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염원이 자라나는 땅 (2/13)

2장 염원이 자라나는 땅

이안이 어느 정도 미리내를 다룰 수 있게 되자 테오는 천천히 참관 시간을 줄여갔다. 큰 소리로 부르면 언제든 올 수 있는 거리의 방에서 일하곤 했으나 이안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항상 서류를 들고 다니는 바쁜 사람에게 계속 옆에 있어달라고 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시종이라지만 천공에게 따로 업무를 받는 거 보면 엄청 유능한가 봐.’

몸 쓰는 게 주 업무인 이안은 책상에 앉아 몇 시간이고 일하는 테오가 조금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사실 테오는 그렇게까지 바쁘지는 않았다. 시종 테오의 업무는 영웅 수행이 다였고, 천공 테오도 석 달에 한 번 기상(氣象)을 예보하는 것이 전부였다.

평소 들고 다니던 서류는 예보가 맞았는지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의 예보는 95%의 적중률을 자랑했기에 대부분 읽고 넘어가면 되는 부류였다.

그런데도 참관 시간을 줄이는 이유는 이안 곁에 있으면 마음이 자꾸 소란스러워지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천공의 심장에 수련하는 이안은 좋지 않은 자극이었다.

하나, 오늘은 4월 1일. 전 세계의 석 달 치 기상 예보를 짜야 하므로 온종일 바쁜 날이었다. 다시 말해, 정말 일해야 하는 날이란 뜻이다.

그래서 테오는 아침부터 땡땡이를 부렸다.

* * *

“동녘의 클로이 공작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클로이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빈자리를 보고 혀를 찼다. 모이기로 한 시각이 다 되었는데 각 지역의 공작들만 앉아 있었다. 서녘, 남녘, 북녘의 공작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클로이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동녘 공. 오는 길에 천공을 보지 못하였소?”

“못 봤습니다. 이번 분기도 역시나군요.”

“그러게 제가 미리 시종을 풀자고 했잖습니까.”

서녘 공작, 로디온이 작게 투덜거리자 남녘 공작, 슐레이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회의 때마다 천공이 시간 맞춰 오리라는 기대를 품었으나 번번이 좌절당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개인 업무를 처리하던 북녘 공작, 지클린데가 펜을 탁 내려놓았다.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 시종들을 풀어 천공을 찾도록 하세.”

다섯 공작 중 가장 연장자인 그녀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북녘 공작이 대표로 명을 내리자 시종장은 미리 준비해 둔 시종과 시녀를 모조리 풀었다. 영웅성을 제외한 모든 구역에 사람들이 투입됐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시녀 하나가 선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이런 일은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습니까? 천공 각하께서 그리 까다로운 분이신가요?”

선임은 조금 순진하게 들리는 질문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천공 각하를 발견하는 사람은 언제나 시종이나 시녀였단다.”

“하인들이 일을 대충 한 겁니까?”

“그럴 리가. 그저 각하께서 우리 앞에만 나타나시는 거다.”

“그렇군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수긍하는 후임을 보며 선임 시녀는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담당 수색 구역인 동쪽 정원에 도착하자 선임은 한쪽 동산을 가리켰다.

“넌 저쪽으로 가봐라. 난 이쪽을 찾을 테니. 낯선 사람 있으면 꼭 날 부르고.”

“알겠습니다.”

시녀는 열심히 동산을 훑어보았다. 천공 각하를 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긴장됐다. 부디 아무도 없길 바라면서도 한구석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천공에 대한 소문에는 아름다운 외모가 꼭 포함됐다. 순금을 얇게 뽑아 봄볕을 쏘인 것처럼 눈부신 금발과 높디높은 가을 하늘을 닮은 벽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고.

그러나 모든 소문의 시작은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소문 몇 개를 떠올리다 괜히 서늘해진 기분에 팔을 쓰다듬던 시녀는 문득 누군가를 발견했다.

동산의 한편에 작게 조성된 인공 폭포를 들여다보고 있는 시종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봄바람에 가볍게 휘날리는 금발이 목덜미까지 내려왔지만, 어깨너비나 전체적인 비율로 봐서는 남자 같았다.

‘누구지? 신입이 길을 잃었나?’

그녀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거기 계신 시종분! 뭐 하십니까?”

그러자 그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녀는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새파란 눈동자와 유백색 얼굴. 동그란 눈이 앳된 매력을 뽐내면서도, 굳게 닫힌 입매가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이제껏 그녀가 보아온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상이 그저 돌덩이로 여겨질 정도로 완벽하게 조형된 이목구비는 위치마저 조화로웠다.

기존의 묘사로는 부족하여서 어떻게든 새로운 찬탄의 말을 찾아내기 위한 창작의 고뇌를 일으키는 얼굴이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무섭다는 감상까지 들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다 하얘지길 반복하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할 일 없으면 어서 이리로 와요! 지금 천공 각하를 찾고 있는데 좀 도와줘요!”

남자는 선선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시녀는 졸지에 시종 하나를 달고 동산 한 바퀴를 수색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동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녀는 실망할 정신도 없이 정체불명의 시종을 데리고 수색 후 모이기로 한 장소로 갔다. 조금 늦었는지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모인 상태였다. 시종장과 시녀장, 선임들이 모여 수군댔다.

“이번 분기는 탈락자가 많군.”

“짧은 시간 동안 넓은 범위를 수색할 정도로 우리의 수색 실력이 발전했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저 녀석들을 인제 어쩌지?”

시녀장이 가리킨 곳에는 얼이 빠진 채 서 있는 시종들과 시녀들이 있었다. 시종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기는. 오늘은 일단 조퇴시켜야지.”

탈락자의 선임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후임들의 몫까지 일하는 것도 싫지만 더 큰 문제는 아직 천공을 발견하지 못한 거였다. 이 이상한 술래잡기는 언제나 천공의 승리로 끝났었다. 즉, 천공이 질릴 때까지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 인원을 세던 시종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인원이 한 명 많은데요? 아까 모인 인원이 오늘 출근자 전부 아니었습니까?”

“맞을 텐데……? 헉, 설마!”

시종장이 다급하게 인원을 확인했다. 과연, 시종복을 입고 있으나 지독히도 눈에 띄는 자가 하나 있었다. 왜 이제야 발견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천공 각하!”

“허억!”

시종장의 외침에 그를 데려온 시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몇 명도 알아보았는지 기함했고, 한쪽에 모여 있던 소위 탈락자들은 기절초풍할 것처럼 뒤집어졌다.

천공이 그들을 둘러보자 모두 몇 걸음씩 물러나 예를 갖추었다. 그는 탈락자들을 가리켜 명했다.

“천공성에서 일하기에 부적절한 이들이다. 알아서 처리하도록.”

“명 받잡겠나이다.”

시종장과 시녀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렇게 골라낸다고 골라냈는데.’

‘아무리 면접을 잘 보아도 천공 각하의 눈썰미를 따라잡을 수는 없군.’

천공은 이어서 모여 있는 이들 중에서도 몇 명을 골라냈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시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영웅성 인력으로 돌리도록.”

할 일을 마친 천공이 본성으로 향했다.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종장이 신입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수치로 붉어져 있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이번에도 역시…….”

석 달에 한 번 있는 천공과의 술래잡기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천공은 신입 시종, 시녀들 앞에만 모습을 보인 뒤 몇 명을 골라 쫓아내거나 영웅성의 인력으로 차출하곤 했다.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쫓겨난 이들은 부정을 저질렀거나 저지를 예정인 사람이었다.

예전에 몇 번 쫓겨난 것에 반발한 시종을 다시 받아준 적 있었다. 그러면 열에 열은 한 달을 못 채우고 지저분한 사건을 일으켜 쫓겨났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시종장과 시녀장은 천공의 안목을 상당히 신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입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으로 물들었다. 쫓겨나게 된 이들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으나 천공이 두려워 차마 반항하지 못했다. 시종장은 그들에게 추천서를 써주기로 약속하며 위로했다.

“시녀장님, 그럼 저희는 왜 영웅성으로 가게 되는 겁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녀가 물었다. 천공을 몰라뵈고 같이 돌아다녔던 그녀는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

소문 이상으로 아름다웠던 천공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기이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소문이 맞았으니 그 많은 잔혹한 소문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시녀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영웅성은 천공 각하께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시는 곳이지. 그곳은 가장 뛰어난 시종과 시녀만이 갈 수 있네. 아마 자네들이 일을 잘 배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걸지도 모르겠어.”

확실히 근 3년간 들어온 시종 중 영웅성에서 일하는 이들은 큰 사고 없이 업무에 적응했다. 영웅성에서 일하며 바짝 긴장한 덕에 일하는 데 필요한 자세와 태도를 확실히 습득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또 바빠지겠군.’

새로운 시종을 뽑을 기준이나 면접 양식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했고, 영웅성에 갈 인원과 돌아올 인원의 배치 또한 고려해야 했다. 시종장과 시녀장의 눈 밑에 벌써 그늘이 내려앉았다.

