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레이첼
“출발할까요?”
마부가 묻자 에단은 조용히 손을 들어 마부를 저지했다. 그리고 속으로 백부터 숫자를 까 내려가기 시작했다.
3…… 2…… 1……
“에단 마일런!!!”
숫자 세기를 끝냈을 때 2층에서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마부가 놀란 말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곧 2층에서 1층으로 도도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자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급히 나왔는지 안 그래도 엉망이던 금발이 이리저리 삐져나와 있었다.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무례하군. 애블랑 자작을 만나 여식 교육에 신경 쓰라 일러야겠어.”
“이 무슨!!!”
그의 말에 레이첼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잔뜩 화가 난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잡아먹을 듯 독기를 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저가 어쩔 수 있나. 에단은 빙글거리며 레이첼이 당황할 말을 꺼냈다.
“그럼 난 돌아가지. 다음에 보자고.”
고급스러운 마차의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마부가 있는 앞으로 똑똑 하고 신호를 줬다. 마부가 말고삐를 당기자 마차가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각하! 저도 데려가세요!!!”
에단이 원하는 말이 밖에서 들렸다. 그는 다시 마부에게 신호를 줬다. 마차가 오솔길을 조금 걷다 말고 멈췄다. 에단이 창을 슬쩍 내렸다. 레이첼이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창가로 다가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에단의 뻔뻔한 말에 레이첼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사나운 표정이었건만 에단은 이런 그녀도 제법 귀엽다 생각했다. 쩔쩔매는 저 몸짓도 떨리는 저 눈동자도 잡아먹기 딱 알맞았다.
“각하께서 저를 데려오셨잖아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납치한 것도 모자라 저를 여기 버리고 가시겠다고요? 제정신이세요?”
“난 조용한 여인만 내 마차에 태우지. 한데 그대는 좀 많이 시끄럽군?”
“…….”
“좋아. 레이디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지.”
레이첼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멍청하긴. 에단은 빙긋 웃으며 어벙하니 예쁜 얼굴을 마주 봤다.
“하나 마차 삯은 받아야겠어. 알다시피 마차가 좀 좁아서 말이지.”
좁기는 무슨. 에단이 끌고 온 마차는 성인 여섯도 태울 만큼 넉넉했다. 눈치 빠른 레이첼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다 새초롬하게 표정을 바꿨다.
“……지금은 돈이 없어요.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드릴게요.”
“아니. 삯을 치를 능력은 충분해 보이는군.”
“…….”
“내가 말하는 마차 삯이 뭔지 잘 알 거라 생각해. 동의하면 타고 아니면 나는 이만 가지. 내일 폐하를 뵈러 일찍 궁으로 들어가야 하거든.”
“…….”
레이첼이 침묵했다. 그는 허옇게 질린 얼굴 밑으로 부들거리는 작은 몸을 보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타겠나?”
* * *
“흐응…… 읏! 으…… 으응.”
달뜬 숨이 절로 나왔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레이첼은 에단의 목을 안고는 어떻게든 버티려 해 봤다.
덜컹―
“하읏!”
마차가 그런 레이첼을 비웃듯 한차례 크게 요동쳤다. 밑에 박혀 있는 사내의 성기가 더욱 깊게 파고듦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다디단 소리에 레이첼에게 바짝 붙어 있던 에단이 낮게 웃으며 가느다란 팔을 떼어 냈다.
“이리 잘 느껴서야. 일상생활은 가능한가?”
“느, 느낀다니. 아니…… 아니에요. 흡!”
“아니긴 무슨.”
레이첼이 부정하자 에단은 비웃으며 그녀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이 천 위에서 멋대로 노닐더니 가슴의 정점을 꼬집고 비틀었다. 거침없는 손길에 자극을 받은 유두가 천 밑으로 뾰족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거긴…… 간, 간지러워. 흐응…….”
찌르르하고 가슴이 가려워졌다. 레이첼은 애매한 자극에 에단을 바라보며 무언의 부탁을 했다. 하지만 에단은 레이첼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가슴을 약한 힘으로 주무르며 나른한 얼굴을 했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손 밑에서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게 제법 큰 유흥거리였다.
“각, 각하 제발 적…… 적당히 하시고.”
사내의 손가락은 가장 가려운 정점만은 피해 갔다. 답답한 마음에 레이첼이 부탁조로 말을 붙였지만 에단의 얼굴은 여전했다. 그가 조금 강해진 힘으로 뽀얀 가슴을 뭉개다 천 아래 젖꼭지를 손톱으로 짓이기며 능청스레 말을 붙였다.
“제대로 말해야 알아들을 게 아닌가.”
“흐응…… 음…… 거기. 거기요…… 흐읏!”
“어디? 여기?”
“지금…… 읏!”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에단이 그녀의 젖꼭지를 쭉 당겼다. 달콤한 교성이 터지고 에단은 그제야 레이첼의 드레스 앞을 풀어 헤쳤다. 가슴에 달린 앙증맞은 리본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자 차가운 공기가 드러난 피부를 자극했다. 상반되는 온도 차에 레이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덜컹―
“흐응!”
마차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열 오른 가슴에 이어 찔러 오는 성기에 레이첼이 입술을 꾹 깨물며 허벅지에 힘을 줬다. 아랫배를 가득 채운 그것은 숨을 막을 듯 그녀의 안에서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이리 음탕해서야. 귀족 영애가 이럴 수도 있군.”
미칠 것 같은 레이첼과 달리 에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작은 떨림조차 없는 목소리에 레이첼이 눈을 위로 치켜떴다. 잘생긴 얼굴에 심술이 잔뜩 붙은 게 보였다. 얄밉고 억울했다. 이대로 혼자 당할 수는 없지. 에단의 입꼬리를 노려본 레이첼은 그냥 막 나가기로 했다.
“하…… 그러는 각하는요! 여자를 괴롭히는 각하도 신사라 할 수 없어요. 천박하기 짝이 없어서는. 누가 각하를 보고 그 대단한 마일런 후작이라 생각하겠어요?”
레이첼의 신랄한 비판에 에단이 표정을 굳혔으나 레이첼은 매서운 눈초리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앙큼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런 자세에서 사내의 저런 눈은 별달리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그 입은 내 걸 빨 때 말고는 쓸모가 없어.”
예상대로 에단은 화를 내거나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레이첼의 작은 입을 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그 나름대로 봐줘 가며 농담조로 한 말이었다만 레이첼은 그 말에 몸이 팍 식는 걸 느꼈다.
‘그래서 묶어 놓고 강제로 했냐?’
아까의 상황에 레이첼의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안에 담겼던 불쾌한 것이 제 밑을 찌른다 생각하니 끓었던 욕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안 해!’
성격 급한 레이첼은 알 게 뭐냐는 심정으로 식어 버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은근한 감각이 아쉽긴 했으나 불쾌함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딜! 값은 제대로 치러야지.”
“그게 무슨…… 아흣!”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에단이 아니었다. 그는 레이첼이 몸을 일으킬 낌새를 보이자 팔을 들어 그녀의 몸을 강하게 내리꽂았다. 부푼 음핵이 쓸리며 다시금 올라오는 쾌감에 레이첼이 신음을 내지르며 에단을 노려봤다.
‘아…… 젠장.’
하지만 에단은 레이첼보다 배는 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멍청한 레이첼! 레이첼은 그제야 자신이 사내를 지나치게 자극했음을 깨우치곤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자지러지는 저와 다르게 멀쩡한 모양새에 발정이 안 난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다. 에단은 오랜만에 먹잇감을 잡은 맹금류가 그러하듯 레이첼을 콱 틀어쥐었다.
“감히.”
두려움에 질린 레이첼이 에단에게서 벗어나려 허리를 비틀었으나 그건 사내를 더 흥분시킬 뿐이었다. 에단은 얇은 허리를 붙잡더니 레이첼의 목으로 이를 가져다 댔다.
“악!”
“또 도망치려고? 응? 레이첼, 넌 어째서 매번 이리 도망치지?”
‘이놈의 개새끼는 어떻게 돼먹었는지 조금만 수가 틀리면 폭력이야! 지가 흡혈귀야 뭐야!’
목에서 몰려오는 아픔에 레이첼이 비명을 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목 왼쪽이 화끈한 것이 자국이 남았음이 분명했다. 올해 유행은 긴 목을 자랑하는 건데 이러면 유행도 못 따르질 않는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었던 레이첼은 대거리를 하기 위해 사내를 쏘아봤다. 아니 쏘아보려 했다.
히죽거리는 사내의 얼굴은 어딘가 섬뜩했다. 레이첼은 에단의 웃음에서 살기를 느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뇨……. 도망은 무슨, 제가 감히 어떻게……. 마차가 아니면 집에도 못 갈 텐데요.”
“아쉽군. 한 번 더 그러면 마차 밖으로 던져 버릴까 고민하던 참인데.”
에단의 말에 레이첼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레이첼의 뺨이 하얗게 질렸다.
“……자비를 베푸세요, 각하.”
레이첼은 살기 위해 에단에게 교태를 부렸다. 비참했지만 어쩌겠는가. 살아야 복수도 하는 게 아닌가. 그 무엇도 생존만큼 중요할 수는 없었다.
‘어쩌겠어, 살려면 뭐든 해야 하는 것을……. 그는 권력자고 나는……. 아버지는 왜 자작밖에 못 돼서는! 적어도 같은 후작 정도는 돼야 이 새끼를 잡아 족치지!’
“그대는 항상 같은 말을 하는군. 그러면서 변하는 게 없어. 혹시 머리가 좀 안 좋나? 하긴 예전부터 그랬지. 공부 머리는 영 없었어.”
“예이, 예. 제가 우둔한 탓이에요. 용, 용서해 주세요. 흣!”
개소리 집어치우렴, 개새끼야. 레이첼은 속으로 욕을 하며 에단에게 매달렸다. 다시 뭉근한 감각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기분은 저조했지만 매끄럽게 살덩이를 받아들인 몸은 언제 식었냐는 듯 기쁨에 허덕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레이첼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
“용서해 달라라…….”
에단이 레이첼의 눈물 어린 말에 고민하듯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레이첼의 허리를 잡고 위아래로 슬쩍슬쩍 움직이고 있었다. 자잘한 자극에 레이첼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흐응…… 응……. 각하…… 으응.”
한번 감칠맛을 맛본 레이첼은 더 강한 것을 원했다. 그녀는 스스로 움직이기 위해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인 순간 에단이 강한 힘으로 레이첼의 허리를 고정했다.
엉거주춤한 상태로 움직일 수 없어진 레이첼이 울상을 지었다. 오다 만 자극에 몸이 재촉했다. 계속! 계속해 줘! 계속!
“벌은 받아야지?”
“예? 벌, 벌이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레이첼이 속으로 비명을 지를 때였다. 에단은 빙글거리며 웃더니 레이첼의 몸을 잡고 느릿하게 그의 것을 빼내기 시작했다. 길고 큰 살덩이가 입구를 빠듯이 벌리며 오돌토돌한 내벽을 천천히 긁었다.
“흐으…… 음……. 각, 각하!”
속을 채우던 것이 천천히 사라지자 레이첼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완전히 나온 것도 아니요 들어간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괴로웠다. 에단이 제 가슴에 뺨을 비비며 앙알거리는 그녀를 보다 짓궂은 목소리로 명했다.
“제발 넣어 주세요. 해 봐.”
레이첼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거절하려 고개를 저으려 했다. 아무리 애타기로서니 먼저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읏!”
그러나 고개가 돌아가기도 전 그녀는 다시금 신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긴 무언가가 쿡 그녀의 내벽을 쑤시고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동시에 에단의 긴 손가락이 접합부 위 예민한 살점을 살살 굴리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응…… 거, 거긴 안 돼!”
몰래 읽는 통속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레이첼의 입에서 나왔다. 에단은 강약을 조절하며 레이첼의 애간장을 태웠다. 계속되는 자극과 스쳐 지나간 쾌감에 레이첼이 결국 항복을 외쳤다.
“흐응……. 넣, 넣어……읏! 주세요.”
“안 들려.”
“제발 넣, 넣어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단이 레이첼에게 거칠게 입을 맞췄다. 뜨거운 입술이 부딪히고 축축한 무언가가 이를 더듬었다.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이며 레이첼은 에단의 목에 다시금 팔을 감았다.
부드러운 가슴이 사내의 단단한 가슴에 뭉개지며 레이첼의 몸 중심으로 무언가가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거친 삽입이었지만 레이첼의 몸은 반갑게 사내의 성기를 받아 냈다. 갈구했던 쾌락이 그녀의 몸을 점령했다.
“흐으응…… 웅, 거기…… 흣!”
“어딜 말하는 거지? 알아야, 읏…… 내가 쑤셔 줄 게 아닌가?”
“쑤신다니…… 각하. 흐응…… 잠자리에선……읍! 예쁘다, 곱다…… 응…… 해 주셔야 신사예요!”
“신사는 무슨……. 됐으니…… 흣! 어딜 쑤셔 줄까? 응? 레이첼.”
“하…… 으응. 그냥 제, 발…… 흣!”
“제발?”
“입 좀 다무세요!!!”
레이첼이 눈을 맞추며 물어 오는 에단에게 소리치며 덤벼들었다. 그녀는 저런 말이 싫었다. 스스로가 예쁘다 생각하는 레이첼은 가장 원초적인 행위를 할 때도 숙녀로서 대접받고 싶었다. 제발 입 좀 닫고 찔러 줬으면. 말로만 떠들지 말고 제대로 쑤셔 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레이첼이 덤벼듦과 동시에 떨어졌던 입이 다시 맞부딪쳤다. 사내의 타액이 혀를 통해 그녀에게 전해졌다.
“읍……?”
갑자기 달려드는 레이첼로 인해 에단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레이첼은 반사적으로 피하는 에단을 끝까지 쫓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야! 이, 이거 무슨……!”
“닥쳐.”
“허?”
에단은 레이첼의 행동에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곧 적응한 듯 그녀에게 입 맞췄다.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서로를 핥고 깨물기 시작했다.
난폭한 손이 레이첼의 뒷덜미를 잡더니 그대로 잡아당겼다. 레이첼도 지지 않고 여린 팔로 에단의 목을 졸랐다. 새빨간 혀가 맞닿은 접합부 못지않게 서로를 갈망했다.
덜컹― 덜컹―
마차가 거친 길을 달리는지 전보다 심하게 흔들렸다. 그에 맞춰 마차 안 열기 또한 뜨거워졌다. 쿵쿵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소리인지 두 사람에게서 나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마차 안에 울렸다.
“하읏…… 으, 응……흡!”
두 사람은 흡사 짐승이었다. 그러나 욕심 많은 레이첼은 아직 부족함을 느꼈다. 거친 색사에 벌겋게 부어오른 음부는 고통을 호소했건만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자색 눈은 요사스럽게 빛났다.
레이첼이 에단을 옆으로 밀어 눕혔다. 나비의 날개와 같은 손이 연약했으나 그는 쉽게 여린 손길을 따랐다.
“흐응…… 으으응. 아…… 아아.”
탄탄한 사내의 몸이 하얀 여체 아래에 깔려 꿈틀거렸다. 에단을 눕힌 레이첼이 그의 위에서 마음껏 움직이며 욕망을 채웠다. 미칠 것 같은 쾌감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바짝 휜 허리 위로 살덩이가 보기 좋게 흔들리자 에단이 그를 잡아채고는 쥐어짬과 동시에 허리를 튕겼다.
“으흡…… 너, 너무 커서…… 아, 아앙!”
단단한 성기가 아래에서 위로 자비 없이 밀고 들어오자 레이첼이 울며 자지러졌다. 못질하듯 구멍에 꽉꽉 박히는 물건이 괴롭고 버거웠다. 그러나 멈추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허리를 돌리며 엉덩이를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다리 사이 구멍으로 사내의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한 줌 얇은 허리가 덜덜 떨렸다.
“아……. 흐읏, 아아.”
한참 시간이 지났다. 양껏 욕심을 채운 레이첼은 어느 순간 눈앞이 점멸되며 배 속이 꽉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몸 안에 가득 찬 살덩이가 그에 화답하듯 뜨거운 무언가를 안쪽에 토해 냈다.
“으윽…….”
