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어리석은 왕의 피가 (3/13)

3장 어리석은 왕의 피가

천공은 이번에도 이안의 요구를 곧장 수용했다. 강해지기 위한 실전 경험을 시켜줄 출정 일정이 잡혔다. 그뿐만 아니라 먼 지역을 빠르게 다녀올 수 있도록 텔레포트 스크롤까지 대량으로 지원했다.

이런저런 지원을 하면서도 천공이 이안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외박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천공은 두 번째 기록 때문에 나에게 죄책감을 가진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챙기는 건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남녘의 바다.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물결 사이로 시커먼 생물들이 떠오른다. 최근 남녘의 해변을 점령했던 물고기와 오우거를 뒤섞은 듯한 몬스터 떼가 바다로 밀려난 채 거품만 부글거렸다.

해변은 몬스터의 사체로 가득했다. 그중 절반에 가까운 수를 이안이 베어냈다.

“고생하셨습니다, 영웅님.”

“정말 대단한 실력이셨습니다!”

함께 싸운 남녘의 기사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이안은 쑥스러워하면서 검집에 미리내를 집어넣었다. 새하얗고 은으로 장식된 검집 또한 첫 출정을 기념하여 천공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크르륵!”

그때 시체 사이에 숨어 있던 몬스터 한 마리가 이안의 뒤에서 기습했다. 기사들이 놀라 검을 치켜들었으나 몬스터가 너무 가까웠다. 그러나 이안은 미리내를 뽑지 않고 슬쩍 뒤를 돌아볼 뿐이었다.

슈욱-

“쿠웩!”

멀리서 화살 하나가 날아와 이안 옆을 스쳐 몬스터의 머리를 꿰뚫었다. 주변 기사들이 놀라 술렁이는 가운데, 이안 혼자 담담하게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한참 떨어진 방책 위에 서 있던 테오가 슬쩍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해양이 오염되지 않도록 몬스터의 사체를 끌어모아 불태웠다. 마법사들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약초를 뿌려 정화한 뒤 바다 쪽으로 날려 보냈다. 동족의 9할이 죽었으니 저 해산물 몬스터는 몇 년간 이쪽으로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진지로 복귀하니 궁병들 사이에서 테오가 걸어 나왔다. 궁병들은 테오를 경외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안도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선봉에 선 이안 옆까지 날아올 만큼 강하게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터였다.

“테오, 아까는 고마웠어. 너 활 정말 잘 쏘더라.”

이안의 인사에 테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병사들의 집중력을 위해 얼굴을 베일로 가린 채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 배려심이 자만이 아님을 아는 이안은 축하 연회를 마다하고 영웅성으로 돌아갔다.

둘 뿐인 성에 오자마자 이안은 테오의 손을 살폈다.

“괜찮아? 오늘 나 때문에 무리했잖아. 다치지는 않았어?”

“괜찮습니다.”

온종일 말을 안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이안은 마디가 살짝 부은 손가락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정작 본인은 팔다리에 잔부상을 입었으면서 테오의 작은 물집에 제가 더 아파했다.

테오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안이 주는 관심과 염려는 달콤했다. 심하게 걱정 끼칠 생각은 아니지만 가벼운 상처 정도는 내버려 두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남녘의 해변을 시작으로 이안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몬스터를 잡았다. 봄의 번식기가 지나면서 몬스터가 급증하는 시기라 그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됐다. 거기에 어지간하면 따라가서 뒤를 받쳐주는 테오 덕에 다칠 일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서인지 이안의 경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소드마스터도 오르기 어려운 경지다. 여기서 더 강해지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래도 난 이미 한 번 경험했으니까 빨리 검강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급함은 독.

남몰래 미리내에게만 속내를 털어놓자 검이 점잖게 말했다. 미리내는 이안에게 다음 글귀를 읽으려면 검강, 즉 검기를 쏘아내는 경지에 오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마법도 없는 세계에서 태어나 소드마스터가 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니 차근차근 나아갈 것.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내는 언제나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미리내에게도 테오를 향한 마음만큼은 차마 털어놓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수련 중에도 테오를 생각하는 시간이 자꾸만 늘어났다. 테오를 생각하다 보면 흐름은 자연스레 천공으로, 그가 남긴 글귀로, 글귀에서 본 기록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기억 속 이안이 살던 냉궁은 세레나의 자료보관소였다. 그가 갇혔던 방은 찾지 못했으나 외관이나 내부 구조는 크게 바뀌질 않아 겨우 알아보았다. 그의 목이 떨어졌던 자리가 바로 천공성 외원이었던 셈이다.

이안은 오직 테오 때문에 영웅성을 떠나지 않고 남았다. 그가 없었다면 이 불쾌한 공간에서 어떻게든 벗어났으리라.

영웅성과 천공성의 외원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나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안은 영웅성의 후원을 보며 자신이 외원에서 걸었던 길을 떠올리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써야 했고, 자연스럽게 테오를 떠올리는 날이 늘었다. 적어도 테오만큼은 그 기억과 관련 없어 보였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7월 중순. 태풍이 발생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연례행사처럼 테오는 여름 감기에 걸려 버렸다.

“그렇게 아픈데 누워 있어야 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참지 말고 그냥 기침해. 난 감기 잘 안 걸리니까.”

테오의 여름 감기는 한 번 걸리면 몇 주는 떨어지지 않았다. 열과 두통, 기침을 동반하니 좀 누워 있으면 좋겠는데 테오는 기어코 이안을 수행했다.

벌써 4번의 여름 내내 그 꼴을 보아온 이안은 특단의 조치로 자신의 행동반경을 테오의 방 근처로 제한했다. 이안이 자신의 방에 떡하니 앉아 있자 잠시 고민하던 테오도 결국 침대에 누웠다.

“봐, 이렇게 누워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나까지 다 편해지네.”

이안은 테오의 목까지 이불을 꼭꼭 덮어주었다. 그는 열감기는 땀을 쭉 빼고 자야 낫는다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방법으로 테오를 간호했다. 언제나 자신을 돌봐주던 상대를 보살피려니 아주 신이 난 기색이었다.

이안은 찬 물수건으로 테오의 이마와 뺨의 열을 식혀주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해서 이 열이 떨어질 리는 없었다. 테오가 걸린 건 여름 감기가 아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계속 누워 있을 테니, 영웅님께서도 가서 쉬시지요.”

“환자를 혼자 두고 어떻게 그래.”

“혹시라도, 아주아주 만약에라도 감기가 옮는다면 천공 각하께서 경을 치실 겁니다.”

이안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천공이 자신에게 너그러워도 직접 만나지 못하는 이상 테오가 혼나는 걸 막기는 어렵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으나 테오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이래서야 충분히 쉴 수 없을 터였다.

“알았어. 그럼 내 방 가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불러.”

이안은 열을 재는 척 테오의 뺨을 쓸고는 후다닥 나갔다. 테오의 얼굴에 열이 더 오르고 말았다.

* * *

테오가 걸린 병의 원인은 태풍이었다. 태풍같이 커다란 자연현상은 천공이 제어한다고 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범위와 발생 기간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것은 천공이 아니라 천룡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천공이 여의주의 힘으로 기상을 조종하거나 예보할 수 있다고 알고 있고, 테오 또한 그렇게 알렸다. 반대로 기상이 테오와 여의주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숨겼다.

태풍이 발생하면 덩달아 여의주의 기운이 강해지고, 여의주를 제어하는 테오에게 영향을 끼쳐 아픈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재해급 태풍이 예정되어 있기에 좀 크게 앓아누웠다.

천공이 여의주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고 휘둘린다는 사실은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태풍 기간은 약 3주 정도. 지난 몇 년간 테오는 이 기간에도 쉴 새 없이 이안을 수행하고 천공 업무를 보았다. 이안 외의 사람에게 아픈 사실을 숨기는 건 베일 하나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올해 유독 아픈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이안의 걱정이 엄청나게 불어나 버렸다는 것이다.

“안 돼. 절대 반대야.”

“하지만…….”

“그, 그렇게 예쁘게 쳐다봐도 안 돼! 아픈 애가 어떻게 출정을 가?”

그 아픈 애가 가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은 출정이었다. 24살 먹은 건장한 청년에게 애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재해에 가까운 태풍의 피해를 막으려면 천공이 가서 힘을 써야 했다. 태풍에 여의주를 동화시키면 태풍도 훨씬 빠르게 진정되니, 몸의 호전을 위해서라도 꼭 가야 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이안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안은 테오를 침대 밖으로도 못 나오게 했다. 흐느적거리며 내려올라치면 냅다 잡아 침대 위에 눕혀 버렸다. 평소라면 이 정도 힘에 당할 리 없는 테오가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니 이안은 마음이 아팠다.

“봐. 내려올 힘도 없잖아. 텔레포트로 간다고 하더라도 일주일이나 걸리는 출정이라니! 심지어 태풍 지역으로 간다니! 차라리 내가 대신 가는 게 낫겠어.”

안 된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여도 마법을 못 쓰는 이안은 강풍에 날아가고 말 것이다.

테오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음을 피력하고 싶었으나 이안이 건드리기만 해도 힘이 빠졌다. 심리적인 각오가 조심스럽게 미는 손길에 무너지는 것이다. 심지어 접촉할수록 열이 오르는 통에 이안의 걱정을 불식시킬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안의 병간호를 받으며 행복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아무리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테오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심이 조금 들어간 결정이기도 했다.

“천공도 무심하시지, 아픈 애 데려갔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나라면 절대 안 그래. 다 나을 때까지 침대 밖으로 절대 안 내보냈을 거야. 너도 아무리 주군의 명이라지만 그러면 안 돼. 차라리 내 핑계를 대서라도…….”

이안은 침대에 앉아 한쪽 팔로 상체를 지탱한 채 테오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테오가 손을 뻗어 이안의 양 뺨을 잡았다. 그리고 이안이 놀라 도망가기 전에 단숨에 코앞까지 잡아당겼다.