* * *

“저기 사랑꾼 오시네.”

회의실에 들어선 테오는 클로이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를 몇 시간이나 기다린 공작들에게 사과의 말이나 인사도 없었다. 공작들은 이미 익숙해진 터라 혀나 끌끌 찼다.

놀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클로이가 샐쭉 웃었다.

“영웅성의 시종들을 3개월마다 바꿔 버리다니. 그렇게 질투가 많으셔서 어떡합니까?”

“영웅님이 고생이 많소.”

슐레이만도 거들며 불만을 표했고, 로디온은 눈치를 보다 고개만 끄덕였다.

“회의 시간에 사적인 주제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시간이 아까운지 지클린데는 클로이와 슐레이만을 말렸으나 그들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테오에게도 질책의 시선을 보냈다.

“천공께서도 적당히 하셨으면 좋겠소. 도무지 회의 시간을 지키지를 않는군.”

“일하기 싫으니 어쩔 수 없소.”

참으로 당당한 답변에 이번에는 지클린데마저 실소했다.

어쨌든 천공까지 모였으므로 회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테오는 원탁에 놓인 세계 전도를 응시하다 눈을 감았다.

그의 분위기가 일변하더니 다시 눈을 번쩍 떴을 때, 눈 전체가 하늘을 그대로 투영한 것처럼 빛났다. 그는 그 상태로 천공성의 북쪽을 가리켰다.

“북녘에서 시작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예보하겠소.”

천룡의 여의주를 소유한 테오가 예보하는 기상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그가 여의주를 얼마나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예보의 적중률을 보면 상당한 수준으로 추론됐다.

석 달마다 주어지는 예보를 받고 백성들은 날씨에 완벽하게 대비한 상태에서 생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날씨를 확실히 안다는 것은 농업, 어업, 목축 등, 분야에 상관없이 무척 유용했다. 특히 농작물 생산량은 언제나 최대치를 찍었고,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로 인한 사고는 옛말이 되었다.

방위에 따라 크게 네 군데로 나눈 지역을 또 도시와 마을, 도회지로 구분해 시간대별로 예보하니 기상 예보는 온종일 걸렸다. 테오의 예보를 받아쓰는 공작과 서기관들은 매번 진이 빠졌고, 테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름이 오기 전, 이 시기에 꼭 의논해야 할 사안이 있었다.

“이번에는 재해급에 가까운 태풍이 오겠군. 작년이 북녘이었으니 올해는 동녘으로 유도하겠소.”

“하필 우리 지역 차례에 재해급이라니. 끔찍합니다.”

전체적인 예보를 보고 흐름을 파악한 테오가 7월 이후를 추측하자 클로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매년 7월에서 8월 사이에는 평균 10여 개의 태풍이 발생했다. 이는 천공이 아니라 천룡이 하늘을 다스릴 때도 막을 수 없던 자연의 이치였다. 그나마 천공 치세에 이르러 태풍이 생성될 지역과 시기를 특정할 수 있게 되어서 피해는 극감했다.

테오는 남, 서, 북, 동 순으로 돌아가며 태풍을 유도했고, 수해 기간에는 세금을 탕감하고 피난을 지원하는 등 백성들의 불편을 최소화했다. 또 그해 땅이 쉰 덕분에 다음 해 농사가 훨씬 잘되곤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큰 태풍이 발생하면 천공이 직접 나서서 그 기운을 억제하니 불만이 크게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고만고만하니 괜찮을 것이오.”

“음, 그럼 동녘에는 한 번만 오실 겁니까?”

“수룡께서도 그쪽으로 가실 테니 나머지 태풍은 그분께 부탁드리시오.”

“일단 알겠습니다.”

클로이는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아직 신이라기에는 부족한 천공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은 수룡신과 화룡신, 단둘뿐이었다. 그 두 신보다 강대했던 천룡신을 무찌르고 여의주를 차지한 천공이라지만 신을 심부름꾼 취급하는 태도에는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수룡신께서 테오 말을 안 듣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참 신통하군.’

언제나 태풍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는 화룡과 달리 수룡은 테오의 의견에 따라 태풍을 쫓으며 피해를 줄이는 데 일조했다. 기상 예보가 도입된 지 5년이 지났음에도 한결같았다.

“태풍을 유도할 넓은 들판을 지정해 줄 테니 그쪽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비워두도록 이르시오. 수룡께서 오시지만 제방과 수도 시설 정비도 잊지 말고.”

“물론입죠. 어느 분과 하는 일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테오는 클로이의 태평한 태도가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 믿지 말라니까.”

“응. 너 안 믿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클로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테오를 가장 믿고 신뢰하는 이는 단연 클로이였다.

테오는 더 대꾸하지 않고 회의를 끝마쳤다.

* * *

천공성에서 영웅성으로 가는 길이 유독 길었다. 테오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한적한 길을 골라 지친 걸음을 이끌었다. 그러나 눈빛은 더욱 날카롭게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천공은 적이 많았다. 인간이었던 그가 신의 힘을 다루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지금은 공포 정치로 찍어 누르고 있으나 언제 불만이 터져 나올지 몰랐다.

막대한 힘을 사용하고 난 오늘과 내일은 비교적 약해지는 시기다. 그래서 일부러 소문을 내 알렸다. 노릴 테면 이때 노리라는 뜻으로. 이미 몇 차례나 그런 시도를 막아냈으므로 효과는 확실했다.

“테오!”

때문에 테오는 이안의 등장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시종 테오는 천공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노려질 여지가 많았다. 괜히 이안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우려되었다.

이안은 그런 테오의 마음도 모르고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받아.”

“이건?”

“후원을 걷는데 예쁘게 폈더라고. 너 보여주려고 따 왔어.”

소담스럽게 핀 은방울꽃 몇 송이가 이안의 손바닥에서 굴러다녔다. 테오가 양손을 내밀자 그 위로 토독토독 꽃이 떨어졌다. 부드러운 꽃잎이 손바닥을 간질여서, 테오는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하느라 오늘 하루 내내 못 만났잖아. 언제나 네가 먼저 나를 찾아오니까 가끔은 내가 널 마중 나가는 게 어떤가 싶어서 왔어.”

이안의 다정함이 이렇게 곤란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테오는 너무 반갑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억양으로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성의 없는 말인가 싶어 살쩍 걱정됐지만 평온한 얼굴색을 유지하는 데 온 집중을 쏟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안은 웃으며 받아주었다.

천공성 내부라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 중 이안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이안이 인사만 짧게 받아주는 사이, 테오는 유심히 그들을 살폈다.

천공일 때와 얼굴은 바꾸지 않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여의주에서 뽑아 쓰는 신력(神力)은 단순히 날씨만 예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처럼 머리색을 바꾸거나 인지를 조작하는 등으로도 쓸 수 있어 유용했다. 신력을 조금이라도 쓰지 못했다면 성내에서도 베일을 쓰고 다닐 뻔했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갈 것 같군. 내일 더 조심해야겠어.’

“많이 피곤하지? 어서 돌아가자.”

“네.”

테오는 영웅성,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신역에 들어서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양손에는 여전히 은방울꽃을 소중히 쥔 채였다.

* * *

테오의 예상대로였다. 반(反)천공 세력은 천공의 기상 예보일 다음 날 바로 움직였다. 아침 일찍부터 이안의 식사를 기미 보던 테오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영웅성의 주방으로 아침 식사를 배달한 시종이 덜덜 떨며 물었다.

테오는 말없이 모든 나물 반찬을 뒤적거렸다. 고소한 기름이나 매콤한 향신료로 버무려진 나물들이 온통 뒤엉켰다. 그중 가늘게 채 썬 나물 몇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쿠당탕!

이안의 입맛에 맞춰 특별히 조리된 12첩 조반상이 엎어졌다. 배달한 시종은 천공의 최측근을 분노케 했다는 데 겁을 먹어 그 자리에 엎드렸다. 테오가 그에게 명령했다.

“영웅님께 가서 오늘 아침 식사가 조금 늦어진다고 전해라. 이유를 여쭈시면 조반상에 가벼운 문제가 있었다고 하고. 담당 시종이 처리하러 간 터라 당분간 네가 수행할 거라고도 말씀드려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던 시종이 고개를 들었을 때 테오는 물론 엎어진 반찬들마저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테오는 신력을 이용해 바람처럼 달려 천공성의 제1조리실에 들어섰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자 한창 바쁘게 일하던 조리사들이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눈부신 금발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거나 조리 도구를 놓쳐 떨어뜨렸다.

“처, 천공 각하!”

“각하께서 어찌 이런 곳에……!”

조리사들을 지휘하던 조리장이 뛰쳐나와 천공 앞에 고개를 숙였다.

“천공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헉, 아이고! 제가 실언했습니다, 각하. 부, 부디 너그러이 용서를…….”

남몰래 천공을 흠모하는 이들이 천공에게 ‘폐하’라는 존칭을 붙이곤 하지만, 정작 천공은 싫어한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가끔 비꼬는 의미로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리장의 태도를 보아 그건 아닌 듯했다.

