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세계를 뒤덮으니 (4/13)

4장 세계를 뒤덮으니

“화룡신이 재앙이 되어가고 있어.”

재회의 입맞춤을 나누고 짧은 회포를 푼 다음 나오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테오는 진지하게 들었다.

“집무실로 가시죠.”

영웅성이 지어지고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이안의 집무실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이안은 상석에 앉으라는 테오의 제안을 거절하고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고작 며칠이지만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 다음에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웬 도마뱀이 나타나서는…….”

이안은 테오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테오의 모습을 보니 천공과 화룡을 만난 뒤로 왠지 모르게 불안했던 감정이 풀리는 것 같았다.

테오는 화룡이 이안에게 했다는 말을 전부 듣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화룡신의 상태는 천공 각하께서도 눈치채셨을 겁니다. 권속에게서 그런 낌새가 있었다니 말입니다. 화룡신은 용살 신화와 천공 각하를 피하고자 분신을 보냈겠지요. 그리고 그 제안은…….”

화룡은 이안의 용살 신화를 이용해 천공을 죽이고 싶어 한다. 재앙이 되어가는 화룡에게 재해의 기운을 다루는 천공과 용을 죽이는 신화를 동시에 없앨 좋은 기회인 것이다.

사실 이안 또한 신벌을 받지 않으려면, 용살 신화를 소모할 필요가 있기에 고민이었다. 테오는 잡고 있던 이안의 손에 다른 손을 포갰다.

“제안 내용은 천공 각하께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할지 이안 님이 결정해 주십시오.”

“그래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이안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테오의 손은 길쭉길쭉해서 예쁜 것에 비해 부드럽지는 않았다. 펜과 활, 여러 무기를 잡아 굳은살이 많았다. 그 단단한 느낌이 이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더 좋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천공의 목적이 뭔지. 화룡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포기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테오는 명쾌한 해답을 주진 않았으나 이안이 남들에게 하지 못할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계에 홀로 넘어온 이안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맞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안은 테오의 어깨에 기대 잠시 고민을 내려놓았다. 포기하지 않았지만 휴식이 간절했다.

* * *

커다란 재앙을 앞두고 전조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재해가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다. 천공과 이안, 테오는 바쁘게 방방곡곡을 누볐다. 재해를 막고 화룡을 수색하느라 몹시 바빴다.

천공과 이안이 동시에 출정하면 어쩔 수 없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아닐 경우 이안과 테오는 항상 같이 다녔다. 전에도 시종인 테오가 이안을 자주 따라다녔으나 더 본격적으로 붙어 다녔다.

물론 사람들 시선을 파악하며 다녔기에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딱 한 사람만 빼놓고.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아무것도, 아니다.”

본의 아니게 이복동생의 연애 행각을 자주 보게 된 세레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사정을 다 알면서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것이 얄미웠으나 그녀에게는 대들 힘이 없었다.

오늘도 두 사람이 입 맞추는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작작 하라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영웅님이 용살 신화를 다루는 법을 물으시더군.”

“뭐라 대답하셨소?”

“그런 기록은 여기에도 없어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였지.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까?”

“신화를 다루려면 일단 읽을 줄부터 알아야 하오. 용살 신화가 기록된 미리내를 항시 들고 다니면서 본인의 기억과 대조해 보라고 하시오.”

천공의 정체가 영웅의 시종 겸 연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자니 양심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천공이 준 방법을 알려준 뒤 한동안 백리안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안은 세레나에게서 들은 조언대로 미리내를 항상 들고 다녔다. 수련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는 악룡을 잡았을 때의 기억이 반복됐다. 몇 없는 선명한 기억이라 아주 세세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검법을 여러 번 재현한 이안은 그 기억을 종이에 쭉 써 내려 미리내의 기록과 대조했다.

“이것 봐, 테오. 내 기억과 이 기록의 문장 구조가 상당히 비슷해. 문자는 다르지만 문법이나 띄어쓰기는 비슷한 모양이야.”

용살 신화는 다섯 개의 글귀와 달리 이 세계의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안의 원래 세계 언어로 기록된 것일지도 몰랐다. 원래 세계의 문자를 떠올리면 연쇄적으로 다른 기억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이안의 마음을 채웠다.

기억과 기록을 대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뜨문뜨문 기록을 읽을 수 있었다. 읽기 시작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을 뿐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안은 사흘 만에 용살 신화를 전부 읽었다.

“그리하여, 성검이 악룡의 드래곤 하트를 파괴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용살 신화의 기록에서 은은한 빛이 발산됐다. 이안은 신화의 강력한 힘에 전율했다. 잠시나마 그때의 힘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글귀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세계를 뒤덮으니]

지금까지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 펼쳐졌다.

* * *

온통 새카만 공간에 세 용이 있었다. 하나는 레드 드래곤의 형상을 한 화룡이었고, 남은 둘은 뱀을 닮은 몸체를 가진 용이었다. 물빛 비늘을 가진 용보다 황금색 비늘을 가진 용의 몸집이 더 거대했다.

그들은 어떤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안은 그곳이 이 세계라는 것을 눈치챘다. 세계는 반투명한 벽 같은 것으로 감싸져 있었다.

물빛 용, 수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각이 없는 신으로서, 이렇게 무언가를 완벽하게 잊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우리와 같은 신일 줄이야…….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신화로 저런 방벽(防壁)을 쌓은 신을 잊는다는 것이?

화룡은 아직 반신반의한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저 신화 방벽의 주인이 아니었고 저런 것을 만든 기억 또한 없었다.

-하지만 본래 신이 잊히려면 가진 신화를 모두 산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신화의 주인은 왜…….

-저 신화를 버린 것이겠지요.

무겁게 침묵하던 금빛 용, 천룡이 짓씹듯이 말했다.

-세계와 우리까지, 전부 다 버린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없는지 말입니다.

천룡은 몹시 화가 난 듯 비늘을 마구 떨었다. 수룡과 화룡은 당황해하다가 차례로 깨닫고 경악했다.

-우리는 모두 탄생신이지요.

-그렇다는 건…….

그들은 부정하고 싶은 듯했으나 천룡이 쐐기를 박았다.

-우리의 세계를 조물하신 창조신. 그분께서 멸망해 가는 세계를 버리신 겁니다. 홀로 잊히기 싫어 세외강에 뛰어들려다가 실패했겠지요.

모든 세계의 바깥인 세외. 그리고 모든 생명의 근원인 세외강. 창조신은 세외강의 물을 퍼 올려 피조물을 만들고, 그 피조물이 죽으면 세외강으로 돌아간다.

