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제국의 명맥을 끊을 자 (7/13)

7장 제국의 명맥을 끊을 자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진 황제궁의 집무실. 비밀스럽게 불려온 1황자 아리테우스는 살짝 긴장한 낯으로 황제를 알현했다.

“위대한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예는 되었다. 앉거라.”

아무리 혈육이라고는 하나 아직 황태자 자리에 앉지 못한 아리테우스에게 황제는 조심스러운 상대였다. 그는 온 신경을 기울여 황제를 살폈다. 언뜻 봐도 심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3황자와 사이가 나쁘다지.”

“아, 그것이…….”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확인차 물은 것이니 솔직하게 답하거라.”

아리테우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황제가 그 앞에서 3황자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제가 일방적으로 그 아이를 싫어합니다.”

“모후 때문이냐?”

“예…….”

“나도 그렇다.”

“예?”

아리테우스가 퍼뜩 놀라든 말든 황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여러 요인 중 하나지. 껄끄러운 점이 많은 녀석이야.”

“맞습니다.”

“요즘도 쉬이 울음을 터뜨리더냐?”

“근래 만날 일이 줄어들어 잘 모르겠습니다. 대예언자께서도 괴롭히지 말라 하셨고…….”

7살 어린 동생을 괴롭히는 게 나쁜 일인 줄은 아는지 아리테우스가 얼굴을 붉혔다. 황제는 에스겔라가 언급되자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에스겔라의 말을 잘 따르는 모양이구나. 하나 예언자는 길잡이일 뿐임을 명심해라. 선택은 스스로 내려야 하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들이 하는 말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아리테우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하면……?”

“재작년부터 3황자가 귀족들과 접촉하고 있지. 한미한 세력이기는 하나 거슬리지 않더냐?”

“체드로 백작이 그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아 신경 쓰였습니다. 함부로 귀족을 척살할 수 없어 내버려 두었지요.”

“세력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중립을 표방하는 척하며 뜸만 들이는 치들은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그들이 뭉치게 두어 배제하는 것이 좋지.”

“그렇다면 그들이 뭉쳤을 때 의기양양할 녀석이 욕심부리지 못하도록 겁을 주어야겠군요.”

황제는 영특한 첫째 아들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잘 풀릴 것만 같았다.

* * *

암묵적으로 1년으로 정해두었던 가정교사 기간이 자연스럽게 연장되어 3년째가 되었다. 이제 배울 만큼 배워 딱히 가르칠 건 없는지라 주 3일이던 방문을 주 1일로 바꾸었다.

클로이만이 아니라 엘바차 남작이 키우는 다른 영재들도 한 번씩 3황자와 함께 수학하며 자신의 지평을 넓혔다.

“에밀로가 다시는 오기 싫다고 하던데요.”

“그게 내 탓인가?”

“걔가 좀 예민하긴 하죠.”

많은 아이가 다녀갔지만, 지속적인 만남이 가장 오래 이어지는 건 클로이뿐이었다. 이유는 터무니없게도 테르세오가 마법에 재능이 없기 때문이었다.

재능 하나 가지고 평민 신분으로 귀족의 후원을 받게 된 이들에게 배움이 무시무시하게 빠른 3황자는 무서운 존재였다. 클로이도 자신이 에밀로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가끔 이해나 적용도 하지 못하는 마법 이론을 외워서 줄줄이 늘어놓을 때면 소름이 돋곤 하니까.

“어쨌든 또 당분간은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뭘 만들어볼까요? 이동식 소형 화로? 음식 보존에 탁월한 피크닉 바구니? 아니면 완벽한 숙식이 가능하고 수납까지 간단한 천막?”

“말투에 묘하게 가시가 돋았군.”

“그럴 리가요. 전부 제 역작인걸요. 비록 그것들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한 번도 확인하지 못했지만요.”

테르세오는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대답을 피했다. 그 모습을 엘바차 남작이 즐겁게 바라보았다.

3년째 주기적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3황자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티팩트를 후원해 주는 남작과 클로이는 모를 수가 없었다. 테르세오 황자는 후원받은 아티팩트를 한 번도 쓰지 않았으면서 언제나 만족스러워했으니까.

비밀스럽게 누군가와 만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엘다를 떠봐도 모르는 거 보면 정말 철저하게 숨긴 것일 터. 클로이는 그저 호기심이었으나 엘바차 남작은 3황자와 좀 더 돈독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비밀 하나 공유하면 딱 적절할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보다 8살 많은 토론의 귀재 에밀로를 침몰시킨 테르세오였다. 어찌나 고집이 센지 한 번 내린 결정은 절대 바꾸질 않았다. 심지어 아직까지 그 결정이 틀린 적도 없었다.

‘가끔, 아니, 요즘 들어 자주 아깝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3황자가 아니라 1황자였다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권력에 욕심을 냈다면 많은 게 바뀌었을-’

딸깍.

3황자가 일부러 찻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엘바차 남작은 서둘러 표정을 관리했다. 그 짧은 새에 남작이 위험한 생각을 한다는 기색을 눈치챈 것이다.

“그나저나 제가 그 얘기를 했던가요? 얼마 전에 남작님이 독특한 염원초를 구하셨는데-”

클로이가 재빨리 말을 돌리려 했지만 테르세오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분명 동갑내기일진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저 눈동자에서는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믿을 수 없는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테르세오는 클로이와 엘바차 남작을 차례로 응시했다.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큰 모양이야. 그런데 자네들을 실망시켜야 한다니 안타깝군.”

“실망이라니요, 전하. 저희가 전하께 실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기대를 충족해 줄 의지가 없다고 해도?”

“…….”

엘바차 남작이 침묵하자 테르세오는 분명하게 말했다.

“자네가 절대왕정을 조금씩 흔드는 데는 일조할 수 있을지 모르네. 하나 나 스스로 왕정을 무너뜨리거나 왕좌를 차지하지는 않을 걸세. 내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테르세오가 엘바차 남작에게 접근한 건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외 진정한 목적이라 할 수 있는 동기는 말해주지 않았다. 함께하고 있음에도 절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는 태도에 질린 클로이가 살짝 발끈해서 따졌다.

“그럼 그 목적이 뭡니까? 얼마나 대단한 목적이기에 대의를 저버리는 건가요?”

“클로이!”

“저는 전하가 우리 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를 그냥 이용만 하려는 거 아닌가요?”

엘바차 남작의 수업을 자주 들은 탓에 클로이는 남작의 사상을 상당히 자세히 이해하고 있었다. 황족이나 귀족이 평민보다 특출하지 않고, 평민도 교육을 받는다면 그에 못지않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그녀에게 절대왕정의 몰락은 인생을 바쳐 이루어야 할 대업이었다.

“클로이, 전하께서 직접 돕지 않으셔도 충분하다. 이렇게 인연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란다. 어서 전하께 사과드리거라.”

“괜찮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야.”

부루퉁히 고개를 돌리는 클로이와 아무런 감흥 없어 보이는 테르세오 사이에서 엘바차 남작은 슬쩍 식은땀을 닦았다. 9살짜리끼리 사상싸움을 하는 게 좀 신기하면서도 일이 잘못 틀어질까 봐 걱정됐다.

그가 더 달래는 말을 하려는 찰나, 테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목적은 자네들의 일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볼 수 있네. 사소하다 하더라도 힘이 필요하기에 자네들을 이용한 것도 맞고. 피차 서로 이용한 셈이니 사과하거나 받을 마음은 없다만.”

“…….”

클로이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앞으로도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견고히 할 필요가 있겠지. 아무도 모르는 내 비밀 하나를 알려주겠네.”

테르세오는 식은 찻주전자에 손을 얹어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차를 조금 더 우린 뒤 세 개의 찻잔에 따랐다.

찻잔에 담긴 맑은 빛의 차를 보던 엘바차 남작과 클로이는 테르세오가 말한 비밀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찻잎에 염원을 담으신 겁니까?”

“자네들의 건강을 기원했네. 염원을 많이 담지 않았으니 차 한 잔씩만 마시면 남은 찻잎에는 흔적도 남지 않을 걸세.”

엘바차 남작은 클로이를 곁눈질했다. 염원은 마력과는 다르나 무형의 기운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보통 사람들보다 마법사가 더 잘 감지했다. 찻물을 내려다보며 얼이 빠진 클로이의 표정을 보니 확실했다.

“5년 전 독살 당할 뻔한 뒤로 나는 내 모든 능력을 숨겨야 했네.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한동안은 생존이 그저 목적이던 시절이었어.”

땅에서 자라는 싱싱한 식물이 아닌, 수확하여 건조해 만든 찻잎에 염원을 담다니. 기존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능력이었다. 이 능력을 밝히는 것 자체로 3황자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다.

“하나 더 늦기 전에 나 자신을 내보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더군. 예언과 염원은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선보이거나 아예 감출 생각이었지만, 자네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면야 아깝지 않아.”

그렇게 말한 뒤 테르세오는 자신의 차를 쭉 들이켰다.

엘바차 남작과 클로이는 이것이 일종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찻잎을 직접 씹어 먹는 게 아님에야 영향은 미미하겠지만, 어떤 염원이 깃들었을지 모르는 차를 마시는 건 위험을 수반했다.

테르세오는 그들에게 신뢰를 주는 대가로 ‘자신의 능력을 믿을지’와 ‘테르세오 파네트라는 사람을 믿을지’를 동시에 시험하고 있었다.

“저는 제 안목을 믿습니다.”

엘바차 남작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눈웃음 지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본 최고의 인재이십니다.”

그러고는 찻물을 남김없이 모두 마셨다. 클로이는 불안한 얼굴로 하나 물었다.

“전하, 나중에 우리 버리거나 배신하지 않으실 거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우리가 그럴 리는 없으니, 저도 전하를 믿겠습니다.”

클로이도 눈을 질끈 감고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테르세오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정해진 수업 시간이 끝나자 두 사람은 떠날 채비를 했다. 엘다와 시종들이 들어오기 전, 클로이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그것’을 말씀하실 결단을 내리신 겁니까? 단순히 제 화를 풀어주기 위해 그러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감이 좋지 않아.”

테르세오의 감은 예언적인 성향을 띠었다.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당분간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자중해.”

강한 어조로 경고한 테르세오는 혼자가 된 뒤에도 자리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그의 감은 여전히 날카로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 * *

엘다는 개운한 기분으로 에스겔라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살다 보면 종종 길을 잃은 것같이 막막한 시기가 오는데, 그럴 때 예언자를 만나 상담을 받으면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처음에는 사사로이 대예언자님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으나 나름대로 적응됐는지 이제는 제법 즐거웠다. 에스겔라는 언제나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3황자 전하의 시녀라고 무시하는 사람들하고는 격이 다르시지. 전에 주신 조언도 참 좋았는데 오늘은 점까지 봐주시고. 저분만큼 훌륭한 예언자가 또 있을까?’

에스겔라 말대로 산책 시간이나 교육에 관여하지 않았더니, 3황자가 많이 밝아진 게 눈에 보였다. 가끔 숙제해 놓은 것을 들춰 보면 어린 황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대예언자쯤 되면 앉은 자리에서 온 황궁을 내다보는 모양이야.’

어쩌면 슬슬 황제 폐하께서 3황자 전하를 살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스겔라의 점괘도 황자궁 기준으로 황제궁이 있는 방향인 동쪽에서 귀인이 나타날 거라 하지 않았던가.

엘다는 괜히 익숙하지도 않은 황제궁을 한 바퀴 빙 돌아보다가 길을 잃을 뻔했다. 너무 들뜬 것 같아 머쓱해진 그녀를 누군가 부른 건 그때쯤이었다.

“세베로 부인,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예? 아, 아! 예! 괜찮습니다!”

말을 건 이는 화려한 복장을 한 남자였다. 엘다는 남자의 얼굴은 몰라도 옷만큼은 바로 알아보았다. 뭐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황제를 모시는 직속 시종의 복장이었다.

시종은 엘다를 인적이 드문 복도로 데려가 고급스러운 상자를 건넸다. 허락을 받고 열어보니 안에는 향긋한 향을 풍기는 약초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은밀히 보내시는 물건입니다.”

“폐하께서요?!”

“공식 하사품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이것으로 분란이 일어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니 이 물품의 출처는 함구하셔야 합니다.”

“무, 물론이죠!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겠습니까?”

엘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토록 천대받던 3황자에게 황제의 하사품이 내려지다니! 비록 비공식이기는 하나 이 또한 다른 형제들의 견제를 방지하기 위함일 터. 그녀는 황제의 너른 아량에 탄복할 뿐이었다.

“3황자 전하께서 총명하시단 소식을 듣고 준비했습니다. 집중력과 학습 능력에 좋은 약초이니 차로 우려 마시면 좋을 겁니다. 세베로가의 영식처럼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찾는 약초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바로 우려 드려야겠어요!”

“당분간은 3황자 전하께도 비밀로 하십시오. 그럼 이만.”

할 말을 마친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엘다는 상기된 얼굴로 황자궁으로 돌아왔다.

‘과연 에스겔라 님이 맞았어! 역시 대예언자셔.’

엘다는 희희낙락하며 바로 조리실로 향했다. 그게 뭐냐는 조리사들의 물음에는 대충 얼버무리고 손수 차를 우려 준비했다. 이 차를 마시고 더욱 영특해질 3황자 전하가 언젠가 진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뻐하실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심장이 떨렸다.

그녀는 다른 시녀를 시키는 대신 직접 트레이를 들고 3황자의 방으로 갔다.

똑똑.

“전하,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들어와.”

테르세오 황자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떠난 손님의 흔적은 전부 치워졌지만 펼쳐져 있는 책들에는 필기가 가득했다. 어른인 그녀가 보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방증이었다. 엘다는 마음이 벅찼다.

“이 시간에 웬 차야? 처음 맡는 향인데.”

