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위선의 결과(3권) (9/13)

9장 위선의 결과

멀리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잎사귀가 빽빽한 나무들로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아이가 있는 방향은 정확히 느껴졌다. 그는 그 방향을 향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도 아이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뿌연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게 흐릿했다. 하지만 울음소리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들렸다.

돌연 그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그는 소용돌이가 만든 계단을 타고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그 끝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푸른 하늘이 걷히고 수많은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우주를 뒤로하고, 베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쥐여 있었다.

그가 검을 겨눈 채 베일을 쓴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그 사람의 복부를 관통하고 얼굴을 가리던 베일이 젖혀지는 순간-

“안 돼!”

이한결은 잠에서 깨어났다.

“헉, 허어…….”

숨을 고르던 그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7시.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슬슬 일어나 하루를 준비할 때지만 그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커튼 밖으로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는…… 누구였지?”

의문스럽게 중얼거리던 이한결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이한결의 실종 기간은 3년 하고도 2개월. 갑작스럽게 홀연히 사라졌던 24세의 청년은 사라졌을 때만큼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변하고, 실종 기간의 기억이 전혀 없는 채로.

그의 어머니인 정희선이 실종 신고를 해두었기에 경찰은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이한결은 기억이 전혀 없었고, 그가 나타난 지하철역 일대의 CCTV와 블랙박스를 뒤져도 수상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

이 특이한 사건에 흥미를 느낀 기자들이 기사를 내고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사건이 커지는 듯했으나, 당사자 모자가 더는 원하지 않았기에 모든 수사는 종결되었다. 과정이 통째로 날아가긴 했지만, 자식이 무사히 부모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결말이었다.

이한결 모자는 오래된 월셋집에서 나와 이사를 했다. 가구 대부분을 버리고 최소한의 짐만 옮겨 기자들이 더는 쫓지 못했다. 아무리 파도 사건에 대한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기에 기자들은 비교적 쉽게 두 모자를 포기했다.

“우와, 여기가 진짜 우리 집이에요?”

전세로 산 아파트는 보안도 잘돼 있고 깨끗해서 두 사람이 살기에 딱 알맞았다. 정희선은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몰래 눈물을 훔쳤다. 아들이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쾌활하게 답했다.

“그럼! 엄마가 우리 아들 돌아오면 같이 살려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집이야.”

“오래전부터? 우리 집에 그럴 돈이 있었나?”

“이리 와봐.”

정희선이 소파에 앉아 손짓하자, 베란다에서 경치를 구경하던 이한결이 곧장 옆에 와 앉았다. 정희선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설명했다.

“엄마가 우리 아들 기다리면서 매일 전단 돌렸다고 했잖아. 일도 다 그만두고 그랬던 거라 좀 많이 힘들었어. 내 새끼 없어졌는데도 밥은 먹고 잠도 자야 하니 돈 들어갈 데가 많더라.”

“엄마…….”

이한결이 먹먹한 얼굴로 정희선의 손을 꼭 맞잡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하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복권을 샀는데…… 1등이 당첨됐지 뭐니.”

“헉!”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희선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산 복권은 모두 고액 당첨으로 이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행운이 두려워 복권 구매를 그만둔 뒤에는 은행 권유로 투자한 펀드가 크게 성공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행운이 그녀를 따랐다. 마치 신이 보우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던 정희선의 얼굴은 발그레했다가 차츰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우리 아들 찾으라고 하늘이 도왔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질수록…… 이만큼 해줄 테니 널 포기하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내 새끼가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나 혼자 편한 것만 같고. 그래서 오기로 너랑 살 집 사서 네 방 꾸미면서 버텼어.”

“……”

“그런데 막상 다 꾸미니까 이사 올 자신은 없더라. 네가 언제 월셋집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 거기서 계속 기다려야겠다 싶더라고.”

이한결은 정희선을 꼭 끌어안았다. 위로하고 싶어서 안은 건데 오히려 정희선이 이한결을 쓰다듬었다. 안은 건 자신이건만 꼭 안긴 것처럼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들.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응……. 갑자기 없어져서 죄송해요.”

“아니야.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이렇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엄마는 충분해.”

그 말에 이한결은 왈칵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품어왔을 말을 꺼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우리 아들.”

마찬가지로 아들이 돌아오면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은 정희선이 무척 행복하게 웃었다.

두 모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함께했다. 같이 요리를 해서 먹고, 근처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으며, 철 지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러 외출했다.

난생처음으로 돈 걱정 없이 아들 옷을 고르느라 정희선은 들떴고, 이한결도 신이 나서 엄마 옷을 왕창 골랐다. 죄다 퇴짜 맞았지만.

한참이나 쇼핑하다 지친 두 사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코스 요리를 시켜 먹으며 시시덕거렸다.

“우리 아들, 옷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 어떡하니.”

“엄마는 마네킹 옷 그대로 벗긴 거잖아요. 난 나름대로 열심히 고른 건데.”

“넌 뭘 입어도 태가 나서 괜찮지만 엄마는 안 돼.”

“안 되기는! 아까 가게 직원도 엄마 옷발 잘 받는다고 그랬는데!”

“어휴, 얘가! 목소리 좀 줄여!”

결국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쇼핑을 시작했고, 상대가 원하는 만큼 옷을 산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산 옷 중 절반을 반품하는 소란이 벌어졌으나 안목을 높이기 위한 경험으로 셈 쳤다.

“엄마, 우리 여행은 어디로 갈까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글쎄. 엄마는 어디든 좋아. 근데 여권은 없으니까 국내로 가자.”

“여권이야 만들면 되잖아요. 그치만 국내도 안 가본 데 많으니까 해외, 국내 번갈아서 가요. 무난하게 제주도로 시작할까요?”

“너무 좋다. 엄마 제주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 아 참, 강찬이도 데려갈까?”

자신이 없는 동안 정희선의 곁을 지켜준 친구의 이름에 이한결이 밝게 동의했다.

“좋죠! 일정 한번 물어볼게요. 직장인이니까 연차 내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그사이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하자.”

“난 엄마랑 같이 있는 게 하고 싶은 건데.”

정희선이 깔깔 웃으며 이한결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장성한 아들의 애교가 징그러우면서도 좋았다. 3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아들은 한결같이 살갑고 다정했다.

그녀는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느라 살짝 어두워진 이한결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 * *

실종됐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이한결은 꿈을 자주 꾸었다. 실종 전에는 꿈을 꿔도 기억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모든 꿈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정말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테오가 누구지?’

오늘은 자신이 누군가를 테오라고 부르는 꿈을 꿨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테오라는 사람을 볼 때 느꼈던 감정은 선명한 색채로 남아 있었다. 낯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한 빛깔의 연정이었다.