이 법칙은 신에게도 적용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신 중에서 세계를 조물한 창조신만은 세계가 멸망하면 세외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잊혔다.

그것이 두려워 죽어가는 세계와 피조물, 자신의 신화 일부를 버렸음에도 그들의 창조신은 세외강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대로 잊힌 것이다.

-어떻게 그런!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화룡이 파르르 떨었다.

어떤 종류의 신이든 서로 존중하는 법이지만, 격차는 어쩔 수 없이 존재했다. 세계에서 태어난 탄생신은 세계를 조물한 창조신을 따르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창조신이 없는 세계에서 탄생신은 훨씬 무력했다.

-창조신도 없고 탄생신 하나마저 죽은 상황에서 우리 셋이 이 세계를 이끌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수룡이 조심스럽게 회의감을 드러냈다.

창조신이 없는 세계는 대부분 다른 신들에 의해 파멸한다. 다른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미치광이 신은 드넓은 세외 곳곳에 있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주인 없는 세계를 강제로 복속하려는 신 또한 조심해야 한다.

-확실히 우리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저것을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천룡은 신화 방벽을 가리켰다. 그 말에 수룡이 난색을 보였다.

-저건 이미 이름을 알 수 없는 잊힌 신화입니다. 게다가 그분의 신화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문제냐니요. 용사의 기억이 저 신화 방벽에 섞여 들어갔습니다. 이 세계를 구한 영웅에게 응당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돌려주면, 그다음에는요?

천룡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용사에게 기억을 돌려준다 한들 그의 진정한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습니까? 그의 원래 세계를 모르는 우리가요? 게다가 기억을 돌려주려면 신화 방벽을 해제해야 하는데, 용살 신화를 노리는 신들이 몰리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세외에는 용살 신화, 즉 신살 신화만을 취하여 신벌을 피하고자 하는 신이 제법 많았다. 아직 성공 사례는 나오지 않았으나, 또는 잊혔으나 신들의 신화 욕심은 이따금 추악할 정도였다. 그들이 비록 세계에 기거하는 탄생신들이라 해도 그런 신에 대한 소문은 종종 듣곤 했다.

유일하게 신살 신화를 보유한 반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비가 걸려오는지 생각해 보면, 그들만으로 버티기란 요원했다. 화룡이 조심스럽게 천룡에게 힘을 실었다.

-갈 수 없는 곳을 영원히 그려야만 한다면, 조금이나마 덜 기억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용사의 상태를 보십시오. 축복을 비틀어 벌을 유예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몹시 괴롭지 않겠습니까?

-하나 그건 용사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수룡의 반발에 화룡이 주춤거렸다. 천룡이 거대한 몸으로 수룡을 감쌀 것처럼 다가갔다.

-잘 생각하십시오, 수룡.

천룡의 목소리는 아주 냉혹했다.

-우리 세계를 지키는 게 먼저입니까, 용사를 돌려보내는 게 먼저입니까? 세계를 구하고자 용사를 불러들였는데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세계 멸망을 감수한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하지만…….

-잊힌 신화로 쌓인 방벽으로 우리 세계를 감싸면 세계 자체가 잊히는 효과를 보일 겁니다. 그러면 타신들도 우리와 세계를 노리지 못합니다. 저 방벽을 해제하면 신화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 텐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와 용사를 저울질하는 말에 수룡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 또한 이 세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탄생신이었으므로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고민하던 수룡은 결국 한풀 꺾이고 말았다.

-대신 영웅이 이 세계에서 최대한 행복하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예언을 내리든지 해서라도.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들은 신화 방벽의 지분을 정확히 삼등분하여 나눠 가졌다. 그들의 합의에 따라 신화 방벽은 세계를 완전히 감쌌고, 그들의 세계는 세외에서 잊혔다.

수룡이 한탄했다.

-우리는 영웅의 또 다른 희생으로 구원받았군요.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비록 잊힌 신화로 만들어진 방벽이라고는 하나 저 사이에 있으면 기억이 손상될 일은 없을 겁니다. 떠올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그가 저 기억을 가져가는 순간 방벽이 무너질 테니, 그는 구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룡은 몸소 인세에 내려가 용사에게 예언을 내려주었다.

[영웅의 행복으로 말미암아 제국이 번영하리라.]

-우리의 구원자인 영웅이 행복하지 않으면 과연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예언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 * *

‘그래. 알고 있었어.’

지하 서고에서 세레나에게 진실을 듣기 전에도. 어쩌면 악룡을 무찌르고 800년 뒤에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안은 은연중에 알았다. 이 세계의 신들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길고 긴 고난의 보상을 지불하지 않았음을.

하지만, 알고 있다 해도 진실을 여과 없이 목도하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이안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신들이 내가 아닌 세계를 선택한 건 당연한 결과겠지. 나는 그들의 피조물이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이 세계를 떠나는 것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신들은 알아야 해.’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표출할 길 없는 분노를 잘 갈무리하여 귀환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난 돌아갈 거야. 그리고 테오도 데려가겠어.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돼.’

본래 보상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 이안은 다른 무엇도 아닌 테오를 원했다. 이제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이 세계에서 난 것 중 이안에게 가치 있는 것은 오직 테오뿐이었다.

한결 침착해진 이안은 화룡의 ‘천공이 용살 신화를 소모하게 하려 한다’라는 주장을 떠올렸다.

네 번째 글귀에 담긴 기록은 그가 기억을 가져가면 신화 방벽이 무너진다고 알려주었다. 천공이 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어쩌면 용살 신화를 이용해 신화 방벽을 무너뜨리고 기억을 가져가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또 이 세계를 감추고 있는 신화 방벽을 부순다면, 기억을 되찾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명확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어. 흐름대로라면 다섯 번째 글귀에 집으로 돌아갈 단서가 담겨 있을 거야.’

그러나 세외라는 장소를 떠올려 보면 어떤 단서일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계와 세계 사이의, 셀 수 없이 많은 세계를 품었을 그 광활한 공간에서 원래 세계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일 터였다.

그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일하러 간 테오가 걱정할 테니 바닥을 마구 구르지는 않았다.

“미리내야, 용살 신화를 전부 읽고 다루어서 네 번째 글귀를 읽었잖아. 설마 마지막 글귀를 읽는 조건이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알면서 묻는 것?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해서 묻는 거잖아.”

-네 생각대로.

“으아악.”