“저희 집 아이가 아카데미에 다니잖아요. 거기서 똑똑하다는 애들이 마시는 머리에 좋은 차래요. 어렵게 구한 거니까 한번 드셔보세요.”

“흠. 여기서 더 안 좋아져도 되는데.”

“그래도요! 한 번만 드셔보세요.”

테르세오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엘다가 저렇게 권하는데 거절하기도 뭐했다. 무언가 기대에 찬 얼굴로 먹이려는 걸 보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찻물을 머금었다. 너무나 치명적인 방심이었다.

“컥, 쿨럭!”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칼날을 삼킨 것처럼 내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테르세오는 비강을 채우는 피비린내에 당황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꾸역꾸역 올라오는 핏물이 기어코 입가와 손을 흠뻑 적셨다.

“저, 전하! 전하!”

엘다가 대경실색하여 테르세오를 붙잡았다. 테르세오는 엘다의 품에 기댄 채 피를 게워냈다. 하얀 얼굴과 옷이 새빨갛게 물들고, 불길한 냄새가 떠돌았다.

테르세오는 눈을 부릅뜨고 엘다를 바라보았다.

“에, 엘다.”

“말씀하지 마세요. 어서, 어서 누구라도 불러와야 하는데……!”

“엘다, 내 말, 들어.”

3황자의 거처는 사용인이나 궁인이 비교적 덜 돌아다니는 구역이었다. 엘다가 3황자를 두고 갈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테르세오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누, 구야?”

“예? 누구, 누굴 불러올까요?”

“차, 준 사람. 엘다, 내가 나, 믿으라고…….”

엘다는 뒤늦게 쓰러진 찻잔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독의 출처가 어디인지 너무나 명확했다.

“마, 말도 안 돼…….”

“누구, 야. 저, 염원초…….”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오랫동안 3황자 곁을 지키면서 황궁의 삭막한 생활은 충분히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손위 형제가 고작 4살 난 동생을 죽이려 하고, 죽일 만큼 미워하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어미는 자식을 없는 취급하고 아비는 모든 것을 방관했다. 이것만으로 차고 넘치게 끔찍한 가족 관계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비인 황제가 자식을 죽이려고 독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최측근인 엘다를 이용해서.

“아, 아! 내가 무슨 짓을……!”

“엘다. 말, 해. 너 위험…….”

“죄송합니다, 전하! 정말 죄송해요!”

“엘, 다……!”

엘다는 울면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테르세오가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붙잡고 힘없이 흔들었으나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상대는 황제였다. 파네트 제국 권력의 정점. 절대로 처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증거는 차를 탄 엘다를 가리킬 테고, 황제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가는 더 큰 벌에 처할지도 모른다.

‘세베로가의 영식처럼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찾는 약초이기도 합니다.’

약초를 건넨 황제의 시종이 한 말이 떠올랐다. 가족을 언급했다는 건 일종의 경고였다. 그들까지 모조리 엮어버릴 수도 있다는.

‘그것만은 안 돼.’

엘다는 품 안의 황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두 눈은 생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과 어려서부터 젖을 먹여 키워온 아이를 지키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전하, 제 말 잘 들으세요. 강해지셔야 해요.”

“말을, 해! 누구인지!”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전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아서……. 제가 더 강하고 현명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엘다는 테르세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찻주전자를 열어 망을 꺼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테르세오가 발버둥 쳤다.

“하지, 마!”

“죄송합니다, 전하. 정말…….”

엘다는 테르세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찻잎을 씹어 삼켰다. 강력한 독성을 가진 염원초가 순식간에 그녀의 생명을 앗아갔다.

테르세오는 부릅뜬 눈으로 생기가 빠진 육신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쾅!

“무슨 일입니까!”

그다음 순간, 엘다가 그렇게 울부짖어도 오지 않던 황실 경비대가 도착한 건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테르세오는 자신을 들어 올리는 기사의 손길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3황자 암살 미수 사건은 주동자인 엘다 세베로의 자살로 빠르게 종결되었다. 암살 동기와 배후는 알 수 없었으나, 자살한 이유는 붙잡히면 가해질 심문이 두려웠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귀족들은 오랫동안 3황자를 돌본 그녀가 왜 암살을 시도했을지 이러쿵저러쿵 떠들다가 곧 잊었다.

엘다 세베로의 가족은 혐의점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했다. 보통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면 가문 하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세베로 자작가를 축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피해 당사자인 3황자가 공식적으로 자작가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못 박았기 때문에 흐지부지됐다.

3황자는 하루를 꼬박 앓고 일어나 일주일을 침상에서만 보냈다.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부분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의욕 없는 조사원들이 사건을 더 빨리 종결시킬 수 있게 도운 셈이었다.

사건이 끝나자마자 세베로 자작은 3황자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본래라면 성사되어서는 안 될 만남이 별문제 없이 이루어졌다.

초췌한 얼굴의 슐레이만 세베로 자작이 3황자에게 깊이 읍했다.

“고초를 겪으시는 와중에 이리 만나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감히 여쭙건대 옥체는 괜찮으신지요.”

“나아지고 있네.”

3황자는 침대에 누운 채 슐레이만을 맞이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마치 정교한 밀랍 인형처럼 보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침대가 아니라 관 안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 겪고 있는 모습이라 슐레이만은 몹시 어렵게 본론을 꺼냈다.

“너무나 괴로우실 질문을 꺼내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여쭙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 오게 되었습니다. 전하, 엘다가…… 그녀가 정말로 전하를 해하려 하였습니까?”

3황자가 미리 시종과 기사들을 물려놓지 않았더라면 끌려 나갈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파란 눈동자가 슐레이만에게로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하를 언제나 성심성의껏 보필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무의미한 질문일세.”

3황자는 딱 잘라 말했다.

“내 대답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네. 그리고…….”

“…….”

“자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슐레이만은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사실 다들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너무 빤하지 않은가. 황족 암살 미수 사건을 이렇게 조용히 끝낼 수 있는 건 같은 황족, 그것도 황제밖에 없다.

극독이 아닌 염원초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굳이 찻잎으로 보냈다는 것은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다. 직접 복용하지 않고 우려 마신다면 염원초의 효과는 반감되고 마니까. 그러나 한 번 우려졌어도 찻잎으로는 누군가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저 경고였겠지.’

방치만 하던 3황자를 건드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3황자가 꽤 위협적으로 자랄 수도 있다는 방증이어서 사리에 밝은 귀족들은 무척 흥미로워하기도 했다.

“엘다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강해지라고 했네. 그건 자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겠지.”

“흑, 엘다…….”

“이만 돌아가게. 나는 더 할 말 없네.”

슐레이만이 떠나고 테르세오는 혼자 남았다. 시종 한두 명이 방 안팎으로 오가며 그를 살폈으나 저녁이 되자 완전히 물러갔다. 숨소리도 죽인 채 천장을 노려보던 아이가 천천히 일어났다.

경고 한 번 주는데 제법 독한 염원초를 썼는지 전신이 욱신거렸다. 여드레나 누워 있어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장신구 함에 숨긴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방에서 나왔다. 경비병이 상당히 늘어 황자궁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테르세오는 피 맛이 느껴지는 숨을 삼키며 달렸다. 무거운 몸은 속도를 내지 못해 빠른 걸음과 진배없었다. 그런데도 달렸다. 터질 것 같은 속을 달래기 위해서.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목덜미와 관자놀이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폐는 찢어질 것 같았고 팔다리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육체가 괴로울수록 영혼은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 멈출 수 없었다.

‘어디까지 달려가야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달을 따라 달렸다. 밤바람을 타고 무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테르세오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하앗!”

왜인지 아주 오랜만에 듣는 듯한 목소리였다. 테르세오는 숨을 헐떡이며 비밀 수련장에 들어섰다. 오늘도 열심히 수련하던 이안이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테오! 이게 무슨 일이야?”

8일 동안 테오의 염원이 담긴 음식 없이 풀죽을 먹은 터라 이안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말도 없이 나오지 않았던 테오를 그저 걱정했다.

가슴이 옥죄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테오는 비척비척 다가가 이안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너, 너 얼굴이 왜 그래? 아팠어? 많이 아팠구나! 아이고, 어떡해. 약은 먹었어?”

테오는 창백한 낯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얼굴이 어찌나 해쓱한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안은 테오의 뺨을 쓸다가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진짜 많이 아픈가 봐. 일단 이리 와. 불을 쬐자. 몸이 너무 차가워.”

그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테오를 안아 들고 소형 화로에 다가갔다. 미리 쌓아둔 장작을 던져 넣고 기다리자 금세 불이 붙었다. 이안은 테오를 무릎에 앉히고 불을 쬐게 했다.

‘아무래도 공황에 빠진 것 같은데…….’

못 본 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그는 그저 테오의 체온이 조금이라도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테오는 여전히 이안의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숨을 쌕쌕 내쉬었다. 그러다 크게 뜬 눈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이안.”

“응.”

“이안.”

“그래, 나 여기 있어.”

“이안…….”

엘다 세베로의 죽음이 테르세오 파네트에게 충격을 주었는가? 그런 물음을 듣는다면 테오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죽음에 무감하다. 그 대상이 오랫동안 그를 돌본 유모이자 시녀였던 엘다라도 그랬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던 죽음이라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엘다는 테오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믿지 않았으며,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테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을지라도 그에게는 배신에 가까웠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찻잎을 씹어 삼켜 죽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를 위해 자신이 그 염원초를 만든 것이라고 거짓말이라도 했을 것이다. 꼭꼭 숨겨두었던 능력을 밝혀내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다는 모든 사실을 찻잎과 함께 삼키고 죽어버렸다.

가장 가까웠으나 테오를 믿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배신이자 상처였다.

“넌, 나를 배신하면 안 돼.”

독과 싸우느라 혼미한 상태인데도 테오는 내내 이안을 생각했다. 엘다만큼이나, 어쩌면 그녀보다도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그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를 몇 번이나 상정해 보았다.

테오의 말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잘못된 결단을 내리는 단호한 표정을. 아무리 만류해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끝내 다정하게 반짝이던 회색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순간을.

“저, 절대 배신하지 마라. 너만은 안 돼. 너만은…….”

그런 이안을 생각하니 성치 않은 몸으로 뛰어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죽음이 원래 이리도 두려운 것이었던가? 낯선 공포에 휩싸여 달리면서 고뇌했다. 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이안의 죽음이 두려운가.

“알았어. 절대 배신 안 해.”

이안은 바들바들 떠는 테오를 꼭 끌어안았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많이 크긴 했지만 여전히 품에 쏙 들어오는 어린아이다. 오늘따라 특히 애처로운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정말이냐? 배신 안 해?”

“응. 안 해.”

“그럼 내 말도 다 믿고 따를 테냐?”

“당연하지.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나? 나는 널 믿어, 테오.”

이안이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줘. 안 와서 계속 걱정했어.”

테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태어나면서 받은 태생 예언과 그로 인한 천대, 최초의 독살 미수와 그 후의 대응, 유모이자 시녀였던 엘다가 왜 죽게 되었는지 전부 털어놓았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머리를 쓰다듬는 이안의 손길이 느려졌다.

“고작 예언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이다니…….”

“고작 예언은 아니다. 황족에게 내려지는 태생 예언은 적중 확률이 9할이 넘어. 내가 재앙의 씨앗으로 보일 만도 하지.”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것도,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이안은 테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네가 원한 것도 아닌데 그저 타고났다고 해서 네 탓을 하면 안 되는 거야. 테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테오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다.

난생처음 들은 말이 이국의 언어처럼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마음에는 와닿았다. 예상치 못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맞아.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태생 예언은 그저 주어지는 것일 뿐. 그것이 테오의 죄가 될 수는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

테오는 이안의 품에 파고들었다. 항상 어린아이 같지 않던 아이가 피우는 어리광에 이안은 말없이 꼭 끌어안아 주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이 그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찬 몸을 감싸는 체온이 뼛속 깊이 새겨졌다. 묵직하게 울리는 심장박동에 마음이 놓였다. 아무리 파고들어도 넉넉한 품은 필요한 줄도 몰랐던 유일한 안식처였다.

‘절대로 잃지 않겠어.’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테오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엘다에게 그랬듯, 괜한 경고가 애먼 이안에게 향할지도 몰랐다. 그는 이안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전략을 수정한다. 눈치 보면서 차근차근 준비하는 건 오히려 그들에게 날 파악할 시간을 주는 거였어. 그딴 경고조차 주지 못하게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해.’

울보 황자를 완벽하게 연기했음에도 엘다를 잃었다. 그렇다면 더는 이 전략을 유지할 필요 없다. 위협받지 않기 위해서 위협적인 전략을 사용할 때다.

게다가 이안은 테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안이 그렇게 말했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다. 태생 예언으로 알게 모르게 위축되어 있던 정신이 활짝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테오는 머릿속으로 기존의 계획을 수정하고 새로이 적립해 나갔다.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짐승의 아가리가 벌어졌다. 건드려도 드러내지 않았던 독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날카로울 것이다.

* * *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만백성을 내려다보는 듯한 황궁. 온갖 보화로 사치스럽게 꾸며졌지만, 이곳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곳인지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은 알았다.

황족 시해 미수 사건이 일어난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었으나 황권을 흔들지는 못했다. 3황자는 죽지 않았고, 주동자는 자결했으므로.

800년 가까이 유지된 무소불위의 권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름답고 화려하기로 유명한 황제궁은 파네트 제국에서 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지표였다. 오래된 절대왕정은 관성적인 충성을 끌어냈고, 황제는 그 충성에 충분히 보답하여 관성을 유지했다.

그런 황제가 황제궁의 부속 건물 하나를 통째로 내주었다는 건 의미가 깊었다. 대예언자를 필두로 한 황실 예언자들은 황제가 가진 권력의 큰 축이었다. 그들은 황제궁에서 가장 가까운 궁에 기거하며 황실과 나라를 위한 예언을 내렸다. 제국의 1황녀 세르티아나도 그중 하나였다.