이한결은 거센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꿈속의 짝사랑 상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말랐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지만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

‘기억나지 않는 3년과 관련 있는 게 분명해.’

그저 꿈이라면 이 설렘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리 없다. 그렇다고 실종 전에 ‘테오’라는 이름의 사람을 만난 적도 없으니, 언제 만났을지 추측하기는 쉬웠다.

‘어쩌면 내가 꾸는 꿈이 모두 3년간의 기억일지도 몰라.’

이한결은 침대 옆 협탁에 둔 작은 노트를 꺼냈다. 꿈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부터 기록한 꿈일기였다. 그는 오늘의 꿈도 꼼꼼하게 기록한 뒤 앞장부터 찬찬히 살펴보았다.

꿈은 대부분 소설이나 만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서양의 중세 시대 같은 배경에 검을 든 자신이 수련을 하거나 몬스터를 해치웠다. 가끔 동료로 보이는 이들과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동료 중 누군가가 죽어 슬퍼하기도 했다. 이한결 자신이 죽는 꿈을 꿔서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깨어난 적도 있었다.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돌아온 직후 경찰서에서 조사를 위해 심문 비슷한 것도 받아봤고, 정신과 상담을 몇 주 정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한결의 정신 상태는 멀쩡했다. 기억상실 치료 요법을 받아도 떠오르는 건 없었으며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이런 허무맹랑한 꿈이 자꾸 실존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검을 잡아 수련하고, 뒤를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를 만들고, 몇 번이나 죽어보았던 것처럼.

이한결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문적으로 관리한 것처럼 전신이 근육으로 꽉 들어차 있다. 머리카락도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염색했다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운 회색. 심지어 새로 나는 머리카락도 이렇게 빛바랬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는 스르륵 미끄러져 침대에 도로 누웠다. 지금 당장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꿈은 일단 계속 기록하겠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몸의 변화도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그래. 엄마한테 열심히 효도할 때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파헤치는 게 아니라.’

이한결은 그렇게 마음을 편히 먹었다.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그는 쉴 자격이 있었다. 이름을 되찾았으나 추억을 잃은 용사는 마침내 미뤄졌던 휴식을 취했다.

* * *

일부라 할지라도 세계를 다스리던 존재의 부재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천공이 사라지자 모든 기상 현상이 일시에 정지한 것이다.

단순히 ‘멈춰 섰다’는 게 아니다. 바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만 불고, 비구름은 같은 장소에만 비를 쏟아냈으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곳은 내내 태양 빛이 내리쬈다. 모든 기상 현상이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양의 움직임만큼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엉망이 된 날씨에 전 세계는 온통 난리가 났다. 천공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이제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며 절망했다.

신도 아닌 고작 인간이, 세계를 이렇게나 뒤흔들었다. 클로이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곱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룡신이시여.”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클로이가 깊이 절하며 하는 말에 수룡이 힘없이 대꾸했다.

수룡과 화룡은 천공의 부재를 메꾸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하늘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으나 그 영역을 담당하던 천공이 사라진 터라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수해 지역에는 화룡이 가서 땅을 말리고, 가뭄이 극심한 곳에는 수룡이 비를 뿌렸다. 만약 화룡마저 재앙이 되었다면 수룡 혼자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화룡은 테르세오라는 새로운 재앙의 발생으로 원하던 대로 재앙이 되지 않았다. 천공은 이것마저 계산에 넣었던 거겠지. 수룡은 쓸쓸히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두 신만으로 돌아가기엔 세계가 극심히 삐걱거렸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안정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나마 그간의 풍년으로 쌓아둔 곡식이 많아 한 해 농사가 망해도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다. 천공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했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피해를 줄인 것 역시 천공이었다. 클로이는 이것마저 테오의 자비는 아닐까 희망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곧 다섯 번째 신전이 완공됩니다. 그러면 조금 더 원활하게 권능을 행사할 수 있으시겠지요.”

오랫동안 신전이나 신도가 없던, 정확히는 필요 없었던 그들이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력이 필요하고, 신력은 신화로부터 비롯된다.

수룡은 클로이와 다른 공작들에게 일러 신전부터 세웠다. 신전을 만들어 신도를 모으고, 그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경전을 집필시켰다. 수룡과 화룡의 업적은 널리 알려져 신화가 되었고, 그들은 더욱 강한 신이 되었다.

강해진 힘으로 세계를 더 잘 돌보면 그것을 목격한 이들이 신도가 되는 선순환이 발생했다. 첫 번째 신전을 짓고 1년 만에 네 개의 신전이 더 생겼으니 매우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수룡은 안심하지 않았다.

-기상은 어떻게든 안정시키고 있지만, 외부적으로는 여전히 불안하구나. 미친 신을 피하는 건 운에 달린 거나 다름없으니…….

세외는 넓고, 그 공간에 담긴 모든 세계를 알기는 어렵다. 신화 방벽이 사라진 세계는 서서히 망각에서 벗어날 터였다. 이 세계를 떠올린 신들이 알음알음 퍼뜨릴 소문이 언제 미친 신의 귀에 들어갈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더욱이 새로운 생명은 점차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다. 이대로라면 100년 안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야.

“공국 내에서도 출생률이 크게 줄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불안한 정세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것과 연관 있을까요?”

-그럴 거다. 더는 새로운 생명을 품지 못하는 세계. 그것이 마지막 재앙을 맞이한 세계이니.

“마지막 재앙…….”

클로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이미 수룡에게서 재앙의 작용 원리에 대해 들었다.

“수없이 많은 재앙을 이겨낸 세계에나 발생한다는 최후의 재앙 아닙니까? 우리 세계가 그렇게나 많은 재앙을 겪었습니까?”

-아니. 하나 재앙을 피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수룡은 천룡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다. 망각된 창조신의 비어버린 자취를 더듬다보면, 창조신이 재앙을 막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중 한 방법이 이계에서 용사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자기 피조물을 사랑하는 신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탄생신끼리 ‘신화’와 ‘영웅신’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그 대화가 잊힌 창조신에게서 파생되었다면, 이계의 신은 영웅신을 만들기 위해 용사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컸다.

예상치 못한 준신벌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기껏 용사를 데려온 창조신이 멸망의 공포에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용사는 무사히 신좌에 오르고 마지막 재앙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지도 않았으리라.

남은 탄생신들은 용사의 원래 세계를 모르기에 그를 돌려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결정의 기저에는 분명 신화 방벽을 보존한다는 목적이 깔려 있었고, 이는 의도치 않은 작용을 했다.

용사가 본인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되었고, 7년에 한 번 용사가 죽으면서 재앙이 무찔러진 것이다. 이 세계는 또다시 용사의 희생으로 수백 년간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렇게 계속 재앙이 저지되다가 새로운 종류의 재앙으로 발생한 것이 천공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단다.