결국,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글귀를 읽기 위해서는 용살 신화를 투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신벌을 피하려면 용살 신화 그대로 진행하면 안 된다. 용의 형상을 한 신과 싸우되 신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한 채로 싸우기란 매우 어려워 보였다. 화룡 말대로 천공과 싸워 인간인 천공을 죽이지 않는 이상은.

이안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을 나왔다. 그러곤 개인 욕실에서 깨끗이 씻고, 테오의 집무실로 향했다.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하던 테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보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수련은 다 끝나셨습니까?”

서류를 밀어놓고 테오가 긴 소파에 앉자 이안이 냉큼 옆에 앉았다. 테오에게서 나는 종이와 잉크, 바람 냄새가 너무 좋았다. 잠시 그를 끌어안고 있던 이안이 물었다.

“전에 천공이 나를 해칠 리 없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말한 거야?”

테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천공 각하께서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영웅님을 해치지 못할 거라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더 자세히 말해줘도 돼. 사실…… 천공이 어렸을 때 날 봤다는 거 알아.”

테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보았다. 이안은 하마터면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입 맞출 뻔했다.

“얼마나 기억하십니까?”

“자세히는 아니야. 내게 내려진 예언과 제국이 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대략적으로 알아. 내가 7년 주기로 회귀하며 기억을 잃고, 어린 천공이 나를 봤었다는 것도. 너는 어렸을 때부터 천공의 시종이었다면서?”

“……세르티아나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억지로 알려달라고 한 거야.”

이안은 세레나가 염려스러운 나머지 덧붙였다.

“천공에게는 안 알릴 거지……?”

“그분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으음, 그런가.”

이안이 걱정하는 기색으로 우물쭈물하자 테오의 눈빛이 조금 뾰족해졌다. 의도치 않게 그의 목소리에 날이 조금 섰다.

“세르티아나 님이 많이 걱정되십니까?”

“그래도 나를 많이 도와준 사람이니까. 동생을 너무 무서워하는 게 좀 안됐어.”

“꽤 친하신 모양입니다. 걱정도 다 하시고.”

테오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했다. 미간에 주름도 살짝 잡혔다. 내색하진 않지만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다. 그 반응에 이안은 긴가민가했다.

‘어, 이거 설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밀빛 눈동자가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정도로 죽이지는 않는데…….”

부루퉁하게 다물린 입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명했다. 이안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귀여워!”

언제나 덤덤하던 테오의 질투라니!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귀엽다는 말에 또 얼굴이 붉어졌다. 귀엽게.

“걱정하지 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테오 너야!”

“아, 아니, 그게!”

이안은 중요한 대화를 나누던 중인 것도 잊고 테오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당황해서 버둥거리던 테오도 입맞춤이 쏟아지자 얌전해졌다. 결국 다시 대회가 재개된 건 다소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입니다.”

한가득 입맞춤을 받고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던 테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밀어내는 테오의 손에 쪽쪽거리는 이안은 진지하게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차마 손을 빼기 싫었지만,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테오는 그의 뺨을 꼬집었다. 그래도 이안은 좋아라 했다.

“어쨌든…… 기록을 조금 읽으셨다고 했지요? 천공 각하께서는 어린 시절 영웅에 대한 진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것이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그분은 세계를 구한 당신께 보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잘해주고, 업적도 널리 알리고, 절대 나를 해칠 리 없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안은 테오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천공의 최측근이라는 테오는 그 사실을 진실로 믿는 듯했다.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 누가 오든 조금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천공이 테오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본래의 목적은 역시 나를 이용해 제국의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면?’

천공이 미리내에 새긴 기록은 그에게 진실을 알리는 동시에 용살 신화의 소모법 또한 알려주었다. 미리내를 돌려준 목적은 역시 용살 신화의 소모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용살 신화로 신화 방벽을 깨뜨려 봤자 이안이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애매하니까.

‘아니지. 아직 마지막 기억이 어떤지 모르잖아.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만 정말 돌아갈 방법을 알아낸다면? 내가 돌아가면 천공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네.’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고 생각에 잠긴 이안을 테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번째 글귀까지 읽었다면 상당한 양의 정보가 저 머릿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결정적인 단서가 없는 한 절대 맞춰질 리 없겠지만.

테오는 가만히 이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살집이 없지만 보들보들한 뺨과 선명한 턱선, 높은 콧대, 진한 눈썹 아래로 깊은 음영이 진 눈두덩이, 그리고 언제나 시원스러운 미소를 그리는 입술까지. 모두 손끝에 새겼다.

“간지러워.”

이안이 속삭이며 테오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테오는 잔잔히 미소 짓다가 그의 눈을 피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막 씻고 온 이안에게서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촉촉한 살 내음이 배 속을 간지럽혔다. 참기 어려운 충동이 으르렁거렸다. 테오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습니다.”

“어, 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이안이 테오의 어깨를 더듬어 잡았다. 테오는 이안의 품으로 파고들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이로 살짝 깨물고 연한 살을 빨아들여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 미리 달래주시면 안 됩니까?”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이안이 테오를 끌어안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테오의 귓가에 스쳤다.

“여, 여기서는 말고…….”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세게 이안을 끌어안았다.

* * *

구세력 802년 1월 1일. 천공의 24번째 생일. 테오는 이안도 만나지 않은 채 숲을 거닐었다. 밤새 쌓인 눈이 발밑에서 뽀드득 비명을 질렀다. 외로운 비명이 이어질수록 밀빛에 가려진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작년 말부터 이안만 보면 치솟던 살의가 모두 우울로 치환되었다. 새빨갛던 살의만큼이나 새파란 우울. 제 주제를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안…….’

맨 처음 만났을 때 그는 7세였고 이안은 24세였다. 그때부터 어제까지 이안은 줄곧 테오보다 연상이었다. 그러나 오늘 생일을 맞이함으로써 테오는 24세가 되었다.

만약 그의 계획이 어그러져 7년을 채운 이안이 다시 회귀하게 된다면, 테오는 28세에 24세의 이안을 만나게 된다.

‘결코 다시는 착한 아이라 불리지 못하겠지.’

나이를 먹는다는 자연스러운 사실에 이렇게 비관할 줄이야. 둘의 관계는 고작 나이의 변화로 바뀔 만큼 불안정했다. 그는 어떤 영원불멸한 끈으로 이안과 연결되길 바랐다.

‘차라리 지금 죽이면 동갑이라도 될 텐데.’

하루라도 어릴 때 이안을 죽여 7년을 더 벌어보자. 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지배하던 살심의 씨앗이 아직 남아 속삭였다.