짧은 신음이 밑에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첼은 넓고 탄탄한 가슴 위로 쓰러졌다. 허연 것이 하얀 다리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마차는 여전히 덜컹거리며 길을 달리고 있었다. 레이첼의 몸 안에 아직 그대로 남은 성기는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안을 잘게 찔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레이첼은 지친 몸을 움찔거렸다.
침묵이 계속됐다. 고요한 가운데 거친 숨소리만이 마차 안에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것을 알려 줬다.
몸이 적당히 식자 에단이 레이첼을 위로 끌어 올리더니 그녀의 목을 빨기 시작했다. 기진맥진한 레이첼은 그런 그가 특이하다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축축한 혀가 목덜미를 간질이는 느낌은 꽤 괜찮았다. 노곤한 기분과 함께 잠이 쏟아졌다.
“……잘 맞아.”
레이첼이 한참 졸음을 즐기던 때 에단이 말을 붙여 왔다. 짧은 말이었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레이첼은 그 말에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개새끼…….’
결국 레이첼은 속으로 에단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욕을 하며 눈을 감았다.
* * *
레이첼 애블랑은 누구나 인정하는 예쁜 아가씨였다.
연한 금발에 그와 꼭 알맞은 명도를 가진 연보라색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했으며 전체적으로 여리여리 하늘하늘한 가운데서도 존재감을 한껏 자랑하는 몸의 굴곡은 뭇 사내들로 하여금 그녀의 이름을 외게 하는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혹자들은 그녀가 고전적 미인일 뿐이라 신선한 매력이 없다 깎아내리곤 했지만 본래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오래가는 법. 레이첼은 누구나 인정하는 고혹적인 미인이었다.
그러나 세간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청초한 외모와 달리 레이첼의 성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보석과 드레스로 사치 부리기를 좋아했고 제 외관이 잘난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겸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적당히 영악하기까지 했기에 제법 많은 사내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제 욕심 채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아비인 애블랑 자작은 혹여나 그녀가 큰 사고를 쳐 그녀 자신과 가문의 평판을 망치진 않을까 끙끙 앓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애블랑 자작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첼은 영악한 만큼 머리는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고 제법, 아니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다년간 쌓인 경험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사내들이 혹하는 것이 자신의 외관뿐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가지고 놀면서도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도망가곤 했다.
많은 이들이 그런 레이첼을 보고 여우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녀는 자신의 만만한 신분이 감내해야 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라 여겼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여우라 불리는 자신의 평판을 더욱 교묘히 이용했다. 언젠가는 제게 마음을 비롯해 모든 것을 완전히 바칠 적당한 인연을 기다리며…….
* * *
“그동안 감사했어요, 백작님. 하지만 저희의 연은 여기까지인가 봐요.”
살포시 내리깔린 자색 눈은 아름다웠고 살짝 올라간 그녀의 입술은 유려했으나 나온 말은 그렇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아이작은 들어 주던 짐을 툭 떨구고는 레이첼을 뚫어져라 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참. 방금 주신 선물을 이렇게 떨어뜨리시면 어찌해요, 백작님.”
“……레이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백작님께서는 곧 정혼자가 생기실 테고…… 저는 당연히 이만 물러나는 게 맞는 도리겠지요.”
아이작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정혼자라. 그래, 그에게는 곧 정혼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도 그렇지만 그가 봐 온 레이첼은 아직 약혼을 치르지도 않은 그를 포기할 위인이 아니었다.
“레이첼. 전에도 말했다시피 가문과의 약혼일 뿐입니다. 그것도 아직 말만 나오는 상태이지요. 그리고 나는…….”
“제가 원한다면 약혼하지 않을 의향이 있으시다고요?”
레이첼은 아이작의 말이 길어질 낌새를 보이자 툭 잘라 버렸다. 한 번도 없었던 일에 아이작은 살짝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그러니깐…….”
“제가 백작님의 말을 어찌 믿고요?”
아이작은 두 번째로 말허리를 잘리고 나서야 레이첼의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이별 통보에 무언가 있음을 알아챘다.
“……레이첼.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혹 누가 그대에게 무어라 말을 했나요?”
‘아직도 수작질이네. 이 망할 새끼가. 내 앞에서는 이런 얼굴을 하고선 뒤에서는 술술 다 불었다 이거지?’
아이작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레이첼은 그 진지한 얼굴마저도 짜증이 났다. 원체 잘난 얼굴이라 다시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는데 과한 걱정이었다. 그녀는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작을 툭 털어 내고 말간 벽안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요. 그 누구도 아무 말 않으셨답니다. 아! 지나가는 개한테 이상한 말을 듣긴 했어요. 백작님께서 저희의 은밀하고도 사적인 만남에 대해 혀에 기름칠한 것처럼 술술 말씀하셨다고요.”
레이첼의 말은 뾰족했다. 분명 오늘 뜯어낸 것들로 마음이 조금은 풀릴 줄 알았건만……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러 귀한 선물 상자들을 힐끔 보다 발로 툭 쳤다.
상자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비싼 사치품들이 가득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혹여나 안의 물건이 흠집이라도 날까 봐 안절부절못했겠지만 지금 당장은 저 물건들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차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거라도 챙겨야지.’
레이첼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눈앞의 아이작을 믿고 좋아했다는 것을. 그러니 이렇듯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이겠지. 사실 당연했다. 그처럼 잘생긴 데다 잘났고 매너 좋은 사내는 보기 힘들었으니.
‘흑…… 정말…… 정말…… 백작님이 저에 대해…… 저와의 잠자리에 대해…… 각하께 말했어요?’
제길. 며칠 전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아이작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조금 전의 언사만 해도 이미 위험했다. 어쨌거나 아이작은 명망 높은 가문의 백작이었고 그녀는 고작 자작가의 여식일 뿐이었다.
“음. 레이첼, 그건…….”
아이작 또한 레이첼의 말을 알아들은 모양새였다. 상황을 짐작한 듯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 사라져 있었다.
‘하…….’
뻔뻔한 놈 같으니라고. 레이첼은 아이작의 수려한 얼굴을 노려봤다. 그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제가 왜 이러는지 이제는 아시는 눈치네요.”
“…….”
“다시는 뵙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만 안녕히…… 조심히 들어가세요.”
레이첼은 아이작의 정강이라도 차 줄까 하다 돌아섰다. 따지고 보면 이런 끝이 맞는 일이었다.
‘하긴 나도 처음에는 뭐 저 얼굴이나 즐기고 저 인간이 줄 거나 생각했으니깐. 애초에 소문이 좋았던 인간도 아니고……. 이만하면 됐지 뭐.’
살짝 구겨진 상자를 껴안은 레이첼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에단도 그렇고 아이작도 그렇고 그녀는 그들과 같이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내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애초에 말 안 할 거라 생각한 게 이상했지. 으이구, 멍청한 레이첼! 저 얼굴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다음번에는 꼭 반듯하고 잘생긴 사내를 만나야지.’
배신감을 떨쳐 내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레이첼은 괜히 기대한 제 마음이 문제였다 자책하며 걸음을 뗐다. 하지만 한 발짝을 제대로 떼기도 전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는 몸을 훅 돌렸다.
“악!”
“내 말도 듣지 않고 그냥 가면 어떡합니까. 레이첼.”
“예?”
“슬픕니다. 나와 그대 사이 믿음이 이 정도라니.”
아이작은 빙긋 웃고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은발 아래 벽안이 휘어지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레이첼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하지. 그래, 꼭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었다.
“아…… 아파! 아파요, 백작님!”
“이런, 실례. 아픈가요? 하지만 그대가 도망을 가려고 하니깐…….”
아프냐고 물으면서도 아이작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레이첼이 팔을 휘젓자 힘을 더욱 세게 줬다.
“도망 안 갈 거라 말하세요. 내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겠다 약속도 하고요. 그럼 풀어 드리겠습니다.”
레이첼은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생각하며 더욱 세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아이작의 손아귀는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단단한 것이어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한참 씩씩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아이작은 손을 놓았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레이첼.”
“무슨 오해……요.”
레이첼은 벌겋게 변한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벌써 푸르스름한 멍이 띠를 형성하고 있었다.
“분명 그대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인 것은 에단, 그 친구겠지요?”
레이첼은 그래, 네 친구 에단 마일런 그 새끼가 그랬다고 소리치려다 멈칫했다. 친우에게 한다기에 아이작은 지나치게 거친 표현을 쓰고 있었다.
레이첼이 아는 아이작은 다른 이에게는 물론이요 친우에게는 더더욱 그런 말을 쓸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이 의문을 담은 채 아이작을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예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 그 친구랑 만났습니까? 언제요? 그대, 내가 알기론 분명 나를 만난 후에는 사내를 만나지 않던데요. 게다가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지 않습니까.”
레이첼은 아이작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렸다. 지금 저런 질문을 할 타이밍인가? 아니, 그보다 나한테 미안하다 말하는 게 먼저 아닌가?
“혹시 나 몰래 만났습니까? 그와? 단둘이?”
헤어지는 마당에 무슨……. 레이첼은 어쩐지 취조를 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그녀는 멍청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말았다.
“아, 아니요?”
“그렇겠지요. 내가 그대에게 붙인 사람이 몇인데.”
“예?”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레이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감시라니. 언제부터 저를 감시했단 말인가.
“감히 그 정도 돈을 받아 처먹어 놓곤 일을 엉망으로 했을 리는 없고. 하지만, 음…….”
당황해하는 레이첼과 달리 아이작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기 바빴다. 레이첼은 가만히 아이작의 혼잣말을 듣고 있다 슬그머니 발을 뗐다. 도망가야 했다.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녀의 감이 그녀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꽁지 빠지게 도망가라고!
“……어딜 갑니까. 레이첼. 아까 나랑 분명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 이건…… 그냥…….”
이번에도 실패였다. 또다시 발을 제대로 떼기 전에 레이첼은 아이작에게 잡혔다. 아까처럼 센 힘도 아니었건만 어깨를 잡힌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
‘망했다.’
“레이첼. 확인할 것도 있으니 저와 함께 잠시 제 저택으로 가야겠습니다. 우리 사이 오해도 풀어야 하고요.”
“아니. 저는 그냥 이대로……. 그리고 오해라니요. 감히 제가 어떻게 백작님을 오해…….”
“아까는 어떤 개새끼가 그대에게 멍멍 짖으며 나를 모함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 레이첼은 자신이 혹 분을 못 이겨 말을 험하게 했나 돌이켜 봤다. 그러나 선을 살짝, 그것도 아주 살짝 넘은 것 외에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늦어서 아버지도 걱정하실 테고…….”
“애블랑 자작에게는 내가 잘 말해 놓겠습니다. 그러니 거절 마세요. 혹여나 그가 그대에게 무어라 한다면 내가 나서겠습니다.”
‘아니요. 그건 더 싫은데요.’
아이작은 레이첼이 마지막으로 꺼낸 도피로마저 막아 버렸다. 레이첼은 혹 다른 수가 없나 머리를 굴렸으나 아이작이 부른 마차가 먼저였다.
“자. 타요. 내가 잡아 주겠습니다.”
어떻게든 고개를 저으려던 레이첼은 시리게 빛나는 파란 눈을 마주하곤 얼어 버렸다. 도망칠 곳 따윈 없었다. 화려하고 편안한 바이허가 마차가 이렇듯 타기 싫은 적은 처음이었다.
아이작이 뒤를 막고 있어 몸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레이첼은 결국 두려움을 가까스로 참으며 마차에 올랐다.
* * *
“주인님! 찾았습니다! 로잘린 아가씨를 찾았습니다!”
빌은 에단을 향해 한걸음에 뛰었다. 하나 젊은 주인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그의 고함을 못 들은 듯했다.
“아이고. 주인님. 찾았다니까요!”
답답해진 빌은 불경하게도 주인의 마호가니 책상을 내리쳤다. 큰 소리가 나자 에단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눈앞에 있는 빌을 쳐다봤다. 그가 책상 위에 편히 올렸던 긴 다리를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반문했다.
“뭐? 뭘 찾아?”
“로잘린 아가씨요! 찾았답니다.”
“아…… 그래? 잘됐군. 아저씨께서 걱정은 없으시겠어.”
빌은 시큰둥한 주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혼녀에게 이렇듯 무심하다니. 이제는 깨져 버린 약혼이었지만 빌은 로잘린이 도망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하십니다. 로잘린 아가씨의 일인데. 주인님께서는 이렇듯 무심하시니…….”
“그래그래, 알았어. 로잘린은 어디에 있대?”
“룩델림에 있답니다. 그것도 그놈하고 같이요.”
“그새 멀리도 갔네. 데려오려면 한참 걸리겠어. 계속 도망칠 테니.”
“불쌍한 로잘린 아가씨! 하필 간악한 모나타 놈의 꼬임에 넘어가셔서는……. 아이고. 불쌍한 아가씨.”
“그건 아니지. 로지오 모나타는 이제 스물이야. 로잘린보다 어린애지. 그러니 누가 봐도 도망을 부추긴 건 로잘린 아니겠어?”
“말도 안 됩니다! 주인님도 아시잖습니까. 로잘린 아가씨가 얼마나 여린 분인지!”
빌은 끝까지 심드렁한 주인을 슬쩍 노려봤다. 모나타 놈하고 같이 있다 하는데도 반응이 없다니. 로잘린이 더 가여워진 빌은 아예 직접 제 바람을 에단에게 말하기로 작정했다.
‘그래. 나라도 나서야지.’
“주인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주인님이라도 나서서 로잘린 아가씨를 구해 와야 합니다! 지금 당장요!”
“내가 왜?”
“왜라니요. 그거야 주인님은 로잘린 아가씨와 약혼…….”
“할아범. 나랑 로잘린은 이제 끝이야. 걘 할아범 말대로 감히 모나타 가문 놈이랑 도망을 쳤어. 그런데 내가 로잘린을 찾아오고 다시 약혼하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빌의 말은 단칼에 잘려 나갔다. 사실 에단의 말은 틀릴 것이 없었다. 빌은 어떻게든 로잘린의 편을 들었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모든 책임은 로잘린 그녀에게 있었다.
멀쩡한 약혼자를 버리고 원수 가문의 사내와 연애를 한 것도 그녀요, 결국 그 사내와 도망을 친 것도 그녀였다. 로잘린의 아비인 캐틀렛 공작조차 약혼을 깬 에단을 비난할 수 없었다.
“…….”
“할아범이 어릴 때부터 로잘린을 봐 온 건 알겠지만, 그만해. 그래도 할아범 주인은 나잖아? 로잘린이 아니라. 내 생각도 해 줘야지.”
에단의 입에서 그렇게까지 말이 나오자 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잘린 아가씨가 그렇게 된 건…….’
빌은 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눌렀다. 어찌 되었든 빌 그의 주인은 로잘린이 아니라 에단이었다. 그러니 빌은 당연히 주인의 입장을 더 고려해야 했다.
“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인님.”
“……그래. 너무 자책은 말고. 그보다 내가 지켜보라는 사람은? 잘 보고 있지?”
“그 아가씨 말입니까? 얼굴만 예쁜…….”
시무룩해 있던 빌은 에단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로잘린을 생각하느라 잊고 있던 주인의 명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뭐…… 며칠 지켜봤는데 잘 살고 있더랍니다.”
명을 게을리 수행한 것은 아니었기에 빌은 풀었던 사람들이 전해 온 말을 늘어놓았다.
이날은 무얼 했다더라. 어제는 어디를 갔다더라. 모두 큰 특이점이 없는 말이었지만 주인의 기분은 어쩐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상점 거리에서 아이작 님과 함께 계시다 같이 아이작 님의 저택으로 향했다 하더랍니다. 그 이상은 경비가 삼엄해 제대로…….”
“뭐? 왜!!!”
“아이고! 깜짝이야!”
결국 일이 터졌다. 점점 어두워지던 에단은 빌의 말에 소리를 꽥 질렀다. 나이가 들어 귀가 어둑해져 가던 빌의 귀에도 천둥소리처럼 큰 고함이었다.
“걔가 거길 왜 가?”
“제,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 아이작 님이 선물도 주시고 꼴을 보니 딱 연인이던데 당연히 젊은 남녀가 붙어 있다 보면…….”
“망할 계집! 내가 그렇게 알려 줬는데도 거길 기어간단 말이야?”
“예? 그 아가씨와 언제 또 만나셨습니까? 그분과는 분명 오래전에 끝났다 그러지 않으셨…….”