6살 때부터 예언 능력을 인정받아 예언자의 궁에 기거한 세르티아나는 오라비인 2황자 오르키우스와 함께 궁 어귀를 걷고 있었다. 근래 종종 있는 일이라 오가는 귀족이나 시종들은 고개만 살짝 숙이며 스쳐 지나갔다.

세르티아나는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러냐. 오라버니와 산책하는 게 그렇게 싫던?”

오르키우스가 점잖게 묻자 세르티아나는 코웃음 쳤다.

“속세의 연을 끊어야 하는 예언자에게 어찌 오라버니가 있겠습니까? 요즘 들어 자주 찾아오시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전하.”

“그것 참 서운한 말이구나, 세레나. 황실 예언자 중 진정으로 속세를 떠난 이도 없거늘. 에스겔라 님도 매주 폐하를 뵙지 않느냐.”

“저는 그런 것이 전부 싫습니다.”

세르티아나가 살짝 치를 떨었다.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황실 정치판에는 정말 신물이 났다. 그러나 황녀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하필 예언 능력까지 타고났다.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릴 수 없는 유용한 말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불편한 산책 또한 생존을 위한 연장선이었다.

“오늘은 또 뭘 물으러 오셨습니까? 빨리 끝내고 제 갈 길 가도록 하죠.”

“하여간에 정 없는 아이라니까.”

오르키우스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세르티아나를 인적 드문 정원으로 이끌었다.

“며칠 전 클라브 왕국의 사절단을 테르세오가 안내하지 않았느냐. 그 일에 혹시 형님의 입김이 들어간 게 아닐지 염려스럽구나.”

“그럴 리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여전히 3황자 전하를 싫어하시니까요.”

“그런가. 그럼 제 능력으로 안내역을 맡은 거란 말이지? 형님은 왜 그런 아이를 멀리하는지 모르겠구나. 나라면 꼭 붙잡아서 내 곁에 둘 텐데.”

오르키우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세르티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의 밑에 들어갈 이가 아닙니다. 4년 전 일을 겪고도 잃을 게 없는 것처럼 달려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방향이 전하와 다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비록 올해 초 1황자 아리테우스가 황태자로 책봉되긴 했지만, 오르키우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세력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휘두르니, 내정에 집중해 차별성을 두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최근 3황자가 보여주는 행보는 그와 유사했다. 4년 전, 독살당할 뻔했던 3황자는 은인자중할 거란 주변의 예상을 깨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당시 세력도 얼마 없던 9살짜리 황자가 돌연 무역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테르세오 황자는 중립파였던 체드로 백작과 손을 잡고 외국에 온갖 물품을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여러 견제와 조치가 들어갔으나 법적인 견제는 빈틈을 파고들어 역공했고, 경쟁 상단의 패악은 황자가 직접 행차하여 찍어 눌렀다. 고귀한 황족이 경박하게 무슨 짓이냐며 꾸짖어도 3황자는 들은 체도 안 했다.

아리테우스가 윽박지르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뛰쳐나가던 어린아이는 이제 없었다. 갓난아기 적 보이던 그 불길한 기질이 다시 드러난 것 같았다.

세르티아나의 말대로 가는 방향이 다른 게 정말 다행이었다. 테르세오는 군사력과 내정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고 오로지 무역과 외교에만 힘썼다. 중립을 표방하던 이들이 3황자 세력으로 많이 흡수되었으나 황태자와 2황자 세력의 유출은 없었다.

‘중립파를 전부 흡수해도 그리 위협적인 세력은 아니지. 하지만 독자적으로 가지 않고 어느 쪽에 힘을 실어준다면 판을 뒤엎을 수도 있어.’

그걸 알기에 황태자도 이제는 쉽게 3황자를 건드리지 못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시절에는 목숨을 위협한다 한들 큰일이 아니었지만, 일반 백성들도 알음알음 테르세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지금은 위험 부담이 컸다.

죽여 없앨 때의 이득보다는 무시하거나 포섭할 때의 이득이 더 많은 것이다.

“아쉬운걸. 가급적이면 손에 넣고 싶은데. 약점이라도 잡아야 하나?”

“아서세요. 역으로 당하기 싫으면.”

세르티아나가 기껏 해준 경고는 오르키우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불온한 욕망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황자궁 쪽을 바라보았다. 궁 안에 있을 테르세오를 생각하면서.

* * *

쐐액-

공기를 거칠게 가르며 목검이 움직였다. 그 찢어지는 소리는 목검이 만들었다기엔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러나 목검이 타격했어야 할 상대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훌쩍 피했다.

“좋은 공격!”

경쾌한 칭찬이 떨어졌지만 테오는 웃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벌써 열 번도 넘게 칭찬만 받고 유효한 타격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가 검을 가르쳐 준 이안이라지만 자존심이 좀 상했다.

테오는 검을 붙잡고 심호흡했다. 하체를 낮추고 바닥을 강하게 박차자 이안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잔상마저 보일 듯한 빠른 찌르기가 펼쳐졌다.

탓!

그러나 이안은 자신의 검으로 테오의 검을 살짝 밀어내며 쉬이 방어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강하게 휘둘러 테오의 목검을 날려 버렸다. 그 반동에 넘어질 뻔한 테오를 이안이 잡아주었다.

“허억, 허억, 헉…….”

“괜찮아?”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을 슬쩍 노려보았다. 이안도 땀이 살짝 흘렀으나 테오만큼은 아니었다. 아직은 실력과 체력의 차이가 심했다.

사실 아직 13살인 테오가 서른인 이안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키도 아직 덜 자라 이안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온갖 어른들을 이기고 다니다 보니 당연한 패배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빨리 배운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니까.”

“흠.”

“마지막 공격은 특히 훌륭했어. 일격 필살의 의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네 또래 중에서는 막을 사람이 없을 거야.”

“필살까지는 아니었다.”

매번 지는 게 분했지만, 더 분한 건 이안의 칭찬 몇 마디에 풀어지는 마음이었다. 남이 해주는 칭찬에 감흥이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안의 칭찬은 언제나 심장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테오는 절로 으쓱해지는 어깨를 내리누르며 목검을 주웠다. 이안이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았다.

한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로 운동한 터라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몰래 꿍쳐 둔 수련복을 벗고 화려한 예복을 입으니 테오는 황자에 걸맞은 기품이 넘쳤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었지만, 그 고아함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이안이 테오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새삼스럽지만 너 진짜 예쁘다.”

“……정말 새삼스러운 소리군.”

테오는 얼굴을 붉히며 괜히 투덜거렸다.

천대받는 것과는 별개로 어렸을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쑥쑥 자라나자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 저절로 감탄을 내뱉곤 했다. 아름답다느니, 천하절색이라느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안의 한마디만도 못했다. 테오는 정말 새삼스럽게도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수련장을 간단하게 점검하고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테오가 9살 때부터 사업을 벌이고 10살 때부터 이안에게 검을 배우느라 바빠졌지만, 이 식사 시간만큼은 절대 빼지 않고 지켰다. 그를 주목하는 시선이 늘어나도 꿋꿋했다. 실력이 일취월장한 클로이의 아티팩트로 수련장을 은폐한 덕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테오가 건강을 염원한 차를 마시며 그들은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이제 추룡제가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워낙 큰 행사라 나도 덩달아 바빠질 거야. 적어도 식사는 챙겨주고 싶은데 시간이 날지…….”

“난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염원 덕에 이제 풀죽 먹어도 멀쩡해.”

이안을 향한 테오의 염원은 하급 염원초에 담긴 염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이안은 풀죽을 싹싹 긁어 먹어도 정신이 말짱했다.

“잘하면 클라브 왕국과 교류도 할 수 있다면서? 외국에 엄청 나가보고 싶어 했잖아. 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음…….”

“어차피 네가 외국에 나가면 몇 주 정도는 풀죽만 먹어야 해. 이번에 연습한다고 생각하지 뭐.”

“차라리 클로이에게 사정을 설명할까? 그 녀석이라면 비밀을 지킬 텐데.”

작년에 엘바차 남작의 양녀가 된 클로이라면 황궁에 들어오기도 용이할 것이다. 마법으로 음식에 보존 처리를 할 수 있으니 그녀를 끌어들이는 건 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네게 도움받는 거로도 미안해 죽겠는데, 네 친구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어. 난 정말 괜찮아, 테오. 너무 걱정하지 마.”

결국 테오는 이안의 의견에 수긍했다. 그들은 추룡제가 무사히 끝난 뒤 테오의 생일 다음 날인 1월 2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떠나기 전, 테오는 이안의 손을 붙잡고 염원했다.

“건강해라. 온전한 의지로 네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염원초를 만들어 섭취하는 것 같은 효과는 없지만, 고마운 마음 씀씀이였다. 이안은 테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테오가 계속 뒤돌아볼 때마다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들 하나 독립시키는 것 같네. 아니, 테오 나이를 생각하면 중학교 첫 등교 배웅인가? ……그런데 중학교가 뭐 하는 데였더라.’

테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이안은 천천히 숲을 거닐었다. 그의 얼굴에서 테오에게 보여주던 다정함이 점차 빠져나갔다. 본래의 색을 잃은 회색 눈동자에 여러 상념이 스쳤다.

‘도저히 테오에게 못 말하겠어.’

자신을 위해 그토록 찾아 헤매는 곳이 사실은 이 세계에 없다고 말하기는 너무도 힘들었다. 테오는 이미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었다. 자세히 말은 안 해주지만, 흘러가는 정세만 보아도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종들이 테오에 대해 수군거리는 빈도가 늘었지.’

고작 13살임에도 사업 수완이 대단하다던가. 손을 대는 사업마다 크게 성공하니 중립파가 아닌 다른 세력도 접촉을 고민한다는 모양이었다. 1황자의 시종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으니 거의 확실했다.

종종 숲을 빠져나가 정보를 모으다 보면 테오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성공담만을 이야기하지만, 잘 들어보면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걱정 끼치기 싫은지 한 번도 말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자신을 위한 일임을 이안은 알았다.

그런 테오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찾으려 할 터였다. 그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말이다. 자신을 위해 힘써주는 것이 정말 고마웠으나 아직 어린 녀석에게 더 큰 짐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없는 곳을 찾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데 어쩌지. 나 대신 신들을 만나게 할 수도 없고…….’

반응을 예측하기 어렵고 제멋대로인 신들을 만나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나마 이안은 천룡과 안면이 있기에 시도할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이유로 계속 미뤄지고 있지만.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이안은 은신 아티팩트를 발동한 채 황궁 주변을 돌아다녔다.

추룡제 준비로 경비 병력이 늘었으나 일반 병사나 평기사들은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상급 기사에게는 들킬 위험이 있으므로 황궁 내부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데도 시기가 시기인지 모은 정보는 대부분 추룡제에 관한 것이었다.

‘7년에 한 번 열리는 추룡제라.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장 황제궁으로 쳐들어가 루키오의 후손일 황제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따지고 싶지만 이안은 그럴 힘이 없었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갑갑함을 꾹 참고 훈련했으나 과거의 무위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했다. 나름 구색을 갖추었다 한들 여전히 부족한 환경과 실전 없이 오직 홀로 해야 하는 수련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

겨울의 낮은 짧았기에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이안은 미련을 갈무리하고 숲으로 돌아왔으나 곧장 냉궁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후원의 숲 가장자리.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성벽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황궁을 넉넉히 감싸는 성벽 위에 난 순회로에선 경비병들이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은 존재했다.

이안은 멀리서부터 도움닫기 하여 성벽을 향해 뛰었다. 벽면을 발로 찍듯이 몇 번이고 박차고 올라가 솟구쳤다.

도움닫기의 추진력이 다했을 때쯤 성벽에 달라붙으니 벌써 십여 미터는 오른 상태였다. 그는 성벽의 틈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위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지?’

성벽 위의 순회로에 오르기 전, 이안은 미리 챙겨 온 작은 돌로 성벽에 흠집을 냈다. 경비병들이 볼 수 없는 위치의 벽돌에는 수십 개의 흠집이 남아 있었다.

순회로에 사뿐히 내려앉은 이안은 뉘엿뉘엿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방향은 이 세계에서도 서쪽이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는 천룡이 산다.

‘이대로 성벽을 넘는다면 경보 마법이 발동될 거야. 하지만 단순히 경보만 울릴 뿐, 마법을 건드린 사람을 추적하지는 못한다고 테오가 그랬지.’

성벽을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된 건 꽤 예전 일이다. 지금이라면 경보 마법이 울려도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노을이…….”

여러 생각이 뒤섞이는 가운데 노을이 지고, 등 뒤로 어둠이 밀려왔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숨어버리자 곧 노을은 짙푸른 어둠에 잡아먹혔다. 이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둠을 뒤집어썼다.

잠시 뒤, 경비병 둘이 불을 밝히기 위해 순회로로 올라왔다. 횃불을 들고 있던 이가 문득 성벽의 한쪽을 가리켰다.

“음? 저기 사람인가?”

“무슨 소리야. 아무도 없는데.”

경비병은 횃불을 들고 인영이 보였던 곳까지 가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성벽 아래로 바람결에 나무 흔들리는 소리만 났다.

“이상하다. 어두워서 잘못 봤나?”

성벽에서 뛰어내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이안은 경비병들이 물러나자 바닥에 착지했다. 결국 그는 오늘도 벽을 넘지 못했다.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지.’

이안은 쓰게 자조했다. 오늘은 자기기만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테오를 위해서라는 변명은 그만하자.’

분명 처음에는 테오의 곁을 지켜주기 위해 남았다. 그 어리고 외로운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했다.

지난 6년간 테오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많은 상황을 바꾸었고, 영리하게 자기편을 만들었다. 오직 이안만이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황과 환경이 열악했다고는 하나 성벽을 넘지 않은 건 그의 선택이었다.

