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예언의 결말 (10/13)

10장 예언의 결말

이한결이 미리내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테오를 구하기 위해서는 재앙을 막는 동시에 그의 염원을 꺾어야 했다.

미리내를 뽑아 깨어날 재앙은 재해의 기운이 쌓인 여의주에서 힘을 끌어 쓸 터였다. 직접 죽이는 것보다는 여의주를 빼앗는 쪽이 최선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염원을 다뤄야 하므로 예언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공국에서 예언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난 못하네. 할 수 없어.”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세르티아나 님.”

세레나는 옛 황족의 핏줄이자 대예언자 에스겔라의 마지막 제자였다. 천공이 대대적으로 예언자를 숙청하고 예언 활동을 금지한 이후 남은 유일한 황실 예언자이기도 했다. 천공 때문에 일반인처럼 살았다지만 타고난 재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천공이 사라진 이후에도 예언자로 복귀하지 않고, 남녘성에 의탁해 슐레이만을 돕고 있었다.

제국이 망한 뒤로 자취를 감춘 예언자 중에서 실력 있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가까이 있는 세레나를 설득하는 게 더 효율적일 거라는 게 모두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세레나는 상당히 완고하게 그들의 계획에 반대했다.

“나는 지금까지 테르세오가 하자는 대로 다했네. 그가 내 목숨을 살려놓을 거라 판단했기에 그랬지. 우리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고, 그 관계는 3년 전에 다 끝났어.”

언제나 생존을 갈구하던 세레나에게 테오를 구하는 작전은 너무 무모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자기 세대에서는 세계가 멸망하지 않을 거라 안도했는데, 까딱 잘못하면 곧바로 멸망할 수도 있는 계획이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을 설득하러 온 클로이를 역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세계는 멸망하게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굳이 그 시기를 앞당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대로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게 더 좋은 일일 게야.”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평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세르티아나 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대들의 작전이야말로 약속된 평화를 희생하자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영웅과 테르세오는 상황의 다르지. 적어도 테르세오는 스스로 선택했으니까.”

이렇게 나오면 클로이도 할 말이 없었다. 기실 세계의 운명을 그들끼리 정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이 세계의 신인 수룡과 화룡이 동의했다지만, 인간으로서는 번민할 수밖에 없었다. 클로이는 하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오랜만이네, 세레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세레나는 클로이를 노려보았다. 클로이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이한결이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네 말대로 세계의 명운이 걸린 문제를 우리끼리 정하는 건 옳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테오도 마찬가지고, 나에게 염원초를 먹인 어느 황족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지.”

“제 죄책감을 끌어내시려는 겁니까?”

“그런 의도는 아니야.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 세계는 잘못된 희생으로 유지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마무리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잖아.”

세레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토해내듯 말을 쏟았다.

“그럼 단 한 사람을 구하려다 실패하여 발생하는 멸망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 서서히 말라붙어 스러지는 것보다 낫습니까? 아니, 사실 아름다운 멸망이 있기는 할까요? 막을 수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면, 차라리 더 오래 버티는 쪽이 낫지 않습니까?”

비명에 가까운 세레나의 주장에 클로이는 숨을 죽였다.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테오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녀는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세레나는 지금 아무런 상황조차 모르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이한결은 세레나의 모든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곱씹은 뒤 운을 뗐다.

“네 말대로 멸망이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 세상에는 우리보다 네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고. 우리 멋대로 세상의 운명을 정하는 건 끔찍한 일일 거야.”

“그걸 아시는 분이……!”

“하지만 세레나, 내 말을 들어줘. 내가 테오를 사랑하기 때문에, 테오가 나를 구했기 때문에 그를 구하겠다는 사견은 빼고 말할게. 너는 우리의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나는 성공할 자신이 있고, 그 근거도 있어.”

이한결은 아주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회귀를 반복하느라 잊었던 수많은 기억 중 한 가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세계의 창조신이 굳이 다른 세계의 용사를 불러온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이 세계는 예언과 염원이 이끌어간다 해도 무방하지. 그리고 그 힘을 향유하는 이들이 적을수록 예언의 실현 가능성은 커져. 지금 가장 예언을 강력하게 다루는 사람은 단연 테오고 말이야.”

“잘 아시는군요. 그래서 제가 그 계획에 반대하는 겁니다. 이 세계에서 그 누구도 염원과 예언으로 테르세오를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잖아.”

이한결이 나직이 말했다.

“그건 이 세계의 법칙일 뿐이고 나는 다른 세계 사람이잖아.”

“아! 그렇다면!”

클로이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세레나도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테오의 염원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내가 개입하면 틀어버릴 수 있어.”