“어, 어?”

테오 위로 이안이 반쯤 엎어졌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테오는 촉촉한 밀빛 눈동자로 애절하게 속삭였다.

“저를 보내주세요.”

동그란 눈의 꼬리를 축 내리고 절절한 목소리로 말하니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열기가 훅 끼쳤다. 선이 고운 입술의 움직임이 이안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발.”

언제나 하얗던 얼굴이 발갛게 물든 병약해 보이는 미청년의 애원은 강력했다. 이안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테오는 그의 뺨을 잡은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러곤 그 상태로 만족스럽게 살짝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 어? 엉?”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이 테오의 손가락이 이안의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안은 테오가 미는 대로 밀려났다. 그가 얼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테오는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양손으로 뺨을 감싸 쥔 이안이 꽥 소리쳤다.

“지, 지, 지금 이거 미인계지? 미인계도 쓸 줄 알았어?!”

“아, 큰 소리를 들으니 두통이…….”

“헉, 미안.”

이안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어마어마했다. 언제나 담백하던 테오는 사실 미인계의 달인이었다. 생각해 보면 테오처럼 똑똑한 사람이 굉장히 유용한 장점-얼굴-을 사용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저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저 이제 옷을 좀 갈아입겠습니다.”

아직도 미인계의 여파에서 해롱거리던 이안은 테오가 그렇게 말하며 팔목의 천을 풀자 허둥지둥 방에서 나갔다.

그는 복도 벽에 뺨을 대고 식히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막아야 한다고 중얼거리다가 테오의 촉촉한 눈망울을 떠올리고 가슴을 부여잡길 반복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예쁘지. 천사인가? 아니, 미의 신인가?’

처음 테오를 봤을 때도 같은 종족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외모에 놀랐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한 상태로 미인계까지 당하니 황홀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이안은 자신이 꼴사납게 코피를 흘리지는 않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건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봐도 찬양할 만한 외모였다. 신이 7일 동안 정성스럽게 빚고 만족하여 다시 7일을 내내 감상했을 것만 같다.

기실 이안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상형에서 얼굴이 크게 중요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테오는 논외였다. 테오의 장점을 꼽으라면 열 개도 넘지만 그중 외모를 절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힘겹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테오는 벽에 붙어 있는 이안을 보고 흠칫 놀랐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홍조가 가득 돌았다. 미인계의 효력이 예상보다 강력했다.

‘내 얼굴이 마음에 찼나 보군.’

어려서부터 타고난 제 얼굴을 잘 사용해 온 테오도 이 순간만큼은 꽤 안심했다.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 이안의 미적감각은 이곳과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반응을 보아하니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테오는 베일을 둘러 얼굴을 가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살짝 뒤를 본 이안은 그제야 미혹에서 풀려났다.

“……무기는 안 챙겨?”

“태풍에 활을 쏘며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까 심란하네.”

이안이 시무룩한 얼굴로 잔소리했다.

“천공께서 바람을 다루신다고 하니, 날아가지 않게 그분 곁에 잘 붙어 있어. 식사랑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서 일하지 말고 쉬고. 조퇴할 수 있으면 조퇴하고…….”

“유념하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한 말 지켜. 기다리고 있을게.”

그는 입을 앙다물었다가 심호흡했다.

“베일 걷어서 열 좀 재도 될까?”

테오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베일을 걷어 테오의 뺨에 손등을 댔다. 걱정스럽게도 여전히 열기가 뜨끈뜨끈하게 올라왔다. 테오가 잠시 눈을 감고 시원한 손등의 감촉을 즐겼다.

“……다, 다른 사람한테는 미인계 안 쓸 거지?”

“보통은 쓸 일이 없습니다.”

테오는 눈을 감은 채 나른하게 말했다. 천공은 미인계 같은 걸로 회유할 필요 없이 명령만 내리면 충분했다. 애초에 본격적인 미인계를 쓴 건 테오에게도 처음이었다.

이대로 방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테오는 이안의 배웅을 받으며 영웅성을 떠났다.

* * *

약 5년 전. 거대한 대륙을 제패했던 제국은 이제 천공성을 중심으로 사 등분된 무명 공국으로 전락했다.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제국 시절에도 종속되지 않고 버티던 왕국과 부족들이 보기에 만만해진 것이다. 다소의 희생을 감수한다면 대륙의 패자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부푼 꿈이 사방에서 자라났었다.

그 헛된 꿈이 산산이 조각나게 된 것은 천공의 치세가 시작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천공은 기상 예보를 발표하며 자신의 권능을 온 세계에 알렸다.

천공의 완벽에 가까운 통제 아래서 자연현상이 주는 경외감은 점점 천공에게로 향했다. 이것만으로 많은 이가 현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천공은 여유롭게 때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기회가 올 것을 알았다.

그리고 천공 치세가 시작된 구세력 796년의 여름. 천공은 크고 작은 태풍을 잠재우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단순히 예언에 그치지 않고 재해를 다스리는 천공. 감히 그에게 맞설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천공은 무명 공국을 이끌어 나갔다.

동녘을 통치하는 공작, 클로이는 천공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을 써도 수백㎞ 떨어진 터라 테오의 윤곽만 겨우 보였다. 그는 태풍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평온한 듯했다.

“당연하지. 원래 태풍의눈은 고요한 법이란다.”

“앗, 그렇습니까?”

마법 수식이나 공부했지 자연현상, 특히 재해라 불리는 태풍의 중심이 어떤지는 공부한 적 없는 클로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을 읽힌 게 부끄러웠다.

상대방은 너그럽게도 화제를 잇지 않았다. 2m가 넘는 장신의 키와 긴 물빛 머리카락을 가진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왼쪽에만 박힌 물빛 외눈이 클로이를 내려다보았다.

태풍의 영향권 바깥에 있다고는 하나 그들 위로 두꺼운 먹구름이 자리 잡고 손가락 굵기만 한 장대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특히 바람은 마차까지 뒤덮을 것처럼 거셌다.

그러나 한 사람과 한 존재는 평온하게 들판에 서서 천공과 태풍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빗방울과 바람은 조금도 닿지 않은 채였다.

“수룡신께서 매년 보살펴 주신 덕분에 수해가 크게 줄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클로이가 열심히 웃으며 말하자 수룡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매년 듣는 이야기로구나. 그리고 나야 천공의 일을 도울 뿐이잖니.”

1차로 천공이 태풍의 강도를 줄이면, 수룡이 땅 위로 흐르는 물을 조절해 2차 피해가 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둘 다 중요한 일이었으나 천공이 없었으면 수룡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저만한 신력을 다루기란 어렵지. 인간 기준으로도 어리신 분이 참 대단해.”

신이 보이는 꾸밈 없는 감탄에 클로이는 자기가 칭찬을 받은 양 뿌듯해했다.

천공이 태풍 안에서 하는 일은 단순히 비와 바람을 조절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태풍으로 땅이나 나무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살피고 최대한 평야 지대로 이끌었다. 수맥과 지류의 흐름을 파악하여 물이 넘치지 않게 조절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경 쓸 일이 많으니 천공이 태풍 기간만 되면 예민해지는 게 당연했다.

“흐음, 남쪽에서 오는 기척은 없네요.”

“네가 걱정하던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일대가 텅 비었어.”

지클린데가 남녘 공작 쪽 반천공파의 기습을 걱정하길래 따라와 봤는데 무사히 넘어갈 듯했다. 하기야 클로이 같은 고위 마법사가 아닌 이상 태풍을 뚫고 진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클로이는 뿌듯하게 천공을 살폈다. 멀리서 천공이 전진 방향을 살짝 트는 것이 보였다. 천공에게는 한 발자국 정도의 변화지만, 태풍 전체로 따지면 수㎞가 옆으로 움직인 셈이었다.

순식간에 클로이와 수룡이 태풍 범위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우왁.”

클로이는 전개하던 마법을 강화하며 팔랑이는 로브 자락을 붙잡았다. 수룡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지탱해 주며 신력을 일으켜 클로이를 보호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여쭈어봐도 될까요?”

감사 인사를 한 클로이가 그새 젖은 옷을 말리며 물었다. 수룡은 물끄러미 보는 것으로 질문을 허락했다.

“제가 보기에 천공께서는 신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아직 인간이신 겁니까? 그러니까, 왜 신이 되지 못하신 걸까요?”

“답해야 할 게 많은 질문이구나.”

수룡은 하나뿐인 물빛 눈동자로 천공을 응시했다. 태풍 영향권 안이라지만 그의 눈은 천공의 모습을 똑똑히 비추었다.

“신에도 종류가 있단다. 세계를 창조해 낸 창조신, 그 세계에서 태어난 탄생신. 그리고 피조물이 신화를 쌓아 권능을 얻은 영웅신. 나를 비롯한 용들은 모두 탄생신이란다.”

“그, 천룡신께서도요?”

“그래.”

천룡은 이 세계의 탄생신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신이었다. 수룡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 언제나 유감을 표할 뿐, 천공을 향해 적의나 악감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클로이는 천룡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한데 천공처럼 다른 신의 신화를 빼앗아 신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내가 꽤 오랜 시간 세외(世外)를 살피지 않았다지만, 그쪽에도 이런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천공께서 오롯한 신이 되실까요?”

“글쎄, 그건 천공의 의지에 달린 일 같다만……. 너는 천공께서 신이 되시길 바라느냐?”

클로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건방지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천공께서는 신의 자리에 어울리십니다.”

“어째서?”

“누구보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니까요.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수룡은 미소를 지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신이라고 해서 언제나 피조물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수룡은 사랑을 빙자해 제 피조물을 학대하는 창조신도 본 적 있었다.

“하나 이것은 저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저는 천공께서 인간으로서 할 일을 다 마치신 뒤에 신좌에 오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할 일이라…….”