‘난 사실 탈출 이후의 상황이 두려웠던 거야. 미리내도 없고 이렇게 약해진 상태에서 천룡을 만나면, 그 신이 나를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그가 처한 상황에 신이 관여했을 가능성은 상당했다. 그렇다면 찾아가 봤자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터. 오히려 더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 막막함이 언제나 이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유일무이한 해결책이 사실은 자충수에 가까웠으니.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더는 망설일 수 없어. 아니, 이미 너무 많이 망설였어. 테오가 나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애를 쓰는데, 정작 나는 한 게 없잖아.’

물론 테오가 이안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음은 분명하다. 여전히 종종 이안의 품에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곤 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어린아이에게 도움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황궁을 탈출하자. 역시 그게 낫겠어. 바깥에서 본격적으로 무력을 키우는 거야. 얼마나 오래 걸리든 간에 수백 번 회귀하는 것보다 힘들겠어?’

신조차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안은 이미 신을 죽인 바 있다. 한 번 도달한 경지를 두 번은 못 이루겠는가.

‘다음에 테오를 만나면 전부 이야기하자.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를 위해 노력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지. 내가 떠난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 친구고,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는 거야.’

자신을 위해 무리하지 않도록 테오를 설득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처음으로 다툴지도 모르겠다. 테오도 고집이 제법 세니까.

하지만 모두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열심히 서로를 설득하다 보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지. 이안은 그저 자신과의 이별에 테오가 너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시종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냉궁으로 들어온 이안은 바닥에 깔린 침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불편한 잠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니 좀 유쾌했다. 그는 바깥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가늠하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똑똑.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도련님.”

이안은 일부러 비척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하품도 야무지게 해주고 헤실헤실 웃자 시종도 마주 웃어주었다. 완벽에 가까운 바보 행세였다.

“오늘도 남김없이 다 드셔야 해요. 아셨죠?”

“으응.”

이안은 별생각 없이 풀죽을 휘적이다가 한술 크게 떠서 입안에 넣었다. 가급적 염원초를 씹지 않고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켰다.

“으, 으음?”

순간 강한 현기증이 돌았다. 힘이 빠져 놓칠 뻔한 죽 그릇을 꽉 잡았다. 급작스러운 허기가 돌며 죽을 마구 먹어 치우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왜 그러세요? 맛이 없으신가요?”

“아, 아니…….”

이안은 염원초를 분간할 능력이 없었지만, 이 죽에 든 풀이 전에 먹던 것과는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한 숟갈이라도 더 먹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갑자기 이렇게 강한 염원초를 사용한다고? 설마, 들켰나?’

이안이 의혹에 찬 눈으로 시종을 노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 우리가 계속 모를 줄 알았어요? 그냥 얌전히 행복한 바보로 살면 좋았을 텐데 왜 머리를 쓰고 그래요. 범죄자 새끼가 사람 귀찮게 하네.”

“뭐라고?”

“됐고. 일 더 커지기 전에 다 드시죠? 좋은 말로 할 때.”

방 밖에는 어느새 병사들이 깔려 있었다. 이안이 움츠러든 채 움직이지 않자 시종이 짜증을 내며 다가왔다.

“어서 먹으라고- 아아악!”

이안은 가까이 온 시종의 팔을 잡아 냅다 꺾어버렸다. 시종의 비명을 듣고 병사들이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안은 시종을 그들을 향해 던지고는 뛰어올랐다.

엄청난 도약력으로 날아오른 그는 병사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고 달렸다. 좁은 복도를 빽빽하게 메운 병사들은 가진 무기를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몸을 잔뜩 숙이고 돌파하던 이안은 병사들의 밀집도가 떨어지는 부분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대비하고 있던 터라 낙법으로 착지한 뒤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후려치며 계속해 달렸다. 염원초의 기운으로 어지러웠으나 아직 힘이 있을 때 탈출해야 했다.

‘테오에게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이렇게 떠나는 건가. 이런 건 원치 않았는데.’

그러나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냉궁 밖의 상황을 확인한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창을 든 병사가 빽빽하게 냉궁을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이안을 발견하자마자 창을 겨누었다.

“대단하군. 꽤 심혈을 기울여 키운 거였는데.”

팽팽한 대치 상황을 덤덤한 목소리가 갈랐다.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이안은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으나 입고 있는 로브로 예언자임을 알았다.

“뭣들 하느냐. 포박해라.”

대예언자 에스겔라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이 일제히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이안은 자신을 향해 내질러진 창을 잡아 쑥 당겼다. 병사가 휘청거리며 딸려오자 복부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창은 리치가 긴 게 장점이지만 익숙하진 않은 무기였다. 그는 창을 반으로 부러뜨려 쌍검처럼 휘둘렀다.

죽일 작정은 아닌지 병사들의 창끝에는 날붙이가 모두 제거되어 있었다. 이안도 급소를 노리기보다는 손목을 쳐 무기를 떨어뜨리는 데 집중했다. 무력화된 병사들이 하나둘씩 이탈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제대로 싸우지 못할까!”

병사들을 이끌던 기사가 보다 못해 호통을 쳤다. 답답해하면서도 나서지 않는 것을 보니 병사들로 이안의 힘을 뺀 뒤 붙을 모양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이안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종전과는 다른 기세를 피워 올렸다. 인간이 아닌 괴물을 상대할 때나 쏘아내던 살기.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을 마주한 병사들이 굳어버렸다. 아무리 약해졌어도 악룡을 상대했던 경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겁먹은 병사들을 삽시간에 돌파하여 기사를 공격했다. 미약하나마 오러가 담긴 창대로 있는 힘껏 내려쳤다.

쾅!

“크윽!”

대경실색한 기사가 황급히 검을 뽑아 막았으나 두 걸음 밀려나고 말았다.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갔다. 오러의 총량이나 육체의 완성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그가 가진 경험의 질과 양은 그 차이를 메꾸고도 남았다.

쐐애액-

오른쪽 창대로 기사의 검을 튕긴 다음 몸을 회전하여 왼쪽 창대로 허벅지를 내려쳤다. 오러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지 자세가 무너지진 않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으로 부족하다면 다섯 번이고 열 번이고 치면 된다.

기사는 이안의 흉흉한 기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으나 그전까진 타격을 계속 허용했다. 한 번은 괜찮았지만 그것이 다섯 번, 열 번이 되자 기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빠아악!

열세 번째 공격이 먹히자 마침내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기사는 이다음으로 몰아칠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 자세를 취했다. 지극히 당연한 생각의 흐름이었다.

타앗!

그러나 이안은 기사를 후려칠 듯 달려들다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내 목적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탈출하는 거다!’

그는 곧장 후원의 숲으로 뛰어들어 가 성벽을 향해 달렸다. 다리를 다친 기사나 일반 병사들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안은 기척을 숨기고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휘이익-

그때, 쇠사슬이 달린 갈고리가 이안을 향해 날아왔다. 황급히 창대로 쳐냈으나 오러까지 담겼는지 창대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안은 갈고리가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며 남은 창대 하나를 겨누었다.

갈고리를 회수한 자가 나무 그림자 아래서 걸어 나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오러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기사 같았다.

이안이 주춤한 사이 숲에 매복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일반 병사가 아닌 정예 기사 수십 명. 갈고리를 쓴 기사가 단장인 듯 그들에게 명했다.

“황명이다. 흉악범을 상처 없이 포획하라.”

“예!”

기사들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퇴로까지 막혀 버린 이안은 창대를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제기랄!”

이안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머릿수로 몰아붙이니 방법이 없었다. 열댓 명의 기사가 쓰러지고 스무 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달라붙고 나서야 이안이 붙잡혔다.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와 날뛰는 이안을 유심히 관찰하던 에스겔라가 중얼거렸다.

“설마 기사단까지 이렇게 애먹을 줄이야. 단순히 섭취량이 줄었다기엔 너무 극적인 변화로군. 혹시 3황자 전하께서…….”

기사들에게 깔려 묶이는 와중에도 이안은 에스겔라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날 범죄자 취급하던데, 테오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그는 바닥에 머리가 눌린 채 으르렁거렸다.

“날 놓아줘! 무슨 이유로 날 가둔 건지 모르겠지만, 난 범죄자가 아니야!”

“시끄럽다! 어디서 대거리질이야, 이 범죄자 놈이!”

“거, 거기 더 꽉 묶어! 쇠사슬 끊어질라!”

기사들이 몸을 던져 이안을 짓눌렀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이안이 꿈틀거릴 때마다 산처럼 쌓인 인간들이 크게 휘청거렸다. 기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된 지 오래였다.

에스겔라는 그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갔다.

“대, 대예언자님! 조심하십시오!”

“괜찮다.”

기사 하나가 이안의 머리를 날카로운 검으로 겨누었으나 에스겔라가 치우게 했다. 그녀의 눈에 모처럼의 흥미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안에게만 보이도록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용사님.’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제국을 위해 계속 희생해 주십시오.’

“다, 당신-!”

이안이 경악해 입을 열자 에스겔라가 그 안에 염원초를 쑤셔 넣었다. 바로 뱉으려 했으나 기사들이 달라붙어 억지로 씹고 삼키게 만들었다. 에스겔라가 손수 키워 만든 염원초가 바로 효능을 보였다.

‘아, 안 돼. 테오…….’

곧 이안이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에스겔라는 기사들에게 실려 가는 이안을 보며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 추룡제 때까지만 해도 양산해 만든 하급 염원초로 충분히 붙잡을 수 있었다. 한데 이제는 내 염원초에 저항을 할 정도야. 3황자 전하께서 숨기신 힘이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이때까지 황제와 에스겔라는 3황자와 용사의 만남을 묵인해 왔다. 아직 어리숙한 황자와 염원초에 취한 용사가 만나봤자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에스겔라는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점을 여러 차례 쳐서 괜찮을 거란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점괘에 따르면 두 사람을 계속 만나게 두는 대신 용사를 붙잡아두는 것이 3황자의 태생 예언의 실현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나, 용사는 추룡제 때 죽어야 한다. 죽어서 지난 7년의 기억을 잃고 다시 냉궁에 갇혀야 했다. 용사를 위해 염원의 힘을 사용한 3황자가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었다.

‘폐하께 요청하여 3황자 전하께서 추룡제에 불참하도록 만들어야겠군.’

그리고 그전까지 3황자가 냉궁으로 못 오도록 하고, 이후 만남에도 개입해야 했다.

“너무 안일했는지도 모르겠어.”

작게 한탄한 에스겔라는 걸음을 서둘러 황제궁으로 향했다. 황제를 알현하여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야 했다. 자꾸만 불길한 마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 * *

테이블 위에 깔린 비단 위로 카드가 쏟아졌다. 한 장씩 늘어놓았다가 모으고, 마구 어질렀다가 다시 정리하기를 일곱 번 반복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에 현기가 담길 때쯤, 세르티아나는 세 장의 카드를 뽑았다.

늘어놓은 카드 세 장 아래에 두 장의 카드를 추가로 엎어놓고, 맨 아래에 카드 한 장을 두어 역삼각형을 만들었다. 떨리는 손이 맨 윗줄의 카드를 뒤집었다.

“용의 카드 역방향, 검의 카드 정방향, 탑의 카드 역방향.”

‘용을 죽인 검에 의해 추락할 자’. 13년 전과 같은 이 카드들은 세르티아나가 그간 피해온 사람을 뜻했다.

두 번째 줄의 카드를 뒤집었다. 차례로 군중의 카드 정방향과 죽음의 카드 정방향이 나왔다. 세르티아나가 미간을 모았다.

“해석이 좀 애매한데…….”

군중의 카드와 죽음의 카드 모두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카드였다. 군중이 꼭 군중이 아니고 죽음이 꼭 죽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군중이 죽는다’ 혹은 ‘군중 앞에서 누군가 죽는다’가 된다. 죽음을 사건의 종결이나 관념 그 자체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군중이 죽을 만한 재해? 재난? 아니. 그런 쪽은 아니야. 그만큼 큰 사고였으면 다른 카드가 나왔겠지.’

같은 이유로 ‘군중 앞에서 누군가 죽는다’도 아니었다. 암살 또는 사형으로 해석되는 카드는 따로 있었다. 세르티아나는 카드를 매만지며 고심했다.

‘군중과 죽음. 군중에게 벌어진 사건이 종결된다…… 는 쓸데없이 번잡해. 그보다는 군중이 죽음을 생각한다? 떠올린다? 그렇다면 추모 혹은…… 제사.’

추룡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제국의 가장 큰 제사.

마이너한 해석이지만 정황상 두 카드는 추룡제를 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추룡제 때 테르세오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테르세오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마지막 카드가 알려줄 것이다.

세르티아나는 가장 아래쪽 카드를 뒤집었다.

“세계의 카드…… 역방향.”

터무니없는 점괘였다. 열셋밖에 안 된 그 어린아이가 세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거라니. 세르티아나는 세계의 카드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으나 자꾸만 테오의 태생 예언이 떠올랐다.

‘‘제국의 명맥을 끊을 자’. 그 예언이 이루어지려는 건지도 몰라. 아니면 추룡제 때 용살검이 쓰이니까 크게 다치는 것일 수도…….’

그러나 그녀의 직감은 더 광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설마 ‘구원에 종언을 고할 자’일까? 하지만 구원은 어디에 있고 종언은 또 뭐야. 말이 안 되잖아.’

세르티아나는 이성과 직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그녀의 예언이나 점이 항상 맞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허무맹랑한 점괘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심심해서 친 점도 아니었다.

‘카드가 쏟아지는 꿈을 꾸고 친 점은 지금까지 전부 맞았는데…….’

예언자들의 꿈은 잘 들어맞는 편이다. 에스겔라의 수제자인 세르티아나도 그랬다. 점점 방금 예언이 정말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세르티아나는 거꾸로 된 세계의 카드를 두려운 눈으로 보다가 카드를 다시 뒤섞었다. 섬뜩한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카드를 섞은 뒤, 이번에는 한 장의 카드만 뽑았다.

별의 카드 정방향이었다.