테오는 그를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영웅의 식사에 염원초를 사용한 자가 있다.”

주방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염원초는 예언자나 강력한 염원을 가진 이가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보통은 예언자들이 자신이나 다른 이의 염원을 불어넣어 재배하는데, 대륙의 모든 식물로 가능했다.

사용처가 워낙 다양한 터라 천공이 집권하고부터는 재배를 금지한 품목이었다. 특히 성내 반입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누군가 천공의 분노를 살 짓을 한 것이다.

“5분 안에 범인을 찾지 못하면 여기 모인 자들의 오른손을 자르겠다.”

그 말에 모든 이의 낯빛이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영웅님과 관련된 일에 천공이 허튼소리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의심스러운지, 오늘 누가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테오는 팔짱을 낀 채 그 촌극을 지켜보았다.

“너 오늘따라 일찍 출근하지 않았어? 염원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너야말로 오늘 지각했잖아!”

“조리장님! 이 자식 손에 풀물 든 것 좀 보십쇼! 유독 선명한 게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불신과 불안, 공포가 뒤섞인 고함이 이리저리 오갔다. 상하를 불문하고 삿대질을 해댔고, 흘러가는 시간은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감정이 격해져서 주먹질까지 오가는 와중에 테오는 자신에게 닿은 시선 하나를 잡아냈다.

“거기 너.”

천공이 입을 열자 끓어올랐던 분위기가 팍 식었다. 다들 시간을 확인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지목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장 말없이 사람들 틈에 서 있던 자였다. 다만 다른 사람들처럼 불안해하며 범인을 찾는 게 아니라, 자꾸만 천공의 눈치를 살폈다.

테오의 바람을 닮은 신력이 그자를 끌고 왔다. 그는 당황하여 발버둥 쳤으나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윽고 목덜미에 단단한 손끝이 닿자 공포에 질려 외쳤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시키는 일, 커헉!”

“시킨다고 해서 영웅의 식사에 손을 대서야 쓰나.”

“사, 여주시…….”

목이 졸린 조리사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댔다. 테오는 손에 준 힘을 살짝 풀었다.

“누가 시켰지?”

“제, 발…….”

“누구냐고.”

“크억, 산을 등, 진 백작가입니다!”

우드득-

조리사의 목이 옆으로 늘어졌다. 동공이 풀리고, 전신의 근육에 힘이 빠져 사지가 축 처졌다. 공포에 질린 얼굴에서 순식간에 생기가 빠졌다.

살고 싶다는 생각에 폭로했겠으나 바로 다음 순간 그의 목이 부러졌다. 아귀힘만으로 목뼈를 부러뜨린 테오가 시체를 던졌다. 힘없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앞으로 음식에 수작 부리는 자는 즉결 처형하겠다.”

고개를 숙인 조리사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테오는 조리실을 빠져나와 자료보관소로 향했다. 미리 문 앞까지 나와 있던 세레나가 즉시 말했다.

“백작은 이미 저택을 떠났다. 아직 수도 내부지만 곧 빠져나가겠구나. 영지로 향하는 것 같다.”

“염원초를 놓친 것은 나중에 따지겠소.”

“내 일이 반천공파 경계만 있는 줄 아느냐!”

역정을 내는 세레나를 무시한 채 테오는 천공성을 빠져나갔다.

휘이익!

바람이 휘몰아치며 테오의 신형이 매섭게 움직였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수십 걸음씩 나아갔다. 사방으로 퍼뜨린 신력이 다급히 달리는 마차 하나를 잡아냈다. 아무런 장식도 달리지 않은 마차는 산을 등진 백작가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쿵!

마차 지붕에 올라탄 테오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온 것이다. 신력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을 상대할 때는 무기가 있는 편이 효과가 좋았다.

“누구냐!”

마침 주변에 백작가의 기사들이 있어서 창 하나를 조달할 수 있었다. 기사를 모두 낙마시킨 테오는 마차 문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콰직-

반쯤 부서진 문을 밀고 들어가니 뻣뻣하게 굳은 백작과 창에 복부를 관통당한 기사 하나가 마주 앉아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기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겨누려 했으나 백작이 막았다.

“그만하게! 상처가 벌어지네!”

그러고는 선량하고 겁먹은 얼굴로 테오를 보았다.

“천공 폐하께서 어찌 저를 이리 핍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나?”

“아, 존칭 때문이라면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워낙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던 터라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겁을 먹었으나 비꼼을 멈추지 않는 게 아직 들켰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테오는 죽어가는 기사 옆에 앉았다. 말과 마부는 건드리지 않았기에 마차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부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멈출까요?”

“그-”

“아니. 계속 가라.”

백작의 말을 끊고 테오가 명령했다.

“늦지 않게 치료사를 만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백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죽을죄라도 지었나?”

“각하께서 화가 나신 것 같아 이대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테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 두고 차라도 마실 것처럼 잔잔한 얼굴이었다. 비현실적인 외모와 비인간적인 면모가 어우러지자 알 수 없는 신성(神性)마저 느껴졌다.

“내가 왜 그대에게 화가 났을지, 그대의 죄를 하나하나 고해하게.”

백작은 불편한 감정을 추스르듯 목을 가다듬었다. 천공이 어디까지 알고 왔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영웅을 건드렸다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다. 차라리 솔직하게 내 생각을 전하는 게 살 방도일 수도 있겠군.’

그는 자신의 오랜 이야기를 꺼냈다.

“각하의 명으로 전국의 귀족 가문이 성씨를 잃기 전, 몬테르고 백작이셨던 부친께서는 천룡신을 뵌 적이 있습니다. 뱀의 몸통에 매의 발과 사슴의 뿔, 사자의 갈기가 달린 모습으로 하늘을 가득 메운 광경에 압도되셔서 며칠을 앓으셨었지요.”

“색다른 경험이었겠군.”

“그렇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종종 그날의 감상을 들려주시며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고, 신은 신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면 신에게 인간의 영역을 망가뜨릴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절대 신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부친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천룡신께 제를 지내 봉헌하셨습니다.”

“지금은 쓸데없이 그럴 필요 없어서 좋겠어.”

백작은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는 듯 백작에게선 일말의 분노마저 엿보였다.

“저에게 죄가 있다면 각하께서 인간일 뿐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가?”

“저는 각하께서 천룡신을 잡았다는 항간의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신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기에 신입니다. 어떻게 여의주를 얻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상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반드시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겁니다.”

천공은 백작의 주장을 묵묵히 들었다. 백작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다듬어왔는지 매끄러운 어조로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정작 천공이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네가 지은 죽을죄가 무엇인가?”

백작은 왜 그걸 묻느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말 자체가 어찌 보면 반역 아닙니까?”

“그것 말고.”

감을 잡지 못하는 백작에 천공이 짧게 혀를 찼다.

“자네는 나를 잘 아는 척해놓고서는 중요한 걸 모르는군.”

천공의 기세가 천천히 일변했다. 무감하던 얼굴에 작은 표정이 덧씌워지니 큰바람이 부는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영웅의 식사에 염원초를 넣은 까닭이 무엇이지?”

“아.”

백작은 그제야 눈치챘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천공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해를 살 만한 일이었으나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삶의 활기를 일으켜 주는 염원이었으니까요.”

“그런 것치고 제법 본격적으로 숨겼더군. 구분하느라 애먹었어.”

백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저 말은 영웅이 염원초를 먹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기대했던 한 방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본래 염원초에 몰래 담으라고 명령한 염원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부풀리는 종류였다. 백작은 영웅의 염원이 당연히 천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염원초를 먹은 영웅이 천공을 공격하는 게 목적이었다.

천공이 영웅을 마음에 두었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영웅이라면 천공도 당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런데 아예 먹기도 전에 막힐 줄이야.

백작의 침묵이 길어지자 천공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나는 신이라고 할 수 없다.”

놀랍게도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천공이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자 손바닥 위에 오색의 영롱한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가장 강력한 신이었던 천룡의 여의주. 백작은 순간 아버지가 느꼈다던 위압감을 그대로 느꼈다.

“여의주에 기록된 신화를 전부 읽을 수 없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내가 천룡이 아닌 천공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따위 것은 상관없다.”

천공이 다시 주먹을 꽉 쥐자 여의주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내가 신 행세를 하는 것이 불만스럽다는 건 잘 알겠다. 그런데 왜 상관없는 영웅의 음식에 염원초를 넣었냐는 말이야.”

“그, 그건…….”

“같잖은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영웅을 이용해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나? 자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감히 아무런 상관없는 영웅을 이용하려 들어?”

천공은 백작이 자신을 업신여긴 것보다 이 사실에 더 크게 분노했다. 심지어 약간의 살기까지 피어올라서 옆에 앉은 기사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여의주에 압도되었던 백작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거칠게 말했다.

“모르는 일 아닙니까! 영웅이 각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다면요? 그렇다면 상관없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각하야말로 태생 예언이 두려워 영웅을 가두고 있는 것 아닙니까!”