수룡의 외눈이 깊게 침잠했다. 그는 천공이 여의주를 무리하게 억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신화를 복속하려 할 뿐 계승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이 세계를 증오했다. 그 증오가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타당하여서, 수룡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오늘따라 텅 빈 오른쪽 눈구멍이 욱신거렸다.

* * *

“오셨군요.”

세레나는 오늘따라 담담한 얼굴로 이안을 맞이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처음으로 그를 직시했다. 그녀 뒤에 있는 창문으로 햇빛이 가늘게 드리우면서 미묘하게 다른 두 눈동자의 색이 두드러졌다.

“바로 이동하죠. 설명은 가서 하겠습니다.”

천공이 없을 때의 세레나는 겁을 먹지도,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인 태도는 모두 천공에게서 기인했다는 것처럼. 진정한 그녀의 모습은 이렇듯 차분하고 기품이 흘렀다. 이안은 괜히 서먹해져서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레나가 향한 곳은 1층의 구석진 창고였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먼지투성이였지만, 한 상자에 달린 손잡이는 깨끗했다. 세레나는 그 상자 안에 있는 또 다른 상자의 자물쇠에 품에서 꺼낸 열쇠를 꽂았다. 소리 없이 열린 상자 안에는 새로운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열쇠를 가지고 다른 방에서 자물쇠 달린 서랍을 찾았다. 그 서랍에는 역시 열쇠가 들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모양, 같은 재질의 열쇠만 열 개 넘게 찾았다.

열쇠들은 언뜻 봐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다. 열쇠가 있는 장소도 꽁꽁 숨어 있어서 순서를 정확하게 외우지 않으면 찾는 장소로 가기 힘들 것 같았다.

마침내 세레나는 낡은 오르골에서 찾은 열쇠를 1층 로비 벽난로 안쪽에 있는 열쇠 구멍에 넣었다. 그러자 안쪽 벽이 밀리면서 사다리가 나왔다.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제 속도가 느리니 조금 천천히 내려와 주십시오.”

“알았어. ……그런데 그냥 처음부터 오르골 열쇠를 준비해 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재투성이가 된 세레나가 치맛자락을 털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곳이 중요한 장소라는 느낌이 퇴색되지 않습니까.”

“오, 일리 있네.”

가벼운 말로 긴장을 풀려 한 의도와는 달리 세레나는 뻣뻣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안은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세레나를 따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사다리는 제법 길었고 내려갈수록 어두컴컴했다. 그나마 벽에 드문드문 발광석이 박혀 있어서 발을 헛디딜 일은 없었다.

도착한 곳은 서늘한 지하 서고였다. 마법으로 관리되는지 쾌적한 공기에 이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은은한 발광석의 빛이 곳곳에서 빛났다.

“이곳은 약 6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서고입니다. 둘러보세요.”

이안이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서고는 연대가 다양한 책장이 줄지어 있었고, 책장마다 두루마리나 서책이 가득했다. 서고 한가운데에는 널찍한 책상도 하나 놓여 있었다.

책장에 붙은 연대표를 살피니 두루마리는 600년도 더 된 물건이었다. 두루마리를 먼저 만들다가 뒤늦게 이 서재를 만든 모양이었다.

가까이에서 책장을 살피던 이안은 희미한 혈향을 느꼈다. 그러나 주변에 피가 묻어 있는 곳은 없었다.

“혹시 이것들 모두…….”

“펼쳐보시죠.”

이안은 아무 서책이나 집어서 펼쳤다.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하얀 종이 위에 붉은색 글씨가 선명했다. 글씨에서 풍기는 생생한 혈향에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두 피로 적힌 거야?”

“그걸 피라고 할 수 있다면, 네. 그렇습니다.”

이안은 거북한 마음이 들어 책을 내려놓았다. 세레나도 이 공간이 싫은지 얼굴이 창백했다. 그녀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구세력 1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영웅님의 기록을 모아놓은 장소입니다.”

“이게 전부?”

“147개의 두루마리와 325권의 서책을 보관 중입니다. 본래는 더 많은 기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안은 입을 벌렸으나 쉬이 질문하지 못했다. 세레나는 혼란스러운 그를 배려해 자신이 아는 바를 전부 설명했다.

“영웅님께서 악룡을 잡은 직후 모종의 이유로 신들께서 영웅님께 내려진 축복을 비트셨습니다. 영웅님께서는 사망 시 24세의 육체로 돌아갑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는 7년마다 영웅님을…… 말하자면 ‘회귀’를 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세레나는 본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으나 이안은 알아챘다. 그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받은 회귀 축복. 그가 죽으면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신들이 그 축복을 비틀어서 세계를 내버려 두고 그의 육체만이 회귀하게 만든 것이다. 믿기 힘든 사실에 이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축복이, 비틀렸다고? 7년마다 회귀시켰다면 루키오가 나를…… 설마 800년 내내……?”

순간 두 번째 기록이 떠올랐다. 미리내를 들고 자신의 목을 베던 루키오의 후손. 제정신이 아니던 과거의 자신.

무언가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다. 이안은 치솟는 분노를 참으며 먼저 근본적인 원인부터 찾았다.

“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런 거지?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는 초대 황제 폐하의 일기가 남아 있습니다.”

세레나는 책장이 아닌 책상에 놓여 있던 일기장을 보여주었다. 이안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루키오의 글씨체에는 슬픔과 회안이 가득했다.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내가 그의 숨통을 끊고 모든 죄업을 짊어질 수 있다면, 그의 고통은 이어지지 않을 텐데……. 처음으로 신이 원망스럽다.]

[그는 나와 동료들을 항상 한결같이 대한다. 이제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어제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구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영원히 7년의 시간에 박제되겠지만, 나와 동료들은 흙으로 돌아가겠지. 혼자가 될 그가 너무나 걱정스럽다.]

[이제 동료들도 몇 남지 않았다. 수룡신께서 주신 예언이 그에게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일기 사이사이에는 같은 문장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영웅의 행복으로 말미암아 제국이 번영하리라.]

잉크가 번져 뒷면까지 물들 정도로 반복해 적은 이 문구에서 강한 염원이 느껴졌다. 자신을 향한 루키오의 걱정에 이안은 코끝이 찡했다.

“일기에 쓰인 것처럼 영웅님께는 예언이 내려졌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셔도 황실에서 영웅님을 보필하기 위한 조치였지요. 실제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대 황제들은 다분히 노력했습니다.”

세레나는 두루마리 몇 개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그 기록에는 영웅이 얼마나 극진히 대접받았는지, 비록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이 세계에 정착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쓰여 있었다.

이안은 머리가 아팠다. 오랜 친우의 일기와 이 기록들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에게 남은 기억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게 다 내 기록이라고? 실감이 나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시간보다 잊어버린 시간이 훨씬 많은 거잖아. 그리고 이건 왜 피로 적힌 거야?”

“그건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세레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먼저 기록이 이렇게나 많은 이유는, 영웅님께서 회귀하실 때마다 ‘7년의 기억’이 따로 떨어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수룡신께서는 영웅님께서 신에 가까운 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신화의 ‘기록’처럼 기억이 남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화 기록’은 보통 기록물이나 어떠한 매체의 형태를 띠지만, 영웅님의 기억은 엄밀히 말해서 기록이 아니기에 결정의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세레나의 손가락이 서책에 닿았다가 황급히 떨어졌다. 그 동작에서 숨길 수 없는 꺼림칙함이 묻어났다.

“황실에서는 결정을 잉크로 만들어 그 기억을 기록했습니다. 언젠가 영웅님께 전해 드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억을 전달받은 이안은 몹시 우울해했고, 영웅이 행복해야 제국이 번영한다는 예언에 따르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결국, 황실은 언젠가부터 이안에게 기억을 전달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이계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안은 그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어도 한결같이 원래 세계를 그리워했다. 심지어 이따금 황궁을 탈출해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쌓이고 쌓여,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영웅님의 명성은 퇴색되고 황실의 부담은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예언 때문에 영웅님을 내치거나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고심하던 황실은 최후의 수단으로…… 염원초를 사용했습니다.”

예언자가 염원을 불어넣어 재배하는 염원초. 황실 예언자들은 황명에 따라 강력한 염원초를 재배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평범하게 행복을 기원하는 말이 수많은 예언자의 염원이 되자, 이 염원이 담긴 염원초는 강력한 약이 됐다. 이 염원초를 먹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황실은 영웅님을 감금하고 주기적으로 염원초를 섭취시켰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서책이…… 그때의 기록입니다.”

세레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조의 죄업이 후대까지 이어져 수치가 되었다. 이안은 믿기지 않아 그녀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곧, 그가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

“그것뿐만이 아닐 거 아니야. 전부 솔직하게 말해.”

세레나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졌다.

“황실은 황권 강화를 원했습니다.”

악룡을 쓰러뜨리고 세계를 구원한 일은 연호(年號)를 바꿀 정도로 위대한 업적이었다. 이안을 행복한 바보로 만든 황실은 그의 업적까지 탐냈다.

해서, 영웅이 7년 만에 악룡을 잡았다 하여 7년에 한 번 오는 추룡제를 입맛대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본래 추룡제의 마지막 순서인 연극에서는 영웅으로 분장한 기사가 악룡으로 분장한 사형수를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황실은 영웅을 초대 황제로 바꾸어 황가의 일원이 맡게 했습니다. 심지어 보고에 보관되던 용살검을 사용했으며, 악룡은…….”

“그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세레나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그때의 기억을 되찾았으므로.

두 번째 기록에서 왜 그를 동정하던 시녀가 울었는지, 왜 검은 분장을 하고 외원까지 걸어 들어갔는지, 왜 사람들이 그를 보고 욕을 하고 야유했는지 모두 이해가 됐다.

7년에 한 번, 영웅이었던 이안은 사형수가 되어 미리내를 든 황족의 손에 공개 처형당한 것이다. 황가의 편의를 위해, 황권의 강화를 위해.

