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영웅이여……
수해로 상처 입은 대지가 채 회복되기도 전에 화마로 바싹 타들어갔다. 동녘의 드넓은 땅은 석양이 내려앉은 색으로 지글거렸다. 공기는 재와 열기, 그리고 검댕이 뒤섞여 텁텁했으며 불온한 바람이 한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휘이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다. 바람 따라 불길이 춤추듯 너울거렸다. 높이, 더 높이 치솟은 불은 거대한 기둥처럼 보였다.
텔레포트로 동녘에 막 도착한 이안 일행을 불꽃을 휘감은 회오리가 반겼다.
“저건 대체…….”
자연의 섭리일지 역리일지 모를 광경에 일행들은 꽁꽁 얼어붙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피부를 할퀴는 열기는 그들이 상대해야 할 존재가 어떤 권능을 가졌는지 상기시켰다.
신과 인간의 영역에는 이렇게나 넓은 간극이 존재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그 간극에 주눅 들지 않았다.
“화룡신과 천공이 저기에 있겠군요. 바람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화룡신의 힘이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이안은 날카롭게 회오리를 관찰하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곳곳이 움푹 팬 땅이 험난한 전투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일대는 온통 재와 검댕투성이였다.
‘신끼리 사흘이나 치고받은 것치고는 흔적이 너무 적어. 화룡신은 드래곤이니 공중전을 치렀으려나. 어느 쪽이 앞섰다고 예측하기 어려워.’
일방적인 공중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천공은 천룡의 권능으로 하늘을 다스린다. 완전한 신은 아니더라도 천공의 패배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클로이 공작님, 화염 저항이나 열 저항 마법 있습니까?”
“이미 시전 중입니다, 영웅님. 하나 신의 불꽃이라 그런지 좀처럼 마법이 잘 먹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드리지요.”
이안의 고민을 끊고 수룡이 나타났다. 수룡은 건조한 땅에 물을 뿌리며 열기를 식혔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공기에 습기가 더해졌다.
일행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수룡의 기척을 가늠하고 있던 이안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입니다, 영웅이여.”
수룡이 침잠한 얼굴로 말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신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 왔습니까?”
이안은 미리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예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당신은 참 한결같군요.”
수룡이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불의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저에게는 그럴 자격도, 힘도 없지만…… 감히 부탁합니다. 천공을 막아주세요. 그래야만 멸망을 막을 수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있던 클로이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기운에 눌려 감히 끼어들지는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이안이 그녀를 슬쩍 보고 말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천공을 도우러 온 거였거든요.”
“저 현상을 보세요. 천공은 이미 화룡에게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룡신께서는 천공의 목적을 아십니까?”
“어렴풋이는……. 그 목적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이 세계의 존망이 갈릴 겁니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 세계 일인데 한발 물러나 있는 게 궁색했다.
“왜 직접 나서지 않으시고요?”
“천공의 목적을 망치러 온 건 아니니까요. 여기서 이 아이들을 지키겠습니다.”
더는 질문 받고 싶지 않은 듯 수룡이 다가와 이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시원한 기운이 이안을 감싸고 스며들었다. 불꽃의 열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가호를 내렸습니다. 부디 도움이 되기를. 그리고…….”
수룡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당신이 마땅한 결과를 얻기를 바랍니다.”
수룡의 물빛 눈동자를 보며 이안은 세레나를 떠올렸다. 세레나의 오른쪽 눈과 수룡의 하나뿐인 왼쪽 눈이 겹쳐졌다.
“혹시……?”
“천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돌리며 수룡이 물러났다. 이안은 나중에 물어볼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회오리를 향해 달렸다. 클로이와 일행들이 따라가려고 했으나 수룡이 막았다.
“진정하거라. 너희들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이안은 미리내를 빼 들고 바람을 갈랐다. 타닥타닥- 불티가 사방으로 튀었으나 수룡의 가호 덕에 다칠 일은 없었다.
오러를 몸에 둘러 바람을 이겨내며 회오리의 중심에 다다르자 부드러운 바람 한줄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발치로 오더니 한데 뭉쳤다. 이윽고 불과 바람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이안을 하늘로 이끌었다.
회오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끝없이 치솟았다. 이안은 바람에 반쯤 몸을 맡긴 채 겅중겅중 뛰었다. 방심하다 천공이 마음을 바꾸면 추락할 수도 있기에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점점 산소가 부족해지고 있어. 나는 그렇다 쳐도 테오는 괜찮은 건가? 차라리 다른 곳에 있으면 좋으련만.’