“……테오의 태생 예언 중 하나가 ‘구원에 종언을 고할 자’였지요. 명확하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리석었군요.”

-네게 무슨 죄가 있을까. 애초에 천룡을 막지 못한 우리의 죄가 너무도 무겁구나.

수룡은 회복될 수 없을 세계를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번째 강지기가 말했었다. 멸망은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라고. 자연스러운 일을 억지로 피하고 막으려 들었으니 크게 잘못되는 것이 당연했다. 차라리 조금이나마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용사의 희생으로 일궈낸 평화는 우리의 창조신이 존재할 적과 비슷했지. 나는 그 안에서 헛된 안온함에 젖어 용사를 있는 힘껏 외면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그는 나에게도 구원이었구나.

회한 가득한 수룡의 목소리에 클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룡 같은 신이 자신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담스러운 동시에 이해가 갔다. 그녀 또한 수룡 앞에서만 약해질 수 있었으니까.

“저는 테오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기에 그를 제일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지를 저버리고 그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했죠. 테오라면 절대 실수하지 않고 우리를 이끌어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책임 전가임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클로이는 몇 번이고 테오에게 왕이 되어달라 부탁했었다. 그가 거절해도 진의를 파악하려 들지 않고, 그저 언젠가는 받아주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또한 테오가 자신처럼 공국을 아낄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다는 노골적인 암시를 끊임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이상적이라 판단하여 왕으로 치켜세웠다.

“테오는 우리를 배신했지만, 그의 예고를 믿지 않았던 건 저희의 잘못입니다. 충분히 대비하고 마지막에 그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기라도 했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죠.”

-수색은 여전히 진행 중인가?

“예.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진입할 구석이 없습니다.”

-억지로 펼쳤다고는 해도 신역은 신역이니……. 그나마 위치를 아는 것이 다행인가.

“테오의 허락이 있어야만 신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사람은…….”

클로이는 염치없음을 느끼며 말을 줄였다. 어느 세계로 돌아갔는지 모르는 건 차치하고, 구원받아 놓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착취하던 세계에 다시 와달라고 하기에는 그녀는 부끄러움을 알았다. 수룡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봐야지.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힘으로 세계를 지켜내는 거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한 신과 한 인간은 강하게 마음먹었다. 그들은 이런 다짐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 자체를 다행으로 느꼈다.

* * *

우는 아이가 나오는 꿈은 이한결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었다.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달래줄 수가 없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계속 깊게 잠들지 못하고 꿈을 길게 꾸는 바람에 수면 장애가 생긴 건 덤이었다.

“수면제 먹어도 꿈을 꾼다고?”

“응.”

이한결의 오랜 친구인 서강찬이 누워 있는 자세에서 고개만 든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집들이랍시고 두루마리 휴지를 두 묶음이나 사 와서는 제 방처럼 이한결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자에 앉은 이한결은 책상 위에 둔 약통을 보여주었다. 약통은 절반이 빈 상태였다.

“그걸 보면 내가 뭘 알겠냐? 의사 선생님이 뭐라셨는데?”

“그냥 꿈은 무의식의 잔재다, 내가 불안해서 그런 꿈을 꾸는 거다. 그런 얘기만 했지. 잠은 나름 잘 자. 자꾸 꿈을 꿔서 그렇지.”

“진짜 불안한 것 같아?”

“아니.”

이한결은 제법 단호하게 부정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 듣고 계속 생각해 봤는데, 불안한 건 딱히 없어. 갑자기 또 행방불명될 것 같거나 어디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고.”

“그래? 그러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딱 끊어버려. 자꾸 생각하니까 꾸는 거 아니야?”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신경 쓰이는 게 있긴 한가 보다.”

서강찬이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로 앉았다. 이한결은 조금 낯설어진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목구비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솔직하게 믿고 말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꿈에서 자꾸 누가 우는 게 신경 쓰여. 달래주고 싶어.”

심지어 어제는 가위까지 눌렸었다. 온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가슴 위가 묵직했다. 그 상태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날 이안이라고 부르면서, 자꾸 달래달라고 하는데…….”

“이안은 네 영어 이름이고. 그래서, 달래주고 싶다?”

“응…….”

“그런데 꿈이잖아. 울음소리 들리면 꿈인 거 딱 눈치채고 마음대로 조종 못 하나?”

“안 되더라고.”

“흐음. 어렵네.”

이한결은 쓰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답답한 마음에 털어놓기는 했지만, 서강찬이라고 별다른 답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차마 정희선이 마음 쓸까 봐 말하지 못한 것을 털어놨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서강찬도 그걸 알기에 입맛만 다셨다. 별다른 대응책을 주지 못하는 게 영 짜증이 났다.

고민하던 서강찬은 주제를 전환하고자 부쩍 진지해진 친구에게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어제 들은 목소리는 어른 목소리였다고 했잖아.”

“응. 이상하게도.”

“예뻤냐?”

순간 ‘테오’가 떠오르긴 했지만 잽싸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이한결이 칠색 팔색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 왜애! 목소리만 들어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잖아.”

“서럽게 우는 사람한테 그런 걸 구분해야겠어?”

“예쁘면 더 달래줄 의욕이 생길 거 아냐. 그리고 어차피 꿈인데 뭐 어때.”

서강찬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그 나름의 시도였다.

“네가 계속 신경 쓰니까 가위까지 눌리는 거 아니야? 어른이면 누가 달래주기 전에 스스로 그칠 줄도 알아야지. 고작 꿈 가지고 책임감 느끼지 마.”

이한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서강찬의 말대로 그는 꿈속의 우는 아이에게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네가 그럴 만도 해. 3년 동안 실종됐는데 기억은 없고, 자꾸 의미심장한 꿈을 꾸니까 신경 쓰이겠지. 근데 너 돌아온 지 이제 석 달째잖아. 좀 더 현실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어?”

서강찬은 망설이다 덧붙였다.

“어머니를 생각해야지. 너 찾는다고 정말 많이 고생하셨어.”

3년 전, 이한결은 서강찬과 만나러 집을 나섰다가 그대로 실종됐었다. 책임질 일은 아니었으나 일종의 부채감을 느낀 서강찬은 3년 넘도록 정희선을 도왔다.

어머니의 고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다 보니 그가 하는 말이 이한결에게 깊게 와닿았다. 이한결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도 여행 계획 짜자고 부른 거였는데.”

“난 됐네요. 사이 좋은 모자끼리 오순도순 잘 다녀오셔.”

“엄마는 널 거의 둘째 아들로 여기고 계시던걸?”

“뭐야? 생일도 빠른데 왜 내가 첫째가 아닌 거지? 안 되겠다. 당장 어머니께 가서 이한결은 하지 못할 애교 어택을-”

“우리 엄마 눈 썩는다! 하기만 해봐!”