다른 세계에까지 와서 세계를 구한 대가는 이리도 처참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참지 못한 이안이 숨을 헐떡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모두 그가 흘린 피였다.

“루, 루키오의 후손들이 어떻게 나한테! 왜 아무도 나를! 내가 구한 세계는……!”

누구보다 믿었던 동료의 후손은 그의 업적을 앗아갔고, 그를 원래 세계로 보냈어야 할 신들은 외면했으며, 그의 고난은 이 세계에서 잊혔다.

이안이 얼굴을 감싸 쥐며 울부짖자 세레나가 무릎을 꿇었다.

“지난 시대의 후예로서 영웅님께 사죄드립니다.”

그녀가 보닛을 벗자 짧은 금발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이안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루키오의 머리색이었다.

“역시 황족이었구나.”

“예. 지금은 멸망한 파네트 제국의 세르티아나 파네트가 인사드립니다. 제 사죄로 모든 죄가 사라질 수 없겠으나 마음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길 빕니다.”

세레나는 이마를 바닥에 대며 사죄했다. 이안은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버석하게 갈라졌다.

“사죄한다고? 내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허망하다. 정말로 사죄해야 할 사람들은 다 죽고 없어졌는데.”

“…….”

“일어나. 네게 사과받기 싫어. ……나는 아직도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아.”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레나는 감히 입을 열 수 없었고, 이안은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바빴다.

‘내 모든 노력이 이다지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구나.’

이안은 찬 바닥에 무릎 꿇은 세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측은지심이 들다가도 발광석의 어슴푸레한 빛에서도 색을 잃지 않은 금발을 보자 욕지기가 치솟았다.

‘루키오. 그리운 내 친구.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러나 그에게 죄지은 이는 이미 모두 죽었다. 여기서 세레나를 징벌해 봤자 분풀이에 불과하다.

문득 이안은 처음 자신을 보자마자 기절했던 세레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를 불편해하면서도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죄책감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세레나는 이안과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선조들과는 다르게.

‘정신 차리자. 죄의 주체를 헷갈리지 말자. 징벌도 용서도 할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자.’

이안은 찔끔찔끔 자꾸 나오는 눈물을 열심히 찍어내며 속으로 되뇌었다.

루키오와 세레나, 그리고 그에게 죄지은 황족은 모두 다른 존재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머리가 식고 사고가 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798년? 799년? 그때까지는 추룡제, 에서 내가 죽은 거야? 그러다 천공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안은 세레나가 고개를 젓기 전에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는 799년 1월 1일에 깨어나 테오를 만났다. 테오는 천공의 최측근이니 그전에 반란이 일어난 게 맞았다.

“반란은 794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796년 천공이 황제의 목을 베고 제국 시대의 종막을 선언했으며, 798년 12월 31일에 진행된 추룡제에선 사형수 처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799년 1월 1일에 깨어났다는 건, 천공이 나를…….”

이안은 불현듯 떠오른 예감에 흠칫했다. 그가 깨어났을 때 곁에 있던 건 천공이 아니라 테오였다. 어쩌면 천공이 아닌 테오가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세레나는 여전히 무릎 꿇은 채 조심스럽게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천공의 성향상 다른 이에게 영웅님을 맡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추측하기조차 죄스러우나 그때만큼은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 그런가.”

이안은 미묘하게 안도했다.

“내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을 정도로 신경 썼다면, 아예 안 죽게 하는 건 불가능했을까? 내가 왜 7년 회귀를 반복해야 하는지는 모르지?”

“죄송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이안은 대화 내용과 루키오의 일기를 복기했다. ‘동료들을 한결같이 대한다’라는 내용이 있었으니 악룡을 잡은 기억을 가진 채 회귀한 다음, 회귀 시점부터 7년간의 기억을 다음 회귀 때 잃어버리는 듯했다.

불현듯 추룡제 때 보았던 음식상과 그 앞에 놓인 텅 빈 대접이 떠올랐다.

“계속 피 냄새가 나서 묻는 건데, 그 기억 결정이라는 거 혹시 혈석 같은 거야?”

“……예, 맞습니다.”

목을 베어 흐른 피로 만들어진 혈석이 기억 결정인 모양이었다. 이안은 세레나의 나이를 어림하며 망설이다 물었다.

“너도 추룡제 본 적 있어?”

세레나는 입술을 깨물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차마 이안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19세 때 딱 한 번…… 보았습니다.”

“황족들은 다 참관한 건가?”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그랬습니다. 보통 14세, 15세쯤부터 참관합니다.”

“그럼 천공도?”

세레나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이안은 날카롭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천공도 참관했었구나. 몇 년도였어?”

“791년…… 천공이 13세 때입니다.”

“반란은 794년부터니까 계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네. 혹시 천공이 왜 반란을 일으킨 건지 알아?”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세레나의 안색이 너무 나빠 보여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책상 옆 의자에 앉혔다. 대체 6살이나 어린 동생인 천공에게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천공과 관련된 이야기는 유독 힘들어했다.

“천공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알면 현재의 목적도 짐작할 수 있을까 해서 물어본 거야.”

“죄송합니다. 최대한 협조해 드려야 하는데.”

“뭐…… 됐어. 모르는 걸 어쩌겠어. 그보다 여기에서 일하는 것도 천공이 시킨 거야?”

“예. 기록을 관리하고 영웅님께서 기억할 만한 기록을 분류하는 게 저의 주 업무였습니다.”

자신의 기록을 전부 읽어봤다는 소리에 이안은 얼굴을 붉혔다.

“재미없는 업무였겠네.”

“재미를 따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종의…… 벌을 받는 거였으니까요.”

세레나는 재차 눈을 내리깔고 고해했다.

“사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행한 일도 아니고 선조의 죄를 정확히 알지 못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에서 진상과 그 피해를 낱낱이 알게 되었을 때, 수치심으로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았습니다. 선조의 죄는 후예가 영화를 누리는 밑바탕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천공이 황제를 그렇게 죽일 만도 했죠.”

“황제면 너의, 아버지 아니야? 괜찮아?”

세레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으나 제대로 미소가 그려지지 않았다.

“정감 넘치는 가족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역시…… 누군가 죽는 걸 지켜보는 건 괴로웠던지라…….”

“음, 어, 일단 알았어. 그만 말해.”

“배려 감사합니다.”

그녀는 떨리는 팔을 연신 문질렀다. 찬 바닥에 오래 앉아 있던 탓에 안색이 파리했다.

“이만 올라갈까?”

“아닙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천공이 없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물으시어 알아보고 가셔야 합니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 거칠게 말하자면 내가 기억을 얻어봤자 몇 년 뒤면 또 잃잖아.”

“다음 추룡제 전에 천공이 무언가 할지도 모릅니다.”

천공을 언급할 때 세레나의 목소리는 한층 낮고 떨렸다. 마치 그가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나 먼 동녘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천공의 계획을 전부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적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정말로 무슨 일이든 해냅니다. 그의 혜안은 따라올 자가 없어서 마치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처럼…….”

세레나는 문득 깨달았다. 바로 자신이 그렇게 조종당했다는 것을. 그녀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어쩌면, 어쩌면 제가 영웅님께 말할 줄 알고 이런 정보들을 알려주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분명 그렇겠지요. 왜 나에게 이런 정보를 주는지 물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저는 스스로 결정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천공의 계획이었던…….”

세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바들바들 떨리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제부터 제 말은 천공이 영웅님께 전하는 정보임을 감안하고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알았어. 그래도 지금까지 천공은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움직였던데, 그 목적에 내가 필요한 걸까?”

“저도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나에게 예언이 있다면서. 내 행복이 제국의 번영을 이끌 거라는. 그 예언을 이루려는 건지도 몰라.”

나름 유력하다고 생각한 가정이었으나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천공은 제국과 황실을 증오했습니다. 이 나라가 제국이 아닌 공국이 된 것도 그 때문이죠. 이제 와서 나라의 번영을 챙길 리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 사람들을 잘 다스리는 것 같던데. 수도만 그런 건가?”

“그건…….”

세레나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이안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넘길 생각이었으나, 천공의 정체나 연심까지 밝힐지는 망설여졌다. 감이 좋지 않았다.

‘녀석은 분명 내가 영웅님께 말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겠지. 그래서 내게 백리안을 주어 살피게 하고,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았을 거야. 만약 내가 천공의 정체를 알린다면 한 방 먹이게 되겠지만…… 나는…….’

과연 계획을 어그러뜨린 그녀를 천공이 가만둘까? 그 천공이 세레나가 일을 그르칠 것을 대비하지 않고 두었을까? 그럴 리 없다고 감이 외쳤다.

결국 세레나는 천공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적당히 다른 이유를 댔다.

“천공은 천룡의 권능을 이어받아 날씨를 조종할 줄 압니다. 그래서 몇 년이고 풍작이 이어진 덕분에 민심이 풍요로워졌습니다.”

“아하, 그래서 이번에는 태풍을 막으러 간 거구나. 그런데 왜 테오는 못 데려가 안달이람?”

“그, 그는 어려서부터 천공의 시종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천공을 잘 알고 있지요. 천공처럼 예민한 이에게 그런 시종은 꼭 필요한 법입니다.”

이안은 테오의 능력과 세레나의 똑 부러진 설명에 감탄했다. 어쩐지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치더라니, 어릴 때부터 황족을 수행하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세레나는 이안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아서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 세레나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안은 고민에 빠졌다.

‘천공이 없을 때가 기회인 건 도망칠 때도 마찬가지야. 천공은 분명 나에게는 잘해주지만,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 생각 직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간간이 기침을 하면서도, 그가 걱정하지 않게 숨을 죽이던.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귀한 미소를 지어주던 그의 시종 테오.

이안은 테오의 미소를 떠올리며 뺨을 문질렀다. 어두워서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약간 뜨끈뜨끈해졌다. 그러나 곧 의문 하나가 그의 머리를 때렸다.