까마득한 땅과 아직 먼 하늘을 보며 이안은 테오를 걱정했다. 자신이야 오러가 있으니 이 높이에서 추락해도 살겠지만, 테오는 아니었다. 그의 정신이 자꾸만 분산되자 미리내가 진동하며 경고했다.
마침내 바람이 잦아든 하늘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과 우주 너머로 반투명한 방벽이 보였다. 그리고 온 세계를 뒤덮은 거대한 신화 방벽을 배경으로 두 인영이 보였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천공과 그에게 멱살이 잡힌 시종이었다.
“테오!!”
이안이 단숨에 하늘과 우주의 경계로 뛰어올랐다. 천공의 배려로 발밑에 생긴 공기가 그를 굳건히 받쳤다. 이안은 그런 배려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천공에게 달려들었다.
“테오를 놓아줘!”
그러자 천공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허공으로 떨어지는 테오의 손목을 이안이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그러나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그의 손에는 시종복만이 남았다.
이안이 허망하게 옷을 추스르자 그 안에서 조그마한 도마뱀이 툭 떨어졌다.
“화룡신……?”
-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도마뱀으로 변한 화룡은 작달막한 날개를 펼쳐 쏜살같이 달아났다. 사태를 파악한 이안이 천공을 돌아보았다.
“테오는 어디 있습니까?”
“그걸 가장 먼저 묻는 건가?”
“절 농락하고 반응을 살피신 겁니까? 대체 무얼 위해서?”
노려보는 이안의 시선에도 천공은 태연자약했다.
“그대의 우선순위는 그런 타인이 아니어야 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천공의 목소리는 기록에서처럼 바람 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안은 섣불리 미리내로 천공을 겨누지 않으며 진위를 가늠했다.
천공의 기운이 사방에 가득했으나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밑보다 훨씬 아래로 구름이 흐르고, 머리 위 가까운 곳에서 별이 빛나는 장소였다. 이안이 이곳에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천공이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천공의 목적은 어쩌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다. 이안은 천공이 영웅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테오의 말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천공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본명은 아니지만 이안이라고 합니다. 그간 신세 많았습니다.”
천공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금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루키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안은 베일 너머의 벽안을 상상하며 질문을 이었다.
“아까 시종으로 분한 건 화룡신이셨지요? 화룡신을 이용해 제 반응을 살피신 이유가 제 우선순위를 따지기 위함입니까?”
“그대는 이 세계의 것을 우선해서는 안 돼.”
“저는……!”
“이 세계가 무엇을 우선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잊지 않았다.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천공이 직접 기록을 새겨 보여주지 않았던가. 마치 이안이 이 세계를 증오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안은 천공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증오할 대상을 착각하지 않았고, 보다 더 귀한 가치를 아낄 줄 알았다. 증오와 분노가 얽힌 진창 속에서도 갓 피어난 꽃 같은 사랑을 발견해 소중하게 여기는 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가 멸망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건 옳지 않으니까요. 화룡신과의 전투에서 이기셨으니 일단 지상의 불을 꺼주십시오.”
“내가 안 끈 게 아니야.”
천공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안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회오리의 불꽃이 천천히 잦아드는 게 보였다. 천공이 아니라 도망간 화룡이 불을 다룬 모양이었다.
이안은 괜히 헛기침했다.
“어쨌든, 저를 여기까지 부른 건 천공이시지요. 왜 그런 겁니까?”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안 하시면 어떡합니까. 절 부른 목적이 있으시잖습니까.”
천공이 키득키득 웃었다. 묘한 애수가 섞여 불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이안은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미리내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내 목적은 예언을 이루는 것. 마음껏 질문해라. 궁금증이 풀릴 때쯤 모든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니.”
이안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차분한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천공의 광기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듣던 대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간 수집했던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질문을 골랐다.
“무슨 예언을 이루려는 겁니까?”
“나의 모든 예언을 이루려 한다.”
“당신의 예언이 모두 이루어지는 게 어떻게 당신의 목적이 되는 거죠?”
“내 예언이 탄생 예언뿐인 줄 아느냐?”
