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사랑이 아니어도 (13/13)

외전3 사랑이 아니어도

천공성에서 천공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수십 구역으로 나뉜 외원과 내원, 성벽을 따라 조성된 숲까지 있어서 마음먹고 숨는다면 며칠은 못 찾기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천공은 내키는 대로 숨었다가 내키는 대로 등장하는 습성을 가졌다. 고로 만약 천공성에서 천공을 발견한다면 절대로 우연한 만남이 아니다.

‘처, 천공 각하다!’

마지막으로 천공이 목격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성을 오가는 시종과 시녀들, 사용인, 병사와 기사도 모자라 귀족 관료들까지 눈이 빠지도록 천공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한 시종이 마침내 천공을 발견했다.

후원의 초목에 가려져 전신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은 분명 천공의 것이었다.

시종은 당장 후원으로 뛰쳐나갔다. 무명 공국을 다스리는 네 명의 공작이 오매불망 천공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천공이 있을 위치로 뛰어가던 시종은 슬슬 걸음을 늦추더니 곧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이 당혹과 경외로 굳어졌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이제야 본 탓이다.

천공은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금발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하얀 맨발 아래로 잔물결이 일며 물그림자가 흔들렸다.

100년 전 반파된 천공성을 재건할 때 만들어진 호수. 그 호수 한가운데에 천공이 서 있었다.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꼿꼿이 서 있음에도 툭 건드리면 물안개로 흩어질 것 같은 신령한 분위기.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조화로이 어우러진 모습. 마치 승천을 앞둔 이무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시종은 압도되고 말았다.

“처, 천공 각하……?”

그래도 천공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제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시종은 한 폭의 아름다운 명화에 먹칠을 하는 듯한 죄악감을 느끼며 가냘프게 천공을 불렀다.

과연 이 거리에서 들릴까 싶은 작은 목소리였으나 천공은 고개를 돌려 시종을 바라보았다. 차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던 시종이 고개를 팍 숙였다.

“다른 공작 각하들께서 찾으십니다.”

찰방거리는 물소리에 이어 잔디가 밟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천공의 목소리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파드득 놀란 시종이 뒤를 돌아보니 천공은 어느새 후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종은 얼이 빠진 채 텅 빈 호수와 천공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절로 흘러나왔다.

“정말로 신은 뭔가 다르구나…….”

천공이 들었다면 아직은 아니라고 정정했을 말이었다.

* * *

테르세오가 오래전에 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아직 천공성에 머무는 이유는 공작들 때문이었다. 초대 공작들이 차례차례 은퇴하고 완벽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지 어언 30년. 파릇파릇한 새내기에서 벗어나 제법 연륜이 쌓인 새 공작들은 유독 테르세오에게 엄살이 심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평균적으로 3, 4일 자리를 비우시더니 이번에는 일주일이나 안 오시다니요.”

“자리를 비우시는 주기도 점점 짧아지는 게 염려스럽습니다. 이러다 성에 안 계시는 날이 더 길어질까 우려됩니다.”

“저, 저, 저희는 아직 독립할 준비가…….”

우다다 쏟아지는 질문과 염려에 테르세오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 없이도 잘만 일하던 녀석들이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무슨 수호 부적처럼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반신이니 수호 부적보다 영험한 건가?’

테르세오는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너희가 선대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이냐. 복창해라.”

“‘자신의 일은 스스로, 어렵다면 다 같이!’입니다.”

“그래. 잘 알면서 내가 없어지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구는구나. 공국이 그렇게 허술하게 세워졌더냐?”

“아닙니다.”

공작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겉보기에는 중년의 어른들이 젊은 청년에게 혼이 나는 모양새라 꼴이 조금 우스웠다. 미리 회의실에서 시종들을 내보낸 게 다행이었다.

테르세오는 봐주지 않고 공작들을 계속 다그쳤다.

“백 년 전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너희 선대가 자기들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퇴보할까 봐 자기 자신마저 경계했지.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단 말이다. 그런데 너희는 내 감시에 의지하는구나.”

“저…….”

“뭐냐, 남녘 공.”

남녘 공작이 손을 들자 다른 공작들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닥치고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눈치채지 못한 남녘 공작이 해맑게 물었다.

“인간의 자기 객관화는 허상에 가깝고 자기 합리화는 피하기 어려우니, 완벽한 기준을 가지신 천공께 감시받는 것이 퇴보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남녘 공, 복창.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하지만 어려운 일은 다 같이-!”