‘테오는 천공의 사람이니까, 내가 도망가자고 하면 곤란하겠지?’

아픈 몸으로도 천공을 수행하는 걸 보면 테오와 천공과의 유대가 생각보다 깊을지도 몰랐다. 이안은 순식간에 막막해져서 힘없이 물었다.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도망간다는 선택지를 빼면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세레나가 정석적인 답을 제시했다.

“더욱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부터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테오는 엿새에 걸쳐 태풍의 힘을 다스렸다. 양손 위에 여의주를 띄우고 사방으로 바람이 나부끼는 모습은 퍽 몽환적이었으나 위치가 태풍의눈이었던 만큼 목격자는 없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여의주 안에 태풍의 힘, 즉 재해의 기운이 그득그득 쌓였다.

‘꽤 많이 모였군.’

테오는 태풍이 전부 흩어지기 전에 재해의 기운을 살폈다. 기운을 흡수하며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여의주를 꿀꺽 삼켰다.

“고생하셨습니다……! 어쩜, 천공 각하께서는 잠시도 쉬지 않으시는지이……. 그 엄청난 체력에 탄복했습니다…….”

수룡 옆에서 태풍을 쫓느라 홀쭉해진 클로이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아직 바람이 거칠었으나 대마법사라 불리는 실력자이니 여력을 남겨둔 모양이다.

테오는 베일 너머로 클로이 옆 수룡을 바라보았다. 수룡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나머지 태풍은 비등비등하니 맡기겠습니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천공이시여.”

수룡의 존대가 불편한 것처럼 클로이는 귀를 문지르며 바르르 떨었다. 뭔가 피조물로서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기분이라 좋지 않았다. 반면 테오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클로이에게 손을 쓱 내밀었다.

“뭐.”

“텔레포트 스크롤.”

“……나 그거 비상용밖에 없는데.”

“마력 회복하면 되잖아.”

“너야말로……!”

뭐라 대꾸하려던 클로이는 테오의 상태를 깨닫고 그냥 스크롤을 내주었다. 아무렴 그저 태풍을 따라다닌 대마법사가 태풍을 억누른 천공보다 피곤할까. 바람처럼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스크롤을 찾는 것을 보면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테오가 텔레포트로 떠나고 수룡과 클로이는 허허벌판에 남겨졌다.

하늘의 먹구름이 서서히 옅어졌고 비를 머금은 풀은 한층 더 싱그러웠다. 촉촉한 풀 내음을 음미하던 클로이는 바닥의 물웅덩이를 없애는 수룡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 있는 신들이 전부 탄생신이면…… 이 세계를 조물하신 창조신은 어디 계신 걸까?’

* * *

클로이의 텔레포트 스크롤은 이동 위치가 천공성 앞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조금도 그립지 않았던 천공성을 올려다보던 테오는 걸음을 옮겼다. 천공성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서였다.

천공성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동녘과 북녘 공작이 사는 성이, 서쪽에는 서녘과 남녘 공작이 사는 성이 위치했다. 주로 황족들이 기거했던 궁들은 화려한 장식품이 싹 치워져 실용적인 성으로 변모했다. 그중 가장 소박한 곳이 남녘 공작, 슐레이만이 사는 남녘성이었다.

슐레이만은 천공의 갑작스러운 행차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집무실에 들어온 천공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내 분명 날짜와 위치까지 지정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더군.”

“예. 제가 못 가게 설득했습니다.”

“반천공파의 불만이 상당했을 텐데 그걸 다 막았다?”

“이래 봬도 건국 공신이니 말입니다. 제 말에 잘 따라주었습니다.”

싫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태풍을 억제하느라 천공이 지치더라도 인간이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실질적인 증거는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천공 근처에 수룡 또한 있을 거라는 말을 흘리니 사기를 떨어뜨리는 건 무척 쉬웠다.

천공은 대놓고 혀를 찼다.

“자네도 클로이에게 물들어 버린 건가.”

“동녘 공은 가장 솔직하게 저희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모두 각하께서 통치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국 이념은 날아갔군. 이러려고 공작을 다섯이나 둔 게 아니었거늘.”

“최고의 선택지가 있는데 무얼 망설이겠습니까. 저희는 왕정의 부활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천공께서 마지막 군주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반란으로 폭군을 몰아낸 이가 하기에는 아이러니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대를 보라. 가장 이상적인 왕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모시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는 천공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왜 내가 이 세계를 잘 다스릴 거라 믿는지 모르겠어. 내가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면서 말이야.”

“영웅님과 관련된 일에만 그러시잖습니까. 전 황제를 생각하면 양반입니다.”

슐레이만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저는 각하께서 왜 부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도, 반천공파로 자기 자신을 견제하는 것도 모두 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까?”

천공은 복잡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대답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슐레이만은 그 눈빛에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붙잡지는 못했다.

‘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 걸까.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걱정하고 계신 건지…….’

부디 많은 이를 위한 선택을 내려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몽환적인 달빛 아래로 겨울의 숲이 펼쳐졌다. 빽빽한 나무에 교묘하게 가려진 공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작은 인영이 상대를 붙잡고 외쳤다.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 네 슬픔과 상실, 두려움을 모조리 기억하마.’

‘내 비록 지금은 어리지만,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될 테다.’

‘그리하여 내가 반드시 너를……!’

영웅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던 테오는 겨우 눈을 떴다. 아직 태풍이 전부 가시지 않고, 엿새를 내리 날밤 지새웠던 탓에 원래 컨디션이 아니었다. 더 자고 싶었으나 오랜만에 꾼 옛꿈에 잠은 도리어 달아났다.

무엇보다 침대 옆에 손님이 와 있었다. 창문을 등져 달빛을 온몸으로 받는 이안이 앉은 채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이 달빛으로 물들어 반짝거렸다. 꼭 오래된 신화를 묘사한 조각상처럼 숭고한 모습이었다.

하염없이 그 모습을 보는데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잠이 든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생각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테오는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테오, 나는 어쩌면 좋을까.”

이안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테오가 다 아는 내용이었다. 예상대로, 그리고 유도한 대로 세레나는 이안에게 그가 알아야 할 것을 적절하게 알려주었다.

테오는 언제나 오로지 이안만을 위한 선택을 내렸다. 이안이 제국과 이 세계에 정을 뗄 수 있도록. 더욱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도록.

그러나 이안은 달빛 속에서 예상과 다른 고민을 털어놓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세계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와 헤어지는 건 더 싫어.”

뜻밖의 발언에 테오는 숨이 멎을 뻔했다. 이안의 단 한마디로 겨우 눌러놓은 감정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지글거리는 욕망이 그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테오는 그것을 다스려야 했다. 감정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므로.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테오는 막 깨어난 것처럼 스르륵 눈을 떴다. 그리고 고뇌에 빠져 주먹 쥔 이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화들짝 놀란 이안을 보며 테오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앞의 말을 제외한, 그의 고뇌만 들은 것처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자신과 이안의 감정을 모르는 척했다.

“그걸 간절히 원하셨잖아요.”

크게 뜨였던 회색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안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테오가 처음 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미소였다.

“응. 그런데…… 만약에 돌아가서 여기가, 그러니까 네가 그리워지면 어쩌지? 우리는 치, 친구잖아.”

“그쪽에도 친구가 있을 겁니다.”

“응. 그렇지만…….”

이안이 원하는 대답이 아님을 알지만, 테오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말로써 틀어막아야 했다.

테오는 잡고 있는 이안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이안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나긋하게 물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나요. 집으로 돌아가시면 행복하실 겁니다.”

이안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테오 또한 창밖의 달을 보며 채근했다.

“갑자기 왜 걱정이 생기신 걸까요. 혹시 제가 없는 사이 기억이 돌아오신 겁니까? 그건 아주 좋은 일이잖습니까.”

“테오, 너는…….”

이안은 테오가 야속한 것처럼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너는 혹시, 이 세계에서 떠나고 싶었던 적은 없어? 아니, 미안. 이상한 말이지. 여긴 네가 태어난 곳인데. 태어난 곳이니까, 이곳에서 사는 게 좋겠지? 나는 그러니까…….”

“아니요.”

테오는 이안의 예상과 다른 답을 주저 없이 내놓았다. 서늘하고 냉담한 어조에 이안이 살짝 놀랐다.

“단 한 번도 이곳이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

“하지만 태어난 곳이니까요. 그러니 살아가야죠.”

어딘가 공허한 목소리는 깊게 체념한 것처럼 들렸다. 이안은 테오의 표정이 궁금한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유독 밝은 달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테오는 작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자신의 운명을 모두 결정지은 사람의 것이어서 이안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영웅은,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남자는-

‘말하면 안 돼.’

테오의 눈이 그렇게 전하고 있는데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테오, 나와 함께 가자. 내 세계로 가자.”

이안은 테오의 미소가 사라졌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재차 말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게. 나는 너를 여기 두고 가고 싶지 않아. 너와 계속 함께 있고 싶어.”

“왜 그런…….”

“너를 좋아하니까.”

한 번 터져 나온 진심은 막을 수 없었다.

“너를 정말 좋아해, 테오. 너를 내 세계로 데려가고 싶어. 너와 함께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진심과 욕심이 구분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안은 칼을 벼리듯 섬세하게 말을 골랐다. 이미 결정지은 운명을 바꿀 만한 말이 필요했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만약, 내게 떠나고 싶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면, 나는 너를 데려가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게.”

이안은 테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심장이 철렁였다. 테오는 단 한 번도 이안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은 적 없었다. 금방이라도 거절의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이안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테오는 이안의 손을 확 잡아끌더니 다른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안은 테오의 눈이 감기는 걸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곧 부드러운 입술이 입술에 닿고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이안도 눈을 꾹 감고 한 손을 테오의 어깨에 올렸다. 두 사람 모두 잡은 손은 절대 놓지 않았다.