이안보다 어려질 수 없다면 동갑이라도 되자. 어차피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홀로 오지 않았으리라.

‘이안.’

테오는 이안을 처음 만난 장소에 도착했다. 후원에서 이어지는 숲의 어느 구석은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았으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날 만난 이안의 모습이 생생했다. 기억은 이리도 선명한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렀다.

휘이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바닥에 쌓인 눈이 파란 비명을 냈다. 기억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테오? 추운데 여기서 뭐 해?”

차라리 환영이길 바랐건만 진짜 이안이 나타났다. 테오는 반쯤 돌아선 몸을 애써 멈춰 세웠다. 아직 살심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 대답도 하지 않고 땅만 내려다봤다.

“아파서 쉰다고 했잖아. 그, 그렇게 얇게 입고 나와도 괜찮은 거야?!”

이안이 서둘러 다가왔지만 테오는 다가오는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으나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무례함을 탓하며 떠나가길 바랐다.

“왜 그래. 화났어? 어제오늘 네 말 잘 들은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안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감정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이었다. 테오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깨 위로 무언가 얹어졌다. 타인의 체온이 그를 감쌌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추운 데 계속 있으면 걱정되잖아. 혼자 있고 싶으면 따뜻한 방에서 있으면 안 될까?”

“…….”

“으음, 싫으면 나도 안 가. 너 돌아갈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이제 말도 안 할 거고.”

흥. 이안이 새침하게 말하는 소리에 테오는 맥이 풀려 버렸다. 자신은 살심을 억누르며 애써 밀어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어주다니. 아무리 자기 시종을 믿고 있어도 그 다정함은 상대를 가려가며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테오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이안이었다. 사람 좋고 다정한, 누군가를 억지로 위로하려 들지 않고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누군가 울고 있다면, 어디서든 달려오는 사람.

테오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 사이에 코를 박고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울음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울고 싶었다.

“어, 어어어?! 왜 그래! 역시 아픈 거야?!”

크게 당황한 이안이 옆에서 허둥거렸다. 업고 가야겠다느니, 아니면 사람을 불러오겠다느니 부산을 떠는 그의 바짓자락을 테오가 붙잡았다. 힘주어 당기자 이안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만약에 말입니다.”

테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만약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뜬금없고 불분명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테오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한테 짓는데? 혹시 나?”

“중요한 사람한테요.”

“으음, 애초에 죄를 짓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원치 않게 죄를 짓는 경우도 있으니까.”

“제 간절한 염원이 죄가 된다면요? 제가 죄짓기를 선택한다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안이 테오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마구 비볐다.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무엇을요?”

“죄를 짓지 않아도 괜찮아지도록. 아니면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도록.”

테오는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시한 농담을 하는 어투였으나 눈빛은 진지했다. 직감적으로 자신의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너는 악의로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야.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뭐든 도울게.”

* * *

그때를 떠올리면 테오는 공연히 서러웠다. 이안의 한결같은 다정함이 너무나 좋았다. 동시에 도저히 모질지 못한 그가 미웠다.

“이안, 읏, 이안…….”

이안을 한 번 잃었던 테오는 그가 미련 없이 떠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글귀를 새기고 계획을 세웠다. 스스로를 자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선을 긋고 감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이안이 한 발자국 다가온 것만으로 이렇게나 무너지고 말았다. 작은 균열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윽. 테오, 괜찮아? 아프지 않아?”

“괜찮으니까, 빨리…….”

완전히 삽입된 성기에 이안과 테오 모두 숨이 벅찼다. 정제되지 않는 쾌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처음 겪는 감정의 격류에 무력하게 휩쓸렸다.

이안은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고 갈급하게 삽입한 자신을 책망했다. 터질 것 같은 성기에 고통마저 느끼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목에 둘러진 테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 좀 더……. 흣.”

테오는 이안을 원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를 가지고 싶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안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보챘다.

“이안, 이안, 앗!”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테오를 보며 이안은 사정을 참았다. 그가 만질 때마다 테오는 자지러지며 구멍을 조였다. 테오의 쇄골과 가슴에 흔적을 남기던 이안이 말했다.

“계속 이름 불러줘, 테오.”

“이, 이안……!”

테오가 이름을 부를수록 이안의 허릿짓이 거세졌다. 상대를 배려하려던 마음가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유를 잃은 이안이 테오의 속을 마구 들쑤셨다.

“흐, 흐앗! 윽, 악.”

“테오, 큿, 테오…….”

살이 맞붙은 자리마다 화끈거렸다. 이안이 닿은 부위가 모두 성감대가 된 것처럼 테오의 성기가 연신 물을 흘렸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절정에 가까워졌다.

처음으로 감정에 몸을 맡기니 고통보다는 충족감이 더 컸다. 테오는 헐떡이며 계속 이안을 불렀다. 부르면 부를수록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이안.”

터질 것 같은 쾌락만큼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안을 끌어안고 등을 더듬던 테오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이안과 입을 맞춘 후 그의 몸을 밀어 자세를 바꾸었다.

드러누운 이안의 얼굴로 테오의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오직 이글거리는 눈동자만을 볼 수 있도록.

“사랑해, 이안. 그대를 사랑해.”

이안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화인처럼 새겨졌다.

“나도 사랑해, 테오.”

그 말을 삼키듯 테오가 이안에게 입을 맞췄다. 물어뜯을 것처럼 키스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불편한 자세로도 쾌감은 식지 않아 금세 절정에 다다랐다.

첫 사정의 여운으로 바들바들 떠는 테오를 보고 이안도 사정했다. 그는 넋이 나간 것 같은 테오를 어루만지며 다시 눕혔다. 정신을 못 차리는 테오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왜 울어?”

“무, 무서워서.”

“뭐가 무서워?”

“너무 좋은 게, 무서워…….”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란 무섭다. 그러나 너무 좋았다. 이대로 영영 통제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 끝을 알기에 더더욱. 이안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테오는 눈가가 짓무를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이안이 그를 쉼 없이 달래주었다.

“아프지는 않았어? 내가 너무 서툴러서…….”

“전혀. 괜찮으니까 계속해.”

이안은 여전히 훌쩍이는 테오를 향해 몸을 기울여 촉, 눈가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하대였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그 명령에 따르고 싶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사정을 해서 그런지 테오의 몸은 긴장이 많이 풀린 상태였다. 눈물을 그친 테오는 슬슬 구멍을 조이며 이안을 자극했다. 삽입된 성기에서부터 찌릿찌릿 쾌감이 퍼져 나갔다.