이안은 금세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 이안이 아는 천공의 예언은 태생 예언뿐이다. 그것들을 그대로 이루는 게 천공의 목적인 건 이상하지만, 다른 예언이 있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빈틈을 보인 탓에 이안은 좀 더 신중해졌다.
“왜 저에게 그런 기록들을 남긴 겁니까?”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지?”
“……화가 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신감이 들어 슬펐습니다. 신들과 이 세계, 제가 구한 이들에게 실망했습니다.”
이안은 성인군자가 아니었으니 여전히 그 감정들은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러나 굳은 심지는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절 그렇게 만든 이들은 대부분 죽었더군요.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에 매여 있지도 않을 겁니다. 전 그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대라면 그럴 줄 알았어.”
천공의 어조에는 약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이안은 생뚱맞게도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듯한 감상을 받았다.
“그럴 줄 알아서 저 대신 복수한 겁니까? 당신이 왜?”
“그것 또한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이었다.”
“‘제국의 명맥을 끊을 자’를 말하는 겁니까? 절 핑계 삼아 제국을 시작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작정입니까?”
“이 세계는 가치가 없다.”
천공이 나직이 선언했다.
“그리고 멸망은 자연스러운 섭리다.”
그는 위를 가리켰다. 더는 하늘이라 칭할 수 없는 천외천의 우주로 밝은 빛을 내는 별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이안의 원래 세계 또한 존재할 것이다.
“저렇게 많은 세계가 존재하지만 생명의 근원은 무한하지 않아. 모든 생명은 죽어서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난다. 그것이 순환이고 섭리이다. 그러나 욕심 많은 신들이 그 순환에서 벗어나려고 하기에 멸망이 발생하는 것이지.”
그래서 멸망은 자연의 섭리. 사람이 언젠가 죽는 것처럼 세계도 끝이 나야 한다.
천공의 멸망론에 이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 세계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고여 있었다. 나는 잃었던 섭리를 되찾으려는 것일 뿐. 어쩌면 그러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지. 나를 재앙으로 낳은 것은 이 세계 그 자체다.”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는 목소리는 이안이 한 번 경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시감을 자세히 고민하기 전에 천공이 신력으로 창 한 자루를 구현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미리내를 치켜들었다.
“저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천공은 창대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리치의 장점을 이용하지 않고 검처럼 휘둘렀다. 이안이 미리내로 막자 천둥 같은 굉음이 일었다.
“신화를 투사해 마지막 글귀를 보아라.”
충격파가 연달아 하늘로 뻗어 나갔다.
* * *
하늘이 뒤흔들렸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신이시여…….”
클로이는 자신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낯설었다. 수룡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신을 찾게 됐다. 저 무서운 광경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존재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우리의 창조신은 대체 어디에…….’
갈 곳 잃은 그리움에 그녀는 심장께를 짓눌렀다.
수룡은 클로이와 다른 인간들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이 간구하는 존재는 오래전에 잊혔다. 작은 조각이나마 겨우 기억해 낸 신들만이 그 자취를 더듬으며 그리워했다.
‘아니, 그리워만 해서는 아니 되었어.’
그리워하기만 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단 한 사람의 희생에 의지해 세계를 지탱한 결과. 이 세계를 구원한 인간과 신들의 외면이 낳은 재앙이 하늘 위에서 맞붙었다.
쿠우웅- 우우우웅-
방관했던 신들을 향해 천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언뜻언뜻 구름 너머가 빛날 때마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들이 놀라 무릎을 꿇었다.
“제발! 누가 좀-!”
클로이의 절박한 외침이 수룡을 아프게 때렸다. 수룡은 계속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을 참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끝까지 방관했으나 더는 외면하지 말아야 했다.
화아악!
그런 결심을 하는 순간, 하늘 너머에서 강렬한 신화의 역동이 느껴졌다. 수룡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신화의 투사!”
이미 죽은 악룡과 악룡을 찌르려는 용사의 그림자가 하늘에 비쳤다. 그리고 그 위에 덧씌우듯 기록 하나가 투영되었다.
* * *
전투는 일방적이었지만 치열하지는 않았다. 천공은 오로지 물러나길 반복하며 이안의 공격을 모두 받았으나 수세에 몰린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승기를 잡은 이안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그는 용살 신화가 투사될 때까지 제 실력을 숨기려는 게 분명했다.
“용살 신화를 소모하게 하려는 겁니까?”