서투른 입맞춤이 이어졌으나 상관없다는 듯 둘 다 떨어지질 않았다. 숨이 막히는 대로 이가 부딪히는 대로 적응하며 익숙해졌다. 쾌감보다는 서로 깊게 얽히려는 키스였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입술이 퉁퉁 부을 때쯤에야 입맞춤이 제법 부드러워졌다. 이안은 황홀경에 빠져서 테오의 입안을 탐했다. 이렇게 붙어 있는데도 부족해서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가 테오의 뺨을 붙잡아 당기는 순간이었다. 손바닥 아래로 부드러운 피부와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물기?’

이안이 눈을 번쩍 떴다. 깜짝 놀라 떨어져 보니 테오의 얼굴이 눈물로 온통 축축했다. 한참 전부터 울었는지 눈이 조금 부어 있었다.

“미, 미안해! 내가 뭐 실수했어? 기분 나빴어?”

테오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부었을 눈을 보이기 싫어서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숨을 헐떡이는 게 꼭 훌쩍이는 소리처럼 들렸는지 이안이 펄쩍 뛰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용서해 줘!”

키스하고 난 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이 말 외에 할 말이 없었다. 테오는 고개를 저으면서 눈물이 계속 나는지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 모습이 애틋하고 안쓰러웠던 이안은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테오가 염원초를 먹고 달래달라 졸랐을 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발 울지 마…….”

이 마법 같은 말은 도리어 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테오는 이안이 달래자 금세 눈물이 멈추는 것을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운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었다.

“안 돼요.”

테오는 이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미련마저 없애 버리려는 듯 손도 놓아버렸다. 이안은 테오의 거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저는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안은 테오가 이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저 표정이 자신을 거절하느라 나왔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왜? 너는…… 이곳이 좋지 않다고 했잖아. 떠나고 싶지 않아? 나와 함께 떠나기 싫어?”

테오는 아니라는 말 대신 해야 하는 말을 했다.

“저는 천공 각하께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 세계로는 갈 수 없습니다.”

예상할 수 없었던 대답에 이안은 당황했다.

“종속이라니? 단순히 최측근이 아니라는 말이야?”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 허락 없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못합니다.”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데?”

“제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이안은 그제야 천공이 왜 테오를 부득불 데리고 다녔는지 이해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이 세계를 좋아하지 않는 테오가 이안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건 일종의 저주입니다. 생이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을 저주…….”

“만약, 만약에 내가-”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안의 말을 자르고 테오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비록 제 몸은 따라가지 못해도 마음만은 언제나…….”

테오가 말을 다 끝맺지 못하자 이안이 그를 끌어안았다. 테오를 쓰다듬으면서도 이안의 마음 한구석에선 미련이 부풀었다.

‘어떻게 천공을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 테오를 무사히 데려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천공을…….’

이번에는 아무리 달래도 테오의 눈물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 * *

서녘 지역에 문제가 생겼다. 동녘으로 비와 습기가 몰려 상대적으로 건조해진 땅에 불 속성 몬스터가 나타난 것이다. 까다로운 종류의 몬스터에 날씨도 받쳐주질 않아서 서녘 공작은 지원을 요청했다.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공은 이안을 보내기로 했다.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는 테오는 영웅성 앞까지 이안을 배웅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손잡은 채 걸으니 이안은 처음으로 출정 가기가 싫었다.

“으으, 두고 가기 싫다.”

“저도 따라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직 아픈 애를 데려갈 수는 없지.”

아직 아픈 24세 청년이 쑥스러워했다. 그 작은 표정 변화가 너무 사랑스러웠던지라 이안은 테오의 뺨에 입을 맞췄다.

테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뺨을 가리자 반대편 뺨에도 쪽. 양손으로 감싼 얼굴의 입술에도 한 번 더, 쪽. 테오의 얼굴이 감기가 아닌 다른 열로 달아올랐다.

“이러셔서 열이 안 내리는 것 같습니다.”

타박하는 말에도 개의치 않고 이안은 테오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가지런한 눈썹과 반듯한 이마, 매끄러운 콧날과 뺨을 쥔 손등, 마지막으로 입술에도 쪽쪽대다가 참지 못하고 진하게 입 맞췄다.

입안으로 침입한 혀를 받아들이던 테오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는 배웅이 끝나지 않을 지경이라 일단 이안을 밀어냈다. 밀어낸 테오와 밀려난 이안 둘 다 몽롱한 표정이었다.

“빨리, 빨리 처리하고 돌아올게.”

“네.”

마지막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안은 테오를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꽉 안고 있으니 충족감이 달콤했다.

테오도 이안의 몸에 팔을 둘렀다. 꽤 담백한 몸짓이었으나 속내는 달랐다.

‘보내기 싫다.’

감정이 넘쳐흘렀던 그 날을 기점으로 테오의 마음속에 욕심이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쳤다. 그가 세운 계획과 이루어야 할 예언 따위를 다 내팽개치고 이안을 계속 옆에 두고 싶었다.

‘나를 좋아하는 이안이라니…….’

계획을 모조리 미룬다면 적어도 3년간 이안은 자신의 이안으로 남아줄 것이다. 항상 곁에서 웃어주고 달래주고 입 맞춰주겠지. 어쩌면 테오 곁에 남기 위해 원래 세계를 포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이안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이안은 이미 그렇게 희생되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한 번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테오는 알았다. 그는 절대 3년으로 만족하지 못할 터였다.

‘어떻게든 이안을 붙잡기 위해 미쳐가겠지. 그러니 지금 끊어내는 게 옳다.’

감정적으로 굴어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테오는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팔을 억지로 떼어낸 후 맞잡아 비틀었다.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힘을 주었으나 옷에 가려 이안은 모를 것이다. 겨우 이안에게서 떨어진 테오가 미소 지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안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천공성으로 돌아갔다. 몇 번이나 뒤돌 때마다 테오가 여전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설레는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테오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니. 전혀 몰랐어.’

로디온의 브리핑을 듣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을 때도 이안은 테오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며칠 전 싹이 튼 미련은 의문으로 커져 여러 개로 불어난 상태였다.

‘천공을 만나 설득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 하지만 가능할까? 원리는 모르겠지만 저주에 가까운 힘으로 테오를 종속시켰는데, 천공이 아무리 나를 총애한다 해도 테오를 데리고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을 과연 허락할까?’

여건이 된다면 테오는 이안을 따라 이 세계를 떠날 것 같았다. 일을 벌이기 전에 확답을 받아야 하는 문제지만, 며칠간의 달콤한 시간을 떠올려 보면 거의 확실했다. 테오는 자신의 세계를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안을 사랑했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 내 욕심을 이루고자 이렇게 쉽게 살인을 도구화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이안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죽인 적은 없었다. 테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죄악감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신에 가까운 존재이자 이 세계 권력의 중추야. 그런 사람을 죽였을 때의 여파는 어마어마하겠지. 겨우 구원한 세계가 다시 혼돈에 빠지는 건 싫은데…….’

비록 오랜 시간 이 세계가 그를 외면했을지라도, 그가 한때 구하기 위해 애를 썼던 세계다. 천공의 통치로 맞이한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건 꺼림칙했다.

‘역시 가급적 대화로 설득하는 게 옳아. 안 그래도 문제는 산적해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건 요원한 상태고, 뒤틀린 회귀 축복까지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는군.’

이안은 드넓은 서녘의 대지를 응시했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여름 더위와는 다른 열기가 느껴졌다. 재와 불씨의 냄새가 났다.

‘세레나도 죽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지.’

마른땅을 박차며 그는 어제 테오와 천공에 대해 상담하려 만났던 세레나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천공에게 테오가 종속되었다는 말에 한참을 고민하더니, 혹시 모르니 천공을 죽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천공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적이 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전에 테오가 천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해치지 못할 거라고 했어. 테오는 천공의 목적을 알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천공을 죽이는 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안은 미리내를 휘두르며 천공의 목적을 생각해 봤으나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천공은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을 터였다.

미리내가 불꽃을 휘감은 사슴을 베자 뜨거운 체액이 튀었다. 이안은 무심코 피했다가 검붉은 체액이 떨어진 땅이 지글거리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다른 병사들은 근접전을 포기하고 화살로만 상대했다.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만약…… 내가 천공보다 강해서 그를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다면.’

이안은 몸에 둘렀던 오러를 모두 검으로 모았다. 저 멀리 불사슴이 떼를 지어 달려왔다. 뒤쪽에서 대피하라는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물러났으나 그는 검에 집중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악룡을 잡았던 그때처럼 강해진다면!’

밀려들어 오는 오러에 희열하듯 미리내가 진동을 멈췄다. 이안은 미리내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백색의 오러가 검에서 튀어나와 대지를 부술 듯 달려오던 몬스터 떼를 덮쳤다.

이안은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으로 백여 마리의 몬스터가 반으로 갈린 채 나뒹굴고 있었다.

병사들이 환호하며 화살을 쏘아 확인 사살하거나 물동이를 던져 뜨거운 대지를 식혔다.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인 환호에 피식 웃은 이안은 미리내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세 번째 글귀가 빛을 내며 떠올랐다.

[어리석은 왕의 피가]

이안은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눈을 감았다.

* * *

“으아아아악!”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천공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천공은 지루한 몸짓으로 물 흐르듯 공격을 피했다.

여전히 흐릿한 얼굴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덕분에 천공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이번에 그는 아주 긴 금발을 높게 묶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첫 번째 기억보다 이전 시간인 듯했다.

상대방은 색이 비슷했으나 새치가 섞인 금발을 길게 땋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옷이나 손에 든 미리내를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바로 알 것 같았다. 특유의 금빛 머리카락과 벽안. 황족 중에서도 황제일 것이다.

황제로 추정되는 남자는 검술 실력이 엉망이었다. 자신의 공격을 천공이 모조리 피하자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다 금세 지치고 말았다. 천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의 손목을 쳐 검을 떨어뜨리게 했다.