세계 밖의 인물이라면 예언을 깨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기에 이 세계의 창조신은 이계의 용사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한결은 이미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세계를 구해 낸 전적이 있었다.

“약속할게, 세레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획이 실패하는 일은 없도록 할 거야. 성공만 한다면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을 때보다 세계는 더 오래 유지되겠지. 부디 나를 믿어줘.”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집중해서 이한결을 응시하던 세레나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고뇌에 찬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이 선택이 옳다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웅님께서 제 마음을 움직이시는군요. 미약한 재주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한번 해보겠습니다.”

세레나의 마음을 알기에 이한결과 클로이는 드러내고 기뻐하지 않았다.

“어려운 결심 해줘서 고마워.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함께 세계를 지켜봅시다, 세르티아나 님.”

“실질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승리를 예언하는 것 정도입니다. 하지만 테르세오의 염원을 이기려면 저 혼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레나는 마음을 정하자마자 바로 작전을 구상했다. 두 사람은 그녀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혼란을 피하려면 계획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서둘러 실행해야 하는데, 짧은 시간 내에 다른 예언자를 찾기는 어렵겠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 낫습니다. 공작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모아 염원제를 지내게 하시지요.”

“염원제?”

“신분이 어떠하든 사람은 누구나 염원을 지닙니다. 염원제를 열어 그 염원들을 하나로 모은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클로이는 곧장 이 아이디어를 다른 공작들에게 전했고, 아이디어는 구체적인 계획이 되어 다른 귀족들에게로 전달됐다. 영지를 가진 모든 귀족은 영주성을 개방하여 가장 큰 회장에서 염원제를 열었다.

재앙을 이겨내는 승리 예언을 위한 염원만을 얻으려면 영지민 관리가 중요했다. 생업 종사자들을 제외하고 각 가구당 1명씩, 돌아가면서 염원제에 참석하도록 만들었다. 또 염원제에 참석하면 곡식을 나누어 주었고, 무엇을 염원해야 할지 꾸준히 주지시켰다.

‘용을 죽인 검이 다시 한번 세계를 구해내리라.’

곧 영웅과 재앙에 관한 소문이 국경 밖까지 퍼져 나갔다. 공국과 이웃한 왕국들과 그 너머 도시들까지. 전 세계인의 염원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도 해야 할 일을 하죠.”

염원제의 불길이 전 세계로 번지는 동안 이한결을 비롯해 재앙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은 전쟁을 준비했다.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질 전대미문의 전쟁을 대비해 인구 대부분이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전투 능력이 모자란 슐레이만과 로디온은 피난민을 통솔하였고, 수룡과 화룡은 힘을 합쳐 봉쇄선을 세웠다. 대마법사 클로이와 전직 변경백인 지클린데는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과 마법사, 유일한 예언자인 세레나와 함께 수도에 남았다.

군량미를 비롯한 자원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준비 기간은 2주로 잡았다. 그동안 세레나는 지문이 닳도록 예언 카드를 뒤집었으나 승리를 점치지는 못했다.

“불의 카드 정방향, 검의 카드 역방향, ……세계의 카드 역방향.”

앞의 두 카드는 변해도 세계의 카드가 계속 역방향으로 나오니 결과는 같았다. 이한결은 세레나가 아무리 정성껏 카드를 뒤섞어도 꼭 세계의 카드가 나오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예전에 루키오도 너처럼 카드로 점쳤었는데 마지막 결전이 꼭 이랬었어. 그때는 카드가 이렇게 구체적이지 않고 그냥 트럼프 카드였거든? 뽑는 족족 같은 카드만 나오는데, 그 녀석 표정은 점점 굳어지니까 살 떨리더라. 부정 탄다고 끝까지 설명하지도 않았고.”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좋게 끝났으니 굳이 전승하지 않은 거겠지. 우리가 이기고 난 뒤에는 점 따위 다 소용없다며 카드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고.”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기억이 나쁜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이한결은 루키오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세레나가 카드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한결이 그녀에게 연고를 건넸다. 부르튼 살갗에 바르는 약이었다.

“설령 끝까지 승리 예언이 나오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 포기하지 말고 우리를 응원해 줘.”

이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레나는 안전을 위해 소수의 병사와 함께 수도의 가장 끝자락에 숨어 있었다. 천공성과 상당히 떨어져 있어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승리 예언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쟁을 이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2주만 해도 이미 많은 자원이 소모됐다. 이한결은 세레나를 뒤로하고 공성으로 돌아갔다. 수룡과 화룡, 클로이를 비롯한 정예 병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전원, 영웅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한결은 고작 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 병사를 훑어보았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이 모두 용사이자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들을 승리로 이끌 책임이 있었다.