“그새를 못 참고 또 사내 품을 찾았다 이거지! 제길!”
“저…… 주인님 일단 진정하시고…….”
빌이 급격히 나빠진 주인의 심기를 읽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러나 에단은 그런 그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벌떡 일어나더니 온 집 안이 울리도록 발을 굴리며 홱 방을 나가 버렸다.
“주…… 주인님?”
멍하게 있던 빌이 정신을 차리고 따라붙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빌이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에단은 마구간에서 말을 잡아타고는 발을 구르고 있었다.
* * *
“흐응…… 아읏!”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사내의 긴 손가락 끝 단단한 손톱이 가슴의 중심을 쿡쿡 찌르고 긁은 탓이었다.
“마음이 아픕니다, 레이첼. 그대가 다른 사내에게 그리 쉽게 안겼다니.”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으나 한편으로는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기에 레이첼은 사내의 손에 자지러지면서도 몸을 움찔거렸다.
“으응…… 그, 그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요? 하지만 레이첼, 전 분명 그대 입에서 즐겼다는 말이 나온 걸 들었습니다. 차라리 거짓을 말하지. 다른 사내의 품이 즐거웠다니. 속상합니다.”
젖꼭지를 희롱하던 손가락이 부푼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꼭 화를 내는 모양새에 레이첼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니! 거짓말 못 하게 수를 쓴 게 누군데!’
레이첼은 얼마 전 에단과의 일을 아이작에게 말할 생각 따위 없었다. 이미 거짓을 말하기도 했거니와 아이작이 에단과 만난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 게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헤어지는 마당에 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나 욱하며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헤어지더라도 자신보다 강자인 아이작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 따위는 만들어서 좋을 게 없는 법. 레이첼은 화를 꾹 누르며 계속 거짓을 말하다 적당히 도망칠 참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의 도주 계획은 어느 순간 완전히 짜그라지고 말았다. 아이작은 저택에 들어선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하룻밤 머물 방을 마련하라 일렀다. 도망칠 계획이었던 레이첼은 당연히 완곡하지만 단호히 머무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아이작은 그녀에게 난감한 표정을 보이더니 차를 한잔 권했다.
‘그럼 차나 한잔하며 오해나 풀고 가요, 레이첼. 그래도 손님인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이첼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 한 잔쯤이야 거절하기도 무엇한 것이었고 차라리 대충 말이나 주고받다 도망치면 되겠지 그리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차를 마신 순간부터 그녀의 정신은 급격히 혼미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아…… 그래서 좋았다 이 말이군요. 에단과 마차에서, 흐음…… 즐거웠다?’
‘네에. 좋았어요. 생각보다, 아니 상상 이상으로요…….’
‘나와 할 때와 비교하면 어땠습니까?’
‘더 좋았어요. 사실 백작님처럼 침대에서 너무 다정한 것보다는 그런 쪽이 더 취향에 가까워서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레이첼은 아이작의 모든 질문에 한 점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했다. 에단과 만난 것은 물론이요 그와 동침을 한 것까지. 그녀의 입은 주절주절 잘도 떠들어 댔다. 그리고 그 주저리 속에 절대 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 포함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레이첼. 그대는 거짓말을 참 잘합니다. 물론 그런 모습도 귀엽지만…… 당연히 벌은 받아야겠지요?’
아이작은 레이첼의 말을 듣는 내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레이첼은 그가 진실로 웃는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 해서 그녀가 무얼 할 수 있겠나. 레이첼이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갈 때쯤 두 사람은 이미 침대 위에 당도해 있었다.
“나 참. 레이첼. 이런 게 좋다니. 진작 말하지 그랬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숨길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이작은 다정했던 예전과 다르게 거침없었다. 시정잡배처럼 흰 가슴을 세게 주무르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레이첼의 가슴에 그대로 입을 가져갔다.
“아읏!”
부드러운 살에 콱 하고 이가 박혔다. 레이첼은 날카로운 고통에 제 가슴을 물고 있는 아이작의 머리를 밀어 내려 했지만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이첼이 반항을 하면 할수록 아이작은 이로 더욱 세게 여린 젖꼭지를 짓이겼다.
“으…… 흐응…….”
그렇게 얼마 동안 고통에 시달렸을까. 까슬한 혀가 한참 만에 얼얼해진 젖꼭지를 천천히 쓸었다. 잇자국이 파인 곳을 기이한 감각이 채우자 레이첼이 비음을 흘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흣!”
아이작이 조금 전보다 진해진 젖꼭지 색을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그가 이번에는 레이첼의 가슴을 정성스레 핥고 빨았다. 사내의 혀가 주는 쾌락에 레이첼의 눈에서 눈물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바르르 떨리는 몸에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 휘어진 눈이 야살스러웠다. 아이작은 제 입술을 한 번 훑더니 타액으로 질척해진 레이첼의 분홍빛 젖꼭지를 손바닥 전체로 문지르며 물었다.
“좋아요? 하긴 그대, 전부터 여기가 약했지요.”
“아, 아니…… 앙!”
레이첼은 부정하려 했으나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쾌락에 어느 정도 젖어 든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있었다.
“어느 정도 발정이 난 것 같으니…….”
아이작은 느긋했다. 그는 제 손길에 앙앙대는 레이첼을 구경하듯 훑으며 장난치듯 젖꼭지를 당기다 갑자기 그녀를 뒤집었다.
“엎드려요. 벌은 받아야지.”
침대가 출렁이며 순식간에 레이첼의 시야가 뒤집혔다. 베개를 바라보게 된 그녀는 어느새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운 채 엎어져 있었다.
“으응…… 이런 건 싫…….”
짐승 같은 자세에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물론 이런 체위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아이작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한 왕자님과 같다고 생각한 그와는 처음이었다.
레이첼의 머리가 생각하는 아이작의 모습은 아직 예전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머리는 지금 상황을 수치스럽다 여기고 있었다.
“귀여운 암캐 같네요. 레이첼. 꼬리랑 귀를 달아 주고 싶어요. 물론 목줄도 매고. 목줄에는 에릭 바이허 소유라 써 놓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어디 가서 함부로 가랑이 벌릴 일은 없겠지요.”
레이첼이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아이작의 행동이 이어졌다. 낭창한 허리를 붙잡아 고정한 그는 제 앞에 놓인 레이첼의 하얀 엉덩이를 자비 없이 세게 올려붙였다.
짝―
“악!”
사내에게 엉덩이를 맞다니. 이건 레이첼로서도 처음이었다. 왠지 모르게 울컥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아프고…… 서럽고……. 그러나 그보다는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레이첼의 눈물에도 아이작의 반응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는 발발 떨리는 레이첼의 등과 허리, 그리고 제 손길로 붉어진 둔부를 바라보며 차갑게 일갈했다.
“고작 이런 걸로 울어요? 에단과는 이러고 놀았잖아요? 목줄도 찼다면서? 그가 여기도 만져 줬나?”
아이작이 레이첼의 은밀한 부위를 예고 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여린 살을 들추고 속에 감춰진 구멍을 느긋하고 얕게 쑤시는 손가락이 무도했다. 덕분에 레이첼은 아픔과 수치심에 눈물을 떨구면서도 묘한 쾌락에 허덕여야 했다.
“아니, 흐읏…… 그런 게 아닌데. 흐윽…….”
“울어도 소용없어요. 허리 더 내려요. 벌은 마저 받아야지.”
레이첼은 싫다 말하려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얼어 있는 아이작의 벽안을 보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그의 손가락이 누르는 대로 허리를 내리고 말았다.
완전히 내려간 허리에 아이작이 입구를 벌리던 손가락을 빼냈다. 촉촉하게 젖은 그의 손가락 끝에는 투명한 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걸 본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꼬며 혀를 차다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반성의 의미로 울음을 터뜨린 줄 알았더니…… 쯧.”
짝―
짝―
짝―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이 내려왔다. 연달아 세 대를 맞은 레이첼은 이제 울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만 있었다. 맞기 전 아이작의 손장난으로 기이한 열감이 전달된 탓인지 고통 속에서도 뺨이 붉어졌다.
‘나 혹, 혹시 이런 쪽으로 위험한 거 아니야?’
레이첼이 제 취향에 대해 걱정할 때였다.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던 아이작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붉게 물든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비틀린 만족감이 가득했다.
“흐음……. 벌을 잘 받았으니 상을 줘야겠습니다.”
“필요…… 없……하앙!”
아이작에 대한 미움이 솟구친 레이첼은 필요 없다 말하려 했다. 그러나 다시금 들어오는 손가락에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까보다 더 젖었군요.”
하나였던 손가락이 두 개 세 개로 늘었다. 빠듯하게 채워지는 감각에 레이첼은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신음을 삼켰다. 아이작은 레이첼이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톡 튀어나온 살점을 뭉개듯 누르며 비볐다.
“흐으응…… 으응…….”
레이첼의 눌린 신음과 함께 질척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이작은 레이첼의 애액이 아래를 적시다 못해 허벅지를 타고 흐를 때가 돼서야 손가락을 뺐다. 마디 하나만 젖었던 아까와 달리 그의 손가락은 애액에 절여진 듯 전체가 번들거렸다.
“흐응…… 백, 백작님. 아…….”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가 허무했다. 레이첼이 허리를 잘게 떨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참을 수 없는 열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잠식당해 있었다.
“레이첼. 그대는 음탕한 계집입니다. 이런 발정 난 냄새라니…….”
아이작 또한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상스러운 소리를 지껄이며 단단히 발기한 제 성기를 레이첼에게 들이댔다. 쿡쿡 찔러 오는 거대한 물건에 레이첼은 당황했지만 곧 기대감에 허리를 살랑 움직였다.
“읏……!”
그걸 신호로 아이작은 단숨에 레이첼을 꿰뚫었다. 엎드린 바람에 시각이 차단되어 있던 레이첼은 갑작스레 닥친 거대한 충격에 입을 벌리고 뻐금거렸다. 몇 번이고 받아 오던 것이었지만 길고 두터운 아이작의 것은 그녀에게 항상 버거웠다.
“아읏…… 아…… 백작님……! 하앙! 아!”
아이작은 가는 허리를 틀어쥐고 앞뒤로 움직였다. 레이첼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신음을 내질렀다. 바짝 내려간 허리가 휘어지며 얇은 팔이 침대 시트를 아무렇게나 구겼다.
“아…… 레이첼. 예쁜 내 여우.”
아이작이 몸을 숙여 레이첼의 어깨와 목 여기저기에 입맞춤했다. 레이첼을 끌어안은 그의 얼굴은 이미 그녀 못지않게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 * *
에단이 도착했을 때 이미 레이첼과 아이작의 정사는 끝난 후였다. 아이작은 침실에서 잠든 레이첼을 가만히 쓰다듬다 에단이 왔다는 말에 침의 차림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너!”
에단은 젖은 채 저를 맞이하는 친우를 보고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갯짓으로 카우치를 가리킬 뿐이었다.
“앉지.”
에단은 잠시 아이작을 노려보다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의 검은 눈은 여전히 활활 불타고 있었다.
“내놔.”
에단은 자리에 앉자마자 따지듯 아이작에게 말했다. 아이작은 에단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았지만 일부러 시치미를 뚝 뗐다.
“무슨 말이지 도통 모르겠군. 갑자기 찾아와 내놓으라니. 자네 내게 뭐 맡겨 놨나?”
“모르는 척 말고! 레이첼 애블랑! 네가 데려갔다는 거 이미 알고 있어!”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저리 당당한 태도라니. 누가 보면 레이첼이 자신의 연인이 아니라 에단의 연인인 줄 착각하리라.
‘짜증 나는군. 아직도 이러니 원. 오늘이 지나면 꽁꽁 싸매 숨겨 놓든지 해야지.’
따지고 보면 레이첼에게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은 아이작 또한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으나 그에게 레이첼의 결별 선언은 이미 잊힌 말이나 다름없었다.
“뭐, 에단 자네가 누구를 찾든, 내놓으라 소리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하지만 자네가 찾는 사람이 내 연인이라면 그건 좀 곤란한데…….”
“연인은 무슨! 야! 아이작 네가 레이첼을 연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분명 얼굴 예쁜 정부라며!”
“정부? 난 그녀를 정부라 부른 적 없어. 얼굴이 제법 볼만하니 나중에라도 정부로 데리고 있을 만하다 말한 적은 있지만. 하지만 그건 그녀와 교제하기 전의 일이니 상관없지 않나?”
“야!”
에단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지만 분명 처음 아이작은 레이첼을 연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했다.
‘장난감에 가깝다 한 주제에!’
물론 아이작은 레이첼이 원하는 물건을 사 주고 사랑을 속삭이며 연인처럼 굴기는 했다. 하지만 에단이 보기에 그건…… 사랑하는 관계보다는 욕망을 채워 주는 대가로 거래를 하는 관계 같았다. 게다가 아이작은 곧 정혼자가 생기지 않는가. 아무리 친우라도 이런 놈에게 레이첼이 놀아나도록 둘 수 없었다.
“거짓말 마! 내가 내 귀로 들은 게 몇 번인데. 그리고 너 곧 모나타 공녀랑 약혼하잖아! 그런데 어디서…….”
“아! 그거? 마음이 바뀌었네.”
“뭐?”
“레이첼이 속상해하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바꿨네. 좀 더 고민하는 걸로. 이른 시일 내에 모나타 공작가에 서신을 써야지. 레이첼이 생각보다 많이 침울해하더군. 마음이 아팠어.”
에단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아는 아이작은 이런 선택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절대 손해는 보지 않는 이가 고작 자작가 여식 하나 때문에 그 좋은 혼사를 놓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짓말! 네가 잘도 모나타를 포기하겠다.”
“사실이야.”
아이작의 표정이 진심 같아 보이자 에단은 급급해졌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래서는 안 됐다. 레이첼은 이 능구렁이 놈하고 헤어져야 하는데! 그리고 나랑 다시…….
“그래도 안 돼! 너 아직 못 들은 모양인데 레이첼은 이미 나랑…….”
“들었으니 입 닫게, 에단. 다시 듣고 싶지는 않아.”
“뭐? 들었어? 누구한테?”
“레이첼을 겁박하고 납치했다지? 게다가 원치도 않는 그녀를 범했다고? 에단. 그건 범죄야.”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아이작은 제가 레이첼에게 금지된 약을 먹이고 조금 전까지 괴롭혔던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 굴었다.
그러나 레이첼이 아이작에게 어떻게 안겼는지 알 리 없는 에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게 그렇게 말해? 원하지 않았다고? 그 계집애가! 저도 즐겼으면서! 그거 어딨어? 여기에 있지? 2층이야?”
“여기에 있다 해도 자네의 태도를 보면 그녀를 보여 줄 수는 없을 거 같은데. 그리고 조금 전 말에 좀 보태자면 마차 삯을 핑계로 그런 건 좀 치사하지 않나? 그것도 먼저 납치한 이가. 형편없는 태도야. 자네와 내가 같은 리온의 귀족이라는 게 부끄럽군. 에단.”
에단의 얼굴이 벌겋게 타들어 가며 입이 풀을 붙인 듯 붙어 버렸다. 그는 레이첼이 아이작에게 이런 것까지 말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찌 보면 그의 생각은 맞았다. 레이첼은 자의로 떠들어 댄 것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앞선 상황과 마찬가지로 에단은 레이첼이 처한 상황에 대해 몰랐으므로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런 것까지 말했단 말이지? 펑펑 울면서 헤어질 것처럼 굴더니 다시 이놈한테 붙어서는 온갖 이야기를……. 괘씸한 계집!’
에단은 속으로 레이첼을 욕하며 잠시라도 그녀를 믿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자책할수록 생각나는 건 그날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뿐이었다.
‘제길! 멍청한 놈! 이런데도 생각하는 거라곤!’
에단이 스스로를 욕할 때였다. 가만히 에단을 보고만 있던 아이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에단. 나도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자네, 레이첼에게 오해를 불어넣었더군.”
에단은 아이작의 말에 급격히 화사한 얼굴을 했다. 그럼 그렇지! 헤어지진 않았어도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해 보였다.
“흥! 오해는 무슨. 사실이지! 네가 술에 취해 그녀와의 관계를 내게 떠벌린 건 맞는 말 아니야? 증인도 있는데 이것까지 발뺌할 참은 아니겠지?”