“후우-”

깊은숨을 내쉰 이안이 테오를 끌어안고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테오가 이안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몸이 바싹 붙고 테오의 체중이 실리니 삽입이 깊어졌다. 이안의 성기가 깊은 곳까지 닿자 테오가 허벅지를 벌벌 떨며 이안에게 매달렸다.

“흐읏, 윽…….”

빠듯하게 들어찬 성기가 느끼는 부분을 무자비하게 자극했다. 발기가 풀렸던 테오의 성기가 다시 배까지 올라붙었다.

이안은 그 상태로 얕게 허리를 들썩이며 테오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 흣!”

간지러워서 놀랐다기엔 테오의 반응이 컸다. 구멍을 자꾸 조였다 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상당히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그 반응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쉽사리 더 자극하지 못했다.

‘등에 흉터가 이렇게 많이…….’

테오의 등 전체가 끔찍한 흉터로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테오는 처음 옷을 벗을 때도 의식적으로 마주 보려고 노력했었다. 이안은 사연 모를 흉터에 마음 아파하며 테오를 다시 눕혔다.

그리고 성기를 잠시 뺀 뒤 테오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헸다. 어리둥절해하던 테오가 그제야 깨달은 듯 몸이 굳었다.

“이건…….”

“많이 아팠겠다.”

이안은 테오의 등에 입을 맞췄다. 상처 하나하나를 보듬듯 부드럽게 핥았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테오는 움찔움찔 떨었다.

“다시는 이렇게 아플 일 없을 거야. 반드시 내가 너를 지킬게.”

“흣, 이안.”

이안은 쉼 없이 입을 맞추며 흔적을 남겼다. 이리저리 얽힌 흉터 위로 울혈이 꽃처럼 피어났다. 굳었던 테오의 몸이 점점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예쁘다.”

“흐, 하아…….”

“정말 예뻐, 테오.”

자신의 흔적으로 채운 테오의 등을 감상하던 이안은 그의 골반을 잡고 다시 삽입했다. 처음보다 훨씬 원활한 삽입이었으나 여전히 빡빡했다. 그는 앞뒤로 살살 움직이며 천천히 진입했다.

테오는 삽입하기 쉽도록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이안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싫지만, 뜨거운 체온을 느끼는 데 집중할 수 있는 건 좋았다. 오히려 얼굴을 못 보니 조금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너무 감정에 휩쓸렸어. 이래서는 안 돼.’

그러나 이안이 추삽질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굵고 단단한 귀두가 테오가 느끼는 부분을 긁으며 움직였다. 테오는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도록 버티며 이안을 받아냈다.

“크읏, 테오…….”

등에 닿는 이안의 몸과 귓가에 흘러들어 오는 이안의 목소리는 테오를 더욱더 흥분시켰다. 시트에 얼굴을 묻은 그는 짐승처럼 헐떡이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이안과 박자가 맞을 때마다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쾌감에 이성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이성이 없는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코피를 쏟을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흔들었다. 테오의 골반을 잡고 박아 넣으면 부드러운 내벽이 환영하며 잘근잘근 조였다. 두 사람 모두 절정에 가까워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이안은 선액이 뚝뚝 떨어지는 테오의 성기를 발견했다. 아까 만지지 않았는데도 테오가 사정한 게 문득 떠올랐다. 그는 테오의 배를 쓰다듬던 손을 성기로 가져갔다.

“흐앗!”

뜨거운 성기를 힘 있게 문지르자 테오가 자지러졌다.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그는 버티지 못하고 금세 절정에 다다랐다. 이안도 강하게 조이는 내벽을 느끼며 테오의 안에 사정했다.

“후우, 후우, 헉…….”

이안은 테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까처럼 무서워하지 않도록. 자신이 곁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후희를 즐기지 못하고 떨던 테오는 그 의도를 알아채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등에 닿은 이안의 가슴을 통해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통제의 상실이 불러일으킨 불안이 잦아들었다.

성기를 빼고 테오와 마주 누운 이안이 물었다.

“괜찮아?”

테오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 외에 다른 대답은 필요 없었다. 이안은 웃으며 키스를 받았다.

* * *

고즈넉한 새벽녘. 먼저 깨어난 테오는 잠든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열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은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 그 속에서 테오는 홀로 번민했다.

‘나는 이안을 사랑하기에 세계를 증오하는 걸까, 아니면 세계를 증오하고자 이안을 사랑하는 걸까.’

한참 늦은 고민이었다. 테오의 계획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목적이 이뤄지는 순간 이안은 그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원망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크게 입겠지.’

테오는 이안을 위해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그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안의 감정은 테오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의 감정도 통제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내 목적은 그대를 위한 것인데 정작 그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니. 이건 사랑일까 아닐까. 그대는 화를 낼까. 나를 용서할까.’

테오는 이안을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깊게 잠들었는지 눈가와 뺨을 쓸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다행이면서도 아쉬웠다.

“사랑해, 이안. 사랑해. 사랑해.”

깨어나지 않으니 마음껏 감정을 토해냈다. 테오는 이안을 덮을 것처럼 상체를 숙였다. 이안의 살 내음을 맡으며 귓가에 연신 속삭였다. 이대로 굳어 돌이 되어버리고 싶었다.

이 감정의 뿌리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테오는 이안을 사랑했고, 그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상처 입히게 될지라도.

“그대를 사랑해.”

예언은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하므로.

테오는 쪽지 한 장을 남긴 뒤 방에서 나갔다. 한참 뒤 깨어난 이안이 발견한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천공 각하께서 찾으셔서 먼저 갑니다. 사랑합니다. -테오.]

* * *

중요한 소식을 들은 클로이가 천공성으로 달려갔을 때, 마침 천공도 그곳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천공에게 곧바로 보고했다.

“동녘의 수해 지역에서 화룡신이 나타났습니다. 현재 병사들을 동원해 거주민을 대피시키는 중이고, 마법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각하를 위해 동녘의 모든 병사가 불길로 뛰어들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소. 피해 상황은?”

“화재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연기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는 중입니다. 기상예보에 따르면 바람이 강하고 비가 오지 않아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건 현장에서 손봐야겠군.”

정식 보고가 끝난 뒤 클로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테오를 살폈다. 오늘따라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몸 상태 괜찮아? 어디 불편해 보이는데.”

“신경 쓰지 마. 수면 부족이라 그래.”

“수면 부족인데 왜 안 입던 정복을 챙겨 입었어. 평소처럼 시종복 입지 않고.”