“모두 살아남읍시다.”

긴말할 필요 없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이한결의 등을 받쳤다. 이한결은 신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봉인된 신역에 누워 있는 테오는 2주 동안 아무런 변화 없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이 될 때마다 이곳을 찾았던 이한결은 조심스럽게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필코 살려내겠다는 다짐이자 염원의 의식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모두 마친 이한결이 미리내를 잡았다.

“뽑는 순간, 시작되는 거지?”

-그래.

“설마 과다 출혈로 죽지는 않겠지?”

-이 아이 또한 신격을 갖추었으니 쉽게 죽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네.”

이한결은 흐리게 웃고는, 이를 악물고 미리내를 뽑아냈다.

슈아악!

크게 들썩인 테오의 몸에서 어두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검붉은 빛이 용의 형상이 되어 치솟았다. 불길하고 섬뜩한 기운이 날름거리듯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미리내를 뽑자마자 뒤로 훌쩍 물러났던 이한결은 그 형상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천룡……!”

800년 전 세계를 유랑하던 시절 만났던 존재. 단 한 번뿐이지만, 그 위용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백금빛 비늘과 푸른 갈기를 휘날리며 아름다운 광채를 두른 몸으로 하늘을 유영하던 천룡. 그 신은 이제 피보다 짙은 독기를 뿜고 번개가 튀는 가시를 품은 재앙이 되었다.

콰과과과과과과!

거대한 재앙룡이 영웅성 일부를 무너뜨리고 후원의 숲을 짓밟으며 내려앉았다. 용이 내딛는 곳마다 화염이 일며 잿빛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용을 둘러싼 독기에 아름답게 꾸며진 초목이 검게 물들어 시들어갔다.

이한결은 서둘러 테오를 찾았다. 그는 재앙룡의 문드러진 앞발에 쥐어져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몸이 마치 시체 같았다.

“지금!”

이한결의 외침에 수룡과 화룡이 재앙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룡은 머리, 화룡은 꼬리에 달라붙어 움직임을 제한했다. 재앙룡의 크기가 월등하게 컸으나 두 용이 달라붙으니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독기가 너무 강해! 모두 대비해라!

-으아아아아! 우리도 오래는 못 버틴다!

재앙룡이되 일종의 신이라고 할 수 있기에, 수룡과 화룡이 직접 나서서 죽일 수는 없었다. 두 신 중 하나라도 신살 신화를 얻어 신벌을 받으면 세계 운영에 차질이 생긴다.

악룡을 죽여 준신벌에 시달렸던 이한결도 직접 죽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

또한 신화의 강이 생겼다고는 하나 신살 신화는 그곳에 버릴 수 없었다. 강지기는 그런 강렬한 신화는 다른 신화와 섞이지 못할 것이며, 미친 신들이 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처치 곤란한 신화였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재앙을 막아야 했다.

“돌격하라!”

“포격 시작!”

기사와 마법사들이 공격에 들어갔다. 기사들은 꼬리를 맡아 독기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오러를 날리거나 투척 무기를 던졌고, 마법사들은 몸통을 향해 온갖 공격 마법을 발동시켰다.

신에게 가하는 인간의 공격은 미약했으나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 화력이 이어질수록 독기가 출렁이고 번개가 끊겼다. 그러나 이 화력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한결은 재앙룡의 머리에서 눈 같은 급소를 공격하며 앞발에 접근했다. 바람 같은 하얀 오러가 검게 번들거리는 재앙룡의 비늘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다가오는 이한결을 본 재앙룡이 앞발을 숨기며 크게 몸부림쳤다.

-끼에에에에!

신이었던 재앙의 비명에 인간들의 공격이 주춤했다. 수룡과 화룡이 신력을 일으키며 몸통을 조였다. 그러자 물이 독기를 씻어내고 불은 번개를 집어삼켰다.

오러로 몸을 보호한 이한결이 미리내에게 물었다.

“테오에게 여의주가 있는 게 맞는 것 같지?”

-저렇게 숨기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테오는 천룡에게서 빼앗은 여의주를 삼켜 보관했다. 천룡의 신화 기록이자 재해의 기운이 쌓인 여의주를 빼앗는다면 재앙룡은 힘을 잃을 터였다.

문제는 재앙룡이 테오를 꽉 붙잡고 있다는 거다. 문드러진 앞발은 테오를 거의 감싸고 있었다. 앞발 주변은 번개를 머금은 가시가 잔뜩 곤두섰고, 독기가 유독 짙었다.

이한결이 앞발만 자르기 위해 몇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막혔다.

‘잘못 공격하면 테오가 다친다!’