이안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천공은 대답 없이 바로 달라붙었다. 미리내와 창대가 순식간에 다섯 번 부딪혔다 떨어졌다.
“용살 신화가 없어도 미리내는 용을 죽인 검입니다. 예언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해!”
“말이 많군. 집중해라.”
차갑게 일갈한 천공이 이번에는 제대로 공격했다. 날카로운 창날이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빠르게 쇄도했다. 이안은 놀랐으나 침착하게 모조리 쳐냈다.
공방이 오갈수록 대화할 여유도 바닥이 났다. 이제 이안의 머릿속에는 천공의 급소를 어떻게 찔러야 하는지에 대한 궁리만 들어 있었다.
궁리하여 떠오른 묘수를 실험해 볼수록 옛 실력을 되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오직 이기기 위해 온 정신으로 집중하는 감각. 세계를 구한다는 대의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위기감마저 잊고, 승리만을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
인간의 한계를 다시 한번 뛰어넘어 끝내 천공의 방어를 파훼하고 창을 날려 버렸을 때, 이안은 과거의 용사가 되어 미리내를 찔러 넣었다.
마침내 미리내의 마지막 글귀가 빛났다.
[영웅이여, 이제 그만 돌아가라]
눈부신 빛과 함께 투사된 신화 위로 기록이 투영되었다.
* * *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천룡, 수룡, 화룡이 다급하게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수많은 세계가 스쳐 지나갔다.
그곳은 모든 세계의 바깥, 세외(世外)였다. 텅 비었으면서 꽉 찬 공간에 얕은 무언가가 흘렀다. 굳이 비유하자면 ‘강’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 그것을 두고 세 용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화룡이 전율에 떨며 비틀거렸다.
-정말로 새로운 강이 생겨나다니? 이제 멸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걸까요?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이릅니다, 화룡이시여. 일단 강지기를 만나봅시다.
세계가 아닌 강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강을 수호하는 신인 강지기. 새로운 강에 미친 신들이 난장을 치지 않는 것을 보면 강지기가 지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룡이 차분하게 화룡을 진정시키는 사이, 천룡은 가느다란 강줄기를 노려보았다. 아직 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밑바탕만은 훌륭했다. 천룡은 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저건 세외강처럼 생명의 근원이 되는 강이 아닙니다.
두 용이 놀라 천룡을 바라보았다.
-저 강은 신화의 강입니다. 생명이 메말라 가는 세계를 적실 수원(水源)은 되지 못하겠군요.
-그 말이 맞습니다. 어딘지 모를 세계에서 온 신들이시여.
세 용이 돌아보니 꽃처럼 붉은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형의 신이 있었다. 그 신이 쥔 창을 보기도 전에 세 용은 그가 새로운 강의 강지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두 번째 강의 강지기를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신화의 강을 보러 오셨나요?
-한동안 세외의 소식을 듣지 못해 새로운 강의 출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설명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강지기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해 신들이 잊히지 않고 세외강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만든 강입니다.
-잊히지 않는다고요?
-우리 신들, 특히 창조신은 신화로 인해 행적과 존재가 증명되지요. 그 때문에 신화가 전부 산화되면 존재 자체가 잊히고 맙니다. 그렇다고 세외강에 투신하기에는, 신화가 세외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강지기에게 막히고 말지요.
그들은 자신의 창조신을 떠올렸다. 존재했다는 사실만 겨우 떠올린 그 신은 잊히는 것이 두려워 세외강에 투신하려다 강지기에 의해 죽어 잊혔을 것이다.
-그래서 저와 다른 신은 신화만을 모을 수 있는 강을 만들었습니다. 세외강으로 돌아가기 전, 신화를 두고 가게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화는 산화되지 않고 존재와 행적을 기억할 수 있게 되니 말입니다.
-그럼 멸망은 어떻게 됩니까?
화룡이 절박하게 물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화가 아니었다.
-잊히지 않더라도 멸망이 계속 발생하면 소용없지 않습니까? 혹시 멸망을 극복할 방법도 찾으셨습니까?
-아주 오랫동안 그 방법을 찾은 신이 있었지요.
강지기가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 그 얼굴에서 길고 긴 시간을 읽은 수룡이 침음했다. 천룡은 매서운 눈으로 강지기를 노려보았다.