백작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이 말해놓고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천공의 기세는 도리어 평온해졌다. 그는 웃음기까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그의 자유를 바라는 이가 과연 있을까.”

천공은 손가락으로 백작을 가리켰다. 부서진 문으로 들어와 백작을 할퀴던 바람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곧 그에게는 한 점의 바람도 닿지 않게 되었다.

백작은 숨을 헐떡였다.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만 그런지 호위 기사를 확인했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긴 후였다.

“나를 친다는 명목으로 감히 영웅을 이용하려 들다니 이 죄는 사형감이지. 안 그런가?”

“숨이…….”

“하나 쉽게 죽으면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겠나. 나는 신이 아니지만, 자네에게 천벌을 내려보았네. 이제 바람은 자네를 위해 불지 않을 테고, 구름 또한 자네에게 그림자를 내려주지 않을 거야. 태양과 달이 어디에서나 자네를 노려볼 것이네. 그런데도 자네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겠지.”

백작은 가슴을 두드리며 천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가볍게 피한 천공이 문가에 가 섰다.

“다른 방법으로는 죽지도 못할 테니 괜히 힘 빼지 말고. 모쪼록 최대한 끔찍하게 죽길 바라.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도록 말이야.”

“영웅을, 그렇게 아끼지만…… 헉, 당신이 붙인…… 시종과, 부, 붙어먹는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죠?”

테오가 비소를 흘렸다.

“붙어먹기는 개뿔이.”

백작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를 자극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테오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천공을 공격하기 위해 영웅을 건드린 백작은 그야말로 끔찍한 몰골로 수도를 떠났다. 그가 아주 천천히 질식사했다는 소식은 한 달 후에나 전해질 것이다.

* * *

테오가 돌아왔을 때 염원초에 대한 소식은 이미 천공성을 몇 바퀴나 돈 뒤였다. 시체가 나온 제1조리실은 폐쇄되었고 소속 조리사는 모두 심문받았다. 거기에 테오가 굳은 얼굴로 성내를 돌아다니니 분위기는 굉장히 경직되었다.

소문을 들은 공작 중 가장 먼저 그를 찾은 사람은 클로이였다.

“얘기 들었어. 이번에는 영웅님한테까지 손을 뻗쳤다면서?”

상대가 예민한 상태라는 것을 고려했는지 지금만큼은 클로이도 장난기 없이 진지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우와 영웅을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했다.

“네가 직접 처벌하긴 했지만, 산을 등진 백작가는 공식 재판에 회부될 거야. 염원초를 어디서 어떻게 재배했는지 알아내서 파기해야지. 조사 중이던 다른 죄목까지 탈탈 털릴 거야.”

클로이는 테오를 슬쩍 보았다. 백작을 처리했음에도 그의 신경은 다른 데 쏠린 것 같았다.

“네 소문은 일부러 더 퍼뜨렸는데, 영웅성을 오가는 시종들은 입단속 해놨어. 괜히 영웅님께 심려 끼칠 수는 없으니까.”

“고생했다.”

“뭘. 영웅님이 우리 천공 각하께서 이렇게 노력하시는 걸 아셔야 할 텐데.”

“쓸데없는 소리.”

테오의 예민한 기색이 조금 누그러지자 클로이가 생긋 웃었다. 테오의 친우로서, 그리고 천공의 신성을 숭배하는 이로서 이번 사건은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처리해야 했다.

“어떻게 염원초를 알아냈는지 좀 알려줄래? 사건 기록에 남겨야 해.”

“먹어보고 알았지.”

“뭐? 그럼 네가 염원초를 먹은 거야? 무슨 염원인데?”

“섭취자가 자신의 염원을 이루고 싶어지게 만드는 염원. 영웅이 자유를 염원한다고 멋대로 생각해, 그로 하여금 나를 공격하게 할 의도더군.”

클로이는 꼼꼼하게 기록하며 테오를 흘끗거렸다. 천공의 염원이라. 물어보긴 무섭지만 궁금했다.

‘분명 영웅님과 관련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뭐가? 내가 뭐?”

훅 치고 들어오는 테오의 경고에 그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묘하게 붉어진 뺨이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테오는 그녀를 흘겨보다가 홱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따라가려던 클로이는 그 방향이 영웅성 쪽이라는 사실을 알고 멈췄다. 작게 꺅 소리를 낸 그녀가 참지 못하고 테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천공 연가 기억하지? 행복하게 해줘야 해! 행복하게!”

“시끄러워!”

사납게 일갈한 테오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클로이는 숨죽여 웃다가 겨우 진정했다.

“아, 이렇게 놀려먹었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

그녀는 너무 웃어 파들거리는 뺨을 주물렀다.

서둘러서 염원초 밭을 불태우려면 백작령까지 직접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천공성에서 나가려던 클로이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어디론가 향했다. 폐쇄된 제1조리실 대신 바빠진 제2조리실 쪽이었다.

‘내일 영웅성 식단은 기력에 좋은 음식으로 보내라 해야지.’

장난과 진심이 한데 섞인 명령을 내린 그녀는 도망치듯 천공성을 떠났다.

* * *

이안은 아침 식사가 늦어질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테오는 완벽주의 경향이 있어서 시간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면 반드시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사람이 테오였다.

“영웅님, 송구스럽게도 오늘 조반은 좀 늦어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한 시종은 테오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시종이 잔뜩 겁먹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테오는 어디 갔어요?”

“부디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영웅님의 아랫사람입니다. 영웅님의 시종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어, 음. 무슨 일인데?”

“조반 조리 중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영웅님 수행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건 시종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안은 시종의 이름을 기억하며 무슨 문제일지 고민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독살 시도였다.

“있지, 테오가 또 내 식사 기미 봤어? 그래서 문제를 알아챈 거야?”

“예, 그렇습니다.”

“괜찮았어? 어디 아파 보이진 않았고?”

시종은 기억을 되짚다가 바르르 떨었다.

“찬을 하나씩 맛보시다가 갑자기 기분이 몹시 상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혹시 걱정하시는 게 독이라면 괜찮습니다. 조리실에서 나오기 전에 은침으로 독이 없다는 걸 모두 확인했습니다.”

석연찮은 기색으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은 새 조반상을 확인하겠다며 식당에서 나가 버렸다. 이안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은침으로 모든 독을 검출하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정말 독이었으면 어쩌지? 저 녀석은 테오 얼굴 보느라 중독을 몰랐을 수도 있잖아.’

이럴 때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닿았다. 친구가 독에 중독됐을지도 모르는데 찾으러 갈 수도 없다니. 이안은 걱정과 불안을 넘어서 조금 화가 나기까지 했다.

아침을 먹고 점심이 지나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테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종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라 죽어가는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한 문제였다면 언제나 그랬듯 금방 돌아왔을 텐데.’

유능한 테오가 이만큼 늦어진다는 것은 평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초조한 나머지 수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간혹 테오가 출장을 갈 때도 이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천공 따라 재해를 상대하는 것이 독에 중독된 것보다 훨씬 위험할 텐데도…….

‘왜 이렇게 속이 갑갑하지? 독에 당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맛으로 느낄 수 있고 즉효성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강한 독도 아닐 거고.’

스스로 다그쳐 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미리내를 휘두르거나 혼자 저녁을 먹을 때도 계속 테오 걱정만 들었다. 이대로라면 잠도 설칠 게 뻔했다.

“테오는 언제쯤 돌아올까?”

“죄송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는 전혀 모르는 거야?”

사실 시종은 점심과 저녁 식사를 챙기러 갔다가 대강의 사정을 주워들은 상태였다. 하지만 동녘 공작의 입막음으로 이안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돌리고 돌려서 겨우 한마디를 해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천공 각하께서 진노하셨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이미 시체 하나 치웠다는 얘기도……. 하, 하지만 영웅님의 시종께선 직속 수하시니 괜찮으실 겁니다.”

이안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시종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나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안은 오늘은 일찍 자겠다며 시종을 내보낸 후, 한참 기다렸다가 방에서 나왔다.

저녁까지는 그래도 오가는 사람이 있지만, 밤이 깊은 영웅성은 인기척 하나 없이 텅 비워진다. 3년 넘게 이곳에서 산 이안에게조차 약간 오싹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어두운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가 이내 깨달았다.

‘테오 방이 어디지……?’

테오는 휴식을 취하거나 아플 때면 언제나 자신의 방에 머물렀다. 독을 먹었든 천공에게 혼났든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이안은 추측했다.

해서, 어떤 상태든 간에 일단 돌아왔기를 바라며 찾아가려 했는데 방 자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이렇게 무심할 수가. 이안은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아무리 업무라고는 하지만 테오가 이안에게 쏟는 정성은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오늘 수행한 시종과 비교하면 차이가 극명했다. 이안은 언제나 그 정성에 보답하고 싶었다.

‘테오 방 위치도 모르는 주제에…….’