재앙룡도 이한결이 테오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가 공격하려 할 때마다 앞발을 움직여서 방해했다. 수룡과 화룡 또한 제압 이상으로 손을 쓰지 못하자 재앙룡이 본격적으로 날뛰었다.

-끼에에에에! 키에엑!

재앙룡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수룡과 화룡을 매단 채 몸을 뒤틀었다. 두 용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으나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재앙룡의 원본인 천룡은 사룡신 중 가장 강했다.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이한결이 재앙룡의 앞발을 자르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거칠게 흔들어대느라 도저히 조준할 수 없었고, 다른 앞발까지 써서 테오를 꽉 붙잡기까지 했다.

이한결은 몇 번이고 재앙룡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으나 앞발을 자르지는 못했다.

‘젠장, 결국 그 방법을 써야 하는 건가?’

기사와 마법사들은 재앙룡의 발버둥을 피해 공격 범위 밖까지 물러났다. 머리와 꼬리를 붙든 두 용의 몸이 자꾸만 들썩였고, 몸통은 반쯤 떠오른 상태였다. 시간을 끌지 말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이한결은 수룡의 몸을 타고 올라 재앙룡의 머리로 향했다. 아직 용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머리에는 뿔을 닮은 거대한 가시가 두 개 자리하고 있었다. 두 개의 가시 중 하나는 다른 것에 비해 가늘고 비교적 물러 보였다.

재앙룡은 이한결이 자신의 뿔을 노린다는 것을 감지해 머리를 땅에 들이박았다.

쾅!

이한결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머리를 옥죄고 있던 수룡이 크게 신음했다. 재앙룡은 멈추지 않고 다섯 번을 연달아 땅에 부딪혔다. 땅이 깊게 팰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 일었다.

-크흑!

결국 수룡이 힘이 빠져 머리 쪽 제압이 풀렸다. 재앙룡은 분풀이를 하듯 수룡을 물어뜯었다. 삐죽삐죽한 독니가 수룡의 비늘을 꿰뚫었다.

-안 돼!!

화룡이 비명을 지르며 재앙룡의 꼬리를 물었다. 대비 못 한 공격에 재앙룡이 입을 벌리자 수룡은 진체를 인간형으로 변화하여 빠져나갔다. 상체가 자유로워진 재앙룡이 화룡마저 떨어뜨리기 위해 머리를 치켜들던 때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끝까지 매달려 있던 이한결이 미리내를 휘둘러 가시 하나를 잘라냈다.

-끼에에에에엑!

재앙룡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신호로 화룡이 떨어지고, 이한결도 재앙룡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흥분한 재앙룡이 곧바로 날아올랐다.

“후퇴하라!”

미리 말을 맞춰둔 클로이가 병력을 완전히 물렸다. 지클린데가 수룡을 부축하고 작은 개만 한 크기의 도마뱀으로 변한 화룡이 수룡의 상처를 살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이한결은 끝까지 재앙룡을 노려보았다. 클로이가 마법으로 날아와 그의 곁에 섰다.

“성공할까요?”

“성공해야죠. 하지만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니 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영웅님께서 먼저…….”

“저는 괜찮습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이한결은 전신이 독기로 푹 젖은 상태였다. 오러로 독의 침입을 막고는 있으나 피부는 일부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게다가 번개를 품은 가시에 찔린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검게 그을려 버렸다.

“어서 자리로 돌아가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클로이는 망설이다가 이한결에게 방어 마법 스크롤을 안겨준 뒤 후방으로 빠졌다.

마침내 재앙룡이 폐허로 만들어 버린 일대에 이한결 혼자만 남았다. 그는 하늘을 메울 듯이 어마어마한 크기인 재앙룡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가 아주 하찮다는 듯이 재앙룡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이한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 년을 산 뱀이 용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 만난 인간이 용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지.”

독으로 검푸르게 변한 손가락이 용을 가리켰다.

* * *

세레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쉴 새 없이 카드를 뒤집었다. 재앙룡의 존재감은 공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뚜렷하게 느껴졌다. 일반인에 가까운 세레나에게 버거운 기운이라 공포심이 뼛속까지 침투했고,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나마 공포를 버틸 수단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세레나는 눈물을 훔치며 계속해서 카드를 섞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용의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카드를 뽑았다.

또다시 역방향인 세계의 카드가 나왔다.

“제발, 제발, 제발! 그 카드가 나와야만…….”

재앙룡을 물리치기 위해 두 가지 계획을 세운 이한결은 가급적 첫 번째 계획만으로 일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는 세레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만약 네가 그 카드를 뽑는다면 꼭 알려줘.’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제 염원은…….’

‘너에게만 짐을 지우려는 게 아니야. 우리 모두의 염원이 합쳐져서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순간, 그 카드가 나올 거야.’