‘희망이 있다, 또는 내가 이끌어야 한다.’

양치기가 별을 가리키고 있는 이 카드는 보통 직관적인 해석이 잘 들어맞았다. 그림 그대로 양치기가 별을 보고 길을 찾는다 하여 희망이기도 하고, 별이 양치기를 이끈다 하여 길잡이기도 했다.

주체를 어느 쪽으로 두느냐, 그리고 카드를 뽑을 때 어떤 질문을 했느냐에 따라 유연하게 풀이하는 게 정석이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물었으니…… 희망보다는 길잡이 해석이 더 알맞겠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따라가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야.’

별의 주체를 자신으로 둔다면 양치기는 누구일까? 추론은 쉬웠다. 직전 예언의 주인공. 용을 죽인 검에 의해 추락할 자. 테르세오 파네트.

세르티아나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어. 역방향인 세계의 카드가 언제나 멸망을 뜻하는 건 아니니까.’

좁게 보면 ‘멸망, 끝, 종료’ 등으로 해석하겠으나 넓게 보면 ‘죽음 뒤의 새로운 탄생, 또 다른 시작’처럼 희망찬 해석도 가능했다. 그리고 예언이 어떻게 해석되느냐는 예언 대상의 염원에 달렸다.

세르티아나는 벌떡 일어났다.

‘범상치 않은 예언이야. 신중하게 움직이자.’

그녀는 거처에서 나와 곧장 황자궁으로 향했다.

* * *

이안을 만나지 못한 지 벌써 일주일째. 최대한 노력했지만, 예상대로 식사를 챙겨줄 짬조차 나지 않았다. 사절단 관리를 하며 겸사겸사 세력도 넓히려 하다 보니 황족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바쁜 일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 해도 그를 주목하는 시선이 너무 늘어 후원의 숲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써보려 해도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추룡제 준비를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따라붙은 시종들도 조심해야 했다. 사실상 테르세오를 감시, 견제하는 그들 때문에 이안을 살피러 가기가 더욱 어려웠다.

불만이 쌓였으나 세력을 넓히면서 따라오는 부작용이었으니 안정될 때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래도 1월 2일에는 시간을 내야지. 풀죽만 먹어 괴로울 테니 아주 맛있는 음식을 가져가야겠다.’

테르세오는 하루에 몇 번이고 날이 서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이안 생각이 났고, 그가 너무나 그리웠다. 심지어 꿈에 이안이 나오기까지 했다. 꿈의 내용이 꽤 민망했던지라 그는 안색을 유지하기 위해 표정을 굳혔다.

‘예언적인 꿈은 아니겠지 설마. 그냥 보고 싶은 마음이 꿈에 반영된 걸 거다.’

이안은 몹시 상식적이고 건전한 사람이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테르세오를 상의 탈의한 채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을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예쁘다고 속삭일 리 없었다.

‘내가 어른이 된 뒤라면 모를까…….’

어쩌면 그때도 꿈속 이안과 달리 진짜 이안은 테르세오를 그저 귀여운 조카 보듯이 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테르세오의 걸음에 신경질이 살짝 담겼다.

남들이 다 예쁘다고 하면 뭐하나. 정말로 예뻐해 줬으면 하는 사람이 안 그러는데.

테르세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특히 이안을 생각하면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클라브 왕국의 사절을 만나러 가는데 정신이 흐트러져서는 안 됐다.

그는 회중시계를 보며 남은 시간을 확인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뒤따라오던 시종들이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클라브 사절단 숙소로 가서 한 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거라. 제4조리실 조리장에게 특별히 부탁한 다과는 먼저 전달하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전하.”

아무도 없는 거리를 집요하게 뜯어보는 시선이 어쩐지 소름 끼쳤지만 시종은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수행했다. 테르세오는 남은 시종들이 눈치 보는 것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의외로 잘 숨는데? 목적이 뭔지는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고. 그 전에 이 귀찮은 찰거머리들을 떼어내려면…… 옳거니.’

테르세오가 향한 곳은 황자궁과 가까운 정원이었다. 마침 안 어울리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게 보였다.

기분도 안 좋던 차에 괜찮은 먹잇감을 발견한 테르세오는 모른 척 그들에게 다가갔다. 살갑지 않은 분위기로 산책하던 두 사람이 그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테르세오? 우리 막내가 아니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부드럽게 눈을 휘며 다가온 오르키우스가 손을 내저었다.

“뭐 그리 격식을 차리느냐. 그저 형님이라고 부르렴. 그래도 괜찮지요, 형님?”

“마음대로 해라.”

더는 테르세오를 무시하거나 윽박지를 수 없는 아리테우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혼자 있다면 모를까 능구렁이 같은 2황자가 있는데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테르세오가 2황자 측에 붙으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테르세오는 필요도 없는 고민을 하는 척하다가 싱긋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좋구나.”

피차 불편한 사이에 뭐가 그리 좋은지 오르키우스가 실실 웃었다. 그는 테르세오에게 진득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나와 형님은 간단히 산책 중이었단다. 바쁘지 않다면 적당히 어울려 주지 않겠느냐?”

“그러지요.”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접근했기에 테르세오는 순순히 동행했다.

시종들은 황족의 산책을 방해하지 않고자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붙었다.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빈말로도 사이좋다고 할 수 없는 세 사람인지라 부디 이 중요한 시기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만을 바랐다.

겨울의 정원은 그다지 볼거리도 없고 춥기만 했다. 다 시든 꽃 대신 곳곳에 놓인 얼음 조각들만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얼음 조각 덕분에 풍경은 괜찮았으나 대신 더 추운 느낌이었다.

물론 보온 아티팩트를 가진 황족들이 추위에 떠는 일은 없었다. 약간 어색하고 지루한 정적을 깨듯 오르키우스가 테르세오에게 말을 붙였다.

“너는 자라날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구나. 저명한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는 얼음 조각상도 네게 견줄 수 없겠어. 성년이 되기도 전에 온갖 가문의 영애들이 몰려들게야.”

“아직 먼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직 열세 살인걸요.”

“다음 주면 열네 살이고, 금방 성인이 되겠지. 시간의 흐름이 참 빠르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뭐, 그렇군.”

“보렴, 막내야. 형님께서도 네 미모를 인정하시잖니.”

“이놈이 진짜.”

교묘하게 아리테우스를 대화에 끌어들이려는 오르키우스의 수작이 잘 먹혀들었다. 유독 테르세오를 적대하는 성질을 잘 긁어댄 것이다. 알맞게 열받은 아리테우스는 오르키우스를 노려보다가 테르세오를 홱 돌아보았다.

“클라브 왕국의 사절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예, 큰 형님.”

“공무 얘기 중이니 예를 갖춰라. 클라브 왕국의 준마는 제국군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공물로 바치게 하든 정식으로 수입하든 어떻게든 해야 할 것이야. 황제 폐하께서 네 수완을 꽤 높이 평가하신 모양이지만…….”

20살, 성년의 나이로 완연한 성인인 아리테우스가 매섭게 테르세오를 내려다보았다.

“반반한 얼굴만 믿고 설치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얼굴이든 뭐든 네가 쓸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사용해라. 네 가치가 얼굴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황태자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에는 옅은 살기마저 배어 있었다. 2황자 측에 붙을까 염려해 조심하던 태도는 금세 없어지고, 어린 동생을 망설임 없이 위협했다.

그러나 테르세오는 오히려 웃음을 머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입매는 날카롭게 휘어졌다.

“큰 형님께서는 여전히 피아식별을 못 하시는군요.”

“뭐야?”

“무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잘 부탁하지는 못할망정 위협한다니요. 이래서야 일할 맛이 나겠습니까?”

아리테우스가 테르세오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오르키우스는 어이쿠 추임새를 넣으며 발만 구를 뿐, 도우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도리어 멀리서 다가오려는 시종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네놈이 감히 날 협박해?”

“이것 봐. 아직도 내가 도움이 될지 아닐지조차 구분하지 못하잖아.”

테르세오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만 들리도록 비아냥거렸다.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를 분이 개인감정에 휘둘려 이익을 놓쳐서야 쓰겠습니까?”

“이 자식!”

“눈치 하고는. 아직도 모르겠어? 난 황제가 누가 되든 관심 없어. 날 자유롭게 내버려만 둔다면.”

“……뭐?”

“그러니까 관심 꺼줄 때 알아서 잘 좀 해봐. 기껏 얌전히 있어주는데 멍청하게 헛발질하지 말고.”

일순 말문이 막힌 아리테우스가 멈칫거리는 사이, 테르세오는 그의 손을 쳐냈다. 그러곤 주름진 옷을 탁탁 털며 보란 듯이 웃었다. 여전히 울보 황자를 기억하는 궁인들이 헉 소리를 낼 법한 뜻밖의 화려한 미소였다.

“좀 더 격식 있는 차림새로 사절단을 방문하라는 황태자 전하의 넓은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누가 들어도 테르세오가 아량을 베푸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아리테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권력 다툼에서 발을 빼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시를 세우면, 애초에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중립파의 구심이 되는 테르세오가 이대로 아무도 지지하지 않고 세력이 유지된다면 이득을 보는 건 황태자인 아리테우스다. 오르키우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저는 환복하러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테르세오는 아리테우스와 오르키우스의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 뛰거나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걸음이었다. 테르세오의 시종들이 황급히 뒤따라갔으나 신경질적인 손짓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3황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오르키우스가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하하!”

“왜 웃느냐?”

“막내가 참 귀엽지 않습니까? 형님께 아양 부리는 것도 아니고 있는 대로 들이받으면서 살겠다고 하다니. 하하하!”

“그만 처웃어라!”

아리테우스가 벌컥 짜증을 냈다. 오르키우스는 테르세오를 비웃는 척하면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어린 동생에게 휘둘릴 대로 휘둘리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그러나 그런 오르키우스의 속도 썩 좋지는 않았다.

“너야말로 테르세오 녀석에게 막내야, 막내야 하면서 더 아양 떨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봐도 널 지지할 것 같지는 않던데.”

“하핫.”

오르키우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더 활짝 웃었다. 편한 산책을 위해 멀찍이 떨어졌던 시종들과 달리 가까이 있던 오르키우스는 테르세오가 아리테우스에게 한 말을 모두 들었다.

아리테우스와 테르세오를 이간질하기 위해 말을 붙인 건데 역효과만 났다. 테르세오가 아리테우스를 그런 식으로 회유할 줄은 그도 짐작하지 못했기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

“확실한 게 없기는. 아직도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느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폐하께서 추룡제의 대미를 나에게 맡기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구나. 애처로운 녀석, 그 욕심이 네게 독이 될 것이다.”

생글거리는 오르키우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리자 아리테우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오르키우스를 두고 성큼성큼 정원에서 빠져나갔다. 추룡제를 대비해 연습할 것이 많았다.

오르키우스는 아리테우스가 사라지자마자 표정이 싹 달라졌다. 항상 미소를 달고 있던 탓에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으나 눈매는 차갑게 굳었다.

‘너야말로 그 안일함에 죽을 것이다, 아리테우스. 날 간과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게 해주지.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자조하며 죽어라.’

일평생 뛰어넘지 못한 동갑내기 형을 향한 열등감이 오르키우스의 속에서 끓다 못해 졸아들었다. 시커멓고 끈적끈적해진 그 감정은 황위를 빼앗으라고 그를 계속 부추겼다.

저 오만 방자한 아리테우스를 무릎 꿇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르키우스는 방법은 아직 모를지언정 방향은 정확히 알았다.

‘테르세오를 손에 넣을 방법이 필요해. 모두의 예상을 깨고 황태자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도록.’

그의 두 눈이 번들거리는 욕망으로 음험하게 빛났다.

* * *

환복하기 위해 황자궁으로 복귀한 테르세오가 자기 방이 아닌 빈방으로 쑥 들어가자 세르티아나는 깨달았다.

‘내가 따라붙은 걸 알고 있었군.’

그녀가 은신술이나 추적술을 배운 것도 아니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접촉을 시도할 줄은 몰랐지만.

세르티아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따라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손님용 방.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소파 중 하나에 테르세오가 기대앉아 있었다. 세르티아나는 문을 잠근 뒤 테르세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서로 탐색하는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다 서로의 존재만 알 뿐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누님.”

누님이라는 단어에서 세르티아나를 황족으로 대하겠다는 함의가 느껴졌다. 상대가 꼴도 보기 싫은 오르키우스였다면 구역질이 나왔겠지만, 테르세오와는 적당히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세르티아나는 호칭을 정정하는 대신 솔직히 말했다.

“내가 오늘 점을 쳤는데 네게 어떤 사고가 일어날 것 같더구나. 혹시 추룡제에 참석하니?”

“아니요. 안 그래도 폐하께서 추룡제 참석을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누님의 점 때문일까요?”

“아니. 내 점은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폐하께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

상황이 절묘했다. 별의 카드를 해석한 대로라면 세르티아나는 테르세오가 추룡제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했다. 그러면 추룡제에서 어떤 사건을 겪은 테르세오가 세계를 뒤엎거나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된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폐하의 명을 어기고 추룡제에 참석할 생각이었니?”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요즘 클라브 왕국 사절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제국의 가장 큰 행사인 추룡제를 기대하고 있죠.”

“그래서 안내역으로 어떻게든 참가할 생각이었다? 어째서?”

테르세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7년을 더 기다릴 필요 있나 싶어서요.”

황명을 어기려는 이유로는 너무 사소했으나 세르티아나는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테르세오는 세르티아나가 인도하지 않더라도 추룡제에 참석할 작정이었다.

‘추룡제에서 죽음과 가장 연관 깊은 건 마지막 의식이야. 나는 이 녀석을 어디까지 이끌어야 하지? 얼마나 관여해야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까?’

테르세오는 세르티아나가 무얼 고민하는지 눈치챈 듯 씨익 웃었다.

“왜요. 도와주시렵니까?”

세르티아나는 결단을 내렸다.

