르게 레이첼을 털어 냈다.
“너!”
에단의 얼굴이 흉흉해졌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는 서서히 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레이첼을 들쳐 업을까 생각하다 레이첼의 눈을 보고 입술을 물었다. 보라색 눈에는 저를 향한 증오와 미움만 있었다.
내가 이 빗속을 어떻게 왔는데. 어떤 마음으로 왔는데. 순간 울컥 원망이 솟았다.
“레이첼 애블랑!”
“…….”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순순히 대해 주니 만만하게 또 기어오르지!”
내가 저를 어찌 생각하는데! 에단은 손목에 난 잇자국을 보다 노성을 내지르며 레이첼의 양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 계집애는 전부터 그랬다. 봐주면 방자하고 주제넘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에단은 원래 하던 대로 지위로 찍어 누르마 다짐했다.
“네 그 알량한 자존심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비도 오는데 내가 한낱 자작가 영애 때문에 여기 계속 이러고 있어야겠나? 응?”
에단의 말에 레이첼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이글거리던 보라색 눈은 급격히 그늘졌으며 분으로 솟았던 눈썹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이리로 오느라 얼마나……!”
“그래서요?”
“뭐?”
“제가 그걸 알아야 해요?”
에단은 그제야 레이첼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차분했으며 공대도 돌아왔다. 하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각하께서 이리 오시든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든 제가 그걸 알아줘야 하느냐고요?”
“너…….”
“아! 알아줘야 하지. 그 대단하신 마일런 후작 각하께서 직접 자작가 여식을 데리러 행차했는데 알아줘야지. 이렇게 달려왔는데 모르면 안 되지.”
“그만해.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걸 알잖나.”
“몰라봬서 죄송해요. 아니지, 이렇게 사죄드리면 안 되나?”
“그만하라 했어.”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공작 각하께서 그러시더군요. 제가 예의를 모른다고. 윗분들께는 이리하는 게 옳은 거라죠?”
레이첼은 몸을 비틀어 에단의 손에서 빠져나오더니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 에단은 질척해진 바닥에 내려앉은 레이첼을 보다 인상을 구겼다.
‘레널드 님의 급한 전언입니다!’
이런 꼴을 보려던 것이 아니었다. 처음 소식을 듣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혹여나 사고라도 당하면, 얼마 전처럼 이상한 놈들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하나 걱정되는 마음에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채 앞뒤 재지도 않고 말을 달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넌 왜 그런 얼굴인가. 왜 나를 미워 죽겠다는 듯 노려보나.
“무릎까지 꿇고 사과드렸는데 왜 그러세요? 왜? 그때처럼 다리라도 벌려 드려요?”
“넌 날 도대체 뭘로…….”
“각하께서 제게 이러시는 거야 뻔하죠. 버릇없고 난잡한 계집애 한번 품어 보시겠다는 거잖아요. 아니면 그날처럼 입으로라도 해 드릴…….”
“그만!!!”
에단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레이첼과 시선을 맞췄다. 바지와 코트 할 것 없이 진흙이 튀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지 몰라서 이래?”
충동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에단은 그만 빈정거리라 소리치려다 말고 애원하듯 레이첼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마음이 욕정에 비견되다니.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기적이야! 알지 않아? 내가 왜 이러는지! 눈치 빠른 네가 못 알아챌 리 없잖나!”
레이첼이 놀란 듯 에단을 응시했다. 계속 바락바락 소리나 지를 줄 알았더니 갑자기 왜……. 당황한 그녀가 에단에게서 손을 빼내곤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소나기 때문에 질척해진 진흙투성이 바닥이 보였다.
“내가 왜 네게만 이리 무르겠어! 왜 이리 달려오겠어! 고작 네 몸 때문에 그런다 생각하나?”
“…….”
“이미 알잖아! 나는 너를…….”
에단은 말을 하려다 말고 웅얼거렸다. 참 뱉기 힘든 말이었다. 내가 널 사모한다. 한낱 자작 영애인 널 내가…….
“……좋아한다. 한 번 흐지부지 끝났지만 그래도 난 네가 다시 내게로 왔으면 해. 그때처럼 내 곁에 네가 있길 바란다.”
에단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부끄러웠지만 한순간이리라. 계속 이 사내 저 사내 옮겨 다니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자존심이 좀 망가지면 어떠랴. 아이작의 말대로 좋아하는 여인이 아닌가.
‘차라리 이참에 아예 끝을 보고 내가 차지하는 게 낫지.’
에단은 제가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가 누구인가. 에단은 자신이 리온에서 가장 잘난 젊은 사내 중 하나라 자부했다. 그런 자신이 고작 자작 영애에게 먼저 고백한 것도 우스운데 거절당하다니.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웨딩 아치를 통과하는 저와 레이첼이 있었다.
레이첼이 더러운 길바닥에서 시선을 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확신에 찬 에단의 표정을 본 그녀가 버석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에는 허탈감과 함께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 낸 레이첼이 시린 눈을 했다.
“설마 제가 그때처럼 고개 끄덕이길 바라시는 건 아니시죠?”
직접적인 거절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표정과 비꼼이 가득한 어투는 분명 거절을 말하고 있었다. 에단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곤 한 번 끔뻑였다.
“너 지금…….”
“각하. 그때를 입에 올리시면서 저한테 이러실 수는 없으세요. 각하께서 제게 이러시면 욕먹는 사람이, 다치는 사람이 정말 누군지 몰라 이러세요?”
에단은 레이첼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과거 그들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파국을 맞이했다.