세레나는 누군가의 비명을 들으며 카드를 다시 섞었다. 재앙룡이 아닌 다른 용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녀는 카드를 뽑기 전에 간절히 빌었다.

“부디 우리가, 세계가 승리하도록!”

살면서 이렇게 자신의 안위보다 더 큰 것을 염원한 적이 있던가. 이한결은 세레나에게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카드를 뽑는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의 염원이 가장 강하게 작용할 게 분명했다.

세레나는 죽기 싫었다. 그러므로 세계는 멸망해서는 안 됐다.

“제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떨리는 손으로 카드 한 장을 뽑아 뒤집었다. 다시 한번 재앙룡의 울음소리가 들려 움츠렸다가, 진정되고 나서야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곤 곧장 뽑아야 할 세 장의 카드 중 첫 번째 카드를 확인했다.

뱀의 카드, 역방향이었다.

“아……!”

드디어 기다렸던 카드를 뽑은 세레나는 격동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두 번째 카드를 뽑았다. 그녀가 주로 ‘추락’이라 해석하는 역방향의 탑의 카드였다.

이제 마지막 카드만이 남았다. 카드를 뒤집는 손이 너무 떨려 다른 한쪽 손으로 부여잡아 겨우 뒤집은 마지막은-

“세계의 카드…… 정방향!”

정방향이었다. 늘 역방향으로 나오던 세계의 카드가 반대로 나온 것이다. 이는 한 가지 예언으로 이어졌다.

“뱀은 추락하고, 세계는 구원받으리라!”

멸망으로 향하던 운명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강렬한 전율에 떨던 세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뛰쳐나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기사 중 가장 발이 빠른 자가 공성으로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합류하자!”

“예!”

기사들이 발이 느린 세레나를 호위했다. 그들은 땅울림을 조심하며 격전지로 향했다.

* * *

테오는 이한결을 이 세계에서 내보내기 위해 지하 서고의 기록과 자신의 기록을 사용했다. 신화를 비롯한 기록이 더 큰 쪽을 향해 흐른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로 인해 테오의 일대기는 이안의 기록과 섞였고, 이한결은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면서 테오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다.

이한결이 그 기억 중 가장 눈여겨본 것이 바로 천룡과의 전투였다. 테오는 천룡을 떨어뜨린 뒤 죽이지 않고 여의주와 함께 삼켰다. 어찌 보면 여의주에 쌓인 재해의 기운을 받아 천룡이 재앙이 된 것도 당연했다.

그러므로 재앙룡을 떨어뜨리는 방법이 천룡과 같을 거라는 게 이한결의 예측이었다.

“뱀. 너는 뱀이다.”

이한결은 테오가 그랬듯이 말했다. 비록 그에게는 염원이나 예언의 힘이 없지만, 그걸 보완할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뱀. 그것도 아주 작은 뱀. 바닥을 기는 뱀이구나.”

테오는 예언으로 천룡의 ‘승천 신화’를 비틀었다. 그리고 이한결은 그때와 유사한 상황을 만들었다. 하늘의 용이 인간에 의해 떨어진 그때처럼. 재앙룡의 비틀어진 ‘낙룡 신화’를 투사하기 위해서.

“뱀! 너는 뱀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뱀!”

-키에에에에에!!

재앙룡이 거친 울음을 토해내며 고도를 높였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울부짖음에 다소 당혹스러운 기색이 섞였다. 하늘 높이 올라가는 용의 몸체가 자꾸만 기우뚱 기울었다.

“너는 바닥을 기는 뱀일 뿐이야!”

그러나 신화가 온전히 투사되기에는 유사성이 좀 떨어졌다. 재앙룡이 점점 더 멀어져 이한결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곳까지 올라갔다.

“화룡신이시여!”

이한결의 부름에 작은 화룡이 날아왔다. 뱀 호명의 효과를 확인했으니 지금 당장은 투사를 포기하더라도 공중전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재앙룡을 뱀으로서 추락시킨다면 그 자체로 신화의 재현일 터.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화룡은 드래곤화하지 않고 작은 날개를 팔딱거렸다.

-승리 예언이 도착했노라!

화룡의 외침과 동시에 후퇴했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뱀이다! 하늘에서 뱀이 추락한다!”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지친 병사들이 간절하게 외쳤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염원이 하늘을 찔렀다.

이한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레나가 해냈군요!”

멀리서 세레나 또한 합류해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들은 통신구로 각 영지에 이 소식을 알렸다. 곧 전국에서 하늘의 뱀이 추락하길 바라는 염원제가 일어날 것이다.

“뱀이 추락한다!”