“감시를 나한테 다 맡기고 있는데 뭐가 다 같이냐. 이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느냐? 스스로 감시하지 못한다는 건 성찰할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고, 성찰하지 못하면 반성할 수 없으며, 반성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

“너희는 이대로 정체될 거냐? 지금 키우는 후계에 더 나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공작들은 모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천공의 말 하나하나가 전부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클로이를 닮지 않아 공작 중 가장 과묵한 동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근래 들어 기운이 많이 바뀌셨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식사도 아예 끊으셨고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사실 천공께서 저희가 모르는 사이에 승천하실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걸 왜 그들이 걱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테르세오가 뚱한 표정을 짓자 북녘 공작이 이어받았다.

“저희는 모두 천공께서 수호하시는 공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당신이 없는 공국을 상상할 수 없는데, 당신은 신이 되어 이곳을 떠나려 하십니다.”

신이 특정한 한 나라만을 수호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다만 이것이 공작들을 포함한 공국민에게는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희는 단순히 의지할 수 있는 감시자를 잃을까 봐 당신의 외유를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공국의 신을 잃고, 점차 공국의 위상이 추락할 것이 두렵습니다.”

로디온을 꼭 닮아 소심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서녘 공작도 덧붙였다.

“계속…… 저희의 신으로 남아주시면 안 되나요?”

테르세오는 바로 답변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지 않으면 순간 치밀어오른 분노를 마구잡이로 휘두를 것 같았다.

‘공국의 신? 뭐로 남아? 내가 너희 인간 때문에 신이 되려는 줄 아느냐? 도대체 누굴 믿는 거야!’

테르세오가 세계에 품은 증오는 인간에게도 향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지금의 공작들은 몰랐다. 클로이를 비롯한 초대 공작들이 숨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신이 될 존재가 세계를 증오한다는 이야기는 전승되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테르세오도 동의했고,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숨겼으니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들의 걱정은 타당했다. 그러나 테르세오는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없어 공국이 망한다면 그뿐이다. 공국의 최선이 그 정도였을 뿐인 거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강성했던 제국은 어린 황자의 손에 멸망했고, 영원히 하늘을 지배할 것 같던 신마저 추락했다. 공국이 끝까지 버틴다 한들 언젠가 이 세계는 멸망할 것이며, 테르세오의 증오 또한 그 순간 끝날 것이다.

문득 이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낀 테르세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들이 망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으나 더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천공성에서 나와 아예 세계 밖으로 벗어났다.

* * *

영웅신. 한때 피조물이었으나 피조물로서 불가능한 업적을 이루고 신화를 쌓아 신좌에 오른 신. 주로 멸망을 막아 세계를 구한 영웅이 피조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영웅신이 된다.

테르세오의 세계를 구한 이한결 역시 영웅신이 될 준비를 모두 끝마친 상태였다.

-기다림이 지루하지는 않나요?

테르세오는 이한결의 세계에서 겨우 눈을 떼고 옆으로 다가온 솔애담에게 대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신마다 진체(眞體)를 구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르니 인내심을 잃지 말아요.

이한결은 인간의 삶을 끝내고 신이 되기 위해 영혼 상태로 잠이 들었다. 가장 안전한 세계의 중심부에서 영혼을 중심으로 진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신화가 깃들어 새로운 신으로 태어날 것이다. 테르세오에게도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다만 테르세오는 그 언젠가를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여전히 망설여지나요? 분명히 말하지만 세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

-강지기께서 믿을 만한 신을 소개해 주셨어요. 그 신을 초청하면 당신이 신이 되는 동안에도 세계는 안전할 거예요.

-그렇군요.

나긋한 어조로 친근하게 구는 솔애담을 테르세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겪어본 바에 따르면 이 신은 이해득실 계산에 능하고 맺고 끊음에 있어 상당히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그런 신이 어느 순간부터 신끼리의 격식을 슬쩍 놓더니 몹시 살갑게 굴었다.

‘분명 내가 신이 된다면 이득이라고 계산했겠지.’

그 계산에 테르세오의 모든 면을 반영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테르세오는 조금 삐딱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런데 제가 신이 되는 것이 과연 세계에 좋은 일일까요?

-보통은 그렇죠? 세계를 돌보는 신이 늘어나는 거니까요.

-하지만 저는 세계를 증오하잖습니까.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천룡을 집어삼키고,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다. 스스로 재앙을 자처할 정도로 깊은 증오심은 100년이라는 시간에도 쉬이 희석되지 않았다. 테르세오 본인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결과 함께할 때는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곁에서는 세계를 비교적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옛날로 되돌아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한결을 향한 테르세오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그림자에 증오가 숨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아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은 사랑하는 이가 멀어지자마자 튀어나왔다. 증오하지 않으려던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이한결이 돌아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군요.