이한결이 침대로 몸을 날려 서강찬을 무게로 제압한 뒤 팔을 뒤로 꺾었다. 연약한 직장인이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나 죽네!”

“엄살 부리지 마라, 둘째야.”

“이, 이거 안 놔?! 너 네 몸 바뀐 거 생각 안 하지! 부, 부러진다고오!”

“잘 조절하고 있어.”

두 사람은 한참을 티격태격하다 시끄럽다는 정희선의 호통이 들려온 다음에야 멈췄다. 서강찬이 침대에 늘어지자 이한결은 낄낄거리며 그를 발로 밀어 떨어뜨렸다.

“아악!”

“침대 정리해야 하니까 비켜.”

“말로 해도 비켰을 거거든?”

“퍽이나.”

이한결이 장난스럽게 이죽거리며 서강찬을 약 올렸다. 서강찬은 침대 밑에 쭈그려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는 추진력을 이용해 반격을 꾀했지만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또 큰 소리 내서 혼나지 않도록 조용히 레슬링을 하던 그들은 정희선이 저녁 먹으라고 말하고 나서야 방에서 기어 나왔다.

“아니, 그냥 피자만 시켜주셔도 되는데 뭘 이리 만드셨어요?”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나와서 뭐라도 하는 건데…….”

“어휴, 됐네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둘이 재밌게 노는데 방해하기 싫었어.”

“방해 아니었으니까 다음에는 저희 꼭 부르세요, 어머니. 이한결 저 자식, 절 엄청 괴롭혔다고요.”

“엄마는 둘이 사이좋은 형제 같아서 너무 기뻐.”

“어, 어머니……?”

능청스러운 정희선과 떨떠름한 서강찬을 보며 이한결이 크게 웃었다. 잠시나마 꿈을 잊은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 * *

이한결이 실종 전에 다니던 4년제 대학은 제적된 상태였다. 어차피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대학으로 성적 맞춰 간 거라 미련은 없지만, 정희선은 이번에야말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라고 제안했다.

그는 거의 10년 만에 수험 생활을 다시 하기 싫다며 난색을 보이면서도 여러 학과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평생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냥 놀고먹어도 괜찮지 않냐. 어머니가 미다스의 손을 가지고 계신대.”

직장인인 서강찬은 건물주나 될 것이지 뭐 하러 지옥에 스스로 들어가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결국 성실함을 타고난 이한결에게 맞춰주며 진로 상담을 해주었다.

시간은 여유롭게 흘렀다. 이한결은 자신의 미래를 충분히 고민하며 설계했다. 설계대로 진행된다는 보장은 없었으나 이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었다. 바뀌면 바뀌는 대로 새로운 길을 걷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

물론 새로운 길에 재미만 있지는 않았다.

“뭐, 뭐야.”

이한결은 양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등골이 찌릿했다. 무심코 입술을 매만지던 그가 화들짝 놀랐다.

“뭔 놈의 꿈이……!”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꿈이었다. 아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오늘 꿈에서 그 ‘테오’가 자신에게 입 맞추기 전까지는.

이한결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꿈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선명한 감각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아직도 혀와 입술에 무언가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야!’

그저 생생한 꿈이었으면 욕구불만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꿈에 ‘테오’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는 것은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현실이 아닌 꿈속 존재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한결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그는 동이 틀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일어났니? 어머, 얼굴이 왜 이래. 잠을 잘 못 잤어?”

“아, 아니에요.”

이한결은 정희선이 걱정할까 봐 아침밥을 싹싹 긁어 먹고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며 일찍 집에서 나왔다.

꿈에 관한 문제는 절대 어머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찾은 아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효도는 못 할망정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공부한다고 나왔으니 하는 시늉이라도 하러 독서실로 가던 이한결은 발걸음을 돌려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새로운 장소에서 공부할 생각이었다.

무난한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시킨 뒤 빈자리에 앉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그가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깔린 카페에서는 직원이 음료 만드는 소리만 들렸다.

바닐라라테는 금방 나왔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졌다.

‘그냥 잊자. 말만 안 하면 아무도 모를 문제야. 현실에서도 해본 적 없는데 꿈에서 무슨 사랑이야. 엄마한테 들켜서 심려 끼치지 말고 효도나 해야지.’

딸랑-

무의미하게 문제집을 긁고 있던 샤프가 멈췄다.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는데도 직원의 인사말은 들리지 않았다.

차분한 발걸음이 이한결이 앉은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왜 손을 멈췄는지 생각하던 이한결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체불명의 손님이 다가온다는 걸 깨닫자 팔뚝에 소름이 쭉 돋았다.

육체적 반응이 먼저 일어난 뒤에야 정신이 판단을 내렸다.

‘인간이 아니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장신의 손님이 이한결 앞자리에 앉았다. 틀어져 있던 노래도 멈춰 카페는 고요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맞은편의 존재에게서 부드럽게 풍겼다. 상대를 압박할 의사는 없는 듯했으나 압도적이었고, 동시에 견딜 만했다.

“잘 지내신 것 같군요.”

손님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청아한 목소리였다. 이한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뜯어보았다.

물결치듯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존재는 하나뿐인 물빛 눈동자에 죄책감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옷은 현대적인 정장과 코트를 입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홀로 다른 화풍으로 그려진 것처럼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았다.

“절 아십니까?”

이한결은 물어보는 동시에 답을 알 것 같았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질문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죠? 다른 세계에서 오신 겁니까? 그 세계에는 몬스터가 사나요? 제국이 무너지고 세워진 공국은요? 왕을 대신하는 다섯 명의 공작과 그중 가장 강력한 천공, 그가 살던 천공성과 그 옆의 영웅성, 용을 죽인 검인 미리내, 그리고…….”

이한결은 숨을 골랐다. 목소리가 절로 간절해졌다.

“테오를, 아십니까?”

이 질문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던 꿈이 진짜이길 바랐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전부 잊었음에도 사랑을 느꼈던 테오와 만나기를 원했다.

“저는 수룡입니다. 당신이 구원한 세계에서 온 탄생신입니다.”

수룡은 이한결의 질문에 모두 긍정했다. 그의 세계에는 몬스터와 공국이 있고, 천공과 성, 미리내를 안다고. 자신의 세계를 자세히 묘사하며 이한결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정말로 제가 꾼 건 꿈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까?”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이 꿈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화의 강을 타고 흐르고 있어 이리저리 엉킨 채지만, 있었던 일임은 제가 장담합니다.”

“그, 그럼 테오도…….”

이한결은 얼굴을 붉히며 입가를 가렸다가 어두워지는 수룡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수룡은 죄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영웅이시여, 염치없는 부탁이오나 부디 그 아이, 테오를…… 테르세오 파네트를 구해주십시오.”