“필요한 상황이니까.”

테오는 일부러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신력으로 이동하지 않는 이유가 대화하자는 뜻인 걸 눈치챈 클로이는 테오를 따라갔다.

후원의 숲에 들어서자 테오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엘바차 남작의 유지를 저버리면서까지 나를 황제를 만들고 싶은 이유가 뭐야?”

클로이는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뜻밖인 동시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정을 없애고 새로운 정치 체계를 만들어 적용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너는 신에 가까운 존재이니 아주 오래 살겠지? 네가 마지막 황제가 되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그것뿐이야? 아니잖아.”

“……아버지께서는 네가 좋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어. 나도 그렇게-”

“남작 핑계 대지 말고. 클로이, 네 생각을 말해.”

그늘져 어둑어둑한 숲에는 아무도 없었다. 속내를 털어놓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클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공작이 되어서 백성들을 다스려 보니까…… 알겠더라고. 군주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그리고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첫 1년은 압박감에 잠을 자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혼자 다스리는 게 아니라 다른 공작들과 함께였지만, 그 부담감은 누군가 덜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매 순간 번민했다.

“그런데 너는 언제나 망설이지 않았잖아. 옳은 결정만 내렸잖아. 네가 해온 일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처럼 불완전하지 않은 존재가. 공국의 안위를 생각할수록 완벽한 존재가 필요했다. 테오는 그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존재였다.

자신의 유약함을 드러낸 클로이가 상기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듣고 있던 테오는 나지막이 물었다.

“내 태생 예언 기억해?”

“기억해.”

테오의 태생 예언은 금언령에 붙여졌으나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당시 황태자에 이어 두 번째 황후 소생으로 태어난 황자에게 그런 흠이 달렸으니, 황권을 약화해 권력의 전복을 노리던 귀족파에게는 매력적인 가십이었다. 엘바차 남작가에 입양된 평민인 클로이도 들었을 정도였다.

“전부 다 기억하는 거 맞아?”

“기억한다니까. 이미 이루어진 것까지 합해서 세 개나 받았잖아.”

“그런데 넌 왜 나를 믿는 거지?”

“그거야…….”

‘제국의 명맥을 끊을 자’는 이미 이루어진 예언이다. ‘구원에 종언을 고할 자’는 추상적인 만큼 실현 가능성이 작았다. 그리고 마지막 예언, ‘용을 죽인 검에 의해 추락할 자’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클로이는 테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언은 상관없어. 천공은 아주 훌륭하게 무명 공국을 다스리고 있고, 더 나아가 대륙 전체를 돌보고 있으니까. 이보다 더 믿음직한 군주는 있을 수 없어.”

“믿음직하다라. 그래서 자꾸만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건가.”

테오는 짙푸른 눈동자로 클로이를 응시했다. 그 시린 색채에 그녀가 몸서리쳤다.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성을 잃어버리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세계를 이끄는 힘은 예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어느새 두 사람은 냉궁에 도착했다. 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클로이를 내버려 둔 채 냉궁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바람이 휘몰아치며 테오의 기척이 떠나갔다. 클로이는 석상처럼 굳은 채 테오의 말을 곱씹으며 멀거니 서 있었다.

* * *

동녘의 수해 지역에 도착한 테오는 조소를 머금었다. 몇 달 전 빗물로 문드러졌던 대지는 검붉은 화염에 바싹 말라붙었다. 불길로 튼 둥지의 한가운데에서 레드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진체 곳곳 탁하게 변색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테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꽃이 위협하듯 날름거리며 불티를 튀었으나 그에게는 조금도 닿지 못했다.

“꼴이 말이 아닙니다. 재앙이 될 준비는 다 마치셨습니까?”

-닥치시오!

화룡은 몸집을 키우듯 비늘을 세웠다. 그래 봤자 테오의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투명한 붉은빛을 띠던 비늘의 태반이 탁한 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화룡은 테오가 웃자 격렬하게 소리쳤다.

-나일 리 없습니다! 당신이 있는데 어째서! 왜 내가 재앙이 되느냔 말입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결국 다 자연의 이치인 것을.”

혀를 쯧쯧 찬 테오가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다른 신들과 달리 인간 모습 그대로가 진체인 그는 불에 타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불바다가 꽤 아름다웠다.

-재앙은 당신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내가……. 당신만 아니었다면!

화룡의 눈이 검붉게 물들었다. 불온한 기운에 이성이 먹히는 게 보였다. 테오가 나직이 다른 이를 불렀다.

“수룡이시여.”

그러자 땅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불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수룡이 나타났다. 그는 힘을 쓸 준비를 하는 듯 인간의 형상에 비늘이 조금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의 물빛 외눈이 착잡한 심경을 담고 화룡과 테오를 차례로 응시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먼저 대화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야겠지요. 불이 더 번지지 않게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화룡을 죽이시려는 건…….”

“굳이 신살 신화를 얻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수룡은 작게 안도한 뒤 작은 용이 되어 불바다의 끝자락으로 날아갔다.

테오는 수룡이 충분히 멀어지고 나서 움직였다. 이성을 잃기 직전인 화룡에게 신력으로 구현된 창을 겨누었다.

“얼마나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화룡이 브레스를 머금고, 천공은 바람의 창을 내질렀다.

* * *

이안은 근래 인생 최대의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테오가 날 사랑한다고 했어!’

며칠 전 함께 사랑을 나누며 속삭인 테오의 고백은 이안이 그간 알게 모르게 느끼던 갈증을 싹 가시게 했다. 지금까지 테오의 비언어적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들은 사랑한다는 말에 이안은 푹 빠져 버렸다.

‘테오가 나를 사랑한대. 그리고 나도 테오를 사랑해…….’

마음 같아서는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테오가 천공과 깊게 연관된 이상 비밀 연애를 유지해야 했다. 이안은 이것도 나름대로 스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날 이후 천공에게 불려 나간 테오가 벌써 사흘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공성을 돌아다니며 들은 바에 따르면, 천공이 화룡과 싸우고 있는 듯했다. 아마 테오도 현장에 있는 모양이니 언제 돌아올지는 미지수였다.

‘신들의 싸움에 애꿎은 우리 테오가 다치면 어쩌지. 약한 애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사흘이나 이어졌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하물며 그 천공이 사흘이나 고전하고 있다니, 분명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리라.

천공의 꿍꿍이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재앙이 되는 중인 화룡을 응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안은 클로이를 찾아갔다. 천공을 지원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지나가는 시종들에게 물어보니 안 그래도 클로이를 포함한 공작들이 이 사태를 두고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바쁘다고 문전 박대당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웅님.”