-예. 결국 제 안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상태로 신이 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말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테르세오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제가 다시 재앙이 되어, 세계를 멸망시킬 악신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결코 과한 상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한결을 향한 사랑이 세계를 겨눈 증오보다 크다고는 하나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테르세오가 증오를 품은 이상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솔애담도 이견이 없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큰 문제네요. 그렇게 되면 이한결도 무척 괴로워하겠죠.

-맞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전까지는 신이 되지 않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그건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천룡의 신화를 가진 테르세오는 피조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지 않아 아직 반신이었다. 그러나 피조물의 수명은 유한한 법. 억지로 버틴다 한들 끝은 오고 만다.

천룡의 신화를 억지로 품은 육신은 점차 마력으로 화하여 흩어지고 있었다. 매 순간 집중하지 않으면 언제 몸이 무너질지 몰랐다.

테르세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버틸 겁니다. 반드시.

솔애담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으로 테르세오를 바라보았다. 그간 테르세오가 보인 말과 행동, 무의식적인 몸짓, 표정 등을 복기하며 말을 골랐다. 자신이 떠올린 간단한 해결책을 이 어린 신은 왜 떠올리지 못했는지 헤아리던 그가 슬쩍 운을 뗐다.

-한 가지 생각이 났어요.

-대책이 말입니까? 이렇게 빨리요?

-네. 어려운 방법도 아니에요.

솔애담이 이한결이 잠든 세계를 가리켰다.

-신이 된다면 당신이 증오하는 세계가 아닌, 저곳에서 머물면 어떨까요? 증오하는 대상에서 멀리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죠.

테르세오는 멍한 얼굴로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세계를 증오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세계, 이한결을 착취한 세계만을 증오했다.

이한결의 세계는 증오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였다. 그곳에 갈 때마다 테르세오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쩐지 곧바로 긍정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다만?

-제가 떠나면 남은 세계의 운영이 어려워질 텐데요. 전처럼 봉인하는 게 아니니 기상이 정지하지는 않겠지만, 세계를 떠나는 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솔애담은 가벼이 미소 지었다.

-그건 나와 수룡, 화룡이 더 노력하면 될 일이지요. 멸망의 가능성을 하나 지울 수 있다면 조금 바빠지는 것쯤이야 감수할 만하죠.

-아. 그렇군요. 맞습니다.

테르세오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껄끄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는 입가를 연신 쓸어내렸다.

분명 솔애담의 대책은 괜찮았다. 그리 어렵지도 않아 간단하게 실행할 수 있고, 그 효과도 확실했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달갑지 않았다.

‘왜 지금 그 녀석들이 떠오르는 거지?’

테르세오의 머릿속에 무명 공국의 네 공작이 떠오르더니 연쇄적으로 몇몇 인물들이 나타났다.

초대 공작인 클로이와 지클린데, 슐레이만, 로디온부터 세르티아나, 엘바차 남작, 엘다. 나아가 체드로 백작과 여러 귀족, 반란군 세력, 평민 아이들, 천공을 칭송하던 백성들.

그가 증오하여 죽인 모든 이와 그를 증오하며 죽은 모든 이. 어지럽게 떠다니는 얼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테르세오는 알 수 없었다.

-왜 아직도 망설이나요?

왜 그는 증오하는 세계를 떠나지 않았는가. 왜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가.

-저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의 그물을 펼쳐 의미 없는 상념, 연관 없는 기억들을 건지니 남는 게 없었다.

할 말이 궁해지자 점점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테르세오는 심상에 어설프게 가라앉은 단어들을 긁어모아 힘겹게 문장을 만들었다.

-저는 그들이 나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답일까? 그는 좀 더 가다듬었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얼기설기 이어 붙인 문장에 꼬리가 달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테르세오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건 모순이었다. 그렇게나 증오하면서 나아지는 모습이 보고 싶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솔애담은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럴 수 있지요.

-뭐가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제가 말해놓고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대의 내면은 무척이나 복잡해요. 세계를 향한 가장 강력한 감정은 증오겠지만, 그것뿐만은 아니겠죠. 그리고 때때로 감정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끼리 부딪쳐 뜻밖의 작용을 하기도 하지요.

-제가 세계에 증오가 아닌 다른 감정도 느낀단 말입니까? 그게 뭐죠?

-내가 그대의 감정을 가늠해도 된다면, 나는 그걸 책임감이라 부르고 싶네요.