이안이 경악에 차서 되묻기 전에 수룡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결정은 모든 기억을 되찾은 뒤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수룡이 서책 한 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옛날 방식으로 엮어 만든 서책의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할 뿐이었다.

“당신의 기록을 담아 왔습니다. 모든 내용이 담기지는 않았으나 이것만으로도 신화의 강에 잠긴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제 잃어버린 3년을 되찾을 수 있는 거로군요.”

“……단순한 3년은 아닙니다. 무척 괴로우실 겁니다.”

이한결은 각오를 다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가늠하며 시계를 흘끗 보니 초침이 멈춰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경 음악으로 깔리던 노래도 수룡이 들어선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지.’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카페 직원과 길거리 행인 모두 행동을 멈춘 채 굳어 있었다.

‘엄마한테 왜 늦었는지 말할 필요 없겠다.’

그는 시간이 멈춰 버린 이 사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서책을 펼쳤다. 푸른빛 잉크로 쓰인 낯선 글자가 자연스럽게 읽혔다. 수룡이 담아 온 기록이 물처럼 녹더니 이한결에게 흘러 들어갔다.

“억!”

머리에 파도가 철썩 부딪히는 것 같았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방대한 기억이 폭력적으로 떠올랐다. 이한결은 생리적인 눈물을 흘리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았다.

머리가 무거워 두 손으로 받쳐야 했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뇌의 과열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곧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테오! 내, 내가 어떻게 테오를 잊……! 테오가 왜! 아윽, 나, 나는…… 제국은, 세계는!”

천공의 정체, 제국의 죄악, 세계의 방관, 그리고 영웅의 고난. 모든 진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이한결은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닦았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수룡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한결이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은 다른 무엇도 아닌 테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테오가, 천, 공이었고…… 내가, 그를 찔렀…….”

“천공은 죽지 않았습니다.”

수룡이 칼날 같은 눈빛을 받아내며 말했다.

“반이나마 신으로 각성했으니까요. 무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손으로 그를, 테오의 태생 예언은…….”

“자신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 천공의 목적이었습니다.”

테오는 예언자를 숙청하여 예언을 모조리 독식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과 관련된 모든 예언을 이뤄냈다. 또한 자신이 내린 예언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끝없이 높였다. 반드시 이루고자 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신에게 예언을 내렸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누구보다 염원했습니다. 그 염원을 우리 세계의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었지요.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일이라면?”

“우리 세계의 사정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이한결은 멈칫했다. 수룡의 말은 부드러운 제안이었다. 사정을 듣고 제대로 개입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듣지 않을 것인지 선택지를 주는 제안. 이한결이라면 사정을 듣는 순간 나서리라는 사실을 수룡은 아는 것이다.

“저는…….”

당연히 듣겠다고 말하려던 이한결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없어져서 고생한 어머니가 떠올랐다. 잊었었다고는 하나 그런 어머니를 두고 다른 세계를 선택하려 했던 사실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 어머니께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응당 그리하셔야지요.”

수룡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시간 정지가 풀렸다.

이한결은 짐과 서책을 챙겨 카페를 박차고 나왔다. 테오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고 초조한 상황에서도 머리는 갖은 고민을 토해냈다.

‘이건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야. 제정신이 아닌 취급을 받아도 할 말 없을 정도잖아. ……이런 이야기를 엄마가 과연 믿을까? 괜한 말로 걱정만 드리는 것은 아닐까?’

전속력으로 달리자 고민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집에 도착했다. 정희선은 오전 수영 강습을 들으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한결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엄마, 잠깐 나한테 시간 좀 내줘요.”

“무슨 일인데 그리 심각한 표정이야? 엄마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얘기해.”

“그게요…….”

정희선의 모습을 보니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찰나 들었다. 소중한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을 지키고, 자신만 잠시 비일상의 영역에 다녀오는 것은 안 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안 될 일이지.’

가족이라고 해서 비밀 없이 모든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면 알려야 한다. 갑자기 없어진 아들을 찾아 3년간 헤맸던 정희선에게는 더더욱.

이한결은 정희선과 거실 소파에 앉은 후 서책을 내밀었다. 정희선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아들의 얼굴에 차근차근 설명을 들었다.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으나 이한결이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끝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게 나에게 있었던 일이에요. 나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를 구했고, 그곳에서 배신당했다가 그곳의 신에게서 사죄를 받았어요. 그런데 나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위험하대요. 나라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대요. 그래서…… 그 사람을 구하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한결의 조심스러운 말에 정희선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다.

“너는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렇게 당해놓고, 또 누구를 구하고 싶은 생각이 드니?”

“믿어, 주는 거야……?”

“내가 내 새끼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 이 불효자식아. 엄마 마음에 또 대못을 박는구나.”

“죄, 죄송해요.”

정희선은 이한결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어떤 괴상한 이야기라도 아들이 진지하게 말해준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은 믿기 싫을 만큼 잔혹했다.

“네가 이렇게 튼튼해진 건 고생해서 그런 거고, 머리색이 다 빠진 건 전부 거기에서 오랜 시간 사느라 그런 거라며. 어떻게 또 거기 갈 생각을 해!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려고!”

“거기가 여기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진짜 금방 다녀올게. 나 믿어줘요, 엄마. 엄마 아들 세계도 구한 사람이야.”

이한결은 정희선을 토닥이면서 열심히 설득했다.

그는 테오를 구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정희선을 두고 막무가내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안심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 납득은 해야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믿을 것이다.

정희선은 이한결의 등짝을 세게 내려친 뒤 숨을 골랐다. 눈물을 닦은 그녀는 아들을 노려보다가 대뜸 말했다.

“너 데리러 왔다는 양반 한번 만나보자. 나도 그 양반한테서 설명을 좀 들어야겠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인종이 눌렸다. 정희선이 화들짝 놀라고 이한결이 인터폰을 확인했다. 인터폰 화면은 푸르스름한 인영만을 비추고 있었다.

“뭐, 뭔 줄 알고 문을 열어주는 거니?!”

“수룡신께서 오신 거예요. 공용 현관도 그냥 들어왔잖아요.”

이한결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수룡이 부연했다.

“이 세계의 기술력으로는 아직 이계신의 모습을 온전히 비출 수 없을 겁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웅의 어머니시여.”

수룡이 정중히 인사하자 정희선은 얼결에 마주 인사했다. 그녀는 살짝 긴가민가한 얼굴로 수룡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곁눈질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마주하자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던 이야기들에 현실감이 확 들었다.

“아니, 근데 신이라면서 왜 존댓말을……?”

“영웅과 영웅의 어머니께 드려 마땅한 예의를 갖추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격을 되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에 가까운 존재인 영웅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저는 부탁을 드리는 처지이니 말입니다.”

“세상에나.”