영웅성에서 함께 사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것도 3년 넘게 같이 살았거늘, 방 위치가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기에 이안은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성이라 불리는 5층짜리 대저택을 일일이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머리를 써서 수색 범위를 많이 줄였다. 일단 자신의 방이 있는 5층과 연무장이 반을 차지하는 1층은 제외했다. 테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같은 층을 쓰면서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1층에는 아예 침실이 없었고.

남은 층은 2층, 3층, 4층. 이안은 4층부터 내려가며 수색했다. 테오가 놀라지 않게 기척을 숨기고 방 하나하나 살핀 터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두 명밖에 쓰지 않는 성에 방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를 일이다.

가장 유력했던 4층은 물론 3층에도 아무도 없자 이안은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2층은 대부분 사용인이 주로 쓰는 구역이었다. 귀족적인 외모에 모든 몸짓이 우아한 테오가 2층을 쓸 것 같지 않았다.

이안은 테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2층을 살폈다.

“……무슨 소리지?”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고 무언가 억누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짧게 끊어졌으나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이…….”

기감을 더욱 예민하게 세워 천천히 소리의 자취를 더듬자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테오의 목소리라는 것을 분간할 수 있었다. 이안은 걸음을 서둘렀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2층 서쪽 복도 구석에 있는 창고나 다름없는 방이었다. 이안은 순간 의심했지만 분명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괴롭게 앓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흐으…….”

테오가 많이 아픈 게 분명했다. 저런 울음기 섞인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노크했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미안해, 테오. 너무 걱정돼서 좀 실례할게.”

자기만족으로 그렇게 말한 뒤, 이안은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방은 무척 비좁아서 가구는 침대 하나뿐이었다. 구석에는 옷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고, 그 옆에 책 몇 권이 가지런히 뉘어 있었다. 테오 같은 사람이 쓴다기엔 너무 볼품없었다.

창문도 없는데 이상하게 바람이 불었고, 봄의 밤이라기엔 이상하게 서늘했다. 테오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추운 것처럼 심하게 몸을 떨었다.

“테오?”

이안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건드렸다. 낡은 이불 아래로 느껴지는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시체처럼 뻣뻣했다.

더럭 겁이 난 이안은 이불을 조금 걷어 테오를 확인했다. 새파랗게 질린 테오는 해독 중이라 아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아픈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테오, 괜찮아? 눈 좀 떠봐.”

이안은 테오의 이마와 뺨을 짚어보다가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오려고 했다. 이대로 의원을 찾으러 천공성까지 다녀오는 사이 큰일이 날 것 같아 일단 체온부터 올려놓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안이 차가워진 손을 테오의 뺨에서 떼는 순간, 테오가 그 손을 확 잡았다.

“테오! 정신이 들어?”

테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눈동자 색이 평소와 다른 듯했다. 방이 온통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갈색은 확실히 아니었다.

테오에게 잡힌 손이 살짝 저렸다. 이안은 생각보다 강한 힘에 당황했다. 뿌리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잘못해서 테오가 다칠까 봐 가만히 있었다.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응? 테오…… 앗!”

다시 잠들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자 테오의 눈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곁에 있는 이가 이안이란 걸 눈치챈 건지 테오가 눈을 확 크게 뜨고는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겼다.

테오 위로 엎어진다 싶더니 어느새 빙글 돌려져 자세가 바뀌었다. 이안은 침대에 누워 테오를 올려다봤다.

‘테오가 힘이 이렇게 셌었나?’

당황한 나머지 저항할 틈도 없었다. 테오는 여전히 이안의 손을 잡은 채로 그 위에 반쯤 엎드려 있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밀착한 경험은 이안의 기억상 처음 있는 일이라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안?”

테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불렀다. 평소와 달리 존칭도 생략하고 애달픈 감정이 담겨 있어서 너무나 낯설었다. 어둠이 드리워져 윤곽만 드러난 얼굴은 이 와중에도 아름다웠다.

“이안…….”

이안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테오의 눈동자가 축축해지면서 목소리에 울음기가 담겼다. 그의 이름 아닌 이름을 이렇게 소중하게 부르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테오는 이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칭얼거렸다.

“이안, 날 좀 위로해 줘. 흑, 어서 날 달래줘.”

이안은 뻣뻣하게 굳은 채 가슴께가 젖어드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중 그의 마음에 슬픔이 가장 거세게 부딪혔다.

테오의 목소리가, 눈물이, 그를 꽉 잡은 손이 모두 모여 그를 아프게 했다.

“괜찮아, 테오. 괜찮아.”

이안은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끌어안았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끼며.

“울지 마, 응? 내가 여기 있어.”

파고드는 테오에게 그는 기꺼이 품을 내주었다. 비좁은 침대 위에 누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울음을 그친 테오가 잠들 때까지 이안은 최선을 다해 그를 달랬다.

* * *

테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이 친 사고를 깨달았다. 꽉 맞잡은 손, 얼굴에 닿은 따뜻한 품, 머리카락으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숨결, 약간 쓰라린 눈가까지. 염원초에 취한 자신이 이안을 붙잡고 부렸을 추태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상황을 파악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위장이었다. 미세한 바람이 불자 테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연갈색으로 물들었다.

“으음, 테오?”

예민한 이안이 그 작은 기척에 깨버렸다. 잠꼬대인 듯 테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테오가 움찔하자 덩달아 이안도 딱 멈춰 버렸다. 그가 테오와 비슷한 사고 과정을 겪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어색하고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굳어 있다가, 이안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테오는 스르륵 이안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어찌나 매끄럽게 움직이는지 붙잡을 겨를이 없었다. 이안에게 등을 돌린 그는 재빨리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카락과 얼굴을 정돈했다. 그러고 다시 돌아서서 평소보다 훨씬 공손한 자세로 고했다.

“네.”

그러나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새빨개진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침대에 바로 앉은 이안도 새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꾹 참았다. 항상 덤덤하던 녀석이 부끄러워하니까 그도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가슴께의 간질거림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크흠. 그럼 다행이고.”

“네.”

테오는 붉어진 얼굴이 진정되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언제나 절제를 의무로 삼아왔던 그에게 이런 상황은 무척 낯설었다. 도저히 이안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안도 비슷한 처지란 점이었다.

이안은 연신 헛기침하며 어제의 진상을 궁금해했다.

“어제 아침부터 그렇게 아팠던 거야?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말 좀 해줘.”

본래 계획은 전부 다 처리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었으나, 지금 이 어색함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테오는 딱딱한 어조로 보고했다.

“구세력 802년 4월 2일, 오전 7시경. 영웅님의 조반을 기미 보던 중 성내 반입 금지 식품을 발견했습니다. 해당 식품을 수집하여 천공 각하께 보고한 뒤, 제1조리실을 시작으로 범인을 추적했습니다. 천공 각하께서 무사히 놈들을 잡으셨고, 동녘 공작 각하께서 해당 식품의 생산지를 조사 중이니 앞으로 이런 일은 재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말하다 보니 뜨거웠던 뺨이 금세 원래 온도로 돌아왔다. 감히 염원초를 써서 이안을 이용하려던 백작을 떠올리자 피가 싹 식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옛날 일까지 떠올라 기분이 처참해졌다.

“반입 금지 식품이면 독 같은 거야? 지금은 괜찮고?”

“전부 해독했으니 이제 괜찮습니다.”

해독하지 않고 며칠 끙끙 앓으며 염원초의 기운을 몰아낼 생각이었으나 이안 덕분에 멀끔히 해독되었다. 테오는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범인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데 날 공격한 거래?”

“사실 영웅님보다는 천공 각하를 향한 테러에 가까웠습니다. 일종의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는 독으로 영웅님을 이용해 천공 각하를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다더군요.”

“엄청 위험한 독이었잖아! 정말 다 해독된 거 맞아?”

화들짝 놀란 이안이 벌떡 일어나 테오에게 다가왔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평소보다 거리감이 확 줄었다.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친 둘은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졌다.

“해독은 다 됐습니다. 확실합니다. 어제는 신세가 많았습니다.”

“기억, 나……?”

“아니요.”

단호한 즉답에 이안은 살짝 실망했다. 왠지 모르게 드는 아쉬운 마음에 그가 테오의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날 이안이라고 불러줬는데.”

사실 전부 기억하고 있는지라 테오는 어젯밤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열심히 모른 척했다.

“아주 많이 울던데, 무슨 슬픈 환각이라도 본 거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안은 테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고 낯선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테오의 붉어진 뺨이 보기 좋았다. 오늘따라 내리깐 속눈썹이 유독 예뻤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치아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귀여웠고, 빨간 귓바퀴를 만지고 싶었다.

어제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소매를 잡은 손을 내려 손을 붙잡고 싶었으나 참았다. 왜 참기 싫은지 고민하느라 튀어나오는 말을 막지 못했다.

“방 옮기자.”

“네?”

뜬금없는 말에 드디어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나 왜 이러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안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전부 해독됐어도 후유증이 남았을지도 모르잖아. 내 옆방으로 와. 또 울면 금방 가서 달래줄 수 있도록.”