“저 망할 뱀! 빨리 좀 떨어져라!”

“추락하는 뱀이다!”

병사들이 악을 쓰다 못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한결도 힘을 모아 외쳤다.

“늙은 뱀이여, 땅으로 떨어져라!”

염원이란 예언이 이뤄지도록 간구하는 힘. 세계의 인과는 염원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곳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염원이 한데 모여 인과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검은 점처럼 보일 만큼 멀어졌던 재앙룡이 다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크기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이 눈에 띄었다.

재앙룡은 미꾸라지처럼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땅으로 추락했다. 이한결은 추락 예측 지점을 향해 달렸고, 마침내 무너진 영웅성과 짓밟힌 후원 사이의 공간에 재앙룡이 떨어졌다.

쿠웅!!

공성을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거대했던 재앙룡이 초라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여전히 어지간한 인간에 비하면 몇 배 정도 컸으나 재앙이라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테오를 다 감쌌던 앞발도 이제는 겨우 몸통을 붙잡을 정도였다. 재앙룡은 몸통으로 테오를 꽁꽁 휘감은 채 상처에 발톱을 넣고 있었다. 여의주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보며 이한결은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테오를 놓아줘!”

-샤아아아아!

이한결이 달려들자 재앙룡이 독기를 뿜으며 물러났다. 테오의 상처 때문에 둘 다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 사실 이한결은 거의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테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다. 이한결은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이라면 저놈을 죽여도 벌을 피하지 않을까?’

추락한 용도 신으로 쳐주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신에 가까운 존재였던 그가 용살 신화를 얻어 준신벌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예 타격이 없을 가능성은 적었다.

기실 준신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한결을 진정으로 망설이게 하는 것은 고통 따위가 아니었다.

테오가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해온 일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 테오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러나 재앙룡에게 붙잡혀 피를 쏟는 테오의 모습이 이한결을 자꾸 초조하게 만들었다.

-캬아아악!

이한결이 망설이는 사이, 재앙룡이 먼저 공격했다. 독을 머금은 이빨이 미리내와 부딪혔다. 가까워진 주둥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에도 독이 묻어 있었다.

“쿨럭!”

이한결과 재앙룡이 맞부딪히는 순간 테오가 피를 토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이한결이 외쳤다.

“너는 땅으로 추락한 뱀이다! 내가 목을 베어주마!”

뱀 호명에 재앙룡이 다시 고통스러워하며 꿈틀거렸다. 그럴수록 앞발이 박힌 테오의 상처가 헤집어졌다.

‘안 돼.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테오가 위험해지겠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이한결이 남은 힘을 끌어모아 재앙룡의 목을 베려던 때였다.

파지지지직!

재앙룡 머리에 하나 남은 가시 쪽으로 번개가 다발처럼 모여들었다. 모든 기운을 긁어모은 최후의 공격이었다.

가까이에서 맞는다면 피할 틈도 없이 튀겨질 위력이었으나 이한결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맹하게 달려들었다.

‘반드시 버텨낸……!’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미물아.”

재앙룡의 낙룡 신화가 그에 반응했다. 외뿔에 모인 번개가 뿔뿔이 흩어졌고, 재앙룡이 경련했다.

이한결은 내지른 검을 틀어 외뿔을 베어냈다. 그러곤 반가움과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테오!”

정신을 차린 테오가 복부에서 재앙룡의 앞발을 뽑았다. 피가 바닥으로 쫙 뿌려졌으나 그의 형형한 푸른 눈동자는 이한결을 곧게 응시했다. 상황을 파악하듯 주변 경관을 눈에 담던 테오가 재앙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미물이 감히.”

으득, 이 가는 소리가 생생했다. 테오의 두 눈에 시퍼런 귀기가 서리더니 빈사 상태의 몸에서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는 짙은 살기가 뿜어졌다.

전투에 끼어들 틈만을 노리며 날아다니던 화룡이 뚝 떨어지고, 이한결마저 놀라 다가가지 못할 만큼 흉흉한 기운이었다. 테오는 구렁이만큼 작아진 재앙을 움켜쥐고 대지에 내리찍었다.

쿵! 쿵! 쿵!

“감히, 미물이, 누구를!”

이한결이 기억하는 한 테오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매우 드물었다.

테오는 어릴 때부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감정의 고저가 일정한 사람이었다. 예언자들을 몰살하거나 제 아비를 벨 때 드러나던 광기조차 통제된 느낌이 있었다.

“미물 주제에 감히 이안을!”

쿵!

그런 테오가 저렇게 날 것의 감정을 토해내는 순간은 언제나 한 사람이 관련되어 있을 때 발생했다.