공작들만 모인 회의실에서 지클린데가 대표로 이안을 환영했다. 다른 공작들도 예를 갖추었는데 표정이 그리 밝지는 못했다. 특히 언제나 쾌활한 성격이던 클로이는 눈 밑에 짙은 그림자까지 깔린 상태였다.

“천공과 화룡신이 전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벌써 사흘째 진행 중이라고요. 걱정돼서 그러는데 자세한 상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동녘 공작의 기사들이 올린 보고에 따르면 일대가 불바다로 변해 진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수룡신께서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계시는지, 갑자기 생겨난 물길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고 있습니다.”

“동녘 공작의 기사들이면 마법사일 텐데, 그들도 진입을 못 한다니…….”

이안은 무거운 얼굴로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클로이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피했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동녘 공작? 클로이? 왜 그러십니까?”

“음. 아니, 그게…….”

클로이는 계속해서 이안을 훔쳐보았는데 시선이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용살검은, 잘 있습니까?”

“미리내요? 미리내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요.”

이안이 미리내를 검집에서 살짝 뽑아 보여주자 클로이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검집에 가려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지클린데가 클로이를 추궁했다.

“용살검은 왜 찾습니까? 천공과 관련 있는 일입니까?”

그 질문에 이안은 이 자리에 있는 공작 모두 천공의 태생 예언을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용살검과 천공을 바로 연결 지을 수 없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천공께서 떠나시기 전에…….”

클로이는 적당히 얼버무리려다가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다. 계속 신경 쓰였던 듯 조금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녀에게서 전해 들은 천공의 질문에 공작들은 심란해했다.

“왜 자꾸 믿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슐레이만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언급했다.

“분명 공국이 하나의 왕이 아닌 다섯 공작이 통치하는 이유는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횡포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하나 천공께서는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꾸만 본인을 저지하도록 유도하시는 것 같아 의문입니다.”

“저는 알 것도 같습니다.”

로디온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는 연신 이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옛날에, 뭐, 여러 일이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염려가 많으신 거겠지요.”

보다 못한 이안이 점잖게 말했다.

“천공의 태생 예언을 말씀하고 싶으신 거면 괜찮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헉. 어, 어떻게…….”

“그건 비밀이고요. 어쨌든 서녘 공작께서는 천공이 태생 예언 때문에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로디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이번엔 클로이를 보았다.

“그리고 동녘 공작께선 미리내가 천공께 큰 위협이 될 거란 생각을 하셨고요.”

클로이가 애써 씨익 웃었다.

“안 그러실 거죠?”

“뭘 말입니까?”

“천공과 싸우신다거나…….”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네요.”

여차하면 주문이라도 영창할 것 같던 클로이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다른 공작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안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천공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그렇게 믿는 겁니까?”

“영웅님, 그건 저희에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지클린데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천공께서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기상을 예보하거나 공국을 돌봤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누가 그분이 행하신 일을 선이 아니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위선으로 시작해도 결과가 선하다면, 그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천공의 선함을 믿습니다.”

이안은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지클린데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천공의 선함을 믿는 것과 선함에 의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스스로 무언가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천공을 도우러 가겠다고 해봤자 반대할 게 뻔했다.

이안은 천공의 목적을 의심했으나 여기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접근 방법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냥 믿고 맡기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까 서녘 공작께서 천공은 스스로 믿지 못하기에 믿지 말란 말을 한다고 하셨지요.”

“네.”

“여러분이 그 불신을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천공이 스스로 신뢰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잖습니까.”

공작들끼리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안은 일장 연설을 펼치는 것처럼 눈을 빛냈다.

“동녘 공작에게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까지 말씀하셨다면서요. 이건 일종의 도움 요청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힘을 내고 있지만, 천공으로서의 업무는 부담이 클 테니까요. 게다가 천공은 아직 20대 초반이지 않습니까.”

“공작 중 가장 어리긴 합니다.”

“젊은 나이에 짊어진 큰 부담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제가 제일 잘 알 겁니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존재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동료입니다.”

공작들은 예상한 대답이 나오자 잠시 침묵했으나 이안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여러분은 천공에게 누구보다 필요한 존재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로 할지도 모르죠. 언제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신과 싸우는데,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겨우 본론을 꺼낸 이안은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고뇌를 담은 정적이 그들 곁에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지클린데가 의견을 내놓았다.

“저는 반대입니다. 영웅님의 전반적인 의견에는 동의하나, 이번에는 아닙니다. 신과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대결입니다. 우리가 가봤자 방해만 될 것입니다.”

곧이어 로디온이 지클린데의 주장에 동의하고, 슐레이만은 중립을 표방했다.

“도움의 종류를 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일반 병사들을 데려가 봤자, 불에 타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클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는 가지 말라는데, 심장은 가라 하네요. 남녘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능력 있고, 불구덩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몇 명만 소수 정예로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이안과 미리내를 보았다.

“가신다면 영웅님이 가장 강력한 전력이 되겠지만…… 용살검을 두고 가시지는 않겠지요?”

“미리내와 저는 한 몸이라서요. 별일 아니면 천공을 겨눌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늦지 않게 어서 갑시다.”

지클린데는 그들의 결정이 불만스러워 보였으나 막지는 않았다. 출정 인원은 소드마스터인 이안과 마법사인 클로이, 마법을 배운 동녘 기사 십수 명뿐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가기 위해 이안에게 보급되었던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했다. 클로이가 스크롤의 좌표를 동녘의 수해 지역으로 재조정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슐레이만의 배웅을 뒤로하고 일행들은 순서대로 스크롤을 찢었다. 빛무리에 휩싸여 이동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싫어, 싫어, 싫어……!

검붉은 불꽃을 머금은 화룡이 연신 날개를 떨었다. 레드 드래곤의 거체는 마법을 이용해 비행 중이었다. 작은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띄운 노림수였다.

그러나 하늘을 다스리기에 천공(天公)이라 불리었으니. 하늘은 테오의 영역이었다.

슈우우욱-

화룡이 가르던 바람이 흩어졌다. 아무리 빠르게 비행해도 도달하는 곳마다 공기가 희박했다. 공기가 있어야 타오르는 불길이 자꾸만 꺼져갔다. 아무리 브레스를 뿌려도 오래가지 못했다.

-싫다! 재앙이 되고 싶지 않아!

파앗!