“으아악!”

검에 달려드는 황제를 걷어차고 천공이 미리내를 잡았다.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검이 허락하지 않는 자는 손을 댈 수도 없을 텐데!”

황제가 체통 없이 바닥을 기어 물러나면 그만큼 천공이 느린 걸음으로 따라잡았다. 먹이를 물기 전 느긋하게 압박하는 뱀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이 극악무도한 것! 내 그런 예언을 받고도 네놈을 살려주었거늘!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내가? 원수로 갚아? 정말로 무도하고 은혜를 모르는 게 누군데.”

천공이 검을 휘두르자 황제의 전신에 검날이 스쳤다. 절묘하게 급소를 피하자 극심한 고통에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 천공은 검면으로 황제의 머리를 후려쳐 비명을 끊었다.

“걱정하지 마. ‘제국의 명맥을 끊을 자’, ‘구원에 종언을 고할 자’, ‘용을 죽인 검에 의해 추락할 자’. 모두 이뤄질 거야.”

“마, 말도 안, 돼……. 에스겔라, 그 예언은…….”

“그 예언? 나에게 예언이 또 있었나?”

호기심이 동한 듯 천공이 황제의 상처 난 허벅지를 밟았다.

황제의 비명이 멀어지고 이안의 시야가 부자연스럽게 흐려지며 장면이 달라졌다. 장소는 같았으나 시간이 흐른 듯 황제가 널브러져 있었다. 천공이 황제를 비웃었다.

“그녀의 염원이 나보다 약했던 걸까? 그도 아니라면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주 작아 들리지 않았다. 돌연 광소를 터뜨린 천공이 검을 떨쳤다. 죽어가는 아비를 향해 그는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예언을 이루려면은-”

“사, 살려…….”

“아주 간절히 염원해야겠지.”

빛살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황제의 목이 떨어졌다. 동시에 이안도 기록에서 빠져나왔다.

* * *

기록을 본 시간은 아주 찰나였지만, 이안은 몇 초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순식간에 입력된 정보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안은 자신이 정리한 전장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전장에서 그 잠깐은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쾅!

이안은 반사적으로 오러를 몸에 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안이 검강으로 만든 몬스터의 시체 너머로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가 서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불사슴과 유사했으나 뿔이 나뭇가지처럼 길고 많았으며 사람처럼 뒷발로 서 있었다. 그것은 불꽃을 휘감은 자신의 뿔을 꺾어다가 병사들을 향해 연거푸 던졌다.

뿔창은 지면에 닿는 순간 터져서 불꽃을 흩뿌렸다. 불사슴들이 죽은 자리에 물을 뿌리러 갔던 병사들이 황급히 흩어졌지만, 기어코 몇 명은 불길에 휩싸였다.

이안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는 검강을 쓴 직후였다. 깨어나고 처음 사용한 기술은 그의 예상보다 오러를 많이 잡아먹었다. 저 기형적인 불사슴을 상대하려면 또 검강을 뽑아야 할 테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웠다.

“물러나라! 어서 물러나!”

이안이 할 수 있는 건 목청껏 퇴각을 외치며 불길에서 병사들을 구출하는 정도였다.

기형 불사슴이 머리를 털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불씨가 후드득 떨어져 불꽃으로 피어났다. 이안은 열기를 이겨내기 위해 몸에 물을 끼얹었으나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그때, 기형 불사슴이 달릴 것처럼 몸을 낮췄다. 이안 역시 기민하게 움직여 몸을 낮추며 오러를 두껍게 뒤집어썼다.

쿵!

순식간에 맞붙은 두 존재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탐색했다. 바위도 녹일 듯한 열기가 뿔에서 뿜어져 나와 이안은 오러를 발출했다. 동시에 가까이서 본 기형 불사슴에게서 무언가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이 기운이 왜 이것에게서……?’

신경이 잠시 다른 쪽으로 쏠리는 사이 기형 불사슴이 머리를 털며 그를 흔들었다. 이안은 버티고 버티다가 지면을 박차 뒤로 훌쩍 물러났다. 불사슴도 똑같이 물러나자 그는 자신의 실책을 인지했다.

‘저대로 돌진하면 나에게 불리하다!’

그렇다고 피하면 뒤쪽 병사들에게 피해가 간다. 다시 거리를 좁히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안은 빠른 판단으로 있는 힘껏 오러를 끌어 올렸다.

기형 불사슴이 투레질하다 바닥을 박차는 순간, 뒤에서 빠르게 날아오는 기운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슈웅-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치듯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것은 정확하게 기형 불사슴을 맞췄다. 상체를 관통당한 불사슴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서 땅에 쓰러졌다. 놈의 가슴에는 푸른 창이 꽂혀 있었다.

스스슥-

가벼운 짐승이 바닥을 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의 앞으로 내려서서 달렸다. 불투명한 베일 아래로 선명한 금발이 반짝였다. 뒷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천공 각하께서 오셨다!”

병사들이 울며 환호했다. 천공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창을 기형 불사슴의 머리에 꽂았다. 치이익, 하고 불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연기가 피어올랐다.

천공이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자 바람이 불며 먹구름이 몰려왔다. 곧 불타는 대지 위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떨어졌다. 상처 입은 땅을 휩쓸 정도는 아닌, 그저 불을 끄고 열기를 식힐 만큼의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방울을 맞자마자 이안은 긴장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미리내를 땅에 박고 겨우 서 있는 그를 흘끗 본 천공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의 기운은 후방 끝자락에서 느껴졌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로디온에게 간 모양이었다.

이안은 허탈했다. 그렇게 자신을 피하던 천공과의 첫 만남이 이렇게 끝났다. 천공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줄 뿐이었다.

* * *

‘영웅 좋아한다는 거 사실 거짓말 아니야? 아니면 내가 그렇게 형편없었나?’

자신에게 배정된 개인 숙소에 들어온 이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천공은 정말 급한 불만 끄러 왔다는 듯 로디온과 대화를 나눈 뒤 그대로 떠나 버렸다. 끝까지 이안은 안중에 두지 않은 행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천공을 설득해야 하나, 싸운다면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것이 다 허망했다.

아무리 자신이 지친 상태였다지만 고전하던 적을 단숨에 해치운 천공은 너무나 강했다. 특히 푸른 창에 담긴 기운이 인상적이었다.

‘악룡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야. 역시 상상 이상으로 강해.’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게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신과 싸워 이겨낸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천공과 대등하게 싸우려면 악룡을 잡았을 때의 스펙을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어려운 실정이다.

‘깨어나고 7년 안에 무조건 회귀해야 한다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3년 하고도 몇 개월 정도. 악룡을 죽인 것도 사실상 운이 좋아서 가능했으니, 그때의 실력이 되돌아와도 천공은 못 이길 수도 있어. 그렇다면…….’

이안은 미리내를 강하게 쥐었다.

‘천공의 목적을 알아내서 협상하거나 방심을 끌어낸다. 부득이하게 싸워야 한다면, 미리내에 담긴 강력한 신화를 이용한다.’

이번 기억에서 천공에게 내려진 예언 몇 개를 알았다. 그중 ‘용을 죽인 검에 의해 추락할 자’에서 ‘용을 죽인 검’은 용살검, 즉 미리내를 뜻했다. 천공과 싸운다면 미리내를 필히 지참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나에게 그런 기억과 미리내를 준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자신을 공격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기록으로 보아온 천공이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차라리 이 또한 목적을 위한 일이라고 보는 편이 나았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안을 이용하려는 것이리라.

또 천공의 예언 중 ‘구원에 종언을 고할 자’라는 것도 신경 쓰였다. 종언이라 하면 보통 끝을 의미하니 ‘구원을 끝낼 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악룡이라는 재앙에서 벗어난 이 세계에 또 다른 재앙이 초래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예언이 이루어진다면 천공은 새로운 재앙이 되고, 천공의 목적은 세계 멸망인 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지만, 긴장을 늦춰서는 안 돼.’

이안은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이상하게 열이 오르는지 조금 더웠다. 그리고 의지를 불태워서 그런가 어디서 타는 냄새가…….

“아니, 진짜 탄내가 나잖아?”

그는 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 쓰느라 체온이 오른 게 아니라 방이 후텁지근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는데도 그랬다.

불사슴 주변에 다가갔을 때와 비슷했다. 이안은 잔뜩 경계하며 미리내를 쥐었다. 숙소는 마을 내에 있어서 민간 피해가 없도록 탄내의 원인을 발견하는 즉시 유인해야 했다.

-경계를 풀라, 인간 영웅이여.

이안은 소리가 난 쪽으로 검을 겨누었다. 붉은색 바탕에 검은 반점이 난 도마뱀 한 마리가 하얀 회벽에 붙어 있었다. 타는 냄새는 그 도마뱀으로부터 나고 있었다.

파스슷.

도마뱀이 새빨간 눈으로 그를 보며 불꽃을 날름거렸다.

-나는 대화를 나누러 왔을 뿐이니.

“화룡신……?”

도마뱀 모습을 한 화룡의 분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룡의 기척이 매우 옅은 것으로 보아 본체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이안은 미리내를 아래로 늘어뜨렸으나 완전히 치우지는 않았다.

“화룡신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그 위험한 검은 멀리 치워주길 바란다. 몹시 거슬리는군.

“성검인 미리내가 말입니까? 무언가 알고 계시는군요.”

화룡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알기만 할까. 그대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왔느니라.

“제가 모르는 것이라……. 예를 들자면?”

-이 세계에 닥쳐올 위협 같은 것.

의도가 의심스럽지만 들어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이안은 미리내를 침대에 두었다. 검날이 화룡을 향하지 않으면서 언제든 뛰어들어 쥘 수 있는 위치였다.

“이 세계가 위험합니까?”

-아주, 위험하고말고. 인간 하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으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확실히 말해주길 원하느냐. 천공이 이 세계를 멸망시킬 작정이다.