테오는 살면서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 말로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안의 억지에 가까운 제안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드러운 회색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약간 섞인 다정함이 가득했다. 소매를 잡느라 피부가 닿진 않았으나 살이 가까워서 그런지 온기가 느껴졌다. 어젯밤 내내 그를 달래준 온기였다.

이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온기를 나누어 주려고 했다.

“읏, 하지만…….”

테오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이안은 새빨개진 귀와 목덜미를 볼 수 있었다.

“응? 그러지 말고 내 옆방 쓰자. 아무 일 없어도 자주 놀러 갈게. 네가 혼자 여기서 아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아.”

이 나이에 이런 투정 섞인 말투를 쓰다니 역효과 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아니었다. 몇 번 더 그렇게 조르자 테오가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으나 테오는 얼굴을 가린 채 도망가 버렸다. 이안도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다가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밥도 같이 먹자고 할까?”

이유는 충분했다. 또 독 같은 거 먹으면 안 되니까. 그러면 테오는 그게 바로 기미 보는 이유라고 하겠지만, 사실 이안은 처음부터 기미가 싫었다.

또 곤란해하면서 얼굴이 붉어질 테오를 생각하니 기분이 유쾌해졌다. 숨죽여 웃던 이안은 불현듯 깨달았다. 꽃봉오리 같던 마음이 팡 터지고 말았다는 것을.

* * *

테오는 오늘 하루 내내 바쁠 예정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로 이안을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으나 정말로 중요한 업무가 있었다.

오늘따라 힘이 들어간 조반을 떨떠름하게 먹는 이안을 두고 테오는 천공성으로 향했다. 예보하느라 힘쓰고 염원초 먹은 채 백작을 벌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안 덕분에 몸 상태가 괜찮았다.

그는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며 안색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볼썽사납게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다니면 천공의 위엄이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테오는 천공성의 북동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옛 황비궁이었던 현 북녘성이 있었다. 공국의 다섯 공작은 옛 궁전을 하나씩 차지해 기거하고 있었다.

약속을 잡지 않았으나 올 줄 알았다는 듯 테오는 바로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지클린데가 조금 피곤한 안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바로 이틀 전에 만났던 두 사람은 안부 인사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정기 회의 때보다 훨씬 공손한 어조로 보고했다.

“반천공파가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산을 등진 백작의 작전은 허술하긴 했으나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통하지 않은 데다 주동자인 백작이 끔찍한 꼴을 당했으니 한동안 자제할 것으로 보입니다.”

“심약하기 짝이 없군. 그러니 여태 실패만 반복했지.”

“본인의 행적을 돌아보고 말씀하시지요. 산을 등진 백작이 천벌을 받아 숨을 못 쉬는데 죽지도 못해 고통스러워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중입니다.”

“나를 직접 건드리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니오?”

지클린데는 반만 수긍했다. 유력한 귀족가의 상당수가 반천공파임에도 그들이 힘을 못 쓰는 이유는 많았다.

일단 상대가 나빴다. 인간이지만 신의 힘을 다루고, 비범한 태생 예언을 가진 황족인 데다, 직접 황가를 몰살할 정도로 잔혹한 인물. 암암리에 광천공(狂天公)이라 불릴 정도로 천공은 반천공파를 압도했다.

또 반천공파의 수장들이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한몫했다. 가장 위세 높은 만큼 좀 더 열성적으로 움직이면 따라갈 텐데, 뒤로 물러나 지켜만 보고 있으니 다른 이들도 몸을 사렸다.

마지막으로 명분이 부족했다. 천공이 통치 아닌 통치를 시작하면서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태평성대가 열렸다. 매년 풍작이 이어지고, 크고 작은 재해의 피해가 최소한으로 줄어드니 백성은 물론 귀족들까지 편안해졌다.

게다가 천공은 영웅님만 건드리지 않으면 성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처음 ‘감히 인간이 신의 권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라며 세웠던 명분이 죄다 쓰러질 판이었다. 어떤 신도 이렇게까지 인간을 돌보지는 않을 것이다.

“몇몇 가문은 남녘 공작 쪽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슐레이만이 잘 조절하고 있지만 그쪽은 사병이 너무 많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군사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을까요?”

“7월에 큰 재해가 있을 거란 예보를 흘리시오. 내가 그 재해를 처리하느라 지친 틈을 노릴 녀석들이 있겠지. 그놈들을 싹 쓸어버리면 병력이 많다고 기세가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테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천공파의 수장이 천공의 학살 계획에 수긍하면 어쩌잔 거요?”

“제가 원해서 수장이 된 것도 아니고, 저는 그들과 사상이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저를 이 자리에 앉히시고, 학살 계획을 짜시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이왕 말이 나온 거 지클린데는 이전부터 품어온 불만을 토로했다.

“언제까지 주군께 적대적인 시늉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군께서는 반란의 선봉이셨던 동시에 제국 황실의 적통이십니다. 이대로 황제로 즉위해도 나무랄 데 없으십니다.”

천공을 제외한 네 명의 공작 중 대놓고 친천공 행보를 보이는 건 동녘 공작인 클로이뿐이었다. 그러나 남은 세 방위의 공작들이 천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테오가 여의주를 얻기 전부터, 반란을 꾀할 때부터 그를 흠모해 왔다.

그리고 그 흠모는 현재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다. 그들이 보기에 테오는 완벽한 성군의 재목이었다.

“반동분자를 미리 확인하고 제어하기 위해 주군께서 시키시는 대로 그들의 수장이 되었으나, 행동하지 않는 수장은 신뢰를 잃습니다. 이제 슬슬 다른 방도를 찾으심이 옳습니다.”

“예를 들어 즉위라든지?”

“그렇습니다.”

“내가 자른 제국의 명줄을 도로 붙일 생각은 없소.”

테오는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이걸 그대에게도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날 너무 신뢰하지 마시오. 나는 목표가 따로 있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소. 날 주군이라 부르는 것도 삼가시오.”

뭐라 반박하려던 지클린데는 잠시 호칭을 고민했다.

“천공께서는 훌륭한 군주의 덕목을 갖추셨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을 위해 보이는 아량이라고는 하나 백성들에게 그만큼 베푸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일입니다. 게다가 귀족들을 휘어잡는 능력까지 갖추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성군이 될 생각 없소.”

테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그가 황실을 없앤 까닭은 그들을 증오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제국이, 더 나아가 이 세계가 평화로이 다스려질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클린데가 보았다는 성군의 자질은 모두 테오가 이안을 생각해서 나온 것이었다. 이안이 끔찍하게 희생하여 구한 세계를, 적어도 그가 있을 때까지는 평화로운 상태로 두기 위해서. 그가 끝까지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오로지 그걸 위해서 테오는 증오스러운 세계를 돌보았다.

“분명 나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만 여의주를 다루겠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어찌 그렇게 바라는 게 많소.”

“인간의 평화에 대한 염원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게 평화를 염원한다면 무언가에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테오는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고개만 까딱이고 응접실에서 나가 버렸다. 서릿발 같은 걸음걸이로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지클린데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가 않군…….”

천공의 마음을 돌리는 것과 이 평화를 포기하는 것. 둘 중 어느 쪽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먹을 걱정과 재해로 인한 걱정 없는 이 안온함은 많은 사람이 유지되길 바랐다.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영웅과 관련 있을 천공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 * *

이안은 연무장 창가에 앉아 후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원은 봄을 맞이해 피어나길 기다리는 꽃봉오리가 가득했다. 며칠만 지나면 아름다운 꽃이 가득 피어날 것이다.

저 아름다운 후원처럼 이안의 마음에도 무언가 피어나 버렸다. 사실 그는 그것의 새싹이 움틀 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애써 외면했을 뿐.

‘나는 테오를 좋아해.’

꽃이 보일 때마다 생각하면서도 아닌 척했다. 늦으면 올 때까지 기다리고 함께 길을 걷고 싶은 걸 친구라서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커질 것만 같아서.

‘어떡하지. 테오가 정말로 좋아.’

어제의 일은 한계에 다다른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에 불과했다. 배 속에서 꽃잎이 와글거리는 것 같았다.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자 이안은 울상이 되었다.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안의 가장 큰 염원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편안히 숨 쉴 수 있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줄 곳으로. 그래서 이 세계에서 깊은 인연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떠나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새싹 같은 마음을 외면한 것도, 꽃봉오리가 피어나지 못하게 움켜쥔 것도 다 그래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외면하고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커졌다.

이안은 테오를 좋아했다.

이런 마음은 처음이라 주체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주었던 꽃송이를 모은 것보다 훨씬 커다란 꽃다발을 테오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봄바람이 스치듯 테오의 손을 잡고서 한가로이 걷고 싶었다. 테오가 그를 향해 웃어준다면 이 세계를 구한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느껴질 것 같았다.

‘악룡을 잡았을 때는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지. 만약에 테오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는다면…… 나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을까? 이 세계에 남는 게 더 행복하다면 어쩌지?’