바람을 머금은 창이 오른쪽 날개를 부러뜨렸다. 비행에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중심을 잡거나 방향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신체 일부였다. 화룡은 잠시 버티다가 신력으로 날개를 복구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같은 부위를 또 공격당하고 말았다.

-이런 악랄한!

“공중전을 시작한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바람이 테오의 말을 전해주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바람은 빠르게 왔다 사라졌다.

화룡은 그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도를 높였다. 이미 하늘의 끝에 다다른 높이였다.

‘차라리 공기가 없는 곳으로 가자.’

고도가 높아질수록 땅이 공기를 붙잡는 힘은 약해진다. 그쯤부터 하늘이라고 칭하기 어려운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이 바로 세계를 담는 그릇인 우주이자 세계와 세외의 경계. 즉, 신화 방벽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어떻게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가 재앙이 되겠지. 재앙을 물리친다면 내가 재앙이 되는 일은 없을 거야.’

파아앗!

또다시 날아온 창을 마법으로 겨우 막았다. 쓰면 쓸수록 탁해지는 탓에 신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큰 제약이었으나, 공기가 없으면 천공 또한 신력을 쓰기 어려울 터. 아직 신이라고 할 수 없는 만큼 신력을 쓰려면 매개인 공기가 필요했다.

“도망치는 겁니까? 신력을 쓸수록 재앙이 되어가면서…… 방벽 밖으로 나가시려고요?”

비웃음 가득한 전언에도 화룡은 이를 악물고 우주로 나아갔다. 우주로만 나가면 인간인 천공에게 더 불리하다. 둘 다 신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가 이길지 불 보듯 뻔했다.

파앗!

‘그걸 알기에 천공도 필사적으로 공격하는 것일 테지.’

마침내 공기 한 줌 없는 우주에 다다른 화룡이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았다. 테오는 하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신력 없이는 우주로도 나올 수 없었다. 화룡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나 잘난 척하시더니 어쩔 수 없는 인간이셨군요. 공기 없이는 살 수도 없는 연약한 피조물.

테오가 뭐라 대꾸했으나 인간의 목소리는 공기 없는 우주에 울리지 못했다. 화룡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당신은 마법조차 배우지 않았잖습니까. 거기서 날 공격할 수단은 전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난 아니지요.

화룡은 비행에만 쓰던 마력을 끌어모았다. 강력한 인력(引力)이 작용하며 우주를 떠돌던 운석이 끌려왔다.

초장거리 광역 마법이 단거리에서 발동하는 만큼 피격 범위는 줄어들겠지만, 운석을 직격한다면 저 인간은 살점 하나 남지 않고 으깨질 것이다.

그러나 메테오를 완성하기 직전, 천공은 검지로 화룡을 가리켰다. 태평한 미소가 걸린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이는 모양이 화룡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이 세계에서 나보다 강한 염원을 가진 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끌고 가는 힘은 예언, 즉 염원이지요.’

화룡은 천공의 손에 잡힌 장창을 보았다. 그 장창에는 신력과 함께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곧 다른 예언자를 모두 죽인, 이 세계의 유일한 예언자가 예언했다.

[화룡은 장창에 날개가 찢겨 추락할 것이다.]

장창이 던져졌다. 화룡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이 세계의 모든 인과의 흐름이 예언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 바람이 불고, 닿을 리 없는 인간의 염원이 하늘 끝에 닿았다.

으지직!

-아아아악!

장창이 화룡의 날개를 갈기갈기 찢었고, 거체를 띄우던 마법은 완전히 해제됐다. 화룡은 장창에 날개가 찢겨 추락했다.

-아아악! 으아아아아!

콰아앙!!

대지가 뒤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부딪히고 나서야 화룡은 인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전신의 뼈가 부서진 고통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사흘 내내 비행하면서 마법을 쓴 탓에 마력도 아슬아슬하게 남았다. 이 상처를 수복하려면 신력을 써야 했다.

“그만두시죠. 그러다 정말 재앙 되실라.”

화룡은 간신히 눈을 떴다. 작은 인간이 어느새 눈앞에 와 있었다. 아니, 저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세계를 수호하는 사룡신이라더니. 고작 인간의 손에 셋이 떨어져 버렸군요.”

-다, 당신은…… 이미 재앙이었던 거야.

“그럴 리가요.”

테오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더니 무언가를 휙 던졌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병에서 나온 액체가 화룡의 비늘에 스며들었다.

화룡이 기함했다.

-이걸 왜?

“당신은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테오의 손짓에 따라 바람이 대량의 마력 회복 물약을 화룡에게 퍼부었다. 진의가 의심스러웠으나 화룡은 일단 뼈부터 붙였다. 테오는 딱 운신이 가능할 만큼의 물약만 준 뒤 멈췄다.

“폴리모프할 여력은 있겠지요?”

-젠장.

물약에 흠뻑 젖은 화룡은 일단 요구에 따라 인간의 모습으로 화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테오의 손에 목을 틀어 잡혔다.

“큭!”

“재앙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이, 이거 놔……!”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당신이 재앙이 되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화룡이 눈을 홉떴다. 검게 물들어가는 붉은 눈동자와 창공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마주쳤다. 천공은 그저 덤덤하게 웃었다.

“당신이 가진 신화 방벽의 지분을 나에게 넘기십시오.”

“무슨……?”

“그러면 당신 대신 제가 먼저 재앙이 될 겁니다. 영웅이 있는 한 이 세계가 멸망할 일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화룡은 천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앙이 되어 영웅의 손에 죽겠다고요? 그게 당신의 목적입니까?”

“제 목적은 언제나 ‘예언을 이루는 것’입니다.”

불현듯 천공의 태생 예언 중 하나가 떠올랐다. ‘구원에 종언을 고할 자’. 이 세계에서 신화 방벽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 신화 방벽을 없앰으로써 예언을 하나 이루고…….

‘용을 죽인 검에 의해 추락할 자.’

영웅의 손에 의해 죽는다면. 영웅이 용살 신화를 소모한 뒤 천룡과 신화 방벽의 신화를 얻는다면. 그렇다면, 영웅은 이 세계의 새로운 신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은 재앙이 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화룡의 눈에 떠오른 열망을 보며 테오는 웃음을 삼켰다. 곧 화룡은 그에게 신화 방벽 지분을 넘겨주었다. 깔끔한 거래였다.

“제, 제게 볼일은 이제 끝나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목이 붙잡힌 화룡이 살짝 저항했으나 천공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인간화한 화룡을 훑어보며 말했다.

“잠시 제 시종 노릇을 해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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