“그렇지. 사실이지. 하지만 내가 왜 그랬을까? 그건 자네가 취한 나를 도발해서 그런 게 아니었나. 그날 자네가 그런 말만 안 했어도 난 가만히 있었네. 난 신사고 누구와 다르게 그녀의 명예를 지켜 줄 줄 아는 사람이니 말이야.”
“신사 같은 소리 하네. 신사가 제 연인 과거 이야기 좀 들었다고 발끈하면서 주절주절 할 말 못 할 말 떠드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
이번에는 아이작의 입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처음으로 승기를 잡은 에단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
“…….”
두 사람의 대치는 한참 이어졌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두 사람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고용인들뿐이었다.
“에단.”
한참 만에 아이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푹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친우를 노려보던 눈에 힘을 풀고는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더는 이상한 말 말아 주게. 잘 교제하고 있는 나와 그녀 사이를 왜 방해하나 모르겠군.”
“……잘 교제하기는 무슨.”
“혹시 에단, 자네 레이첼을 짝사랑하기라도 하나? 아직도?”
“뭐, 뭐?”
“아…… 그런 거였군. 그래, 어쩐지 나와 그녀가 교제하기 시작한 후로 계속 신경을 긁는다 싶었다만.”
“아, 아니야! 내가 무슨 그런 쓸모없는 계집애를! 그거 잘난 겉껍데기 빼면 쓸모도 없어. 그게 가문이 잘났기를 해, 집에 돈이 많아?”
허를 찔린 에단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가리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조리 그의 진심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그 진심을 알아주겠는가? 그 자신마저도 제 진심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데.
“헤프게 웃으면서 가슴 들이미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아이작은 에단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지금까지는 친우와의 말다툼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에단의 말은 점점 위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한 대 쳐?’
아이작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말고도 에단의 말을 듣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기대만큼 즐기지도 못했어. 구음도 형편없어서는 재미도 없고, 아무리 예쁜 얼굴도 계속 보면 질린다더니 그 말이 딱 맞더라.”
“야!!!”
새된 목소리가 에단과 아이작이 있는 공간을 갈랐다. 에단과 아이작 두 사람의 고개가 계단 위를 향했다.
상대를 본 에단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반면에 아이작은 묘한 미소를 보이다 안타까운 듯 표정을 빠르게 바꿨다.
“……나쁜 놈.”
계단 위에는 레이첼이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그녀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 보였다.
* * *
레이첼은 에단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그녀를 싸구려 취급 하며 곧잘 얕잡아 봤으니 그가 말한 내용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 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구설에 오르내리긴 했지만 그녀는 올해 스물둘인, 아직은 어린 아가씨였으니 말이다.
‘개새끼! 나쁜 새끼!’
레이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자리에서 에단을 노려봤다. 미움 가득한 눈이었으나 조금 전 말을 끝으로 레이첼은 에단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러운 가운데서도 그가 지닌 지위와 알량한 권력이 두려운 탓이었다. 이미 그녀는 ‘놈’이라는 단어를 뱉은 제 혀를 에단보다 더 원망하고 있었다.
반면에 에단은 핏기 가신 얼굴로 레이첼을 마주 보다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누가 봐도 그는 개새끼였다. 차라리 화를 내면 같이 맞받아치겠건만, 앙앙거리며 그에게 덤비던 레이첼은 항상 그래 왔듯 결정적인 순간에는 저렇게 눈물만 보였다.
결국 세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건 아이작이었다. 그는 긴 다리로 계단을 두세 개씩 올라 단번에 레이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눈물을 닦아 주며, 훌쩍이는 레이첼을 다독였다.
“이런……. 레이첼.”
크고 따뜻한 품이 눈물을 더 솟게 했다. 레이첼은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아이작에게 기대 울기 시작했다.
같이 대화를 하고 있었던 아이작도 다를 바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어쩌면 동의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항상 다정하게 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그도 에단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가벼이 보고 뜻대로 하는 사내였으니.
하지만 지금 당장 가장 미운 것은 에단이었으므로 레이첼은 아이작에 대한 감정은 아주 잠깐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당장 기댈 곳이 필요했다.
홀에 들리는 소리라곤 레이첼의 울음소리와 다정히 그녀를 어르는 아이작의 소곤거림뿐이었다. 레이첼은 다정한 품에서 어리광을 피우듯 흠뻑 울었다.
“……집에서 걱정하실 거예요.”
한참 만에 젖은 뺨을 닦아 낸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울며 감정을 풀어낸 그녀는 어느 정도 진정된 모양새였다.
‘……이게 뭐라고.’
부끄러웠다. 상처받았다는 것을 티 내는 일은 그녀에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고작 이런 일로 울다니. 실컷 울고 난 후 그녀는 패배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레이첼. 자작가에는 이미 말해 놨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요. 이렇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그대를 보냅니까.”
“아니에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더는 폐를 끼칠 수도 없고……. 죄송하지만 마차를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니면 삯마차를 불러 주세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레이첼은 억지로 얼굴을 펴곤 아이작에게 말했다. 부끄러운 것도 그렇지만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이작은 안 된다 몇 번이고 레이첼을 만류했지만 그녀의 뜻을 꺾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데려다주겠노라 말했다. 레이첼은 그마저 부담스러웠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입씨름할 체력도 없는 탓이었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백작님.”
아이작은 하인을 불러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레이첼은 아이작의 명을 받고 하인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 남은 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진짜 싫은데…….’
레이첼은 에단에게 인사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 말을 들었으니 하지 않아도 딱히 책을 잡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 또한 ‘놈’을 입에 담았기에 에단을 무시하고 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레이첼은 약한 게 죄라는 말을 속으로 웅얼거리며 에단을 마주 봤다. 수 초 후 그녀의 허리가 살짝 내려갔다. 평소보다는 조금 올라간 허리의 각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했다.
“우습군.”
레이첼이 숙인 허리를 채 펴기도 전 조롱 가득한 에단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그의 시선은 레이첼의 어깨, 정확히는 그녀의 어깨 위 아이작의 손에 가 있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에단은 저리 딱 붙은 두 명의 남녀가 그렇게 짜증이 날 수 없었다. 뭐가 좋다고 저리 붙어 있나? 그새 뚝 끊겨 버린 인내심은 그에게 사고와 자제라는 것을 모조리 앗아 가 버렸다.
“우스워.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질질 짜기는. 애블랑 영애. 그리 울면 다 해결되는 줄 아나? 하긴 그렇게 사내를 몇이나 홀렸을지…….”
“에단!”
아이작은 에단의 입을 막으려 급히 그를 불렀으나 에단의 입은 그 삐뚤어진 심사를 대변하듯 꼬인 채 돌아올 기미도 멈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왜? 내가 어디 틀린 말을 했나? 지금 당장만 보더라도……. 애블랑 영애, 본인 꼴을 좀 봐. 눈물을 쏟는 척 아이작의 팔에 매달려 가슴이나 비벼 대지 않나. 천박해서는! 하긴,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신분이 있겠다, 인사는 하고 가려던 레이첼은 에단의 모욕적인 언사에 그 자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게 진짜 미쳤나?’
이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를 향한 날것의 모욕들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눈물 대신 펑펑 솟아난 것이 있었으니…….
“아, 그래요?”
그건 분노요 오기였다. 레이첼은 삐뚤게 올라간 에단의 입을 노려보다 제 가슴을 슬쩍 봤다. 적당히 부푼 가슴은 최근 유행하는 드레스의 양식 덕에 뽀얀 속살을 조금 드러내고 있었다.
‘그놈의 가슴! 가슴! 지겹지도 않나!’
문뜩 든 생각에 레이첼은 일부러 저를 감싸 안은 아이작에게 더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의 팔에 보란 듯이 가슴을 들이댔다. 아니나 다를까 에단이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인상을 썼다.
“백작님…….”
에단의 반응을 확인한 레이첼이 눈을 촉촉이 적시며 아이작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 서러움에 터뜨린 울음과는 다른 계획된 눈물이었다.
“레이첼…….”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아름다웠다. 아이작은 레이첼의 눈물을 슥 닦아 주며 위로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서로를 사랑해 마지않는 세기의 연인이었다.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저 친구 입이 워낙 신사적이지 못하다는 걸. 친절한 그대가 이해하세요.”
“전 무서워요. 각하께서 저를 너무도 미워하시니…… 도통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흑…….”
레이첼은 아이작에게 기대 에단을 쫓아낼 참이었다. 물론 아이작이 고작 잠자리 상대인 그녀를 위해 친우를 쫓아낼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의 아이작이라면 어쩐지 제 말을 들어줄 거 같아 레이첼은 기대를 걸었다.
“저게!”
“꺄악!”
에단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바짝 수축한 몸이 당장에라도 레이첼에게 덤벼들 듯싶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반응 속도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아이작의 품을 파고들었다. 괴물을 피해 도망가는 그림 속 미인처럼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에단! 숙녀께서 두려워하지 않나. 그만하게.”
“숙녀는 얼어 죽을! 아이작 넌 저게 숙녀로 보이냐? 난 숙녀는커녕 귀족 영애로도 보이지 않는데.”
“에단. 레이첼이 속한 애블랑가는 엄연한 귀족 가문이야. 귀족 영애로도 보이지 않는다니 그 무슨 망발인가. 지금 자네 언사는 레이첼을 모욕한 걸 넘어서 그녀의 가문을 욕되게 하고 있네.”
“하! 몇 대 후면 작위나 유지할까 싶은 가문도 가문이던가? 혹 모르는 노릇 아닌가? 곧 작위를 팔아 치울지도! 하기야 집안을 보면 안다고…… 애초에 저게 왜 저렇게 됐는지 애블랑가를 보면 답이 나오는군. 여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모양이지.”
“에단! 레이첼은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가 아니야. 그녀는 모범적인 숙녀네. 그러니 실없는 소리로 그녀를 모욕하는 건 그만두게. 더는 친우로서도 참아 줄 수 없어.”
레이첼은 에단의 말에 몇 번이고 울컥했다. 그는 그녀를 모욕하는 걸 넘어서 그녀 가문을 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 하나가 모욕당했을 때보다 더한 상처였다.
화로 간신히 억눌렀던 눈물이 다시 터질 낌새를 보였다. 레이첼은 일부러 눈에 힘을 꾹 줬다.
“이런, 레이첼…….”
아이작은 레이첼의 상태를 눈치챈 듯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아 도닥거렸다. 그 모습에 에단의 눈에서 순식간에 불꽃이 튀었다.
“모범은 무슨! 길거리 창부 같은 게!”
“에단!!! 그 입 닫게!”
끝내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오자 아이작의 언성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레이첼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고함에 놀라 딸꾹질을 하며 눈을 끔뻑였다.
“아이작, 정신 차려. 아니지. 네가 저딴 속셈에 넘어갈 리는 없고……. 야! 너 지금 일부러 저거 편드냐?”
“편을 든다니! 이게 편들 일인가. 당연히 자네가 잘못한 일이고 자네를 탓할 일이지.”
“웃기지 마. 아이작 네가 그래 봤자 저게 감동이나 먹을 거 같아? 저거 별명이 여우야, 여우! 친우로서 충고하지. 당장 네게 매달린 그거 떼어 버려. 아니면 바이허가라도 돈깨나 감당하기 힘들걸?”
“정말이지 더는 못 들어 주겠군. 당장 내 집에서 나가게! 나가! 당분간은 자네 얼굴을 보지 않겠네!”
‘어? 이렇게까지는…….’
두 사람의 다툼이 심각해지자 오히려 당황한 건 레이첼이었다. 물론 그녀는 에단이 쫓겨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면 곤란한 건 그녀였다.
“하! 내게 축객령이라? 좋아. 내가 가지! 나도 당분간 아이작 자네! 특히 저런 걸 매달고 있는 자네는 보기 싫을 예정이거든.”
에단은 두 사람 모두를 노려보다 마지막으로 레이첼을 노려봤다. 꺼멓게 타다 못해 활활 불이 지펴진 눈동자에 레이첼은 혹 일을 너무 키운 것인가 고민했다.
레이첼이 한참 전전긍긍할 때 에단이 등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저를 보는 눈빛에 레이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솔직히 좀 두려웠다.
쾅―
문이 큰 소리로 닫혔다. 결국 자리에 남은 것이라곤 진동하는 문과 그 문만큼이나 떨리는 레이첼, 그녀의 몸뿐이었다.
* * *
바이허가의 마차는 그 값을 하듯 편안했다. 레이첼은 애블랑가의 하나 있는 낡은 마차나 매번 타던 삯마차를 기억해 내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좋아서 재수 없어.’
기분이 좋았더라면 편안한 바이허가 마차를 충분히 즐겼을 터였다. 나아가 비슷한 처지의 또래에게 자랑할 생각에 조금 우쭐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어김없이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동시에 에단이나 아이작이 사는 세상이 그녀와는 너무나 다름을 문뜩 깨닫곤 했다.
‘타고난 걸 어떻게 하겠어. 그저 운이거니 생각해야지.’
‘그게 주제라는 거야. 그래도 우리네 삶은 저기 평민들보다는 좋은 편이잖니? 주제넘게 굴지 말고 만족해. 솔직히 레이첼 넌…… 그 얼굴 덕에 많이 누리는 편이잖아. 더 욕심부리면 탈 난다.’
다른 이들, 멀리 갈 것 없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마저 항상 그렇게 말했다. 레이첼 또한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보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다.
그래도 간혹 욕심이 나는 걸 어떡하나. 가끔은 못된 마음이 들며 질투가 나는데 어떡하나.
레이첼은 아이작이나 에단처럼 근사한 개인 마차를 가지고 싶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저만을 위한 마차. 벨벳으로 안을 꾸미고 우아한 금박 장식을 잔뜩 넣은 편안한 마차를 개인 소유로 두고 싶었다.
‘이런 걸 가질 정도면 분명 남 눈치는 안 봐도 되는 거겠지. 저 인간들처럼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뭐라 못 할 거야.’
“하…….”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니 결국 레이첼의 입에서 두 번째 한숨이 나왔다.
“레이첼. 괜찮은 겁니까?”
맞은편에서 레이첼을 유심히 살피던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끝내 레이첼과 동행한 그는 마차에 탈 때부터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첼은 아이작의 말에 작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차를 보니 괜스레 짜증 난다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에단 그 친구 때문이라면…….”
에단의 이름이 나오자 레이첼의 표정이 조금 샐쭉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갈무리한 채 아이작에게 적당히 웃어 보이고는 창가 커튼을 슬쩍 걷었다.
“아니에요.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랍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밖을 보는 그녀의 말에는 선이 있었다. 아이작은 예전과 묘하게 거리감을 두는 그녀의 태도에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본모습을 보이기 전 레이첼과 교제를 할 때엔 그녀는 제법 자주 어리광을 부리며 그에게 기대 왔다.
‘작은 고양이 같아 귀여웠는데 말이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뭐라 해야 하나. 어리광이나 기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그때와 다르게 그녀는 아이작에게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런 레이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전의 그대 모습이 좀 더 사랑스러웠습니다만.”
“예?”
“아닙니다. 그냥 그대가 걱정스러워서요.”
흐릿한 아이작의 웅얼거림에 레이첼이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 봤다. 그러자 우습게도 불쾌했던 기분이 순간 싹 가라앉았다. 아이작은 저에게 집중하는 레이첼을 빤히 보다 빙긋 웃었다.
레이첼은 아이작이 웃자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힘이 없는 적당한, 예의를 차린 반응일 뿐이었다.
레이첼이 다시 마차 밖을 봤다. 흩어지는 그녀의 집중에 순간 올라갔던 아이작의 기분은 다시금 곤두박질쳤다. 초조함을 느낀 아이작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레이첼…… 가만 생각해 보니 억울해서 못 참겠습니다. 화가 나는군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대의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말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만 안 되겠습니다.”
아이작은 맞은편 레이첼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레이첼이 걷었던 커튼을 소리 나게 쳐 버렸다. 갑갑한 마음에 밖을 구경할 참이었던 레이첼은 이 무슨 상황인가 미심쩍은 눈으로 아이작을 봤다.
“……그대와 단둘이 마차에 있으니 그대에게 들은 말이 떠올라 괴롭군요. 질투가 솟아 견디기 힘듭니다.”
아이작은 레이첼의 가는 손목을 쓸다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레이첼을 마주 보며 소리 나게 손목 안쪽에 입맞춤했다.