이안은 버릇처럼 옷의 목깃을 늘렸다. 다른 세계에 있다는 이 갑갑함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를 사랑하는 채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아픈 마음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마음이 한결같이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감정의 뿌리를 뽑기 힘드리란 것을.

이 마음이 싹텄을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다. 설령 그에게 주어진 모든 길의 결과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이 마음이 변할 리는 없었다.

이안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도 슬픔을 품어야 한다니. 처음 여기서 눈을 떴을 때만큼 막막했다.

“테오 보고 싶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슬픈 생각을 해도 말랑해진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평소처럼 수련하기 어려웠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는 괜히 겸연쩍어하며 후원으로 나갔다.

정원사들이 정성껏 가꾼 후원에는 꽃봉오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따뜻한 날씨에 일찍 피어난 꽃들이 보였다. 며칠 전 자기 마음도 모르는 상태에서 테오에게 꺾어다 준 은방울꽃도 있었다.

이안은 꺾을 듯 말 듯 꽃을 건드리다가 그만두었다. 모든 꽃이 테오에게 어울렸으나 하나같이 부족했다. 그 큰 후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한 송이도 꺾지 못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설렐 일인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붕 뜬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테오 앞에서 제대로 실수할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는 연습이 필요했다.

이안은 아무도 없는 후원의 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봤자 역효과이니 흐르는 대로 테오를 떠올렸다.

‘딱 한 시간만 테오를 생각한 뒤 명상을 하자.’

처음에는 불쑥불쑥 테오가 떠올랐으나 곧 익숙해졌다. 수월하게 텅 빈 상태가 유지되던 이안의 머릿속에 문득 미리내가 떠올랐다. 이안은 상상 속 미리내를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러나 심득을 방해하는 것처럼 천공이 나타나 미리내를 쥐었다. 그는 누군가의 목을 베듯 허공에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보았던 천공의 기록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었다.

천공은 예언자를 베고, 은방울꽃을 베고, 악룡을 베어냈다. 그는 다시 이안이었던 영웅으로 바뀌어 울부짖는 악룡과 싸웠다.

이 세계의 사룡신 중 하나였던 악룡은 땅을 다스리는 드래곤이었다. 지룡의 단단한 비늘은 부수기 무척 어려웠다. 영웅은 말 그대로 온몸을 내던져 가며 악룡을 죽였다. 손끝으로 드래곤 하트를 파괴하던 감각이 전해졌다.

그 순간, 이안은 눈을 번쩍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이 황혼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의 광경과 눈앞의 풍광이 순간 연결되지 않아 괴리감으로 정신이 멍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허리에 찬 미리내를 뽑았다.

그때가 떠올랐다. 가장 용맹하고 강인하던 시절의 자신이. 지금이라면 그 실력을 조금이나마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안은 미리내에 오러를 불어넣은 채 휘둘렀다. 예전에 베었던 몬스터를 베고, 마물을 베고, 악룡을 베었다. 영웅이 남긴 검로를 따라 미리내를 그었다. 마음에 들 때까지 덧그리기를 반복했다.

우웅-

그러기를 수 시간. 미리내에 오러가, 즉 검기가 둘러졌다. 마침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다시 오른 것이다. 이안은 기뻐하기에 앞서 검면을 살폈다. 역시나 글귀 하나가 빛나며 떠올랐다.

[염원이 자라나는 땅]

그는 다가오는 기억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 * *

이번 기록은 첫 번째 기억보다 훨씬 현장감이 넘쳤다. 동시에 물에 잠긴 것처럼 모든 감각이 둔해졌다. 이안은 무언가를 씹고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꿀꺽 삼켜 버렸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그는 스스로를 잃고 말았다.

“자, 남기지 말고 드셔야지요.”

아이를 채근하는 듯한 말투에 그는 스푼을 입에 물었다. 이름 모를 풀만 들어간 죽은 맛이 없었지만 허기는 가셨다. 그리고 이상하게 날카로웠던 기분이 가라앉고 행복해졌다.

그는 스푼을 문 채 히죽 웃었다. 식사를 돕던 시종이 따라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 빨리 드세요.”

시종의 어조는 나긋나긋했으나 말에는 가시가 돋쳤다. 그러나 남자는 상냥한 말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곤 열심히 손을 놀려 풀죽을 떠먹었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창고처럼 좁은 방의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시종이 작게 투덜거리며 식기를 챙겨 나갔다.

식사는 하루 세 번. 메뉴는 항상 같은 풀죽이었다. 기록 속 남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지 먹고 자기만을 반복했다. 당번 시종이 바뀌는 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지표였다.

비슷한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일부러 끊어놓은 구간에 이를 때면 이안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 계속 저항했으나 기록 속 남자에게 동화되지 않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워만 있어서인지 팔다리는 비쩍 마르고 배만 나온 몸뚱어리. 몽롱하게 풀어져서 이따금 이유 없이 히죽이는 얼굴. 지금보다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아무리 달라졌어도 몰라볼 리 없었다.

저 남자는 이안이었다. 이 기록은 이안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이안은 수치스러웠으나 기억과 동화되면서 다시 모든 걸 잊어버렸다.

남자를 보필하는 시종 시녀 중에는 그를 동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종종 남자를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키곤 했다. 그때 남자가 사는 건물을 볼 수 있었는데, 조금 오래되고 허름한 궁이었다. 어디서 본 듯 익숙했다.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사이 시간은 유수처럼 몇 년이 흘렀다. 남자는 나날이 왜소해졌고,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는 이안은 괴로웠다. 빨리 이 기록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남자가 걷기 시작했다. 항상 풀죽만 먹으면 누워서 잠들었는데, 이제는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걷기에 중독된 사람처럼 보였다.

이안은 이 또한 남자를 가둔 누군가가 의도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남자를 업신여기던 시종들까지 걷기 운동을 열심히 보조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사는 궁 밖은 무언갈 준비하는 건지 떠들썩했다. 시종들이 하나같이 불쌍하다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걸로 미루어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다. 이안은 불길한 기분에 몸서리쳤으나 막을 방도가 없었다.

무슨 행사라도 진행되는지 바깥이 유난히도 시끄럽던 날. 시종들은 남자에게 새로운 옷을 입혔다. 온통 검은 비단으로 지어진 파네트 제국의 전통의상이었다. 남자는 베일로 얼굴까지 완전히 가렸다.

시종과 시녀 중 가장 그를 연민했던 밝은 금발의 시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도련님, 이제 우리 사람 많은 곳으로 갈 거예요. 가서 저처럼 머리가 노란 사람한테 걸어가면 아주 맛있는 걸 준대요.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맛있는 걸 준다는 소리에 남자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눈물을 빠르게 닦고 남자를 인도했다.

남자는 똑같이 시커먼 옷을 입은 시종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로 가장 큰 궁궐의 정문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남자를 보며 혀를 찼다.

궐문부터 궁궐의 외원까지 일직선으로 길이 놓여 있었다. 길의 양옆으로는 관중들이 넘쳐났고 그들을 통제하는 병사들과 금줄도 보였다. 사람들은 남자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하고 비웃었으나, 그는 알아듣지 못해 그냥 웃을 뿐이었다.

길의 중간부터는 시종들이 팔을 놓고 등을 밀었다. 남자는 홀로 비틀비틀 남은 길을 걸었다. 악단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흥이 났으나 음악에 맞춰 뛰는 법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길 끝에 있는 높은 단상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고, 단상 아래에는 노란 머리의 누군가가 검을 들고 있었다. 반짝반짝 아주 예쁘고 익숙한 머리카락 색깔이었다. 그 생각은 풀죽이 아닌 다른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에 금방 스러졌다.

남자는 금발의 검사를 향해 걸었다. 길의 끝에 다다르자 과연, 화려한 음식이 한가득 차려진 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커다란 대접이 놓여 있었다. 무언가 담기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악룡이여! 나의 검을 받아라!”

검사는 극적인 말을 외치더니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비명 섞인 환호성을 내질렀고, 남자는 잔칫상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안이 본 기록의 마지막 부분은 미리내에 의해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기록이 끝나고 이안은 다시 현실에 내동댕이쳐졌다. 미리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안은 풀밭에 누워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방금 그건 내 기억이야.’

첫 번째 기록과는 달랐다. 첫 번째 기록이 남의 기억을 새롭게 보는 기분이었다면, 이 기록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비록 그가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이런 식으로 남아 있다면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잃어버린 기억이 비단 이전 세계의 기억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테오는 분명 내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했어. 머리카락도 아마 그 때문에 세어버린 것이고.’

기록 속 이안은 지금의 이안보다 머리색이 짙었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처럼 완전한 흑발은 아니었으니 분명 그 기억은 잠들었다던 800년 사이의 기억일 것이다.

‘테오는 이 사실을 알았을까? 왜 예전 황족이 미리내로 나를 죽인 거지? 그리고 왜 나는 그때 죽었는데…… 회귀를 하지 않은 거지?’