“약속 하나만 해준다면.”

* * *

구세력 0년 0월 0일. 제국의 초대 황제 루키오 아일리우 파네트가 악룡을 죽이고 세계를 구원한 날. 초대 황제의 여정이 7년 만에 끝났다 하여 7년 주기로 열리는 추룡제는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가 즐기는 제사이자 축제였다.

본 행사가 열리기 3일 전부터 길거리마다 초대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와 국가를 떼 지어 부르고, 각자 직접 만든 요리를 마음껏 나누어 먹었다. 아이들은 나무칼을 휘두르며 악룡을 무찌르는 놀이를 했고, 광장에서는 마지막 날 다 함께 불태울 거대한 악룡 모형이 나무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본고장의 축제는 확실히 다르군요! 모든 백성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이 작은 악룡 폭죽을 보셨습니까? 너무 귀여워서 터뜨리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이 꼬치 요리의 이름은 정말 익살맞군요. 악룡 꼬리 구이라니! ……설마 악룡이라서 도마뱀 고기를 구운 건 아니겠지요?”

황궁에서 나와 평민들의 축제를 경험한 사절단도 아주 신이 났다. 그들은 실컷 놀고 돌아온 뒤 테르세오에게 온갖 감상을 늘어놓았다. 처음으로 추룡제를 경험 중인 테르세오는 웃으며 적당히 맞장구쳤다.

‘제사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축제는 나가도 상관하지 않는다니. 정말로 내가 어리기 때문일까?’

세르티아나는 추룡제의 마지막 의식 때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마치 짜고 친 것처럼 황제도 황궁 행사가 아닌 외부 축제에 참여하는 건 허가했다. 추룡제의 마지막 의식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었다.

어쨌든 황제가 허락한 덕에 사절단은 몹시 좋아하며 제국의 축제 문화에 흠뻑 빠졌다. 공들여 심은 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에 쐐기를 박았으니 추룡제로 얻을 이득은 충분히 얻은 셈이다. 이 환상을 토대로 앞으로의 무역 협상을 수월하게 이끌어 나가면 테르세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만 세르티아나가 예언한 그 사건이 뭔지 궁금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이가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그 여파가 상당할 터였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말했는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누님도 마지막 의식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말리지는 않겠다고 했지. 자기 예언이 실현될 거라 굳게 믿는 걸 보면 실력 있는 예언자 같았어.’

세르티아나는 카드를 이용해 테르세오의 계획 일부를 맞히고 조언까지 주었다. 덕분에 여러 계획 중 하나를 선택해 수립하기 용이했다.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아도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제사 또한 정말로 기대됩니다. 3황자 전하께서 참석하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쉽군요.”

사절단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테르세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계획을 이행할 때였다.

“저도 무척 아쉽습니다. 올해를 놓치면 7년 뒤에나 참석할 수 있는데 고작 나이가 부족해 못 본다니요.”

“나이가 어려요? 아!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는…….”

사절단은 이 아름답고 유쾌한 소년을 평범한 10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사로잡는 언변과 적절한 화제 선정 능력, 클라브 왕국을 자세히 알아본 정보력까지. 여러모로 또래 소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테르세오가 13세라는 걸 새삼스레 인지했음에도 나이가 어려 추룡제의 마지막 의식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무릇 나이란 성숙의 일반적인 지표이긴 하지만, 사실 모든 이가 똑같은 속도로 성장하지는 않지요.”

“맞습니다. 분명히 개인차가 있어요.”

“평균적으로 14세에서 15세부터 참석하는데, 제 또래 중 명석한 아이도 가끔 참석한다더군요. 저는 그러지 못했으니 수양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조금 더 노력했으면 여러분을 편하게 안내했을 텐데요.”

미안하다는 어조를 가득 담아 시무룩하게 말하자 사절단이 일제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매우 훌륭하셨습니다.”

“아무도 전하의 노고를 폄훼하지 못할 것입니다!”

“추룡제에 참석하지 못해 가장 아쉬운 건 전하 아니십니까. 저희는 염려치 마시지요.”

“으음. 확실히 기대가 많았는데 못 가서 아쉽습니다.”

테르세오가 좀처럼 아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자 사절단도 안달복달했다. 테르세오는 참 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은근하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을 살짝 반짝였다.

“어떤 아이들은 믿을 만한 어른들과 동행하기도 한다는데…….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줄 어른이 별로 없지 뭡니까. 다들 바쁘셔서요.”

있다 해도 황제 폐하의 명을 사사로이 어길 제국민은 없었다. 면책권을 가진 외국인이라면 또 모를까.

“험험.”

“으흐흠.”

테르세오가 무엇을 바라는지 눈치챈 사절단 일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했다. 면책권이 있어도 사절단 입장에서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잘못 걸렸다가는 클라브 왕국이 파네트 제국을 무시한 행동으로 비칠 수 있었다.

‘자, 모든 건 여기서 결정된다.’

테르세오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을 하며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대부분의 예언은 간절히 염원해야 이루어지지만, 어떤 것은 마치 운명처럼 반드시 실현된다. 후자의 경우 마땅한 인과가 예언을 이루기 위해 비틀리기도 한다.

이 계획이 통하지 않으면 세르티아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의식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한들 테르세오가 자리에 없다면 이미 예언은 빗나간 것이므로.

예언이 맞지 않는 경우야 종종 있는 일이니 그저 넘어가면 된다. 반면에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사절단이 이렇게 곤란한 부탁을 들어준다면-

“에이, 그럽시다! 황자 전하께서 그렇게 원하시는데.”

“맞습니다. 우리 사절단을 열심히 도와주신 분인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함께 마지막 의식을 보러 갑시다, 전하!”

추룡제에서 반드시 사건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마치 운명처럼.

사절단은 자신들의 비상식적인 결단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일말의 상의도 없이 모든 이가 동시에 예언을 이루는 선택을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테르세오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심장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사절단을 사로잡아 놓았어도 이리 간단하게 황제의 명을 어기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내가 추룡제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운명에 따른 것인가. 과연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세르티아나가 예언한 운명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테르세오는 궁금해졌다.

* * *

추룡제 참석이 확정되자마자 테르세오는 잠시 자신의 방에 들렀다. 그곳에는 같이 논다는 핑계로 와서 열심히 아티팩트를 제작 중인 클로이가 있었다. 그녀는 고상한 어조로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우왓! 미친.”

파아앗!

클로이의 두 손이 온갖 빛깔로 번쩍거렸다. 테르세오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닫혀 있는 커튼도 다시 확인했다. 클로이 옆에는 방음 아티팩트인 오르골이 돌아가고 있었다.

“옷 갈아입고 온다고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완성해 봐.”

“에이씨! 천천히 갈아입어!”

테르세오가 가림막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클로이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일주일 안에, 그것도 궁에서 보내는 한정된 시간 동안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년간 남몰래 아티팩트를 제작하여 이 분야에서만큼은 어지간한 황실 마법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된 어린 천재 클로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테르세오는 조금 전 사절단을 설득했을 때처럼 반쯤 운명에 맡겼다.

“다 됐다!”

테르세오가 가림막에서 나오자마자 클로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간에 딱 맞았지만 테르세오는 도리어 찝찝해졌다. 얼마나 대단한 예언이 이루어지려고 모든 게 착착 들어맞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시키는 대로 다했는데 표정이 왜 그러시는지?”

“음, 아무것도 아니다. 너도 추룡제에 참석하나?”

“아니. 아버지가 추룡제 별로 안 좋아하셔서. 들어보니 나도 별로라 아버지랑 별장에나 가기로 했어.”

“그래?”

클로이가 끙끙거리며 일어나 오르골을 챙겼다. 그녀는 테르세오가 입은 옷을 보고 혀를 찼다.

“시종복까지 몰래 구해다가 참석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행사는 아닌 것 같던데. 공개 처형한다는 얘기 못 들었어?”

“들었지만 상관없다. 사형수 하나 죽는 게 뭔 대수라고.”

심드렁히 대꾸한 테르세오는 클로이가 만든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책이 쌓인 책상 위에 테르세오를 닮은 인영이 생기더니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인기척마저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몇 시간 정도 속일 수 있겠군. 어차피 내 방으로 오는 이도 없겠지만.”

“그런데도 나를 악독하게 쥐어짰단 말이지…….”

“준비는 언제나 완벽하게 해야 하는 법이니까. 네 아티팩트는 한 번도 내 기준에 못 미친 적 없었고.”

“젠장. 너무 잘나도 문제야. 가끔은 실수나 실패도 해야 편하게 살 텐데.”

“너 같은 천재가 그럴 리 없지.”

사실 클로이의 실력은 황실 마법사의 보안 마법에 들키지 않고 궁에 반입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그 자체가 반역에 준하는 행위이기에 하지 않을 뿐이었다.

테르세오의 말에 클로이가 얼떨떨해했다.

“뭔 바람이 불어서 칭찬을 다하십니까? 놀라서 존대가 다 튀어나오네.”

“이제 가자. 남작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래애. 너도 들키지 마, 테오.”

테르세오는 기척을 지워주는 아티팩트의 은신 기능을 최대 출력으로 키우고 사절단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테르세오가 틈 사이로 끼어들 때까지 모르다가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고 나서야 알았다.

다 큰 어른들이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그를 둘러쌌다. 이상할 정도로 태평한 모습에 테르세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혹시 몰라서 적당한 모자로 머리카락을 감추긴 했지만, 은신 기능이 있으니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고서야 존재 자체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혹시 눈치채더라도 사절단에 붙은 어린 시종 정도로 생각하겠지. 정말로 운명이 이루어지려는 거라면.’

앞선 두 번의 경험을 겪은 터라 테르세오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운명에 휘둘리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는 자꾸만 풀어지는 마음을 경계하며 사절단과 함께 이동했다.

추룡제의 본 행사는 황제궁의 외원에서 이루어졌다. 궁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놓인 단상 위에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앉아 있었다. 테르세오를 제외하고 세르티아나까지 직계 혈족이 모두 모였다.

단상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로는 귀족들과 귀빈, 각국 사절단의 좌석이 늘어섰다. 클라브 왕국 사절단은 상당히 중요한 손님이었기에 단상과 가까운 거리였다.

테르세오는 평범한 시종처럼 사절단 좌석 뒤에 섰다. 좌석 사이사이 놓인 꽃 장식에 절묘하게 가려져서 단상에서는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단상 아래로는 넓은 무대가 있었고, 그 위에 커다란 제사상이 차려져 있어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평소 일이 없는 마법사들이 모처럼 힘을 써서 제사가 다 끝날 때까지 음식이 식지 않을 터였다.

여기까지는 테르세오도 대충 아는 사실이었는데 제사상 앞에 놓인 커다란 대접은 무슨 용도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제사 진행 중에 필요할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황제가 단상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추룡제를 시작하겠다!”

우렁우렁한 외침과 함께 악단이 웅장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 *

테르세오는 추룡제 내내 긴장한 채로 외원 전체를 살폈다. 언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무희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공연과 초대 황제의 일대기를 그린 극은 무척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이제 우리는 악룡을 무찌른다!”

초대 황제 역을 아리테우스가 맡지만 않았어도 훨씬 볼만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서인 연극마저 끝나가자 살짝 허무해질 지경이었다. 테르세오는 차라리 극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는 게 나을지 고민했다.

“……가 온다!”

“……룡이다! 저 망할……!”

그때, 멀리서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궁궐로 들어오는 정문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궐문에서부터 외원 중앙까지 이어진 길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검은 비단으로 지어진 파네트 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그의 양팔은 뒤로 꺾여 묶여 있었다.

길의 양옆으로 꽉꽉 들어찬 관객들이 그를 향해 야유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테르세오는 어쩐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가 길을 반쯤 걸어오자 아리테우스가 천사로 분장한 시종들이 가져온 검을 들었다. 황가의 보물로 내려오는, 실제로 악룡을 죽일 때 사용된 용살검이었다.

“오라, 악룡이여! 하늘이 내려준 이 검으로 너를 베겠노라!”

악단의 음악이 점점 고조됐다. 테르세오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끼며 악룡 역의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가 비틀거릴 때마다 베일이 벗겨질 것처럼 하늘거렸다.

“죽어라!”

아리테우스가 용살검을 치켜들고 남자에게 달려들었을 때, 비틀거리던 남자가 바닥을 강하게 박차더니 어깨로 아리테우스를 들이받았다.

“큭!”

아리테우스가 용살검을 떨어뜨리고, 남자의 베일이 벗겨졌다. 검은 베일 아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테르세오는 상황을 잊고 무대로 뛰쳐나갔다.

“이안!”

쓰러진 이안이 원독에 찬 눈으로 용살검을 노려보았다. 입은 천으로 묶여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으나 눈물에 젖은 얼굴과 표정이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테르세오는 이안을 붙잡으려고 하는 병사들을 밀치고 달려갔다. 모자가 벗겨지며 긴 금발과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아티팩트를 해제하고 황제를 향해 외쳤다.

“황제 폐하, 이자는 사형수가 아니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3황자!”

당황한 황비가 황제 대신 꾸짖었다.

“그대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았으니 참석하지 말라고 폐하께서 이르셨거늘! 어찌 황명을 어기고 이런 난장을 친단 말인가?”

“7년에 한 번 있는 뜻깊은 추룡제에서 억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굽어살피시옵소서, 폐하!”

“저, 저런!”

황비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황제만을 응시하는 작태에 황비 측 인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르키우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이안과 테르세오를 번갈아 보았고, 세르티아나는 창백하게 질려 자신의 팔을 움켜잡았다.

황제 또한 일그러진 얼굴로 테르세오를 노려보았다. 그의 곁으로 다가간 에스겔라가 무언가 속삭였다. 그사이 몸을 추스른 아리테우스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3황자를 끌어내고 저자를 붙잡아라!”

“손대지 마라! 가만두지 않겠다!”