자식 칭찬을 듣고 기분 나쁠 부모 하나 없다. 그러나 신까지 운운하는 건 과했다. 정희선은 동그래진 눈으로 이한결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들이 신…… 에 가깝다고?”

“그건 그렇고. 어서 설명해 주시지요.”

민망해진 이한결이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수룡의 설명을 들었다.

“당신께서 그렇게 가시고 천공마저 사라지자 세계에는 마지막 재앙이 도래했습니다.”

기상 현상이 멈춘 것은 두 탄생신과 공국의 노력으로 어찌어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탄생하는 생명은 속수무책으로 줄어들었고, 그것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수룡의 세계는 몇 세대만 지나면 소멸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재앙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예? 극복이 아니라요?”

“당신의 희생을 양분으로 꾸역꾸역 버텨왔을 뿐입니다. 일찍이 멸망을 받아들이고 마무리를 준비하자는 것이 저와 화룡, 대륙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수룡은 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했는지는 생략했다. 그건 이들이 몰라도 되는 사실이었으니.

이한결과 정희선도 결론 난 일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천공은 사라진 직후 신역을 설정하여 홀로 틀어박혔습니다. 우리는 그의 신역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들어갈 수 없었지요. 그저 신역이 해제되지 않았으니 살아 있을 거라 여기는 중입니다.”

“그럼 제가 입힌 부상을 치료했는지도 알 수가 없겠군요.”

음울한 이한결의 말에 수룡은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살펴본 바로는, 신역을 일종의 봉인처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아마 미리내에 찔린 그대로 있을 겁니다.”

“젠장, 그럼 정말 최악이잖습니까!”

“살아는 있으니 최악까지는 아니지요.”

이한결은 씩씩거리다가 수룡이 인간이 아님을 상기하고 손을 내저었다. 같은 주제로 계속 떠들고 싶지 않았다. 정희선도 수룡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동안 계속해서 천공의 신역에 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천공의 신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추론했습니다. 부디 이번에는 세계가 아닌, 단 한 사람을 구해주십시오.”

수룡은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깊이 숙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이한결을 대우한다 해도 이런 행동은 파격적이었다. 이한결은 주춤거리다가 일단 수룡을 일으켰다.

“당신의 세계가 나에게 한 짓은 용서하기 어렵지만, 저도 테오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테오를 구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제 이유는 간단합니다.”

수룡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그 아이는 우리 세계의 피조물이니까요. 저는 오랫동안 신으로서의 책무를 회피한 무책임한 신이지만, 당신과 그 아이 덕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창조신이 아닌 탄생신일지라도 이 세계와 그 안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질 것입니다.”

제법 믿음직한 말이었다. 이한결은 굳은 표정으로 정희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다녀오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요?”

* * *

수룡의 세계와 이한결의 세계는 본래 시간의 흐름이 크게 벌어진 편은 아니었다. 수룡 세계의 1주일이 이한결 세계의 1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차이는 신화 방벽을 쌓아 세계가 단절됨으로써 놀랍도록 커졌다. 방벽 속에서 압축된 시간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덕분에 이한결은 수룡 세계에서 수백 년을 보내고도 자신의 세계 기준으로 3년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밥 잘 먹고. 몸조심하고.”

신화 방벽이 무너진 지금은 다시 원래의 차이로 되돌아왔다. 이한결은 정희선의 걱정을 고분고분 들었다. 맞잡은 손으로 불안한 떨림이 전해졌다.

“여기 기준으로 일주일 안에 돌아올게요. 강찬이한테 잘 돌려서 말해놨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걔 부르고요.”

“너야말로…… 아니다. 부정 타는 말은 하면 안 되지. 엄만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만 돌아와. 알았지?”

정희선은 마지막으로 이한결을 한 번 꽉 안은 뒤 놓아주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룡이 미안한 얼굴로 정희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마음을 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수룡이 준 이계의 옷으로 갈아입은 이한결은 수룡과 함께 거실에 나란히 섰다. 수룡이 천장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자 웅혼한 기운이 그들을 감쌌다.

이한결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정희선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정희선에게는 7일, 이한결에게는 7주. 그 뒤에 다시 만나 반갑게 해후하길 바라며 두 모자는 잠시 헤어졌다.

아직은 인간인 이한결을 보호하기 위해 수룡의 세계로 이동할 때는 이한결의 창조신, 솔애담의 도움을 받았다. 솔애담은 수룡을 지긋이 노려보며 툴툴거렸다.

-이 아이의 선택만 아니었어도 그쪽과는 연을 끊었을 텐데.

-이리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흥. 너무 오래 걸리면 상황이 어떻든 빼낼 터이니 그런 줄 아세요.

거대한 솔애담의 손에 담겨 있던 이한결은 살며시 웃었다. 이전에는 딱히 신을 믿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자기편인 절대자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이번에는 잊힐 일도 없으니 전과 같은 불의한 사고도 생기지 않으리라.

-무사히 다녀오너라, 아이야.

솔애담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이한결을 놓아주었다.

이한결은 수백 년간 느꼈던 이계 특유의 갑갑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을 반갑게 받아들이며 깊게 호흡했다.

-저는 세계를 돌보러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내는 클로이, 그 아이가 도와줄 겁니다.

진체인 용의 모습으로 화한 수룡이 바쁘게 날아갔다. 이한결은 성벽의 망루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전해 들은 대로 기상이 멈춘 세계는 몰라보게 황폐해져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풍요로워야 할 공국의 수도가 활기를 잃어버렸다. 파릇파릇하던 나무의 잎은 누렇게 말랐고, 땅은 메말라 먼지가 풀풀 날렸다.

아연해진 이한결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수룡이 지나간 곳마다 먹구름이 빼곡하게 채워지더니 가뭄을 달래는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비를 피하지 않고 몰려나와 환호했다.

“수룡신께서 오셨다! 물의 신이 우리를 돌보신다!”

“수룡신이시여, 언제나 일용할 물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그릇이든 동이든 다 꺼내 와! 비 올 때 최대한 받아둬야 해.”

사람들의 얼굴에 담긴 불안과 초조함을 보며 이한결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자신이 이곳에 있고, 테오가 천공으로서 기상을 관장할 때는 사람들의 저런 표정을 볼 일이 없었다. 시장에 나온 건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때 그가 본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넘쳤다. 자신을 돌려보내기 위해 테오가 행한 일의 결과는 쓰디썼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수룡이 안내역을 맡긴 클로이가 이한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인상이 꽤 달라져 있었다. 언제나 얼굴에 담겨 있던 장난기가 빠지고, 의무를 다하는 책임감이 가득했다. 이 변화는 그녀를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군주로 보이게끔 했다.

“오랜만입니다, 클로이. 그냥 저는…… 이곳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3년 만에 오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쪽은 얼마나 지났습니까?”

“6개월 정도요.”