‘……아. 이놈까지. 하여간 다들 왜 이런 데서 못 해서 안달인 것인지. 쯧.’
뜨거운 입술을 내리누른 채 그녀를 보는 아이작의 의사는 명확했다. 은근하지만 한편으로는 노골적인 행동에 레이첼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그녀에게 마차 안에서 그 짓을 하자 요구하고 있었다. 꼭 그의 친구처럼 말이다.
“싫어요.”
레이첼은 아이작의 손길을 차갑게 쳐 냈다. 평소라면 좀 더 부드럽게 거절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녀의 기분은 바닥이었다.
“싫다 한 겁니까?”
“네. 싫어요.”
아이작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외인 듯 눈을 조금 치켜떴다. 파란 눈에 약간의 불쾌감이 서렸다.
“레이첼. 그렇게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이번 한 번은 그대가 양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이작이 레이첼의 손을 다시금 잡아 왔다. 조금 힘을 준 그는 어쩔 수 없다면서도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하긴 그 인간이나 이 인간이나.’
레이첼은 아이작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짐 느꼈다. 한때는 다정한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상상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끝은 다른 이들과 같았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않으니깐 나도 장단 맞출 필요는 없지.’
빠르게 빠진 만큼 빠르게 사랑이 식어 버린 레이첼이 아이작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냈다. 이리된 거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하루 종일 경황이 없어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백작님의 태도를 보니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네요. 아니, 다시 말씀드리는 거예요.”
“레이첼, 그러지 말고…….”
“똑바로 들어 주세요. 백작님. 저희 관계는 여기까지인 거 같아요. 전 더 이상 백작님과 관계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아요. 물론 이런 신체 접촉도요.”
아이작이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새초롬히 눈을 내리깐 레이첼을 보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사이의 오해는 풀린 거 아니었습니까? 그대, 내 침대에서 제법 예쁘게 울었잖아요? 난 우리 사이 오해가 풀려 그리 예쁘게 우는 건 줄 알았는데.”
아이작의 말에 레이첼은 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우리 사이 오해? 그게 오해를 푸는 과정인가? 그녀의 기억으로는 그녀 홀로 벌을 받은 기억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강제적이고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가만 생각해 보니 아이작은 그녀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제 잘못이 아님에도 일방적으로 아이작에게 당한 것과 그의 뻔뻔했던 태도가 생각나자 레이첼은 에단 때문에 미뤄 뒀던 미움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화가 머리 끝가지 난 레이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을 섞어 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그와 더는 대화조차 하기 싫었다.
“이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원.”
아이작이 결 좋은 제 은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돌아간 작은 얼굴이 그를 살살 긁고 있었다.
“레이첼. 미안하지만 난 그대와 헤어질 수 없어요. 적어도 이런 끝은 아니지.”
“…….”
시린 벽안이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 레이첼을 훑었다. 그러잖아도 긴장하고 있던 레이첼은 아이작의 시선과 험악해진 말투에 살짝 겁을 먹었다. 에단과 아이작. 두 사내는 권력, 재력 등 모든 걸 제쳐 놓고 체격만으로도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었다.
“그대는 이 얼굴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고운 얼굴이나 이 몸이 아니라면…… 내가 고작 자작가 영애의 투정을 들어나 줄 거 같습니까? 이 내가?”
아이작이 레이첼의 두려움을 눈치챈 듯 몸을 더욱 붙여 왔다. 레이첼의 턱을 집어 든 그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순식간에 드레스를 끌어 내렸다. 파렴치한 손길에 레이첼의 눈이 커졌다.
“이! 비, 비키세……읍!”
사내의 손이 드러난 가슴에 닿았다. 강제적인 상황에 레이첼이 몸을 틀며 반항했으나 아이작은 나머지 손으로 레이첼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쌕쌕대는 숨결이 손바닥에 닿으니 흥분으로 아래의 물건이 빳빳이 섰다.
“내가 그동안 레이첼 그대를 너무 무르게 대했나 봅니다. 하기야 오늘을 제외하곤 늘 내가 투정을 받아 주는 입장이었으니 그대가 착각하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만 그건 일종의 놀이였습니다, 레이첼.”
“으븝! 으……읍!”
“뭐 나름 재미있는 놀이긴 했습니다. 그대가 원체 사랑스러웠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질리는군요. 그대, 분명 거친 게 더 좋다 했지요? 다행입니다. 내가 좀 거칠게 굴어도 용서해 줄 테니……윽!”
발버둥 치던 레이첼이 아이작의 손을 무는 데 성공했다. 날카로운 아픔에 아이작이 손을 떼곤 물러났다. 그의 긴 손가락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붉게 나 있었다.
“이리 세게 물다니요. 아프군요. 벌을 한 번 더 받아야겠습니다.”
“이 나쁜 놈!”
레이첼의 울먹거림이 아이작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이 저를 흘기자 아이작은 어쩐지 뿌듯했다. 전의 간질간질한 교제도 좋았지만 이런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앙칼진 게 제법…….’
한결 기분이 나아진 아이작은 레이첼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어차피 벗어나지도 못할 먹잇감. 적당한 재미로 여흥을 돋우는 편이 그의 취향에 더 맞았다.
‘제 입으로 선택하면 딴소리도 안 할 테고 한 번쯤 저 버릇을 손볼 필요도 있겠지.’
레이첼에게서 물러난 그는 두 손을 느슨히 들고는 레이첼을 훑었다. 그녀에게 물린 손가락이 흥분으로 더 욱신거렸다.
“나쁜 놈이라……. 치사한 데다 내 체면도 있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습니다만 나쁜 놈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이상 나도 에단 그 친구처럼 마차 삯을 받아야겠습니다. 이래 봬도 이거 제법 좋은 마차거든요. 에단의 말처럼 비루한 그대 가문에서는 사기는커녕 하루 빌리기도 벅찰 정도지요.”
“허?”
어처구니가 없는 아이작의 말에 레이첼은 순간 두려움을 잊었다. 그녀는 무례한 아이작의 입을 노려보다 손을 세게 꼭 쥐었다.
‘누가 친구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쌍으로 사람을 가지고 노네, 이 망할 것들이! 내가 미쳤지! 똑같은 놈들이라는 걸 진즉 알고 있었는데!’
레이첼은 에단과 아이작 두 사람을 떠올리며 이들과 왜 엮여 버렸나 자책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처럼 당장 이 시간, 이곳에서 내리기에는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레이첼은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달래며 아이작을 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저를 데려다주겠다 말한 건 백작님이세요!”
“그대가 고집을 부려 나오긴 했습니다만 난 분명 자고 가라 했습니다. 그리고 데려다주겠다고 했지 마차 삯을 받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 탓을 하는 건 곤란하지요.”
“정말 이러실 거예요?”
“나쁜 놈에서 다시 백작님이 된 걸 보면 역시 내리는 건 싫은가 보군요. 하긴 그러니 에단에게도 그리 다리를 벌렸겠지. 잔말 말고 우선 내 앞에 꿇어요, 레이첼. 나도 그대 입을 좀 즐겨야겠습니다. 그게 싫다면 내리든지.”
아이작은 다리를 슬쩍 벌리며 제 앞을 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실실 웃고 있는 모양새가 자신을 가지고 놀며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 얄미운 꼴에 레이첼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좋아. 차라리 내리겠어요. 내려! 내린다고! 내가 치사하고 더러워서 내리고 말지! 야! 마차 당장 세워!”
흔들리는 마차 안임에도 레이첼은 벌떡 일어섰다. 입술을 앙 깨문 그녀의 얼굴은 잔뜩 붉어진 채 열이 나 있었다.
골이 난 채 고함을 지르는 레이첼을 보며 아이작이 눈썹을 슬쩍 올리곤 마차를 두드렸다. 그것이 신호인 듯 마부가 금세 마차를 세웠다.
“참고로 밖은 아주 어둡습니다. 그리고 그대 집까진 한참 남았군요.”
“알아서 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혼자 이 잘난 마차 타고 잘 가세요. 가다가 마차가 엎어져 다리라도 부러지면 더 좋고요.”
갈 길이 멀다 한들 아이작과 있는 시간만큼 길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이첼은 구겨진 드레스를 대충 정돈하곤 마차 문을 열려고 했다.
“잠깐.”
사내의 손이 그녀를 급히 저지했다. 아이작은 레이첼이 정말로 내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당황한 모양새였다.
‘고작 그런 말로? 자존심이 강한 건 알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여긴…….’
“이 거리는 위험하기로 유명합니다. 숙녀 혼자 거닐 거리는 아니지요. 레이첼. 내가 봐 온 그대는 분명 현명했습니다. 그러니 그만 고집부리고 내 말 들어요. 그대에게 좋을 게 없습니다.”
원래 신사에게 양보는 당연히 행해야 할 미덕이 아닌가. 아이작은 자신이 조금 물러서 주마 생각하며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이쯤이면 그녀도 분명 고집을 꺾으리라.
아이작은 돌아올 반응을 예상하며 눈을 예쁘게 접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으니.
쾅―
레이첼은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양 아이작을 흘낏 쳐다보더니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 * *
바이허가의 마차는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주인의 심기가 좋지 못함을 알고 있는 마부는 혼신을 다해 마차를 몰았으므로 마차의 움직임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윌리엄. 마차 좀 살살 몰 수 없나? 머리가 아프군.”
“예에. 알겠습니다. 주인 나으리.”
마부의 노력은 허사였다. 아이작은 심기는 원체 불편했다. 그는 아주 작은 덜컹거림에도 괜스레 짜증을 내며 거의 눕듯 기대앉아 있었다.
‘거기는…….’
레이첼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내린 붉은 등 가득한 거리를 생각하며 몇 번이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끈거리던 머리는 이제 열까지 나고 있었다.
마차를 탈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굴 생각은 없었다. 레이첼은 기분이 매우 저조해 보였고 아이작은 분명 그걸 배려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점수도 따고 다음 만남이 편안할 테니깐.
하나 마차에 단둘이 타고 있으니 에단과 레이첼 간의 일이 생각나며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찌 되었건 레이첼은 제 여자인데 왜?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똑바로 들어 주세요. 백작님. 저희 관계는 여기까지인 거 같아요. 전 더 이상 백작님과 관계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레이첼은 답지 않게 그를 끊어 내려 했다. 간신히 참고 있었던 아이작은 레이첼이 제 요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매정히 관계를 정리하려는 것을 보며 한 줌 남아 있던 인내심을 흘려보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심한 거였겠지? 에단, 그 친구랑 똑같은 짓을 한 거니 말이야.”
말을 뱉을 때는 후회하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이 타고 있던 마차에 홀로 남게 되자 씁쓸한 감정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몰려왔다.
“……다시 돌아가지.”
“예?”
“아까 거기. 레이첼이 내렸던 곳으로 다시 가자 이 말이야. 그런 데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던 아이작은 마부에게 돌아가자 명했다. 자존심은 좀 구겨지겠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레이첼을 그런 곳에 둘 수 없었다. 사고라도 난다면 큰일 아닌가. 여리고 아름다운 그의 연인은 그곳에서 좋은 먹잇감이었다.
“빨리 가지.”
“알겠습니다. 이럇!”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작이 채근하자 마부가 말을 급히 몰기 시작했다. 마차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이작은 몸과 마음이 훨씬 편안해짐을 느꼈다. 마차의 덜컹거림이 조금 전과 다르게 거슬리지도,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지도 않았다. 편해진 몸에 아이작은 결국 제가 졌음을 인정했다. 그는 빠르게 바뀌는 바깥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겠어. 신사가 좋아하는 숙녀에게 약한 건 당연한 노릇이지.”
* * *
뤼드발렌 거리의 밤은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공평하게 내리는 어둠이 무색하게 거리 여기저기 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집과 장식물들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거리는 여러 사람에게 기피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이곳, 그러니깐 뤼드발렌 거리는 여러 꽃이 몸을 파는 사창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서 피어나는 꽃들의 값은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었기에 대다수 손님은 귀족이거나 부유한 상인이었다. 거리는 손님을 가려 받는 만큼 질서가 잡혀 있었고 저 밑 미르실라 지역에 비하면 안전했다. 그러나 본질은 결국 같은 곳. 이곳은 여성,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거닐기에는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이런 거리는 으레 그렇듯 술이 항상 따랐다. 그리고 술이라는 물건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자제 못 하는 인간을 짐승으로 둔갑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어디야? 네가 일하는 가게가 어디냐 이 말이야.”
“이봐! 빨리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대단한 사람들이거든. 너 같은 것이 고깝게 굴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아가씨.”
뤼드발렌 거리는 명성에 비하면 짧은 편이었다. 달리기라곤 큰 이후로 해 본 적 없는 레이첼이라도 빨리 걷는다면 금세 지나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레이첼은 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껏 취한 젊은 취객 무리가 그녀를 잡아 세운 다음 으슥한 골목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레이첼이 눈을 한두 번 깜빡인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년이! 우리를 우습게 보나 보네. 야 이것아. 당장 여기서 그 드레스를 걷어 올려 주랴? 그게 좋다면 계속 뻗대든가!”
사내 다섯의 으름장에 레이첼은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할 말은 한다는 소리를 듣는 그녀였지만 그건 잘 꾸며진 사교계에서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조, 조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전…… 저는 생각하시는 그런 일을 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길을 지나고 있었을 뿐이고…….”
레이첼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만큼 그녀는 이 상황이 두렵고 또 두려웠다.
“이게 뭐라는 거야. 다들 들려?”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동의하나 봐. 그럼 뒤로 돌아, 아가씨.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가게 안이 아니니 당연히 가격은 좀 깎아 주겠지?”
“이런 데서 우리 모두가 놀아 준다는데 돈을 받아야 하는 건 오히려 우리가 아닌가. 이런 계집 하나에 사내 다섯이 봉사하는 거잖나. 하하하.”
레이첼의 두려움을 눈치챈 사내들은 저들끼리 질 낮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
웃지 않는 건 레이첼뿐이었다. 그녀는 저급한 농담보다 사내들의 음습한 눈빛에 질려 버렸다. 번들거리는 눈을 한 그들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저절로 레이첼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는…… 아악!”
사내 하나의 손이 울먹이기 시작한 레이첼의 몸에 닿았다. 놀란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몸을 빼자 다른 사내가 재빨리 레이첼의 뒤로 갔다. 순식간에 사내에게 안긴 꼴이 된 레이첼이 몸을 뻣뻣이 굳혔다.
“하…… 부드럽군.”
“정말…… 살 내음도 좋고. 이봐, 아가씨. 아가씨가 있는 가게는 제법 장사가 잘되겠는걸?”
하나가 손을 뻗자 다른 사내들도 앞다퉈 레이첼을 더듬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이대로면 끝이라는 생각에 소리 지르려 했다. 큰 소리가 난다면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와 줄 터였다. 그러면 그 틈을 타서 도망갈 수 있으리라.
“누구……읍!”
“조용히 해야지, 아가씨. 이 예쁜 목소리로 비명 지르는 것도 좋지만 이런 데서는 오해받기 십상이거든.”
레이첼의 속셈을 간파한 사내 하나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에게 몸을 붙였다. 훅 하고 나오는 사내의 더운 숨결에는 독한 술 냄새가 가득했다.
“으브……읍! 으!”
“가만있어. 그래도 부드럽게 대해 주려 했더니! 이렇게 반항하다가는 재미없을 줄 알아!”
드레스 위 가슴을 움켜쥔 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레이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물만 펑펑 쏟았다. 이런 곳에서 여러 사내에게 범해지다니.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부욱―
부드러운 천은 쉬이 찢겨 나갔다. 하얀 다리가 드러나자 사내들의 눈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망했어. 이대로는 집에도 못 들어갈 거고…….’
자색 눈에 절망이 드리웠다. 레이첼은 앞으로 제 삶이 어떻게 무너질지 예상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런 곳에서 여러 사내에게 당했다 소문이라도 나면 그녀의 인생은 끝이었다.
‘아까 아이작 그 망할 자식한테 그냥 비는 건데. 그냥 잘못했다 하고 비위 맞추는 건데. 괜히 덤벼서…… 괜히 평소같이 안 굴어서는…….’