이한결은 테오에게 다가가 피에 물들어 시뻘게진 손을 붙잡았다. 미물이 된 뱀의 머리는 이미 곤죽이 된 지 오래였다. 이한결에게는 재앙의 허무한 최후보다 테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이제 그만해, 테오. 다 끝났어.”

테오는 충혈된 눈으로 이한결을 보다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몸뚱이만 남은 미물의 사체도 내팽개치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한결이 부축하기도 전에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테오! 너 상처! 다쳤잖아!”

중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테오를 이한결이 간신히 따라잡았다. 차마 세게 잡지 못하고 옷자락만 겨우 붙든 그를 테오가 밀쳤다. 그러나 몸에 힘이 빠진 나머지 도리어 나뒹굴고 말았다.

“테오, 제발 치료부터-”

“여기는 왜 온 것이냐!”

이한결이 애원하듯 꺼낸 말을 테오의 날 선 목소리가 잘라냈다.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고 했잖아! 돌아간 고향에서 다 잊고 살았어야지! 멸망하게 두었어야지!”

“그렇지만 네가 여기 있잖아.”

“내가 널 속였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는 널 뒤에서 조종했고, 네 진심을 받아놓곤 너로 하여금 나를 찌르게 만들었다! 네가 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이한결은 자신을 거부하는 테오보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테오의 모습이 더 마음 아팠다. 그는 주저앉은 채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려는 테오 곁에 마주 앉아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리며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테오에게 절절히 말했다.

“그래! 나도 이런 세계 구하고 싶지 않았어. 날 속인 너에게 배신감도 느꼈어.”

“윽……!”

“하지만 네가 울게 두고 싶지 않았어. 널 달래주고 싶었어.”

테오가 헛숨을 들이켰다. 혼나는 아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뻣뻣하게 굳었다. 이한결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잡아 돌렸다.

종전의 살기는 전부 증발하고 물기만 남은 눈동자는 너무나 연약하게 보였다. 하늘의 용을 떨어뜨리고 세계를 멸망시킬 뻔한 염원의 주인은 새삼스럽게도 이렇게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염원이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하면 이한결은 가슴이 저릿해지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세계를 구하러 온 게 아니야. 너를 달래러 온 거지.”

동시에 테오의 머리와 어깨,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우는 아이를 달래주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너무 늦어서 미안.”

“왜, 왜 네가…….”

“널 사랑하니까. 기억을 잃었어도 네가 계속 생각났으니까.”

테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달래는 손길에도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난, 난 널 속였어!”

“날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그런 거였지. 네 덕에 어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내 조상은 대대로, 흑, 널 착취했다고!”

“그 고리를 끊은 게 바로 너잖아. 나 대신 화를 내고 복수도 해줬지.”

이한결이 자신의 말을 부정할수록 테오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굳었다. 그가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통제하여 실현시킨 계획은 한 남자의 사랑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더는 무엇도 통제할 수 없게 된 그는 공황에 빠졌다.

“그렇, 지만…….”

설상가상 눈물마저 조절할 수 없었다. 훌쩍거림이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테오가 자신을 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주워섬기는 동안 이한결은 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복부의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되었다. 아마 여의주의 힘 덕분일 것이다.

한숨 돌린 이한결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내 진짜 이름, 궁금하지 않아?”

훌쩍이며 어물거리던 테오가 입을 딱 다물었다. 물기 어린 눈에서 마지막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이한결은 그의 뺨을 문질러 닦았다.

“네 덕에 되찾은 이름인데 불러줄 거지?”

테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겨울의 어느 밤. 그는 이안이 잃은 것을 모두 되찾아주겠노라 약속했었다. 약속을 지켜도 결국은 알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이한결이야.”

“…….”

“성이 이고, 이름이 한결이지. 한결이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이한결은 테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졸랐다. 그는 테오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하, 한겨얼.”

“응. 테오.”

“이, 한결.”

이한결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테오가 되찾아주었으므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고마워, 테오. 네가 날 구했어.”

환히 웃은 이한결은 테오를 꽉 끌어안았다. 머뭇거리던 테오도 매달리듯 그를 붙잡았다.

“사랑해, 테오.”

벅찬 가슴의 고동이 하나처럼 어우러졌다. 테오는 이한결과 한 몸이 되려는 것처럼 양팔에 힘을 주었다.

“나도, 나도 사랑한다, 한결.”

하늘을 날던 뱀이 추락하고, 세계는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제국의 마지막 예언자도, 모든 것을 통제하던 천공도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해졌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다시 나타난 영웅과 실종됐다가 돌아온 천공이 재앙을 무찔렀다는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특히 자신의 몸에 재앙을 봉인하고 스스로를 희생했던 천공의 행적을 사람들은 두고두고 칭송하며 전승할 기세였다. 비록 당사자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말이다.