“정말로 다른 세계네요.”

클로이가 피식 웃으며 그를 성안으로 이끌었다. 천공성이나 영웅성이 아닌 공작들이 머물던 성이었다. 그녀는 마법으로 이한결의 물기를 말려주었다.

“곧장 신역으로 가시겠습니까? 수룡신께 설명을 얼마나 들으셨는지요?”

“바로 안내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클로이는 이한결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시선을 떨궜다.

“따라오십시오.”

그 반응에서 이한결은 클로이가 이 세계의 치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그녀라면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천천히 걸었다. 클로이가 마법으로 주변에 방음 마법까지 걸었다. 이한결은 피로해 보이는 클로이를 찬찬히 살피다 입을 열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적어도 영웅님께서 아시는 만큼은 알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테오를 구하려는 거죠?”

클로이가 쓰게 웃었다.

“그걸 먼저 물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를 탓하실 줄 알았는데.”

“나를 착취한 이 세계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명백한 가해자들은 테오가 이미 처리해 버렸더군요. 그러니 같은 세계를 공유한 이들까지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테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클로이는 테오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세계를 배신하고 그렇게 사라져 버린 이유를 찾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절규처럼 토해내던 그 말을.

“테오는 영웅님을 희생시켜 유지되는 이 세계를 증오했습니다. 그렇지만 영웅님을 위해 이 세계를 정성껏 가꾸었지요. 비록 이 세계의 안위를 생각한 적은 없더라도 그 덕에 지금 세계가 버틸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것조차도 테오의 계획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정한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이가 힘을 합쳐서 이끌어 나가는 세계. 방법이 거칠었으나 테오는 분명 그런 세계를 만들어냈다.

“아니, 계획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테오로 인해 다들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결국 약해진다는 것을요. 그래서 구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불태워 우리를 일깨워 준 녀석을.”

클로이는 이한결을 보며 작게 웃었다.

“답이 되었을까요? 이제 저희를 믿고 함께 테오를 구해주시겠습니까?”

“티가 났나요?”

“조금요.”

여차하면 클로이와 이 세계 사람들을 배제한 채 테오를 구할 생각이었던 이한결은 경계를 살짝 풀었다. 혹시라도 세계를 이 지경으로 만든 테오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한 것이다.

물론 이 넓은 세계에 사는 모든 이가 안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방금의 대답으로 클로이는 믿을 수 있었다.

“테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네 공작은 테오를 지키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른 의견은 어떻게든 해볼 테니, 부디 테오를 구해주십시오.”

클로이의 진심 어린 말에 이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테오의 안전은 거의 확보됐다.

수룡이 그를 성 근처에 내려놓았을 때 예상한 대로 테오의 신역은 영웅성 일대였다. 푸르스름한 색채를 띤 신비로운 바람이 신역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클로이가 경계로 손을 뻗자 바람이 몰려들어 진입을 막았다.

“수룡신과 화룡신께서조차 이곳으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테오에게 영향이 갈까 봐 강제로 파훼하지도 못했습니다. 저희는 영웅님이라면 분명 경계를 넘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확신했습니까?”

“완벽주의 기질이 있는 테오라면 자신의 계획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간 영웅님이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부상이 깊었으니 영웅님에 대한 방비까지 하기는 힘들었을 거고요.”

어려서부터 테오를 보아온 클로이는 이한결보다 테오를 잘 알았다. 이한결은 그녀의 판단에 동의하며 신역의 경계에 발을 들였다.

예상대로 푸른 바람은 그를 간지럽힐 뿐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는 경계에 발을 걸친 채 클로이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신과 테오는…… 단순한 친구가 맞습니까?”

클로이의 얼굴이 일순 황당함으로 물들자 이한결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걔는 어떨지 몰라도 저는 절친한 소꿉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영웅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머쓱해진 이한결은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신역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바람 결계를 넘어가니 공기가 멈춘 것처럼 묵직해졌다. 바람을 통과한 햇빛이 신역을 푸르게 비추었고, 생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적막이 침입자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이한결은 감각을 곤두세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빠르게 달려 나갔다.

테오가 있을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일단 영웅성에서 머물던 방부터 찾았다. 그의 억지로 바꿨던 방과 이전에 쓰던 방 모두 비어 있었다. 집무실과 연무장에도 없었다.

순식간에 모든 층을 전부 뒤진 이한결은 성 밖으로 나와 냉궁을 향해 달렸다. 역시 그곳까지 신역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테오는 없었다. 지하 서고에도 내려가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리 많이 뛰지도 않았는데 이한결은 벌써 숨이 차올랐다. 불안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클로이 앞에서 썼던 침착한 가면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테오, 어디 있는 거야.”

테오가 이한결의 공격을 받고 치료도 받지 않은 채 사라진 지 3년이 흘렀다. 이곳에서 홀로 3년을 보낸 것이다.

울컥 원망과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자신을 위해서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원망스러웠고, 그에게서마저 숨으려는 건가 싶어 걱정됐다. 문득 살을 파고들던 미리내의 감각이 떠올라 두 손이 떨렸다.

이한결은 슬쩍 차오른 눈물을 훔치며 냉궁에서 나왔다. 막막한 마음에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후원의 숲으로 들어왔다.

불현듯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과 함께 기시감이 들었다.

“꿈에서 본 적 있어.”

우는 아이가 나온 꿈에서 걸은 적 있는 길이었다. 되짚은 꿈은 과거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몇 번째일지 모르는 회귀를 하고 염원초를 먹어 이지를 잃었던 시절로. 이 길의 끝에는 우는 아이가 있었다.

“테오……!”

방황하던 걸음이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짧은 거리였으나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공기는 더 무거워져서 전진하기 힘들었다. 그 이상한 저항감이 저곳에 테오가 있을 거란 확신을 주었다.

“테오!”

수룡은 테오가 신역을 봉인처럼 사용했다고 말했다. 무엇을 봉인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이한결은 신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뒤늦게 질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자기 자신을 봉인한 거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 반대인가? 아니면…….’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제야 이한결은 생각을 멈추고 우뚝 서 테오를 내려다보았다. 거짓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처음 만났던 아이는 이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복부에 미리내가 꽂힌 채로 곧게 누워 있는 테오는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새빨갛게 물든 옷을 입고 누워 있는 그의 주변엔 방금 흘린 것 같은 붉은 피가 흥건했다. 숨이 멎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테오가 가진 태생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모습이었다.

“테오……!”

이한결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가 공기의 저항에 밀려 물러났다.

테오를 중심으로 신역의 시간은 정체되어 있었다. 3년이나 지났으나 테오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큰 차이 없었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분명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설마 천천히 죽기 위해서, 바로 죽으면 안 되기에 자신을 봉인한 건가?”