애블랑 가문은 그녀를 외국으로 보낼 돈이 없으니 어디 먼 시골로 가게 될 터였다. 아니면 가장 못한 자리로 후처나 정부로 들이밀어지겠지. 어쩌면 가문에서 그녀를 버릴지도 몰랐다.
“그만.”
레이첼의 드레스가 허리까지 끌어 올려질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레이첼을 더듬던 사내들의 손이 멈췄다.
“……혹 그대들이 희롱하고 있는 그 여자, 귀족 영애인가?”
나타난 사내는 눈길을 확 사로잡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 가도 보기 힘든 새빨간 머리와 창백한 피부가 으슥한 골목에서도 존재감을 발했다. 하지만 사내에게서 가장 튀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성기사?”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경건함을 상징하는 새하얀 정복. 사내의 옷은 뤼드발렌 거리와 가장 먼 성스러운 신전의 것이었다.
물론 신전에 속한 이들도 자주 이곳 손님으로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이리 대놓고 신전 정복을 입는 경우는 없었다. 상식이 있으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신전에 속한 놈이 이런 곳을 오다니.”
“당장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성기사면 보통 귀족 나으리들 아닌가. 게다가 요즘 신전이 이곳을 조사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내들이 주춤거렸다. 레이첼은 그 틈을 타 몸을 비틀었다. 사내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하얀 정복이 그녀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요 빛이었다.
“이게 어딜!”
“아악!”
레이첼이 도망치려 하자 사내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레이첼의 긴 금발을 잡아챘다.
“멍청한 것들!”
레이첼을 잡아채 바닥으로 팽개친 사내는 무리 중 가장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그는 잠시라도 겁을 먹은 것이 부끄러운지 거친 숨을 내쉬며 갑자기 나타난 하얀 정복 차림의 사내를 가리켰다.
“겁먹지 마! 저렇게 생긴 게 성기사일 리 없잖아! 그리고 이 시간에 성기사가 여기 왜 있어?”
정복 차림의 사내는 미인이었다. 남성이라기에는 가는 얼굴선에 조금 긴 붉은 머리. 게다가 옅은 회색 눈 밑 콕 박힌 눈물점은 붉은 머리카락과 더불어 어딘가 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가만 보니 어느 귀부인과 놀아나는 창놈이구만. 네놈 아랫도리를 즐기는 여편네가 성기사가 취향인가 보지?”
“그러고 보니 얼굴이 참…… 계집이라 해도 믿겠군.”
“하긴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그 옷을 입고 이런 데를 올 리가 없지.”
일원의 말에 무리들은 저들끼리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내가 성기사가 아닌 이곳 거리의 남창일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저놈은 그냥 창놈일 뿐이야.”
“그렇겠지? 이봐! 당장 꺼져. 아니라면 그 곱상한 얼굴을 다시는 못 들게 해 주마!”
스릉―
“여신의 종복인 나를 모욕하는 건 여신을 모욕하는 것. 그대들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무리의 판단은 틀렸다. 차분해 보이던 사내는 무리의 말에 주저 없이 검을 뽑았다. 흰 빛을 뿜으며 드러난 검은 척 보기에도 예리했다.
검날 위 똑똑히 새겨진 신전 문양에 사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건 진짜였다. 신전의 문양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장 거기 서지……!”
사내는 도망치는 무리를 쫓으려 걸음을 뗐다 멈춰 섰다. 정확히는 누군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잡아채 버렸기에 달릴 수가 없었다.
“이, 이봐요!”
“…….”
“구, 구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렇게 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레이첼은 스스로가 조금 뻔뻔하게 느껴졌지만 혼자 있기에는, 특히 이 꼴로 여기에 있기에는 너무도 두려웠다. 다시 저런 사람을 만나면 어쩌란 말인가.
‘이 사람 성기사인 것 같고…….’
게다가 사내는 성기사가 아닌가. 레이첼은 좀 더 뻔뻔해져도 될 거라 생각했다. 자고로 성기사는 약한 이들을, 특히 자신과 같이 위험에 처한 약자를 돕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좀 도와주세요. 발을 삐끗해서 도저히 혼자서는…….”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과 쓰러진 몸은 애처로웠다. 뭇 사내들을 홀리고 다닌 레이첼의 미모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매력이 넘쳤다.
레이첼은 그런 제 미모를 잘 알았다. 그녀는 성기사가 당연히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탁―
하나 레이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와줄 듯 몸을 숙인 사내는 레이첼의 손을 차갑게 쳐 내곤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정말 이곳에서 일하는 여자가 아닙니까?”
레이첼은 내팽개쳐진 제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사내를 올려다봤다. 그녀에게서 한 발 더 떨어진 사내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저 눈은 뭐야?’
어이가 없었다. 살다 살다 저런 시선은 또 처음이었다. 쩌적, 하고 레이첼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참자. 참아야 해.’
레이첼이 머리까지 솟은 열을 겨우 식혔다. 그녀는 괜한 성질머리가 삶을 비극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후였다. 그녀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뒤 사내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신전 인간들은 고지식한 구석이 있으니깐……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걸 따질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아니에요. 제 소개가 늦었어요. 전 애블랑가의 레이첼 애블랑이랍니다. 신전의 기사님 같은데 일단 저 좀 일으켜 세워 주시면 정식으로 인사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상합니다. 당최 이곳에 왜 조숙해야 할 귀족 영애가 있는지. 게다가 그런 옷차림은 숙녀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레이첼의 노력에도 사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는 레이첼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이첼이 숙녀가 아니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숙녀는 얼어 죽을! 아이작 넌 저게 숙녀로 보이나? 난 숙녀는커녕 귀족 영애로도 보이지 않는데.’
“뭐라고요! 숙녀가 아니야? 그리고 내 옷차림이 뭐 어때서요?”
숙녀가 아니라는 말에 에단의 말을 떠올린 레이첼이 발끈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이런 취급을 받는단 말인가. 만나는 사내마다 그녀를 싸구려로 취급했다.
“……말투도 숙녀라기에는. 역시 못 믿겠습니다.”
“아악! 미치겠네! 이봐요! 그래, 내가 만일 귀족이 아니라…… 아니,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못 믿겠다 쳐요! 그래도 약자의 편에 서는 성기사면 당연히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뭘 고민해요! 당장 일으켜 주세요!”
“신전은 신의 아래에 있는 약자만 구하는 법입니다. 신의 뜻을 저버린 이들은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저는 여신의 종. 만일 그대가 그런 이라면 당연히 신의 뜻에 어긋나는 자이니 구해 줄 수 없습니다.”
“야!”
사내의 말에 레이첼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그녀는 좀 전의 교훈 따위 머릿속에서 날려 보낸 채 사내에게 손가락질했다.
“아니라잖아! 아니라고!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그리고 신전에 속했건 말건 너 기사잖아? 기사면 일단 약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거든! 기사 서임 할 때 잤니? 푹 잤어?”
레이첼의 말은 신랄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내는 레이첼을 말에 몸을 움찔거리더니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렇군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대 말이 맞습니다. 내 불찰입니다.”
레이첼은 가까이 다가온 사내를 노려봤다. 그녀의 부루퉁한 얼굴에 사내가 좀 더 손을 뻗었다. 의심 가득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미안함이 가득했다.
“……미안합니다.”
“저도 너무 소리를 높였어요. 죄송해요.”
사내가 사과를 하자 레이첼은 어쩐지 좀 미안해졌다. 어찌 되었건 그녀를 구해 준 이가 아닌가. 일어난 후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생각한 레이첼은 사내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나려 하던 차…….
탁―
“악!”
사내는 다시 그녀의 손을 쳐 냈다.
바닥으로 다시 엎어진 레이첼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너무 황당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그새 다시 레이첼에게서 떨어진 후였다.
“성기사는 기사이기 이전에 여신에게 종속된 몸입니다. 기사 서약보다도 여신에게 맹세한 서약이 우선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만일 신의 뜻을 어기고 타락한 이라면…… 역시 도와줄 수 없습니다.”
‘미친놈.’
사내는 사뭇 진지했다. 레이첼는 그런 사내를 빤히 바라보다 헛웃음을 비실비실 흘렸다. 다시금 슬그머니 분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는 날이네. 아침부터 엮이는 새끼들마다 하나같이 미친놈에 또라이에…… 아악!!!”
“……?”
“됐어! 됐어요! 그럼 난 알아서 갈 테니 그쪽도 알아서 갈 길 가요. 나 원, 재수가 없어서!”
레이첼은 혼자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부어오른 발목이 아파 몇 번이고 주저앉았지만 결국 그녀는 해내고야 말았다.
“아으…… 이거 비싼 건데…….”
레이첼은 쩔뚝거리면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찢어진 드레스가 걸리적거렸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게 어딘가. 레이첼은 그 와중에도 사내들이 드레스를 완전히 찢어 내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이 정도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마차를 탈 수는 있었다.
멀뚱히 레이첼을 보던 사내가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힘들게 걷던 레이첼은 제 뒤를 똑같은 속도로 따르는 사내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왜 따라와요? 여신의 뜻을 어긴 자는 구할 수 없다며! 갈 길 가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대가 그대 말처럼 귀족 영애면 어떡합니까? 그렇다면 난 여신의 뜻도 어기는 것이고 기사로서의 맹약도 어기게 됩니다.”
신! 신! 신! 레이첼은 이교도라도 되고 싶은 심경이었다. 성기사들은 다 저런 족속들인가? 레이첼은 제게 추파를 던지던 몇몇 성기사들을 생각해 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그냥 저놈이 약간 돌아 버린 놈이었다.
“하…… 나보고 그럼 어쩌라는 건지. 그럼 뭐 당신이 판단할 때까지 내가 여기 있기라도 해야 해요?”
레이첼은 톡 쏘아붙이며 사내를 비꼬았으나 사내는 레이첼의 말에 기쁜 듯 물었다.
“그래 줄 수 있습니까? 시간을 준다면 신께서도 언젠가 당신의 정체를 제게 일러 주시겠지요.”
“미쳤어요? 당신과 있으라고? 여기에? 싫어요! 난 집에 갈 거예요.”
상상도 못 한 답에 레이첼이 다시 몸을 돌렸다. 상대를 말자! 하지만 사내는 레이첼에게 한걸음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가는 손목을 홱 잡아끌었다.
“안 됩니다. 적어도 여신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저와…….”
“이, 이거 놔!”
“안 됩니다.”
“싫어! 난 집에 갈 거야! 갈 거라고! 지금도 늦었는데…… 흐윽.”
사내에게서 벗어나는 게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레이첼이 눈물을 보였다. 사내가 당황한 듯 주춤거렸으나 그는 손수건을 꺼내 레이첼에게 주는 와중에도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그대를 따르며 여신께 기도해 보겠습니다. 불경한 일이나 마음속 기도도 자비로운 그분은 들어주시겠지요. 자, 일어나십시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흐아앙!”
끝내 잡혀 있는 손목에 레이첼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에단도, 아이작도, 심지어 오늘 처음 본 사내도! 다들 그녀를 쉽게 제압하고 뜻대로 했다. 서럽기보다 짜증 나는 상황에 레이첼이 펑펑 울며 사내가 내민 손수건을 쳐 냈다.
“어…… 음…… 그러니깐 영애? 아니지, 아직은 모르니깐. 일단 무엇인지 모를 여인이여, 울지 마십시오.”
사내는 말을 더듬으며 레이첼의 얼굴에 직접 손수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순간 골목에서 헐레벌떡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 둘이 레이첼을 향했다.
“야!!!”
“레이첼!!!”
* * *
밤이 깊어짐에 따라 거리에는 욕망을 좇아 온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아이작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으며 혹여나 레이첼이 있나 살폈지만 어느 곳에서도 레이첼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 크지 않은 뤼드발렌. 아이작은 레이첼이 이 거리를 벗어났을 거라 애써 생각했다.
“거기에서 말이야. 릴리 고것이…….”
“호호호. 나리. 이리로 와 보세요.”
“오늘은 거하게 한판 해야지.”
여기저기 들리는 욕망 가득한 목소리들이 그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최악의 상상을 해 버린 아이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창부와 시시덕거리는 취객들을 보다 제 곁에 서 있는 마부에게 다급히 말했다.
“넌 우선 애블랑가로 가서 레이첼이 도착했는지 은밀히 알아봐라. 그리고 사람 몇을 이리로 불러.”
“예? 그럼 주인 나리께서는 어찌 가시려고…….”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아이작이 걸음을 옮겼다. 다급해 보이는 모양새에 마부는 사라지는 주인을 잠시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차에 올랐다.
“애초에 말이야. 왜 귀족 아가씨를 이런 곳에 내려 줘서는…….”
마부가 생각하기에도 그 예쁜 아가씨는 이런 거리에서 딱 변을 당하기 좋은 상이었다.
“차라리 그때 말려 볼 걸 그랬나. 자칫 사고라도 당하면…… 귀족 아가씨가 혼삿길이 막히겠구먼. 쯧!”
* * *
아이작이 레이첼을 찾고 있을 때 에단은 뤼드발렌 거리의 한 가게에서 혼자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못된 계집애! 음탕한 것! 저가 무어라도 되는 줄 알고!!!”
가게 주인은 여자는 부를 생각도 않고 욕을 뱉으며 술잔만 기울이는 에단을 삐죽한 눈을 한 채 쳐다봤다.
‘언제까지 저럴 생각인지 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온 손님은 당장에라도 여러 꽃의 하룻밤을 살 것처럼 굴더니 순식간에 돌변해 술만 달라고 했다.
비싸 보이는 옷차림과 타고 온 말에 웬 횡재냐 속으로 소리 질렀던 주인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손님이 못마땅했지만, 높아 보이는 신분에 심상찮은 분위기를 가진 손님을 건드리기에는 간이 작은 편이었다.
‘속도를 보아하니 곧 진탕 취할 것 같은데 그때 아무나 붙이고 바가지나 된통 씌워야지.’
“한번 제대로 당해 보라지! 그때 가서 질질 짜도 내가 쳐다볼까 보다! 너 같은 건 여기에만 해도…….”
다행인 것은 진상으로 보이는 손님이 곧 취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연거푸 술을 들이켜는 에단을 보며 가끔 쓰는 속임수를 써먹고자 종업원에게 손짓을 보냈다.
“릴리. 저기 저거 보이냐. 일단 옆에 가서 술이나 더 따라 줘. 취하면 말이다…….”
주인이 은밀한 꿍꿍이를 막 실행할 참이었다. 열려 있는 창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바람은 한순간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레이첼! 어디 있습니까?”
잔뜩 취해 있던 에단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밖을 내다봤다. 아이작이 레이첼을 찾고 있음을 확인한 그가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렸다.
“아이고! 이게 뭐 하는!”
주인은 몇몇 손님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것을 봤기에 뛰쳐나가는 에단을 쫓아 나갔다. 그러나 주인이 쫓기 무섭게 에단은 귀찮은 듯 주머니에서 무얼 꺼내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으잉?”
“어머! 금화다!”
짤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것 여러 개가 바닥을 굴렀다. 에단을 쫓던 주인은 당연하게도 방향을 틀어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 * *
“야! 아이작 너 거기 안 서? 레이첼을 여기서 왜 찾는 거야?”
“에단? 자네가 왜……?”
에단과 아이작 두 사람은 조금 전 헤어진 것이 무색하게 금방 다시 만났다. 에단은 아이작에게서 대충 상황을 전해 들은 후 일그러진 얼굴로 거리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얼마나 이 짧은 거리를 뒤지고 다녔을까. 모퉁이가 잘 보이지도 않는 컴컴한 골목에서 익숙한 머리색과 실루엣을 발견한 에단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작도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야!!!”
“레이첼!!!”
레이첼은 으슥한 골목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채 어쩔 줄 모르는 사내놈 하나를 발견했다.
* * *
“감히 누굴!!!”
“에단! 잠깐! 그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첼을 잡고 있던 성기사가 뒤로 넘어갔다.
“어……? 잠, 잠깐만요. 악!”
에단과 아이작. 두 사람을 발견해 안도와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레이첼은 성기사가 쓰러짐에 따라 함께 넘어가 바닥에 뒷머리를 찧었다. 기사가 에단에게 맞고 넘어가는 순간까지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탓이었다.
“레이첼! 괜찮습니까?”
뒤통수가 얼얼했다. 레이첼은 핑 도는 머리를 간신히 가눈 채 부축하는 아이작의 손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놈이지?”
“……으.”