같은 추리를 했다고 한들 처음 보는 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를 외면한 적이 있는 이 세계의 신이라면 더더욱.

이안은 더위 혹은 긴장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을 골랐다. 화룡의 기운에서 탄내가 나는 게 자꾸만 거슬렸다.

“쉽게 믿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천공은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당신의 권속으로 인한 큰 재해를 막으셨습니다.”

화룡이 도마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의 권속이라?

“불의 드래곤이시니 권속도 불 속성 몬스터겠지요. 기운을 숨기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숨기지 않아도 무지한 것들은 알아채지 못할 테니. 영민하구나, 인간 영웅아. 그대를 불러내기 위해 권속을 소모한 보람을 느낀다.

“저를 불러내기 위함이라뇨?”

-천공이 워낙에 애지중지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

천공이 나섰다 하더라도 불 속성 몬스터로 인한 피해는 적지 않았다. 병사 수십 명이 다쳤고 일부는 사망했다. 피조물을 지켜야 하는 신이 행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당신의 권속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 또한 마음이 아프나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나와 그대의 만남으로 그보다 많은 생명을 구하리라.

이안은 화가 났지만 화룡을 내치지 못했다. 한편으로 그를 괴롭혀 오던 질문의 답을 구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천공이 왜 세계를 멸망시킵니까? 그에게 그럴 이유가, 그럴 힘이 있습니까?”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이 되는 것. 이미 20년도 더 전에 예언으로써 정해졌지. 천공은 힘을 얻기 위해 천룡의 여의주를 빼앗았고, 재해의 기운을 모으고 있다.

세계에는 수많은 재해가 발생하고, 그중 일부는 힘이 강해져 재앙으로 발현된다. 그런 재해의 기운을 모은다면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한 재앙이 준동할 터였다.

-천공은 여의주로 재해의 기운을 모아 새로운 재앙이 될 작정일 게다.

천공이 지금까지 재해를 막은 이유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게 화룡의 주장이었다.

“그건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천공의 동기가 너무 빈약합니다. 예언은 절대적인 힘이 아니고요.”

-그자는 이 세계의 예언자 대부분을 죽이고, 예언 행위를 금지하여 예언의 힘을 독차지했다. 예언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재앙이 된 것이다. 그리고 따지자면 재앙에게서 세계를 멸망시킬 동기를 찾는 것이 더 터무니없지.

“하지만…….”

-그대가 죽인 악룡에게는 이유가 있었나? 지룡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악룡이 된 것이더냐?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오직 악룡을 죽여 멸망을 막는다는 사명만을 수행했을 뿐이다. 지룡이었던 신이 왜 악룡이 되었는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왜 세계를 멸망시키냐고? 그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다. 재앙이 재앙이 된 이유 또한 생각할 필요 없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화룡이 재를 날리며 열변을 토했다. 도마뱀의 검붉은 피부에 금이 가면서 불꽃이 살짝 새어 나왔다. 타는 것도 없는데 탄내가 진동했다.

이안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신들께서는 천공이라는 재앙을 막지 않으시는 겁니까?”

-천공은 여의주를 가져 신이 될 자격을 얻었다. 언제 신이 될지 모르는 자야. 신은 신을 죽이지 못한다. 만약 죽인다면…… 아주 끔찍한 벌을 받게 되지.

화룡의 어조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이안은 불현듯 퍼즐 하나가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제가…….”

-그대는 악룡을 죽일 당시 신에 준하는 격을 쌓았다. 그래. 그래서 그대도 신벌(神罰)에 준하는 벌을 받았지. 그로 인해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우리는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모든 세계를 아울러 가장 금기시되는 죄인 신살(神殺). 신이 신을 죽이는 죄를 지으면 그 순간부터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 신마저 이지를 잃고 죽음을 바라게 되는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비록 이안이 신은 아니라 완전한 신벌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에 준하는 벌만으로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았으리라.

이안은 악룡을 죽인 직후 온몸에 가해졌던 충격을 떠올렸다. 절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드넓은 세외에서도 그 고통을 버텨낸 신은 한 분 정도였다. 그 신조차 고통에 무너지길 수없이 반복했지. 우리는 그것을 알기에 그대가 계속 고통을 겪도록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시의 수룡과 화룡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없었다. 가장 견문이 넓고 오래 산 천룡조차 신벌만큼은 저어하며 외면했다. 그래서 이안에게 내려져 있던 회귀 축복을 비튼 것이다.

-처음 회귀 축복을 받은 나이부터 시작해 준신벌을 받기 직전까지의 시간만을 반복하면, 적어도 그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었지. 기억이 떨어져 나오는 부작용은 우리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이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화룡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 준신벌을 영원히 받을 수밖에 없습니까?”

-아니.

화룡은 자신 있게 답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 신벌에서 벗어난 신이 나타났다. 그 신은 자신의 신살 신화를 소모하여 신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대도 그대의 신화인 용살(龍殺) 신화를 소모한다면 준신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 신화를, 그것도 신살 또는 용살 신화를 소모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화룡이 콧김을 뿜었다. 마치 이 말을 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신화의 투사라는 개념이 있다. 신화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 신화의 내용이 현실에 투사되는 것이지. 보통은 신화를 투사하여 신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쓰인다.

이안이 이해하기 힘들어 미간을 찌푸리는데도 화룡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신의 영향력이 강해지면 신화 또한 강해지는 선순환이 발생하지. 그러나 투사되는 신화가 그대로 진행되지 못한다면 도리어 약해지고 만다.

흥분한 화룡은 벽에 붙은 채로 팔딱팔딱 뛰었다.

-용살 신화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서 신화를 투사하되, 신화 내용 그대로 진행하지 않으면 된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신벌에서 벗어나신 분도 그렇게 하셨대요?”

-그분이 하신 방법은 그대가 써서는 안 되는 방식이다. 알려고 하지 말아라.

“말씀하신 방법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용을 죽이려다가 말라니. 게다가 이 세계의 용은 당신과 수룡신뿐이지 않습니까.”

-용 비슷한 게 하나 더 있지.

화룡의 말에 이안은 표정을 굳혔다. 결국 저 신이 하려는 말은 처음과 같았다.

-천공을 죽여라. 그는 천룡의 여의주를 다루지만 아직 인간이다. 용살 신화를 투사하면 그도 쉽사리 여의주의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 틈에 인간 상태인 그를 죽이면, 용이 아닌 인간을 죽이는 것이므로 용살 신화는 산화되어 사라지겠지.

“정말로, 신화가 사라질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용살 신화는 강력하나 매우 짧은 신화다. 조금 비트는 것 정도로 빠르게 산화가 진행될 거다.

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화룡의 말에 따르면 천공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명징하다. 이유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대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화룡의 제안에 흔들리는 자신을 인지했다.

“문제는 제가 용살 신화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 아직 모르고 있었나? 그대의 용살 신화는 성검에 기록되어 있다.

“성검? 미리내 말씀이십니까?”

천공이 말한 강력한 신화가 바로 용살 신화였다. 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미리내는 천공이 저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다른 기록들과 함께요.”

이안은 화룡에게 다섯 글귀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생략했지만 화룡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 생각이야 뻔해. 그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대의 신화를 소모하게 하려는 작정인 게야. 자신을 죽이지 않고 용살 신화를 소모하게 한다면 자신을 죽일 방법은 사실상 없으니까 말이야.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글쎄. 아마 다른 기록에 남아 있겠지. 그대는 기록을 전부 보게 되더라도 절대 넘어가지 말도록.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일전에 미리내가 말해주기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글귀는 자신에게 기록된 신화를 다룰 수 있어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 투사라는 것을 할 때쯤에야 마지막 글귀를 읽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믿음이 안 간단 말이지. 모든 기록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화룡은 대답하지 않는 이안이 불만스러운지 꼬리로 벽을 탁탁 쳤다. 그러자 검은 연기와 함께 탄내가 훅 끼쳤다.

손으로 연기를 쫓아내던 이안은 손에 묻은 그을음을 보고 깨달았다.

그에게는 고작 몇 년 전이지만, 이 세계 기준으로 800년도 더 전의 과거. 낯선 세계에 당도하자마자 땅에서 풍기던 지독한 냄새. 대지를 검게 물들이던 그을음. 지룡이 악룡이 되는 순간, 갈빛 몸체를 뒤덮던 그 그을음. 차례대로 그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

“화룡신이시여, 설마…… 재앙이 되시는 중이십니까?”

그 말에 도마뱀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분노 가득한 음성이 이안의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그게 무슨 무엄한 소리냐! 이 몸이 재앙이 되기는 무슨 재앙!

“악룡과 부딪혀 싸워봐서 압니다. 그 그을음…… 지룡신을 집어삼킨 그을음 아닙니까?”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야!

화룡은 격렬하게 부정하며 제 몸을 털어댔다. 불길이 일고 그을음이 허공으로 휘날렸으나 도마뱀의 얼룩덜룩한 부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안의 날카로운 눈에 검은 얼룩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힘들게 세계를 구해냈건만 재해도 재앙도 사라지지 않는군요.”

-아니야! 나는, 나는 절대 재앙이……!

부들부들 떨며 타오르던 화룡의 분신은 곧 회색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화룡의 기척 또한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간 건가. 하긴 지룡신이 어떻게 악룡이 되고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잘 알 테니.’

이안은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그을음과 탄내는 순식간에 빠졌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화룡이 권속을 부려 지른 불. 천공의 권능으로 내리는 비.

세계를 멸망시키는 예언을 가진 천공. 재앙이 되어가는 화룡.

두 존재 모두 소모하길 바라는 용살 신화.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걸까?’

비는 약하게, 그러나 끊이지 않고 내렸다. 화룡의 권속이 뿜은 불이라서 그런지 멀리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안은 비와 재, 그리고 그을음의 냄새를 맡았다. 이윽고 연기가 멈추고 비가 그쳐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그을음이 어디엔가 묻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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