병사들은 아리테우스의 명령을 바로 이행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황족의 몸에 손을 대 상하게 하는 건 즉각 처분감이었다. 테르세오가 저항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게다가 이안 앞을 지키듯 선 테르세오는 그들을 노려보며 매서운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것이라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살벌함에 짓눌릴 것 같았다.

“이익, 한심한 것들! 비켜라!”

보다 못한 아리테우스가 용살검을 들고 병사들을 밀치며 다가왔다. 테르세오는 이안을 도망가게 하고 싶었지만,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이 막혀 말도 못 하고 흐느끼며 용살검만 응시했다.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 테르세오!”

“안 됩니다, 형님. 이안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이자는 제 치, 친구입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너를 베어버릴 수도 있다!”

아리테우스는 테르세오를 밀쳐 버리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용살검을 들이대도 소용없었다. 날카로운 검끝이 코앞에 있어도 그의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설마 그 예언이?’

테르세오의 태생 예언을 아는 아리테우스는 가슴이 선득해졌다. 하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핏줄을 해할 수는 없었다.

망설이던 그가 이를 악물고 단상 위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시간이 없다. 당장 3황자를 끌어내고, 마지막 의식을 거행하라.”

“폐하!”

황제의 명까지 떨어지자 비로소 병사들이 테르세오를 붙잡았다. 어찌나 저항이 거셌는지, 장정 다섯이 붙어도 버거울 정도였다. 테르세오가 붙잡히자 이안도 덩달아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머지 병사들은 그를 붙잡아야 했다.

“마, 막아라! 전하께 다가가지 못하게 해!”

“전부 달려들어! 목만 빼고 눌러 버려!”

무대 위는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리테우스는 초조하게 하늘을 살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의식을 끝내야 하거늘.’

추룡제의 마지막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었다. 옛 기록에는 해가 지기 전에 의식을 마무리하지 못할 시 굉장히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고 적혀 있었다. 중요한 추룡제가 엉망이 되었는데, 그 불길한 일마저 벌어져 자신에게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갈까 봐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울 해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상황은 정리될 기미가 없었으며, 그동안 점차 노을이 가시고 어둠이 깔리며 밤이 다가왔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초조하게 가늠하던 아리테우스는 결국 성급히 움직였다.

“죽어라!”

눈먼 검에 베일까 병사 몇 명이 황급히 피했다. 병사들이 이안의 힘을 충분히 빼놓지 못한 덕에 반쯤 눕혀 있던 그는 살짝 몸을 틀 수 있었다. 그러나 미처 다 피하진 못해 어깨가 깊게 베였다. 새빨간 선혈이 무대 위에 뿌려졌다.

“안 돼!”

이안의 피에 눈이 뒤집힌 테르세오가 순식간에 자신을 붙잡은 병사들을 뿌리쳤다. 그러곤 병사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빼앗아 들고 아리테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다친 어깨를 붙잡고 웅크린 이안의 목을 베기 위해 아리테우스가 용살검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테르세오가 아리테우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아아아악!!”

툭-

용살검을 쥔 아리테우스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 어떤 생채기도 허락되지 않는 자리에 올라야 할 신체가 훼손된 것이다.

모든 이가 경악하여 무대 위를 바라보는 가운데, 오직 테르세오만이 이안을 살피고 부축했다.

“일어나, 이안. 도망가야 해!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는 이안의 재갈을 풀고 포박을 끊어내며 탈출로를 찾았다. 아리테우스의 부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노려 서둘러 도망가야 했다.

‘여차하면 내가 미끼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안을 구할 거야.’

그런데 이안의 몸이 심상치 않게 떨렸다.

“으, 아, 아윽…….”

“이안?”

“아악! 크흑, 악! 아아아!”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져 어두컴컴해진 무대 위로 이안의 비명이 흘렀다. 그는 온몸을 경련하며 쓰러졌다. 팔다리를 바들바들 떨다가 축 늘어뜨리고, 다시 허우적대며 손으로 자기 몸을 쥐어뜯었다. 몸을 웅크려 말다가도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당황해 굳었던 테오가 그를 뜯어말렸다.

“왜, 왜 그래! 이러지 마, 이안. 다치잖아!”

“아, 아파. 끄윽. 너, 너, 너무…… 아아악!”

이안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테르세오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데 저 상태로는 불가능했고, 무엇보다 그를 도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극에 달했다. 이대로 이안을 잃을 것만 같은 무력감에 테르세오의 손이 벌벌 떨렸다.

“이안-”

“3황자를 붙잡아라!”

팔이 잘린 아리테우스를 수습한 황제가 외쳤다. 테르세오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통제하지 못한 공포에 압도된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병사들이 내지른 창에 검이 날아가고, 테르세오는 포승줄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거 놔라! 이안, 도망가!”

테오의 절박한 외침에 이안이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겨우 주저앉아 있는 그의 앞에 황제가 섰다. 황제의 손에는 용살검이 들려 있었다.

“마지막 의식을 거행하겠다.”

“이안!!”

황제가 용살검을 휘두르는 순간, 보다 못한 병사 하나가 테르세오의 눈을 가려주었다.

투욱, 털썩.

그러나 분리된 신체가 각각 떨어지는 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테르세오는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숨이 막히고 귀가 먹먹해지는 와중에 무언가를 주워 걸어가는 황제의 발소리와 질척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달칵.

황제가 대접에 들고 온 것을 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테르세오는 고개를 틀어 병사의 손에서 벗어났다.

피에 젖은 이안의 머리가 대접에 담겨 있었다. 마지막까지 감지 못한 눈이 테르세오를 향하는 듯했다.

“이것으로 추룡제를 끝마친다.”

그 텅 빈 시선이 테르세오 안의 무언가를 터뜨렸다. 처음에는 꽃향기를 흘렸을 그것은 제때 피지 못한 탓에 썩어 문드러졌다. 썩은 사체에서 태어난 벌레가 배 속에서 우글거리는 것 같았다.

“3황자를 지하 감옥에 투옥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테르세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성대하게 끝났어야 할 추룡제가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됐다. 마지막 의식에 난입한 3황자가 황태자의 팔을 자르고 감옥에 투옥됐다는 사실이 수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황실에서 입막음을 시도했으나 워낙 목격자가 많아 전부 막을 수 없었다.

현장에서 3황자의 발언을 들은 사람들로 인해 3황자와 사형수가 절친한 친구 관계였으며, 어쩌면 사형수가 무고한 백성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몇 년간 어린아이답지 않은 행보를 보여온 3황자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버리고 죽어 마땅한 사형수를 변호할 리 없다는 말이었다.

반면 똑같은 논리로 사형수가 죽어 마땅하다는 반박도 있었다. 똑똑하지만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3황자를 사형수가 세뇌했을 거라는 주장은 꽤 많은 지지를 받았다.

추룡제 마지막 날 벌어진 이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멀리까지 퍼졌다. 대부분 3황자와 사형수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일부는 황태자를 베어버린 3황자를 무도하다 욕하기도 했다. 다만 입방아 찧는 이 모두 그다음 단계로 화제를 옮기지는 않았다.

‘이 일로 3황자는 어떤 벌을 받게 될까?’

‘현 황태자가 불구가 되었으니 폐위되는가? 그럼 2황자가 태자 자리에 오를 것인가?’

일개 평민들이 왈가왈부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주제였다. 따라서 주로 3황자에 대한 소문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소란의 주요 인물은 지금, 지하 감옥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

짜아악! 짜악!

채찍이 살갗을 터뜨리는 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벽에 달린 쇠사슬에 양팔이 묶인 채 형벌 집행인을 향해 맨 등을 내보인 육신은 매서운 벌을 꿋꿋이 받아냈다. 조금이라도 몸을 비틀어 피할 법도 하건만 난생처음 꿇었을 무릎은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짜아악!

작은 등에 겹치고 겹쳐 피를 터뜨리는 상처만이 벌의 강도를 보여줄 뿐이었다.

“많이 반성했니, 막내야?”

황족에 대한 처벌을 감히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어 집행인으로 나서게 된 오르키우스가 땀을 닦았다. 채찍을 100번 내려치는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기에 숨이 매우 거칠었다.

테르세오가 우는 소리라도 냈으면 쉬엄쉬엄했을 텐데 꿈쩍도 하지 않아 그도 오기가 생겼다. 그렇다고 벌이 끝났는데 더 때릴 수도 없어서 그는 일부러 말을 걸었다. 황족의 체벌을 함부로 보일 수 없다는 이유로 감옥에는 둘뿐이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네게는 참 고마워.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다니. 네 덕에 계승 순위가 바뀌었단다. 아무리 폐하께서 직접 선택하셨더라도 불구자를 황위에 앉힐 수는 없지 않겠니?”

오르키우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의 입매가 환희로 비틀렸다.

“그러니 이 내가! 차기 황제나 다름없다 이 말씀이야! 아무리 황후 폐하의 소생이라 해도 떨어진 팔을 붙일 수는 없으니 말이야. 네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테르세오는 오르키우스가 뭐라고 말하든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벽을 향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오르키우스가 그런 테르세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렇게 고마운 선물을 주었는데 나도 뭐라도 줘야겠지? 너는 이제 멀고 먼 변경으로 유배 보내질 거란다. 거기서 몇 년간 자숙하고 있으려무나. 내가 황제가 되면 다시 불러주마.”

“…….”

“명심해라. 거기 가서도 몸조심해야 해. 이제 네게 남은 건 예쁜 얼굴과 몸뿐이니 돌아와서 나에게 귀염받으려면 잘 관리해야지.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잘 보이면 멀리서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고 말이야.”

테르세오가 계속 아무 말도 없자 오르키우스는 기분이 나빠졌다. 고작 사형수 하나 가지고 펄펄 날뛰었던 모습과 비교됐다. 그는 테르세오가 자신의 처지에 조금 더 절망하기를 바랐다.

“듣고 있니? 기절한 건 아니겠지?”

오르키우스는 테르세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어둑한 그림자에 감춰져 있던 표정이 횃불 아래 드러났다.

자신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와 마주한 오르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선 원통해하며 눈물 흘리는 게 당연한 반응이지 않은가. 두려워서 벌벌 떠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테르세오는 지독히도 무감한 얼굴이었다. 건조한 얼굴에서 오직 눈빛만이 상대를 찢어버릴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 압도하는 듯했다.

오르키우스는 자신이 물러났다는 데서 모멸감을 느끼고는 일부러 더욱 다가가 테르세오의 턱을 틀어잡았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느냐? 눈빛이 아주 건방지구나.”

“사태?”

“그래. 머지않아 황제가 될 나에게 잘 보여야-”

타앙!

“으, 으앗!”

오르키우스가 뒤로 나자빠졌다. 한쪽 쇠사슬을 힘으로 끊어버린 테르세오가 팔을 휘두른 탓이다.

테르세오의 손목에 매달린 쇠사슬이 채찍처럼 움직여 오르키우스의 다리를 때렸다.

“아악!”

오르키우스는 바닥을 구르며 테르세오에게서 멀어졌다. 서둘러 다리를 확인해 보니 쇠사슬 모양대로 붉어졌을 뿐 다행히도 생채기는 나지 않았다. 그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욱신거리는 다리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네 이놈!”

촤르르르륵-

“허억!”

사납게 일갈하려는 찰나, 뱀처럼 휘둘리는 쇠사슬을 보고 오르키우스는 숨을 죽였다. 사정 범위에서 충분히 벗어났지만 언제든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맨손으로 쇠사슬을 끊었다는 건 남은 한쪽도 끊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강철로 만든 쇠사슬을 어떻게 맨손으로…….’

그러나 오르키우스를 진정 두렵게 만든 건 그 비인간적인 근력이 아니었다.

“황제? 하고 싶으면 해.”

테르세오의 목소리가 지하 감옥에 스산하게 울렸다.

“네가 뭐가 되든 달라지는 건 없어. 이제 전부 소용없으니까.”

“무, 무슨 소리냐.”

“이안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하나도 돌려주지 못했어. 그 녀석의 고향을 찾아주지도,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도 못했다. 언젠가는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해줄 거라 믿었지만,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지.”

시선은 오르키우스를 향하지만 그를 넘어선 눈빛. 금방이라도 터져 나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 같은 분노와 원망, 증오 등의 감정. 그것을 꾹꾹 눌러 버리는 통제력.

언젠가 저 감정들이 잘 갈고 닦여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오르키우스는 처음으로 테르세오에게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테르세오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꼭 황제가 되도록 해. 내가 그 자리, 영원히 쓸모없어지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오르키우스는 비명을 참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도망치듯 감옥의 문을 열고 나갔다.

“형벌 집행은 모두 끝났다!”

그 외침을 듣고 대기하던 시녀들이 치료를 위해 들어왔다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 나갔다.

테르세오의 상처는 더 두꺼운 쇠사슬로 묶인 뒤에야 치료받을 수 있었다. 시녀들은 이 어리고 고운 몸에 영영 남을 흉터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치료 내내 미동도 없는 테르세오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존재는 배척되게 마련이다. 황실에서 테르세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따랐던 귀족들은 연을 끊기 급급했고, 체드로 백작과 엘바차 남작은 조사를 받느라 면회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테르세오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누님.”

문이 홀로 열렸다 닫혔다. 테르세오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작게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르티아나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클로이의 아티팩트가 들려 있었다.

“용케도 만났군요.”

“엘바차 남작가의 영애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네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더구나. 보안 마법에 걸리지 않는 아티팩트라니.”

“오늘이 며칠입니까?”

“1월 3일이다.”

테르세오는 클로이의 마법 실력보다 벌써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게 놀라웠다. 이안이 죽었는데 세상이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게 이상했다.

세르티아나는 훔친 감옥 문과 족쇄의 열쇠를 쥔 채 물었다.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누님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약속이요?”

어둠 속에서 테르세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님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었나 보구나.”

테르세오는 하마터면 코웃음 칠 뻔했다. 소중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이안은 이 세상 전부와도 견줄 수 없는 존재였다.