에단은 아이작과 다르게 레이첼을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 주먹에 맞은 기사의 멱살을 잡은 채 기사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뽑아 든 참이었다.
“아니지. 물을 필요도 없지. 감히 함부로 여인을 희롱했으니 죽어 마땅한 죄다.”
에단의 기세는 그가 든 검만큼이나 서늘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이미 기사의 목 주변 붉은 머리카락을 일부 베어 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잠, 잠깐! 잠깐만요! 각하!”
“에단!”
금방이라도 기사의 목이 날아갈 듯한 상황에 레이첼과 아이작이 동시에 에단을 불렀다. 에단은 그제야 눈동자만을 굴려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분은 저를 구해 주신 분이에요! 그러니 검을 거두세요!”
“……구해 줘? 너 분명 울고 있지 않았어? 그리고 그 차림새는?”
“그러니깐 어…… 상황이 이상하게 되긴 했는데……. 하여간 저를 구해 주신 기사님이세요. 머리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라고요!”
에단은 레이첼의 말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는 분명 직접 보았다. 엉망이 된 채 놈에게 붙들려 울고 있는 레이첼을. 이런 거리에서 그런 광경이라면 뻔한 것이 아닌가.
“에단! 검을 거두게. 그가 누군지는 아나?”
에단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이작은 한숨을 쉬더니 손을 들어 하얀 성기사의 정복을 가리켰다.
“차림새만 봐도 모르겠나? 그는 신전 소속이야. 레이첼에게 나쁜 짓을 할 자가 아니라고.”
“우습군. 아이작 너도 알지 않나. 신전 것들이 더 타락했다는 것을. 이곳 뤼드발렌 손님의 반도 아마 신전 것들이라지.”
에단이 아이작의 말을 비웃었다. 그러나 레이첼의 말과 기사를 아는 듯한 아이작의 태도에 에단의 경계는 조금 풀려 있었다. 그는 검을 던져 버리고 잡고 있던 기사의 멱살을 털어 버리듯 놓았다.
“내가 대신 사과하지. 미안하군, 아제프 경. 저 친구가 자네를 못 알아본 모양이야. 에단, 아제프 경을 좀 일으켜 주게. 보다시피 난 레이첼 때문에…….”
“…….”
“그리 보지 말고! 자네가 먼저 실례했잖나. 그는 내가 보증하지. 절대 레이첼에게 해를 끼칠 위인이 아니야.”
“그럼 내가 레이첼을 맡지. 넌 저놈이나 챙겨.”
에단은 아무 대꾸 없이 팔짱을 끼고 있다 갑작스레 아이작과 레이첼의 틈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이작이 뭐라 할 틈도 없었다. 레이첼의 허리를 감고 제 쪽으로 거의 안듯 당긴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레이첼을 빼앗긴 아이작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한숨을 쉰 채 몸을 일으켰다. 불쾌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기사도 방금 전까지 제 멱살을 쥐었던 이에게 부축받기보다는 아는 이에게 부축받는 것이 나을 터였으니.
“괜찮나?”
아이작이 미처 다가가기도 전 기사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얼굴만 본다면 갑작스레 맞은 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한 채였다.
에단이 휘두른 폭력의 잔재는 선명했다. 아이작은 기사의 얼굴 한쪽이 벌겋게 부어오른 것에 미안한 표정을 보였다.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자국은 곧 시퍼렇게 변할 터였다. 그러나 맞은 이나 때린 이나 당사자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소개가 우선이겠군.”
부축도 필요 없을 듯싶자 아이작은 괜스레 무안해졌다. 어색한 분위기에 그는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에단은 물론이요 레이첼 또한 기사의 정체를 모르던 걸 기억해 냈다.
“숙녀에게 먼저 인사 올려야지. 레이첼. 여기는 아제프 경입니다. 아시다시피 여신께 명예를 바친 기사지요. 제가 알기로는 얼마 전 수도로 돌아왔답니다.”
“아! 아제프라면 그 리이트가의…….”
“레이첼도 아제프 경의 명성은 들어 봤지요?”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제프 리이트. 그는 유명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미색 머리카락…….’
신전의 성녀 후보 셋이 장밋빛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를 두고 싸우다 모조리 파문당했다더라. 그리고 기사는 그 일로 성소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더라. 저 멀리 성소에서 시작된 소문이었지만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사교계의 유명 인사인 레이첼 또한 그 소문을 몇 번이고 접했다.
‘가만 보니 얼굴이 정말 예쁘게 생기기는 했네.’
“여기는 레이첼 애블랑. 애블랑가의 숙녀분이네. 보다시피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이지.”
아제프는 레이첼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딴생각을 하고 있던 레이첼은 아제프의 회색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떨떠름하게 묵례를 했다.
‘……괜히 미안하게.’
빨갛게 부어오른 뺨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저를 보는 아제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괜스레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 자네를 때린…… 여기 이 친구는 에단 마일런 후작이네. 성미가 참 적극적이지.”
아이작은 에단을 소개하며 헛기침을 했다. 사과하라는 신호였으나 에단은 아제프가 묵례를 하건 말건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오만방자한 그의 태도에 아이작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먼저 주먹을 날린 건 에단일지언데 누가 보면 아제프가 가해자 같았다.
“그를 대신해 내가 다시 사과하지. 미안하네, 경.”
“괜찮습니다. 그보다 숙녀분께 제대로 사죄하고 싶습니다.”
아제프가 레이첼의 앞으로 오더니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함을 느끼고 조용히 있던 레이첼은 갑작스러운 아제프의 행동에 당황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이 정도까지는……. 뭐…… 저도 잘못한 게 있으니깐.”
가만 생각해 보면 다짜고짜 도와 달라 청한 건 레이첼 그녀였다. 그리고 사실 오해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나. 조금 지나친 구석은 있었지만 성기사들이 꼬장꼬장한 건 유명한 일이었고 수도의 성기사들보다 성소의 성기사들은 더하다 들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떤 꼴일지 몰랐다.
‘……잘못했다간 정말 시골 신전에…… 아니 애초에 집으로 못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고.’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린 레이첼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세상에, 지금 나이가 얼마인데. 신전이라니. 끔찍한 일이었다.
“애초 사건의 발단은 이딴 곳에 저를 떨군 신사분…… 아니, 여기서 내린 저에게 있으니까요. 아제프 경께서는 잘못한 게 없으세요.”
레이첼은 아이작을 보며 일부러 뼈 있는 말을 했다. 평소엔 그녀의 말에 잘 동요하지 않는 아이작이 눈에 띄게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떨궜다. 숙여진 고개가 애처로워 보일 법도 했지만 레이첼은 속으로 그를 향해 온갖 욕을 내뱉는 중이었다.
‘뻔뻔하기는.’
알 게 뭐란 말인가. 분명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내린 그녀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이런 곳에 숙녀를 내려 준 아이작의 잘못이 제일 컸다.
“아닙니다. 수양이 부족해 숙녀분을 못 알아본 제 눈과 마음이 문제입니다. 감히 숙녀분을 그런 타락한 자들과 비교하며 의심했다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괜찮은데…….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아제프 경. 경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몰라요.”
“당연한 일을 주저했지요. 죄송합니다, 애블랑 영애.”
“이만 일어나세요, 아제프 경. 이렇게 계속 계시면 제가 불편하답니다.”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진실함을 보는 눈이 부족해 이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게다가 끝까지 그대를 의심했습니다. 애블랑 영애께서는 진실한 눈물로 제게 진실을 알리려 하셨는데.”
“아니, 알겠으니깐 그만 일어나시면…….”
다시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좋게 풀린 상황인데도 갑갑하고 화가 치미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예를 더럽힌 죄. 목숨으로 갚아야겠지요.”
아제프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와 목숨이라는 단어에 레이첼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신경질적인 비명이 골목을 갈랐다.
“당장 그만둬요! 제발 그만요! 각하! 백작님! 말려 보세요!”
“아제프 경. 지나친 행동을 삼가게. 숙녀께서 두려워하시지 않나.”
레이첼의 다급한 말에 아이작이 정신을 차리고 아제프를 말렸다. 아제프는 레이첼이 두려워한다는 말에 순순히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그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왜 자신의 당연한 행위를 방해하느냐고.
‘말이 안 통하는 작자야. 성녀 후보들은 왜 이런 인간 때문에 싸운 거지? 나라면 관심은커녕 눈길도 안 줄 텐데. 성소에 있는 인간들이 다들 반미치광이라더니 끼리끼리 어울리나?’
아제프의 행동을 저지함으로써 목표를 이룬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매사 극단적인 아제프와 그 때문에 파문까지 당한 성녀 후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이 잘났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 얼굴이 세상에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리고 일단 머리가 멀쩡해야지.
‘그러고 보니깐 아직도 안 일어났네. 망할……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아제프는 레이첼의 불편한 마음을 전혀 눈치 못 챈 듯싶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장 제 사죄를 전할 방법을 생각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제 죄를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애블랑 영애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초조한 듯 연신 레이첼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용기가 필요한 듯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레이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말을 꺼내 들었다.
“제 레이디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더럽힌 그대의 명예, 곁에서 속죄하며 평생 지키겠습니다. 맹세를 허락해 주십시오.”
아제프를 제외한 세 사람은 딱 굳고 말았다. 그가 말하는 맹세. 그건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나올 무게의 말이 아니었다.
기사가 제 레이디를 고르며 하는 맹세.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인, 신분에 크게 구속되지 않는 맹세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귀족들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신분과 빈부의 벽이 엄연히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한때는 낭만의 대명사였던 기사의 맹세에도 신분과 재력을 기본으로 한 값어치가 매겨졌다.
대표적인 예로 각 가문은 저들보다 높은 가문의 레이디에게 사위가 될 기사가 맹세를 바치는 것은 허락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딸의 짝이 될 이가 그보다 낮은 이를 섬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듯 사회적 시선이 있었기에 기사들은 보통 제 맹세를 짝에게 바치거나 저보다 고귀한 신분이나 잘난 가문의 여인에게 바쳤다. 아니라면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비웃음과 가문의 이름값을 떨어뜨렸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보통의 경우라면 후작가 태생의 아제프의 맹세는 귀족들 중에서도 특별히 신분이 귀한 여인들이나 받을 수 있는 맹세였다. 게다가 그는 신전에 속한 몸이 아닌가. 애초, 그의 맹세는 새로 뽑힐 고귀한 성녀의 차지여야지 고작 자작가의 여인에게 가기에는 너무도 큰 값어치를 지녔다.
“경.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 우선 레이첼, 오해는 마십시오. 하지만 아제프 경이 잘 모르는 듯싶어 하는 말입니다. 경. 레이첼이 속한 애블랑가는 자작가네.”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문제는 아제프가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아이작의 말에 뭐가 문제냐는 듯 반문했다. 너무도 태연한 아제프의 태도에 오히려 난감해진 것은 레이첼의 가문을 본의 아니게 깎아내리게 된 아이작이었다.
레이첼은 아이작의 말에 화를 내거나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기사의 맹세가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가문을 낮잡아 보는데 좋아할 이가 누가 있으랴. 새초롬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본 레이첼은 아이작이 그녀를 쳐다보자 대놓고 눈을 피해 버렸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문제가 없지. 어찌 되었건 애블랑가는 귀족가이니 말이야. 하지만 자네 가문에서 자네가 자작가 영애를 레이디 삼았다는 것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상관없습니다. 가문에서 그걸 문제 삼는다면 제 성을 버리면 될 문제이지요.”
“리이트 후작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아이작은 하나뿐인 아들 일이라면 길길이 뛰는 리이트 후작을 기억하며 중얼거렸으나 당사자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손해를 본 건 괜히 말을 꺼낸 아이작 그뿐이었다.
아이작이 입을 다물자 네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제프는 레이첼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가지런히 꿇었던 두 무릎 중 하나를 세웠다.
아이작의 말에 기분이 나빠 가만히 있었던 레이첼이 그제야 기함을 하며 그를 만류하려 했다.
“하! 웃기는군.”
비꼼 가득한 음성이 레이첼 앞을 가로막았다. 에단이었다. 그는 안고 있던 레이첼을 제 등 뒤로 보내며 그녀와 함께 몇 발 물러섰다.
“레이디? 명예? 그럼 만약 레이첼이 귀족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 셈이었지?”
“그건…….”
“이런 것에 대해 사과조차 안 할 참이었겠지. 하여간 너희 성기사 족속들은 변함이 없군. 신분 고하에 따라 달리 움직이는 거 말이야.”
에단이 내민 것은 레이첼의 손목이었다. 그녀의 얇은 손목에는 손가락 자국이 시퍼런 멍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것이 분명한 흔적에 아제프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너. 내가 말하기 전에는 이 애의 몸에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제프는 레이첼의 손목이 저렇게 됐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변명하자면 손목을 가린 드레스 소매와 한 번이라도 아프다 말하지 않은 레이첼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명은 변명. 에단도 살핀 손목을, 쥔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한 건 분명 잘못이었다.
“네놈을 포함한 신전 것들이 하는 일의 끝은 항상 이렇지. 여신의 자비는 무슨……. 차별을 두는 자비도 자비던가.”
“……각하. 조금 전 모욕은 참았습니다만 더는 여신과 그에 속한 이들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신전 것들이라니요. 여신의 밑에서 경건한 수양을 하는 이들에게 적절치 못한 말입니다.”
비꼼의 대상이 신전 전체로 튀었다. 가만히 있던 아제프는 그 자신이 맞을 때도 드러내지 않았던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제법 사나운 기세였지만 에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신전 전체를 곱게 보지 않았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던가?”
“각하!”
“그리고 이 애를 레이디로 모시겠다? 그건 안 되지. 일단 네놈은 자격부터 없어. 이런 상처를 내 놓고 감히 어디서 맹세를 한다는 거지? 너 우선 그따위 명예 운운하며 잘난 척하기 전에 이것부터 사과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응?”
“저…… 저기. 각하? 저는 괜찮은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레이첼이 슬그머니 에단의 뒤에서 나오려 했다. 빨리 상황을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은데 이러면 시간이 지체되지 않는가. 게다가 지나가던 이들 중 몇몇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넌 가만있어!”
“넵!”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레이첼은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에단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첼은 에단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곧바로 답을 한 그녀는 다시 얌전히 에단의 뒤로 몸을 숨겼다.
“네놈이 무릎을 꿇든 네 가문을 버리든 그건 하등 상관 없는 일이야. 하지만 더 이상 멋대로 구는 꼴은 봐 줄 수 없군.”
“각하께서 비켜 주신다면 애블랑 영애께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흥! 그것도 안 되겠어. 당연히 이것도 눈치 못 챘겠지만 내 뒤에 있는 레이디께서 발목도 다쳤더라고. 네 사죄를 받아 주다 몸이 더 상하면 어떡하나?”
아제프는 레이첼이 불편하게 걷던 것을 기억해 냈다. 쩔뚝거리며 힘겹게 걷던 여인을 붙잡아 세웠더랬지. 부끄러움이 온몸을 강타했다.
“레이첼. 괜찮습니까?”
“너도 이미 늦었어, 아이작. 신사, 신사 하더니 이런 건 참 늦어, 응?”
레이첼은 어쩐지 에단의 기분 좋아 보인다 생각했다. 이긴 듯 굴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물론 발목과 손목이 아픈 건 사실이었고 챙겨 준 건 고마웠다. 하지만 레이첼이 생각하기에 에단은 두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본인도 몇 번이고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는 무슨!’
“우리는 이만 가 보지. 치료비가 필요하다면 마일런가로 청구하도록.”
“어…… 어? 각하? 각하?”
레이첼이 속으로 툴툴거릴 때였다. 에단이 갑자기 뒤로 돌더니 레이첼을 들쳐 안았다.
“……저놈들이 안 보이면 다리 아프다 해도 내려 줄 테니 가만히 있어.”
“싫어요. 당장 내려 주세요.”
“아, 좀! 가만히 있어 보라니깐.”
“에단. 레이첼이 싫어하지 않나. 당장 그녀를 놓아 주게.”
레이첼이 버둥거리자 아이작이 얼굴을 구기며 에단에게 다가왔다. 그가 레이첼을 넘겨 받으려는 듯 손을 쭉 뻗었다.