-그분과 함께 내린 결론이 이것입니다. 멸망은 자연스러운 섭리임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신화의 강을 통해 신들이 그 섭리를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인다면, 멸망은 차차 줄어들 것입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생명의 근원인 세외강의 강물을 신은 아주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니까요. 신이 돌아가지 못해 잊혀 죽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외강은 해갈되겠지요. 멸망이 발생하여 강제로 강물을 회수할 필요가 줄어드는 겁니다.
수룡과 화룡이 눈을 크게 떴다. 잊힐 바에야 차라리 죽어서 세외강으로 돌아가리라. 많은 신이 그들의 창조신처럼 생각했다. 한데, 잊히지 않는다면? 자진해서 세외강으로 돌아갈 신은 분명 많을 것이다.
-잊히지 않는다면…… 혹시 잊힌 신화를 기억할 수도 있습니까?
수룡이 강지기에게 신화 방벽에 관해 설명했다. 잊힌 신화의 주인인 창조신을 떠올려서 추모하고, 가능하다면 용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이세계에서 온 용사에 대한 설명까지 다 들은 강지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확신은 못 드리겠군요. 다만 신화의 강에서는 신화가 산화하지 않으니 방벽보다는 강에 보관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용사 또한 강으로 데려오십시오. 신화의 강은 한동안 많은 신이 오갈 테니 그중 알아보는 분이 있겠지요.
-아, 그럼…….
-그건 안 됩니다.
천룡이 딱딱한 목소리를 뱉으며 끼어들었다.
-말씀대로 하려면 신화 방벽을 해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세계를 지킬 수단이 사라집니다. 창조신 없는 세계가 어찌 되는지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세외에는 미친 신이 많고, 창조신 없는 세계는 무주공산이 된다. 멸망을 결심했다 하더라도 신화 방벽까지 해제하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 화룡이 동의하듯 말을 얹었다.
-게다가 용사의 상태도 문제잖습니까. 그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완전하지는 않아도 신벌은 신벌입니다.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원래 세계에서도 제대로 살기 어려울 겁니다.
-그건 제가 방법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강지기가 신중하게 말하자 수룡이 놀라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용살 신화를 얻어 벌을 받는 것이라면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용살 신화의 투사 도중 신화 내용을 바꾸어 소모하는 것. 발상하기는 쉬우나 다소 어렵고 영리하게 진행해야 하는 방법이지요. 저는 이것보다는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합니다.
강지기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웃었다.
-두 번째는 신화 자체를 무기처럼 다듬어서 신화 방벽을 깨뜨리는 것. 세계를 구원한 용사에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겁니다.
* * *
기록이 끝나고, 이안은 천공을 보았다. 미리내의 끝이 천공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용살 신화는 투사되는 중이었고, 천공은 신이 아니었다.
이대로 투사에 이끌려 공격한다면 천공의 알 수 없는 목표가 이뤄지고 천공이라는 재앙을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몸을 돌려 저 너머 신화 장벽으로 미리내를 던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찰나의 순간, 점멸하는 고민을 뒤덮은 것은 테오의 얼굴이었다. 이안이 사랑하는 테오.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해도 재앙을 무찌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테오와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이안은 제 속에 쌓인 원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을 찢어발기고 천공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무방비하게 열린 몸은 언뜻 함정 같았으나 아무리 봐도 반격의 기색이 없었다. 천공은 그대로 검을 받았다.
푸욱-
미약한 소리와 함께 검끝에 무언가 닿은 것 같았다. 이안이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미리내가 공명했다.
-안녕히, 나의 주인이여.
영문 모를 인사를 한 미리내는 통증을 일으켜 이안의 손을 떨쳐냈다. 이안의 몸이 뒤로 훅 멀어지고, 투사가 끝났다.
어찌 된 일인지 신화는 소모되지 않았다. 넘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이안은 바람에 의해 훅 날아올랐다. 발밑을 받치던 천공의 힘은 소리 없이 깨졌다.
천공이 맨손으로 검날을 붙잡았다. 관통당한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에 미리내가 젖어 들었다. 이안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깨달았다.
용살 신화가 옮겨진 피가 생물처럼 움직여 천공의 손안에 뭉쳤다. 그 피는 곧 허공으로 곧게 자라나 짧은 창의 형상을 만들었다.
천공이 비틀거리면서 용살 신화를 강하게 쥐었다. 그러곤 이안의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받으며 있는 힘껏 신화를 던졌다.