아직 영웅이라 불리기에는 부족하던 용사 시절. 이안은 회귀의 축복을 받았다. 덕분에 죽어도 언제든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 회귀 축복이 악룡을 잡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깨어난 뒤로는 회귀할 일이 없었다. 축복이 남아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죽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 지금도 할 생각은 없었다.

‘기록 속에서 그렇게 죽고 회귀한 건지 아닌지는 불분명해. 나한테 불사의 축복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그때 죽은 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어려진 채로 깨어난 것과 관련 있나?’

이안은 처음 회귀 축복을 받은 24살의 모습으로 깨어났고, 깨어난 지 4년째인 지금은 27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 속의 자신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망가진 모습이었으나 지금과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족 특유의 금발과 벽안을 가진 검사가 들고 있던 미리내. 미리내는 주인과 공명하는 검이다. 그리고 미리내는 가장 오랫동안 이안과 함께했던 동료였다.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미리내를 주웠다. 검면에 남은 글귀는 이제 세 개였다.

“너는 알고 있었어?”

그는 검에 속삭였다.

“내 기억이 네게 새겨져 있었어. 루키오의 후예가 너를 들고 내 목을 베었고.”

미리내는 바르르 떨었으나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자는 실력이 그리 뛰어나 보이지도 않았는데 널 편하게 잡고 휘둘렀어. 네가 허락했으니 다룰 수 있었겠지. 대체 왜 그랬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미리내는 몹시 슬프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

“나를 죽여야만 했어?”

-…….

“그것 하나만 말해줘.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거야?”

-……맞아.

미리내가 긍정하자 이안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배신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라면 그나마 나았다.

“언제 말해줄 수 있어?”

-그건 나도 몰라.

“누가 네게 기록을 새겼는지도?”

미리내가 대답하기 지친 것처럼 진동으로 긍정했다. 이안은 심호흡하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미리내를 되찾았을 때는 기뻤으나 점점 풀어야 할 의문이 쌓여갔다.

“미리내,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걸 전부 말해줘.”

* * *

테오는 이안을 보자마자 그가 두 번째 글귀를 읽었음을 눈치챘다. 멋쩍은 듯 살짝 미소 짓고 있으나 우울한 기색은 숨겨지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미안. 방 정리는 다했나 궁금해서. 나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테오는 이안이 시키는 대로 방을 옮겼다. 짐이라고는 옷 몇 벌과 책 몇 권이 전부라 정리는 이미 끝낸 뒤였다. 그러나 우울한 이안을 이대로 보내기는 그랬다. 테오는 일단 그를 방으로 들였다.

“짐이 별로 없어서 괜찮았습니다. 정리도 다 끝났고요. 차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이안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테오는 방에 구비되어 있던 티 테이블에 그를 앉히고 수면에 좋은 차를 준비했다. 그사이 방을 한번 둘러본 이안이 중얼거렸다.

“내가 준 꽃은 없네…….”

테오는 하마터면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 아닙니다.”

그는 서둘러 책 한 권을 가져와 펼쳤다. 그 안에는 곱게 압화된 꽃이 모여 있었다.

“그냥 두면 시들어서 이렇게 보관 중입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혼잣말에 놀라 이렇게 보여주는 것도 귀엽고, 작은 꽃 몇 송이조차 버리지 않고 모은 것도 너무 귀여웠다. 살짝 상기된 뺨을 문지르면 꽃물이 배어날 것만 같았다.

“알았어. 고마워. 뭐라고 나무라려던 건 아니었어.”

“오해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오해는 다른 쪽으로 할 것 같은데.’

이안은 테오가 다른 사람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저렇게 사소한 일에 얼굴이 상기되는 이유가 영웅을 흠모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내가 요즘 수련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어.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가능할까?”

테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수도 시장 외출과는 차원이 다른 부탁이었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훨씬 많았다.

“일단 천공 각하께 요청하겠습니다. 혹시 실전 경험이 필요하신 이유를 여쭈어도 될는지요.”

“오늘 두 번째 글귀를 읽었어. 내용은 뭐…… 별거 없었는데, 미리내가 세 번째 글귀도 읽으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더라고. 아무래도 빨리 강해지는 데는 실전이 필수니까.”

매끄러운 이안의 설명에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천공 각하께 잘 말씀드려서 최대한 출정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정말 고마워.”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셨다. 애초에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침묵이 껄끄러웠다.

‘테오한테 거짓말하기 싫었는데…….’

두 번째 기록의 내용은 테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수치스럽기도 했고, 테오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능하다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침묵이 더욱 불편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지난 밤의 일이 떠올랐다.

“그…… 오늘은 혼자 잘 수 있지?”

아무 말이나 해본다고 뱉은 말이었는데 어조가 묘하게 은근히 들렸다. 테오가 화르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확실히 해독했습니다.”

“그래도 문제 생기면 꼭, 나한테 오라고. 알았지?”

“네.”

“하하하……. 아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피곤할 테니까 나는 이만 가볼게.”

“안녕히 주무십시오.”

“응. 너도 잘자, 테오.”

이안은 후다닥 방에서 나왔다. 손으로 뜨거운 얼굴을 식히며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은 한바탕 이불을 차느라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바로 옆방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테오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 *

요즘 세레나의 업무 난도는 ‘최고 어려움’ 수준이었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산만 한 남정네가 풋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은 민망해서 봐주기 어려웠다. 심지어 상대가 상대였으니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은 코빼기도 들지 않았다.

‘그놈이 얼굴을 붉히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세레나에게 테오는 공포 그 자체이자 상당히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다른 황족들처럼 죽이지 않고 살려준 건 고마웠으나 그녀 눈앞에서 모든 가족을 죽인 건 원망스러웠다.

그런 녀석이 혼자 짝사랑하는 꼴을 보는 것도 괴로웠는데 이제는 쌍방이 되어버렸다. 바로 며칠 전 염원초를 적발하지 못해 싫은 소리를 잔뜩 들은 터라 더 자주 관찰해야 하니 곤욕스러웠다. 세레나로서는 백리안을 찔러 버리고 싶은 상황이었다.

‘아, 저 길은…….’

고블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안이 자료보관소로 오는 것이 백리안으로 확인됐다. 그는 평소처럼 바로 들어오지 않고 저택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창문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씩 웃더니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곡예 부리듯 훌쩍 올라온 그는 2층의 서재 창문에서 멈췄다.

‘이런 젠장.’

똑똑.

“흐악!”

세레나는 최선을 다해 놀라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다 보니 자기 목소리에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뒤에 있는 창문을 보니, 이안이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이, 이, 이게 대체 무슨 짓……!”

“정말 미안해! 장난이 너무 심했어.”

세레나가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놀랐음을 피력하자 이안이 거듭 사과했다. 그녀는 나날이 늘어나는 자신의 연기 실력에 회의감을 느끼며 화를 풀었다.

“됐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시죠?”

보통 이안이 왔을 때의 대응법은 테오가 미리 알려주었다. 정기적으로 방문해 갱신할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런데 최근 많이 바쁜지 통 들르지를 않았다.

‘안 보면 나야 좋지.’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실수할까 봐 조금 걱정됐다. 그래도 아까 하는 꼴을 보니 그냥 장난치러 온 건가 싶었는데, 이안은 대응법을 받은 적 없는 부탁을 했다.

“자료보관소면 나에 대한 자료나 기록도 있지? 전부 보고 싶어.”

“아, 영웅님에 대한 자료라면…….”

“아니. 영웅 말고, 세레나. 말 그대로 나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 말이야.”

이곳은 자료보관소고, 이곳의 관리자인 세레나는 모든 정보를 알았다. 그녀는 이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굳어버렸다. 이안은 그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정말로 있었구나. 내가 잠들었다던 800년의 기록이…….”

이럴 때의 대응법은 받은 적 없으니 세레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긍정을 뜻했다.

“나에게 왜 그걸 숨겼는지는 추궁하지 않을게. 대신 그 기록을 확인하게 해줘, 세레나.”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보닛을 잡으며 백리안을 떴다. 시야에 잡힌 테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멋대로 보여줬다간 나도 죽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심상치 않은 세레나의 반응에 이안이 반사적으로 몇 걸음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부탁이 세레나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기, 기록은 함부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보고 가는 것도 안 돼?”

“안 됩니다!”

“천공이 금지한 거야?”

세레나는 말문이 막혔다. 천공은 금지한 적이 없었다.

“아니라면 내가 억지로 보여달라 했다고 해. 책임은 전부 내가 질게. 너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야.”

“…….”

“필요하다면 문서로 남겨도 좋아.”

그 말이 이상하게 달콤하게 들렸다. 그 무시무시한 테오 몰래 나쁜 일을 꾸미는 기분이 들면서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천공이 세운 철창 바깥으로 발을 살짝 내민 기분이었다.

세레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가 원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천공 각하께서 안 계신 날에 오시면…….”

이 또한 테오의 계산 안이라는 사실은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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