‘……지저분한 계집애. 다시는 내 이름 부를 생각도 마. 너 따위에게 격식 없이 대한 게 문제지.’
그 끝은 네 행실 탓 아닌가! 에단은 제게 원망하듯 내뱉는 레이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보고 이기적이라 하셨죠. 하지만 진정 이기적인 건 각하세요!”
“…….”
“그때도 분명 이러셨죠. 괜히 몸이 달아…… 한 번으로는 부족하세요? 다시 제가 그 꼴이 되길 바라시는 거예요?”
“네가 누굴 탓해!”
그때가 떠오르자 감정이 격해졌다. 에단은 저와 눈 마주치면서도 다른 사내에게 안겨 있던 레이첼을 기억해 내곤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그때까지 무릎 꿇고 있던 레이첼도 따라 일어서더니 원망스레 그를 올려다봤다. 거센 빗소리 사이로 멀리서 치는 천둥소리가 섞여 들었다.
“난 분명 지켜 주겠다 했다! 그런데 먼저 떠난 게 누구야? 너잖나!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사내에게 간 게 누구지? 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난 널 끝까지 지켰어!”
“먼저 약혼하신 건 각하세요! 그런데도 제가 기다려야 해요?”
“조금만 양보해 달라 하지 않았나! 그냥 기다리면 내가 알아서…….”
“기다리면요! 기다리면 더한 꼴이 될 텐데 그렇게 하라고요?”
“뭐?”
“제가 모를 줄 아세요? 로잘린과 결혼하신 다음 저를 정부로 두려 하셨다면서요! 둘 사이 아이가 태어나면 공작님께 제 존재를 허락받겠다 하셨다고요?”
“그건!”
“전 싫어요! 저희 집안이! 제가! 각하와 비교하면 낮은 건 사실이지만 정부는 싫다고요! 제게는 정식으로 구혼하시는 신사분이 많아요. 각하보다 모자랄 수는 있지만 절 부인으로 받아들이겠다 하신 분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내가 왜 고작 각하의 정부가 되어야 해요? 왜 지금보다 더 낮은 자리에 손가락질 받으며 들어가야 하느냐고요! 왜 제 가문과 부모님의 이름에 먹칠을 해야 하느냐고요!”
의외의 사실에 에단의 눈이 커졌다. 그는 레이첼이 그런 속사정까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어쩐지 치부를 들킨 듯해 볼이 홧홧해졌다. 에단은 다 설명하겠다 말하려다 말고 레이첼의 손목을 잡아챘다. 설명하려야 할 수 없었다.
‘약조해 주세요. 아저씨 말을 따르면 그 애 들이는 걸 허락하시는 겁니다. 뒤에서 해코지하신다거나 그러시면 안 돼요.’
‘알았다. 단, 아이가 태어난 후다. 그리고 로잘린이 있을 수도에 데리고 있는 건 안 돼. 수도에서 가까운 지방 저택에 두고 왕래하도록 해라.’
‘그건 상관없어요. 어차피 한적한 시골이 더 어울리는 애예요. 순수한 애라서 수도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건 모조리 진실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나도!’
에단은 막막했다. 사실이니 맞다 인정한 다음 로잘린이 그렇게 된 지금은 나도 널 정식으로 맞이할 참이니 기뻐해라, 정부 따위로 들일 생각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 입은 딱 붙어 버렸고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혔다.
“……일단 가. 계속 이렇게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잖아.”
에단은 결국 레이첼을 붙들고 가자 재촉했다. 당장 이 상황과 감정을 회피하면 어떤 수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첼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싫어! 계속 싫다는데 왜 이러세요? 갈 거면 혼자 가세요!”
“너!”
“너랑 안 간다잖아! 안 가!”
“시끄러워! 계속 이럴래? 정말 얼어 죽고 싶어?”
“그래. 얼어 죽어도 안 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하고는 같이 안 갈 거라고! 그러니 이 손 놔! 이 재수 없는 자식아!”
뭉개진 자존심이 또다시 무너졌다. 끝내 이런단 말이지! 그러잖아도 복잡한 심경에 얼떨떨한 에단은 끝내 저를 거부하는 레이첼을 쏘아보다 손을 밀어 내듯 탁 놨다. 갑작스러운 반동에 레이첼이 허물어지듯 뒤로 넘어졌다.
“악!”
레이첼의 꼴은 더 상했다. 드레스는 이제 흙이 안 묻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긴 머리채 끝과 흰 얼굴에도 진흙이 튀었다. 레이첼을 아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녀를 귀족가 영애라 보지 않을 모양새였다.
“…….”
“…….”
두 사람 사이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쓰러진 레이첼이 쌕쌕 숨을 몰아쉬는 소리 외에는 빗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툭툭 떨어지는 비는 에단이 도착했을 때보다는 많이 그쳤지만 여전했다. 계속 맞는다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리라.
에단은 신경 쓰지 않은 채 타고 온 말에 올랐다. 한참 만에 오른 주인의 무게에 말이 푸르륵거리며 갈기에 묻은 비를 털어 냈다.
“……마지막 기회야. 얌전히 말에 오를 건가 아니면 계속 그리 있을 건가?”
“…….”
바닥에 주저앉은 레이첼이 고개를 모로 홱 돌렸다. 함께 가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였다.
에단의 서늘한 낯이 한층 음울해지며 그가 쥐고 있던 말고삐가 한층 팽팽해졌다. 단번에 말 머리를 돌린 그가 짓씹듯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
사내는 올 때보다 빠르게 비를 가르며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건 형편없는 꼴로 주저앉은 채 울먹이는 레이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