발버둥 치던 레이첼이 저를 향하는 손을 못마땅한 듯 바라봤다. 그녀는 오늘의 상황이 누구로 인해 비롯됐는지 기억했다. 괘씸한 놈……. 레이첼이 냉큼 에단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제 가슴에 이마를 폭 기대자 에단의 얼굴이 한층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아이작의 집에서 당한 수모를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아이작. 이번에는 내가 신사인 모양이군. 숙녀께서 날 골랐으니 말이야.”
* * *
레이첼은 새삼 에단의 능력에 감탄했다. 저와 다른 신기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에단은 손쉽게 마차를 구했다. 바이허가의 마차처럼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차는 적당히 아늑했고 빠른 것이 제법 고급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뭐가?”
마차는 좋았지만 문제는 도착지였다. 레이첼은 자신이 잠시 잠든 사이 애블랑가가 아닌 마일런가의, 그것도 손님 침실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저희 집으로 가신다고…….”
“그 시간에 그 꼴을 하고? 자작이 널 잘도 가만두겠군.”
“…….”
뭐 맞는 말이었다. 사실 이 꼴로 집에 몰래 들어가기란 힘들었다. 들켰다면 분명 몇 달 근신령을 받았겠지.
“걱정 마. 자작에게는 리안나 이름을 빌려 말해 뒀으니. 리안나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줄 알고 있겠지.”
레이첼은 배려 섞인 에단의 말에 조금 놀랐다. 리안나는 에단의 가까운 친척 여동생으로 일단 여인이었으니 애블랑 자작도 안심하리라. 아니 오히려 좋아하겠지. 애블랑 자작은 항상 자녀들이 고위 귀족의 자제와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리안나의 이름이라면 레이첼이 며칠을 외박하건 신경 쓰지 않을 인사였다. 그 리안나가 지금 수도에 없는 것도 모른 채.
“……감사합니다.”
“자작은 아직도 그러는 모양이지? 10년이 넘었는데 어째 변하지를 않는군. 쯧!”
에단이 혀를 찼다. 아비를 향한 비웃음이 담긴 말이었건만 레이첼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비굴했고 또 그녀에게 제 비굴함을 강요하는 편이었다.
“언제까지 그럴 참이라지?”
“……왜요. 아버지가 그래서 좋은 건 각하잖아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와 다르게 주제를 아는 것 같아 좋다면서요!”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아니다, 내가 무슨 얘길……. 됐어. 쓸데없는 말이었어.”
두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언젠가부터 당연해진 침묵이었다.
밤이 더 어두워지자 두 사람의 눈은 무언가를 그리듯 서로를 향해 몽롱하게 풀렸다. 부드러운 침구가 깔린 침대, 편안한 향, 낮은 채도의 불빛. 새삼 분위기가 은밀해졌다.
에단이 레이첼을 향해 먼저 손을 뻗었다. 레이첼은 가만히 그걸 지켜봤다. 그녀도 알았다. 분명 내일이면 후회할 선택이었다. 해가 뜨면 눈을 가렸던 충동을 원망하겠지. 자제력을 잃은 자신을 탓할 게 분명했다.
레이첼과 에단. 그들은 분명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 문제는 그 기억들이었다.
얼마 전 함께했던 밤이 떠오르며 기이한 열감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 * *
에단의 입맞춤은 조급하고 거칠었다. 그는 레이첼의 입술을 넘어 그녀 전체를 삼키려 들었다.
“하아…… 읍!”
뜨거운 숨을 머금은 혀가 입안을 유린하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레이첼은 힘들게 그를 쫓았다. 밀어 내지 않고 버겁게나마 혀를 얽고 숨을 넘기는 모양새가 발칙했다.
레이첼이 허덕이는 동안 에단은 착실히 그녀의 드레스를 벗겨 나갔다. 거친 손길에 드레스가 찢어지다시피 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하나 이미 뤼드발렌 거리의 일로 망가진 드레스였다. 레이첼은 비명을 지르는 드레스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덩달아 에단의 셔츠를 더듬다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여인과는 다른 탄탄한 몸이 벌써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작은 손이 닿자 에단이 흥분한 듯 더 거칠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슈미즈 차림을 한 레이첼은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붙들렸다. 매끈한 다리가 들리고 곧이어 몸 전체가 곧 침대로 던져졌다. 침대는 값어치만큼이나 푹신했기에 등이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튀어 오르는 고개 덕에 시야가 조금 어지러웠다.
“천, 천천히…… 흣!”
에단은 침대에 오르기 무섭게 레이첼을 찍어 눌렀다. 제 몸에 실리는 무게감에 레이첼이 작게 신음했다. 채 벗지 않은 하의 아래 존재감을 나타내는 성기가 흉흉했다. 그녀는 곧 닥칠 쾌감과 고통을 상상하며 몸을 떨다 다시 덮쳐 오는 사내의 입맞춤에 급히 숨을 삼켰다.
벌려진 다리를 허리에 걸친 에단이 레이첼의 슈미즈마저 벗겨 내더니 제 옷 또한 완전히 탈의했다. 바닥 여기저기에 천이 쌓이고 드러난 사내의 성기에 레이첼이 질린 눈을 했다.
‘저런 게 들어오면…….’
꼿꼿이 선 채 배에 붙어 있는 모양새가 두려웠다. 그러나 이미 맛본 기대감이 두려움을 이겼다.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악!”
레이첼의 반응에 에단이 곧장 움직였다. 그의 물건이 들이닥치자 레이첼이 순간 숨을 멈췄다. 입맞춤하며 춤추듯 옷을 벗을 때 아래는 이미 젖었건만 몸을 쪼개듯 꿰뚫는 성기의 크기는 언제나 버거웠다.
처음부터 깊은 삽입이었다. 위를 쑤시는 것으로 시작된 허릿짓이 내벽 이곳저곳을 건드렸다. 델 듯 뜨거운 살덩이가 그대로 느껴져 레이첼은 허리를 움찔거리며 떨었다.
“으응…… 응…… 하아!”
에단이 입맞춤을 멈추자 레이첼의 입에서 새된 신음이 흘렀다. 듣기 좋은지 에단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움직이며 레이첼을 내려다봤다.
제 아래 깔린 하얀 나신이 예뻤다. 에단은 하얀 여인의 뺨이, 제 손이 닿은 피부가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눈을 빛냈다. 그의 몸짓이 조금 전과 다르게 느릿하게 변했다.
“예뻐.”
“흐읏……아, 아앙!”
“정말 예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말을 하며 느긋하게 레이첼을 구경하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레이첼의 가슴을 더듬고 예쁜 색의 유두를 비비며 손장난을 쳤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레이첼이 끙끙거렸다.
“좋아?”
레이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려다 말고 끄덕였다. 거짓을 말해 무엇 하랴. 좋았다. 미칠 듯이 좋았다. 저 혼자 흥분한 것 같아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사내의 손가락이 가슴을 주무르고 허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레이첼이 순순히 인정하자 에단은 보상을 주듯 그녀의 안을 깊이 쑤셨다. 그의 성기가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레이첼이 허리를 들었다 내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흐으…… 응! 으응!”
발칙한 레이첼의 허릿짓에 에단의 몸놀림이 금세 거칠어졌다. 그의 성기가 가장 예민한 곳만 골라 여러 번 찌르고 나가자 레이첼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헐떡였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쾌감에 그녀가 떨리는 손을 올려 애원하듯 사내의 얼굴을 쓸었다.
“흐읏…… 조금만…… 조금만 살살……흡!”
사내의 뺨을 건드린 손이 더듬더듬 부드럽게 내려오다 단단한 가슴을 더듬었다. 미약한 손길이었건만 잘 잡힌 근육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감히 나를 막아서?
“하읏!”
레이첼의 두 손목이 순식간에 붙들렸다 다시 떨어졌다. 저를 막는 손길에 투박히 반응했던 에단은 레이첼의 손목에 난 붉은 자국에 혀를 차곤 조금 부드러이 행동했다. 새파랗게 멍이 든 것이 제 잘못은 아니었지만 보기 안쓰러웠다.
“하아…… 감아 봐.”
잠깐 멈춘 에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이첼이 제 목을 감싸 안을 수 있게 도왔다. 덜덜 떨리는 팔이 겨우 사내의 목을 감고 버텼다.
더욱 가깝게 붙은 피부에 에단은 입술을 내리 물었다. 그가 몸을 낮추더니 한 손으로는 레이첼의 뺨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넘치게 차는 가슴과 달리 끊어질 듯 가는 허리가 한 손에 감겼다.
퍽퍽 몰아붙이는 소리와 함께 맞붙은 접합부에서 난잡한 소리가 났다. 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에단의 몸짓에 느긋함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레이첼이 감당 못 할 정도로 움직이며 마음껏 욕심을 채웠다. 단단한 살덩이가 흉기로 변해 들어갔다가 나오길 수없이 반복했다.
“흐으응…… 하으…… 흣!”
레이첼은 이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사내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얇은 뱃가죽 위로 거대한 성기가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당장에라도 배를 뚫을 듯 확연한 움직임에 레이첼이 발발 떨었다.
에단 또한 맞붙은 피부 아래 제 물건을 느꼈다. 그는 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 몸에 무게를 실었다. 납작하게 짓눌린 여체가 가여웠으나 당장은 제 욕망이 우선이었다.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레이첼이 손톱을 세웠다. 에단의 등에 죽죽 붉은 자국이 길게 그려졌다. 하지만 그조차 에단에게는 쾌락이라 그는 짐승의 소리를 내며 더욱 격렬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촘촘히 얽힌 몸 사이 가장 가깝게 맞닿은 접합부에서 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아으, 응!”
어느 순간 고개를 한껏 젖힌 레이첼이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아치처럼 휘었다. 에단도 끝에 다다랐는지 거친 숨을 훅 하고 길게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안을 뚫고 들어간 성기가 가장 깊숙한 곳에서 정액을 쏘았다.
“크흐…….”
에단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오더니 레이첼이 발등을 쭉 편 채 잘게 떨었다. 접합부에 흐르는 질척한 정액과 함께 흐리멍덩한 보라색 눈이 음심을 자극했다.
절정의 여운에 계속 덜덜 떠는 레이첼과 다르게 에단은 거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곧 온전한 얼굴을 했다. 레이첼 옆에 발랑 누운 그가 레이첼의 금발을 만지작거리더니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해. 한참 지났잖아.”
회한 가득한 목소리는 어딘가 애절했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레이첼은 고개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혼몽한 정신은 듣는 것조차 거부했다.
‘뭐라는 거야. 다시 말…….’
눈을 끔뻑이며 어떻게든 입을 열려고 했으나 잠이 쏟아졌다. 결국 레이첼은 멀어져 가는 에단의 목소리를 듣다 말고 그대로 잠들었다.
* * *
오랜만에 열린 황가의 연회는 홀의 규모에 맞게 시끌벅적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하고 익숙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저마다 모인 사람들은 여러 무리를 이루었다.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열댓 명이 모인 무리에는 규칙 따위 없어 보였지만 멀리서 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상한 규칙의 배열처럼 무리들은 종국에는 두 개로 나누
어져 있었다. 연회장 한가운데 긴 카펫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뉜 사람들은 카펫을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막 입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카펫을 따라 걸어오던 이들은 어느 순간 좌우 중 어느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외국 복식을 한 몇몇 이들이 좌우 모두를 자유롭게 나다닐 뿐이었다.
희한하다 못해 기괴한 광경이었건만 누구도 이상하다 생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반대편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세상에. 오늘도 여전하잖아.”
레이첼은 그런 분위기에 질린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바로 옆 로즈가 입을 삐죽이며 자매의 말을 받았다.
“그럼 대번에 분위기가 바뀔 줄 알았어?”
“하지만 폐하 앞에서도 싸웠다던데 여기서도 한판 할 줄 알았지.”
“그때는 두 분 공작 각하께서 안 계셨잖아. 그러니깐 고삐 풀려 그 짓거리를 한 거야. 알잖아, 몇몇 늙은이들 성질머리 더러운 거.”
“없어 그 정도였지 두 분이 계셨으면 더했을 거 같은데……. 자식들 일이잖아.”
“하긴 핏줄 일이니 두 분 다…….”
“레이첼, 로즈. 내가 이런 곳에서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했지?”
속닥거리던 레이첼과 로즈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렸다. 곧 두 사람의 시야에 금발을 풍성하게 틀어 올린 젊은 귀부인이 보였다.
아름다운 귀부인의 이름은 제인 랑트. 레이첼과 로즈의 언니였다. 비록 몇 년 전 결혼을 해 남편인 랑트 자작의 성을 쓰고 있었지만 눈부신 백금발은 세 사람이 자매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제인 언니!”
“언니! 언제 왔어?”
화가 난 듯 날카로운 눈초리를 한 제인은 두 여동생의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야 하는데. 이런 얼굴을 한 동생들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동생들은 철없었지만 그래도 동생이라고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 입들! 내가 입조심하라 그랬지.”
제인 딴에는 화를 누그러뜨린 목소리였으나 어릴 적부터 제인에게 혼이 나며 자란 레이첼과 로즈의 얼굴은 시무룩해졌다.
“너희도 이제 짝을 찾을 나이인데 언제까지 망아지처럼 굴 거야?”
“하지만 언니. 다들 아닌 척 다 그 이야기인걸.”
“맞아. 다들 속닥거리는데 우리만 조용한 건 억울해. 그리고 욕한 것도 아니고……. 로잘린이 로지오 모나타랑 야반도주한 건 사실이잖아.”
철없는 소리에 제인은 머리가 아팠다. 다들 이야기하고 있으니 떠들어도 된다니. 이 무슨 멋모르는 소리인가. 아무리 작은 일이어도 두 공작가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좋았다.
“조용! 내가 전부터 말했지. 감당 못 할 일에는 관심도 두지 말라고. 야반도주라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제인의 엄한 말에 레이첼과 로즈가 입을 꾹 물었다. 그녀들의 언니는 언제나 현명했으니 따르는 것이 옳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불안한 위치셔. 그러니 너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로즈. 얼마 전에 또 남장을 하고 검술 시합에 참여했다지? 네 형부가 소문을 막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레이첼과 로즈가 입을 다물었건만 제인의 잔소리는 계속됐다. 레이첼은 얌전히 있는 척하다 로즈가 제인에게 지적을 받자 그녀를 쿡쿡 찌르며 웃었다. 몇몇을 때려눕혔다 자랑하더니 이 꼴이 날 줄 알았다.
“레이첼. 네게는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넌 연애 놀음 좀 줄이렴. 네가 사고를 칠 때마다 불안해 수명이 줄 지경이야. 설마 아직도 바이허 백작을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레이첼은 뜨끔해 제인의 눈을 피했다. 아이작과는 얼마 전까지. 아니 당장 일주일 전에도 만났다. 납치당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집에서 그와 뜨거운 시간도 보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안 봤잖아? 헤어지자고도 말했고. 뭔가 애매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그쪽도 나를 안 찾으니 끝난 거겠지?’
제인이 알게 된다면 기함할 일이었으나 레이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헤어진 건 맞으니 잘못한 것도 없었다.
“에이. 언니. 내가 바이허 백작이랑은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그런 말을 해.”
“거짓말! 너 얼마 전에도 바이허 백작하고……악!”
레이첼의 행적을 모조리 알고 있는 로즈는 고자질을 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뾰족한 손톱이 팔을 파고들었다. 로즈가 몸을 비틀며 반항하다 제인과 눈을 딱 마주치고 몸을 굳혔다.
“로즈. 아는 대로 말해. 레이첼이 아직도 바이허 백작을 만나니?”
제인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레이첼 대신 로즈에게 물었다. 로즈는 입을 달싹였지만 레이첼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레이첼. 나는 너를 믿는다. 바이허 백작은 캐틀렛을 따르지 않아. 즉 아버지나 네 형부와 같은 편이 아니라는 말이지.”
“…….”
“네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모나타의 사람인 그와 만나지는 않겠지?”
“물론이야, 언니.”
제인은 레이첼의 답을 한 번 더 들은 후에야 싸늘한 표정을 내려놓았고 레이첼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에게 모나타니 캐틀렛이니 하는 것들은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제인은 그런 문제에 예민했다.
‘다행이다, 헤어져서. 계속 만났으면 언니한테…….’
레이첼이 안도하며 숨을 내쉴 때였다. 긴장을 채 풀기도 전에 제인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더. 레이첼 네가 에단 마일런 후작과 다시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