‘잃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더 일찍 자신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텐데. 이안을 위해서 정말 반란이라도 일으켰을 텐데.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안은 죽었고, 테오는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으며, 앞으로 행할 모든 일은 분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안이 없는 세계에서는 어떠한 것도 의미를 갖지 못하므로.

“절 풀어주고 은신 아티팩트로 숨어 계세요. 황제궁과 황자궁이 아닌 후원의 숲이 괜찮겠습니다. 무슨 소란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말고 피하세요.”

“무슨 일을 하려고?”

“의미 없는 것들을 모두 부술 겁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테르세오는 일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열심히 생각했다.

좀 더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한 자신을 비난했고, 이안이 냉궁에 갇힌 이유를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던 과거를 자책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이안을 7년이나 가두고 끔찍하게 희생시킨 황실을 증오했다.

이제 이안이 왜 갇혔어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테르세오는 이안을 직접 죽인 황제를 비롯해 냉궁과 관련 있는 이를 모두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이안을 구하지 못한 자기 자신 또한 죽여 버릴 것이다.

어린 동생이 내뿜는 살기에 세르티아나는 잘게 떨었다. 단신으로 황궁을 치겠다는 허황된 소리가 정말로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무서움에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테르세오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진짜 용건을 꺼냈다.

“나를 살려만 준다면 네 말대로 하마. 하나 그 전에 네가 가야 할 곳이 있다.”

이미 모든 것을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테르세오에게 잠시 시간을 내는 것쯤은 별것 아니었다. 그는 세르티아나를 따라 감옥에서 나왔다. 감옥 입구를 지키던 간수들은 세르티아나가 들어올 때 클로이의 아티팩트로 잠재운 상태였다.

‘황제가 죽으면 남작과 클로이가 좋아하겠군.’

실없는 생각을 한 테르세오는 간수가 가지고 있던 검과 단검을 챙겼다.

각자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은신 기능을 발동했기 때문에 서로를 인식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조심조심 목적지로 향했다. 궁성 중앙에 위치한 황제궁을 지나 후원을 건너며 테르세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세르티아나가 기어코 후원의 숲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걸음을 멈춰 섰다.

“무슨 속셈입니까?”

“진정하거라. 네가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누님도 냉궁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까?”

세르티아나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뿌리칠 것 같은 테르세오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큰 오라버니만큼은 아니지만, 직계 황족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직계가 모두?”

“내 전부 설명해 주마. 지금은 일단 나를 따라와다오.”

테르세오는 흐릿한 세르티아나의 형체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러나 결국 손을 뿌리치진 못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바르르 떨리는 손에서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이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 생각할 테니 함부로 거짓말하진 않겠지.’

세르티아나가 테르세오를 이끈 곳은 예상대로 이안이 갇혀 살던 냉궁이었다. 7년 전 이안과 함께 잠깐 왔을 때 보았던 외관과 변함이 없어서 테르세오는 숨이 막혔다. 그때와 달라진 점은 이안이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차게 식은 테르세오의 손을 끌고 냉궁으로 들어갔다. 이안에게 들었던 것과 달리 경비병도 시종도 없었다. 이제 쓰는 사람이 없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드문드문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저들은 뭡니까?”

“감옥으로 잠입하기 전에 여기서 아티팩트 사용법을 연습했었다.”

“그게 아니라 사람이 왜 있는…….”

“쉿.”

둘은 웬 창고 같은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영 감을 못 잡던 테르세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또 다른 사람을 감금해 둔 겁니까?”

“열어보면 알 거다.”

세르티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뒤로 물러났다. 테르세오의 시선을 외면하며 버릇처럼 카드를 꺼내 뒤섞는 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별수 없단 생각에 테르세오는 문을 열어젖혔다.

무척 비좁은 방은 아무것도 없이 바닥에 침구만 덜렁 깔려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회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추룡제 이후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테르세오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

다시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기적처럼 나타난 이안 앞에서 한낱 다짐은 의미 없이 무너져 내렸다. 테르세오는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이안! 살아 있었, 흣, 어, 어떻게 된, 일이야!”

터져 나오는 울음에 발음이 뭉개져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테오는 이안의 어깨와 목을 떨리는 손으로 살폈다. 분명 다치고 잘렸던 부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아니, 됐다. 살아 있으면 된 거야. 아프지는 않았느냐? 응? 널 영영 잃는 줄 알았다…….”

울다 웃기를 반복하는 테오를 이안은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처럼 달래주지도 않았다. 테오는 어리둥절해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안 너…….”

그의 얼굴이 7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비밀 수련장에서 함께 수련했던 흔적이 몸에 남아 있지 않았다. 테오는 불가사의한 위화감에 눈을 치떴다.

“저기, 정말로 미안한데……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닐까?”

이안이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며 테르세오를 슬쩍 떼어냈다.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내 이름은 이안이 아니고……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걸.”

테르세오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멍해졌다. 사고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뜨거운 피 대신 얼음처럼 찬물이 혈관을 내달리는 것 같았다. 그는 비척비척 물러났다가, 무고한 얼굴을 샅샅이 살피다가, 결국 무너지듯 이안에게 매달렸다.

“으아아아아아!!”

이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테르세오는 생애 첫 울음을 토해냈다. 속을 박박 긁어내어 피와 내장과 살점을 모두 토할 것처럼 울부짖었다. 자신이 아는 이안이 죽었음에 절망하고, 그래도 이안이 살아 있음에 조금이나마 기뻐하며.

“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애를 쓰는 이안의 손길을 느끼면서 그 한결같음에 쉬지 않고 울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세르티아나는 전신을 덮치는 한기에 바들바들 떨었다. 처절하게 무너지는 테르세오를 보며 그녀는 안타까움보다도 어찌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마치 태풍과도 같은 자연재해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탁, 촤라락-

식은땀이 난 손에서 카드 뭉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수십 장의 카드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중 단 한 장의 카드만이 앞면을 내보였다.

‘세계의 카드, 역방향.’

세르티아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닥에 엎드린 채 카드를 끌어모으며 태풍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울음을 그친 테르세오는 제법 침착해 보였다. 그렇게 울고도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세르티아나가 테르세오보다 더 나쁜 안색으로 자신이 아는 사실을 설명했다.

“추룡제가 7년마다 열리는 이유는, 초대 황제 폐하께서 7년 만에 악룡을 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악룡?”

이안이 세르티아나의 말에 반응했다.

“초대 황제가 악룡을 잡았다고?”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는 무척 해괴한 말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테르세오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전혀 아니었지만 테르세오는 굳이 묻지 않았다. 지금의 이안은 테르세오를 신뢰하기 어려울 테니 무언가 숨기는 건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세르티아나가 조급한 표정으로 설명을 재개했다.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이분은 사망 시 이 모습으로 살아나신다. 추룡제의 마지막 의식은 해가 지기 전에 이분의 목을 베는 것이었지.”

“뭐라고?”

“그럼 추룡제마다 이안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다시 살아나면 염원초를 먹여 7년간 가두고요?”

“뭐어?!”

이안은 도저히 대화 내용을 따라잡지 못하고 경악했다. 떡 벌어진 입이 그가 받은 충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테르세오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약조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으, 응. 고마워……?”

자기보다 훨씬 작은 테르세오의 손을 보며 이안이 떨떠름해했다. 묘한 경계가 서려 있는 그의 목소리가 테르세오의 속을 헤집어놨다.

테르세오는 쓰린 속을 추스르며 벽 너머 황제궁이 있을 곳을 노려보았다.

“황제라면 이안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알겠지요. 바로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진정해라. 지금 상황에서 두 사람이나 지키며 황궁을 치는 건 불가능하다.”

세르티아나가 자신도 보호 대상임을 강조하며 테르세오를 설득했다. 테르세오도 동의하긴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이안에게 데려다주었으니 그녀와의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안을 지켜야 하는 이상 몸 사리지 않고 죽겠다는 각오로 싸울 수는 없었다.

“이대로 수도를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거다. 다만…….”

“…….”

테르세오는 우울한 낯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너를 데려갈 수는 없겠구나.”

“날 데려가? 아니, 데려갈 생각이었어?”

여전히 자신에게 붙은 이안이라는 이름을 어색해하는 이 잿빛 청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겨우 열몇 살은 된 듯한 아이가 섬뜩한 살기를 흘리는 것이나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구는 것을 그는 영 거북해했다.

테르세오는 차근차근 이안에게 설명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지금 황실 전체가 너를 억류하고 있다. 이유는 몰라도 전통 행사인 추룡제 때마다 네게…… 그랬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가둬왔겠지.”

“으음…….”

이안의 표정이 매우 복잡해졌다. 그럴 만했다. 기억이 없으니 실감 나지 않을 테고, 방금 만난 테르세오와 세르티아나도 황실의 일원이었으니까.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르세오는 이안에게 조금이나마 신뢰를 주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나 혼자 도망가는 것과 너와 함께 도망가는 것은 수색의 차이가 매우 클 거라는 소리야. 나야 어차피 유배 갈 처지였으니 수배령이 내려지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네가 사라지면 황제는 이 드넓은 제국을 다 뒤집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굳이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안의 육체 상태도 도주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전혀 수련되지 않은 몸이었다.

과거 이안이 말한, 잃었던 것 중 하나가 무력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테르세오는 입안이 썼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널 자유롭게 풀어줬을 텐데…….”

“음, 아니, 미안할 것까지야……. 들어보니 어쩔 수 없는 일 같은데.”

이안은 몹시 어색해서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아는 이안과 다른 반응에 테르세오는 또 착잡해졌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짤막하게 논의한 후 갈라졌다. 테르세오는 외부에서, 세르티아나는 내부에서 반역을 준비하고, 이안은 일단 염원초를 먹은 체하며 몸을 사릴 계획이었다.

세르티아나는 살아남기 위해 반역을 꾸며야 한다는 사실이 착잡해 몇 번이나 예언 카드를 섞고 뒤집었다. 그러나 아무리 점쳐도 별의 카드가 나오니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착잡해 하든 말든 테르세오는 이안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지금은 내부 사정 때문에 너를 방치 중이지만, 머지않아 네게 염원초를 먹이려 들 거다. 어떻게든 섭취량을 줄이고 주기적으로 누님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힘들겠지만 버텨다오. 내가 반드시 다음 추룡제 전에 너를 구하러 오마.”

“……우리가 그렇게 친했어? 내 말은, 넌 황족이라면서. 가족을 상대로 그래도 괜찮아?”

“너는 네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으면서 나부터 걱정하는구나.”

테르세오가 설핏 웃었다.

“친한 정도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너보다 귀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리고 네게 지켜야 할 약속도 있고.”

“약속?”

“나는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될 거다. 그리고 네가 잃은 모든 것을 모조리 되찾아주겠다. 네 기억과 시간, 돌아가야 할 장소까지도.”

이 담담한 고백에 이안은 애써 세운 경계심이 일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테르세오가 보이는 감정은 자신을 향했으나 도저히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만큼 진실하다는 건 알았다.

“응. 믿을게.”

테르세오는 마지막으로 이안을 한 번 끌어안은 뒤, 클로이의 아티팩트 몇 가지를 챙겨 황궁을 떠났다. 그중에는 황궁의 보안 마법을 무력화하는 것도 있어 들키지 않고 무사히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수도의 뒷골목을 한참 달린 그는 바깥으로 이어지는 숲속에 몸을 숨겼다. 제국 지도가 머릿속에 들어 있지만 황궁에서 이렇게 멀어진 건 처음이라 신중하게 전진했다.

달빛이 흐릿하게 내리쬐는 겨울 숲. 작은 짐승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정적 속에서 테르세오의 입김만 하얗게 얼어붙어 하늘로 올랐다. 문득 그림자가 발을 잡아챈 것처럼 멈춰 선 테르세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숲은 그곳을 닮았다. 울며 도망쳐도 아무도 쫓아오지 않아 혼자 있을 수 있던 곳을. 동시에 아주 작은 울음에도 반드시 누군가 찾아오던 곳을.

장소로부터 연상된 추억이 테오의 마음 일부를 무너뜨렸다.

“이안.”

떠나기 전까지 담담했던 것과 달리, 울먹임이 뒤섞인 가냘픈 부름이었다. 테르세오는 주변 기척을 살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안……?”

울음기가 점점 짙어졌다. 방황하는 눈동자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끅끅거리며 가슴을 쥐어뜯던 테르세오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한때 아주 작은 울음에도 누군가 달래주던 시절이 있었다.

“이안, 어디 있어? 내가, 내가 울고 있잖아.”

거친 손으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던 사람이. 작은 몸을 너른 품으로 안아주던 남자가. 거짓된 눈물이라도 진심을 다해서 달래주던 이안이 있었다.

“나 좀 달래줘, 이안. 흑, 어서 날 달래러 와줘.”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 이안은 이제 테오를 달래러 올 수 없었다. 이안은 테오를 잊었고, 테오는 이안을 잃었다. 어두운 숲에 홀로 주저앉아 우는 테르세오를 달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안, 이안……. 이안!”

테르세오의 목소리에서 점점 울음기가 빠져나갔다. 사그라든 서러움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꽉 쥐어진 주먹이 땅을 내려쳤다. 갈라진 목소리가 확연히 달라진 감정을 토해냈다.

“황실이! 제국이!”

테오의 이안은 이용당했다. 추룡제를 위해 사육당했고, 염원초를 먹어 자유와 존엄을 약탈당했다. 아마도 수백 년 동안을.

“이 세계 전체가!”

이안에게 벌어진 비극은 인력(人力)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이 개입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안을 방치했다.

“용서하지 않겠다. 전부 가만두지 않겠어!”

눅눅한 그리움과 서러움이 가시고 염화와 같은 분노가 테르세오를 잠식했다. 황실을 피바다로 만들어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불태우다 못해 자기 자신마저 찔러 버릴 감정이었다.

예언의 실현이 아스라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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