“저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게 아닙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힘든 시기잖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우러러보고 의지할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럼 저 말고 한결을 띄웠어야죠.”

테오의 억지에 수룡은 그냥 빙그레 웃었다. 테오 또한 자신의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 툴툴거리는 선에서 멈췄다. 이계인인 이한결보다는 천공으로 알려진 자신을 띄우는 게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았다.

“어쨌든 세계는 빠르게 안정되고 있습니다. 천공께서 돌아와 주신 덕에 기상도 원상 복구됐고, 생명의 메마름도 진화되고 있어요.”

“후자는 솔애담께서 와주신 덕분 아닙니까. 제 공이 아닙니다.”

“영웅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분을 설득하셨으니, 간접적인 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한결은 마지막 재앙인 메마르는 재앙을 유예하기 위해서는 창조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창조신만이 세외강의 물을 끌어다가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솔애담은 처음에는 난색을 보였으나 이한결이 어떤 제안을 하자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솔애담은 이 세계의 두 번째 창조신이 되었다.

물론 창조신이 생겼다고 해서 재앙이 완전히 종식되는 것은 아니었다. 종말은 언제든지 어느 순간에든 닥칠 수 있었다.

단지 끝을 담담하게 대비하고 지켜줄 든든한 존재가 생겼을 뿐이다. 그런 존재가 이 세계에는 꼭 필요했다.

하늘의 경계에 선 테오와 수룡은 물끄러미 세계를 내려다보았다. 수룡의 눈에는 세계를 향한 애정이 듬뿍 들어 있었지만, 테오의 낯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천룡의 신화를 기반으로 반신이 되었고, 그의 진짜 신화도 만들어지는 중이건만 이 세계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세계를 증오하고 멸망시킬 예언을 타고난 자의 비애였다. 수룡이 그 기색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신화를 쌓고, 추후 신전이 생겨 신도를 받는다면…… 당신은 인간의 생을 끝내는 순간 신이 되시겠지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을 거 뭐 있겠습니까.”

“증오하는 세계의 신이 되는 거잖습니까. 아마도 아주 긴 시간 이 세계를 돌봐야 할 텐데요.”

테오가 피식 웃었다.

“혼자가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 우주 너머 머나먼 세외로 향했다. 이한결의 세계가 있을 곳으로.

‘제가 신이 되어서 솔애담 님을 도우면 어떻겠습니까?’

이한결이 솔애담을 설득할 당시, 테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 만난 창조신은 새초롬한 얼굴로 테오를 바라보았다. 이한결은 테오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신에게 말했다.

‘저도 신화를 꽤 쌓았으니 몇 가지 조건만 맞추면 신이 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곧장 신이 되어 솔애담 님을 돕기는 어렵겠지만, 테오와 다른 신들이 있으니 그리 고생스럽지는 않으실 겁니다.’

‘깜찍하기도 하지. 너는 그냥 네 옆의 반신과 함께하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 아니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솔애담 님께도 나쁜 조건을 아닐 겁니다.’

‘아니기는. 영웅신 하나 만들려다가 세계 하나 떠맡게 생겼는데.’

솔애담은 앓는 소리를 늘어놓긴 했으나 이한결의 부드러우면서도 완고한 표정에 끝내 지고 말았다. 피조물의 고집은 창조신도 꺾기 힘든 모양이었다. 아니면 영웅신이 될 이한결과 미리 돈독한 관계를 쌓기 위함일 수도 있고.

물론 단순히 이한결의 부탁만 듣고 수락한 건 아니었다. 별다른 품을 들이지 않고 두 번째 세계를 얻었으니 상당한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기존의 세계와 다른 차별점이 솔애담 마음에 쏙 들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신과 매우 가깝구나. 우리 애들은 다 좋은데 불신론자가 많아서 말이지. 여기라면 신도를 제법 모을 수 있겠어.’

솔애담의 수락에 이한결은 뛸 듯이 기뻐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던 두 사람에게 연결 고리가 생긴 것이다. 비록 아직은 각자의 세계를 살피느라 바쁘지만, 인간의 삶을 끝내고 온전한 신이 되는 순간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그때를 생각하니 테오의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평생을 가슴에 새겨온 이안이라는 이름자 위로 새로운 글자가 새살처럼 돋아났다. 비로소 예언을 벗어난 사랑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이한결.”

그 이름의 주인을 불러본다. 이번에는 울지 않고. 웃으며 부르면 기쁘게 달려올 것을 알기에.

“응. 나왔어, 테오.”

테오는 이한결을 맞이하며 활짝 미소 지었다.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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