테르세오는 아직 솔애담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던 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제가 왜 책임감을 느낍니까? 증오하는 대상을 책임지려는 건 이상합니다.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죠. 그래도 짐작해 본다면, 이미 한 번 나아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에는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점점 더 나아질 거야. 설령 뒷걸음질 치는 순간이 오더라도 고개까지 돌리지는 않겠어.’

클로이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녀를 비롯한 초대 공작들은 일평생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테르세오는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부끄럽다 하여 과거를 지워 버리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겠지. 나는 제국 황실의 마지막 후예로서 모든 기록을 전하겠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회피하지 않고 선조의 죄업을 짊어진 세레나. 그녀는 몇 번이고 도망쳤을지언정 진실마저 내던지지는 않았다. 부끄러운 과거를 짊어졌으나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다.

이렇듯 끔찍하게 증오하는 세계에도 더 나아지려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수일지라도 그런 사람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제야 테르세오는 인정했다. 그는 나아가는 이들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그들로 인해 세계 또한 더 나아지기를 바랐다.

-단순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책임감이라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정말로 단순한 마음이었다면 세계를 떠나라는 제안에 망설이지 않았겠죠. 증오하는 세계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은 수준 높은 책임감에서 비롯되었을 거예요. 세계가 또다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책임감이요.

솔애담은 속 시원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런 책임감을 가졌다면 악신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설령 될 것 같아도 다른 세계로 떠나면 될 테니,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네요.

-아.

새삼스럽게도 이 대화는 테르세오가 신이 되느냐 마느냐에서 시작되었다. 테르세오는 대화가 어떻게 흐르든 자기 이익을 놓치지 않는 솔애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애담은 테르세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

-세계를 사랑하지 못하고 증오한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 책임감으로 세계를 살피겠죠. 사랑이 아니어도 좋은 신이 될 거예요.

테르세오는 이한결의 세계를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세계가 있었다. 두 세계를 오가는 시선의 온도 차는 극명했다.

정말로 괜찮을까? 사랑이 아니어도? 끊지 않고 고민을 잇던 테르세오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런 고민 자체가 책임감에서 오는 것일 테지.’

그는 오직 이한결과 함께하기 위해 온전한 신이 되고자 했다. 그런 그가 반신 상태로 버틴 건 정말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책임감이 없었다면 세계를 증오한다는 이유로 신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오랜 노력 끝에도 결국 세계를 사랑하지는 못했다.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책임을 피하지 않는 신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걱정하던 부분이 다 해결되었나요? 강지기께서 소개해 주신다는 신을 만나러 가볼래요?

테르세오의 심경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솔애담이 넌지시 물었다. 테르세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 * *

테르세오의 호출에 바쁘디바쁜 네 공작이 모두 모였다. 천공이 냉정하게 떠나 버린 게 고작 며칠 전이었던 터라 공작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섭섭함,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자신을 상석에 두고 둘러앉은 그들을 훑어보던 테르세오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난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었다.”

공작들이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이곳을 증오하기 때문이었지. 사실 나는 여전히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증오스럽다.”

“저, 저희는 그런 말씀 처음 듣습니다!”

“초대 공작들과 논의한 끝에 전하지 않기로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숨기려니 영 피곤하더군. 너희가 알는지 모르겠다만 증오하는 것을 살피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

테르세오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공작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당연하게도 찌그러진 얼굴마다 혼란과 당혹이 가득했고, 슬픔이 엿보여 조금 놀랐다. 그리고 의외로 단 한 명도 분노를 보이지 않았다.

북녘 공작이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을 저희에게 밝히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을 알아야 너희가 제대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테르세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들어라. 나는 세계를 증오하는 반신이다. 인간의 수명이 끝나면 세계를 증오하는 신이 될 것이다. 결코 너희가 ‘공국의 신’이라며 모실 만한 존재가 아니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며칠 전 테오를 가장 분노케 한 단어는 ‘공국의 신’이었다. 초대 공작들의 진일보를 후퇴시키는 단어이자 테르세오에게 기대어 나아가지 않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다만 내가 떠나려는 이유는 내가 너희를 증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녘 공작이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자 옆에 앉아 있던 남녘 공작이 그를 끌어 앉혔다. 남녘 공작도 표정이 무척 어두웠으나 서녘 공작을 붙든 채 테르세오의 말을 기다렸다.

“신이 특정한 하나의 나라를 수호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수룡과 화룡만 해도 어느 한 곳에 적을 두지 않지 않더냐. 따지고 보면 그동안 공국이 특혜를 입고 있던 셈이지.”

“아…….”

“그, 그렇게도 볼 수 있군요…….”

공작들이 하나같이 탄식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오래 지속된 특혜는 당연한 권리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마치 자신의 것을 빼앗긴 기분이겠지. 사실은 없는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 공국은 천공이라는 절대적인 힘 없이 나아가야 한다.