피 냄새를 풍기며 이안을 스쳐 지나간 용살 신화는 신화 방벽에 적중했다. 인간으로서는 해석할 수 없는 파열음이 들리고, 거대한 신화의 묶음이 아주 짧은 신화에 의해 흩어졌다. 신화들은 짧은 폭발을 일으키며 강력한 기류를 형성했다.
등 뒤에서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이안은 천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공은 미리내에 찔려 예언을 이루는 동시에 신화 방벽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목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신화 폭발로 인한 충격파로 천공의 베일이 뒤집혔다. 이안은 처음으로 천공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부신 금발에 푸른 하늘을 담은 눈동자, 피를 토하면서도 한껏 말려 올라간 입술.
“테오……?”
매우 익숙한 얼굴이 낯선 색채를 가진 채 드러났다. 이안이 경악하며 손을 뻗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어둠 속에서 보았던 밀빛이 아닌 눈동자. 지워진 천공의 얼굴. 금빛과 밀빛 머리카락.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테오의 증언. 그러나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천공과 테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조각들이 채 다 맞춰지기도 전에 이안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안 돼! 테오!!”
테오 역시 이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피 묻은 손이 무언가를 뿌렸다. 냉궁의 지하 서고에서 챙겨 온 서책, 이안의 기록이었다.
기록은 연기처럼 허공으로 풀어지더니 신화들의 기류 쪽으로 향했다. 연기와 함께 날아온 바람이 테오의 목소리를 전했다.
“돌아가, 이안.”
테오는 용을 죽인 검에 찔린 채 천천히 추락했다.
“이제 아무것도 구하지 마.”
그것은 이 세계의 구원을 향한 종언이자 작별 인사였다.
“테오!!!”
이안이 발버둥 쳤으나 강력한 바람이 그를 신화의 기류로 이끌었다. 지독히도 떠나고 싶었던,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남기로 선택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이안은 미친 듯이 절규하는 와중에도 물소리를 들었다.
풍덩!
그는 그대로 신화의 강에 빠지고 말았다.
* * *
쿵! 테오는 대비하지 못한 채 지상으로 추락했다. 미리내에 찔리기 직전에 여의주의 신화를 받아들여 반신으로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었으리라.
그는 전신이 박살 나는 듯한 고통에 경련하면서도 환희에 차 있었다.
“다 이루, 었다.”
만족스러웠다. 비록 이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나 신화의 강에 빠지는 순간 전부 잊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영웅이어도 수많은 신화의 흐름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안의 창조신은 그를 건져내어 필요한 기억만 골라 준 뒤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을 터.
테오는 바들바들 떨며 충격으로 움푹 팬 땅에서 기어 올라왔다.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테오오오오!!”
끔찍한 배신을 당한 것처럼 찢어지는 목소리에 테오는 피식 웃었다. 깊고 넓게 팬 구덩이 건너편에서 클로이가 울부짖었다.
“네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째서 우리를, 이 세계를 버린 거야!”
그녀의 주변 인간들도 충격에 벌벌 떨고 있었다. 물러나 있는 수룡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신화가 투사된 위에 기록이 투영되어 아래에 있던 클로이 일행이 본 모양이다.
테오는 유쾌한 기분이 들어 피를 토하면서도 웃었다.
“내가 왜 그랬냐고?”
“우리를 선택했어야지! 우리 세계를!”
“내가 왜?”
“그거야 당연하잖아! 우리 세계니까, 다 함께 살아가는 세계니까!”
배신감에 치를 떠는 모습이 테오는 허망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미리내가 박힌 명치께를 누르며 그녀를 비웃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나를 믿지 말라고.”
클로이가 흠칫 놀라며 이를 악물었다.
“나를 믿지 말았어야지. 의지하지 말았어야지. 주어진 평화를 지키고 싶으면 끝없이 경계했어야지!”
“나는…….”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너희는 왜 나를 막지 못했지? 왜 나보다 간절히 염원하지 못했지?”
테오는 클로이와 수룡, 나아가 이 세계를 비웃었다. 결국 이 세계에서 그보다 강한 염원을 가진 이는 없었던 것이다. 고작 한 명의 염원을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스스로 구하지 않는 세계 따위 멸망하라지. 한 명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세계는 가치가 없어.”
테오는 휘청이며 돌아섰다. 그를 부르짖는 이들을 무시한 채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렸다.
“테르세오!!”
바람이 불고, 피가 흥건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