이한결은 무심코 말을 내뱉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생각까지 막지는 못했다.

테오의 태생 예언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재앙의 씨앗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테오 또한 자기 자신을 재앙이라 여겨왔을 것이다. 그의 태생 예언이 모두 이루어진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봐도 그럴듯했다.

그러나 세상은 천천히 말라갈지언정 다른 재앙은 닥치지 않았고, 재앙이 된 테오는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봉인한 거야? 재앙으로서 죽으려고? 너 이외의 재앙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세상을 증오했기에 내린 결정인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내린 결정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테오가 어떤 의도로 재앙이 되었든 세계는 스스로 일어섰다. 그러니 분명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하지만 너는 내가 홀로 희생되는 걸 싫어했잖아.”

이한결은 테오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정지된 공기로는 호흡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래서 나를 구한 거잖아. 그런데 네가 이러면 어떡해.”

한마디, 한마디 테오에게 닿았으면 하는 진심을 담으며 이한결은 미리내로 손을 뻗었다.

“그러니 너만은 내가 구할게.”

떨리는 손으로 미리내를 움켜쥔 순간,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반동이 일었다. 이한결이 놀라 테오를 살피니 다행히도 상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뽑으면 안 돼!

그러나 미리내가 공명하며 이한결을 제지했다. 이한결은 테오의 상처를 계속 살피면서 물었다.

“왜 막는 거야? 나에게는 치유 포션과 스크롤이 있어. 너를 뽑자마자 치료하면 테오는 살 수 있을 거야.”

-이 아이는 그걸 원하지 않아.

“상관없어! 내가 원하니까!”

테오는 이한결을 구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이한결은 스스로 강해져서 기억을 되찾고 싶었지, 계략에 휘말려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도 테오를 멋대로 구해 버릴 작정이었다.

미리내는 침착하게 테오에게 영향 가지 않도록 웅웅 울리지도 않고 공명했다.

-나를 뽑으면 재앙이 깨어날 거야.

“알고 있어.”

-아니. 넌 몰라.

미리내가 딱딱거렸다.

-이 아이가 모아온 재해의 기운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거야.

이한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 * *

테르세오 파네트가 천공으로서 기상을 관장하던 시절. 그 시절에도 재앙에 가까운 재해는 종종 발생했다. 그때마다 테르세오는 직접 현장으로 나가 재해를 막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를 아끼는 마음에서 벌인 행동이 아니었다.

“테오는 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는 계획을 세웠고, 그로 인해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세계를 증오하는 녀석이 재해를 막은 건 그 계획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이한결의 요청으로 모인 네 명의 공작과 두 용은 씁쓸한 얼굴로 수긍했다. 천공이 사라지고 3년이나 흘렀으니 그들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세계를 향한 천공의 증오는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테오는 천룡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멸망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며 막을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도 알겠지요. 그렇다면 세계를 증오하고, 종언(終焉)이 들어간 태생 예언을 가졌으며, 재해의 기운을 모으는 자신이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이 될 거라 추측했을 겁니다.”

“고작 인간이 세계를 멸망시킨다니…….”

화룡은 말도 안 된다는 투로 중얼거렸으나 그것이 현실임을 모두 알았다.

테르세오 파네트는 인간이었으되 세계를 멸망시킬 만한 힘을 가졌다. 태생 예언부터가 그러했으니 정말로 재앙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에게 어려서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말대로.

그러나 이한결은 다르게 생각했다.

“하지만 테오가 정말로 세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면, 제가 떠난 직후 재해의 기운을 폭발시켜 재앙을 일으켰을 겁니다. 자기 자신을 봉인하는 게 아니라요.”

“부상이 너무 심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면 치료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영웅님께서 미리내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고 하셨잖습니까.”

지클린데가 슐레이만의 말을 부정하며 간절한 얼굴로 이한결을 바라보았다. 이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테오가 세계에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다고 봅니다. 증오해 마지않는 세계지만 어떻게든 노력한다면.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어선다면. 그럼 한 번쯤은 기회를 주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노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재앙을 봉인한 게 아닐까요?”

천공이 사라지자 네 공작은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기상이 멈추자 두 용신도 합세하여 세계를 지탱했다. 풍족했던 천공 치세 동안 비축한 곡식으로 힘겨운 시기를 버텼고, 3년이 지나자 그럭저럭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비록 생명이 메마르는 마지막 재앙이 진행 중이나 모두 힘을 합치니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했다. 테르세오가 준 기회를 제대로 잡은 것이다.

수룡이 탄식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천공께서 계획하신 최선의 상황이겠군요. 그분이 준 기회와 시간 덕에 우리는 세계를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테오의 최선은 그렇죠. 하지만 전 생각이 다릅니다.”

이한결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은 제가 있을 때와 다를 게 없습니다. 이번에는 테오의 희생으로 다른 재앙들을 막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녀석을 이대로 홀로 희생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 하지만 천공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일인데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이…….”

로디온이 손을 들며 소심하게 주장했다. 다른 이들도 침음하며 깊게 고심했다.

이한결의 주장대로 한다면 겨우 정리되던 세계가 다시 엉망이 될 수도 있다.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이를 알기에 이한결도 신중하게 설득할 말을 고르는데, 지금껏 침묵하던 이가 입을 열었다.

“테오는 위선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걔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모든 일은 오직 영웅님만을 위한 것이었죠.”

클로이는 신랄한 목소리로 평했다. 다들 말문이 막히고 심약한 로디온은 딸꾹질을 했다.

“백성들을 돌본 것도, 재해를 막은 것도 결국 영웅님께 보이기 위한 거였고. 왕을 세우지 않고 공작 여럿으로 통치한 것도 제 아버지, 엘바차 남작의 유지를 받든 게 아니라 영웅님을 모실 시간을 만들기 위한 거였습니다. 걘 영웅님만 안중에 있었던 거예요.”

분위기에 맞지 않게 민망해진 이한결이 작게 헛기침했다. 클로이는 좌중을 한 번씩 살피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어쨌든 위선도 선이잖아요? 테오가 위선으로나마 기상을 관측해 풍년을 만들었기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고, 우리도 각자의 업무에 익숙해진 상태였으니 위급한 상황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을 수 있었죠. 그러니 우리는, 세계는 녀석에게 빚을 졌다 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 말씀은……?”

“테오가 사람 하나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세계에 무슨 가치가 있냐고 그러더라고요. 맞는 말 아닙니까? 근데 영웅님 말씀대로 지금 상황도 그렇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부려보자고요, 위선.”

클로이는 예전처럼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또 다 된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테오가 보일 반응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좀 통쾌할 것 같은데.”

지클린데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드러운 눈빛은 클로이의 주장에 동의하는 듯했다. 다른 이들도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춘 이한결이 담대하게 선언했다.

“아무도 홀로 희생하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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