테르세오는 엄하게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천공성이라는 이름부터 버리고 새로 지어라. 필요 없다는데 굳이 만들어둔 내 방도 정리하고, 나와 관련된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면 차라리 신전을 작게 마련해라. 그리고…….”

지금 말하려는 것은 오래전부터 망설이던 것이었다. 하지만 공국과 공작들이 바뀌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공국에 붙일 새로운 국호(國號)를 정해라.”

이 세계를 구하다 이름을 잃어버린 이한결의 고통을 기리기 위해 테르세오는 공국에 이름을 주지 않았다. 천공의 존재가 특혜였다면, 무명은 일종의 징벌이었던 셈이다.

둘 다 테르세오가 내렸던 만큼, 특혜를 거둬가면 징벌도 거두는 것이 옳았다.

공작들은 부담감에 짓눌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세오의 떠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느끼자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래도 전처럼 우는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쯤에서 불안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조용하군.”

동녘 공작이 조용히 대답했다.

“저희도 생각이라는 것을 합니다.”

“동녘 공, 구체적으로 얘기해야지.”

북녘 공작이 나무라자 동녘 공작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천공께서 안 계신다고 공국이 무너진다면, 그저 공국의 최선이 그뿐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공국의 최선은 우리 공작들의 최선이 아닌가, 정말로 우리끼리는 공국을 이끌 수 없는가 자문했습니다.”

동녘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최선은 선대로부터 이어졌습니다. 선대께서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선대부터 지탱해 온 공국이 우리 세대에 무너지면 아주 창피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대와 우리의 최선이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공국을 지켜낼 겁니다.”

북녘 공작이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테르세오의 말에 대오 각성하여 마음가짐을 바꿨다는 소리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테르세오는 괜한 핀잔을 참으며 근엄하게 맞장구쳤다.

“그래.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는 거다. 선대로부터 이어진 최선이 다시 후대로 이어진다면, 공국의 최선은 계속해서 나아지지 않겠느냐.”

테르세오의 어조가 조금 부드러워지자 공작들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여전히 그가 떠나는 것이 불안하고 걱정되지만, 지금의 마음가짐만 잊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럼 천공께서는…… 고, 곧 떠나시는 건가요?”

“그래야지.”

“너무 아쉽고 기분이 이상합니다. 천공께서 공국을 떠나신다니…….”

“온전한 신이 되신다면 이제 다시는 만나 뵐 수 없는 겁니까?”

테르세오는 어떻게 설명할지 잠시 고민했다.

“대체로 신들은 피조물의 사회에 크게 관여하지 않지. 하지만 나는 세계를 두루두루 돌아볼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이곳에 도달할 날도 오겠지.”

공작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들은 앞다퉈서 테르세오가 다시 왔을 때 더 나은 모습으로 반기겠다고 맹세했다. 테르세오는 그 맹세를 모두 받아들였다.

* * *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는 테르세오는 곧장 신이 될 준비를 했다. 신화는 이미 있고, 인간의 육체는 오래전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가 없는 동안 세계가 안전할 수 있도록 대비만 하면 됐다.

강지기가 솔애담과 테르세오에게 소개해 준 신은 인상이 제법 독특했다.

인간 여성체의 모습으로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 내렸고, 똑같은 색의 눈동자는 심유한 빛을 띠었다. 등에는 얇고 기다란 짐을 멨으며, 아래로 갈수록 넓게 퍼져서 온몸을 가리는 겉옷은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주변과 동화되는 게 인상적이었다.

-반갑소. 윤슬이라 하외다.

말투가 굉장히 독특한 윤슬은 테르세오가 신이 되는 동안 세계를 유랑하며 지킬 예정이었다. 상당히 격 높은 신으로 보였기에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테르세오는 마지막으로 이한결의 세계를 눈에 담았다. 솔애담이 물었다.

-긴장되나요?

-……예. 생각보다 떨립니다.

죽음을 각오했을 때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전부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반면, 부활이 예정된 지금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삶을 생각하게 되니 조금 막막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더는 망설이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사랑하는 동반자가 있고, 사랑하진 않지만 지켜보고픈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테르세오는 육체의 붕괴에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곧 그의 몸은 마력으로 화하여 산산이 흩어지고, 영혼은 세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허공에 남은 여의주가 솔애담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이제 진체가 완성되기만을 기다려야겠네요.

완성된 진체에 신화가 담긴 여의주가 깃들면 마침내 새로운 신이 탄생하리라.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신이. 그 신은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은 신일 것이다.

<외전3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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